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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6)
이승만 2023-09-27 22:30:34 | 조회: 97
[......농민은 농작물의 55% 내지 60%를 세금, 기타 부과금으로서......


..... 상시 감시..... 생산종목, 생산량 내지 그들이 할 바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를........]



미국무부, 북한 토지개혁 실태조사 발표



게재지명 부산일보

게재일자 1951년 03월 31일



[워싱턴 29일발 USIS] 미국무성은 최근 북한의 토지개혁에 관한 실태조사를 완료하였는데 28일 동 省은 소위 북한의 공산주의 토지개혁은 일종의 완전한 기만으로서 북한인민을 토지의 노예 내지 무자비한 관료정치의 희생물로 하였다고 요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 공산주의 치하 토지를 배당받은 농민은 농작물의 55% 내지 60%를 세금, 기타 부과금으로서 국가에 바쳤으며 그들은 상시 감시의 관계관 이외에 시·군·도의 관리소배들로부터 생산종목, 생산량 내지 그들이 할 바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를 받았다.

이 결과 그들은 작년 말에 있어 生産推持를 위한 이외에 전보다 더욱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그 보수로서는 공산주의 경제의 방직공장으로부터 배당되는 면제품 구입에도 불충분하였다.



1. 공산주의 정권은 5년 간에 있어 신 토지소유자로부터 그들의 독립성을 여지없이 빼앗고 그들은 국가 계획경제란 기계의 예속물화 하는데 간단없는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1950년에는 농업조치로서 집단농장의 실현도 未久에 근박하고 있었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민의 경제상태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토지의 기술적 소유제도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하 완전한 기만으로 되고 말 것이며 전 농민계급은 농업무산계급으로 하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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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권이 토지를 분배한 후 新 토지소유자들은 토지는 영구히 공여한 것이니 매매 대차, 저당은 이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한 증명서를 받았다. 즉 그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는 그 사용에 국한되었으며 그 사용료로서 25%의 현물세를 지불하였다.


1947년에 세율은 논 27%, 밭 23%, 沓 10%로 작정되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평가 때문에 실질적으로 규정율을 초과하는 토지세 이외에 농민들은 또한 특별세 부과금 그리고 소위 자진헌납이라는 重荷 아래 신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 □□을 취□하는 외에 공산주의 정권은 농민들에게 지방건설 내지 광산작업을 무보수로 강요하였으며 매 호구는 1 내지 2개월 간 자진노동을 제공하였고 18~55세의 전 농민에는 1년에 1회씩 20일간의 강제노동이 부과되었다.


(1) 북한 농민들은 항상 관공서 숫자와는 반대로 전농생산량은 일제시의 수준에도 미급하였으며 정부발표에는 멀리 미달하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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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에 150% 상환' ..... 소작료를 불과 5년만 내면 .......

..... 농지세 .... 세율이 7%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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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5년에 150% 상환'이라는 대원칙이었다. 즉 북한에서는 30%씩 영원히 새로운 지주에게 바쳐야 했지만, 한국에서는 30%씩 단 5년만 내면 영원히 그 땅을 자신이 소유하여 자손에게도 길이 물려 줄 수 있게 한 것이다. 1년에 50%~ 60% 소작료를 바치던 일제시대와 비교하면, 소작료를 불과 5년만 내면 영원히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북한은 30%씩 5년이 아니라 500년을 내도 그 땅은 자기 땅이 안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하나 더 남는다. 지가를 상환한 다음에 국가에 세금을 얼마나 냈느냐는 것이다. 만약 농지세를 10% 이상 걷어 가면 고려초나 조선초보다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한 자료를 알 수 있는 것이 1950년의 임시토지수득세이다. 이 해에 정부는 200만 정보의 농지에 대해서 140만석의 농지세를 걷기로 했다. 이것으로 세율을 계산해 보면 한국의 농지개혁이 농민에게 유리했는지 불리했는지 알 수 있다. 1950년 곡물 생산이 345만 톤 곧 2156만석. 140만석을 2000만석으로 나누면, 0.07 곧 세율이 7%였다. 성군인 세종조의 세율과 비슷하다. 북한에서는 세율이 30%이고 한국은 7%였던 것이다! 고추와 마늘, 배추와 무 등에 대해서는 따로 걷지 않은 걸 감안하면 6% 정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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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학위 논문으로 “농지개혁 과정에 관한 실증적 연구 - 충남 서산군 근흥면의 사례를 중심으로”를 썼다. 70년대 당시 학계에서 박현채 선생 등은 농지개혁이 실패했다고 했는데, 농민운동을 하면서 살펴본 농촌 현지에서는 지주계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기존 인식과 현실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 충남 벽지 농촌에서 농지개혁 당시 농지매매경험이 있는 촌로들을 발로 찾아다니며 논문자료를 수집했고, 농지개혁에 대한 기존 인식을 전환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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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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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식 농지개혁 .... 정부에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

.....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 ........ ]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8)



8. 이승만의 토지개혁으로 ‘차별 없는 시대’ 실현



농지개혁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은 근대화 출범 초기부터 지주-소작인간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균질한 사회로 출발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첨예한 계급 갈등의 소지를 미래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농지개혁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성과다.


관리자



지주-소작관계 청산하고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뿌리내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업적을 논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토지개혁이다. 현대사 전문가들은 건국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시행된 토지개혁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평을 내놓을 정도다.


조선 500년을 지배했던 유교는 물질이나 돈을 비천한 것으로 규정했다. 황금 천시(賤視)사상은 곧 상업 천시로 이어졌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도 하에서 상업을 가장 비천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 풍토가 깊이 뿌리내려졌다.

농업을 제외하고는 산업이 태동하지 못해 민족자본 축적이 불가능했고, 그 결과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야 하는 산업화는 엄두도 못내는 상황에서 해방을 맞게 됐다. 국내에 남은 유일한 민족자본이라고는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까지 이어져 온 토지자본이 전부였다.



선각자 이승만의 앞선 사고방식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 최고의 선진 공업국이었던 미국에서 수십 년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엘리트 교육을 받은 당대의 선각자이자 지성인이었다. 그는 미국 망명 생활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선진 공업국의 장점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건국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한국 사회의 근본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농토는 농민에게 돌려야 한다’는 구상을 갖게 되었다. 그래야만 수천 년 이어온 지주-소작인의 갈등 관계를 청산하고 시장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토양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농지개혁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의 방법론에 있어 북한 식의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닌, 유상몰수 유상분배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신문(1948년 12월7일자) 보도에 의하면 이대통령은 “북한식 농지개혁을 할 경우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하게 되어 전에는 부호에 노예 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 같은 신문 12월10일자에는 “자본이 대부분 토지에 있는 한국에서는 지주들이 다 토지를 내 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태로 농지개혁을 진행하고, 지주들에게 토지대금으로 지급된 자금으로 산업화로 나갈 방침을 밝혔다.



당시 의회의 다수 의석은 지주 계급이 주가 된 한민당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지주계급에 결정적 타격이 가해질 농지개혁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비장한 각오와 비상한 수단이 필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나라가 바로 선다는 각오 아래 과거에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씨를 농림부장관에 발탁하여 한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지개혁을 강도 높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1950년 3월부터 농민들에게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발급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농민들에게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발급한 것은 법과 시행령이 완성되기 이전에 이대통령의 의지로 단행됐다는 점이다. 이대통령은 “춘궁기가 촉박했으므로 추진상 불소한 곤란이 있더라도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개정 법령과 시행령이 미처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먼저 행정적 조치들이 신속히 추진됐다.


지주들은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내놓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지가(地價)증권을 받았는데 농지개혁이 시행된 지 3개월만에 6ㆍ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은 모든 질서와 가치를 파괴한다. 돈의 가치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정부는 마구 돈을 찍어 유통시킴으로써 전시(戰時) 인플레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물가지수는 서울 도매 물가를 기준으로 1945년을 100으로 할 때 1947년 855, 1950년 2974, 1951년 1만8753, 1952년 4만605, 1953년 5만863으로 폭등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 양상을 보였다. 부산으로 피난을 온 지주들은 전시 인플레로 인해 휴지 조각처럼 변한 지가증권을 투매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그 결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지주 계급은 몰락했고, 경제 부흥과 산업 발전에 쓰여졌어야 할 유일한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은 지주들의 생활비나 소비 자금으로 유실되어 갔다.



우리와 달리 대만은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에 성공한 나라다. 특히 중소 규모의 지주들이 내놓은 토지를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만은 건실한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우리 나라는 6ㆍ25 전쟁으로 인해 중소 지주들의 지가증권이 제 역할을 못하고 소비됨으로써 특히 중소기업의 뿌리가 근본적으로 취약한 경제 구조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자본축적이 미약한 상황에서 산업화가 추진된 결과 우리 기업들은 만성적인 자본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우리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원조자금이나 해외 차입금, 은행 차입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또 중소기업의 뿌리가 허약해 대기업 위주의 경제발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가는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우리 나라 유일의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을 소유하고 있던 지주들이 6ㆍ25를 맞아 몰락해 가자 정부는 귀속 기업체 매수자가 타인 명의의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이를 귀속기업체 인수 대금으로 지불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 즉 지주가 아닌 제3자가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귀속 기업체 매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정부는 지가증권이 더 이상 부스러기 돈으로 공중분해되는 것을 막고, 산업으로 유도하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전시 인플레에 시달리고 피난살이의 와중에 생활비 해결에 애를 먹던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액면가의 40%~80%로 처분하고 몰락해 갔다. 반면에 신흥 기업가들은 지가증권을 싼값에 매입하여 귀속재산 불하 대금으로 납입함으로써 손쉽게 산업 자본가로 도약하는 기회를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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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이지수씨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농지개혁 당시 20정보 이상의 농지를 분배당했던 호남지역 지주 418명을 조사한 결과 산업 자본가로 전업한 지주는 이 가운데 47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불과 11%의 지주만이 성공을 거두었을 뿐,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농지개혁 때 일반 보상으로 지급된 지가증권의 총 보상액 가운데 귀속재산 매입에 동원된 비율은 54%로 집계됐다. 전체 귀속 기업체 불하대금의 절반 정도만 지가증권으로 납입되어 산업자본화했고, 나머지 절반은 생활 자금, 소비 자금 등으로 부스러기 돈으로 흩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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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의견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당시 우리 나라 지주 계층이 근대식 경영을 해 본 경험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토지자본이 산업자본화 했다 해도 실제 경영은 불가능했을 것이란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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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우리 나라는 사회 지도층이었던 지주와 양반 계급이 해방될 때까지 공업이나 산업의 개념이 무엇인지 인식조차 없었다. 해방 후에는 우리 나라 기업인이 창업한 기업 중 경성방직이 유일한 산업 시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업 수준이 보잘 것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지개혁으로 지주들이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 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산업 시설 운영 능력이나 경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성공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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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농지개혁은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지주계급은 대대로 토지를 세습했고, 소작인 계급은 대를 물려 소작인으로 존재함으로써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 현상을 되풀이해 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지주 계급이 소멸됨으로써 뿌리 깊게 이어져 오던 지주-소작인, 즉 부자와 빈자(貧者)간의 갈등을 일거에 불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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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 동안 지주들에게 갖다 바쳤던 소작료의 상당 부분이 농민 자신의 것이 되자 농민들은 늘어난 소득을 자녀교육에 집중 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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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여 반공주의자들이 된 농민들이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가능케 한 지방의 이승만 지지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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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농지개혁이다. 관련 법규가 미비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적 의지와 결단에 의해 농지개혁이 시행됨으로써 우리 나라는 수천 년 고질적으로 이어져 오던 지주-소작인 관계가 근절됐다. 그 결과 국민 모두가 균질화 된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고도 성장기에 계층 간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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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풀이하지만 김일성은 일본 덕을 제일 많이 보았다. 무엇보다 일본은 패망하면서 이남보다 10배나 많이 세웠던 공장과 발전소를 고스란히 삼팔선 이북에 남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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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이승만은 일본인들이 철도 외에는 남겨 놓은 게 없어서 일본으로부터 덕 본 게 거의 없었다. 미국으로부터 잉여농산물을 받아 국민들을 간신히 먹여 살렸다. 인기가 있을 리 없었다.


청사에 길이 남을 농지 개혁을 단행한 것도 철저히 왜곡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배운 자들과 토지를 빼앗긴 자들이 그를 독재자라고 규탄하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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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 정부가 헤쳐 나가야 할 앞길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당대를 살았던 경험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정황이 그려진다. 우선 국토의 분단으로 신생 대한민국의 주권과 통치권 행사가 38선 이남으로 한정되었다는 점이다. 국토의 분할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양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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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해방 직전 전국의 발전설비 용량은 총 172만2695kW로, 남북한 점유 비율을 보면 남한이 11.5%(19만8782kW)인 반면 북한은 88.5%였다. 북한 지역에는 압록강의 수풍 발전소, 부전강 장전강 발전소 등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전력을 이용해 흥남 질소비료 공장 같은 세계적 규모의 산업 시설이 건설되어 있었다. 흥남 질소비료 공장에서 생산된 비료는 경원선과 호남선을 이용해 호남 곡창지대까지 공급됐고, 생산량이 워낙 많아 멀리 만주 일대까지 공급됐다.



반면에 남한에는 수천 년 경작을 되풀이해 온 탓에 매년 비료를 주지 않으면 생산이 불가능한 농지와, 북한에서 공급되는 전력을 공급받아 가동하는 소규모 경공업 시설이 위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중공업 분포도를 보면 남한 21%, 북한이 79%였다.


금속공업 생산의 90%가 북한에서 이루어진 반면, 방직공업 생산의 85%는 남한에 치우쳐 있었다. 또 철광석, 선철 등 금속 기계공업에 필수적인 지하지원은 남한에는 매장량이 거의 없었고, 유연탄 무연탄 흑연 중석 등도 북한이 독차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남한에는 해방과 더불어 해외 각지에서 몰려들기 시작한 귀환 동포, 이북에서 핍박을 받아 탈출해 온 월남민 등 주거지와 직장이 없는 300만 이상의 피난민이 제각기 살길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의 파괴와 폭동, 테러와 살인 위협에 맞서 가며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초로 한 자본주의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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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통계를 보면 남한의 전력소비량 10만㎾ 중 7만 1000㎾를 북한에서 공급하는 전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1948년 5월 10일 제헌의원 선거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이 사전 통보 없이 5월 14일에 공급되던 전기 공급을 끊어버림으로써 남한 사회는 암흑천지로 변했고, 공장들을 비롯하여 전차 등 교통수단이 올 스톱 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남한은 농업이 주산업이었으나 비료가 한 톨도 생산되지 않아 북한 지역의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 생산되는 비료를 공급받아 농사를 지었으나 이것도 끊겼다. 이때부터 남한은 충주비료공장이 정상 가동되기 전까지 매년 미국이 지원하는 원조자금 2억 5000만 달러 중 1억 달러 정도를 비료 도입에 사용해야 하는 난감한 현실에 부딪쳤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일제 식민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5일 항복 직후 일본인들의 철수 자금 마련 위해 막대한 통화를 시중에 풀었다는 점이다. 국내에 있는 현금이 모자라자 8월 24일 일본에서 비행기로 지폐를 공수하여 일본군 퇴각 비용 및 총독부 관리들 퇴직수당을 지급하는 바람에 엄청난 화폐가 시중에 풀려나갔다. 덕분에 시중에는 인플레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당시 남한의 도매물가지수는 1945년 8월을 100으로 할 때 1950년 12월에는 4980로 무려 물가가 50배나 폭등하는 광란 상태를 연출했다.


