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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5)
이승만 2023-09-27 22:28:42 | 조회: 77
[기자클럽] 브라질 대통령도 인정한 李承晩의 농지개혁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ironheel@chosun.com)



최근 중앙일보의 南美 특집을 읽다가 흥미로운 얘기를 발견했다. 중앙일보 기자가 룰라 브라질 대통령에게 『브라질처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어째서 5000만 명이 넘는 절대빈곤층이 존재하는 겁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은 과거 19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순간 기자는 李承晩 대통령을 떠올렸다. 李承晩 정부는 제헌헌법 제정 당시부터 『농지개혁이야말로 공산당을 막는 最良의 길』(헌법 기초위원 兪鎭午의 말)이라는 인식 아래 헌법에 농지개혁에 대한 근거 조항을 마련하고, 의욕적으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李承晩 정부의 농지개혁 추진 소식을 전해 들은 金日成은 술잔을 내던지면서 『만일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되면 남한의 농민을 다 대한민국에 뺏기고 말아, 우리들이 이제껏 해왔던 赤化운동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고 개탄했다고 한다.



기득권층의 반발이 있었지만 李承晩 대통령은 『萬難(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하라』고 독려했다. 정부는 관계 법령이 제정·정비되기도 전에 불도저식으로 토지개혁을 밀어붙여 1950년 4월15일까지 농지개혁과 관련된 행정절차를 마무리지었다. 그로부터 두 달 열흘 뒤에 6·25가 발발했다.


金日成은 전쟁 전부터 준비해 온 남한지역에서의 토지개혁 프로그램을 내밀며 남한 민중(농민)들의 봉기를 선동했다. 하지만 농지개혁 이후 『李박사 덕분에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던 남한 민중들에게 金日成의 선동은 먹혀 들지 않았다.

농지개혁 결과 전체 농지의 92.4%가 自作地(자작지)가 됐다. 이는 농지개혁으로 전체 농지의 90%가 자작지가 된 일본의 성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정부가 地主(지주)에게 보상한 20억원 가운데 절반 가량이 地主의 손을 떠나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었다.



반면에 「無償 몰수, 無償 분배」를 내걸고 시작된 북한의 토지개혁은 결국 모든 농민을 小作農化하는 「농업 집단화」로 귀결됐다. 그 결과는 농업생산성의 저하와 기근, 대량 餓死(아사) 사태로 이어졌다.

농업경제학자인 金聖昊 前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고문은 『李承晩의 농지개혁이 한국의 번영을, 북한의 소련식 土地 국유화가 오늘의 북한 참상을 불렀다』고 단언한다. 李承晩 대통령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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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의 농지개혁이 북한보다 못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중국이나 북한에서 농민에게 분배된 토지는 곧 집단농장으로 바뀐다. 중국은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북한은 오늘날까지 만성적 식량 부족에 시달린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비다.


대한민국 건국과 농지개혁, 한국전쟁이 전개된 과정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으로 땅을 갖게 된 수많은 자영농의 자발적 중노동과 창의력이, 또 그들의 교육열이 오늘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경제발전 기적을 만든 에너지의 원천이다. 위대한 나라가 탄생했다. 대한민국 건국이야말로 우리 민족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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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은 우리 민족사 가장 큰 기적 … 진보도 인정해야”
[중앙일보] 입력 2013.04.10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가 보는 현대사 논쟁








1949.4.



[ ...... 말이 유상분배지 실은 무상분배의 가면을 쓴 다른 지역의 그것보다도 훨씬 유리한 것임 ........ ]


[ ...... 상환액을 완납 ..... 임의로 농업에서 이탈하기로 되어 있으니 북한처럼 국가의 소작인과 같은 구속은 받지 않는다. ....... ]



[ ...... 농지를 상실한 지주로서 상업능력이 있는 이에게는 공업생산, 광산개발, 수산개발 등 근대산업에 우선 알선 ....... ]




<농지개혁의 근본이념:농림부 농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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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농지를 상실한 지주로서 상업능력이 있는 이에게는 공업생산, 광산개발, 수산개발 등 근대산업에 우선 알선케 하였으니 지주들로 하여금 가일층 진실한 인간적인 생활과 유효적절히 역할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것이니 소극적인 지주의 구제책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비약적인 발전에 길을 열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老·幼·婦女子로서 농지상실로 인하여 그 생활방도가 難免한 지주에게는 생활비와 아동의 교육비로 農地代價보상금 외에 특별보조금을 지불할 것도 고려하고 있는 바이다.


국회를 통과한 농지개혁법안의 지주에 대한 지가보상은 평년작 주생산물·생산량의 15할로 결정되고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에게는 이보다도 낮게 12할 5푼의 상환율로써 매년 생산고의 2할 5푼 정도를 5년 간 年賦償還하기로 되었다. 말이 유상분배지 실은 무상분배의 가면을 쓴 다른 지역의 그것보다도 훨씬 유리한 것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더구나 소지주에게 대하여는 3할 정도 지가보상에 첨가케 하였으니 이 얼마나 상식적이고 온정적인 것인가?



또 교육재단에 있어서는 그 재정기초에 동요가 없게끔 특별취급을 하기로 하여 文敎발전에 지장이 없게 하였으며 篤農家를 고려하여 자작농지를 3정보까지 보유케 하였다.


농지의 분배를 받은 농민은 상환액을 완납하기까지에는 임의처분을 하지 못하나 그 이후나 일정한 수속을 밟아서 임의로 농업에서 이탈하기로 되어 있으니 북한처럼 국가의 소작인과 같은 구속은 받지 않는다. 물론 분배받은 농지를 소홀히 하여 경작에 무성의하거나 상환금·조세 등 농지에 따르는 당연한 부담을 태만히 하여 국민된 도의에 어그러질 때는 모처럼 분배받은 혜택을 상실할 것이니 농민은 생산증강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미 처분된 귀속농지에 있어서는 경지면적에 아무런 변동은 없으나 상환율에 있어서나 연한에 있어서는 동일히 취급하기로 되어 있다.


요컨대 남한 농지개혁의 중요한 특징은 종합적인 산업재건의 기초를 수립하려는 것과 지주의 민족자본과 그 역량을 건국경제에 유효 적절히 활용하려는 점, 지주에게는 15할을 보상하면서 대지주에 대한 체감율과 귀속농지 수익으로써 충당하여 농민의 상환율을 2할 5푼이나 싸게 해서 국가의 세농민에 대한 온정을 보인 것 등 그 特點이 다른 어느 지역에서 실시한 것보다도 다른 점이 있는 것이다. 또 본법의 국회통과에 際하여 소작권 박탈과 부재지주 농지의 매매금지 등 말썽 되던 농지개혁임시조치법의 삽입된 데 크나큰 이채를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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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04월 27일

주보 제6호, 3~8쪽

<농지개혁의 근본이념:농림부 농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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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심은 66.3%가 경작자에게 분배하되 유상분배(72.9%)를 원 ....... ]



[김순덕의 도발] 대한민국은 정말 ‘태어나선 안 될 나라’였나 ?




김순덕 대기자

2020-08-15




“이승만 대통령을 우리의 국부(國父)다, 하는 부분에 대해선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의 국부는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 되는 것이 더 마땅했다고 생각하고 그런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한 달 전 인사청문회에서 한 말이다.


국부가 누구냐고 아무도 안 물었다. “이승만 정권은 괴뢰정권인가.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건국 대통령이라는 데 동의하느냐”고 박진 미래통합당 의원이 물었을 뿐이다.


광복 75주년을 맞은 2020년 8월 15일.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통일부 장관이 초대 대통령을 건국 대통령으로도, 국부로도 인정하지 않는 사실은 기록해둘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586운동권에 포획돼 있고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전대협 1기 의장 출신이다. 그의 역사의식은 곧 이 정부의 집단 역사의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 누군들 백범 김구를 존경하지 않으랴


백범 김구를 존경하지 않는 한국인은 단언컨대, 없다. 요즘 찐 대세남으로 뜬 영탁 정동원이 TV ‘대한외국인’ 퀴즈 대결에서 백범의 ‘나의 소원’에 나오는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ㅇ ㄹ ㄷ ㅇ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에서 ‘아름다운’을 맞히고는, “민족의 혼을 잊으면 안 된다”고 기염을 토했을 정도다.



하지만 백범이 국부여야 마땅하다는 건 다른 얘기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차원을 넘어,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로 친다는 역사관이 배어난다. 이인영이 1987년 전대협 의장 때 읽기만 했다는 ‘동지여 전진! 동지여 투쟁!’ 격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삼팔선 이남을 점령군으로 진주해온 양키 침략자. 이남의 이승만 괴뢰정권을 내세워 민족해방 투쟁의 깃발을 갈가리 찢고자 책동했다.”



1980년대 NL(민족해방)이나 주사파의 낡은 이념일 뿐이라면, 나도 속 편하겠다. 그러나 이인영은 “(이승만) 괴뢰정권이라고 단정하는 것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이견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좌파진영에선 지금도 이승만 정부를 정통성 없는 괴뢰정권으로 본다는 점을 사실상 시인한 것이다.



