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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간 놈은 김일성이야!
런일성 2023-10-19 00:18:51 | 조회: 211
70년 전 6.25의 진실… ‘런승만’이라고



도망간 놈은 김일성이야!







2020.06.26



이승만 정부 ‘한강교 폭파’와 ‘일본 망명설’의 진실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

1950년 8월 14일, 무초(John Joseph Muccio) 주한 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부를 제주도를 옮길 것을 건의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 권총을 꺼내들고 외쳤던 말이다.



일각에서는 6.25 전쟁 당시 이 대통령이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쳤다”, “일본으로의 망명을 타진했다”는 등의 주장을 하며 ‘런승만’, ‘친일파’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는 목숨을 걸고 한반도를 사수하고자 했던 이승만의 발언, 행적과는 배치되는 주장이다. 어느 것이 진실일까



이승만의 서울 사수 의지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진실을 알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 6.25 전쟁 발발 당시로 거슬러 가보자. 북한 인민군은 소련으로부터 받은 탱크 242대와 항공기 226대의 압도적 전력으로 38선을 뚫고 남침했다. 파죽지세였다. 국군은 화염병을 들고, 수류탄을 두르고 탱크로 뛰어들었지만, 몸만 산화할 뿐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할 수 없었다.



전쟁 발발 하루 만인 6월 26일 정오경,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점령됐다. 의정부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불과 18km. 시속 55km로 달리는 북한군 탱크로 3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6월 27일 새벽 2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속에서 신성모 국방장관, 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 박사 등이 경무대(당시의 청와대)를 찾아 “각하 사태가 급박합니다. 빨리 피하셔야 겠습니다”라고 권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안 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라고 외치며 서울 사수 의지를 역설했다.



적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이승만은 그때서야 참모들의 뜻에 따른다. 당시 참모들의 보고는 사실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대통령이 서울을 사수하다 북한군에게 생포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전시 대통령 유고(有故)’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피신 결정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대통령 피신 바로 다음날인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서울에 남아있던 정부 요인과 주요 인사들, 그들의 가족까지 납치, 고문, 살해했다.





이승만이 한강다리 끊고 도망갔다고 악마적 편집에 의한 해석!



이승만 대통령이 6월 27일 새벽 3시 30분 피난길에 올랐고,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


폭파에 앞서 6월 27일 밤 10시에 서울 중앙방송국에서는 “유엔과 미국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다. 지금 공중과 해상으로 무기, 군수품을 날라와 우리를 돕기 시작했으니 국민들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취지의 대통령 연설이 방송됐다.



이 일련의 사건을 두고 이승만 대통령이 혼자만 살겠다고 도주한 뒤, 서울시민에게는 안심하라 방송하고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켰다는 유언비어가 나왔다. 이른바 ‘런승만’이라는 조롱과 비방. 이는 전후 관계를 생략한 악마적 편집에 의한 해석이다.



먼저 6월 27일 밤,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을 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이 대통령이 대전역 사무실에 머물고 있을 때, 드럼라이트(Everett Francis Drumright) 미 참사관이 찾아와 “유엔이 북한에 대한 군사제재를 결의했고, 트루먼(Harry S. Truman) 미 대통령이 해·공군 출동 및 대한(對韓) 긴급무기 원조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뒤늦게 대전에 도착한 무초 대사도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한 경위와 미국의 적극 개입 방침을 설명했다.


“유엔안보리에 소련이 불참한 것이야말로 러키 찬스입니다. 하나님이 한국을 버리지 않은 증거입니다. 전쟁은 이제부터 당신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미 대사관으로부터 희소식을 전해들은 대통령은 국민에게도 이 희망의 소식을 빨리 알리고자 라디오 연설을 한 것이다. 혼자만 살겠다고 도주한 뒤, 거짓 연설로 국민을 속였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다음으로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 폭파는 전시 지침과 사전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국군 수뇌부는 북한군 탱크가 서울 시내에 진입했을 시, 2시간 내에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강교를 폭파하지 않고는 적 탱크의 도하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군 탱크가 서울 시내로 진입한 시간은 28일 오전 12시 30분에서 1시 사이였고,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시간은 오전 2시 30분이었다. 전시 지침을 따라 계획대로 수행된 폭파 작전이었다. 이를 두고 이 대통령이 자기만 살고자 한강교 폭파를 명령했다는 주장은 역사 왜곡이다.



한강교 폭파로 인해 한강 이북에 남아있던 국군의 퇴로와 국민들의 피난길이 막혔고, 많은 희생을 낳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전쟁 국면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국군은 북한군의 남하 속도를 늦추고, 가장 위협적 무기인 북한군 탱크를 저지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국군은 시간적 여유를 두고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었으며, 유엔안보리에서 한국을 지원한다는 결의가 내려지기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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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일성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통화로 도주 ......

주요기관은 만주로 옮긴다. ....... ]



겁쟁이, 진짜 도망자는 김일성 “최후까지 싸우라” 방송한 뒤 중국으로 도망




이승만 대통령의 도주·망명설은 거짓임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북한 지도자 김일성의 경우는 어땠을까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일에는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10월 3일 아들 김정일과 일가친척들을 만주 심양으로 보낸다. 김일성 자신도 국군이 평양에 입성하기 일주일 전인 10월 12일 평양을 떠나 중국으로 도주한다.


김일성은 도주하며 ‘조국의 위기에 처하여 전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녹음 연설을 방송한다. 연설 주요 내용은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흘리면서 싸우라”, “어떤 일이 있어도 현물세를 바치라”였다.


김일성은 도망치는 와중에도 북한 주민의 피와 땀을 착취했던 것이다. 김일성이 평양을 떠날 때 탔던 차는 소련제 고급 승용차 ‘볼가’였다. 김일성은 도주 중 상황이 여의치 않자 청천강변에 자동차를 버리고 도망했는데, 이 차는 나중에 국군에게 노획된다.



김일성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통화로 도주했고, 1951년 1월까지 강계에 중앙당 연락소를 설치하고 주요기관은 만주로 옮긴다. 김일성이야말로 저만 살겠다고 도주한 뒤 중국에 망명 정부를 차린 것이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행보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 대통령은 서울이 함락되기 하루 전인 6월 27일까지 서울을 사수하며 전쟁을 지휘했다. 그가 서울을 떠날 때 탔던 교통편은 차창은 깨져 있고 좌석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을 정도로 낡은 2칸짜리 3등 열차였다. 그는 어떤 위기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한반도를 사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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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2529









1950.9.