이 와중에 자기 토지가 없는 소작인들의 문제가 심각한 갈등요소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1947년 통계를 보면 200만 호 농가호수 가운데 자기 토지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자작농은 불과 36만 호(16%)에 불과하고, 지주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 90만 호(42%), 그리고 자소작농 혹은 소자작농이 42%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작료는 매년 수확물의 50~60%에 달해 대다수 소작농들은 빈곤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상몰수-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소작 관계를 하루아침에 청산했다. 농지개혁으로 지주라는 전근대적 계급이 사라지고 자본가 계급이 이 땅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도 식민지 반봉건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본격 전환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신생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체계적인 발전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12월 미국과 한미원조협정(ECA)을 체결하면서부터다. 한국판 마샬 플랜이라 불리는 ECA 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국으로부터 체계적인 원조가 시작되어 식량, 비료, 석유, 원료, 공업시설, 발전함 2척, 그리고 기술원조가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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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1950년대, 우리들의 초상(肖像)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외국인의 눈에 비쳐진, 대칭되는 두 가지 시각을 통해 50년 전 한국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진보적인 시각으로 한국 현대사를 들여다보고 있는 부르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이라는 자신의 저서 머리글에서 한국의 1950년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953년, 한반도는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남쪽의 부산에서 북쪽의 신의주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은 죽은 자들을 묻고 잃은 것들을 슬퍼하면서, 그들 생애의 남은 것들을 주워 모으느라 여념이 없었다. 수도 서울에서는 콘크리트와 파편이 뒤범벅이 된 길가에, 텅 빈 건물들이 마치 해골처럼 서 있었다. 수도 주변의 미군 병사(兵舍)에는 수많은 거지들이 외국 군인들이 내버리는 찌꺼기를 줍고자 모여들었다….


마을들은 텅 비었으며 거대한 댐들은 더 이상 물을 저장할 수 없게 되었다. 동굴과 터널 속의 두더지 같은 생활에서 기어 나온 사람들은 밝은 햇살 속에서 악몽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1950년대 후반까지 한미 경제 협의회의 미국측 경제조정관으로 근무한 바 있는 윌리엄 윈 조정관은 유엔 경제 사회 이사회에 참석, ?한국의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아침 7시를 전후해서 중앙청이 보이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보면 7~8세의 어린이로부터 성년이 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제복을 입고 손가방을 들고 혹은 메고 가는 학생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씩씩하고 명랑하고 혈색이 좋다. 그들에게는 신생 공화국의 앞날을 책임질 막중한 의무가 주어져 있다. 한국의 교육은 이러한 사명을 충분히 완수할 수 있다고 본다.“>



죽은 자들을 묻고 잃은 것들을 슬퍼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새로운 세대를 교육시켰던 시대. 콘크리트와 파편이 뒤범벅이 된 길가에, 텅 빈 건물들이 마치 해골처럼 서 있는 그 황량한 풍경을 딛고 허리띠 졸라맨 채 신생 공화국의 앞날을 책임질 아이들을 학교로 보냈던 시대. 그것이 우리의 1950년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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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1)
●1.1950년대를 바라보는 시각 ●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나는 늘 하느님께 기도하네.


李承晩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들 못지 않게 잘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올 때에 나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네.



趙甲濟



故 金溶植 외무장관의 회고록 '새벽의 약속'(김영사, 1993년)엔 이런 대목이 있다. 1955년 그가 일본 주재 한국 대표부의 대표로 있을 때 진해에서 휴양중이던 李承晩 대통령을 찾아가 업무보고를 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金 대표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이를 구술시킨 후 늦여름의 조용한 진해만을 내려다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 줄 아는가

李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늘 하나님께,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들 못지 않게 잘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올 때에 나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네.


각하, 언제쯤 우리도 남부럽잖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한 30년 걸릴 걸세.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바쁘게 지내야 할 걸세.



金 전 장관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85, 86년에 李 대통령의 예언을 회상하면서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고 했다.

86년도의 아시안 게임이 서울의 잠실에서 개최될 때, 관람석의 한 모퉁이에서 나는 30년 전 李 대통령이 한 말을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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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2.4. 이승만



[ ...... 자본가가 있어야 국내에 경제가 유통되어서 민중이 다 살 수 있다 ........

..... 공장에 일을 얻어 생활방도를 만들어 주어야 .......

...... 공업과 산업은 자본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것이니 .........

...... 토지를 내어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 ......... ]




[ ......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 ........

...... 부호에 노예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된다면 ........ ]




李承晩 대통령, ‘토지개혁문제’라는 제목으로 방송연설



게재지명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8년 12월 07일



지난 4일 오후 8시 이승만 대통령은 ‘토지개혁문제’에 관하여 23분간에 걸쳐 중앙방송국 마이크를 통하여 대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강연방송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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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 소위 국유지라는 농토와 적산토지를 합하여 다 민유지로 분배시킬 것인데 땅 없는 농민들에게 넉넉히 나누어서 作農하게 하되 그 땅을 그저 내주는 것이 아니고 정당한 가격을 정하여 매년 얼마씩 정부에 보상하기로 約條를 정하고 팔게 할지니 보상하는 條理와 몇 해만에 다 갚는다는 등 細節目은 다 국법으로 정하게 될 것이니 미리 말할 수 없으나 대체로 말하자면 농민이 그 땅에서 自農하여 묵히는 땅이 없고 그 所出미곡으로 가족에 1년 計糧을 제하고는 여유를 팔아서 돈으로 바치거나 미곡을 대신하여 몇 해만에 다 완납한 후에는 정부에서 문서를 주어서 영구히 농민에 사유지로 만들 것이니 이것이 즉 우리 정부에서 주장하는 토지개혁책의 요점이요, 모든 농민은 이대로 되기를 바라며 또한 노력할 것입니다. (서울신문 1948. 12. 7)




다소간 문제되는 것은 소위 대지주에 소속인 큰 농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 대지주들로 말하면 혹은 몇 대 조상적부터 遺傳하여 내려오는 소유지도 있고 또 혹은 돈을 주고 사서 차지한 토지도 있는 것이니 이상에 말한 바 공공한 천연적 재원을 부자들이 사유로 만들었다는 것은 몇 천년 전에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요, 중간에 와서 무슨 방식으로든지 소유권을 가지게 된 것은 누구나 인정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 대지주들의 땅을 무조건하고 몰수한다는 것은 法理도 아니오 公義도 아닐 것이므로 이 지주들에 소유권은 인정할 뿐만 아니라 국법으로 보호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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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제도를 행하는 나라에서는 지주의 땅을 乾沒해서 소작인에게 나누어 준다 하나 실상은 농민에게 주는 것이 아니오 농민들에게 맡겨서 경작하게 하고 그 땅은 정부에서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 실상을 말하자면 공산제도가 토지를 인민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빼앗아서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해서 정부에 받기만 할 뿐이니 부유한 대지주에게 세를 물고 얻어 경작하느니보다 정부의 땅을 얻어서 경작하는 것이 더욱 자유롭지 못하고 속박을 받는 것이니 전에는 부호에 노예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된다면 경제상 이해에 무슨 차별이 있으며 농민생활에 아무 도움도 없을 것이다. (서울신문 1948.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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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들의 토지개혁책이라는 것이 우리와 같지 아니한 외에 또 한가지 우리와 같지 아니한 것은 소위 자본주의라는 문제입니다. 그 사람들의 말은 토지분배로 많은 경제력을 공평히 조정하기에 부족한 모든 금융과 각종 재산을 다 평균히 분배해서 자본가가 없게 만들어야 한다 하나니 우리 주의는 이와 상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가가 있어야 국내에 경제가 유통되어서 민중이 다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자고로 농업을 근본으로 삼아서 자족자급할 능력을 가졌었지마는 지금은 인구가 해마다 증가되어 토지는 한정이 있으므로 그 땅의 소출만 가지고는 그 민중이 먹고 살 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공업을 숭상해서 생산력이 발전되어야 땅 속에 묻힌 재산을 패어서 인류생활에 공헌할 것이요, 공업의 소출 물산으로 우리도 쓰고 또한 국외에 수출해서 남의 물건을 바꾸어다가 우리의 생활을 돕게 할 것이며 기계공장을 시설해서 國中에 땅이 없이 농사 못하고 일없이 굶게 되는 사람들이 공장에 일을 얻어 생활방도를 만들어 주어야 될 것이니 이것은 공업과 산업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것이고 공업과 산업은 자본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자본가를 다 없이 해다가 노동자만 살 수 있게 하자는 것은 우리가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니 우선 예를 들어 말할지라도 자본이 없어서 기계공장이 문을 닫게 된다면 다수 실업자가 먼저 타격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罷工罷業 등 행동으로 자본가와 충돌을 내며 농민으로 지주와 충돌을 내서 모든 민중이 서로 싸우는 중에 정부가 모든 것을 차지하게 하는 폐단을 우리는 절대 포용치 아니하는 것이니 세계 모든 재원에 세 가지 근본되는 토지와 노동과 자본, 이 세 가지가 서로 충돌을 내지 말고 피차 도와서 합류하여 나가는 중에서 모든 것이 和意로 진전되며 부강전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니 우리는 농민이 지주를 질시하거나 노동자가 자본가를 원수로 여기거나 하여 自相충돌하는 것을 피하고 서로 제휴 공헌하는 중에서 다 잘살 수 있기를 도모하자는 것입니다. (서울신문 1948. 12. 9)


우리 나라의 자본은 대부분이 토지에 있나니 지주들이 다 토지를 내어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므로, 정부에서는 토지대가를 갚아 줄 것이 큰 문제가 되니 이것은 정부와 국회에서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어서 지금 지주들로 하여금 상당한 자본을 얻게 하는 것이 긴요한 문제이니 이것은 많은 연구로 해결책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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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1948.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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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지적했습니다만, 정치경제체제가 이렇게 선택되는데 있어서는 한국이 그 속에 속했던 서구문명과 서구문명을 충분히 흡수했던 이승만대통령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대통령이 시장경제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실시한 중요한 정책은 농지개혁과 귀속 재산의 불하입니다. 농지개혁은 유상몰수(有償沒收)・유상분배였기 때문에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無償分配)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만, 북한은 무상분배였기 때문에 농민적 토지소유가 성립할 수 없었던데 대하여 한국은 유상분배였기 때문에 자작농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자작농체제는 농민들에게 정치적 자유와 상품생산자적 지위를 보장하는 세계보편적인 경제제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귀속재산의 불하는 시장경제제도의 골간인 자유기업제도를 창출하는 획기적인 조치였습니다. 귀속재산불하에 있어서는 부정부패가 격심하고 불하를 받은 기업인이 정상적인 기업경영인이 아니라 정상배(政商輩)가 많았다는 결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당시 우리나라에 기업경영 능력이 일천한 상황 하에서 민간기업을 정려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결함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대통령은 은행마저도 민영화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진실로 한국에서 최초로 한국인의 손으로 자유시장경제제도를 정비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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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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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후, 이승만 대통령은 전후 복구와 부흥/증산계획을 각부처별로 수립실시합니다. 예를들면 1)농업증산 5개년 계획(제1차 1953~1957년, 제2차 1958~1962년), 2)電源개발 3개년 계획(1954~1956년)등입니다.


1955년 미국의 원조물자등을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하여 復興部 설치와 함께 산하에 5개 경제부처 장관으로 구성되는 “부흥위원회”를 두고 경제정책의 조정 기능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1958년에는 부흥부 산하에 “産業개발 위원회”를 설치 ‘경제개발 3개년 계획’(1960~1962)을 수립하고 1960년 4월 국무회의에 상정토록 합니다. 이것이 3공화국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모태가 됩니다.


이승만 정부의 이런 노력으로 1957년 전후복구를 완료하고 1949년 수준의 경제를 회복하게 됩니다. 1953~1959년 년평균 GNP 성장률은 5.33%에 달했고, 광공업 성장률은 무려 15.7%에 달했습니다. 3白공업(면방 제분 제당)은 물론 핵심 생산재 공업 건설, 전원개발사업, 문경선/영암선/태백선 등 산업철도를 건설합니다. 이승만 정부의 교육정책과 함께 이런 시설들이 박정희 정권의 경제부흥의 초석이 되어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됩니다.


이시기에 건설한 주요 공업시설은 포철의 원조라 할 수 있는 1953년 대한중공업(현 인천제철), 1954년 동국제강, 1955년 한국 유리공업, 1955년 충주비료공장, 문경시멘트 공장, 그리고 1959년에는 원자력산업을 위해 트리가 마크2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했습니다. 특히 3백공업과 쌀 부분은 1958년 수요를 초과하여 수출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발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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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3월 장면 정권은 유엔총회에 보낸 보고 ‘통한각서’에서 이승만 정부 12년 치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동보고문 제4장에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의 옹호.


(1) 구제사업 교육사업의 성취

(2) 국회와 언론자유에 의하여 민주주의가 뿌리를 깊이 박았다.

(3) 96% 아동 교육. 78대학에 10만 명 대학생 수십만 졸업생은 교육의 발전이다.


동 제3장


(1) 1957년까지 도시 교통 문화 경제방면에 의하여 30억만 불의 대손해를 받은 6.25동란의 전재를 완전히 복구했다.

(2) 1959년까지 가치 안정 경제 안정 되었다. 각 부문에서 생산율이 상승일로 한국 경제 최고 기록에 달했다.(통계표시)

(3) 1954년~1959년까지 주택 52만호를 건조했고 1959년 곡물 420만톤 최고기록. 기타 생산도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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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3.21. 동아일보

통한각서









1955~1959년 대통령 연두 회견과 시정연설



[ ...... 경제 발전이 제일 위이고 국가 안보는 두 번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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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연구자가 제1공화국부터 전두환의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대통령 연두 회견과 시정연설을 분석해 어떤 것을 가장 중시했는가를 살펴봤다. 제4공화국, 그러니까 유신 체제의 경우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과 달리 경제 발전을 가장 우선시한 것이 아니다. 이걸 제일 우선시한 것은 장면 정부하고 1964~1967년 시기의 박정희 정부다. 장면 정부 때 다른 어느 것보다도 경제 발전을 가장 중시했고, 박정희 정부도 1964년에서 1967년까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경제 발전을 연두 회견이나 시정연설에서 강조했다. 1972~1979년 유신 체제에서는 국가 안보가 가장 강조됐고 그다음이 경제 발전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승만 집권기 중 1955~1959년을 가지고 분석한 것만 봐도 경제 발전이 제일 위이고 국가 안보는 두 번째인데, 유신 체제 때에는 국가 안보가 제일 위에 있고 그다음이 경제 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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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4)


●4.전란의 참화를 딛고 일어서다●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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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현대 산업문명에 대한 이해와 깊은 통찰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가 산업문명의 핵심이 철강공업에 있으며, 철강이 산업의 쌀이라는 사실은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과정에서 깨달은 화두(話頭)였다. 6ㆍ25의 휴전 문제가 흘러나오던 1953년 부산 임시정부는 이미 전후복구를 위한 그랜드 디자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철강산업에 대한 의지를 피력한 것은 1953년 4월4일의 일이다. 이날 이대통령은 내각에 다음과 같이 특별지시했다.


“전쟁이 끝나면 하루 빨리 부흥사업을 펼쳐야 할 것이니 그 기초가 되는 철강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 특히 주택건설사업을 위한 함석, 철판 등의 공급을 담당할 제강사업 건설계획을 우선적으로 강력히 추진하라.”


관계부처는 철강산업에 대한 기본 대책을 검토한 끝에 대통령령으로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현재 인천제철)를 국영기업으로 출범시키고, 파괴된 공장을 복구하는 작업으로 연산 5만t 규모의 평로(平爐:구식 용광로)를 건설하여 제강공장과 압연공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우리 경제는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을 때다. 미국으로부터 오는 무상원조액 4억 달러에 달하는 등 우리 나라의 모든 경제계획은 미국의 경제고문관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정부는 철강공장 건설계획을 수립한 후 미국 원조기관에 철강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이런 소식을 접한 미국 원조당국은 “지금 수백만의 피난민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무슨 철강공장인가. 시급한 민생문제부터 해결하자”며 우리측 요구를 거절했다.


보고를 받은 이대통령은 “못이나 양철이라도 만들어야 판잣집이라도 지을 것 아닌가” 하면서 미국이 돈을 못 낸다면 우리 정부가 보유한 자체보유불로 공장을 지으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극심한 달러 부족으로 장관이 외국 방문을 할 때면 손수 달러를 세어 주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외환사정이 지극히 어려운 전시(戰時)에 철강공장 건설을 위해 140만 달러를 투자키로 결정한 것은 역사적 결단이었다.