● 좌파의 역사인식 공유한 문 대통령


대한민국을 태어나선 안 될 나라처럼 보는 시각은 문 대통령의 올해 제주4·3 희생자 추념식 연설에도 배어난다. “제주는 해방을 넘어 진정한 독립을 꿈꿨고, 분단을 넘어 평화와 통일을 열망했다”며 “그러나 누구보다 먼저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제주는 처참한 죽음과 마주했다”고 했다. 단독선거 저지와 통일정부 수립을 내세운 남로당의 무장폭동(2020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백범이 통일정부를 지지했다고 믿는 세력은 1947년 12월까지만 해도 이승만과 함께 단독정부를 지지했다는 사실도 아는지 의문이다. 해방 후 대세는 좌경화였다며 미군만 아니면 한국은 공산주의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등장한다(실은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어쩌면 문 대통령도 ‘제주의 꿈’이 남조선 전체의 희망이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강만길이 “1946년 미군정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 지향 세력이 70%”라고 한 것도 1994년 ‘고쳐 쓴 한국현대사’ 때 얘기다. 2018년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의 연구를 보면, 미군정은 1946년 7번이나 여론조사를 했고 민심은 북한식 공산주의 아닌 미국식 민주주의를 선호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 해방 직후 한국은 민주주의 남한정부를 원했다



신탁통치를 하자는 미소공위가 실패로 돌아간 1946년 5월 미군정은 “현재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묻는 여론조사를 했다. “남한정부를 세우는 것”이라는 응답이 54%나 됐다는 사실은 눈물나게 감동적이다(미군정 계속은 43.8%). 많은 사람들이 소련과의 협상이 현실적으로 어렵고, 따라서 남한만이라도 독자적으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북한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감행한 3월, 대지주 소유 토지 처리 방법을 묻는 조사에서도 민심은 66.3%가 경작자에게 분배하되 유상분배(72.9%)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누가 한국사람 복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가를 묻는 조사 역시 이승만(30%), 김구(20%)와 안재홍, 김규식, 조만식 등 우익이 70%로 압도적이었다.


그럼 ‘사회주의 선호 70%, 자본주의 13%, 공산주의 10%’라는 조사 결과는 뭐냐고? 박명수는 해방 정국에선 좌익과 우익이 사회주의를 다른 의미로 썼다고 설명한다. 좌익은 공산주의에 이르기 전(前) 단계를 사회주의라고 했고, 우익은 사회민주주의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썼다는 거다. 즉 한국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우파의 대의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경제적으론 중도적 성향이라는 분석이다(그래서 제헌 헌법에도 사민주의적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 공산당과 합작은 불가능… 정치인 김구는 실패했다



백범의 핵심 노선이 주한미군 철수와 자주적 통일이라는 점에서 현 집권세력이 백범을 숭앙하는 것도 당연하다. 국제적 인식이 부족했고, 국제노선을 따르더라도 중국을 우선시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상주의에 치우쳐 현실감각은 물론 정치능력이 부족한 점 역시 집권세력과 비슷하다는 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백범은 1948년 “김일성과의 남북협상에서 성과가 없으면 차라리 38선에서 배를 갈르리라”라는 비장한 성명을 발표하고 북행을 결행했으나, 공산주의 소련과 김일성을 이길 수 없었다. 미국과 소련 군대가 철군해도 전쟁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6·25전쟁 발발 전에 암살당함으로써 오늘날 통일운동과 민족주의의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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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광복 75주년!



문재인 정부가 정녕 백범을 배우겠다면, 독재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라고 지적한 백범일지를 다시 봤으면 한다. 임정 시절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것도 더불어 함께할 수 없다”던 백범도 권력의지는 버리지 못해 북행을 결행했고, 정치인으로서 실패했다.


덕분에(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1948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건국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오늘은 자랑스러운 광복 75주년이다.







* 중국



[ ...... 지주와는 투쟁할 필요도 없었어. 보통 재산이 삼대(三代)를 못 가서 다시 가난해졌으니깐. 지주가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 알아? 8, 9할은 열심히 일해서 스스로 번 재산이야. ........ ]




[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7회. “토지개혁 잔혹사!"



송재윤 객원 칼럼니스트

2018.02.14



국공내전이 한창일 때 공산당이 점령한 “신(新)해방지”에선 급속하게 공산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핵심은 토지개혁이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당시 중국 전역의 농촌에서 대략 10프로의 농민이 지주(地主) 혹은 부농(富農)이라 단정했다. 토지개혁은 바로 그 지주와 부농 소유의 토지를 압류해 중농(中農)과 빈농(貧農)에 재분배하는 과정이었다. 중국정부의 선전에 의하면, 토지개혁은 지주, 한간(漢奸, 친일매국노), 국민당부역자, 토호 등등 소수의 적인(敵人)을 제거하고 다수의 인민(人民)을 해방시킨 “위대한 혁명”이다. 그러나 과연 중공 지도하의 토지개혁이 그렇게 순조롭고 아름다운 과정이었을까?



최신 연구에 따르면, 당시의 토지개혁은 무려 3백만-5백만의 인명(대부분 중·소지주)을 앗아간 대규모 학살극을 수반했다. 그런 과정을 겪었음에도 대다수 농민의 실생활은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됐을 뿐이었다. 재산을 모으면 곧 지주나 부농으로 몰렸기 때문에 농민들은 정성들여 농사를 지을 까닭이 없었다. 그 때문에 토지생산력은 전반적으로 오히려 저하되는 결과가 초래됐다. 이웃으로 공생하던 촌민들은 인민재판을 거치면서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땅을 받은 농민들은 전시(戰時) 총동원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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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주 벌판의 농민들



1948년 여름 장춘포위전이 전개될 당시 주요 도시를 제외한 만주지역 대부분은 공군에 장악되었다. 인민해방군은 마을을 접수하면 제일 먼저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지주와 부농 소유의 토지를 압류해서 빈농들에게 나눠주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식이었다. 인민의 계급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공산당은 온 마을 사람들을 불어 모아 놓고 지주, 부농, 한간 등등 이른바 "인민의 적"에 대한 "공개재판"을 열었다. 공산당 간부들은 으레 봉건지주제의 철폐를 부르짖었지만, 농민들은 계급투쟁이나 토지분배 따위엔 큰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 농민들은 장개석의 국민당을 합법정부라고 여기고 있었고, 전통의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싶어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중앙당의 지시를 따라 공산간부들은 무리하게 토지개혁을 감행하였는데······.



지주와 부농을 추려 봐야 일반 농민과 담벼락을 맞댄 이웃사람들에 불과했다. 그들 소유의 토지 역시 일반 농민이 가진 땅의 두 배도 못되는 정도였다. 중국 및 구미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중국의 많은 지역엔 마르크스 이론에 부합하는 지주계급 자체가 부재(不在)했다. “해방”이전 중국 농촌에서 지주가 점유한 토지는 총토지 면적의 40프로에 불과했다. 그 토지의 25프로는 학교, 사묘(祠廟), 종족전(宗族田) 등등의 공전(公田)으로 개인소유지도 아니었다. 농촌의 빈농들도 2-3무(畝, 1무=667평방미터) 정도의 토지는 갖고 있었고, 토지가 전무한 농민은 기껏 1-2프로 정도였다. 그럭저럭 땅을 부쳐 먹고 사는 가난한 농민들이 올망졸망 모여서 향촌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런 농촌 마을에서 “지주”를 찾아내 죄다 척결하려 한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 더군다나 중공지도부가 이미 인구의 10프로를 “인민의 적”이라 예단해 놓은 상황에서······.



내몽고 적봉(赤峰)시에는 “하늘마을”(乾村)이라 불리는 자그마한 부락이 있다. 이 하늘마을에는 산동(山東) 지방 이주민 42가구가 1300무(畝, 대략 87헥타르)의 토지를 일구며 살고 있었다. 1945년 항일전쟁이 종결된 후, 만주 지역의 각 마을로 침투한 중공세력은 날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착취,” “계급투쟁” 등등 농민들에겐 생경한 혁명이론을 설파했다. “봉건지주제”의 피해자인 농민들을 일깨워 계급혁명의 주체로 거듭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농민들은 지조(地租=지세地稅) 자체를 착취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토지개혁 자체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하늘마을에서 토지개혁이 진행될 당시 제일 먼저 공산당에 가입했던 대옥당(戴玉堂)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에 지주와는 투쟁할 필요도 없었어. 보통 재산이 삼대(三代)를 못 가서 다시 가난해졌으니깐. 지주가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 알아? 8, 9할은 열심히 일해서 스스로 번 재산이야. 우리 마을의 지주나 부농은 다 그렇게 된 사람들이야, 하루아침에 요행으로 돈을 번 게 아니라고. 우리 대씨(戴氏)집안을 보면, 사(四)형제가 남의 땅 부치면서 뼈 빠지게 일을 했어. 그렇게 사 모은 땅 때문에 토지개혁 때는 지주나 부농으로 분류됐던 거지.”



농민들 사이의 계급투쟁이 조장되면서 결국 하늘마을의 42가호(家戶) 중에서 40프로를 넘는 18가호가 “투쟁호(鬪爭戶)”로 분류되었다. 투쟁호란 인민에 적대적인 가호를 의미하는데, 지주 4가호, 부농 6가호, 중농 및 빈농이 8가호였다. 하늘마을의 지주는 모두 타인을 고용하는 고공(雇工)의 방법으로 농지를 경영했다. 타인에게 직접 토지를 임대한 경우는 아예 없었다. 실제로 내몽고를 포함한 동북지방의 광활한 대지에서 많은 농민은 땅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지주나 부농으로 분류되었다. 지주나 부농은 곧 청산(淸算)대상이 되었다. 불과 1-2무의 땅을 가진 사람도 지주로 분류되기도 했는데, 단 1무의 땅이라도 임대를 하면 곧 지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생존자 대옥곤(戴玉坤)씨의 증언에 따르면, 마을에서 지주 색출은 실로 집요하고도 잔인하게 진행되었다. 재산이 없는 사람도 구원(舊怨)이 있으면 지주로 몰려 숙청되기도 했다. 군중집회에서 누군가 한 사람을 지주 혹은 한간(漢奸)이라 지목하기만 해도 처형되기 십상이었다. 다른 마을의 “적극분자”가 원정을 와서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빈번했다. 투쟁집회에선 폭력이 난무했다. 매달거나 얼리거나 불로 지지거나 질질 바닥에 끌고 다니기도 했다. 집회에선 늘 그렇게 사람들을 잡아와선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고, 지주와 부농을 그 앞에 무릎 꿇려 직접 그 장면을 목격하게 했다.



