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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7)
이승만 2023-09-27 22:35:54 | 조회: 90
1908.9. 프린스턴대학 박사과정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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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의 프린스턴 생활에서 가장 큰 수확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총장과 그의 가족들을 가깝게 사귈 수 있었던 일이었다. 윌슨은 메릴랜드州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정치학 교수로서 「議會政府論」과 「國家論」이라는 명저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변호사로서도 평판이 좋았다. 윌슨의 가족들은 韓國과 韓國宣敎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면서 李承晩이 귀국해서 추진하고자 하는 기독교 사업에 대해 격려해 주었다. 李承晩이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던 해 겨울에 윌슨이 불특정 다수의 여러 사람 앞(“to whom it may concern”)으로 써 준 다음과 같은 소개장은 李承晩에 대한 윌슨 총장의 신임이 어떠했는가를 보여 준다.



〈李承晩씨는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생으로서, 탁월한 능력과 고매한 인품으로 우리에게 호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 韓國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東洋의 전반적인 정세에 대해 놀랄 만한 식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대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도 특별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투철한 애국심과 동포들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닌 그는 그의 조국을 위해 큰일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연구하고 보존해야 될 위대한 東洋에서의 우리의 권익에 대해 직접 배우고자 하는 분들에게 나는 기꺼이 그를 추천합니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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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의 윌슨 가족들과의 교분은 자별했다. 윌슨 가족들은 피아노 옆에 둘러서서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는데, 李承晩은 그러한 가족모임에 초대되는 몇 안 되는 프린스턴 대학교 학생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李承晩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딸들은 李承晩과 자기네 아버지를 함께 놀리곤 했다. 학생손님은 흐트러짐이 없이 위엄을 지키고 있고 그를 초대한 대학총장은 풀어져서 마냥 즐거워한다는 것이었다. 캠퍼스에서 윌슨은 방문객들에게 李承晩을 소개하면서 곧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장차 한국의 독립을 되찾을 사람〉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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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21)







1910.9.


[ ......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등 유럽의 대도시들을 둘러본 다음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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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귀국


李承晩이 윌슨 총장 가족과 웨스트 대학원장과 어드먼 박사 등 친지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다음 뉴욕항에서 영국의 리버풀로 향하는 발틱호(S. S. Baltic)를 탄 것은 9월3일, 곧 「한일병합」 조약이 공포된 지 닷새 뒤였다. 李承晩이 미국을 떠나기에 앞서 「병합」 소식을 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李承晩은 귀국하고 나면 언제 다시 출국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귀국 길에 유럽 여러 나라를 잠깐씩이나마 둘러볼 생각이었다. 발틱호로 1주일 동안 大西洋을 항해한 끝에 리버풀에 도착한 그는 런던에서 다시 배로 도버해협을 거쳐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등 유럽의 대도시들을 둘러본 다음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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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22)







1912


[ .......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치열한 .... 주말 저녁을 윌슨 가족이 李承晩과 같이 지냈다 ........


....... 윌슨 가족과의 교분은 이때 이후로 李承晩의 정치 행로에 압도적인 권위를 지닌 정치적 자산으로 ......... ]




[연재再開] 孫世一의 비교 評傳 (2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기독교 국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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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1912년 3월26일에 두 번째 渡美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33년 동안 그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渡美 도중에 그는 日本에 들러서 가마쿠라(鎌倉)春令會를 주재하고 유학생 대표들을 만났다. 이때에 만난 많은 사람들이 뒷날 民族運動의 지도자가 되었다.


李承晩은 5월에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린 국제감리교 총회에 韓國平信徒代表로 참석한 다음 프린스턴大學 때의 은사 우드로 윌슨을 만나, 윌슨이 民主黨 대통령후보로 지명되는 전당대회를 참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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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거트의 州知事별장에서 윌슨 만나



李承晩이 미국으로 떠날 때부터 가장 기대했던 일은 프린스턴 대학시절의 은사인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을 만나는 것이었다. 1910년에 民主黨에 영입되어 뉴저지州 知事로 당선된 윌슨은 과감한 革新政治를 실행함으로써 전국적인 평판을 얻어 일약 1912년 대통령선거의 유력한 후보로 급부상했다.


시카고에서 나흘 밤을 묵은 李承晩은 6월3일에 시카고를 떠나 4일 오후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YMCA에 숙소를 정한 그는 다음날 윌슨의 딸 제시 윌슨(Jessie Wilson)을 만나서 윌슨 지사와의 면담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승만과 제시는 프린스턴 대학시절에 연애감정에 빠진 일이 있을 만큼 서로 친하게 지냈었다고 한다.22) 윌슨은 6월25일로 박두한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앞두고 몹시 분주한 때였으나, 제시는 면담을 주선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출판된 博士學位논문 들고 윌슨 찾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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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에서 2주일 동안 머문 李承晩은 6월18일에는 프린스턴으로 갔다. 첫날 저녁은 「알렉산더 홀」의 게스트 룸에서 자고, 이튿날 같은 홀의 A룸으로 옮겼다. 이 때부터 이듬해 1월에 하와이로 떠날 때까지 프린스턴은 그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李承晩이 프린스턴으로 간 것은 그의 학위논문 「美國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120쪽밖에 되지 않는 얄팍한 책이었으나 학위논문이 출판된 것은 거취문제로 고민하던 李承晩에게 크게 용기를 주는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도착한 이튿날인 19일에 출판을 주선해준 웨스트(Andrew F. West) 학장으로부터 책 50부를 받아 든 李承晩은 그 길로 뉴저지州의 시거트(Sea Girt)로 갔다. 시거트는 주지사의 여름별장이 있는 곳인데, 그곳에 머물고 있던 윌슨이 이승만을 그곳으로 오라고 한 것이었다.