이대통령은 전쟁 부상자 치료를 위해 부산에 와 있던 서독 적십자병원장 후버 박사에게 한국의 철강공장 건설에 서독이 기술지원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이대통령이 서독과 교섭에 나선 이유는 미국이 우리 나라 철강공장 건설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 무렵 서독은 2차대전 패전 후 마샬 플랜에 의해 전후복구가 한창이었다. 때문에 서독 기업들도 해외 공사를 수주하여 달러를 벌어들이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을 받은 후버 박사는 한국의 철강공장 건설계획을 서독 정부에 알렸고, 서독 정부는 일본에서 활동하며 유엔군에 물자를 공급하던 유태인 중개상 아이젠버그를 교섭 상대로 내세워 적극적인 수주 활동을 벌였다.


1954년 실시된 대한중공업공사의 5만t 규모 평로 제강공사 국제입찰에는 미국, 스위스, 서독의 전문회사가 참여하여 경합을 벌였다. 그 결과 서독 최대의 제철시설 제조회사인 데마그사(社)가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이어 1956년 2단계로 실시한 380만 달러 짜리 압연공장 건설사업도 데마그사에게 돌아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강공장 건설공사가 진행되는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 현장을 수시로 방문하여 건설작업을 독려했다. 마침내 1956년 하반기에 인천중공업의 평로 제강공장 건설이 완공되어 첫 출강식(出鋼式)이 거행됐다. 이것이 우리 나라 철강산업 발전의 결정적 전기가 된 것이다. 평로 제강공장에 이어 압연공장 건설이 완료되면서 본격적인 생산이 개시된 것은 1959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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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가 6ㆍ25 직후에 외국 차관 한푼 안 들이고 순수한 우리 자본으로 제강공장을 건설한 것은 2차대전 종전 후 후진국에서 벌어진 최초의 중공업 프로젝트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자체보유불로 철강공장 건설이라는 결단을 내릴 정도로 국가 근대화에 대한 깊은 안목과 식견을 가졌던 지도자였다. 철강공장 건설과정에서 수많은 한국의 기술자와 관리자들이 서독에 가서 현대식 철강산업을 배우고 돌아와 우리 나라 철강산업의 기초를 닦았다. 이 때 양성된 인력들이 박정희 정권 시절 포항제철 건설에 대거 참여하여 오늘의 ‘포철 신화’를 이룬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산업계 관련 인사들은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우리 나라 중공업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라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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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급한 대로 식량문제는 미국 원조로 해결이 가능했으나 땔감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겨울이면 온 국민이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해다 때는 형편이었으니 산에 나무가 남아나질 않았다. 보다 못한 이승만 대통령은 석탄 생산 장려와 전란으로 황폐화 된 탄광을 복구하기 위해 대한석탄공사에 군부대를 파견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육군 파견단이 탄광 현장에 투입된 것은 1954년 12월27일. 육군 파견단장은 김일환 육군 중장(후에 상공부장관 역임)이었다. 육군 파견단은 1957년 8월8일 철수할 때까지 2년 9개월간 각 탄광의 전후 복구 사업과 석탄증산을 도왔다. 우선 광부들에게 군 작업복 1만8000여 벌, 광목 200마, 모포 7000매, 겨울 내의 8000벌을 무상 지급했다. 또 갱목과 자재 운송을 위해 군 트럭 50대를 투입했다.


각 탄광촌에 군 공병대가 투입돼 광원용 사택을 보수하여 입주시켰고, 원주 1군사령부의 지원을 받아 광업소 주변에 학교 신축, 교실 증축, 문맹자 퇴치를 위한 직원교육을 실시했다. 또 정부미 2만5000석을 확보하여 식량 배급을 실시했고 소금과 담배 등 기호품까지 공급했다.


육군 파견단은 군 트럭 100대를 동원하여 석탄 수송을 돕는 한편, 공병대를 투입하여 태백 탄전지대에서 수도권으로 향하는 수송로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또 6ㆍ25로 중단됐던 영암선 철도공사에 군 공병대를 투입했다. 경북 영주와 강원도 철암을 잇는 영암선 철도공사는 1949년 착공된 이래 6ㆍ25 전쟁으로 공사가 전면 중단됐다가 휴전 이후 재개됐으나 자재와 자금 부족으로 지지부진한 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 현장에 군 공병대가 투입되면서 공사가 빠르게 진척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지대한 관심 속에 1955년 12월30일 영암선 철도가 개통됐다.



그 결과 태백 탄전지역에서 생산된 석탄이 영암선-중앙선을 통해 수도권까지 철도 수송이 가능해져 땔감 문제 해결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영암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태백 탄전지대에서 생산된 석탄은 묵호나 심척까지 기차로 운송한 다음 선박에 실어 해로를 통해 동해-남해-서해를 거쳐 인천항까지 운반됐다. 여기서 다시 트럭에 실려 수도권까지 운반해야 했다. 이처럼 험난한 여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석탄 가격보다 운송비가 훨씬 더 비싸지는 모순이 발생하게 됐다.


영암선 개통은 철도를 이용한 석탄의 수도권 직송(直送)이라는 수송혁명을 가져왔고, 국민연료를 장작에서 석탄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고비가 됐다. 1955년 무연탄 생산량은 130만t에 불과했으나 영암선 개통 후인 1957년에는 244만t, 1959년에는 413만t, 1960년에는 535만t으로 급격히 늘었다. 그 결과 광공업 생산은 1957~60년 사이 연평균 12.3%의 고속 성장을 했으며, 전력은 1954~56년 사이에 15.4%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한편으로는 국가 기간산업 수행을 위한 공장들이 속속 건설되기 시작했다. 1953년 6월 대한중공업을 선두로 1954년 7월에 동국제강, 1955년 3월 한국유리공업, 1955년 충주비료공장, 문경시멘트공장이 잇달아 착공됐다. 본격적인 전후복구와 산업 근대화의 첫 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우리 나라는 1956년 2월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간 협력 협정’을 맺었고, 1957년 8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여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적 협력의 발판을 다졌다. 1958년 3월에 원자력법을 제정 공포하고 같은 해 12월에 원자력원의 직제를 대통령령으로 공포하는 등 원자력 연구개발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9)



국민소득 60 달러에 불과한 나라에서 미래의 에너지였던 원자력산업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 것은 당시 국가 지도자의 놀라운 통찰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어려웠던 시절에 노망이 들었다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력산업의 기초를 닦았다. 또 원자력을 이용해 전력 문제를 해결한다는 차원에서 1958년 20명의 유학생을 선발해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당시 유학을 다녀온 이동영(李東寧) 박사, 이관(李寬) 박사, 김호철(金湖鐵) 박사 등이 우리 나라 원자력 산업의 기초를 닦는 역할을 하게 된다. 원자력 연구생의 해외 파견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달러화를 유학생들의 손에 쥐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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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신현확씨가 충주비료공장 계약 건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의 일이다. 대통령은 “공사 기간이 어느 정도인가?” 하고 물었다. 신현확씨가 “3년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고 답했다. 그러자 “공사기간 3년 동안 인플레가 심할 것인데, 이 예산에 에스컬레이션(인플레만큼 예산이 늘어나는 제도) 조항이 들어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 시절에 에스컬레이션이라는 최신 경제용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인데, 李대통령은 그 정도로 깊은 경제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7)우리 정부는 충주비료공장 운영을 위해 노심초사한 장면은 송인상씨 회고록 ‘부흥과 성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경석(馬景錫)씨 등 68명의 기술직 사원을 공과계 출신이면 가리지 않고 채용했다. 전기, 금속, 토목과 출신은 물론 심지어는 원자력, 조선항공과 졸업생도 채용했다. 그들을 세 팀으로 나누어서 미국 독일 스페인 등 세 나라에 파견, 기술훈련을 시켰다.


후일담이지만 그 때의 우리 기술자들이 뒷날 충주비료를 훌륭히 운영 관리했고 다음에 세운 나주비료의 건설과 운영에도 참여,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조업했다. 또 제3비인 울산, 진해의 비료공장을 거쳐 여수의 제7비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화학비료공장 기술진의 핵을 이루었으니 참으로 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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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개혁 과정에서 정부의 실무 담당자들은 자본주의 원칙에는 위배되지만 국가 산업발전을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찾아냈다. 즉 일정 한도 이내의 액수는 100대 1의 비율로 새 화폐로 교환해 주되, 일정 한도를 초과하는 자금에 한해서는 2~3년 간 정부에 거치 시켜 산업자금으로 전환하고, 2~3년 후 원금에 이자를 얹어 상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화폐 교환이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서울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李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 시점에서 왜 통화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해서는 내가 이해를 하겠소. 그런데 일정 금액을 초과하는 돈에 대해 2~3년 간 산업자금으로 전용한다는 것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소. 국민이 피땀 흘려 애써 번 돈을 정부라 해서 권력을 가지고 강제로 2년 혹은 3년 동안 동결시켜 못쓰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조치라고 봅니다. 원래 자본주의의 가장 좋은 점은 사유재산을 엄격히 보호해 주는 것이 기본입니다. 정부라 해서 국민의 재산 사용을 마음대로 제한한다면 누가 정부의 말을 믿고 따르겠소.”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산업자금을 2~3년 간 동결한다는 조항이 백지화되다시피 한 상태에서 관련법규가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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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4)


● 4.전란의 참화를 딛고 일어서다 ●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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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기존의 체제와 질서를 허물고 새 질서를 창조하는 기회가 되었다. 졸지에 인민군의 남침으로 산업의 터전을 잃은 기업가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와 해외 무역을 통해 물자를 조달하면서 새로운 사업의 기초를 닦아가기 시작했다. 전쟁상황이던 당시 우리 나라의 주력 수출품은 고철과 탄피였다. 전장(戰場)에서 수집된 고철과 탄피는 일본이나 홍콩으로 수출되어 귀중한 달러 수입원 역할을 했다.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에 의하면 당시 중간 규모의 무역회사였던 삼성물산의 경우 1951년 한해 동안 3억원을 출자하여 무역을 한 결과 1년 후에는 출자금이 출자금의 20배인 60억원으로 늘어났다. 그 대부분이 고철과 탄피를 수출하고 생필품과 의약품을 수입해서 얻은 수익이다.


전시(戰時)의 무역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훗날 재벌의 반열에 올랐던 당대의 기업가들, 즉 삼성의 이병철, 럭키의 구인회, 두산의 박두병, 한일합섬의 김한수, 동양화학의 이정림, 쌍용의 김성곤 회장 등은 피난수도 부산에서 무역업을 통해 거부(巨富)를 축적한 사람들이다.(1)


당시 임시수도 부산은 6.25 전쟁물자가 부려지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각종 산업시설, 특히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이라 불리던 경인공업지대가 파괴되면서 산업 활동이 거의 마비됐다. 전란으로 고통받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생활필수품과 의약품, 식량과 사치품이었다.(2)


이러한 무역을 통해 거부를 축적한 기업가들 중 선각자들의 생각은 다른 곳으로 발전해 가기 시작했다. 즉 단순히 무역으로 이윤을 축적하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 생필품 공장을 지어 값싸고 질 좋은 소비재를 직접 생산해 공급하자. 그리하여 국민들의 의식(衣食) 문제를 해결함은 물론, 전란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경제부흥에 일조하자는 착상을 하게 된다.


그것은 곧 축적된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이행되는 길이기도 했다. 그 상징적인 변모를 보여준 것이 이병철 회장의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이었다. 제일제당은 그간 수입에 의존하던 기호품을 국내에 공장을 지어 수입대체화함으로써 상업자본의 산업화라는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제당공장 건설 아이디어는 한국무역협회를 이끌던 전용순씨로부터 나온 것이다. 전용순씨는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으로부터 설탕공장이 수지맞는 산업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대만을 점령했는데, 대만에서 공급되는 사탕수수를 원료로 설탕을 만드는 제당공장을 지은 기업가가 큰 재미를 봤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다.


마침 전용순씨는 야당 인사를 두둔했다 하여 집권층의 눈밖에 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정치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부산에서 숨어 지내던 무렵, 이병철씨에게 제당공장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귀가 번쩍 뜨인 청년 사업가 이병철이 무역에서 번 돈을 집중 투자하여 제일제당 공장을 부산에 건설한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제당공장 건설에 착수한 1953년은 아직도 6?25 전란의 포성이 멎지 않은 때였다. 참모들은 전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불투명한 전시 상황에서 가장 안전하고 수지맞는 사업은 외국에서 소비재를 수입 해다 국내에 파는 무역업이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상식을 뛰어넘는 아이디어로 제당공장 건설에 나섰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모험이었고, 값비싼 투자였다.


당시 설탕은 100% 외국에서 수입되고 있었다. 만약 국내에 설탕공장을 지어 생산하면 수입품보다 월등히 싼 가격으로 대량 공급할 수 있다. 이런 확신이 이병철 회장을 제당공장 건설이라는 외길로 내몬 것이다.(3)


제일제당이 본격 가동되면서 이병철 회장은 돈벼락을 맞게 된다. 아침에 설탕 한 트럭을 싣고 나가면 오후에 한 트럭을 돈을 싣고 올 정도로 제당업은 수지 맞는 장사였다.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에서 “제당 설립 불과 2년만에 나는 거부(巨富)의 칭호를 받았다”고 말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1953년 우리 나라 설탕 수입량은 2만3800t이었다. 수입가격은 t당 35달러선. 그때까지 수입의존도 100%였던 설탕은 제일제당의 가동으로 인해 수입의존도는 1954년에 51%, 1955년 27%, 1956년에 7%로 급격히 떨어졌다. 제일제당의 성공이 자극제가 되어 동양, 삼양, 대한 등 7개 제당업체가 난립하는 양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이 다음으로 도전장을 던진 분야는 의복 분야였다. 국민에게 질 좋은 양복지를 값싸게 공급하여 의(衣)생활을 해결하고, 수입에 의존하던 양복지를 국산화함으로써 외화를 절약한다는 사업구상이었다. 제일모직 건설과정은 우리 나라 기업사 뿐만 아니라 산업사에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기업(企業)이란 업(業)을 기획하는 것” “경영(經營)에서 경(經)이란 밧줄이나 끈으로 줄을 쳐놓는다는 뜻. 영(營)이란 줄쳐 놓은 둘레를 두루 쌓는다는 뜻”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경영이란 새로 집을 짓거나 길을 닦을 때 미리 해 놓는 측량계획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 시절 우리 나라 재계(財界)의 사업 규모가 일천하여 주먹구구식의 전근대적 경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제일모직의 건설 과정에서 이병철 회장은 근대화 된 선진 경영의 진수를 우리 사회에 보여주게 된다.


이병철 회장은 오랜 검토 끝에 양복지를 생산할 주(主) 기계는 독일제로, 보조 기계는 영국ㆍ이탈리아ㆍ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최고 성능을 자랑하는 제품을 선별 도입했다. 그리고 모직공장 건설에 필요한 온도와 습도 등 기상조건에서부터 전력ㆍ노동력ㆍ교통ㆍ용수ㆍ수질은 물론, 종업원에 대한 기술지도와 훈련에 이르기까지 48개 항목을 상세히 메모하여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우리 나라 기업 경영에 ‘기획 및 계획’ 개념이라는 최신 경영기법을 처음 도입 시행한 최초의 사례였다.


제일모직도 제일제당처럼 대단한 성공을 거두면서 전후(戰後)의 산업 질서는 상업자본의 산업자본화에 누가 빨리 선착하느냐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이병철 회장의 성공에 자극 받은 기업가들은 앞을 다투어 대한모직, 한국모방, 경남모직 등의 모직회사를 청업했고, 다른 기업가들은 전시(戰時) 무역으로 축적한 상업자본을 투자하여 락희화학, 한국유리, 대한양회, 동양제당, 삼양제당과 같은 근대적인 산업시설 건설에 도전했다.



이처럼 전후에 ‘상업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시류의 흐름을 탄 기업들은 훗날 한국에서 대기업군 형성의 기폭제로 작용하게 되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은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었고 대한모직은 신일그룹, 경남모직은 한일합섬 그룹으로 발전해 나갔다. 락희ㆍ개풍ㆍ삼호ㆍ삼양사ㆍ대한전선ㆍ금성방직ㆍ동양제당ㆍ대한제분 등 초창기 대기업그룹군은 모두 이 시기 흐름에 편승하여 성장의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반면 시대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상업자본에만 계속 매달려 현실안주를 택한 기업가는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해 갔다. 이러한 트랜드의 변화가 벌어진 현장은 피난수도 부산이었고, 대부분의 제조업이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에 밀집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산업화의 첫 토대는 부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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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원자력연구소 설립



[ ...... 원자력원이 장관급을 넘어선 부총리급 .......