[ ..... 연대장이고 대대장이고 할 것 없이 다 내빼 버리고 한 놈 보이지 않아 .......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로써 한국군을 맞는 것이었다. ........ ]


내가 아는 박헌영 (160) 박갑동



중앙일보

1973.09.06


김일성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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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5일「유엔」군이 총반격을 시작하자 김일성 군대는 조직적 저항을 하지 못하고 질서를 잃고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지휘관은 지휘관대로 전사(병졸)들은 전사대로 제각기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달아나 북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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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세 사람은 사단장과 참모장과 연락병이었다. 주먹밥을 같이 나눠 먹으며『참 이런 놈의 군대는 처음 봤 수다』하며 사단장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나는 중국서 수심년간 수백 번 전투에 참가해 봤지만 이놈의 인민군대 같은 군대는 처음 봤 수다. 연대장이고 대대장이고 할 것 없이 다 내빼 버리고 한 놈 보이지 않아 장개석 군대보다 못한 놈들』하며 그는 혀를 차는 것이었다.


나는 이 사단장의 말을 듣고 나의 눈과 나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리석게도 당시 인민군은 규율이 있으며 훈련받은 군대라는 선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눈으로 목격하는 현실은 모두가 그와 정반대였다. 나는 혹시나 도깨비한테 홀렸는가 싶어서 그 사단장과 갈릴 때 일부러 악수를 하며 손을 꽉 쥐어 봤다. 손은 따듯했다.


형편없이 차단 또는 포위 당하여 산산이 붕괴된 북한군은 퇴각하면서 군 규율이 말할 수 없이 흩어졌으며 민간에 많은 피해마저 끼치면서 도주했던 것이다. 해방 후 5년간 김일성이 자칭『경애하는 조선인민의 수령』등의「슬로건」을 강제하여 일인 유일 독재와 철저한 사회주의개혁을 하여 튼튼히 다졌다는 북한에 한국군과 미군이 들어갔을 때 대단한 저항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로 대환영이었다. 지긋지긋한 김일성 독재정권을 벗어날 것이라고 대한민국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로써 한국군을 맞는 것이었다.


당시 김일성 독재정권이라는 것은 북한인민대중의 물위에 뜬 기름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김일성 정권자체도 허무맹랑한 군들이었다.

당시 입만 떼면 자기는 만주에서 빛나는 항일무장유격투쟁을 하였다고 자침하며 선전하던 김일성 일당의 전쟁당시 행적을 그들 자신의 문헌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만주에서 김일성과 같이 일하던 패들, 즉「김일성의 항일무장유격투쟁」의 전통을 만들었다는 자들의 전쟁에서 한 행적을 보면-.


▲김일성=인민군 최고사령관. 50년 10월11일 한국군이 원산을 점령하자『조국의 위기에 처하여 최후까지 싸워라!』라는 방송연설만 남겨 놓고 조국과 인민을 내버리고 저 혼자 평양을 탈출하여 만주통화로 도망가서 중공군의 비호 밑에 들어감.


▲김일=인민군 최고부사령관. 군대 내의 정치사상의 지도공작의 전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 미군의 폭격에 겁을 집어먹고『비행기가 없으면 싸울 수가 없다』고 방언하고 독단으로 전선을 이탈하여 도망함.


▲강건=인민군 총 참모장. 승용차가 지뢰를 저촉하여 폭사함.

▲임춘추=북 강원도 당위원장 겸 군사위원. 직무포기, 전선이탈 도망함.

▲최광=사단장. 직무포기, 전선이탈 도망함.


이상과 같이 소위「김일성 항일무장유격부대」의 중심 최고간부들이 가장 비겁하게 그들의 정체를 대중 앞에 폭로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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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joongang.co.kr/article/1356535









<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59) 박갑동


중앙일보 1973.09.05


< 강계까지 도주 >


나는 북으로 강계를 향해 무거운 발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강계에 중앙당이 임시로 피난 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기 때문이다. 북한정전과 북한군대는 완전히 붕괴되어 버리고 북한 땅은 무정부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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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에 도착하니 정말로 중앙당연락소가 있었다. 강계에 도착하여 내가 제일먼저 안부를 물어 찾은 사람이 박헌영 김형선 이범순 세 사람이었다. 그때 박헌영은 강계에는 없었다. 김일성이 피난 가 있는 만주 통화근처에 가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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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중앙당학교는 만주 노일령에 있었고 내각간부학교는 장춘에 피난 가서 개교하고 있었다. 나는 장춘에 있는 내각 간부학교에 배치를 받았는데 늦게 장춘에 도달한데다 김형태 이범순 등을 찾는다고 강계에 며칠 묵었기 때문에 정작 강계를 떠날 때에는 강계에 가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중공군이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국경통로마다 일반민간의 통행금지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또 너무나 많은 피난민이 만주로 넘어갔기 때문에 만주에서 혼란이 일어나서 중국 측에서 그 이상은 더 못 넘어오게 조치를 취하고 말았었다.


그때 만주가 얼마나 혼란했으며 무질서했는가 하면 직총(노총)위원장이 암살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소련서 북한의 국악예술 총 동맹위원장 한설야에게「레닌 평화상」을 주려고 아무리 찾아도 한설야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끝끝내 찾을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변경하여 박정애에게 수상케 한 것만 봐도 가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만주로 건너가지 못하고 중강진의 자강도 가까운 학교 안에 내각간부학교 특별 반이 생겼다 하여 중강진으로 갔었다. 중강진에 도착한 그 이튿날 새벽 미군의 대폭격이 있었다. 밤사이에 아무도 몰래 압록강을 넘어온 중공군은 말이고 군수품이고 다 내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중강진시가는 일순에 다타 버리고 말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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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joongang.co.kr/article/1356437









오해와 진실



[6.25관련 진실] 이승만 대통령의 서울 탈출과 한강교 폭파




1. 전쟁 시 최고 지도자는 안전한 곳에서 전쟁을 지휘해야 한다.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던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자국의 국경으로부터 320km나 떨어져 있었고,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도 자국의 국경으로부터 1,100km나 떨어져 있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의 도쿄(東京)는 미국의 B-26전략폭격기 공격기지인 사이판(Saipan)이나 괌(Guam)으로부터 무려 1,600km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도 일본과의 항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전선에서 항상 300-4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지도했다. 이는 국가원수가 포함된 전쟁 지도부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도 테러와 같은 비상 사태 시에는 극비 장소에 은신하여 지휘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자 이승만이 전쟁 시에 서울을 탈출한 것은 상식적인 행위이다.