李承晩은 그 날 저녁에 윌슨을 만났다. 윌슨이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앞둔 바쁜 일정 속에서도 李承晩을 만난 것은 李承晩 개인에 대한 호의도 호의지만 대통령후보로서의 외교정책 공약 등과 관련하여 東아시아 정세에 대한 李承晩의 견해를 한번 들어보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徐廷柱의 「李承晩博士傳」이 유일하게 대화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서정주는 李承晩의 두 번째 미국行의 동기 자체가 감리교 총회에 참가하는 것보다도 윌슨을 만나서 한국의 실정을 설명하고 한국의 해방을 위하여 그의 협력을 얻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李承晩은 윌슨을 만나자 한국의 해방을 세계에 호소하는 성명서를 만들고자 하니 거기에 同意署名을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승만의 이러한 요청에 대하여 윌슨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중히 거절했다는 것이다.


『나 개인으로서는 거기에 물론 서명해드리고도 싶소. 서명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일을 도와주려고도 하오. 그렇지만 미국의 정치를 위해서는 아직도 내가 당신의 성명에 도장을 찍을 때는 아니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같이 일할 때는 반드시 올 것이니 그것을 믿으시오. 그렇지 않아도 나는 벌써부터 당신의 조국 한국을 포함한 모든 약소민족 국가들의 일을 생각해 오고 있는 중이오』


이러한 윌슨의 대답에 대하여 李承晩은 한번 더 그의 요구를 간청했다고 한다.

『현상유지의 정치보다 正義人道의 미래를 위하여 나의 편이 되어 주시오』

그러자 윌슨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이오. 그렇지만 모든 일의 해결에는 그 적당한 때가 있는 것이오. 하여간 내 당신의 갸륵한 뜻을 명심해 두리다』23)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비록 그것이 이승만의 구술을 토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윌슨이 이때에 美國 大統領이었다고 적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이 과장된 것이다. 徐廷柱는 윌슨이 李承晩에게 지방 순회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여러 사람을 소개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덧붙였다.

『이승만씨! 당신은 나 한 사람의 도장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미국 국민들의 마음의 도장을 모두 받도록 하시오』


볼티모어에서 열린 民主黨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이튿날 李承晩은 제시 윌슨을 다시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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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노스필드에서 1주일 동안 머문 다음 매사추세츠州의 스프링필드로 갔다. 그곳의 YMCA 트레이닝 스쿨에 와 있는 조남복을 잠시 만나본 다음, 뉴욕을 거쳐 일요일인 6월30일 아침에 뉴저지州의 애즈베리파크(Asbury Park)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는 시거트 별장으로 다시 윌슨 가족을 방문했다.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치열한 접전으로 말미암아 끝나지 않고 있는 주말 저녁을 윌슨 가족이 李承晩과 같이 지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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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 지명대회는 7월 초까지 투표가 계속되다가 46번째 투표 끝에 윌슨으로 결정되었는데, 李承晩은 지명대회 동안 윌슨과 같이 있었다.24) 그것은 李承晩이 美國式民主政治의 극적인 장면을 직접 목격한 값진 체험이었다.


李承晩은 윌슨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지명대회가 있고 난 뒤에 李承晩은 또다시 시거트를 찾아갔다. 그는 7월6일 아침에 프린스턴을 떠나 오전 11시30분에 뉴저지州의 벨머(Belmar)에 도착했다. 그리고 시거트에서 또다시 윌슨 후보의 딸 제시 윌슨을 만났다. 이러한 윌슨 가족과의 교분은 이때 이후로 李承晩의 정치 행로에 압도적인 권위를 지닌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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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


....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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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은 40대 중반에 이른 李承晩과 金九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李承晩은 3·1 운동 이후에 국내외에서 선포되거나 논의되던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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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外地의 인심이 李承晩에게 瀑注해』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는 현순의 표현대로 이때는 이미 李承晩은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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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31. 임시정부 국무총리 李承晩








1919.6.


[ ..... 스펜서 의원은 ..... 국무장관이 상원에 보고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 ......... ]


1919.10.


[ .... 상원과 하원에 각각 한국문제에 대한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 ]



[ ...... 한국친우회는 .... 1만 명 이상이라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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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의회에서 韓國 문제 논의



3·1 운동 이후의 한국사태와 특히 미국인 선교사들과 관련된 일본의 부당한 처사 등에 대해 미국 언론의 관심이 높아지고, 李承晩 등의 미국 의원들을 상대로 한 청원운동이 강화되면서 미국의회에서 한국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로 베르사유 조약에 포함된 국제연맹규약에 반대하는 공화당 의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심의를 하면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조약에 포함된 국제연맹규약 제10조였다. 그것은 연맹 가맹국들은 각 회원국의 영토보전과 현재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고 외부의 침략에 대하여 공동으로 대응할 의무를 갖도록 규정한 것이었다. 이 제10조는 국제연맹규약의 핵심 조항이었다.4)



공화당 의원들은 이 제10조가 열강의 기존 식민지 지배를 보장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미국의 외교전통인 먼로주의(Monroe Doctrine)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윌슨 자신이 제창한 민족자결의 원칙에도 부합되지 않는다면서 반대했다. 그러면서 반대의 논거의 하나로 한국문제가 거론된 것이었다. 미국이 국제연맹 가맹국이 되면 일본의 폭압적인 한국지배를 보장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회의 움직임은 이 무렵에 미국에서 일고 있던 국제연맹 및 베르사유 조약 반대운동과 고립주의로의 복귀경향, 반일무드 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서는 윌슨을 지지했던 자유주의자들도 윌슨의 이상주의가 패배하고 말았다면서 반대하고 있었다.5)