...... 연구원들에게 아주 파격적인 대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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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과학기술 연구 기관은 1959년에 설립된 원자력연구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자력 연구소는 처음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 속에서 설립되게 되는 데, 초창기에 원자력 연구를 담당하는 원자력원이 장관급을 넘어선 부총리급이었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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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연구소는 당시 국내의 유일한 종합 과학 연구소로서 연구원들에게 아주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었기 때문에, 원자력 분야라는 전공과는 상관없이 다양한 과학 분야의 우수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원자력연구소는 특히 원자력 연구생을 해외에 파견하여 1970년대 이후 한국의 과학기술계를 이끌어 나갈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이 원자력연구소의 도움으로 해외에서 과학기술을 배워 올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1956년에서 1963년 8월까지 모두 189명을 해외로 파견했으며, 그 뒤에는 그 수는 좀 줄기는 했지만 지속적으로 많은 유학생을 해외로 내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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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원자력원의 직제와 인원 구성은 1959년 완료되었으나, 곧 이은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서 원자로 건설이 지연되어 초기에는 연구가 재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본격적인 원자력 연구는 1962년 3월 열출력 100 KW 급인 연구용 원자로(TRIGA Mark-II)가 가동되면서부터 가능하게 되었다. 연구용 원자로가 가동되면서 원자력연구소는 방사선 및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기초과학 부문 및 응용과학 부문에 대한 연구에 주력함으로써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설립될 때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종합 과학기술 연구소의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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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연구개발 (거대한 생애 이승만90년 63)



"과기-군사력의 핵심" 미 제안 전격수용

문교부에 전담행정기구-법정비 병행

소장과학자 3년간 1백여명 미 파견

73만불들여 연구용원자로 도입 59년 설치공사 기공



1995.12.11 기고자 : 이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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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제기해야 할 가장 궁금한 질문은 한 가지. 어떻게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난지 2-3년밖에 안된 나라 한국이 원자력에 관한 국제사회의 흐름에 초창기부터 편승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1979년 발간한 한국원자력20년사 를 보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955년의 한국은 과학연구란 사치품에 속할만한 그런 시절이었다. 과학연구라면 국방과학연구소가 약간의 연구를 해내고 있었다고 할까, 그밖의 대표적 연구기관인 중앙공업연구소나 지질조사소 등은 모두 인건비 정도만을 가지고 겨우 겉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고 대학 또한 마찬가지 실정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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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 원자력의 잠재력에 대해 일찌감치 눈뜰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1989년 발간한 한국원자력30년사 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원자력 연구개발은 일반국민에게는 무관한 이야기로 들렸겠으나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원자력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하여 미국의 제안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에게 영향을 준 분이 w l 시슬러(cisler)였는데 그는 유럽주둔 미군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 휘하에서 전후 유럽의 전력계통 복구사업의 총책임을 지고 단시일 내에 임무를 완수한 공로로 기술자 영웅대접을 받고 있는 전기기술의 대가이다. "



진해에 설치 주장


이 시슬러가 한국의 전력계통 복구사업을 돕기 위해 방한했다가 1956년 7월 8일 인사차 경무대로 이승만을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에너지박스 라 부르는 25㎠의 상자 하나를 내보이며 이만한 양의 석탄으로 4.5㎾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지만 같은 양의 우라늄으로는 무려 2백20만배인 1천2백만㎾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으로서는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언제 그것을 가질 수 있겠소?" "20년후면 가능할 것입니다, 각하!"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하오?" "우선 원자력문제를 전담하는 행정기구를 설치하고 연구개발기관이 있어야 하며 특히 인재양성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50여명의 젊은 과학기술자를 해외에 보내 연수시키는 것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 이 말을 듣고 이승만은 "그렇게 해보겠소"라고 답했다.


실제로 그 이후 사태진행을 보면 이날 시슬러의 조언이 이승만에게 크게 작용했던 것같다. 기구설치, 원자력개발기관설립, 인재해외양성 등이 차례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먼저 기구설치를 보자. 1956년 3월 문교부 기술교육국 안에 원자력과가 처음 설치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행정기구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4월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연구생으로 윤세원 김희규 두 사람이 미국 아르곤(argonne)연구소에 파견됐다. 그후 연구생은 급속도로 증가해 2-3년후에는 1백여명에 육박했다.


과는 설치됐지만 과장은 공석상태였다가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윤세원이 1957년 가을 첫 원자력과장에 취임했고 이어 계속된 예산 및 인력확보를 통해 1959년 1월21일 원자력원이 설치됨으로써 원자력의 기구설치 작업은 일단 완료됐다. 이승만이 당시 원자력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초대원장으로 문교부장관과 자유당 원내총무를 거친 거물 김법린을 임명한데서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법률정비에도 나서 1957년 10월 원자력법이 국회에 제출돼 이듬해 2월22일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3월11일 법률 제483호로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원자력원의 발족과 함께 설립된 원자력연구소에는 1959년 2월3일자로 초창기 원자력도입의 산실역할을 했던 문교부 기술교육국장 박철재가 초대소장으로 취임했다.


인재해외양성과 관련해서는 이런 일화가 전한다. 당시 이승만이 외화절약에 관한 한 외무부장관의 해외출장비까지 확인할 만큼 철저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원자력 연수를 떠나는 소장과학자들이 경무대를 방문했을 때 이승만은 손수 연수생들에게 달러를 쥐어주며 "자네들이 열심히 공부해야 우리나라가 부강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하네"라고 당부했다.



과학한국 견인차역


그밖에 연구용 원자로 구입에도 나서 미국원조 35만달러에 국내예산을 합쳐 73만달러를 들여 비행기로 친다면 연습기에 해당되는 triga mark-Ⅱ를 도입키로 결정하고 1959년 7월14일 원자로 설치공사가 기공됐다.


시험용 원자로가 최초로 가동된 것은 1962년 3월30일. 이 때 이승만은 이미 권좌에서 물러나 하와이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자신이 시작한 사업의 완결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것이다.



그러나 원자로와 관련해 이승만이 뿌린 씨앗은 20여년이 지난 후에야 성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나라는 원자력분야에서 선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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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10.10. 고잔동서 첫 로켓 발사

1959.7.27. 2단, 3단 로켓 발사 성공



[ ....... 제566호 3단 로켓은 79초 동안 날아가 8500m 상공에서 성공적으로 분리되면서 일대 장관을 ........ ]



[인천·부천] 1958년 고잔동서 첫 로켓 발사… '우주 한국'의 꿈을 태동시키다


유동현 '굿모닝 인천' 편집장

2012.08.22



[인천 이야기] 국내 로켓 개발 선구 역할한 과학도시

인천서 발사 시험한 것은 최대 화약공장 있었기 때문
1960년대 아암도 해안에서 인하대, 두 차례 발사 성공
1998년 미사일 공중폭발로 전국적인 관심 끌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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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우리나라 로켓 개발과 인연이 아주 깊다. 미국과 소련이 서로 앞다퉈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던 시절, 우리나라는 1958년 10월 10일 오후 3시 인천 고잔동 해안에서 최초의 국산 로켓 시험 발사를 실시했다.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았고 발사장에는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들만 참석했다. 이날 길이 170㎝, 무게 48㎏, 사거리 8㎞ 등 아주 초보적인 7개의 유도탄이 시험 발사됐다. 그중 여섯 개는 성공했고 한 개는 실패했다. 이 장소에서 로켓 발사를 시험하게 된 것은 당시 국내 최대 화약공장인 한국화약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959년 7월 27일 오후 2시 45분 국방부과학연구소 기술진에 의해 처음으로 제작된 2단, 3단 로켓이 역시 고잔동 해안에서 시험 발사되었다. 이 자리에 이승만 대통령과 모든 국무위원 그리고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 대장을 비롯한 주한 미군 장성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날의 시험 발사는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이를 알게 된 시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대부분 걸어서 고잔동 방면으로 향했다. 아침 10시경이 되자 2만여명의 주민들이 주변 언덕과 들판에 새카맣게 진을 치고 기다렸다. 당시 인천시의 인구가 36만명임을 감안할 때 엄청난 수가 이 역사적이면서도 신기한 광경을 보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이날 5개의 로켓을 발사했는데 모두 성공했다. 특히 기대를 모은 제566호 3단 로켓은 79초 동안 날아가 8500m 상공에서 성공적으로 분리되면서 일대 장관을 이뤘다. 지역의 한 신문은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이날 로켓 발사는 순차적으로 이뤄졌는데 제일 먼저 발사된 OO5호는 지휘반장의 신호가 내리자 "꽝"하는 폭음과 함께 고도 2200m를 30초란 눈 깜짝할 사이 비승(飛昇)하여 관중의 경탄과 박수갈채를 받았다.'


언론은 이 날의 일을 약진하는 우리나라 과학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사건으로 일제히 보도했다. 하지만 이후 로켓 연구와 발사를 주도했던 국방부과학연구소가 예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1961년 해체되면서 관련 연구도 중단되었다.



로켓 연구를 이어간 것은 인하공대였다. 15명으로 구성된 인하공대 병기공학부 로켓반에서는 실험용 로켓을 만들어 1960년 11월 19일 오후 3시 송도 아암도 해안에서 IIT0-1A와 IIT0-2A 등 2개의 로켓을 시험 발사했다. '인하 50년사'에 의하면 원래 이 로켓은 우주항행협회에서 주최하는 전국공과대학 로켓 발사대회에 출품하려고 했던 것인데 인하공대만이 유일하게 제작을 완료해서 결국 단독 발사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육군과 학교 측에서는 50만환을 지원했다.


이날 아암도 해안에는 국방부와 학교 관계자 그리고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로켓은 3시 50분 폭음과 함께 하늘로 치솟아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원래 이 로켓은 최고 도달점에서 낙하산이 자동적으로 펴져 동체를 회수하게끔 설계되었지만 1000피트(약 300m) 상공에서 낙하산 부분이 터져 불에 타 아쉽게도 이를 회수하지는 못했다. 약간의 차질은 있었지만 대학 동아리 학생들이 로켓을 쏘아 올렸다는 것에 세상은 깜짝 놀랐다.


인하공대 로켓반은 1964년 12월 19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카메라와 애완용 몰모트(기니피그)를 태운 관측용 로켓을 발사하는 등 우주를 향한 꿈을 계속 펼쳐나갔다. 이렇듯 인천은 초기 로켓 개발과 발사 실험을 담당하며 '우주 한국'의 꿈이 태동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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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중시했던 독립운동가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이승만 시절 뿌려진 산업화 씨앗들 ‘한강의 기적’ 일구는 초석



마연옥 기자

201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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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 경공업 · 중화학 등 산업 전반의 시장경제 초석 다져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산업화와 자유통상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업적에 대해서는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용삼 경기콘텐츠 진흥원 감사는 “이승만 대통령은 철도와 비료 철강 등 중화학은 물론 제당 모직 등 경공업육성에도 힘썼다” 며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일지감치 원자력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경제개발, 산업화는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와 한각의 기적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특히 이승만은 유학 과정에서 자신이 다니던 학교 근처에 있는 MIT를 보면서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이 필수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대통령 재임 시절 그는 하와이 교포회관을 매각한 대금으로 ‘한국의 MIT'목표로 설립한 인하공대 설립자금으로 투자하기도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인, 기업인, 기술자, 외국 유학생 출신 등을 돈암장에 초청해 나라 발전을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을 했다. 이러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그는 ‘국가발전은 광업에서부터’라는 청사진을 마련해 금과 중석, 석탄을 집중 개발하게 된다.


광업 진흥을 위해서는 험산준령을 넘는 철도 건설이 시급했다. 건국된 지 8개월 만인 1949년 4월 8일, 영주에서 태백 탄전지역인 철암까지 연결하는 영암선 철도건설에 착공했다. 한 달 후인 1949년 5월 3일에는 중앙선 제천역에서 영월발전소를 연결하는 함백선을 착공했다. 영암선은 6.25로 중단되었다가 휴전 후 공사가 재개되어 1955년 12월 31일에, 함백선은 1957년 3월 9일에 완전 개통되었다. 이승만 시절 기본적인 산업철도가 건설되었기에 박정희 대통령 때 태백산 종합개발사업이 본격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 차원의 산업화 전략이 추진되기 시작한 시기는 1953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4월 4일 내각에 철강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의해 대통령령으로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를 국영기업으로 출범시키고, 파괴된 공장 복구를 위해 연산 5만톤 규모의 평로(구식 용광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원조당국이 한국의 철강공장 건설계획에 반대하자 이 대통령은 자체보유불로 공장 건설을 강행했다. 그 결과 서독의 데마그 사가 공사를 수주하여 1956년 하반기 첫 출강식이 거행되었다. 압연공장 건설이 완료되어 1959년부터 철강제품 생산이 개시되었다. 공장 건설과정에서 많은 기술자아 관리자들이 국비로 서독 유학을 가서 신기술을 익혔다. 이들이 바로 박정희 정부에서 포항제철 신화를 일구는 주인공이다.


전후복구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공장 건설을 원했지만, 미국은 한국에서 빈곤과 질병의 해소가 목표였다. 미국은 한국에 원조를 제공하면서 농산물을 제외한 공산품과 비료, 시멘트 등은 일본 제품을 구매하도록 하여 일본의 경제부흥을 유도했다. 일본을 부흥시켜 동북아에서 공산주의의 방파제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한국의 공장 건설을 억제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정책에 맞서기 위해 자체보유불로 공장을 건설하거나 유엔한국재건위원회(운크라 · UNKRA)를 설득해 운크라 자금으로 인천에 판유리공장, 문경에 시멘트 공장을 건설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자 미국 정부도 할 수 없이 충주비료공장 건설에 동의하여 대규모 비료공장 건설을 시작하게 된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 시절 산업 각 분야에서 시장경제의 발전을 위한 초석을 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원자력산업에도 시동을 걸었다. 1956년 2월 우리나라는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 간 협력 협정을 맺었고, 1957년 8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1958년 3월에 원자력법을 제정 공포하고 1959년 1월에 대통령 직속으로 원자력원을 설립했다. 미국으로부터 연구용 원자로(트리가 마크2)를 도입했다.


이승만 정부는 체계적인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경제개발 7개년계획을 수립해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들을 마련했다. 이 계획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3개년계획을 완성했으나 국무회의를 통과한 지 4일 후 4.19가 터져 시행되지 못했다.

장면 정부 시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정되었으나 5.16으로 사장되었다가 박정희 정부 때인 1962년 1월부터 본격 추진된다.



이 뿐만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농지개혁, 교육혁명을 통해 우수 인재 배출 시스템을 만들기도 했다.


http://www.k-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879








[ ..... 經濟는 그래도 평균 5~6%라는 상당히 높은 성장 실적을 .......

...... 鑛工業의 성장률은 같은 기간 중 연평균 14.2% ........ ]




1945~1950年代 經濟의 展開

李 大 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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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50年代의 資本蓄積



흔히들 50년대 경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援助經濟’ 또는 ‘援助依存經濟’로, 그리고 이 시대의 자본축적 패턴을 ‘援助蓄積論’ 또는 ‘援助依存的 消費財工業化’ 과정으로 성격짓고 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근거는, 예컨대 中央政府의 總財政收入 가운데서 援助輸入이 차지하는 비중이 1953~59년간 평균 38.7%에 달하고 GNP에 대한 원조의 비중 역시 1955~59년간 평균 11.8%에 달했으며, 더욱이 원조가 최고로 많이 도입된 1957년 같은 해에는 총재정수입의 52.9% 및 GNP의 13.8%를 원조가 차지할 정도로 그 비중이 높았다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貿易收支면에서도 1953~59년간 평
균 總輸入의 무려 73.7%를 원조물자 수입으로 충당하였는데, 이는 같은 기간중 總輸出의 무려 11배에 달하는 규모였다.57)

이처럼 50년대 경제운영에서 外國援助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속에서 經濟는 그래도 평균 5~6%라는 상당히 높은 성장 실적을 가져왔다.