주한 미국대사관의 노블 참사관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장관과 고위관리, 국회의원들이 한강을 넘어 피난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후일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만약 서울 사수를 고집하고 어물거리다가 정부 요인이 한꺼번에 인민군 포로가 되었다면 정부가 와해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6월 27일 새벽 주한미국대사관은 700여 명에 달하는 미국인들을 인천항의 선박편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철수시켰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전문을 보내 “무초 대사가 서울에 남을 특별한 이유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나 인민군이 들어오는데 대사와 외교관들이 자발적으로 포로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인민군이 보유하고 있던 전차의 속도나 성능, 무장능력 등을 고려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국가지도부의 피신은 너무 빨랐던 것이 아니라 시기를 놓친 셈이다.



국가 위급 시에 군 통수권자의 안전지대로의 피난은 전쟁 지휘와 국가의 보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지도자의 피난을 이처럼 몹쓸 언어를 동원하여 비난하는 그 저의가 무엇인지 냉정히 꿰뚫어 봐야 한다.




2. 6.25 전쟁 당시 서울을 떠난 이시영 부통령, 서울에 머무른 교황청 대사의 엇갈린 운명




이종찬 전 국정원장 월간조선 2010년 6월호 부록 60년 전, 6.25는 이랬다


“다음날 찾아온 파나마 모자 쓴 분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으로, 과거 신흥무관학교도 나왔고, 의열단 활동도 했으며 한때 중경과 연안을 드나들며 임정(臨政)요인들과 조선 혁명당 간부들 사이에 연락업무를 해오던 사람인데 그 후 북한 정권 수립에 가담했고 6·25동란 직전 북에서 파견하여 사전 작업하기 위하여 침투활동 중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이 중국 망명시대에도 성재 할아버님(이시영 부통령)을 만났던 인연으로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대통령 부재 중에 부통령이라도 서울을 사수하여야 한다고 바람을 잡고 할아버님의 피란을 극구 방해했던 것이다. 그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할아버님을 앞세워 일을 벌이려 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아마 그 때문에 다음 날, 할아버님을 놓치게 되자 조바심을 냈던 것 같다.



나는 또 그 연장선에서 상상해 봤다. 만약 성재 할아버님이 순전히 애국적인 입장에서 서울을 사수하였다면 서울이 점령당한 후 파나마 모자 같은 북의 공작원이 틀림없이 모셔 갔을 것이다. 그리고 북을 대표하는 김일성이나 김두봉 - 특히 김두봉은 중국 혁명시대 동지였다 - 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통령이 회담을 통하여 어떤 불리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면 이 전쟁 상황은 어떻게 변질되어 발전되었을까



틀림없이 북은 남쪽의 부통령이 항복했다고 선전했을 것이요, 그 순간 대한민국은 침몰되었거나 흡수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여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당시 주한 교황청 대사관의 대표였던 패트릭 번(한국명 방일은·方溢恩) 주교는 일부 외국인 성직자들을 일본으로 피신시킨 뒤 교황 대사관을 끝까지 지키다가 7월 11일 보좌역인 부드 신부와 함께 공산군에 체포되었다. 패트릭 번 주교는 서울 소공동 삼화 빌딩에 감금됐다가 인민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번 주교는 이후 인민군이 후퇴할 때 북한으로 끌려가 평양감옥, 만포, 고산진, 초산진, 중강진 하창리 수용소을 잇는 ‘죽음의 행진’을 겪으며 극심한 고문과 수난을 당하다 1950년 11월 25일 하창리 수용소에서 순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단순히 자기 한 사람의 목숨을 건지려고 피난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소재지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것이다. ‘자연인 이승만’의 ‘피란’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이전’이었다.



헌법에서 대통령에게 ‘국가를 보위’하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대통령에게 소총수들처럼 총을 들고 나가서 적과 싸우다 죽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보전하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 결과로 대한민국을 보전했다. 대통령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는가



3. 이승만의 서울 탈출과 방송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역에서 맹렬한 포격을 가한 후 240여 대의 탱크를 앞세워 남침을 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침을 먹은 이승만은 9시 30분 경 경회루(慶會樓)로 낚시를 하러 갔고, 같은 시각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어금니 치료를 받으러 치과에 갔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승만이 북한의 남침에 대해 처음 보고를 받은 것은 낚시를 하던 중인 10시경이었다.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북한의 남침 상황을 보고 받고 경무대로 돌아왔다.



오전 10시 30분경 신성모 국방장관(국무총리서리 겸임)이 경무대로 들어와 보고드릴 긴급 상황이 있다면서 ‘오전 9시에 개성이 함락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춘천 근교에 도달했다’고 보고했다.



이때까지도 대통령과 각료들 모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장난치다 그만 두겠지’라고들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크고 작은 충돌들이 자주 일어나곤 했었기 때문이다. 신성모 국방장관도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마침내 대통령의 피난 문제가 처음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6월 26일 밤이었다.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하자 정부 각료들이 대통령의 피난 문제를 거론했다.



6월 26일 밤 9시 김태선 서울시경 국장이 경무대로 와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는 수천 명의 공산분자들이 탈옥하면 제일 먼저 경무대로 올 것이므로, 일시 피난을 해서 전쟁의 전반을 지도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완강히 거부했다.



자정을 넘겨 막 잠자리에 들었던 6월 27일 새벽 2시. 신성모 국방장관, 이기붕 서울 시장, 조병옥 등이 경무대로 급히 찾아 왔다. 그들은 “사태가 급박합니다. 빨리 피하셔야겠습니다.”라면서 간곡하게 건의를 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안 돼! 서울을 사수해야 돼! 나는 떠날 수 없어!”라고 말하고는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따라 들어간 프란체스카 여사가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발생하고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게 된다. 그러니 일단 수원까지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는 게 좋겠다’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말에 이승만은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느냐,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그 때 경찰간부 한 사람이 들어와서 적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메모를 전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러자 할 수 없이 이승만은 남하를 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인민군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정보는 사실이 아니었고, 대통령의 남하를 재촉하려는 참모들의 꾀였다고 한다.



