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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부 이승만 4
이승만 2023-09-23 20:51:07 | 조회: 92
1953.4.26. 북진통일 국민총궐기대회



[ .....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민들의 힘찬 행렬이 거리를 .......

...... 전시민이 한뭉치가 되어 국민들의 결의를 피력한 것은 저 신탁통치반대대회 이후 처음 .......


...... 백만 시민이 참집 ........ ]




1953.4.27. 경향신문



장! 휴전반대의 의기충천

휴전결사반대 서울시민궐기대회



공산괴뢰들의 6.25남침으로 조국의 강토가 전화속에 휩쓸려 수백만 인민이 죽고 상하였으며 수천만동포가 재산을 잃은 채 거리에서 방황한지 이미 4년이 되었으나 한가지 국토통일 조국독립이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참고 견디며 싸워왔는데 다시 공산침략군과 타협함으로써 휴전회담이라는 일방적인 결정으로 조국은 다시 두동강에 짤리울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휴전을 반대하고 통일 없는 타협을 규탄하는 국민적인 감정은 임시수도 부산을 비롯한 전국방방곡곡에서 폭발되고 있는데 서울에서도 각정당사회단체 주도 아래 26일 오전 10시 반부터 중앙청광장에서 북진통일국민총궐기대회가 열려 휴전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용소슴 치는 북진의 맥박

침략자를 축출 북진통일을 결의



이날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꽃철을 맞아 시민을 불으던 창경원 덕수궁도 문을 굳게 닫고 시내 상가는 자진 철시를 단행 일체의 가무음곡이 정지된 가운데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민들의 힘찬 행렬이 거리를 메웠는데 이같이 전시민이 한뭉치가 되어 국민들의 결의를 피력한 것은 저 신탁통치반대대회 이후 처음 보는 대회이었다. 백만 시민이 참집한 가운데 대회는 김(김일)씨의 사회로 장중한 주악리에 개막되어 국민의례가 끝난 다음 강(강창희)씨의 사회사에 이어 조(조광섭)씨가 국제정세보고를 하였고 유(유??)씨가 별항과 같은 결의문을 낭독하여 팽배하게 일어나는 북진통일의 국민적 기개를 다시 한번 고창하였다.


이어 윤(윤재욱)씨와 남(남송학)씨가 열렬한 궐기사를 하여 대회회중을 격려하자 회중은 우뢰같은 박수와 환호로 이에 호응하였다.



이어 이대통령과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 장군 그리고 유엔총회의장 피어슨씨 및 크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멧세-지 낭독이 있었고 '속지 말자 침략자 크레므린 평화공세를!'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내몰자 공산오랑캐 압록강 넘어로!' 등 열렬한 구호를 부르짖은 다음 국회 국방위원장 임(임흥순)의원 선창으로 대한민국 만세 북진통일 만세로 대회는 일단 끝을 막고 참집하였던 회중은 '휴전반대' '북진통일' 프라카-드를 높이 들고 일대 데모로 들어 갔다.




선언서



8년전 일본제국의 쇠사슬에서 해방되자 3천만 민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우리 강토는 양단되어 드디어 역사상 일찌기 보지 못한 민족의 수란과 희유의 참화를 당하고 있으며 1951년 소련대표 마리크의 휴전회담 제안은 침략자로 하여금 재침략의 기회를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세계의 고귀한 젊은 피들을 헛되게 하고 있다. 최근 적색제국주의자들은 세계정복의 독아를 닦으면서 가장한 평화공세를 전개하여 국제정국을 현혹케 하고 있으며 이에 수반하여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유엔 총회를 비롯하여 우방제국지도자가 또 다시 혼미에 빠지게 됨은 심히 유감된 사실이다. 오늘 소위 판문점회담이 재개되는 이 마당에 있어 우리는 언제 까지나 외세의 농락에 유린될 수 없고 외세의 과오로 기인한 비극적 대상이 될 수 없다. 민족과 국가의 운명 정히 중대 간두에 선 이 순간 우리는 오직 우리의 힘으로 북진통일하는데 총궐기할 것을 신명 앞에 엄숙히 맹세할 뿐이다. 우리 천손 만대의 경복과 조국의 영예와 자유를 위하여 한사코 북진통일을 이룩할 것이며 우리 대한민국주권을 무시하는 여하한 국제협상도 절대반대하며 UN제국은 우리 민족의 절호에 귀를 기우려 정의를 살리기를 정중히 선언한다.