〈表 2〉1950年代 産業別 成長率 (1954~59년)
(單位:%)

1954 1955 1956 1957 1958 1959

農 林 漁 業 7.7 2.3 -5.3 8.7 6.8 -1.1
鑛 工 業 1
2023-09-27 22:30:34
211.xxx.xxx.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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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 2023-09-27 22:33:03 삭제




[ ..... 經濟는 그래도 평균 5~6%라는 상당히 높은 성장 실적을 .......

...... 鑛工業의 성장률은 같은 기간 중 연평균 14.2% ........ ]




1945~1950年代 經濟의 展開

李 大 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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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50年代의 資本蓄積



흔히들 50년대 경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援助經濟’ 또는 ‘援助依存經濟’로, 그리고 이 시대의 자본축적 패턴을 ‘援助蓄積論’ 또는 ‘援助依存的 消費財工業化’ 과정으로 성격짓고 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근거는, 예컨대 中央政府의 總財政收入 가운데서 援助輸入이 차지하는 비중이 1953~59년간 평균 38.7%에 달하고 GNP에 대한 원조의 비중 역시 1955~59년간 평균 11.8%에 달했으며, 더욱이 원조가 최고로 많이 도입된 1957년 같은 해에는 총재정수입의 52.9% 및 GNP의 13.8%를 원조가 차지할 정도로 그 비중이 높았다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貿易收支면에서도 1953~59년간 평
균 總輸入의 무려 73.7%를 원조물자 수입으로 충당하였는데, 이는 같은 기간중 總輸出의 무려 11배에 달하는 규모였다.57)

이처럼 50년대 경제운영에서 外國援助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속에서 經濟는 그래도 평균 5~6%라는 상당히 높은 성장 실적을 가져왔다.


〈表 2〉1950年代 産業別 成長率 (1954~59년)
(單位:%)

1954 1955 1956 1957 1958 1959

農 林 漁 業 7.7 2.3 -5.3 8.7 6.8 -1.1
鑛 工 業 16.4 22.0 17.0 12.5 7.7 9.3
鑛 業 -19.3 15.9 5.1 32.5 5.0 17.1
製 造 業 20.7 22.5 18.0 11.1 7.9 8.7
SOC ․서비스 2.0 1.5 4.5 7.9 3.6 8.6
G N P 6.0 6.1 1.2 8.8 5.5 4.4

* 자료:韓國銀行, 國民所得年報(1953~1967)(1968), p.52.



〈表 2〉에서 보듯이 農業이 마이너스 성장을 보인 1956년과 59년을 제외하고는 50년대를 통틀어 비교적 높은 성장추세를 보였다. 기간 중 鑛工業의 성장률은 같은 기간 중 연평균 14.2%에 달하였으며, 특히 鑛業이 연평균 9.4%라는 높은 성장률을 보인 것은 당시 重石礦을 비롯한 수출광물의 생산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製造業의 경우, 이 표에서 보는 것처럼 연도별 성장률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으나 1950년대를 통틀어 볼 때 상당한 성장실적을 보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58) 따라서 우리는 이 표를 통해서도 50년대 경제에 대하여 일부의 지적처럼 그렇게 나쁘게 평가할 성질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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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관을 세우는 일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긴요하다 ......... ]



李承晩의 "민중속으로!"


조갑제



<무릇 開明進步하는 길은 대략 네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학교를 세워 학문을 일이키는 것이요, 하나는 民會를 열어 토론을 하는 것이오, 하나는 널리 신문사를 설치하는 것이오, 하나는 도서관을 세우는 일이다. 이 네 가지 중에서 도서관을 세우는 일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긴요하다>


이 글은 李承晩이 고종황제를 ?아내려는 쿠데타 계획에 연루되었다가 한성감옥에 갇혀 있던 시절(1899-1904년)에 쓴 논설이다. 이 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李承晩의 대중노선이다. 그는 국민 전체의 역량이 향상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근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국민들을 교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교육의 수단이 학교, 신문, 도서관, 민회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李承晩은 대중을 설득하여 여론을 형성하고 그리하여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임을 인식한 민주적 정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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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옥 안에 학교와 도서실을 만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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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옥중생활은 감동적이었다. 옥중에서 기독교에 입교한 李承晩은 외국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감옥 안에 학교와 도서실을 만들고, 「제국신문」의 논설을 쓰고, 「영한사전」을 편찬하고, 초인적인 노력으로 콜레라 환자를 돌보고, 「독립정신」을 집필하고, 완벽하리만큼 영어를 익혔다.

金九는 첫 번째 옥중생활 때에 「泰西新史」 등의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책을 읽고 위정척사파에서 개화론자로 변신하는 한편, 문맹인 수인들에게 글을 깨우쳐 주었다.


李承晩과 金九가 감옥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세계적으로도 行刑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한국 역사에서의 문화의 힘, 곧 지금도 한국인의 특성으로 꼽히는 교육열을 말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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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 ..... 李承晩의 건의에 따라 .... 감옥서 안에 학교가 개설 ........

..... 성인반을 개설하여 聖經, 英語, 地理, 文法 등을 ........



..... 외국사람들이 .... 西洋의 開明한 나라에도 그러한 일이 없다 ........

...... 1903년 1월 중순 .... 서적실에서 기거하면서 서적실 운영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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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監獄署學校와 書籍室



李承晩의 옥중활동 가운데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옥중에 학교를 만들어 죄수들을 가르친 일이었다. 李承晩은 1901년 초에 감옥서장 金永善에게 刑政의 개혁을 건의하는 「寄本署長書(기본서장서)」라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한문으로 된 이 장문의 건의서는 李承晩의 서양 선진 제국의 형정에 관한 지식과 함께 한국 형정 개혁에 관한 구체적인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무릇 감옥을 설치한 것은 사실 백성 가운데 불량한 자로 하여금 개과천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泰西(西洋)의 옥정을 살펴보건대 仁愛寬恕(어짐, 사랑, 관용, 용서)의 제 조항 밖에도 별도로 지극히 선한 한 가지 조항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한국이 마땅히 빨리 본받아 시행해야 할 일입니다.… 백성으로서 法律을 위반하는 일은 태반이 직업을 잃어 의지할 곳이 없는 자들로부터 나오는데, 이것 역시 敎化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백성 위에 있는 사람은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그 죄만을 미워하여 죄과에 따라 오직 법으로만 다스리려 합니다.…〉


이처럼 그는 교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몇 가지 형정 개혁방안을 말하고 나서 결론적으로 감옥 안에 학교를 개설할 것을 건의했다.


〈바라건대 각하께서는 이러한 정황을 가엾게 여기시고, 겸하여 學校를 세워 學問을 권장하는 훌륭한 뜻을 본받으십시오. 특별히 한 칸의 방을 허락하시어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을 골라서 한 곳에 모아 수업을 받게 하고, 아울러 등에 불을 켜는 것을 윤허해 주십시오. 필요한 火具는 모두 자력으로 준비하고 주야로 권면하여 切磋(절차: 연마)의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겸하여 심심풀이하는 방편으로 삼고 또한 책을 번역하고 물건을 만들어 비용에 충당하겠습니다.…〉85)



이러한 李承晩의 건의에 따라 1902년 8월에 감옥서 안에 학교가 개설되었다. 옥중학교의 설립 경위와 운영 실태에 대해서는 李承晩 자신이 감리교단에서 발행하던 잡지 「신학월보」에 기고한 「옥중전도」라는 감동적인 신앙고백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우선 옥사의 한 칸을 치우고 각 칸에 수감되어 있는 아이들 수십명을 불러다가 「가갸거겨…」를 써서 읽혔다. 더러는 웃기도 하고, 더러는 흉도 보고, 또 더러는 책망도 했다. 그러나 李承晩은 이러한 일에 개의치 않고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한글을 모두 깨우쳤고 「東國歷史」와 「明心寶鑑」을 어려서부터 배운 아이들 못지 않게 익혔다. 각자의 희망에 따라 英語와 日語도 가르쳤고, 산술은 加減乘除(가감승제)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찬송가 너댓 가지는 「매우 들을 만하게」 불러


글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전도에도 힘써서 아이들은 「신약」을 열심히 읽고, 아침 저녁 기도는 저희들 입으로 하며, 찬송가 너댓 가지는 「매우 들을 만하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에 대해 李承晩은 〈어린 마음이 장래에 어떻게 변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믿을 만한 사람은 이 중 몇 아이만한 사람이 많지 못할지라〉 하고 자부하고 있다.86)


이 시대까지도 한국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미성년범죄자를 별도로 다루는 제도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부모나 가까운 친척 대신에 징역을 사는 어린 代囚(대수)들도 있었다. 시카고에 세계 최초로 소년재판소가 설치된 것은 1899년의 일이며 한국에서는 1923년에 처음으로 소년교도소가 설치되었다.


영어를 큰 소리로 따라 읽고 찬송가를 합창하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하는 아이들과 이들을 가르치는 李承晩의 열성적인 모습은 절망적인 감옥 안의 분위기를 크게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소년죄수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성인죄수 가운데서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李承晩은 감옥서의 협조를 얻어 다시 성인반을 개설하여 聖經, 英語, 地理, 文法 등을 가르쳤다. 이들 어른 죄수들은 거의가 漢文은 말할나위도 없고 다른 外國語를 배운 경험이 있는 政治犯들이었으므로 학업의 성취도 빨랐다. 이 무렵 한성감옥서에 수감된 죄수들은 350여 명쯤 되었는데,87) 이들 가운데에서 40명 가량이 정치범이었다.88)



감옥서장 金永善도 매우 협조적이었다. 그는 토요일마다 大廳(대청)에서 都講(배운 것을 시험하는 것)을 받아 우수한 사람에게는 종이로 상급을 주고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로 절을 시켰다.


이 감옥학교에는 李承晩과 함께 다른 敎師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李承晩과 같이 배재학당에서 공부했던 申興雨였고, 다른 한 사람은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했던 梁起鐸이었다. 신흥우는 1901년 11월23일에 수감되어 3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했고, 양기탁은 1901년 무렵에 구속되어 종신형을 받았다가 1903년 무렵에 석방되었다.89) 신흥우는 어른반을 맡아 가르쳤고, 양기탁은 아이들반을 맡아 가르쳤으며, 李承晩은 두 군데를 다 맡아 가르쳤다. 李承晩은 가끔 여러 주제에 대해 강의를 했는데, 그 내용은 주로 미국의 정기간행물에서 읽은 민주주의에 관한 것들이었다.90)



『감옥학교는 西洋의 開明한 나라에도 없어』



金九와 마찬가지로 李承晩 역시 같이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을 가르칠 생각을 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朝鮮朝의 전통적인 교육열에 기인하는 것이겠으나, 세계의 刑政史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李承晩의 이러한 열성은 그를 지원하는 외국 선교사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신흥우의 아버지 申冕休(신면휴)가 쓴 「獄中開學顚末」이라는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며칠 전에는 외국사람들이 옥중에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기뻐하면서, 西洋의 開明한 나라에도 그러한 일이 없다고 하면서 서적과 식품을 많이 가지고 들어가서 여러 학생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극구 찬양도 하고 갔으니…〉91)


그러면서 신면휴는 李承晩이 어려서 자기에게 배울 때에도 才明이 있었음을 강조했다. 또한 당시의 신문은 옥중학교의 개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감옥서장 金永善씨가 人民의 敎育이 無하야 근일에 犯科處役한 자가 甚多(심다)함을 개탄하야 月前부터 감옥서 내에 學校를 설립하고 죄수를 교육하는데, 교사는 李承晩, 梁義宗(梁起鐸의 初名. 宜鍾이라고도 썼다)씨요 교과서는 개과천선할 책자요, 英語 算術 地誌 등서로 열심 교도하는 고로 英人 벙커씨가 매 일(일요일) 일차씩 와서 교과를 贊務(찬무)하고 서책을 다수 공급하므로…〉92)



감옥서 안의 학교 소식은 밖에서도 큰 관심거리가 되어 많은 내외국 사람들이 연조를 해 왔다. 제물포에 사는 어떤 사람은 익명으로 「제국신문」에 지폐 2원을 보내면서 감옥서학교의 학비에 보태라고 했다. 李承晩은 이 일과 관련하여 〈이원으로 보태어 아이들에게 의복을 고쳐 입히니 참 감동할 만한 일이라〉 하고 적고 있다.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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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감옥을 찾아온 벙커 목사는 모인 아이들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며 매 일요일마다 와서 이들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했다. 이때부터 그는 약속대로 일요일마다 감옥에 와서 아이들이 공부한 것을 문답도 하고 성경도 가르쳤다. 이날 벙커 목사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종교서적 150여 권을 가지고 왔었는데,94) 이것이 기본이 되어 감옥서 안에 서적실이 마련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서적실을 꾸리기 위해서는 우선 책장이 있어야 했다. 李承晩은 〈사백냥 돈을 들여 책장을 만들고…〉라고 적고 있는데,95) 그것은 李承晩 자신이 책장을 직접 만들었다는 뜻이다.96) 李承晩은 손재주가 좋아서 옥중에 있으면서 반닫이 같은 간단한 가구를 만들어 朴씨부인에게 내보내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97)


책장 직접 짜서 書籍室 만들어


책장이 마련되자 李承晩은 여기 저기에 부탁하여 책들을 수집했다. 李承晩이 〈성서공회에서 기꺼이 찬조하여 50원을 위한하고 보조하기를 허락하여 각처에 청구하야 서책을 수합함에, 지어 일본과 상해에 외국 선교사들이 듣고 서책을 연조한 자가 무수한지라〉98)라고 썼듯이, 서적실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은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과 상해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처음 서적실을 개설할 때에는 장서 수가 250여 권 정도였으나 개설한 지 2년이 못 되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때의 監獄署圖書貸出簿가 보존되어 있어서 서적실에 어떤 책들이 비치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도서대출부는 마치 금전 출납부와 같은 대장에 1903년 1월17일에서 1904년 8월31일까지 20개월 동안 죄수들과 간수들이 언제 누가 무슨 책을 대출해가고 또 언제 반납했는지를 적고 있고, 끝에 「監獄署書籍目錄」이라고 하여 서적실에 비치되어 있던 책 523권의 목록이 실려 있다. 성서를 비롯한 기독교 관계서적이 대부분이었으나, 4분의 1 가량은 정치, 경제, 법률, 역사, 과학에 관한 책과 개인전기 등이었다.99)


李承晩은 서적실이 마련되는 1903년 1월 중순부터 유길준의 아우 兪星濬과 함께 서적실에서 기거하면서 서적실 운영을 담당했다. 한성감옥의 감방 수는 모두 20칸이었고, 일련번호가 붙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大廳直房」,「學堂」,「書籍室」과 같은 기능별 방을 비롯하여 「東 1간」,「外東 2간」 등의 별채도 있었다. 물론 「女間」은 따로 있었다. 李承晩은 5월 중순에 「서적실」에서 7간으로 옮겼다가 11월 말부터 이듬해 여름 출옥할 때까지 「학당」에서 지냈다.100)


서적실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는 개설되고 처음 15일 동안에 책을 본 사람이 무려 268명이고, 2월 한 달 동안에 249명이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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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1)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孫世一 논설위원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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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의 옥중도서 보며 깊은 감개 느껴


「백범일지」의 두 번째 옥중생활 이야기 가운데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李承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는 대목이다.



〈서대문감옥에는 역대의 진귀한 보물이 있으니, 지난 날 李承晩 박사가 자기 동지들과 같이 투옥되었을 때에 서양인 친구들과 연락하여 옥중에 도서실을 설치하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진귀한 서적을 구입하여 5, 6년 동안 긴 세월 獄囚에게 나라를 구하고 부흥시키는 방도를 강연했었다.


노역을 쉬는 날 서적고에 쌓인 각종 책자를 각 방에 들여보내 주는데, 그 가운데 이박사의 손때와 눈물 흔적으로 얼룩진 監獄署라는 도장이 찍힌 「廣學類編」, 「泰西新史」 등의 서적을 보았다. 나는 그러한 책자를 볼 때에 그 내용보다는 배알치 못한 이박사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한 느낌이 있었다.〉27)



李承晩이 1899년 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漢城監獄署에서 영어생활을 하면서 감옥서 안에 학교를 개설하여 죄수들을 가르치는 한편 외국선교사들과 聖書公會의 도움을 받아 서적실을 설치하고 자신이 그 서적실에서 기거하면서 수인들로 하여금 基督敎와 新學問을 깨우치게 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月刊朝鮮」 2002년 6월호 「基督敎人이 되어 獄中傳道」 참조).