6월 27일 새벽 3시 30분, 이승만은 기관차와 3등 객차 2량으로 만들어진 특별열차에 탑승하여 남하하기 시작한다. 금고를 탈탈 털어도 5만원 밖에 없었고, 옷가지도 챙기지 못했으며, 특별열차는 차창이 깨지고 좌석의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었다고 한다.



특별 열차는 대구까지 갔다. 하지만 이승만이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을 주장해서 대전으로 돌아갔다. 기차가 대전에 도착하자 소식을 들은 윤치영과 허정이 왔고, 그들은 서울이 이미 점령당했으니 더 이상의 북상은 안 된다고 만류했지만, 이때까지도 이승만은 서울행을 고집하고 있었다.



잠시 대전역 사무실에서 쉬고 있는데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장관은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더 이상 북상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고집을 꺾지 않고, 수원까지라도 가야겠다고 했다. 사실 그때까지 서울은 점령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거짓말을 한 것은 역시 더 이상의 북상을 막으려는 참모들의 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때 미 대사관의 드럼라이트 참사관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유엔이 대북 군사 제재를 결의했고, 트루먼 대통령이 해·공군 출동 및 대한(對韓) 무기원조 명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암담했던 분위기는 이 소식으로 활기를 되찾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북상을 단념하고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이승만 대통령의 숙소는 충남 도지사 관저였다.



그날 밤에 무초 미국 대사가 이승만을 찾아왔다. 무초 대사는 ‘하나님이 한국을 버리지 않았다’며 “전쟁은 이제부터 당신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이 되었다”면서 미국의 적극 개입방침을 설명했다. 이 말에 힘을 얻은 이승만은 국민을 안심시키고 국군의 사기를 북돋우는 방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보처장과 상의한 후 서울중앙 방송국으로 전화를 해 6월 27일 밤 10시에 방송을 하기로 했다. 내용은 “유엔과 미국이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다. 지금 공중과 해상으로 무기, 군수품을 날라 와 우리를 돕기 시작했으니 국민들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취지였다.



방송이 나가고 4-5시간이 지난 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이로 인해 온갖 유언비어가 퍼졌다. 이승만이 혼자서 도망쳐놓고 국민들에게 거짓말로 방송했다, 본인이 살기 위해 국민을 인질로 잡히게 했다, 대통령이 건너자마자 한강 다리를 끊었다, 등등의 왜곡이다.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승만과 정부는 6.25가 대규모의 전면 남침임을 알 수 없었다. 당시 휴전선에서 수백번의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기에, 그와 같은 소규모 충돌로 생각했다.



2) 6.25가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북한의 전면 공격임을 깨닫고 국가의 수호를 위해서 대통령이 피신했다. 이는 불가피한 조치였다.



3) 측근들에 의해 대구로 피신했던 이승만은 서울로 돌아갈 것을 고집해서 대전까지 갔다. 그곳에서 무초 대사로부터 미국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에 국민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안심하라는 방송을 했다.



4)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국군 수뇌부는 계획대로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4. 한강 인도교 폭파



1) 북한은 한강다리가 끊어지기 전에 점령하려고 했다.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함과 동시에 한강교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북한군은 이를 위해 남침 당시 수도권에 그들 전력의 23이상을 투입했다. 북한군은 1개 밖에 없는 1개 전차여단과 1개 모터싸이클(motorcycle) 연대까지 투입시켰다. 전차여단은 한강교 점령 임무를 추가로 부여받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 1, 2001, 138쪽)



우리가 한강교를 끊기 전에 북한이 먼저 점령하는 것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중요한 사안이었다는 의미이다.



2) 우리 정부의 한강교 폭파 계획


27일 새벽 2시 경 신성모 장관, 조병옥, 이기붕 서울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회의가 열렸다.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던 이범석(李範奭) 장군이 주장했다. “정부가 강을 건넌 뒤 한강다리를 폭파해야 된다. 이는 적이 쉽게 도강(渡江)할 수 없도록 할뿐만 아니라, 서울에 남아 있는 국군이 퇴각할 길이 차단됨으로써 보다 완강하게 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해롤드 노블 저, 박실 역, 『戰火속의 대사관』, 40쪽.)고 주장했다.



3) 한강교 폭파



전쟁 초기 국군이 서울을 빼앗기고 후퇴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결정적인 것은 바로 적 전차의 위력 때문이었다. 국군 수뇌부가 한강교를 폭파하는 기준도 적 전차의 서울시내 진입에 두었다. 적 전차가 시내에 들어온 후, 2시간 내에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것이었다. 한강교를 폭파하지 않고는 적 전차의 도하를 저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북한군의 추격도 따돌릴 수가 없었다. 북한군의 전차는 6월 28일 0030-0100에 서울시내에 진입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2, 16쪽.)



이에 군에서는 한강교 상의 인도교를 비롯하여 철교들을 폭파했다. 그때 시간이 6월 28일 0230분이다. 광진교는 이보다 늦은 0400에 폭파됐다.




4) 한강교 폭파의 결과



한강교가 폭파되자 북한군 전차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서울시내에서 귀중한 3일간을 허비하게 되었다. 반대로 국군은 한강이남에서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됐다. 국군은 한강선을 방어하기 위해 시흥지구전투사령부(始興地區戰鬪司令部)를 설치하여 김홍일(金弘壹)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한강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국방부, 『한국전쟁사 북괴의 남침과 서전기』제1권(개정판), 710쪽)



북한이 한강교를 점령하기 전에 국군이 폭파한 것에 대하여 소련 군사 고문단은 북한군에도 책임이 있음을 지적했다. “서울을 점령한 후 [북한군] 각 부대가 행한 극단적으로 완만한 행동과 개별부대 지휘관들의 임무유기로 인하여, 적[국군]은 한강을 도하하고 교량을 파괴했으며, 남쪽 강변에 방어선을 조직하여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늦추었다.”며 북한군 수뇌부의 작전미숙을 강하게 질타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1, 183-184쪽.)