4286년 4월 26일

북진통일 서울시민궐기대회



구호


1 속지말자 침략자 크레므린 평화공세를

2 내몰자 공산오랑캐 압록강 넘어로

3 청년들아 북으로 총을 잡고 진격하자

4 멸공으로 통일하자 3천리강산

5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다오







1953.4.30


[ ....... 궐기대회 참가 총인원은 500여만 명 .......

......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한다는 결의문은 약 1만 통 ....... ]



경찰, 휴전반대 궐기대회 참가 연인원 통계 발표

평화신문 1953년 5월 4일


[부산] 통일 없는 휴전은 우리겨레에 주검을 갖다 주는 것이라고 절규하여 방금 전국적으로 북진 통일궐기대회가 개회되고 있거니와 30일 현재 치안국 집계에 의하면 동 궐기대회 참가 총인원은 500여만 명으로 각사회 단체 및 각지구의 대회에서의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한다는 결의문은 약 1만 통에 달하고 있다.






1953.5.29. 경향신문


북진통일에 접대부들 궐기



긴급 국무회의로 북진의 소리도 드높은 27일 파고다공원에서는 종로구 요식업자 접대부 들의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가 벌어졌다.


통일이 아니면 죽엄을 달라! 통일 없는 휴전은 6.25의 재판이다! 고 외치는 구호도 씩씩하게 대회끝에 시가행진에 들어가 이마에 수건을 힘있게 싸맨 1천여 접대부들


종로로부터 세종로등 시내 중심가로를 일주하였는데 이날만은 이들도 이나라 여성의 ?된 가치를 시민들 앞에 남김없이 발휘하였다.(사진은 시가행진하는 접대부들)








1953.6.9. 진명여중고



[ ...... 학생들이 눈물로 아우성치면서 생사를 가리지 않고 떠밀고 들어가려고 .......

..... 울분이 터지는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 ]



휴전반대 시위중 미군의 진압으로 여중고생 다수 부상


서울신문 1953년 6월 11일



9일 擧市的인 휴전반대 데모에 참가한 진명여중고 학생 25명이 해산을 명령하는 미군헌병들에 의해서 부상을 당한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즉 이날 시위에 참가한 시내 각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정오경 미 제8군사령부와 미 제5공군사령부 앞에 쇄도하여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반공포로의 즉시 석방’등 구호를 드높이 부르면서 열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때마침 미 제5공군사령부 후문을 경비 중이던 미군헌병이 쇄도하는 진명여중고 학생들을 제지하려고 이들을 구타한 나머지 동 여중고생 25명을 부상시켰다.


부상당한 학생들은 대부분이 타박상을 입었는데 팔목에 열상 입은 자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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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정보에 접한 시경 사찰과에서는 10일 상오 전기 학교 현장에 출동하여 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한바 있었다.


그리고 이날 학생들을 인솔하였던 담임선생과 동교 학생 및 학부형측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책임 인솔선생 李根永씨:불상사가 발생할까 해서 혹시나 학생들의 데모를 제지해 봤으나 5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눈물로 아우성치면서 생사를 가리지 않고 떠밀고 들어가려고 하는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교장 이세□씨:이날 내가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휴전을 반대하는 마음에서 그 같이 시위하는 학생들의 행동을 제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학생일솔 책임 洪妊順□:울분이 터지는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학부형 □□창씨:내 딸이 미군에게 맞아 죽었다 하더라도 민족의 굳은 의사를 표시해 주었으니 만족하게 생각한다. 미군들이 어린 소녀들의 눈물로 호소하는 애끓는 정신을 이해 못하고 폭행을 가하였음은 실로 유감이다. 이래서 과연 자유세계의 진실한 민주평화가 확립되겠는가. 미군 당국자들의 신중한 검토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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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6.11. 부산 60만 시민궐기