1908년 10월에 서대문감옥이 신축되어 한성감옥서의 기능이 그곳으로 이관될 때에 한성감옥서의 주요 비품들도 서대문감옥으로 이관되었는데, 이때에 李承晩이 관리했던 서적실도 함께 옮겨졌을 것이다. 이승만이 관리하던 때에 서적실에는 국문서적 52종 165권, 한문서적 223종 338권, 영문서적 20종 20권이 있었는데,28) 어느 정도가 서대문감옥으로 이관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책들 가운데에서 김구가 「廣學類編」과 「泰西新史」 두 권의 이름을 들고 있는 것이 흥미 있다. 「태서신사」는 일찍이 자신이 仁川감옥에서 옥중생활을 할 때에 간수들의 권유로 얻어 읽고 그때까지 衛正斥邪派였던 그가 開化論者로 사상전환을 했을 만큼 큰 영향을 받은 책이었다(「月刊朝鮮」 2002년 5월호, 「衛正斥邪派에서 開化論者로」 참조).



김구는 이 서적들이 〈역대의 진귀한 보물〉의 하나라고 말하면서, 그 서적들을 볼 때에 그 내용보다 〈배알치 못한 李博士의 얼굴〉을 보는 듯한 감개를 느꼈다는 것이다.


김구는 두 번째 영어생활을 할 때까지 이승만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백범일지」의 기술로 미루어 보면, 비록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더라도 이무렵 김구도 獨立協會 이래의 이승만의 활동과 경력에 대하여 숙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승만은 美國留學 이전에 이미 30대의 청년으로서는 유일하게 徐載弼, 尹致昊, 朴泳孝, 李商在 등과 같은 정도로 빈번히 신문 잡지에 그 이름이 보도될 만큼 知名度가 높았는데,29) 그 뒤로 渡美하여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哲學博士(실제는 政治學博士)를 받았다는 사실은 「博士 李承晩씨」의 명성을 한결 드높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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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2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우리 정부 창문 닦아보고 죽게 하소서』









[ ...... 1945년 80%에 이르던 문맹률은 1958년 4.1%로 급감 ........ ]



1954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6년에 걸친 의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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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제3세계 지도자 중 교육에 대한 관심이 가장 높았다. 이 대통령의 담화를 분석했을 때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이 국가안보였고 둘째가 교육이었다.


당시 예산 수준으로 1954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6년에 걸친 의무교육을 단행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로 인해 1945년 80%에 이르던 문맹률은 1958년 4.1%로 급감했다. 이는 4·19혁명 등 민주화의 문화적 토대가 됐으며 1960년대 경제개발의 인적자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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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군은 “전쟁 직후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 (기독교) 신자’가 늘었고 기복신앙이 강화됐다는 설명이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로 미군의 보호 아래 한국의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는 강연내용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김군은 “광복 직후 80%에 이르렀던 문맹률이 의무교육 실시와 군대에서의 교육 덕분에 대폭 줄었다는 이야기가 새로웠다”면서 “당시에 비해 지금의 교육상황이 얼마나 좋은지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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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6년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고 중·고등학교 및 대학교를 대폭 증설해 광복 당시 75%였던 문맹률이었던 대한민국이 문자 해독률이 가장 높은 나라로 변모하는 데 기여했다.


李承晩이 대통령에서 물러날 무렵 대한민국의 대학 진학률이 영국을 앞질렀다. 1950년대에 추진한 교육개혁 덕택에 1960년대 이후 朴正熙 시대의 「경제 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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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엘리트를 형성했던 인물이다.

그는 의무교육제로 문맹자를 없앴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고급인력을 육성했다. 군 장교·하사관 등 선진문물을 배워 온 이들은 60년대 산업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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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만 생기면 국비유학생을 .......

.... 1953년부터 1960년까지 .... 국비유학생의 숫자가 2만여명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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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객원연구원은 이승만 정부가 국가 및 사회발전에 필수적인 유능한 지식인과 엔지니어들을 길러냈고, 산업화의 기반을 다졌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은 정부에 돈만 생기면 국비유학생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 고급기술을 배워오도록 했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해외 유학이나 연수를 다녀온 국비유학생의 숫자가 2만여명에 달했다.

박정희 시절의 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한 엘리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승만 시절 국비로 유학을 다녀온 인재들이었다.”


김 연구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발전의 기틀을 다졌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설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 끝난 뒤 ▲화천발전소 2호 발전 ▲디젤기관차 운행 ▲충주비료공장 기공 ▲영암선 철도 전 구간 개통 ▲국내최초 원자력 전시회 ▲대한양회 문경공장 준공 ▲한강인도교 재건 ▲국산 판유리 미국 최초 수출 ▲외자도입촉진법 시행령 공포 ▲부산 디젤 전기기관차 공장 건설 등을 통해 경제개발을 위한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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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핫바지들만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란 말이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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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교육부문에 대대적인 투자와 복구를 통해 문맹을 퇴치하고 고급 인재를 육성하여 산업사회에 필요한 인력을 대량 배출하는 바탕을 마련했다고 지적한다. 이승만 정부가 총력을 기울인 것은 누가 뭐래도 교육이었고, 산업화의 시초를 교육으로부터 시작했다. 국가 지도부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교육시설의 복구와 개선을 국가운영의 최우선과제로 삼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교육시설 확충을 위해 폐쇄됐던 교육계를 개방하여 사립학교를 대대적으로 허가했다. 그리하여 사립학교가 곳곳에서 설립되면서 전체 숫자가 공립학교를 능가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이런 노력으로 이승만 시대에 이미 우리는 교육 분야에서 세계 선진국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올라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 부산 영도에 전시(戰時)연합대학을 설립했다. 대학이래야 천막을 치고 칠판 하나 걸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시 연합대학 문을 연 후 국내 대학 재학생들은 다 등록시켰다. 그리고 내각에 지시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생들은 보존해야 한다”며 군에 입대시키지 않았다. 그러자 사방에서 “못 배운 핫바지들만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란 말이냐” 하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통령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조금만 더 견디면 전쟁이 끝난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나라를 새로 건설해야 한다. 전후 복구와 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인재가 필요하다. 그 때를 위해서 대학 재학생들을 보존시켜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그의 혜안은 그대로 적중했다. 교육보급율은 경제발전에 직결되는 것이 몇 년 후부터 서서히 그 성과가 나타난다.


1950년대 정부 예산 구성비를 국방비가 전체 예산의 50%, 문교 예산이 20%를 차지했다. 국방비를 제외하면 전체 예산 중 문교 예산이 비중이 가장 클 정도로 교육을 중시한 시대였다. 임영신(任永信)씨가 중앙대학교를 세우고 건물 등 시설을 짓기 위해 기자재를 외국서 수입할 때 정부는 무관세로 통관시켜 학교시설 확장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교육에 대한 투자는 당대에는 별다른 혜택을 보지 못했지만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0년대에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교육이었다. 만약 이승만 시대에 교육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면 박정희 시절의 고도성장이 과연 가능했을까.



기술원조


미국의 원조 중에서 우리 정부 관계자들이 유효 적절하게 사용한 것이 미국 원조 중에 포함되어 있던 ‘기술원조’라는 항목이었다. 이것은 원조를 제공받는 나라의 경제 사회 발전에 필요한 인재양성이나, 기술습득, 행정능력의 효율성을 높이는 작업, 혹은 그 나라가 필요로 하는 산업기술 인력의 파견 등에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었다.


이승만 정부에서 부흥부장관, 재무부장관을 지낸 송인상 효성 고문은 자서전에서 “미국의 원조계획이 한국에 남긴 것 중에서 가장 성공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기술원조계획이었다고 답변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다.

그 시절에 정부 관료들은 대부분 일본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과 대화가 잘 통하질 않았다. 그래서 지도층 인사들은 “기술원조 자금으로 인재를 길러 사회 각계에 진출시켜야 나라 운영이 제대로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시절 기술원조 자금으로 이루어진 인재육성 사례는 다음과 같다.


우선 서울대와 미네소타대학의 공대ㆍ의대ㆍ농대간에 700만 달러를 들여 계약을 체결하여 교수를 상호교류하고, 우리 학생 상당수를 미네소타대학에 유학을 보냈다. 게다가 연구와 관련된 많은 기계와 설비들이 미네소타대학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 나라 박사 중에 미네소타대학 박사가 가장 많은 것은 이승만 시절에 노력한 결과다. 중고등학교 교육 프로그램은 피보디사범대학과 연계해서 개선작업을 시작했다.


또 워싱턴대학과 연세대ㆍ고려대간에 협정을 맺어 경영학과를 신설했다. 해방 후엔 화신의 박흥식씨나 경방의 김연수씨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에 경영자다운 경영자가 없었는데, 연세대와 고려대에 경영학과가 설치됨으로써 많은 인재들이 기업경영의 선진기법을 공부하는 기회를 맞게 되어 우리 나라 기업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이밖에도 서울대학교의 행정대학원, 국방부 산하의 국방대학원이 미국의 기술원조자금으로 설립되었다.



이밖에도 AID 자금으로 정부 관리, 기업체 사원, 기술자들을 외국에 파견해 3개월, 6개월, 1년 단위로 연수를 시켰다. 그 하나의 사례가 발전소 운영요원 연수였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당인리(10만kW)와 묵호(5만kW), 마산(5만kW)에 화력발전소가 건설됐다. 이 발전소 운영을 위해 이공계통의 젊은 기술자들을 기술원조 자금으로 디트로이트의 에디슨 전기회사에 연수를 보냈다.


이들이 귀국해 최신식 발전소를 차질 없이 운영한 것이다. 당시 10만 kW의 당인리 발전소에 근무한 인원은 총 180명. 미국이 똑같은 규모의 화력발전소를 파키스탄에 지어주었는데, 그곳 운영요원은 1500명이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우리 엔지니어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여 최소 인원으로 발전소를 원활히 운영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국 정부가 필요로 하는 미국인 기술자도 기술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에 초청할 수 있었다. 우리 정부는 각 분야에서 미국 원조기술단을 초빙했는데, 그 중 가장 성공을 거둔 사례는 철도였다. 우리 나라에 온 미국 철도기술 고문단은 총 25명이었다. 그런데 다른 분야와 달리 철도 고문단은 현장 기술자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드 그로 고문단장은 텍사스주의 철도기사 출신이었는데 이들이 불철주야 노력하여 서울-부산 간 정시운행 시스템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시절만 해도 혼란한 사회 분위기, 정비되지 않은 운행 시스템 등으로 인해 기차가 연착하지 않고 정시에 도착한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무렵 우리 나라 철도는 100% 증기기관차로 운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기관차 연료인 유연탄이 비밀리에 명동 음식점으로 흘러나가 연료로 사용됨으로써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한미 양측의 담당자들은 디젤기관차를 도입하여 연료를 탱크에 넣고 봉인하여 운행하면 연료의 외부 유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에 합의했다. 더구나 증기기관차는 열효율이 5%인 데 비해 디젤기관차는 18%나 된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리하여 제너럴일렉트릭에서 도입한 디젤 기관차 27대가 도착했고, 이를 운행할 기관사 양성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미국 철도 고문단은 한국인들의 천재적인 소질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런 각고노력 끝에 우리 나라는 1960년대 초까지 수송의 애로를 완전 타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 미국의 기술원조는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고, 특히 교육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계기가 됐다. 박정희 시절의 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한 엘리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승만 시절에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미국 원조자금으로 정부 관계자들은 문맹퇴치에 앞장섰고,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여 세계 유수의 교육수준을 유지하는 나라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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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5)
이승만의 공헌-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교육시설 확충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 ........ 해방 당시 약 80% ...문맹률을 1960년까지 10% 이하 수준으로 .......

...... 건국 당시 ... 대학생수는 7,800여명에서 9만7,800여 명으로 ......

..... 당시 영국의 대학생 수에 맞먹는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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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교육분야에서), 청년기부터 교육입국(敎育立國)론을 외쳤고 박사학위 취득 후 장기간 교육에 종사했던 이 대통령은 집권하자 6년제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하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여 해방 당시 약 80%이었던 한국인의 문맹률을 1960년까지 10% 이하 수준으로 낮추는 데 성공하였다. 동시에 그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및 대학(교) 등 각급 학교의 수를 대폭 증설하였다.


그 결과 대학(교)의 예를 들면 건국 당시 19개에 불과했던 대학(교)의 수가 63개교로, 즉 3.3배 증가하였고 대학생수는 7,800여명에서 9만7,800여 명으로 10배 이상 증폭하였다. 9만7,800명이라는 수치는 당시 영국의 대학생 수에 맞먹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고급 인력 양성에 관심을 기울여 청년들의 해외 유학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한국에는 전례 없는 ‘유학 붐’이 일어나 1953~1966년 약 7,400명의 젊은이가 해외유학인정시험을 거쳐 해외 특히 미국으로 유학하였으며 그 중 약 1,500명이 1982년까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들 정규 유학생 이외에 미국경제원조처(USOM)가 후원하는 ‘교육교환계획’에 따라 약 2,500명의 고급 인력이 유학, 단기 훈련, 단기 시찰 등 명목으로 외국(주로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미 국무성이 지원하는 ‘지도자 단기시찰 계획’의 일환으로 940여 명의 정치인, 고급 관료 및 교육자(특히 영어교사)들이 미국을 다녀왔다.


이상과 같은 교육개혁조치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에는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육기적(敎育奇蹟)’이 일어났다. 이 기적은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문화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에 양산된 고급인력은 1960년대의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알려진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었다.


말하자면 이 대통령은 한국민의 교육수준을 현격히 상향시키고 수많은 고급인재를 길러냄으로써 1961년 이후 남한의 눈부신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기틀을 조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역사상 ‘교육대통령’으로서 길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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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마치 '광란의 시대'를 연상하는 '대약진' 운동의 어처구니없는 정책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이러한 정책이 실시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국민의 문맹율도 일조하였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蔣介石)도 자신이 실패의 원인을 중국인들의 문맹에 두고 있다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공산혁명이 성공한 1949년의 중국인들의 문맹률은 80%에 달하였고, '대약진' 운동을 거친 뒤인 1964년의 일부 조작된 통계수치로도 문맹률이 52%에 달해 국민의 절반이 문맹이었던 시기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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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했을 때,
13세 이상 인구의 80%가 문맹자였다>



해방이 되어 그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한국인은 13세 이상 인구의 80%가 어떤 형태의 교육도 받지 못했던 문맹자 국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서둘러 1949년에 초등교육을 위한 의무교육제를 도입하고, 매년 정부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입하였다. 그 결과로 그의 대통령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1959년에 대한민국은 취학 적령기 아동의 95%가 의무교육을 받는, 그리고 순 문맹 율이 22.1%대로 낮아진 개화된 나라로 바뀌었다.


초등교육의 확산은 고등교육의 확산으로도 이어져 대학 숫자는 해방 직후의 19개교에서 1960년의 63개교로 크게 늘어났고, 대학생 숫자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6.25전쟁 당시 대학생에 대한 병역 혜택의 조치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일단 양적인 측면에서 고등교육 혁명이 일어난 것은 틀림이 없었다.


이러한 교육인구의 증가는 1960년대 이후에 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산업화를 시작하려는 나라에 이승만 시대의 교육은 우수하고 풍부한 인적 자원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급인력의 양성은 대한민국 정부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최고 수준의 문명국인 미국과의 연계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한국을 해양문명권의 중심인 미국과 군사적, 문명적으로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그러한 결합의 계기는 한국과 미국이 동맹국으로 싸운 6.25전쟁을 통해서 찾아 왔다. 새로운 엘리트의 대량 양성은 군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군대는 한 때 80만 명 선까지 갑자기 커지기도 하였지만, 1954년에만 보더라도 병력 65만 명에 정부예산의 40%를 사용하는 막강한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군대의 유지를 위해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아냈다. 매년 1천명 이상의 장교들이 미국에 파견되었다. 그의 통치기간에 기술실무를 맡은 하사관의 단기 파견 연수는 거의 1만 명에 이르렀다. 한국이 그와 같은 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냉전에서 반공의 첨병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이 배워 온 군사기술은 대부분이 일반사회에서도 필요로 하는 요긴한 것들이었다. 특히 조직 관리의 기술은 무질서한 한국사회에 합리적이고 능률적인 행정체계를 도입케 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유능한 장교집단은 후일 한국 사회에 기획과 조직의 개념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강의 기적’은 대한민국을 해양문명권에
편입시킨 이승만의 ‘文明史的 전환’서 시작>


그러한 사회 분위기에 맞추어 선진문명을 배우기 위한 해외유학 붐이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해외 유학을 적극 권유하였다. 그래서 나라가 경제가 어려운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는 매년 600명 이상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특히 1956년부터는 미네소타 계획에 따라 서울대학교의 많은 교수들이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미국 문명의 습득은 미국의 원조 가운데 포함된 기술 원조를 통해 가장 잘 이루어졌다. 전시긴급구호(CRIK), 대외 활동처(FOA), 국제 협력처(ICA) 등의 원조 계획에 따라,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가 훈련 목적으로 미국에 파견되었다. 그것은 한국과 미국 사이에 상호방위조약이 개정된 1956년부터 특히 활발해졌다.