대옥곤이 집회를 피해 도망을 간 후, 그의 부인은 짐승이 끄는 수레에 묶인 채 흙길에서 질질 끌려 다녀야 했다. 그 밖에도 여자들을 달군 쇠로 지지거나 속옷까지 다 벗기고 때리는 경우도 있었다. 읍내 소학교의 교사들이 불려 와서 학살당한 사건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존경하고 떠받드는 인격자까지 지주로 몰려 숙청되기도 했다. 당시 촌민들 사이에선 “팔로군(八路軍=인민해방군)이 온 후엔 만주국 시절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네!”란 얘기가 돌 정도였다. (이상 내용은 중국 인민대학 고왕릉[高王凌] 교수의 아래 논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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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민”과 “인민의 적”


오늘날 중국의 고교과정 정치교과서에 따르면, 인간(人間)이 다 인민(人民)은 아니다. 인간은 인민과 적인(敵人)으로 구분된다. 인민이란 역사의 정도(正道)를 걷는 다수대중을 의미한다. 반면 적인이란 역사의 정도(正道)에서 이탈한 적대세력이다. 공산혁명의 성공을 위해선 “절대다수 인민”이 “극소수의 적대세력”을 억압하고 제거해야만 한다.


인간사회에 암세포처럼 반드시 제거해야만 하는 “적대세력”이 따로 있다는 발상이다. 모택동은 1925년 “중국의 사회 각 계급 분석”이란 시론에서 혁명의 성공을 위해선 “적과 친구”를 명확히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혁명운동의 성공을 위해선 진정한 적인(敵人)을 정조준해서 일침견혈(一針見血)의 공격을 감행해야만 한다는 논리이다. 국공내전 당시 토지개혁 과정에서 3백만-5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지주, 한간, 토호, 부농 등 “인민의 적”으로 분류되어 학살당했다.



지금껏 살펴 본 바대로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의 집권 과정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서 세워진 나라다. 인민해방군은 장춘에선 5개월간의 잔혹한 포위전으로 수십 만 인민을 아사시켰고, 수천만의 유민을 낳았으며, 중원지방에선 수백만 농민들을 징발해 전투에 투입시켰다. 아울러 토지개혁의 명분 아래 3백만-5백만의 사람들이 항변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인민재판을 통해 도륙되었다. 국공내전의 감춰진 역사를 파헤칠수록 중국공산당의 집권과정의 도덕성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중국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린 소수의 반체제인사들은 억압당하고 있다.



모택동이 중국에서 피의 숙청을 수반한 잔인한 토지개혁을 진행시킬 때, 장개석은 대만에서,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한국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농지개혁을 완성했다. 특히 대한민국 건국헌법 제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에 따라 1949년 6월 농지를 재분배하는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그 결과 농민은 경작지 소출량에서 연 30%씩 5년 동안만 지주에게 지불하면 그 토지의 소유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매해 생산량의 50%이상을 지주에 바치던 농부는 30%씩 5년 만 상납함으로써 지대(地代)에서 해방된 셈이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대해서, 특히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낸다. 반면 중국의 공산혁명은 흠모하고 미화하기 일쑤다. 중공치하 토지개혁의 폭력과 광기를 직시한다면, 과연 그런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를 견지할 수 있을까? 이념의 미망(迷妄)은 역사적 무지에서 비롯된다. 중국 공산화의 생생한 역사가 일깨우는 진실이다.


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2305









* 1930 소련


[ ..... 차라리 임차한 땅에서 경작하는 것을 선호하여 .... 중농, 빈농들이 집단농장에서 대규모로 이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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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호들의 조직적인 사보타지와 선동, 위로부터의 급속한 집단화에 따른 농민들의 인식부족과 일부 공산당원과 빈농들 사이에서의 좌경적 경향으로 농민들이 국경을 넘어 중국을 도피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많은 빈농들이 과중한 국세가 책정되어 있는 국영농장에서 반강제역노동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임차한 땅에서 경작하는 것을 선호하여, 1930년 3-4월 일부 마을에서는 중농, 빈농들이 집단농장에서 대규모로 이탈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극도로 높게 책정된 과세, 원시적인 농업기술, 높은 생산노동을 향한 의욕 부재 등으로 인하여 벼 파종면적의 축소와 수확량 감소를 초래하였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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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로한인(在露韓人) 강제이주(强制移住) 이전(以前)의 한인사회(韓人社會)의 동향(動向)(1923-1937)

반 병 율(潘 炳 律)*






[ ...... 지주가 사전 방매한 토지의 가격이 법정 상환가격보다 높지 않음이 일반적 ........

...... 전 경지의 96%가 자작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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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의 효과에 관해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비판적인 견해가 우세했습니다. 정부가 직접 수용하여 분배한 토지가 전체개혁 대상의 절반도 되지 않은 가운데, 많은 토지가 지주에 의해 은닉되거나 사전에 소작농에게 고가로 강제 처분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최근의 여러 구체적인 연구는 지주가 사전 방매한 토지의 가격이 법정 상환가격보다 높지 않음이 일반적이었으며, 또 대량의 사전 방매도 결국 개혁의 강제성 때문인 만큼 크게 보아 농지개혁의 효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재인식》에 실린 장시원 교수의 논문, <농지개혁ㅡ지주제 해체와 자작농체제의 성립ㅡ>은 이러한 새로운 동향의 연구 성과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소멸하고 전 경지의 96%가 자작지로 바뀌었습니다. 농지개혁의 효과는 어느 정도 국가체제가 안정된 195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농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들의 생산의욕으로 농업생산력이 부쩍 증가하기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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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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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소련


[ ..... 차라리 임차한 땅에서 경작하는 것을 선호하여 .... 중농, 빈농들이 집단농장에서 대규모로 이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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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호들의 조직적인 사보타지와 선동, 위로부터의 급속한 집단화에 따른 농민들의 인식부족과 일부 공산당원과 빈농들 사이에서의 좌경적 경향으로 농민들이 국경을 넘어 중국을 도피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많은 빈농들이 과중한 국세가 책정되어 있는 국영농장에서 반강제역노동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임차한 땅에서 경작하는 것을 선호하여, 1930년 3-4월 일부 마을에서는 중농, 빈농들이 집단농장에서 대규모로 이탈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극도로 높게 책정된 과세, 원시적인 농업기술, 높은 생산노동을 향한 의욕 부재 등으로 인하여 벼 파종면적의 축소와 수확량 감소를 초래하였다.44)""


원동의 러시아 공산당간부들도 이러한 좌경적인 오류로 인한 집단화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어서, 원동집행위원회는 1930년 4월 19일 "농촌과 어민 집단과정에 대한 결의"를 채택하고 당과 소비에트 농장조직들이 소수민족지역의 콜호즈건설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못하고, 빈농의 지도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중농들까지 무시했다고 지적하기에 이르렀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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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로한인(在露韓人) 강제이주(强制移住) 이전(以前)의 한인사회(韓人社會)의 동향(動向)(1923-1937)

반 병 율(潘 炳 律)*








1938.12. 삼천리 소련탈출 군인 증언




[ ...... 「도망한 장교들은 잘했다」고 동료들이 부러워하면서 ........

...... 바람이 부러서 창이 덜걱거려도 께페우가 오지 않는가 ......... ]




[ ...... 농민은 .... 혁명이전 때가 살기 좋았다 해요. .........

...... 부담이 많어서 입는 것은 고사하고 빵문제 해결에도 곤란합니다. ........

...... 지금은 백퍼-센트가 다- 빈민 ....... 만족히다고 볼수 있는 것은 농촌에 있는 청년공산당원 뿐 ........ ]




[ ...... 독신이래도 8시간 勞働이면 겨우 살어갈 정도 ........

...... 물건이 니러졌으나 께페우는 재판에 부칠 수가 없으니깐 상점의 책임이 되여서 ........