李承晩은 윌슨 대통령에게 마지막 전보를 보낸 6월27일에 美 국무장관 대리 포크(Frank L. Polk)에게도 편지를 보내어 1882년의 朝美修好條約을 상기시키고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촉구하는 한편, 법률고문 돌프(Fred A. Dolph)로 하여금 미주리州 상원의원 스펜서(Seldon P. Sepncer)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게 했다. 돌프는 한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공화국이 선포된 것과 현재 한국인들이 일본인들로부터 부당하게 억압받고 있는 사실을 설명하고, 미국이 조미수호조약에 따라 한국인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스펜서 의원은 돌프의 편지 내용을 근거로 하여, 사흘 뒤인 6월30일에 한국의 현상황과 관련하여 미국이 조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제1조)에 의거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하여 국무장관이 상원에 보고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것은 한국문제가 미국의회에 정식으로 상정된 최초의 일이었다. 李承晩은 1905년의 포츠머스 강화회의 때에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상대로 벌였던 외교활동이 무위로 돌아간 이래로 거듭해 온 자신의 청원외교 활동을 회상하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을 것이다.



선교사들의 보고서 「한국사정」을 의사록에 수록



한 달 뒤인 7월4일에 포인덱스터(Miles Poindexter) 상원의원은 뉴욕州 로체스터에서 행한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국제연맹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로 연맹이 한국인을 구제하기는커녕 3,000만의 중국인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는 협정을 일본과 체결하는 데 급급하다고 비난했다. 이 연설은 7월15일의 상원의사록에 수록되었다.7)


또한 7월15일에는 네브래스카州 출신 노리스(George W. Norris) 상원의원이 강화회의가 중국 山東半島의 독일조차지에 대한 일본의 요구를 수용한 사실을 비난하면서, 일본의 한국통치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3·1 운동 진압과정에서 일본이 자행한 잔혹행위를 提岩里(제암리)사건 등의 구체적인 보기를 들어 비판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일본의 만행을 보도한 7월13일자 「뉴욕 타임스」지의 기사를 의사록에 수록하도록 했다.8)

이틀 뒤인 7월17일에는 매코믹(Malcom C. McCormick) 상원의원이 미국기독교회 연합평의회 동양관계위원회에서 발행한 「한국사정(The Korea Situation)」 전문을 의사록에 수록할 것을 요구하여 받아들여졌다.9)

「한국사정」은 3·1 운동 이후에 한국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들이 보내온 각종 보고서를 간추려서 작성한 125쪽짜리 팸플릿이었다.10)


매코믹에 이어 공화당의 거물인 보라(Willian E. Borah) 의원은 국제연맹의 결성에 관여한 사람들이 이집트, 아일랜드, 중국의 주장에 귀를 귀울이지 않고 한국을 어느 탐욕스러운 나라(곧 일본)가 기다리고 있는 도살장으로 돌려보냈다고 역설했다.11)



노리스 의원은 또 한 달 뒤인 8월16일에 헐버트(Homer B. Hulbert)를 의회에 불러 증언하게 했다. 헐버트는 1905년에 을사조약이 강제될 때에 高宗이 자기를 미국에 보내어 미국 정부와 교섭하게 했던 사실 등을 진술하면서 일본의 한국 통치의 부당성을 역설했다.12)


노리스 의원은 뒤에 워싱턴 한국친우회의 부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李承晩이 워싱턴에 대한민국 특파 구미주찰위원부, 통칭 구미위원부를 개설하는 것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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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위원부의 설치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대회가 8월30일에 워싱턴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李承晩과 金奎植의 명의로 된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 선언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래 서명자는 2천만 한국민족을 대표하여 행동하는 바, 일본이 (한국인을) 무력으로 속박하며 노예 만드는 것을 항의하며, 한국의 독립선언서와 정부의 성명서를 빙거하여 또는 우리 국가와 민족이 소위 일본연방의 한 자치국으로는 발전할 수도 없고, 더구나 일본 귀족정치와 군인정치 밑에 우리 민족이 한 분자가 되어 가지고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까닭으로, 우리는 한국 민족의 절대적 독립과 완전한 자유를 기록한 뜻으로 성명하노라. …〉22)

「新韓民報」 1919년 9월2일자, 「한국은 일본의 속박을 벗어――우리 집정관 총재의 선언」.



그런데 선언서에 서명을 마친 李承晩이 선언서를 배부할 곳으로 미국 국무부, 상하원의 외교위원회, 상하원 의장, 상하원 의원, 워싱턴 주재 외국공관, 파리평화회의 대표들, 연합통신(AP)과 각 외국신문 및 잡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평소에 얼마나 홍보활동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23)

이 선언서에는 3·1 운동 때에 선포한 독립선언서와 임시헌법이 포함돼 있었다고 했는데,24) 이때의 임시헌법이란 아마 한성정부의 임시약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일본 정보기관이 이때의 李承晩의 선언서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것은 일본의 자치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것으로 전해진다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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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건립을 위해 미국의 자본이 필요하다』



구미위원부의 설립작업을 마친 李承晩은 워싱턴의 업무는 金奎植에게 맡기고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활동에 온 정력을 쏟았다. 그의 「일지」에 보면, 한 지방의 교회와 학교에서 강연을 한 다음 밤차로 이동하여 다른 지방의 로터리클럽 오찬모임에서 강연한 것 같은 경우도 있었다.

강연회에는 徐載弼이나 鄭翰景, 그리고 구미위원부의 선전원으로 위촉된 헐버트와 벡(S. A. Beck)이 같이 참석하기도 했다. 헐버트와 벡에게는 월 200달러의 사례비가 지급되었다.