이승만 통치기에 이루어진 미국의 최고 기술 지원이 원자력 부문 이었는데, 1956년에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간의 협력을 위한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농축 우라늄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트리가마크Ⅱ 연구용 원자로를 구입하고, 그 사업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정부는 과학자들을 제작업체인 제네럴 일렉트릭 사로 파견하여 훈련을 받게 하였다. 1956년부터 1963년까지 200여명이 기술훈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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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forum

한국논단 2008년 1월호
<건국 60주년 특집③>

이주영 / 건국대 사학과 명예교수








[ ...... 초등학교 취학률이 .... 1959년에는 96.4퍼센트 ..........

..... 중학생이 .... 1960년에 가면 65만 ..........



..... 대학생 .... 1960년 ... 9만7819명 .........

..... 10만 명당 고등 교육 .... 1960년 .... 일본은 750명, 한국은 367명, ....... ]




한국이 잘된 건 일본 가르침 덕분 뉴라이트의 헛소리


김덕련 기자, 서어리 기자

2015.01.24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3 경제 개발, 아홉 번째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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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해방되면서 문화적, 교육적 혁명을 맞이했다. 일제 때 초등학교 취학률이 얼마나 낮았느냐 하는 건 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일본은 1904년에 이미 초등학교 취학률이 94.4퍼센트가 돼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가고 있었는데, 한국은 일본이 98.1퍼센트로 세계 최고 수준으로 갔을 때인 1911년에 적령 아동의 초등학교 취학률이 1.7퍼센트였다. 1929년에도 18.6퍼센트밖에 안 됐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가 한국인을 동원하면서 취학률이 좀 높아지지만, 일제 시기 내내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그런데 해방되면서 초등학교 취학률이 갑자기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1945년에 초등학교에 다닌 학생들이 136만여 명으로 통계가 나와 있는데, 이게 1955년에 294만여 명, 즉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온다. 1960년에는 408만 명이나 된다. 그러면서 해방 직후에 이미 70퍼센트를 훌쩍 뛰어넘는 것을 볼 수 있고, 의무 교육을 실시한 직후인 1954년에는 82.5퍼센트가 된다. 1958년에는 94.6퍼센트,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9년에는 96.4퍼센트가 된다. 96.4퍼센트라고 하면 유럽에서도 이만큼 되는 나라가 많지 않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초등학교 취학률로는 선진 대열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당시 학교 유리창도 깨진 게 많았고, 초등학교 교육 환경이 말할 수 없이 안 좋았다. 그리고 제대로 가르쳤느냐, 교사 질은 어땠느냐 하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때 대량으로 한글세대가 탄생하게 된다. 엄청난 한글세대의 탄생을 이 시기에 맞이하게 된다.



평준화와 더불어 한국을 역동적인 사회로 만든 교육열과 한글세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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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일제 때는 한국에 문맹자가 참 많았다. 예컨대 문맹자가 1930년에 77퍼센트였고 1933년에 72퍼센트였다. 그런데 해방 후에는 한국인이 초등학교에는 100퍼센트 가깝게 들어갔고, 13세 이상 인구 중에서는 1960년 통계를 보면 159만 명이 글을 모르는 것으로 돼 있다. 문맹률이 27.9퍼센트, 그중 남자는 15.8퍼센트로 나온다. 무학자 비율도 1955년에는 50.4퍼센트, 1960년에는 39.5퍼센트로 대폭 줄어든다. 그 후에는 훨씬 더 줄어든다. 거듭 얘기하지만 여기서 대량의 한글세대가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중학생 숫자가 해방 직후에 엄청 늘어나는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일제 때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중학생은 더더욱 적었다.

한국에 와 있는 일본인이 1910년의 경우 한반도 거주자의 1.3퍼센트, 1940년에는 3.0퍼센트였다. 그래서 한반도 거주자 중에서 일본인이 대략 40분의 1 정도였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중등학교에 다닌 학생 수를 살펴보면 일본인 숫자와 한국인 숫자가 거의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인은 일본인의 40분의 1밖에 중등학교에 못 들어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예컨대 1922년 조선총독부 통계를 보면 한국인은 7691명으로 돼 있는데, 그 당시 인구의 2퍼센트를 조금 넘던 일본인은 1만2567명으로 한국인보다 월등 많았다. 1938년에 가면 한국인은 2만4473명, 3퍼센트 정도 되던 일본인은 2만10명으로 일본인이 약간 적었다.


이때까지 한국인이 다닌 학교는 고등보통학교, '고보'라고 보통 말했고 여자의 경우 여자고등보통학교, '여고보'라고 했다. 이와 달리 일본인이 다닌 학교는 중학교였다. 초등학교도 이름이 달랐다. 한반도에 있던 일본인이 다닌 학교는 소학교, 한국인이 다닌 학교는 보통학교였다. 이름만 격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교육 수준도 떨어졌다. 하여튼 중등학교에 다닐 수 있는 숫자가 무척 적었다. 그렇게 일본은 문맹 수준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인이 교육 받는 것을 제한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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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통계를 보면 중학생이, 이 당시에는 중·고등학교가 합쳐 있었는데, 8만4572명으로 나온다. 일제 때보다 숫자가 많이 늘어났다. 이게 1955년에 가면 47만5302명이 된다. 5배 이상으로 급증한 것이다. 1960년에 가면 65만5123명으로 나온다. 고등학생 숫자도 1955년에, 이때는 중·고등학교가 분리됐을 때인데, 이미 21만2518명에 이르렀고, 1960년에 32만3693명이 된다.


그러니까 이 시기에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온 한글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세대들은 1960년대의 노동 집약적 경공업에서는 전부 다 일할 수 있었다. 일하는 데 조금도 지장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1970년대에 중화학 공업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에는 소비재 중화학 공업, 그러니까 석유화학 계통, 조선, 가정용 전기·전자 제품을 만드는 중화학 공업이 많았는데 여기에서도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거의 다 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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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대학생의 경우 숫자로만 따지면 일제 때보다 훨씬 비율이 높다. 사실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그나마 일부 있던 대학 과정을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면서 없애버리지 않았나. 그러고 나서 대학을 세우지 않았다. 일본의 중요 지역, 그러니까 교토, 도쿄에는 대학이 몇 개씩 있었고 다른 어지간한 도시에도 대학이 다 있었으며 중국만 하더라도 큰 도시에는 몇 개씩 있었던 건데, 도대체 한국에는 나라 전체를 통틀어서 대학을 안 세운 것이다. 그러니까 1920년대 초에 민립대 기성회라는 것이 생긴 것이고, 그러자 일제가 할 수 없이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라는 것을 만든 것 아니겠나.


이 경성제국대학이 일제 시기를 통틀어 유일한 대학이었는데, 뽑는 숫자도 얼마 안 됐고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1920년대에서 1930년대를 기준으로 하면 한국인은 20퍼센트에서 30퍼센트밖에 안 됐다. 정원이 얼마 안 된 이 학교에조차 대부분 일본인이 들어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한국인은 특별히 돈이 많거나 아르바이트를 정말 열심히 해서 일본이나 미국 등에서 유학을 하는 방법 이외에는, 국내에서 대학을 다니기가 아주 어려웠다.

전문학교라는 것도 몇 개밖에 안 됐다. 서울을 중심으로 의학전문학교니 고등사범학교니 하는 몇 개의 전문학교가 있었다. 이런 전문학교도 대개 20퍼센트, 많아야 30퍼센트만 한국 학생을 뽑았고 나머지는 한반도 거주자의 2퍼센트에서 3퍼센트밖에 안 되던 일본인으로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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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8.15 당시에는 대학이 갑자기 늘어나서 19개나 된다. 통계를 보면 대학생 숫자가 7819명으로 나와 있다. 1952년에는 3만2542명, 1955년에는 대학 숫자도 많이 늘어나서 53개 학교에 7만8649명, 그리고 4월혁명이 난 1960년에는 남학생 8만770명, 여학생 1만7049명 해서 총 9만7819명으로 통계가 나온다. 대학생 숫자는 그 뒤에 엄청나게 늘어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시기에도 일제 때와는 비교가 안 된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숫자를 비교한 통계가 있는데, 거기서 한국은 수준이 아주 높게 나온다. 1955년에 인구 10만 명당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일본은 470명으로 나와 있는데, 한국은 177명이고 대만은 그 반절인 88명밖에 안 된다. 버마는 18명, 인도는 영국이 해놨기 때문에 112명이었다. 1960년 통계를 보더라도 일본은 750명, 한국은 367명, 대만은 많이 올라와서 329명인데 한국보다는 적었다. 버마는 63명, 인도는 220명이었다. 그러니까 교육 수준에 의해서 아시아에서 한국과 대만이 일본 다음으로 경제 발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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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3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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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이오 전란의 포화 속에서도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학교육은 쉬지 않았다. 전쟁 중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병역혜택을 주었다. 1960년에는 대학수가 65개로 늘어나 대학생 10만 명 시대를 열었다. 이 증가는 교육에 정부예산의 10퍼센트를 담당하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교육이 후일 경제를 일으키는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지만 이승만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만든 역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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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1.18.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



평화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평화선(平和線)은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대통령령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함으로써 설정된 대한민국과 주변국가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이다. 미국, 중화인민공화국, 일본에서는 이승만 라인(영어: Syngman Rhee line, 중국어 정체: 李承晩線, 일본어: 李承晩ライン)으로 부른다. 이는 오늘날 배타적 경제 수역과 비슷한 개념이다. 이렇게 해양 경계선이 획정되었는데 1952년 2월 8일 이승만 정부는 동선을 설정한 주목적은 한·일 양국간의 평화유지에 있다고 발표함으로써[1] 이를 "평화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 평화선의 설정목적은 해양분할이 국제적 경향이 됨에 따라 정당방위책으로 해안 어족(魚族)의 보호와 생물자원의 육성을 기하고, 특히 발달한 일본 어업활동으로부터 영세적인 한국어민을 보호하려는 데 있었으며, 국제관계상 합법적인 조치였다. [1]이 경계선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포함하고 있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였고[2],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2] 이승만은 이를 묵살하였다. 이 경계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미일평화조약이 1952년에 발효됨에 따라 무효화되자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하고자 한 것이다. 한반도 주변 수역 50-100해리의 범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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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평화선이 설정된 직접동기는 맥아더 라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종전 직후 미국을 중심한 연합국은 일본 어업이 세계어장에 출어하여 남획(濫獲)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1947년 2월 4일 맥아더사령부 명령으로 일본어선의 출어금지선을 책정하였기 때문에 한국은 직접적으로 큰 혜택을 받아왔다. 그러나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조인됨으로써 맥아더 라인은 자동적으로 철회될 운명(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1952년 4월에 발효할 예정이었다.)에 있었고, 그것은 곧 일본어선의 한국연안 대거출어·남획을 가져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이에 대한 사전준비 대책으로 평화선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1]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의 내용


1952년 당시는 한반도는 한국 전쟁 중이었다. 부산을 임시 수도로 한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은 한국의 연안수역보호를 통해 수산 자원과 광물, 공산주의 국가로부터의 안보와 인근 국가로부터의 영토주권을 주장하기 위한 선언을 만들게 되었다. 공식명칭은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선언'으로서 1952년 1월 18일 국무원 공고 제14호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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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동선언 제3항 규정에 따라 1952년 12월 12일 '어업자원보호법'을 제정, 동선 내의 해양의 어업자원보호를 위한 관리수역을 명시하고(제1조), 동 수역안에서 어업활동을 하려는 자는 주무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제2조), 국적여하를 불문하고 한국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이를 위반하면 처벌받게 되었다. [1]


한국 정부는 이러한 전례가 없다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1945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 의한 '연안어업에 대한 선언'과 '해저와 지하자원에 관한 선언' 그리고 아르헨티나(1946년), 파나마(1946년), 칠레(1947년), 코스타리카(1948년), 엘살바도르(1950년), 온두라스(1951년), 칠레, 페루, 에콰도르(1952년) 등 다른 나라에서 채택한 유사한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선언은 이후 한국의 수역 내에서 외국 선박의 불법 어로 행위를 단속하는 근거가 되었다.



일본의 반응


일본은 평화선의 선언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공해자유의 원칙을 내세워 반대하였다. 선언 직후인 1952년 1월 24일 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미국·캐나다·일본의 어업 협정에서 공해의 자유가 인정된 것과 같이 공해 자유의 원칙이 인정되어야 한다.
2.공해에 국가 주권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전례는 없다.
3.한일 양국의 친선을 위해 이는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한국보다 발달된 수산업으로 이 지역에서 당시 연간 23만 톤 이상의 어획고를 올려오던 일본으로서는 경제적 타격과 함께 영토의 위협으로 여긴 여론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또한 1월 28일에는 일본의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독도를 경계선 안에 넣은 것은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고 주장하였다.



대치 국면의 전개

대한민국의 강경 정책


대한민국은 선언 이후 1952년 10월 14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2호로 '포획심판령'을 제정 공포하고 포획심판소및 고등포획심판소를 개설 하였으며 1953년 해양경찰대 설치계획을 수립하고 이해말에 180톤급 경비정 6척으로 부산에서 한국해양경찰대를 창설하여 평화선을 침범하는 외국선박과 밀무역을 단속하도록 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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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2월 4일 일본어선 제1대방환호와 제2대방환호가 제주도 남쪽 해안의 평화선을 넘어 조업하다가 경찰에 적발되어 나포 도중 총격으로 제1대방환호의 선장 세토준지로(瀬戸重次郎)가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후 대한민국 영해를 넘나드는 일본 선박에 대해서는 체포, 억류 등의 강경대응을 하여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을 나포, 억류하였으며[4] 나포한 일본 배를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게 하기도 했다[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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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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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泳煥과 韓圭卨이 高宗에게 건의


그러나 閔泳煥과 韓圭卨 등 李承晩을 신임하는 중신들이 高宗에게 그를 미국에 밀파하도록 건의한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李承晩은 민영환과 한규설이 처음에는 자기를 駐美公使로 임명시키려 했으나 日本人들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35) 또 李承晩은 뒷날 다음과 같이 술회하기도 했다.