...... 트로키스트 ..... 1937년 1월부터 38년 5월까지 그 명목 하에 검거당한 인수가 전부 2백60만 ........ ]



[ ...... 데파-트 한 집의 상품만 해도 하바롬스크全市에 있는 상품보다 아마 더 많고 ........ ]




삼천리 제10권 제12호

1938년 12월01일




蘇聯事情 듯는 座談會, 脫走하여 朝鮮에 온 赤露士官으로부터


出席者


脫走 赤軍士官 이반 야꼬레비치 나하로프

脫走 赤軍兵 표오톨 마까로비치 이봐노프

權忠一, 朴得鉉, 金漢卿, 朴英熙,

이박게 朝鮮軍 囑託 高井邦彦




지난번 高鼓峯事件 때 蘇聯 極東軍에서 탈출하여 蘇聯兵 2명이 새로운 살 길을 찾고저 OO에 와 있는 것을 기회로 그들을 中心삼어 이 좌담회를 열었다. 질문한 사람들은 元共産黨 幹部로서 入露의 경험조차 가??든 몃 분들이다. 우리가 이 좌담회를 개최한 까닭은 蘇聯知識의 一資料를 어드려고 하는 것뿐 아니라 그들 탈주병이 祖國蘇聯을 어떻게 보는가를 알고저 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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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井. 그러면 나부터 먼저 張鼓峰事件에 현지에서 탈주해 온 蘇聯兵<92> 2명을 소개하겠읍니다. 이분은 나하로푸군 24세올시다. 저쪽 분은 이와노푸군 22才올시다. 양군이 다 歐羅巴 로시아 출신으로 나하로푸군은 8년제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서는 하사관양성소를 중도에서 퇴소했읍니다. 이와노푸군은 극히 짧게 밖에 학교에 가지모했음으로 무학이라해도 과언이 아입니다.


나하로푸. 사건이 勃發하기 얼 전에 일인대요. 蘇聯의 장교 6명이 ****?近에 갓는데 수비병들이 확실히 삼림 속에 들어간 것을 보았다고 하지만 장교 6명이 죄다 행방불명이 되었든 것입니다. 내 생각엔 그이들도 滿領내에 탈주한 것 같슴니다. 그때 내가 있든 군대가 1개 연대 출동해서 장교 6명이 들어간 국경 부근의 산을 죄다 찾어 봤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말었읍니다. 그때 도라오면서 「도망한 장교들은 잘했다」고 동료들이 부러워하면서 외국의 이야기들을 했는데 그것이 내게 있어서 마음의 파동을 이르게 했읍니다.


記者. 이와노푸군은 어떳습니까.

이와노푸. 나는 個人農임으로 늘 꼬르포-즈에게 압박을 받어 심히 괴로운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든 관계로 생각할수록 로서아가 싫어졌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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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노푸. 우리 가족의 일상생활이란 그야말로 恐怖의 연속이라고 해도 좃습니다. 바람이 부러서 창이 덜걱거려도 께페우가 오지 않는가 하고 신경이 산란해 집니다.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도 군복을 입은 자가 오는 것을 먼데서 보면 우리들 잡으러 오나부다고 벌벌 떨고 있읍니다. 이것이 우리들 농민의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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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漢卿. 소聯學校에서는 東洋事情이라고 할는지 특히 日本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키고 있읍니까?


나하로푸. 4년제의 의무교육학교에서는 日本에 대해서 또는 그 他 다른 외국에 대해서 교육하지 않습니다. 지리는 배워 주나 극히 개략적입니다. 4년제 이상의 학교가 되면 일반정치학을 배워 줌으로 각국의 정치상태, 국내상태 등을 배워 주고 특히 日本에 대해서는 로시아가 본 日本의 나쁜 점에 주력해서 배워 줍니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농민은 매우 가난하다든가 상품이 없다든가 하는 것을 밤낮 들었든 까닭에 오늘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슴니다. 그랬으나 현재는<95> 그것이 틀린 것으로 알고 로시아의 교육은 진실하지 못하고 역선전하는 것이라고 알었읍니다. 학교는 상급이 됨에 따라서 정치교육이 진보되고 로시아대외정책이라는데 대해서 가르치고 있으나 제1상급의 대학교 혹은 사범학교에서는 그 경향이 만습니다. 또 그 교재로서는 주로 신문에서 산 재료를 취해서 배워 주긴 하지만 그 신문도 결국은 로시아 신문이 아니면 않되는 것이니까요.

高井. 외국신문은 전혀 볼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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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최근엔 蘇聯政府의 종교에 대한 정책도 엣날과 같이 심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어떠읍니까?

나하로푸. 정부는 법률로선 종교의 자유를 인증하면서도 무신론자, 무종교단체라는 것을 맨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박멸책을 강구하고 있읍니다.


權. 현재 소련민중은 종교에 대해서 어떤 感을 가지고 있읍니까? 우리도 들었지만 無神運動者들이 선전하기 위하여 농촌에 가면 농민들이 ?㎰㈄榕?때러서 골통을 깨고 도라 온다는데 사실입니까?


나하로푸. 혁명전에 교육을 바든 사람들은 전부 신을 믿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산주의자들 중에도 맑씨즘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되는 땐 신앙을 가지는데요. 더구나 부모들의 영향이 있음으로 이런 사람들은 몰내 긔도를 하는 일이 있읍니다.



農民은 極度로 絶望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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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농민은 정말 행복합니까.


나하로푸. 개인경영으로선 재산을 빼앗깁니다. 꼴포-즈조직은 월급이지요만 이전은 勤農들에게 매우 환영을 받어답니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선 먼저도 말한 바와 같이 前途의 희망이 보이지 않음으로 蘇聯의 농업자들은 매우 실망하고 있읍니다. 혁명이전 때가 살기 좋았다 해요.



朴得鉉. 그렇게 되면 현재의 농민생활과 혁명이전의 농민생활과의 차는 어떻읍니까?


나하로푸. 帝政時代엔 아주 큰 지주가 있었고 그밖게 농민이 그것과 비교된 때문에 어쩐지 재미없는 일이 많은 것 같았지만 그때도 현재의 농민과는 비교할 배가 아니지요.<98>

이와노프. 문제도 않된다고 하는데요.


나와로푸. 현재 농민과 帝政時代의 농민과를 비교할 만한 정확한 數字는 내가 여기서 말슴하지 못하지만 내 부모든지 또 형제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帝政時代 世界大戰 당시 이전은 그 지주들이 농민에게 그 토지를 난하줄 운동이 있어서 그래서 농민은 대지주로부터 토지를 가지고 자기의 토지와 재산을 가질 遇境가 있도록 되었다고 합니다. 최근은 꼴푸즈가 되면선 자기의 재산, 자기의 토지라는 걸 가질 수 없고 또 정규수납의 규정이 있기 때문에 부담이 많어서 입는 것은 고사하고 빵문제 해결에도 곤란합니다.


高井. 거기에 내가 한 마디 말슴 더 하겠읍니다. 쏘베-트당국은 농민으로부터 것보리를 1키로 5카페-클을 수납해서 이것을 ?튼지 혹음 제분하든지 해서 1루-부르 카페클 내지 2루-부르 즉 30배 내지 40배의 값으로 팔어 버립니다. ?는 데라든가 제분하는 비용을 합한다 치드래도 약 20배의 값이 되지요. 우유에 있어서도 1릿토르 15카페-크르를 수납하고 이것을 그대로 1루-부르 50카페클 즉 10배의 값으로 국영상점을 통해서 국민에게 판매하고 있읍니다. 그 差額이 전연방에 쌓이고 쌓여 蘇聯國家 豫算의 반액을 형성하고 있읍니다. 이것을 보드래도 꼴포-즈란 것이 조직적으로 농민을 착취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즉 농민은 정부에게 자기의 소득을 10배 많으면 30배 40배식 착취하고 있으니 쏘베-트 농민이 곤궁에 빠질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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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당신네들이 일상 먹는 음식을 거즛없이 말슴해 주시요. 그것으로 대체를 알 수 있으니까요.


이와노프. 아츰은 우유와 껌정팡... 우유를 먹을 만하면 상당한 셈죠. 점심은 감자얘요. 고기를 살 수 있으면 먹게 되지만 지금은 닭과 소를 먹이게 못하는 까닭에 소고기 같은 건 도모지 먹질 못해요. 지금은 그런 고기도 없이<99> 대체로 감자와 파를 한데 짓*서 가지고 가*쯔데쯔를 맨드러 먹지요. 거기에 쓰-프 이것도 감자와 카*쯔. 저녁은 차와 껌정빵, 연어같은 *을 먹을 때도 있지만.


權. 나는 1931년. 1932년에 우라지오 太平洋 勞働書記局에 있을 때의 일이지만 그때 *껌정빵이 없어졌단 이얘길 들었는데 아직 있읍니까.

이와노푸. 우리들의 상식 인데요.

나하로푸. 도회엔 한때 없어진 때가 있었을지 모르나 현재 극동에 있어서 蘇聯 농민의 긴요한 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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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농민은 얼마나 세납을 부담합니까.


高井. 농민이 바치는 세금 중에서 제일 많은 것은 소득세입니다. 이것을 소득률에 따라 지불*니까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하로프. 그다음에 문화세 같은 것이 십수종이나 됨니다.

高井. 그 밖에 보험료가 있읍니다.

나하로프. 세금 외에도 여러가지 돈을 많이 냄니다. 먼저 의무적으로 채권을 사야 됨니다. 그밖에 스페인 전쟁 때문에 자기들이 동지를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사변 때문에 곤란을 받고 있는 支那의 자제들을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혹은 각국 혁명 때문에 타국에 있는 사람들을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여간 많은 것이 아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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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 농민들은 현정부의 정책에 대하야 만족*하는 모양이지요.


나하로프. 만족이란 蘇聯에는 없읍니다. 농민들은 결코 만족하여 있지 안슴니다. 혁명이전에는 농촌에 *는 빈민 라고 돈이 없기 때문에 해도 약 15퍼-센트밖에 안되고 그 외의 85퍼-센트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백퍼-센트가 다- 빈민이 되였읍니다. 물론 한사람도 신정부의 정책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읍니다. 다만 만족히다고 볼수 있는 것은 농촌에 있는 청년공산당원 뿐으로 그 사람들은 꼴포-즈의 근육노동에 참가할 필요가 없고 다만 선전이라든가 세금 독촉에<100> 한목 끼여서 일할 뿐인 고로 筋肉勞働을 안 하게되니깐 만족해 하지요.