강연회의 순서나 강연내용은 집회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달랐으나 대체로 비슷했다. 그 지방의 유학생들이나 교민들이 교회나 학교를 통하여 청중들을 모으면 李承晩이나 그밖의 연사들이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통치와 한국의 실정을 알리는 강연을 한 뒤에, 그 자리에서 동조자들을 모아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미국정부와 의회에 탄원서를 보내고, 지역언론에 한국문제에 관한 기사를 내게 하는 것이었다.28)

李承晩의 강연내용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최근의 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무엇을 위한 싸움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전제정치에 항거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이제 2천만 한국인은 민주주의와 기독교의 원칙들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

우리 한국인은 미국의 그것과 같은 원칙들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원칙들을 지지합니다. 우리는 한국의 건립을 위하여 미국의 자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그것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주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의 문호개방에 찬성합니다. 반대로 일본은 대전쟁(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던 제국주의 방식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한국과 체결한 조약에 따르면 여러분은 외부의 침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켜주도록 되어 있습니다…』29)


이것은 1920년 1월11일 오후에 매사추세츠州 보스턴의 한 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 연설이었다.

이렇게 하여 결성된 한국친우회는, 필라델피아 한국친우회 회장 톰킨스 목사의 말에 따르면, 1921년 6월까지 미국 내 21개 도시에 2만5,000명의 회원을 확보하게 되었다.30)

일본경찰은 한국친우회의 회원수가 3,000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했는데,31) 1920년의 친우회 광고에 회원수가 1만 명 이상이라고 한 것을 보면,32) 친우회 회원수는 1만 명쯤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33) 하와이동포들을 포함하여 재미동포들의 총수가 1만 명이 채 되지 않던 상황에서 각 지역의 정치가, 종교지도자, 실업가 등의 유지들로 구성된 친우회 회원수가 1만 명에 이르렀다는 것만으로도 괄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하여 확보한 미국인 인맥은 해방 이후까지도 李承晩의 큰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한국친우회는 1920년 10월26일에 영국에서도 결성되었는데, 창립멤버는 국회의원 17명을 포함하여 학자, 신문기자, 목사 등 62명이었다.34)


美國 의회에 韓國결의안이 제출돼



李承晩은 친우회 회원들의 협조도 얻고 하여 미국의원들을 상대로 한 홍보와 청원활동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주 한인단체와 상해 임시정부에 전보를 쳐서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의원들에게 감사하다는 전보를 치게 했다. 심지어 파리에서 뉴욕에 막 도착한 金奎植에게까지 그러한 전보를 치라고 타전하고 있다.35) 그것은 동포사회에 그 자신의 권위를 높여주는 일이 되기도 했다.



李承晩은 9월에 돌프로 하여금 「대한민국을 위한 진술과 적요(Statement and Brief for the Republic of Korea)」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상원에 제출하게 했다. 이 문서는 상원의사록에 수록된 뒤에 외교위원회로 회부되었다.36)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상원과 하원에 각각 한국문제에 대한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10월1일에는 펠런(James D. Phelan) 상원의원이 〈미합중국 상원은 스스로 선택한 정부를 갖고자 하는 한국인의 열망에 대하여 동정의 뜻을 표한다〉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본회의에서 낭독된 뒤에 외교위원회에 회부되었다.37)


또 10월9일에는 프랜스(Joseph I. France) 상원의원이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반대연설을 하면서, 그 이유로 한국에 대한 부당성을 거론했다.38) 그의 발언에는 4월의 필라델피아 한인대회(제1차한인회의)에서 채택된 결의문이 첨부되었다. 10월13일에 노리스 의원이 다시 국제연맹규약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한국문제에 관해 긴 연설을 했다.39)


또한 10월24일에 이번에는 하원에서 메이슨(William E. Mason) 의원이 펠런 상원의원의 결의안과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제출했다.40)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에 대한 표결은 11월19일에 있었다. 유보조건 없는 결의는 찬성 38 對 반대 53, 러지(Henry Cabot Lodge) 의원이 제안한 유보조건부 결의는 첫 번째 투표에서 찬성 39 對 반대 51, 두 번째 투표에서 찬성 41 對 반대 51로 모두 부결되었다. 베르사유 조약 비준문제에 대한 상원의 심의는 이듬해 2월에 재개되는데, 이때에 다시 한국문제가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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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3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대통령 李承晩, 경무국장 金九

孫 世 一







1920.3.



[ ...... 미국 상원에서 베르사유조약의 비준문제 ..... 韓國문제 유보조건안 .......

...... 한국안은 34대 46(기권 16)으로 부결 ........ ]





[ ....... 합중국 상의원들의 신의와 인도 정의의 주장을 조금도 의문할 여지가 없는 동시에,


이번 실패는 실상은 실패가 아니요 승리이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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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美國 上院에서 韓國問題 다시 擧論


李承晩은 1920년에 접어들어서도 강연여행에 주력했다. 1월10일부터 1주일 동안 그는 林炳稷과 함께 동부지방을 순회하면서 대학과 교회 등에서 강연했다. 그러나 李承晩은 2월 한 달은 워싱턴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미국 상원에서 베르사유조약의 비준문제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비준을 전제로 15가지가 넘는 유보조건이 제의되어 토론이 계속되었는데, 한국문제도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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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黨의 토머스 議員이 韓國문제 유보조건안 제의



미국 상원에서 한국문제가 다시 거론된 것은 3월16일부터였다. 이번에는 공화당 의원들이 아니라 민주당 소속의 토머스(Charles S. Thomas) 의원이 앞장섰다. 그는 콜로라도州의 지사를 지내고 같은 콜로라도州에서 상원의원으로 선출된 사람이었다.


이날의 회의에서 오언(Robert L. Owen) 의원은 이집트의 독립문제와 관련된 유보조건안을 제출했고, 이어 쉴즈(John K. Shields) 의원이 아일랜드의 독립문제와 관련된 유보조건안을 제출했다. 그러자 토머스 의원이 쉴즈 의원의 유보조건안에 한국독립문제를 추가한 수정안을 제출했다. 이러한 제안들을 놓고 장황한 논란이 계속된 끝에 세 가지 제안을 통합한 다음과 같은 수정안이 다시 제출되었다.