한강교 폭파는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의 희생과 군의 피해가 있었지만, 전쟁의 전체국면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한강교 폭파로 인해 국군은 북한군의 한강도하를 막을 수 있었고, 가장 위협적인 무기였던 북한군 전차를 저지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국군은 시간적 여유를 갖고 한강방어선을 형성했다. 바로 그 한강방어선을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시찰했다. 방어선을 둘러본 맥아더는 지상군의 투입만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미국의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지원을 결의하고, 유엔군을 파병하기로 했으나, 만약 국군이 그때 한강방어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졌다면 유엔안보리의 결의는 무위로 끝났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과 유엔회원국이 한국을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면, 대한민국은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공산이 매우 컸다.



결론적으로 한강교 폭파는 대한민국을 살리고 미국과 유엔의 참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5)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의 책임



한강교 폭파를 명령했던 채병덕 육군 참모 총장은 6.25전쟁 중에 전사했다. 이 사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자 이승만 정부는 실제로 폭파를 지휘했던 최창식 공병감을 처형했다. 1962년 재심에서 폭파 명령의 책임은 채병덕에게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지만, 최창식의 고문이었던 미군 크로포드 소령은 당시 폭파명령을 내린 것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의 고문으로 있던 미군 장교라고 증언했다.





5. 김일성의 사례



김일성이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떠난 것은 국군이 평양에 입성하기 1주일 전인 10월 12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이 함락되기 하루 전인 6월 27일 새벽 3시경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을 떠났다. ‘특별열차’라니 대단해 보이지만, 좌석의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을 정도로 낡은 객차들을 급히 편성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청천강변에 이르러 자동차를 버리고 도망했는데, 이 차는 나중에 국군에게 노획되었다.



그들은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김일성도 급히 평양을 빠져 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그는 자신의 승용차에 올라타고 북상하다가 결국 청천강 변에 자동차를 버리고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도망을 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김일성의 행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백선엽, 6. 25 징비록




김일성의 피신 행적은 분명치 않다. 북한 당국에서는 백두산에서 끝까지 항전을 지휘했다고 선전하고 있으나,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주장도 있다. 김일성은 자신이 평양을 떠나기 이미 열흘 전에 아들 김정일과 딸 김경희를 만주 창춘(長春)으로 피난을 보냈다. 김정일은 만주 길림학원에 입학, 1952년 말까지 2년 동안 초등학교 과정을 중국에서 공부했다.



자식들을 일치감치 중국으로 피난시키고 자신도 행방이 묘연하게 탈출했던 김일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이승만을 비난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6. 이승만이 피신하지 않고 한강다리도 끊지 않고 국민들을 먼저 탈출시킬 수 있었을까


북한군의 막강한 전력에 열세한 국군은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후방에 있는 모든 부대까지 전선으로 동원해야 했다. 병력수송을 위해 열차가 동원됐다. 이 와중에 약 140만 명에 달하는 서울시민에 대한 피란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중공군 개입 후 1·4후퇴 때, 정부는 미군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20여일에 거쳐 서울시민을 피난시킨 적이 있었다. (전상인, 「6·25전쟁의 사회사」, 『한국과 6·25전쟁』, 184, 214쪽; 짐 하우스만·정일화 공저, 『한국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한국문원, 1995, 236쪽.)



그때는 전선도 38도선 부근이었고, 시간도 20여일이나 되어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군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최소한 이 정도의 능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100만명이 넘는 서울시민을 피란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남침 직후 2-3일 만에 서울시민을 피란시킨다는 것은 당시 정부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한다고 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재앙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정부의 여력으로는 서울시민을 피란시킬 수송수단도 없었고, 피란민이 이용할 도로는 군사용 도로로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이었다. 여기에 북한군 전투기는 공중공격을 감행했다. 서울은 격전지로 변하고 있었다.



서울시민을 안전하게 피란시키고,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국군도 온전히 철수한 다음에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일일지 모르나 당시 전쟁 상황과는 동떨어진 주장이다. 만약 이때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서울시민의 안전을 위해 매달렸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또 대통령과 정부의 그런 노력에 서울시민은 안전하게 피란할 수 있었을까 북한군은 서울시민이 피란하고 국군이 철수하도록 그냥 보고 있을까 만약 시민피란과 국군철수를 동시에 실행에 옮긴다고 하더라도, 도로와 교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짧은 시간에 이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서울시민을 의도적으로 방치한 것이 아니었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전쟁 상황에서 당시 정부의 능력을 고려할 때, 어찌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의 동선(動線)은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극비(極秘) 중의 극비사항에 해당된다. 전시에 국가원수가 위난을 피하기 위해 피란을 간다고 공개적으로 알린 예(例)는 고금을 통틀어서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또 대통령이라고 해서 전시에 모든 것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7. 1.4 후퇴 당시, 이승만은 서울 시민을 먼저 대피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서울시민을 놓고 피란을 했지만, 국가원수로서 서울시민을 구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바로 후회를 하고 이를 바로 잡았다.



1951년 1·4후퇴 때, 이승만 대통령은 악몽과 같았던 남침직후의 실수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다. 중공군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 이남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자, 이승만은 전쟁 초기 서울시민을 피란시키지 못한 점을 회한(悔恨)으로 여기다가, 마침내 1·4후퇴 이전 그는 20여일에 걸쳐 군과 행정 관서를 총동원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서울시민을 한강 이남으로 무사히 피란시켰다. 그리고 대통령 자신은 가장 늦게 서울을 떠났다.



그는 국민에게 아픔을 주는 일은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며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현명한 국가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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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6·25 한강인도교 폭파 '위법행위' 아니다



2013-05-14



납북 제헌의원 가족들 손해배상 소송 패소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한국전쟁 당시 정부의 한강인도교 폭파를 '위법행위'로 볼 수 없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0부(고영구 부장판사)는 구중회 전 의원 등 납북된 제헌국회의원 12명의 자녀와 손자·손녀 22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고 14일 밝혔다.