都市의 勞働者 生活



金. 도시 勞働者들은 어떳슴니가.

高井. 도시 勞働者들의 생활이라고 말하면 勞働法에 따라서 勞働時間은 8시간이라고 제한되여 있기는 하지만 8시간의 勞働으로선 가족을 부양해 나갈 수가 없읍니다. 제한되여 있어도 가족들 때문에 3시간 내지 4시간을 연장하야 11시간 12시간의 勞働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記者. 월급이 아니고 일한 분량대로 주는군요.

이봐노프. 독신이래도 8시간 勞働이면 겨우 살어갈 정도입니다.



金. 그래도 勞働者가 농민보다 생활이 행복함니까.


이봐노프. 물론 勞働者는 농민보다 생활이 양호함니다. 그러나 혁명전에 勞働과는 비교도 될 수가 없읍니다. 싸베트에서 비교적 행복되게 뵈는 것은 勤務員입니다. 그 중에서도 학문이 있고 또 특수한 기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스탈린은 기술은 모든 것을 해결한다.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표어를 늘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 해당하는 기술자, 학문이 있는 사람들이 비교적 유복하게 생활하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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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로프. 물론 다 그러타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자에게만 조치요. 왜 그러냐하면 그들은 공산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좋은 지위도 어들 수 있고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할 수가 있으니깐요. 그러니깐 그런 사람들은 공산주의는 아주 좋은 것인 줄 알지요. 그러고 일반 청년은 반동적으로 여기 대하야<101> 공산주의라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자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읍니다.



肅淸工作의 一例들 들음



記者. 여기서 문제을 박궈서 스탈린의 숙청공작에 대하야 즘 이야기합시다. 싸베트 건설공로자를 투옥한다거나 살해한다거나 하는 스탈린의 숙청공작에 대한 蘇聯내의 일반사회의 공기 같은 것은 어떳습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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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井. 당신도 3년 징역 살었다지요.(笑聲)

나하로프군이 처형 바덧다는데는 금일의 싸베트를 잘 나타내고 있는 무슨 사정이 이슬 듯하니 좀 들어봅시다.


나하로프. 생각해 내는 것만 해도 실증이 남니다만 나는 3년간의 强制勞働에 복역하였읍니다. 감옥에 드러 가기까지는 나는 어떤 상점 발송계에서 일을 보고 있었읍니다. 그 상점이라는 것은 지배인과 야체-카와 께페우의 3세력이 주장이 되여 있어서 내가 발송계니깐 물건을 어디로 보내라구 명령을 바더서 그대로 보낼야구 하면 금방 또 께페우에서 그 물건은 어디로 보내라구하는 주문이 드러옴니다. 나는 명령이니깐 께페우의 주문대로 했드니 처음 보낼 작정이든 그 곳에서는 물건이 안 오니깐 그것이 분실되였다구 말이 되는 것임니다.


高井. 께페우가 중간에서 주문을 했다는 것은 비밀이니깐 결국 죄는 발송계에 씨여지지요


나하로프. 물건이 니러졌으나 께페우는 재판에 부칠 수가 없으니깐 상점의 책임이 되여서 보내야 할 걸 보내지 않은 발송계의 책임이 되는 것임니다. 그 때문에 국가에 손해를 끼첫다는 의미로 재판에 걸닌 것입니다. 나는 국가의 유해자라구 하야 그때 처벌당한 것입니다.


記者. 재판 현황을 하나


나하로프. 내가 처형당한 재판소는 인민재판소였읍니다. 그 재판은<102> 재판장과 판사장 앞에 내가 서고 또 검사가 있읍니다. 거기다 또 배심원이라고 해서 농민출신이 한 사람, 勞働者출신이 한 사람, 이 밖에 여자 서기가 1명 이것으로 구성된 데서 재판을 바덧는데 별로 조사도 없어 그냥 인정서를 가지고 약간 물어 본 후 그냥 그 조서를 認定식히고 단 10분도 안돼서 징역 3년 强制勞働이 회부한다는 판결을 바든 것입니다. 그리고 3년의 强制勞働을 모스코바 마보루가에서 지냈읍니다.




犯罪, 乞食, 賣笑婦



記者. 그러면 이쯤에서 화제를 돌여서 이번에는 일반사회 사정을 들읍시다.



朴英熙. 싸베트에서 어떤 범죄가 제일 만습니까.


高井. 그것은 무엇무엇해도 지금 유행하고 있는 트로쯔키스트의 검거일 걸요.(笑聲)

나하로프. 범죄라고 하기엔 안됐지만 국가에 손해를 준다든가 혹은 국가가 원치 안는 자는 다- 싸베트의 범죄자로서 트로쯔키스트의 명목으로 검거당하는 것이 제일 만슴니다. 그 다음이 公金消費입니다. 그밖에는 뭐 다 그러치요. 살인은 도회에 많고 절도 같은 것은 농촌에 많은 것같이 보힘니다.


高井. 그것은 농촌이 얼마나 貧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暫間 소개함니다만 범죄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싸베트에서 제일 많은 범죄는 지금 유행하고 있는 트로키스트라고 생각함니다. 1937년 1월부터 38년 5월까지 그 명목 하에 검거당한 인수가 전부 2백60만9천인이나 됨니다. 그리고 本年度 內務人民委員部豫算의 강제노역소 경비를 정하는 기초로 되여였는 정부측의 자료에 의하면 강제노역소 재감자 수가 6백11만2천4백3십2인 약 1천만인입니다. 이중의 대부분을 정부측에서 소위 트로쯔키스트라고 보는 자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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貧弱한 民衆娛樂



金. 蘇聯의 민중오락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이와노. 도시에는 여러 가지 있읍니다마늘 우리 농촌에는 手풍금에 ?Ь?딴스를 하는 것쯤 한 정도이고 혹 휴일에는 술도 먹습니다.

나하로. 다른 것은 없어도 술만은 잘 공급하여 줍니다. 따라서 농촌의 오락으로서는 딴스와 술의 정도입니다.

權. 우리들이 로시아에 있을 때의 영화는 5箇年計劃의 선전영화가 대부분이고 다음은 모다 아메리카의 희극 같은 것이였는데.

나하로. 공개영화는 이전에는 獨逸 것도 있는 모양이였으나 지금은 주로 아메리카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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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者. 일본에 물자가 많은데는 저 三等大將 류시코프도 놀난 모양인데 대체 로시아의 현상은 어떠하십니가.


나하로프. 蘇聯의 물자란 대체 빈약합니다. 있기는 있드래도 불필요한 것이 많고 필요한 것은 적습니다. 워드카 같은 것이 많지요. 그러나 팡 같은 것은 적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데파-트를 구경하였는데 그 데파-트 한 집의 상품만 해도 하바롬스크全市에 있는 상품보다 아마 더 많고 민중이 즐겨할 것도 더 많으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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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得鉉. 蘇聯의 兵役은 自由兵役입니까. 强制兵役입니가?


나하로프. 蘇聯의 兵役은 형식으로는 自由兵役이여서 징병한다 하드래도 徵兵檢場에 査가면 나도 그랬지만 징병관이 「당신은 兵役에 종사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라고 하는데 그 徵兵官의 골 속에는 「兵役을 기피하는 者 國賊이다.」라고 하는 큰 글자가 씨어저 있읍니다. 그것을 보고는 모다들 자진하여 지원합니다.(笑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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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者. 日本에 와저 제일 감탄된 것이 무었입니가. 어데 간단히 대답하여 보시요.


이하노프. 제일 감탄한 것은 전쟁 중인데도 극히 평온한 것 그리고 日本은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물자가 없다는 것을 蘇聯에서 들었고 로시아는 물자가 아주 풍부하다고 하는 것이 전혀 그 반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日本 사람들은 퍽 친절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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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9. 한경직 목사의 증언



[ .....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


......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 ]



[ .....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 ........ ]



[ ..... 먼저 은행에 가서 현금을 강탈 .......

......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 ....... ]




[단독] "소련군에게 무기 넘겨받은 공산주의자들, 라디오 방송국과 지역신문 빼앗고 있다… 반대세력 학살 위협하고 대낮에 총살"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

2017.08.16



[오늘의 세상]


故 한경직 목사가 1945년 9월 평안북도 상황을 알린 비밀청원서 발견


"청원서 받은 美군정 정치고문… '소련군 활동, 믿을 만한 첫 증언'
소련군, 도시에 들어가면서 현금 강탈·부녀자 강간 일삼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리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련군이 진주해 우리 백성을 약탈하고 많은 비행을 자행하고 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공산당 지배를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공산 한국'을 원하지 않는다(We do not want red Korea).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북한 지역은 완전히 황폐질 것이다. (연합군이) 즉각 위원회를 파견해서 상황을 조사해 달라."