〈합중국은 조약 제6항에 따른 보호는 단지 전쟁기간 동안 이집트의 영토와 독립의 보전을 위한 전쟁조치였다고 이해한다.

합중국은 나아가 국제연맹조약의 근본정신인 모든 민족의 자결과 평등의 대원칙을 실행하기 위하여 영국과 일본이 각각 아일랜드 공화국과 한국 구왕국(the ancient kingdom of Korea)의 존재와 정치적 독립을 즉시 인정하고 아일랜드와 한국이 다른 독립 주권국들과 동등한 대표권을 갖는 국제연맹 회원국이 되는 데 동의할 것으로 이해한다.〉2)



이 유보조건안에서 한국의 존재가 「대한민국」이 아닌 「한국 구왕국」으로 되어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토머스 의원이 그의 주장의 근거로 강조한 것이 1882년에 조선왕국과 맺은 한미수호통상조약에 따른 미국의 책임문제였기 때문이다.


이 유보조건안의 표결은 연기되었다. 이틀 뒤에 게리(Peter G. Gerry) 의원은 아일랜드 독립에 관한 유보조건안만을 분리하여 다시 제출했다. 그러자 토머스 의원은 그 유보안에 〈또한 합중국은, 역시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한국인민의 울분과 그들의 구왕국을 회복하고 일본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에 대한 동정을 표명하며, 나아가 그것이 달성될 때에는 즉시 국제연맹의 회원국으로 가입되어야 한다는 것을 표명한다〉는 내용을 첨부한 수정안을 제의했다.3)




『「舊王國 회복 지지」는 美國 議會에 처음있는 일』



이 수정안을 놓고 의원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전개되었다. 한 의원은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일본의 압제(the tyranny of Japan)로부터 벗어난다〉는 구절을 삭제하고 다만 신의적으로 동정을 표시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다른 한 의원은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라는 문구의 삭제를 요구했다. 수정안에 반대하는 월쉬(Tomas J. Walsh) 의원은 토머스 의원의 수정안에는 아일랜드의 독립문제와 관련된 유보조건안을 부결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 이 수정안의 〈구왕국을 회복한다〉는 용어에서 보듯이 군주제 정부의 부활에 찬성의사를 밝히는 것은 미국의 의회 및 어떤 의회기관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라고 비꼬았다. 토머스 의원은 이 모든 수정요구를 받아들였다.4)




이러한 논란이 있은 뒤에 아일랜드와 한국에 대한 유보조건안은 각각 표결에 부쳐졌다. 아일랜드안은 38대 36(기권 22)으로 가결되었으나, 한국안은 34대 46(기권 16)으로 부결되었다.5)

아일랜드안이 가결된 데에는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시기에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인구는 3000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



미국 상원은 3월19일에 다시 베르사유조약 비준에 대한 표결을 실시했다. 결과는 찬성 49, 반대 35(기권 12)로 찬성표가 반대표보다 많았으나, 비준에 필요한 3분의 2에 미치지 못하여 부결되었다.7) 이렇게 하여 국제연맹은 미국이 불참하고 또한 소비에트 러시아와 패전국 독일이 배제된 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4개국을 중심으로 설립되어 운영되게 되었다. 그것은 세계평화보장기구의 창설이라는 윌슨 대통령의 꿈이 실현되는 첫 출발이기는 했으나 윌슨 자신의 정치생명에는 치명적인 패배였다.



상원에서 비준이 거부되자 윌슨은 국민투표를 검토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행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는 1920년 가을의 대통령 선거를 그 대신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윌슨의 이상주의, 국제주의에 환멸을 느낀 미국 국민은 윌슨의 후임 후보로 지명된 민주당 소속의 오하이오州 지사 콕스(James M. Cox) 대신에 그보다 인물이 떨어지는 공화당의 하딩(Warren G. Harding)을 선택했다. 실의에 빠진 윌슨은 마침내 21년의 연두교서에서 국제연맹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선거 유세 때의 과로로 중병을 앓게 된 윌슨은 1924년 2월3일에 숨을 거둘 때까지 폐인과 같은 생활을 보냈다. 그에게는 1920년에 받은 노벨평화상이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프린스턴 대학 시절의 윌슨과의 교분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내세워 왔던 李承晩은 그러나 만년의 윌슨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대통령 재임 때의 윌슨의 냉대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추억 어린 덴버市 방문



미국 상원에서 한국독립과 관련된 유보조건안이 토의되는 것을 보고 李承晩은 토머스 의원의 출신지인 콜로라도州의 덴버로 떠났다. 한국친우회 결성을 위한 강연여행이었다. 3월17일 새벽에 워싱턴을 떠난 그는 시카고를 거쳐 이틀 뒤인 19일 아침에 네브래스카 역에 도착했다. 鄭翰景이 마중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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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실패는 실패가 아니요 승리이니…』



李承晩이 미국 상원의 한국문제에 관한 표결을 눈앞에 두고 콜로라도州를 방문한 데에는 그나름의 계략이 있었다. 그것은 토머스 의원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인가를 그곳 미국 시민들이나 동포들에게 주지시키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활성적인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 자신의 희망적인 전망과 과장된 선전에도 불구하고 미국 상원이 한국독립과 관련된 유보조건안을 채택하리라고는 아마 李承晩 자신도 확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한국조항이 가결되지는 못했더라도 한국의 독립문제를 두고 미국의 도의적 책임이나 조약상의 의무와 관련하여 미국 의회에서 열띤 토론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그와 구미위원부의 외교적 노력의 큰 성과였다. 그러한 사정은 李承晩에게 비판적 입장이었던「新韓民報」의 다음과 같은 「논설」로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에 향하여 막대한 동정을 주는 합중국 상의원들의 신의와 인도 정의의 주장을 조금도 의문할 여지가 없는 동시에, 이번 실패는 실상은 실패가 아니요 승리이니, 곧 미구에 합중국 상의원은 한국문제를 따로 제출하고 따로 토의한 후에 일반 한국동정 상의원들의 투표로 단독의 보류안을 성립할 기회를 예비함인 까닭이라. …