가족들은 국군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고 납북이 충분히 예상되는 제헌의원들에 대해 아무런 피난조치를 취하지 않은 국가에 납북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정부와 국군·의회가 서울 사수에 대해 통일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인민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기 위해 불가피하게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며 현재의 관점에서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다 해도 고의나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한강인도교 폭파 전날인 1950년 6월27일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대전으로 피신한 상태에서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한 데 대해서도 서울시민의 동요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1950년 6월25일 이전에 전쟁이 발발할 것을 알 수 있었는데도 정부가 전쟁 준비를 게을리했다거나 연좌제로 피해를 입었다는 원고들의 주장도 증거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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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na.co.krviewAKR2013051320200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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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계속 서울에 남았다면


이승만이 만약 서울에 계속 남았다면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거나, 사살 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중과부적으로 당시에는 국군의 전력만으론는 도저히 서울을 지킬 능력이 없었다. 서울 뿐만 아니라 파죽지세로 북한군은 내려오고 있었기에 혹자는 북한군이 서울에서 몇일을 보내지 않았으면 낙동간 방어선을 정비하기 전에 적화통일이 되었을것이다 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국군통수권자이자 국가원수인 대한민국 대통령이 사살되서 유고가 되거나 북한군의 포로가 된다 북한에게만 좋은 일이다.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전혀 좋은 일이 아니다. 대통령은 평시에도 1급 경호대상이다. 하물며 전시에는 더더욱 그렇다. 선조는 도망이라도 잘 갔지. 조선시대 인조는 도망도 제대로 못쳐서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 항복했다. 만약 이승만이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으면 그건 그것대로 깠을 것이다. 북한은 서울을 점령했을 때 대대적인 인민재판을 벌였다. 대한민국 대통령인 이승만이 생포되었다면 어떻게 대우 했을까 북한에게 이용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서울을 사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대통령이 남아서 서울을 사수 했다면,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고집을 부리다가 생포되거나 사살된다면 그건 필부의 만용일 뿐이며 무모한 용기로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 일뿐이다. 대통령은 국군통수권자이자 국가원수로서 그냥 한 개인 차원에서 끝나는 생명이 아니라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의 신변은 국가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대통령은 평시는 물론 전시는 더 말할 필요 없이 본인의 신변을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이승만의 목숨이 붙어 있고 대통령직을 피난길에도 계속 유지 했기에, 국군의 지휘권을 유엔군에게 넘길 수도 있었고, 반공포로 해방이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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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승만

우남위키











** 만민공동회 스타 이승만




1989. 11.21.


[ ..... 李承晩은 보부상들 속에 혼자 남아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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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하루


11월21일. 만민공동회의 철야시위가 17일째 되는 날이었다. 漢城府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告示를 했다. 드디어 보부상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이날은 李承晩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하루였다.


이날 새벽 2시에 만민공동회의 요청에 따라 회장에 나온 의정 서리 金奎弘 등 정부 대신들은 보부상의 혁파와 만민공동회의 피격 방지를 거듭 약속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종로의 보부상 패는 아침 일찍 홍종우의 격렬한 선동 연설을 들은 다음 2000여 명이 길영수와 홍종우의 지휘 아래 두 패로 나뉘어 고함을 지르며 인화문 밖의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李承晩은 회중이 동요하지 않도록 연단에 올라가서 연설을 계속했다.


『우리가 여기 進伏(진복)하여 풍찬노숙하는 것이 옷들을 탐하는 것이오이까 밥을 탐하는 것이오이까! 다만 한다는 일이 모두 나라를 위하고 동포를 사랑함이외다. 지금 들은즉 못된 간세배가 부상패를 불러 우리 만민을 치라고 해서 부상패들이 지금 목전에 당도하였소이다. 우리가 죽더라도 忠愛(「忠君愛國」)하는 의리는 가지고 죽을 터이니, 신민의 직분에 죽어도 또한 천추에 큰 영광이오이다!』63)



이 때에 큰 몽둥이를 든 길영수의 지휘에 따라 보부상들이 공동회장을 둘러쌌다. 경운궁 주변을 지키던 병정과 순검들은 처음에는 보부상들을 제지하는 체했으나 짐짓 밀리고 말았다. 아무 방비 없는 공동회 회중은 보부상 패의 몽둥이에 맞아 이내 부상자가 속출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옆 프랑스 공사관의 담을 넘어 피신하기도 했다. 길영수를 보자 격분한 李承晩은 그를 붙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너도 명색이 국록을 먹는 신하요 너도 소위 대한의 백성이 아니냐! 네 어찌 간세배와 부동하여 부상패를 모집하여 충애하는 우리 만민을 친단 말이냐!』



그러면서 그는 머리로 길영수의 가슴을 들이받으며 『나부터 죽여라!』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길영수는 히죽이 웃고는 몸을 빼어 좌충우돌했다. 누군가가 李承晩을 꽉 껴안고 『이승만씨, 진정하고 빨리 달아나시오』하고 말했다. 주위를 살펴보자 李承晩은 보부상들 속에 혼자 남아 있었다. 그는 가졌던 작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보부상들이 계속 밀려오는 쪽으로 나아가 그들이 길을 막아 놓은 작대기를 발로 차버리고 배재학당 쪽으로 걸어갔다.


배재학당 앞길로 나서며 李承晩은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때에 이승만의 아버지 敬善이 나타나 아들을 안고 같이 통곡했다. 어떤 사람이 李敬善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아들을 그런 위태한 데 다니게 하오』

그러자 이경선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 자식이 만일에 悖戾(패려)한 일을 하게 되면 아비된 도리에 마땅히 엄금하려니와 당당한 충애의 의리로 나라를 위하고 동포를 사랑하여 다니는 것을 어찌 금할 수 있소!』


이 광경을 보도한 「독립신문」의 기사는 〈李承晩씨의 충애에 열심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부친의 당당한 의리는 세계에 더욱 드문 줄로 공론이 있다더라〉하고 덧붙이고 있다.64)



『李承晩이가 吉永洙에게 맞아 죽었다』


高宗과 수구파는 이것으로 만민공동회가 해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의 기습에 성공한 보부상들이 궁중에서 보내온 백반과 고깃국으로 아침을 먹고 의기양양해 있을 때에, 소문을 듣고 정동 골목길에 모인 군중들이 돌팔매로 반격을 시작했다. 돌팔매에 쫓긴 보부상들이 英國公使館으로 피해 들어가자 공사는 이들을 내쫓았다. 보부상들은 서대문쪽으로 밀렸다. 서대문을 지키던 파수병들은 보부상들만 통과시키고 뒤따르는 군중은 막아서서 뒤쫓지 못하게 했다.