20세기 후반 한국을 대표하는 개신교 지도자인 한경직(1902~2000) 목사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26일 서울의 미군정에 소련군이 점령한 평안북도 일대의 정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영문(英文) 비밀청원서가 발견됐다.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는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가 최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에서 찾아낸 이 문서는 일본이 패망한 뒤 신의주에서 소련군 및 공산당과 마찰을 빚던 한 목사가 서울로 내려와 미군정 당국에 제출한 것이다. 당시 미군정 정치고문이었던 베닝호프는 비밀청원서를 자신의 평가를 담은 보고서와 함께 미국 국무부에 보냈다. 베닝호프는 이 청원서가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의 정치 활동에 관한 최초의 믿을 만한 목격자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베닝호프의 보고서는 미 국무성 외교문서집(FRUS)에 수록됐지만 한 목사의 비밀청원서는 포함되지 않아 그동안 전문이 알려지지 않았다.



한경직 목사가 신의주 제1교회 담임인 선배 윤하영(1889~1956) 목사와 연명으로 작성한 A4용지 3장 남짓 분량의 청원서에 따르면, 일본이 항복한 다음 날인 8월 16일 신의주의 지도급 인사들은 질서 유지를 담당할 자치위원회를 구성했고, 8월 25일 평안북도 각 시·군 대표들이 참여하는 평북 자치위원회로 확대됐다. 8월 30일 소련군이 신의주에 들어오면서 시태가 급변했다. 소련군은 인민정치위원회를 새로 만들고 급조된 두 개의 소규모 공산주의 조직과 자치위원회가 함께 참여하도록 지시했다. 곧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정치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뒤 그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었다. 며칠 뒤 조직된 공산당은 법원 건물을 무력으로 차지해 본부로 사용했고 라디오 방송국과 유일한 지역신문을 빼앗아 공산주의 선전 선동을 시작했다. 공장과 농촌 마을에는 공산당 조직이 만들어져 무력으로 공장과 농지를 접수했다. 소련군은 비행기로 선전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공산당을 지원했다.



이런 사태 전개에 놀란 개신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었다. 이를 알게 된 공산당은 그들이 공식 활동을 하면 소련군이 대량 학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에서 벌어진 테러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9월 16일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살인자는 풀려났고, 평상시처럼 일하고 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이에 항의하자, 다음 날 경찰이 몰려와 체포했다."


비밀청원서는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고 적었다.



이어 소련군의 비행이 "상상을 넘어선다"며 자세히 설명한다. 소련군은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은행에 가서 현금을 강탈한다고 했다. "신의주에서 소련군은 (은행에서) 120만엔을 가져갔다.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사례는 셀 수조차 없이 많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38선을 넘으면서 소련군에게 약탈과 강간을 당한다고 폭로했다.



1932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에서 돌아와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하던 한경직 목사는 일제 말 교회를 사임한 뒤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광복 후 신의주 자치위원회 부위원장, 기독교사회민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한 목사는 비밀청원서를 제출한 뒤 평양으로 돌아갔지만 10월 말 윤하영 목사와 함께 북한을 탈출했다. 그가 북한을 떠난 뒤 용암포 지역의 기독교사회민주당 창립 모임을 공산당이 습격하자 신의주 일대의 개신교 학생이 중심이 돼 저항한 사건이 신의주학생의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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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6/20170816002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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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개혁에 대한 저항세력은 상당수 북한을 탈출하고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반발세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새로운 반발세력이 생성된 것이다. 토지개혁 이후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갔기 때문이다.


북한은 토지개혁 후 당해연도의 산물에 대하여 농업현물세제를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25%를 징수하도록 하였으나 이 수치는 법령상의 규정일 뿐이었다. 농업현물세뿐만 아니라 애국미, 성출 등 잡세로 인하여 실제로는 40% 정도를 납부해야 했다. 북한의 농민들이 낸 각종의 잡세는 토지개혁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인지주제에서 국가지주제로 변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북한은 도시나 농촌에서 기아가 속출하는 현황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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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0.5. 미군정청 법령 9호



[ ....... 최고소작료는 소작인이 경작한 토지의 총수확물의 3분지1로 ......... ]



법령 9호 공포


자유신문 1945년 10월 11일




군정청에서는 농민의 번영과 보호를 꾀하고자 최고 소작료를 전 수확의 3분지1로 제정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5일밤 군정장관으로 발표된 법령에는 소작인과 지주간의 현존하는 계약과 협정이 개정되었다. 따라서 소작인이 지불할 최고소작료는 소작인이 경작한 토지의 총수확물의 3분지1로 협정되었다. 그러므로 토지에서 산출된 전수확의 3분지1 이상의 소작료에 대하여는 여하한 새로운 규정된 계약도 실시되지 못한다. 그럼으로 이 법령에 위반하여 작성된 계약도 소작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면 그 효력이 계속되고 지주가 법령에 위반할 때는 그 1할을 감한다. 그리고 지주는 재판후에 결정되는 이외에 현재의 소작관계를 해약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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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3.22 미군정청 귀속농지불하



[ ...... 농민들의 호응은 열광적이었다. ........

...... 귀속농지 불하는 급속도로 추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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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選擧 이전에 小作農家 절반가량이 농지 불하받아



3월 22일자로 발족된 중앙토지행정처는 설립과 동시에 행정기구 개편과 농지매각에 관한 실무자 교육을 실시하여 4월 8일에는 토지분양개시식을 거행하고, 서울에서 가까운 양주군과 고양군의 100여 농가에 매호마다 450여평씩 15정보가량을 분양했다.19) 그리고 전국적으로는 5,000호의 경작농가에 양도증서를 교부하고 등기절차를 끝냈다.


농민들의 호응은 열광적이었다. 4월 1일부터 시작된 귀속농지 매각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4월 13일 현재 양도수속이 완료된 건수는 토지행정처 서울지청 관할이 8,162건, 대구 관할이 8,343건, 부산은 937건, 그리고 이리는 무려 20만 5,775건에 이르렀다. 한편 신한공사 토지의 전 면적 가운데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전남북의 일부 지주는 귀속농지 불하에 대해 맹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20)



이 조치에 좌익 정파들의 입장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논평에 집약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이번 군정당국이 동척(東拓)의 후신인 신한공사 소유지를 비롯하여 일본인이 강점했던 전답을 방매 처분하게 된 것은, 첫째로 괴뢰적 반동 단정 조작을 위한 남조선 단선을 앞두고 농민의욕을 사서 득표를 노리자는 것이요, 둘째는 전농안(全農案)에 표시된 민주적 토지개혁을 요망하여 투쟁하고 있는 남조선인민의 투쟁의욕을 토지를 농민에게 준다는 허울 좋은 기만으로 거세하자는 것이요, 셋째는 반동적 기만적 토지개혁의 전례를 만들 음모로써 소위 ‘입법의원토지개혁안’과 같은 지주의 특권 옹호적 반동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봉건적 지주토지제도를 영구화하여 지주를 미제의 침략과 식민지화의 앞잡이로 충실화하여 괴뢰 단정의 물질적 토대를 튼튼히 닦자는 기만적 모략적 술책이다. …”21)


그러나 귀속농지 불하는 급속도로 추진되어 총선거 이틀 뒤인 5월 12일 현재 전 농가의 44.6%가 귀속농지를 분양받았고, 8월까지는 86%의 농지가 불하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수립 이후에 실시해야 된다는 명분으로 반대하던 우파인사들도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농지개혁의 기념행사에 참여하는 등 협조적인 반응을 보였고, 좌익 그룹은 이에 대한 반대 캠페인의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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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년 수확물과 동일가격(평년소출의 20%를 15년간 현물로 분납)으로 농지를 구입하게 된 농민들은…낮은 가격을 기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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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의원의 와해로 ‘토지개혁법안’이 유산되자 미군정은 1948년 3월 22일자로 歸屬農地賣却令 및 新韓公社解散令을 공포, 이 날짜로 商法體制였던 신한공사를 정부기구로서의 中央土地行政處로 재발족시켰다. 이러한 재발족에 앞서 이미 5일간(1948.3.16∼20)에 걸쳐 직원들에게 토지매각 요령을 특별히 교육시키어, 4월 8일부터 토지매각을 개시했다. 이와같이 미군정이 토지매각을 서두른 이면에는 철군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즉 군정당국은 5·10총선을 앞두고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수 십만장의 항공삐라를 농촌 전역에 살포하고 또한 전국적으로 포스터를 부착했다. 그런데 “이 항공삐라와 포스터에는 귀속농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그 토지를 시세에 합당한 가격으로 팔 것이며, 상세한 내용은 지방토지행정처나 마을의 農監들에게 문의하라고 했다.


이에 대한 농민들의 반영은 대단했다. 여러 곳의 행정처 앞에는 설명을 듣기 위한 농민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C.C. Mitchell, 1949, p.127). 이와 같이 군정당국은 5·10총선의 弘報物에 토지분양을 함께 선전했다. 말하자면 귀속농지가 미군정의 5·10총선에 선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5·10 총선까지 적어도 10만호에 토지를 분양할 목표였다. 이것이 어떤 목적이었는가는 다음의 G-2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귀속농지의 대부분은 신속히 판매될 전망인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종래의 小作契約을 賣買契約으로 대체하면 되고 또한 1948년 첫번째 수확까지 상환이 유예되었기 때문이다(4월 9일자).

…중앙토지행정처는 土地分讓式을 거행하여 이 날로 5,000 농가에 경작농지의 양도증서를 교부했다. 이 계획에 대한 농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열열하며…3년 수확물과 동일가격(평년소출의 20%를 15년간 현물로 분납)으로 농지를 구입하게 된 농민들은…낮은 가격을 기뻐했다. 실제로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매각계획에 대해 비난성명을 발표했지만 이 계획에 대한 농민들의 호의적인 반응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4월 23
일자)

…4월 한 달에 10만 농가의 목표를 훨씬 초과하여 16만 농가에 농지를 매각했다…이 계획을 불신시키려던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은…소유권을 인수 하려는 농민들의 열망에 직면하여 명백히 실패했다. 또한 우익 지도자들의 초기저항도 점차 사라졌다(5월 7일자). (〈미군정정보보고서〉《자료집》6, pp. 15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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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7.