이번 첨가 개의안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번 더 확실히 아는 바는, 곧 합중국 상의원의 인도주장이 참 굉장한 일이라. … 만일 우리가 힘이 있거나 기회가 있어 우리 독립을 찾으면 온 세계 여러 나라 중 먼저 우리 독립을 승인할 나라는 곧 합중국이라.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독립은 첫째는 우리에게 있다 하며, 우리 독립을 위한 외국의 동정은 벌써 우리 외교대표들의 힘과 인도와 정의를 주장하는 외국, 특별히 합중국을 우리는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감사하고, 우리의 실력 예비와 우리의 외교 계속에 진력하여, 이 다음 첫 번 오는 독립전쟁 기회를 잃지 말 일이로다.〉10)



또한 上海의 「獨立新聞」도 논설에서 〈회상하라, 國恥(국치) 10년 이래로 언제 한국문제가 세계의 여론에 오르내렸더뇨. … 한국과 한족이라는 명칭은 다만 사학자의 필기장에나 희미히 기억된 명칭에 불과하였도다〉라고 말하고, 미국 상원에서 한국문제가 논의된 것은 3·1운동 이래 계속되어 온 우리의 독립운동이 전 민족적 운동임을 세계가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위대한 사업」이라고 평가하면서, 〈동포여, 이번 미국 상원의 한국독립안을 경시치 말지어다〉라고 강조했다.11)




國際聯盟에는 기대 안 해


한국유보조항을 찬성한 34표 가운데에서 23표는 공화당 의원들에 의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맹렬히 반대한 외교위원장 로지(Henry C. Rodge)를 비롯하여 보라(William Borah), 존슨(Hiram W. Johnson) 등 강경파 고립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李承晩과 구미위원부는 이처럼 윌슨에 반대하는 상원의원들의 협조를 얻어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한 결의안을 성립시키려 했던 것이다.12)



李承晩은 한국의 독립문제가 미국 의회에서 거론되는 일에 정력을 쏟으면서도, 새로 발족하는 국제연맹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평화보장기구로 발족하는 국제기구이기는 하나, 미국이 참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상해 임시정부가 처음에 국제연맹에 대하여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앞에서 본 대로, 연맹의 출범을 앞두고 제일 먼저 착수한 작업이 연맹에 제출할 한국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또한 1920년부터 실시하기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정방침」에도 〈국제연맹회에 대하야 대사를 파견하며, 독립승인을 요구하며, 또한 한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함을 요구함〉이라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13)


미국 상원에서 베르사유조약 비준이 거부되고 나자 미국 의회에서의 한국문제논의도 일단 끝이 났다. 구미위원부는 법률고문 돌프로 하여금 3·1운동 이후에 미국에서 진행된 李承晩과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정리한 「업무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 「보고서」는 1920년 9월15일자로 위원장 金奎植에게 제출되었는데, 거기에는 국제연맹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국제연맹에 관하여는 본인은 이를 죽은 기관이라고 판단합니다. 연맹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본인의 판단으로는 美國은 결코 연맹에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연맹은 근근이 유지되다가 자멸할 뿐입니다.〉14)

돌프의 「보고서」의 이러한 언급은 李承晩을 포함한 구미위원부 인사들의 국제연맹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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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3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金九, 공산주의를 거부








1921.1. 「獨立新聞」


[ ..... 국민아, 우리 임시대통령 李承晩 각하가 上海에 오시도다. .........
......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그의 호령 밑에 바치자. ....... ]



孫世一의 비교 評傳 (3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임시대통령 각하, 上海에 오시도다 』


孫世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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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월1일자 「獨立新聞」이 李承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은 그의 지도력에 대한 임시정부 인사들의 관심과 기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국민아, 우리 임시대통령 李承晩 각하가 上海에 오시도다. 우리는 무슨 말로 우리의 元首를 환영하랴. 우리 民國의 첫 원수를 우리 故疆(고강)의 서울에서 맞지 못하는 비애를 무슨 말로 표하랴.


국민아, 통곡을 말고 희망으로 이 결심을 하자. 우리의 원수,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대통령을 따라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기에 일신하자. 합력하자. 그는 우리의 大元帥(대원수)시니 獨立軍人되는 국민아, 우리는 그의 지도에 순종하자. 그의 명령에 복종하자. 죽든지 살든지, 괴롭거나 즐겁거나,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그의 호령 밑에 바치자. 진실로 우리 대통령을 환영할 때에 우리가 그에게 바칠 것은 화관도 아니오 頌歌(송가)도 아니라 오직 우리의 생명이니, 우리의 생명이 가진 존경과 지식과 기능과 심성을 다 그에게 드리고, 마침내 그가 「나오너라」하고 戰場으로 부르실 때에 일제히 「네」 하고 나서자. 민국 3년 원단에 국민아, 일심으로 「우리 대통령 李承晩각하 만세」를 높이 부르자.〉32)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당면한 위기 국면에 대한 불안감에서 기인하는 자기최면적인 환호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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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李承晩과 이동휘의 논쟁과 관련하여 金九는 뒷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격렬해졌다. 심지어 정부의 국무원 중에도 대통령과 각부 총장들 간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로 각기 옳다는 주장을 좇아 갈라졌다.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 이로 인해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 불일치로 때때로 논쟁이 일어나 國是(국시)가 서지 못하고, 정부 내부에 괴이한 현상이 거듭 일어났다.〉37)