李承晩은 배재학당으로 들어가자 기절하고 말았다.65) 보부상 패에 쫓겼던 사람들이 배재학당으로 몰려왔다. 金瑗根(김원근)이 눈물을 흘리면서 뛰어 들어오더니 『李承晩이가 길영수에게 맞아 죽었다』하고 외치며 통곡을 했다. 李承晩도 자서전 초고에서 〈그날 오후 신문도 내가 길영수에게 덤벼들었다가 그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보도했다〉고 적고 있으나66) 현존하는 당시의 신문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몸을 추스린 李承晩은 배재학당에 모인 군중들과 함께 종로 쪽으로 걸어갔다. 종로에서 다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이때에 모인 회중의 수는 인화문 앞 집회의 곱절이나 되었다. 李承晩과 양홍묵 등이 등단하여 정부가 보부상을 동원하여 회중을 습격했다고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李承晩이 연설하는 것을 보자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 놀랐다. 어떤 사람은 그가 얼마나 상했는가 보려고 그에게 다가와서 만져보기까지 했다. 흥분한 회중의 일부는 보부상 패가 몰려 있는 서대문 밖으로 밀려갔으나 병정들이 총포로 위협하여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



高宗과 수구파는 낭패했다. 고종은 경무사 閔丙漢(민병한)과 한성부 판윤 李根鎔(이근용)을 만민공동회에 보내어 회중을 회유하며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나 격앙된 시민들이 돌팔매로 응수하는 바람에 경무사는 황급히 민가로 피해 숨어야 했다. 이때에 나무를 팔고 돌아가던 나무장수들이 만민공동회가 습격당했다는 말을 듣고 격분하여 이기동의 집을 부셔버렸고, 흥분을 이기지 못한 회중의 일부도 다투어 달려가 조병식 등 보부상 패를 조종하는 대관들의 집을 때려부셨다.



각 학교는 문을 닫았고, 학도들은 모두 공동회로 몰려왔다. 공동회에 참가하지 않은 시민들도 의연금과 음식 등을 보내어 공동회를 격려했다. 군부는 병력을 풀어 高宗이 기거하는 경운궁 앞을 엄중히 경비했고, 정동 큰길은 통행이 통제되었다.




18일 동안의 철야투쟁 끝에 獨立協會 부활 얻어내


격정의 긴 하루가 지나고 날이 밝자 이른 아침부터 더 많은 시민들이 종로로 모여들었다. 서대문이 열릴 시간이 되자 회중은 보부상을 반격하러 그쪽으로 몰려갔다. 보부상들은 마포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거의 빈손인 회중으로서는 몽둥이로 무장한 보부상들을 이길 수 없었다. 신기료 장수 金德九(김덕구)가 사망하고 부상자 10여 명이 생기고 시민들은 패퇴했다.



그러나 서울 시내는 병정들과 순검들마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지지하여 제복을 벗는 등 혁명 전야와 같은 분위기였다.67) 高宗은 각국 공사들을 입궐시켜 궐내에 머물게 하면서 民會에 대한 각국의 대책 사례를 묻고 무력 진압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각국 공사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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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보부상들에게 한성부 판윤 李啓弼(이계필) 등을 보내어 보부상이 혁파되었으므로 퇴거하라는 칙유를 전했다. 그러나 보부상들은 종로의 만민회가 퇴거하지 않았다면서 듣지 않았다. 만민공동회는 잠시 먼저 해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尹致昊 등이 중심이 되어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토론한 끝에 23일 오후 8시를 기해 이틀 동안 해산하기로 했다. 이날 高宗은 朴定陽, 閔泳煥 등 만민공동회의 지지를 받는 인사들을 주축으로 하여 각료를 개편하고 尹致昊를 한성부 판윤에 임명했다. 그러나 보부상패는 여전히 해산하지 않고 마포에 집결해 있었고, 吉永洙는 가마를 타고 몰래 입궐하기까지 하는 판국이었다.



정부가 약속을 이행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26일 아침부터 군중들이 다시 종로로 모여들었다. 사태가 다시 심각해지자 高宗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시도했다. 高宗은 하오 1시에 경운궁의 敦禮門(돈례문) 軍幕(군막)에 친림했다. 이 자리에는 각국의 외교관들과 그들의 부인들도 초대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참관했다.



高宗은 먼저 공동회 대표 200명에게 독립협회의 부활 등 공동회의 요구조건을 대체로 허락하면서 해산을 친유했다. 다만 『독립협회는 앞으로 국내의 文明進步에 관한 일만을 토론할 것이며, 정부의 조치에 대한 말참견을 불허한다』고 했다. 공동회 대표들은 만세를 부르고 나와서 해산했다. 高宗은 오후 4시에는 또 보부상 대표 200명을 불러 모호한 약속을 하면서 역시 해산을 권유했다. 보부상들도 만세를 부르고 나와서 해산했다.



이튿날인 27일은 독립협회가 부활되고 나서 처음 맞는 일요일이었다. 감격에 넘치는 통상회의가 열렸다. 이날의 회의에서는 마포에서 보부상 패와 싸우다가 희생된 신기료 장수 김덕구의 장례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는 문제 등과 함께 협회의 토론회를 정상화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다음 토론회는 주제를 「信과 義를 튼튼히 지키는 것은 본국을 다스리는 데와 외국들을 사귀는 데 제일 요긴함」으로 정하고, 右議(우의)에 李承晩과 장태환, 좌의에 李商在와 方漢德을 선정했다.70) 부활된 독립협회의 첫 토론회에서 李承晩이 부회장 李商在와 동격의 토론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신진 소장파인 李承晩이 이제 독립협회 안에서도 지도적 위치를 확보했음을 말해 준다.