[ ...... 매일같이 심한 부역과 50%를 넘는 현물세에 살 수 없어 월남하였다 ........ ]



북한 한 마을 天道敎靑友黨員 100여 명이 집단 월남



경향신문

1949년 07월 08일




이북공산당정권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한 부락이 송두리째 월남한 사실이 있다.


즉 강원도 춘성군 공고리에 살고 있는 26가구 102명이 지난 7월 1일 밤 9시경 북한괴뢰군이 없는 틈을 타서 월남하여 왔다. 그들 가운데는 76세나 되는 노인도 있으며 그들은 소 21頭를 끌고 월남하여 강원도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청우당원으로 매일같이 심한 부역과 50%를 넘는 현물세에 살 수 없어 월남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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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2.4. 평양



[ ...... 모여드는 남하 피난민의 수는 무수하였는바 그들은 파괴된 가교를 드럼통과 부서진 가교의 木片 등으로 얽어매가지고 건너는 것이었다. ........


...... 도강하는 시민들을 중공군 게릴라부대로 오인하고 다시 기총탄을 내려 부어서 도강 중도에 쓰러지는 시민도 있었으나 쓰러지는 사람의 시체를 넘으면서도 도강하는 시민들 .......


..... 평양에서 남쪽으로 .... 연도는 약 50만으로 추측되는 피난민으로 덮여 ....... ]




유엔군 철수 직후의 평양 전경



조선일보

1950년 12월 13일



[본사 특파원 全東天 記] 12월 5일 유엔군 및 국군의 전략적 철수로 적의 손에 떨어지기 직전의 최후의 평양은 폭음과 화염 그리고 그 충천하는 흑연 속에서 도강하여 남하하려는 시민들의 아우성으로 뒤덮여 있었다. 일반시민에 대한 피난 권고는 12월 3일에 내려져서 대부분의 시민은 4일까지 피난을 하였으나, 4일 저녁 대동강의 가교가 최후 철수부대의 손으로 끊긴 다음에도 이 가교로 모여드는 남하 피난민의 수는 무수하였는바 그들은 파괴된 가교를 드럼통과 부서진 가교의 木片 등으로 얽어매가지고 건너는 것이었다.


이렇게 피난민들이 건너는 동안 하오 3시가 되자 유엔군 전투기들은 모란봉 근처의 중공군 게릴라부대를 기총 소사한 다음, 도강하는 시민들을 중공군 게릴라부대로 오인하고 다시 기총탄을 내려 부어서 도강 중도에 쓰러지는 시민도 있었으나 쓰러지는 사람의 시체를 넘으면서도 도강하는 시민들의 광경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등을 이들 평양시민들이 죽음으로써 찾는 광경이기도 하였고, 괴뢰집단의 행악이 그들에게 얼마나 심독하였는가를 실증하는 광경이기도 하였다.


전투기들은 계속하여 시내의 군사시설 비행장 등을 폭격하여 피난민들이 寺洞 근방의 언덕에 올랐을 때는 맹렬한 화염이 평양을 뒤덮었는데 때마침 저녁노을이 화염에 반사하여 그 처절한 평양의 최후는 평양을 떠나는 시민들의 발을 몇 번이고 멈추게 하고 눈물을 뿌리게 하였다. 허나 이렇게 평양을 바라보며 눈물 뿌리는 시민들도 국군과 유엔군의 최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지극히 마음 든든한 점이었다. 대동강의 가교가 끊길 때까지 강을 건너지 못한 피난민들은 강서·용강쪽으로 흘러내려갔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진남포·광량만을 경유해서 해로로 인천에 상륙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중화에서부터 신막에 이르는 300리 길의 연도는 약 50만으로 추측되는 피난민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들 일렬종대의 피난민의 대군은 하루 60리 내지 70리의 평균속도로 남하하고 있었으며, 이 피난민의 수는 그들이 한 마을 한 시정을 지날수록 늘어만 가고 있었다. 그들의 이동속도로 추측하여 오는 15일이면 그 선두부대는 서울에 들어올 것으로 보이는 바 불에 뒤덮인 자기 집을 돌보지 않고 최후의 평양에서 죽음으로써 대한민국을 찾아 남하하는 그들의 피난행렬은 정의의 승리를 시위하는 인민의 행렬 같기도 하였다.


조선일보 1950년 12월 13일








1950.11.



[ ...... 현물세가 너머도 가혹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오히려 그전 반타작의 소작제도가 좋다고 생각할 정도 ........ ]


평양과 함흥 (2) 두개의 좌담회


1950.11.16.동아




평양과 함흥에서 민간유지들과 좌담할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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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과 공포의 5개년동안 그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동경은 흡사 지상천국에 대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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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된 토지를 어떻게 재조정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괴뢰정권의 현물세가 너머도 가혹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오히려 그전 반타작의 소작제도가 좋다고 생각할 정도이니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을 크게 환영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민생문제와 아울러 그들이 심각한 안색으로 강조하는 것은 "인민군"의 대부분은 강제로 끌려간 자제들이니 이들 포로에 대하여 관대한 조치가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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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통치의 장단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들의 정치는 살인 강도정치에 불과하지만 그 강력한 조직력은 우리에게 많은 참고가 된다는 것이었다.







1951.1.



[ ...... 실지로는 6할 이상을 빼앗아가고 맙니다. ........

..... 무슨 회합, 무슨 대회 등 .......

..... 소작하던 농가도 그 전보다 살기가 더 한 층 어려워졌으니 ........

..... 어린 자식들이 내복입고 신발 신은 것을 이남에 나와서 처음으로 보니 ....... ]




월남민·피난민들의 공산체제 경험담



민주신보 1951년 01월 15일




기원전 게르만 민족의 유럽대이동도 이랬을까? 세계제2차대전 시 일본침략군을 피해 양자강 줄기를 타서 북상으로 죽음의 이동을 한 세기의 비극이라고 일컬어졌던 중국민족의 수난도 비할 바 아니다. 모진 공산 魔風에 견디지 못하여 수백만이 넘는 동족이 우리의 부모형제와 아들 딸들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있다. 세계 역사상에 한 민족이 이러한 수난과 이러한 비애를 겪어온 일이 어디 있었던가. 한 핏줄을 반만년이나 타고 나온 동족에 이렇게 모진 운명의 십자가를 누가 강요했는가. 대한의 온 겨레의 평화롭고 안락한 꿈을 그 어느 누가 깨뜨렸는고…….


이제야 우리 삼천만 동포는 다 봤다. 겉으로는 민족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다는 그 毒牙 품은 가면을 온 민족은 뚜렷이 봤다. 허위·약탈·학살·포악이 붉은 무리들이 자랑하던 그 정치의 전부였다는 것을…….


우리 민족은 두 번 다시 그네들에 속지 않으리라. 여기에 공산치하의 암흑세계에서 그 모진 질곡과 □□으로부터 벗어나와 광명의 천지로 돌아온 몇 사람들의 입을 빌려 민족 앞에 공개하는 그 몸서리나는 생지옥의 양상을 들어보면서 삼천만의 이름으로 아니 세계 자유애호 인류 20억의 이름으로 공정한 심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곤궁이 극도, 농민 朱씨:무슨 會인지 회의 때마다 놈들은 나보고 하는 말이 中農이라고 합디다. 허기야 답 2,000평 가량하고 田 4,000평 가량 경작을 하니 남한농가로 친다면 그리 옹색한 실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농가는 나보다 더 많이 농사짓는 농가도 살림살이는 남한농민보다 훨씬 곤궁하지요.


현물세라는 것이 말로는 전곡의 2割 3分, 稻作이 2할 7분이라고 하지만 알알이 세고 재고 심지어는 마당가의 호박 몇 포기, 고추 몇 대까지 현물세로 샅샅이 털어가니 실지로는 6할 이상을 빼앗아가고 맙니다. 그놈에 2개년계획은 농민이 굶어 죽는지 부어 터지는지 그 따위 것은 조금도 상관치 않고 초과 달성해야 한다고 모두 털어 가지요.


단지 이것뿐이라면 그래도 죽을 끓여 먹어도 제 고향에 박혀 있을려고들 하겠지만, 지방자치세니 국가동원이니 해서 2년에 20일 이상 노력자는 모두가 광산·탄광으로 강제노동으로 끌려가야 하고, 가마니 공출은 노력자 매 인당 20매 이상 바쳐야 하니 노동자·농민을 위한다는 북한은 실지로는 농민을 소나 말 같이 부려먹는 것입니다.



그게 다 군인에게 준다는 獸肉費로 耕作地田 1町步에 정육 8斤, 답 1정보에 16근씩 洞里마다 소 5·6頭씩 바쳐야 하고, 무슨 희사니 열성미니 애국미니 하여 바치는게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만일 이걸 내 놓기를 꺼려한다면 어디서 잡아가는 줄도 모르게 끌려가는게 공산독재 치하올시다. 그러니 이것저것 다 바치고 나면 빈농가는 설 안에 식량이 떨어지고 그래도 조금 낫다는 중층이라야 3월달 밭갈 머리까지 겨우 죽으로 연명하는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품삯벌이라도 하려니 도로경비니, 철도경비니, 세곡경비니 무슨 회합, 무슨 대회 등에 벌이를 할 여가가 없습니다. 하나 잘 먹고 잘 산다는 사람은 소위 노동당 간부와 인민위원회 간부들 뿐이지요. 저 같은 사람은 원래가 자작농이었지만 과거에 소작하던 농가도 그 전보다 살기가 더 한 층 어려워졌으니 거기에서 어찌 산단 말입니까. 어린 자식들이 내복입고 신발 신은 것을 이남에 나와서 처음으로 보니 고향에 둔 어린 것들이 불쌍합니다.