임시정부의 보위를 책임지고 있는 金九의 고충이 어떠했는지가 느껴지는 술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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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제를 위원회제로 바꾸자는 이동휘의 제안에 대해서는 李承晩은 물론 안창호도 반대했다. 그러자 이동휘는 사임을 청원했다. 李承晩과 각원들이 극력 만류하였으나 이동휘는 1월24일에 〈나의 쇄신의안을 정무회의에 제출하였으나, 한마디 심의도 없이 구겨 없앴기 때문에 나의 실력으로서는 이 난관을 타개하기 어렵다〉41)는 요지의 선포문을 발표하고 광동으로 가버렸다. 내무총장 이동녕이 그를 대신하여 1월25일에 국무총리 대리 겸임으로 임명되었다.


이동휘의 사임은 곧 한인공산당의 임시정부 탈퇴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동휘는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친미 우익그룹에 지도적 역할을 계속 맡겨 두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라고 판단하여 임시정부에서 탈퇴했다고 적고 있다.42) 그리고 한인공산당의 이러한 결정은 「대중의 전적인 신뢰를 받는 최고혁명기관」을 다시 조직하는 계획과 관련되어 있었다.43) 그것은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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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



[ ..... 이동휘가 ....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 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

.... 그러니 ....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


.....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 "안 되지요" ........ ]




[ .....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 ......

.....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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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백범은 ´임시정부´를 이끄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나도 괴로움을 당한 나머지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 것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백범의 생각은 <백범일지>(서울; 범우사, 2002.8.5, 3판3쇄)의 관련 대목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인용이다.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 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 이 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 위대참령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하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 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 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말)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大不可)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갔다.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 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 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돌아와 공산당 무리들에게는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 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安秉贊)·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은 김준연(金俊淵) 등의 엠엘(ML)당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두 형제와 유자명(柳子明)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 개최된 국민대회라는 것은 참으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 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 들었는 데. 그 중에서 일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크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金奎植)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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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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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革命이란, 네가 살아있으면 내가 죽는다, 네가 이기면 내가 진다고 하는 무자비한...물리적 대결전을 요구 한다」고 로동신문(2000년 12월 22일자「正論 白頭의 銃(총)의 혈통」는 썼다.


죽일 것인가 죽임을 당할 것인가, 어느 쪽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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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2.



[ ....... 조직의 규칙이 뭐기에 살인명령을 무조건 받는단 말인가.

나는 이미 자연인이 아니라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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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黨조직으로부터 나와 李, 金 셋에게 「대동청년단 대송면 단장을 제거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黨命을 수행하기 위해 남성동에 있는 단장 집의 담을 넘었다. 나는 마당에서 망을 보고 둘은 내실에 침입하여 일을 저질렀다.

셋이 함께 도주하여 송정동의 가톨릭수녀원 천장 속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나는 징역 8년을 선고받고 김천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 전쟁을 맞았다』



2·7 투쟁은 4·3 제주도 폭동으로 어어졌고, 5월14일 북한은 남한으로의 송전을 중단했다. 그리고 10월19일 국군 제14연대에 의한 여수·순천반란이 일어났다.


―조직의 규칙이 뭐기에 살인명령을 무조건 받는단 말인가.

『나는 이미 자연인이 아니라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다. 당 이외의 세계는 일단 파괴해 놓고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은 다음에 다시 건설하면 된다는 신념을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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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4. 김좌진



[ ...... 오직 우리의 사모하는 각하의 지도하심만 빌고 기대 ......


..... 오직 우리는 각하의 지도를 받아 사업의 전도를 진행코저 하오니, 통량하신 후에 다음 조항의 선후판법을 明敎하오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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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은 취임사에서 천명한 대로 李?(이탁), 金東三, 吳東振, 李裕弼, 尹世葺(윤세용), 玄天默, 尹秉庸, 金佐鎭, 曹成煥의 9명을 국무원으로 추천하여 10월10일과 12일의 임시의정원에서 가결되었다.11)


이상룡이 추천한 국무원 9명은 상해에 있던 이유필 이외에는 모두 이 시기의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세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와 新民府와 參議府의 지도자들이었다. 이탁은 정의부의 중앙행정위원회 위원장이었고, 김동삼, 오동진, 윤병용은 모두 중앙행정위원이면서 외무위원장, 생계위원장, 교통위원장을 각각 겸하고 있었다.12) 유명한 청산리전투를 지휘했던 김좌진과 조성환, 현천묵은 1925년 3월에 북만주지역에서 새로 조직된 신민부의 간부들이었다. 김좌진과 조성환은 중앙집행위원으로서 군사부위원장겸 총사령관과 외교부위원장을 각각 겸임하고 있었다. 현천묵은 사법부에 해당하는 檢査院 원장이었다.13) 대한독립단, 한족회, 大韓統義府 등의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했던 윤세용은 이때는 압록강 대안의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참의부의 참의장이었다.14)



金佐鎭 등은 李承晩에게 忠誠편지 보내


그러나 이러한 인선은 당사자들의 동의를 거쳐서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새로 선임된 국무원들 가운데 이유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취임하지 않았다. 국무원에 선임된 정의부 간부들이 부임하지 않은 것은 중앙의회가 결의한 4개항의 선결조건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상룡이 독단으로 국무령에 취임한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신민부 간부들이 국무원 취임을 거부한 데에는 더욱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개조파그룹이 취한 일련의 조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신민부 간부들은 1921년 이래로 白純을 통하여 李承晩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5)


그러한 사정은 신민부 창설 1주년이 되는 1926년 4월15일자로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金爀과 김좌진, 朴性儁(박성준) 두 위원이 연명으로 李承晩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해외 성상에 각하의 분투 노력하심은 우리 일반이 감읍하는 바외다. 저희들은 경신참변 이후에 북쪽으로 가서 북만주 일우에서 옮겨 다니던 중 작년 3월경에 北路軍政署, 義軍府, 光復團, 獨立團 및 내지 각 단체와 북만주 각 지방 주민대표들과 함께 통일회를 촉성한 결과 신민부를 조직한 이래 1년 동안 軍民行政을 실시하고 있는 바, 지금은 차츰 정리되어 기반이 점점 확고해지고 있어서 다행이오나, 어찌 이것으로써 대업의 기본이라 하오리까.