(5) 中樞院議官에 선임되었다가

제일 먼저 파면돼



高宗과 정부는 11월29일에 기정 방침대로 의관 전원을 관선으로 하여 中樞院을 성립시켰다. 선임된 議官 50명은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계열이 17명, 황국협회 계열이 16명, 전직 관료와 都約所 등 高宗의 직계가 17명으로서 수구파가 3분의 2 의석이 되도록 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의관들에게는 연봉 360원을 지급하기로 했다.71)


이 때에 李承晩도 從九品의 의관으로 선임되었는데,72) 독립협회 계열의 17명 가운데에서는 일본에 유학했던 스물두 살의 漢城義塾 교사 卞河進(변하진) 다음으로 가장 젊었다.73) 李承晩은 스물네 살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일방적인 중추원 의관 선임은 시국을 수습하는 데 전혀 효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17명의 독립협회계 인사 가운데에서 만민공동회 의장 高永根과 尹夏榮, 玄濟昶(현제창) 세 사람은 아예 의관직을 받기를 거부했다. 이들 말고도 李南珪(이남규) 등 전직 관료 네 사람도 授勅(수칙)을 하지 않았다. 일반 국민들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신문들도 「관보」나 「잡보」란에 간단히 보도하고 있고, 「皇城新聞」은 중추원이 「옛날의 言官」이라고 해설했다.74)


독립협회는 정부의 일방적인 중추원 의관 선정 발표에 대해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렇게 설치되는 중추원이 협회가 당초에 주장한 의회와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어서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헌의6조」 등 정부가 약속한 사항을 빨리 실시하게 하는 것이 주된 운동목표가 되고 있었다.


장례형식 빌어 대규모 시위행진


12월1일에 거행된 신기료 장수 김덕구의 장례식은 그러한 독립협회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것은 장례식의 형식을 빈 대규모의 대중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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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 박사가 홀홀단신으로, 그놈들과 마자싸와, 死生을 직결하던, 그의 극적 활약장면은, 아아 무엇이라 말삼하면 可하오릿가. ........ ]



李承晩 博士는 渾身都是熱


金一善



이러케 鐘路를 거처서 청년회관을 오면 李박사 생각이 別로 간졀해짐니다.

정말로 公번 띄고 私心업고, 혼신이 도모지 열정 떵어리인 李박사! 그야말로 愛國愛民의 열렬한 志士요 烈士임니다.


일즉이 海州에서 생장하야, 자기 아버지를 쪼차 京城에 드러오기는 아마 16,7세이엿슬 듯함니다. 본래 漢文에 능한 그는 培材學堂에 드러가 영어를 중심으로 신학문을 학습하다가, 丁酉年頃에 徐載弼박사가 독립신문을 發刋할때에는 그 社에 논설기자로 드러가서, 독립이상의 고취에 盡力하얏슴니다.


독립협회라 하며, 만민공동회라 하면 더 말할 것 업시 近世의 조선에서 처음 닐어난 유일한 민간정당으로서, 당시에 宮中府中을 蕭淸하고, 민간사회를 혁신하기에 얼마마한 활약을 하엿는가하는 것은 이제 군더덕이로 말할 것 까지도 업는 바이어니와, 李박사는 그때 겨우 22,3세의 年少로써, 일즉히 독립협회에 관계하고 만민공동회를 지도하야, 소위 황국협회의 褓負商軍으로 더부러 정면격투를 행하얏슴니다. (戊戌己亥年間의 일),


그 당시에 내가 아조 實見한 광경이 잇거이와, 兵丁, 난민을 어울너서 수천으로써 算하는 平凉子軍(褓負商)이 제각각 흉기를 들고, 새문 밧그로부터 貞洞을 넘어, 大漢門쪽 길로 덥허올 때에, 박사가 홀홀단신으로, 그놈들과 마자싸와, 死生을 직결하던, 그의 극적 활약장면은, 아아 무엇이라 말삼하면 可하오릿가. 엇잿던 박사는 그와가티 열렬하엿스며 대담하엿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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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 제62호 밧게 잇는 이 생각, 異域風霜에 氣軆安寧하신가

1925년 08월01일









*

겁이 없는 것이 이승만의 특성의 하나입니다.









1950.7.



<건국62주 특집> 이승만의 대한민국 만들기

"제주도 못가!" 美대사에 권총 빼든 李대통령



최종편집 2010.08.20



『6.25와 이승만,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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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6월 27일


숨 막힐 듯한 긴장과 긴박감 속에 하루가 지났다. 대통령이나 나나 자정을 넘겨 막 잠자리에서 눈을 붙였을 때 비서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맡의 시계는 27일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어 서울시장 이기붕(李起鵬) 씨와 조병옥(趙炳玉) 씨가 들어왔다.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겠습니다.”
신 장관이 간곡히 남하를 권유했다.
“안 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대전 사수해, 난 여기서 죽겠다" 유서 남겨

7월 1일 오전 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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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차라리 대전에서 죽는 게 낫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 경멸을 당하지는 않겠다며 대전 사수를 고집했다. 침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대통령은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리고 기도하는 자세였다. 그의 얼굴은 불행한 국민들에 대한 연민의 정과, 잇단 패전에 대한 분노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당장 상황을 뒤바꿀 어떤 대책이 있을 수도 없었다.

대통령은 노트를 꺼내 내게 건네주며 메모를 부탁했다. 나는 조용히 그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다. 나는 자유와 민주제단에 생명을 바치려니와 나의 존경하는 민주국민들도 끝까지 싸워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다만 후사 없이 죽는 게 선영에 죄지은 불효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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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길엔 너나없이 단벌신사들이었다.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고위관리고 간에, 양복이나 와이셔츠를 아끼려고 지사관저에 들어오면 팬츠만 입고 웃옷은 옷걸이에 모셔놓았다. 그러다가 회의가 있거나 외국손님이 올 때면 옷을 챙겨 입고 나타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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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망명정부를..." 美대사 말에 권총 꺼내

"이 총으로 적을 죽이고 처를 쏘고 나를 쏘겠소"



무초 대사는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가자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의 주장은 그곳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고, 최악의 경우 남한 전체가 공산군에 점령된다 해도 망명정부를 지속시켜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무초가 한참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권총을 꺼내들었다. 순간 무초는 입이 굳어져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살 때 고속순찰 오토바이를 따돌리고 과속으로 달릴 때 가슴이 떨린 이후 그렇게 놀란 적이 없었다.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히 말했다.

대통령이 권총으로 어쩔 것은 아니었지만, 긴장한 무초 대사는 더 이상 아무 말을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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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54212
2023-10-19 00: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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