〈… 외교방면에 국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되었다. 그래서 민영환, 한규설, 金宗漢(김종한), 金嘉鎭(김가진)제씨와 상의하고 그중 한 사람이 주미공사의 책임을 띠고 나가서 평화회의시에 해외활동을 미리 준비치 않을 수 없다 하여 그 방법으로 주선하여 보다가, 일사(日使:日本公使)의 조종에 막가내하(莫可奈何:막무가내)임을 각득(覺得:깨달아 앎)하고, 나를 대행하려 하여 보아도 역시 불가능하므로 나를 위탁하여 조용히 도미케 한 고로… 〉36)



일본군의 점령 아래 일본공사의 내정간섭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는 직접적 외교활동을 벌이기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미국정부에 대해 1882년의 朝美修好條規에 따른 지원을 교섭하고 앞으로 있을 러-일 강화회의에 대비할 사람을 駐美公使館에 확보해 두는 것은 高宗과 한국정부로서는 절실히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먼저 제안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고 李承晩은 적고 있다. 〈그때에 나는 閔公이나 民族黨에서 어느 누구를 해외로 보내도록 하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서 그럴 수 없었다〉37)는 것이다. 올리버도 李承晩이 민영환과 한규설에게 미국을 방문하도록 설득했다고 적고 있다.38) 독립유지를 위한 지원을 교섭할 밀사 파견이 李承晩의 말대로 그 자신의 아이디어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1907년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르기까지 高宗의 거듭된 밀사파견의 효시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閔泳煥과 韓圭卨은 자기들 대신에 李承晩을 미국에 가도록 권유했다. 민영환은 李承晩에게 가족의 뒷일을 자기가 돌보아 줄 것이며, 李承晩이 워싱턴에 있는 한국공사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李承晩이 「韓國獨立黨」또는 「民族黨」이라고 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개화파 관료들을 지칭한 것이므로, 그의 미국행은 민영환이나 한규설과의 상의에 의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高宗의 부름을 즉석에서 거절


이 무렵의 어느 날 李承晩이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니까 궁중에서 온 시녀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가 李承晩을 단독으로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李承晩은 황제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에 대한 평소의 증오감이 복받쳐 올라와 즉석에서 거절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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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李承晩은 여러 통의 「外交文書」를 트렁크 속에 숨겨가지고 급히 미국으로 떠났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때에 그가 지니고 떠난 「외교문서」란 閔泳煥과 韓圭卨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하원의원 앞으로 써 준 편지와 민영환이 주미공사에게 보내는 편지였다.41)


딘스모어는 1887년부터 2년 동안 주한미국공사로 와 있던 사람이다. 韓圭卨은 李承晩에게 여비로 50원을 보탰고, 독립협회 회장과 農商工部 大臣을 지낸 金嘉鎭도 李承晩의 여비를 보탰다.42) 한규설은 자신이 喪中(상중)이므로 격식을 갖추지 못하고 노자를 보태니 꺼리지 말고 받아달라는 정중한 편지를 함께 보냈다.43)


그런데 李承晩의 여비조달이 이처럼 개인차원의 구차한 방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미국행이 고종의 「밀사」 임무가 아니라 민영환과 한규설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 관료들의 「밀사」 임무였음을 말해 준다.


알렌公使는 소개장 써주지 않아


李承晩의 도미 목적은 그러한 「밀사」임무만이 아니었다. 아마 그보다도 더 직접적인 목적은 留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게일, 언더우드, 벙커, 질레트, 스크랜턴, 프레스턴, 존스 등 한국에 와 있던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미국 敎會 지도자들이나 그밖에 도움을 줄 만한 주요인사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추천서를 무려 19통이나 받아 놓았던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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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5)








[ ...... 1905년 7월에는 .... 이승만을 밀사로 선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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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7월에는 러일간의 강화담판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자는 취지로 이승만을 밀사로 선정하였다.11) 이승만은 독립협회운동 당시 급진공화세력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선교사들의 배려로 1904년 8월 특별사면을 받고 11월 미국으로 출국한 상태였다.


당시 정부대신 중 미국과 가까웠던 민영환과 한규설은 이승만에게 미국정부 요로에 한국의 독립보전을 요청하는 서신을 전달하게 하였고, 이승만은 주한 미국공사였던 딘스모어(H. A. Dinsmore)의 주선으로 1905년 1월 상순에서 2월 사이에 미국무장관 헤이(John Hay)를 면담한 바 있었다.12) 이때 다시 이
승만을 강화담판 밀사로 선정했던 것은 러일간의 협상이 한국에 유리하게 결정되도록 잘 교섭해 보라는 지시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8월 4일 하와이 교민 8,000명을 대표해서 미국에 온 목사 윤병구와 함께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하고 한국의 주권과 독립보전에 대한 청원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친일파인 주미 한국대리공사 김윤정이 한국정부의 공식 훈령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면서 이들의 對美교섭을 지원하지 않음으로써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13) 물론 미국이 이미 태프트-가츠라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승인한 상태였으므로 이승만 등의 루즈벨트 면담이 특별한 결과를 낳을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의 면담에도 불구하고 러일강화조약이 일본의 한국보호권을 승인하는 것으로 결정되자, 고종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를 1905년 10월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 친서를 전달했다. 1882년 朝美條約 제1조의 ‘居中調整’조항에 의거하여 미국이 나서서 한일의정서를 파기하고 열강의 공동보호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견제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保護條約’이 체결된 직후인 11월 26일에는 헐버트에게 勒約은 무효라는 긴급 전문을 보냈고, 주프랑스공사 閔泳讚에게도 밀명을 내려 12월 11일 미국무장관 루트를 면담하게 하였다. 그러나 루트는 ‘한국은 1904년 2월의 한일의정서와 8월의 顧問協約 체결로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 상태가 되었으므로 미국은 어떠한 협조도 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전 주한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도 고종으로부터 운동자금 1만불과 황제의 어새가 압인된 백지 친서 등을 전달받고 미국정부를 상대로 교섭을 벌였으나 미국은 고종의 호소를 모두 묵살하였다. 미국정부의 입장은 일관되게 친일적이었기 때문이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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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 국 사 편 찬 위 원 회

Ⅴ. 대한제국의 종말
1. 고종의 국권회복 노력과 강제퇴위
1) 밀사파견 외교의 전개








190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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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閔泳煥과 韓圭卨의 편지를 가지고 아칸소州 출신 하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를 찾아갔다. 딘스모어는 1887년부터 1888년까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인물로서 그의 밑에서 서기관으로 일했던 알렌에 따르면 〈냉정하고 빈틈없는 法律家〉이며 〈양심적인 크리스찬 紳士〉였다.5) 그는 동아시아의 정세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우호적이었다.


딘스모어는 옛 친구들의 소식을 들어 기쁘다면서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의 면담을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헤이는 매킨리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있던 1898년에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정책을 제창한 인물이었다. 그의 문호개방정책은 중국에 대한 열강의 통상기회의 균등과 영토보전을 강조함으로써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을 방지했고 이후 오랫동안 미국의 동아시아정책 기조가 되었다. 李承晩은 물론 딘스모어도 이같은 정책기조에 따라 헤이가 親韓的 조치를 취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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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에 딘스모어 의원은 의원사무실에서 기다리지 않고 자기 마차를 몰아 아이 스트리트에 있는 李承晩의 거처로 데리러 왔다. 국무부로 간 두 사람은 곧 장관실로 안내되었다. 면담은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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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장관은 條約上의 義務이행 약속


李承晩은 그에게 한국이 開港한 이래로 한 사람의 선교사도 아무런 화를 입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그러고 나서 결론적으로 말했다.

『우리 한국인들은 장관께서 中國을 위해 하신 일을 韓國을 위해서도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李承晩이 지적한 것은 헤이 장관이 1899년에 발표한 「무역상의 門戶開放政策에 관한 宣言」을 뜻하는 것이었다.8)

헤이는 李承晩이 자신의 문호개방 정책을 거론한 데 대해 기뻐하는 듯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나는 개인적으로나 미국정부를 대표해서 우리의 條約상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것입니다』9)



이때에 헤이 장관이 李承晩에게 조약상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이처럼 확실하게 말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헤이 장관은 바로 한 달 전에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으로부터 〈우리는 日本의 의사를 거슬려가면서까지 韓國問題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韓國人은 자신들의 방위를 위해 一擊을 가할 능력도 없다〉10)는 편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러-日 사이의 講和가 성립되면 韓國은 日本의 保護國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문제로 자신과 대립했던 알렌 공사를 3월에 해임하고 후임으로 모건(Edwin V. Morgan)을 임명했다.


李承晩은 헤이 장관과의 면담으로 크게 고무되었다. 국무부를 떠나면서 딘스모어 의원도 회담결과가 매우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李承晩은 閔泳煥과 韓圭卨에게 회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썼고, 딘스모어는 그것을 외교 파우치 편으로 주한 미국공사관에 보내어 두 사람에게 전하게 해주었다. 李承晩이 閔泳煥과 韓圭卨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미 한국공사관 파우치를 이용하지 않고 미국 외교파우치를 이용한 것은 이 무렵은 이미 스티븐스(Durham W. Stevens)가 외교고문에 취임하여 일체의 외교관련 업무를 장악하고 있어서 편지가 日本人들에게 알려질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헤이 장관이 한국정부의 공식 사절도 아닌 젊은 李承晩을 만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李承晩은 이때의 일을 오래도록 자랑스럽게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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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록코트와 실크해트로 정장한 李承晩과 尹炳求는 오후 3시에 새가모어 힐에 도착하여 안내하는 대로 마차에서 내려 대기실로 들어갔다. 집 안은 들고 나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 가운데에는 문무관 복장을 한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러시아의 수석대표 위테(Sergei Witte) 일행이 막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안내인이 와서 두 사람을 한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가슴이 조마조마했고 사지가 떨렸다. 이 때에 루스벨트가 안쪽에 있는 방에서 나오면서 문 밖에서 기다리는 외교관들을 보고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반갑습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서 두 사람에게도 의자를 권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루스벨트가 어떻게 바쁘게 서두는지 두 사람은 말을 꺼낼 겨를이 없었다.


尹炳求가 청원서를 꺼내면서 말했다.

『우리는 하와이에 거주하는 우리 국민의 청원서를 가지고 각하에게 바치러 왔습니다』

루스벨트는 그 자리에서 청원서를 읽었다. 그가 청원서를 읽는 동안 두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청원서를 다 읽고 나서 루스벨트가 말했다.


『두 분이 내 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러시아와 일본을 초청하여 講和를 논의하도록 권할 뿐이고 다른 간여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대단히 중대하여 이 청원서를 내가 사사로이 받을 수 없고,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다 보았으며, 또 이렇게 두 분을 만났으니까…, 나의 권리가 防閑(방한·하지 못하게 막는 범위)이 있는 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각하의 스퀘어 딜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李承晩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먼 지방에서 각하의 스퀘어 딜(Square Deal: 공평한 처사나 정책, 공정한 거래 등의 뜻)을 구하러 왔습니다』


李承晩의 이 말은 사전에 여러 사람과 상의하여 준비했던 말이었을 것이다. 「스퀘어 딜」이라는 말은 이 무렵 루스벨트가 大企業과 勞動組合의 대립을 조정하면서 슬로건으로 표방한 말로서, 루스벨트의 국내정책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어 있었다.


李承晩의 말에 루스벨트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줄 압니다』


李承晩은 말을 이었다.

『저희가 온 것은 각하께 강화회의에 구태여 간섭을 하시라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기회있는 대로 朝美修好條約에 입각하여 불쌍한 나라의 위태함을 건져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루스벨트는 한국 공사관을 아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대답했다.

『이 일은 공사관에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일은 우리 백성끼리 전국 관민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므로 공사관에서 간여하는 것은 긴요치 않은 줄 알았습니다』

『淸國政府에서도 항의 서한을 공사관을 통해서 보내었으므로 이 청원서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루스벨트는 이 일의 중대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공사관으로 보내어 보겠습니다』하고 일어섰다.37)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에서 이때에 루스벨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적고 있다.

『만일 당신들이 이 문서를 귀국 공사관을 통해 제출하신다면 나는 그것을 中國의 청원서와 함께 강화회의에 제출하겠습니다. 귀국 공사더러 국무부에 가져다 주라고 하십시오. 국무장관을 만날 수 없거든 아무에게나 내게 보내라고 말하고 맡기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38)



태프트가 써준 소개장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루스벨트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두 사람을 만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루스벨트가 두 사람을 만난 것은, 그 자신이 면담사실 자체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데서 보듯이, 어쩌면 위테 백작과 고무라 주타로의 면접에 앞서 잠깐 동안이나마 한국인을 만나는 것이 강화회의를 주선하는 자신의 영향력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회견은 30분 가량 걸렸다.39) 루스벨트는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이때는 루스벨트가 태프트에게 가쓰라와의 비밀협정을 확인하는 전보를 보내고 5일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그러므로 루스벨트가 韓國政府의 공식문서가 아니라 하와이에 사는 민간인들이 대통령인 자기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굳이 公使館을 통해서 제출하라고 한 것은 청원서의 접수를 정중하게 거절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기자들의 축하받으며 워싱턴으로 달려가


李承晩과 尹炳求는 루스벨트의 친절에 진정으로 감사했다. 루스벨트와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오는 두 사람은 흥분과 희망으로 들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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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뉴욕을 거쳐 이른 아침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새 기찻간에서 뜬눈으로 보냈으나 아침 신문들에 난 자신들의 기사를 보자 다시 힘이 솟았다. 「워싱턴 포스트」는 두 한국 사절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서 청원서를 제출했고, 이미 그 청원서를 공사관을 통해 공식으로 접수시키기 위해 워싱턴으로 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신문보도에 대해 李承晩은 閔泳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는 지금 우리나라 형편에 앉아서 몇 천원, 몇 만원을 각 신문에 주어가면서도 이렇게 될 수 없는 일이라. 초목 같은 무리라도 흥기나는 마음이 없지 못할러라〉라고 적었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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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머드 강화회의가 폐막되고, 며칠 뒤인 9월10일에 李承晩은 閔泳煥으로부터 그와 尹炳求의 노고를 치하하는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그 동안의 비용이라면서 130달러의 송금수표가 들어 있었다.58) 민영환은 皇帝가 자기편에 두 사람의 노력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비밀 경로를 통해 두 사람의 활동자금을 보낼 것을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閔泳煥의 격려편지도 실의에 빠진 李承晩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高宗이 비밀경로를 통해 활동 자금을 보낼 것을 약속했다는 말에 대해서도 李承晩은 〈나는 그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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請願外交路線과 여론환기 작업의 원형


李承晩의 대미 「밀사」 사명은, 미국의 「居中調整」을 통하여 大韓帝國의 독립유지를 보장하게 한다는 목적에서 보면, 헐버트 등 다른 밀사들의 경우와 함께,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李承晩의 개인적 능력 밖의 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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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헤이國務長官을 만난 데 이어 포츠머드 강화회의를 앞두고 루스벨트 大統領을 만나고, 특히 그것을 계기로 美國의 유수한 신문에 韓國問題를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은, 李承晩 자신의 말마따나 한국정부가 〈몇 천원, 몇 만원을 각 신문에 주어가면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成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李承晩은 루스벨트와의 면담을 계기로 제국주의적 國際政治秩序의 냉엄한 현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아무런 공적 직함이 없는 신분으로 미국의 大統領과 國務長官을 만났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경험이 되었다. 사실 李承晩은 이때 이후로 독립운동 기간 내내 미국의 어떤 대통령이나 국무장관도 만날 수 없었다.



이때에 李承晩이 헤이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고 또 그것에 대한 미국 신문의 반응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뒷날 그가 독립운동 방략으로 시시포스의 神話처럼 되풀이하는 請願外交와 여론 환기작업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金九가 國母報讐(국모보수)의 의분에서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를 살해했던 치하포 사건과 대비되는 상징성을 가지면서, 그 자신의 名聲과 權威를 높여 주는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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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7)
루스벨트 大統領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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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루즈벨트의 별장에는 세계 각처에서 남긴 귀한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조선의 전통 나전 칠기가 있다. 나전칠기 뒷면에는 조선의 왕이 보냈다는 글귀가 선명하게 쓰여 있다. 이승만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선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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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879

외교 중시했던 독립운동가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이승만 시절 뿌려진 산업화 씨앗들 ‘한강의 기적’ 일구는 초석

마연옥 기자 2015.03.03








1908.9. 프린스턴대학 박사과정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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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의 프린스턴 생활에서 가장 큰 수확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총장과 그의 가족들을 가깝게 사귈 수 있었던 일이었다. 윌슨은 메릴랜드州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정치학 교수로서 「議會政府論」과 「國家論」이라는 명저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변호사로서도 평판이 좋았다. 윌슨의 가족들은 韓國과 韓國宣敎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면서 李承晩이 귀국해서 추진하고자 하는 기독교 사업에 대해 격려해 주었다. 李承晩이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던 해 겨울에 윌슨이 불특정 다수의 여러 사람 앞(“to whom it may concern”)으로 써 준 다음과 같은 소개장은 李承晩에 대한 윌슨 총장의 신임이 어떠했는가를 보여 준다.



〈李承晩씨는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생으로서, 탁월한 능력과 고매한 인품으로 우리에게 호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 韓國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東洋의 전반적인 정세에 대해 놀랄 만한 식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대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도 특별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투철한 애국심과 동포들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닌 그는 그의 조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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