▹인권을 유린, 노동자 宋씨:나는 과거 5년 동안 북한에서 제철노무자 생활을 해왔다. 나는 과거의 근로자 생활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북한 괴뢰정권이 표면으로는 노동자, 농민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옹호한다고 말하고 있고 또 그들의 소위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다고 뻔뻔하게 떠들어대면서도 그 실에 있어서는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진보적 노동법의 혜택을 받는다고 하지만 8시간 노동제가 분명히 위반되고 있다. 그들은 항상 생산돌격이니, 목표달성이니 하는 아름다운 구호를 내걸고 8시간 노동시간을 유린하고, 둘째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견지에서 사회보험제 같은 것을 실시하고 있으나 이도 그 실에 있어서는 표면적인 언사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근로자의 이익과 근로자의 모든 자유를 보장해준다면 이 나라 근로자들이 왜 그들의 정책을 반대할 리 있겠는가? 대다수의 노동자, 농민이 공장과 농토까지 버리고 심지어는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고향산천까지를 버리고 남하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남하한 피난민은 다 나와 같이 헐벗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로운 땅을 찾아온 것이리라고 생각하고 있다(평양 거주자 宋榮煥씨).



▹언론을 총탄압, 문화인 李씨:나는 6·25사변 이후 3개월 동안 북한 괴뢰군이 서울에 침략의 마수를 뻗쳤을 때 그곳에 있었다. 나는 순서 없이 그들의 문화정책의 면모를 본대로 말하련다. 첫째 그들의 언론정책을 보라. 아는 자유, 알고 싶은 자유, 알리는 자유가 완전히 속박되어 있다. 그들의 신문을 보면 그야말로 정부나 당국에 아부만을 일삼고 있는 어용신문이 아니면 관보나 기관지에 불과하다. 그뿐 아니라 신문기사 검열 같은 것도 일일이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니 과연 이래도 언론자유며 민주정책이라 하겠는가. 그들이 하는 선전은 모두 아름답고 기막힌다.


그러나 현실을 떠난 그 선전인 까닭에 민중들은 처음엔 속지만 나중에는 그 기만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된다. 문화정책에 있어서 그들의 기만성이란 더욱 심하다. 물론 우리는 무질서한 것을 자유라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허나 우리는 비판의 자유를 티끌만큼도 그들에게서 향유한 일이 없었으며 그야말로 벙어리의 3개월을 보냈다. 여기에 이제 무슨 문화가 있고 예술이 있고 인생이 있겠는가. 더 말할 여지가 없다. 나는 앞으로 내가 갈 길만을 가려고 단연 남하하였다(서울 거주문화인 李永哲씨)



▹교육은 암담, 교육가 金씨:내가 월남하게 된 동기는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다만 북한동포의 전부가 가슴속에 가다듬고 있던 심정을 나 한 개인의 행동으로 옮겼을 따름입니다.

5년간 우리가 북한 교육계에서 맛본 鐵帳 내의 교육제도는 세계역사에도 드문 암담한 것이었고, 인간의 정당한 지성과 감정이 응당 향유해야 할 온갖 자유를 압살 당하는 그러한 교육제도였습니다. 그들의 교육정책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보다 앞서 월남하여 국군진영에서 싸우고 있거나 전사 혹은 戰傷한 나의 후진 제자들의 눈물겨운 싸움의 길에서 잘 표현되고 있을 것입니다(원산거주 교육가 金素仁씨).



▹내분이 다반사, 관리 崔씨:북한 괴뢰정권의 소위 외무성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이번 남하하게 된 것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외무국장이었던 李康國이가 많은 인테리겐챠와 함께 도태 당하고, 소위 그들의 성분개조운동으로 내분이 자자하던 시기를 回感하면 진저리가 나고 치가 떨립니다. 소위 남북연석회의 당시에 그들은 많은 관리들을 여관 보이로 변장시켜 정객들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기만과 학살정책으로 인하여 괴뢰정권 내부의 모든 관리들은 상호견제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친소파가 아닌 분자는 기어이 숙청 당하고야 마는 형편입니다.


독신관리들의 합숙소에는 반드시 정치보위부의 스파이가 개입하여 각자의 일언일동을 감시하고 있습니다(관리, 전 평양외무성 西歐部 근무 崔成極).



▹지긋지긋하오, 부녀 吳某씨:지금 생각하여도 지긋지긋한 90일 공산치하의 서울의 생활……. 겨우 걸어 다니는 어린 자식들도 괴뢰군이라면 지금도 “엄마”하고 품안에 뛰어오며 울음소리를 그치는 것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매일 같은 강제노동에 수수국, 캬배쓰국 한 그릇에 쓰러지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가 없다. 남편은 반역분자라고 이곳 저곳을 피해 다니고 어린 자식 6명을 데리고 살자니 배급하나 없고, 또한 돈 한 푼 없는데 매일 야밤에 남편을 내놓으라는 놈들의 공갈협박에 1일이 천추 같았다. 저녁마다 애국자를 총살하는 총성, 수많은 괴뢰군의 강도·절도로 하루 한시간의 수면조차 어려웠다(서울 거주, 吳某씨).



▹공산주의 강요, 학생 康군:배우는 학도로써 진리의 탐구란 생명이요, 또는 양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북 공산치하의 교육정치란 진리의 탐구는커녕 그 정열조차 가지지 못하는 불행 속에서 살아나왔다. 그곳의 교육제도는 4년제의 인민학교로부터 위로 초급중학(3년), 고급중학(3년), 각종의 전문학교(4년), 그리고 대학교(4년)가 있으며 이에 공산운동의 간부양성기관인 당학교가 있는데 전부 맑스·레닌주의 강제수업이 그 교육의 근본중심이 되어 있다(평양 음악학교 생도 康斗柱).



▹거래세로 파탄, 상인 朴씨:북한에서는 상업을 하려면 등록을 하여야만 상행위를 할 수 있다. 每 등록된 상인들은 매월 20일까지 거래세라는 것을 바쳐야 되고, 其 외에 공채 할당이라던지, 대소 행사비 조달은 전부 상인들의 부담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세금, 부담금 등으로 상인들은 허리를 펴볼 여유라고 없고 1년 가야 넥타이 한 번 매볼 수 없는 형편이다. 상거래에도 여러 가지 제한이 많아서 도저히 남한에서 보는 것과 같은 상행위의 자유성은 없다. 상업규모에는 별 제한이 없으나, 대규모로 하면 할 수록 손해를 입는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크게 하면 그 만큼 모든 부담금도 증가하므로 100만 원의 자본을 가진 상인이나, 10만 원을 가진 상인이나 자기 소득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함북 길주읍 거주).








[......농민은 농작물의 55% 내지 60%를 세금, 기타 부과금으로서......


..... 상시 감시..... 생산종목, 생산량 내지 그들이 할 바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를........]



미국무부, 북한 토지개혁 실태조사 발표



게재지명 부산일보

게재일자 1951년 03월 31일



[워싱턴 29일발 USIS] 미국무성은 최근 북한의 토지개혁에 관한 실태조사를 완료하였는데 28일 동 省은 소위 북한의 공산주의 토지개혁은 일종의 완전한 기만으로서 북한인민을 토지의 노예 내지 무자비한 관료정치의 희생물로 하였다고 요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 공산주의 치하 토지를 배당받은 농민은 농작물의 55% 내지 60%를 세금, 기타 부과금으로서 국가에 바쳤으며 그들은 상시 감시의 관계관 이외에 시·군·도의 관리소배들로부터 생산종목, 생산량 내지 그들이 할 바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를 받았다.

이 결과 그들은 작년 말에 있어 生産推持를 위한 이외에 전보다 더욱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그 보수로서는 공산주의 경제의 방직공장으로부터 배당되는 면제품 구입에도 불충분하였다.



1. 공산주의 정권은 5년 간에 있어 신 토지소유자로부터 그들의 독립성을 여지없이 빼앗고 그들은 국가 계획경제란 기계의 예속물화 하는데 간단없는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1950년에는 농업조치로서 집단농장의 실현도 未久에 근박하고 있었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민의 경제상태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토지의 기술적 소유제도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하 완전한 기만으로 되고 말 것이며 전 농민계급은 농업무산계급으로 하락하고 말 것이다.


.........................................................................

북한정권이 토지를 분배한 후 新 토지소유자들은 토지는 영구히 공여한 것이니 매매 대차, 저당은 이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한 증명서를 받았다. 즉 그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는 그 사용에 국한되었으며 그 사용료로서 25%의 현물세를 지불하였다.


1947년에 세율은 논 27%, 밭 23%, 沓 10%로 작정되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평가 때문에 실질적으로 규정율을 초과하는 토지세 이외에 농민들은 또한 특별세 부과금 그리고 소위 자진헌납이라는 重荷 아래 신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2023-09-27 22:28:42
211.xxx.xxx.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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