3·1운동이 발생한 이후로 성립된 임시정부는 우리 운동의 최고기관이 되어 절대로 대동적 통치의 본위가 되지 않고는 밖으로 국제의 동정을 구하며 안으로 군중의 정신을 全一케 하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견지에서, 연래로 다소의 노력과 고통을 겪지 아니함은 아니오나, 시국의 복잡은 갈수록 더욱 심하야 수습책이 큰 난관에 이르렀으니, 우러러 바라건대 각하는 東風西潮(동풍서조)가 점점 박두한 위기를 당한 우리 민족의 전도를 장차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저희들이 연래로 荒漠(황막)한 구석에 있으면서 오직 우리의 사모하는 각하의 지도하심만 빌고 기대하거늘 불행히 야욕자의 간사한 농간과 私利를 도모하는 자의 편견으로 우리 운동의 전도를 가로막으며 사업의 발전을 저지케 함은 참으로 통탄스러운 바이 올시다. 그러나 최후의 노력은 우리의 천직이므로 오직 우리는 각하의 지도를 받아 사업의 전도를 진행코저 하오니, 통량하신 후에 다음 조항의 선후판법을 明敎하오서 우리의 목적을 속히 도모케 하심을 바라나이다.〉16)



李承晩이 임시의정원에서 탄핵 면직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李承晩을 임시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면서 이들은 개조파그룹을 독립운동의 방해세력으로 규정하고 「선후판법」으로 1) 내정, 2) 외교, 3) 무력준비, 4) 경제문제의 네 가지 사항에 관한 李承晩의 지도를 요망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이상룡의 조각작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상룡을 추대하여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려고 했던 개조파그룹은 낭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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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4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內務總長 사임 2년 만에 國務領으로 선출되다











1933 모스크바



[ ..... 미국으로 가게 하여 달라 .......

...... 길가에서 기진하여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보았는데 이렇게 굶어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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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정치이념이 온축된 《일민주의》의 내용은 4월 20일 저녁에 ‘일민주의 정신과 민족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서울중앙방송국의 방송을 통하여 발표되었다. 다음과 같은 서두는 이승만의 일민주의가 절박한 공산주의 비판 이론으로 구상되었음을 말해 준다.



“세계 모든 나라의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자는 현재 생존의 위기를 당하지 않은 나라나 민족이 없는 터이니, 이 이유는 즉 공산당 문제입니다. 공산주의는 본래 빈천한 사람들을 부귀한 사람들과 동등으로 살게 만들자는 주의라 할 것인데, 이 주의가 러시아에서 크게 발전된 이유는 러시아 제정(帝政)시대에 전제정치가 세계에서 가장 심하였던 것이므로 맑스주의를 흡수한 레닌(Vladimir I. Lenin)의 대혁명이 성공되어 러시아 황실을 다 전멸시켜 세계에 참혹한 공산혁명의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



이승만은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경험했던 일을 보기로 들면서 소련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1933년에 국제연맹 회의가 열리는 제네바에 갔던 이승만이 시베리아의 한인지도자들을 만날 목적으로 모스크바까지 갔다가 입국을 거부당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月刊朝鮮》2006년 8월호, <레만湖에서 만난 프란체스카> 참조).


모스크바 방문경험 보기로 蘇聯의 실상 설명



“빈민들은 부민(富民)을 타도해야 산다, 무식자는 유식계급을 몰락시켜야 산다, 상놈은 양반을 없애야 산다, 노동자는 재벌가를 정복해야 산다, 농민은 지주를 박멸하여야 산다, 이러한 것으로 언론과 서류를 세계에 전파하고 세포조직을 아니 둔 곳이 없게 되었으니, 영미 등 부강한 나라나 폴란드와 헝가리 같은 빈약한 나라에까지 그 세력이 뿌리를 박게 되어, 사람마다 생각하기를 러시아공산혁명으로 나라도 부강하고 백성들은 풍족하게 자유로 살 수 있는 극락세계로 알 만큼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러시아의 민중 같이 빈곤하고 압박받는 인민은 더 없을 것이니, 내가 13년 전 모스크바에 있을 때에 여관 사무원인 독일인이 나의 방에 들어와서 비밀히 말하기를 매달 미화 8원씩 받아 가지고 일을 보라 하니 살 수 없는 것을 간신히 지낸다 하며 자기의 길을 열어서 미국으로 가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들었으며,


기차에서 미국인 몇 사람이 처음에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가 기차가 러시아 국경을 넘어온 뒤에는 이 사람들이 비로소 숨을 쉬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러시아 내지에 있던 곳을 몰래 들어갔다가 길가에서 기진하여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보았는데 이렇게 굶어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니, 이것이 오늘 공산당 사람들이 자랑하는 러시아 극락지의 실정입니다. …


거짓 선전에 빠져서 남의 부속품인 노예가 되거나 공산당과 싸워서 민주국의 자유 복락을 누리게 되거나 이 두가지 중 한 가지를 택해야만 될 것이니, 이외에 다른 것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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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109.주한미군의 철수와 국회 프락치 사건
2023-09-27 22:35:54
211.xxx.xxx.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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