[ ...... 굴욕적인 휴전조인을 한사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희구하는 3천만 겨레의 절규는 바야흐로 최고절정에 ........ ]



1953.6.12. 동아일보


우리의 갈 길은 오직 통일완수


정부안만을 지지
철시코 60만 시민궐기



굴욕적인 휴전조인을 한사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희구하는 3천만 겨레의 절규는 바야흐로 최고절정에 달하고 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어제 11일 국제시장을 비롯하여 신창동 대신동 등 전시내의 시장이 철시하는 한편 일반 상가점포 및 다방 등의 문은 굳게 닫혀지고 시민대중의 발인 시내 '버스'는 그 운행을 총정지하였다.


한편 이와 아울러 시내 충무로 광장에서는 상오 11시 40분부터 부산시 애국단체연합회 주최의 '정부대안 절대지지 국민총궐기대회'가 개최되었는 데 이날 대회장에는 각동민 상인조합 직장근로자 등 자발적으로 밀려든 수만여명이 참집하였다.


그리하여 동대회는 한청 이달우씨의 사회로 시작되어 양우정 김우정 양씨의 개회사 및 궐기사가 있은 다음 이대통령을 비롯하여 미대통령 유엔 사무총장 및 유엔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멧세-지'를 채택하고 이어 다음과 같은 결의문낭독이 있은 다음 만세3창으로서 하오 영시 15분 대회를 마치고 이어 보수동 파출소 미국대사관 앞을 통하여 시가행진에 드러갔다.


이날 시위에 있어 팔과 다리를 국가와 민족에 바친 수천 상이군인들은 역시 싸우다 쓰러진 앞 못보는 상이전우를 부축하여 가면서 '북진통일을 위하여 나머지 목숨을 바치겠다'는 피눈물의 구호와 '푸란카-드'를 내흔들고 시민의 앞장에 나섰다.








[ ..... 남녀학도 10여 만명 ......

.....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 .... 데모행진 ......

..... 이들의 부르짖음은 온 시내를 진동하였다. ....... ]



1953.6.12. 동아일보



10만 학생도 일대시위

상이병은 도청에서 대좌



또한 이날 전시내의 67개교 고등학교 학생과 10여 대학교의 남녀학도 10여 만명은 하오 1시 대신동을 비롯하여 영도 초량 충무로 서면 동래 등 6개 지구로 나누어 각기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를 개최하고 동 1시 40분경 부터는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등등의 구호를 절규하면서 데모행진을 감행하였다. 전기 10만명 이상의 데모 행진은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젊은이의 순정한 기개를 여지없이 발휘하여 남음이 있었고 이들의 부르짖음은 온 시내를 진동하였다.


한편 수천명의 상이군인들은 행진끝에 임시 중앙청내에 몰려들어 정부 및 입법부의 책임자를 만나 재기봉공의 각오를 표명하는 멧세-지 전달과 명확한 정부의 태도의 천명을 듣고저 하오 2시반 현재까지 광장에 주저 앉고 있다.






1953.6.11. 홍성군 이재명



[ ..... '통일 없는 휴전은 죽음이다' .....

..... 미제 수류탄에 자폭자살 ....... ]



1953.6.20. 경향신문


휴전반대의 불꽃

홍성 이씨는 통분 끝에 자결



우리의 주권을 무시한 휴전은 결사반대한다고 부르짖는 민족의 함성은 방방곡곡에서 들려오고 있다.


<이리> 지난 13일 이리 시민들은 역전광장에 시민총궐기 대회를 개최한 후 시가행진을 성대히 거행하는 한편 야간에 횃불 행진도 하였다.


(안중) 당지 평태군내 현덕 포승 청북의 3개면에서는 지난 11일 휴전결사반대 북진통일 총궐기대회를 군청광장에서 성대히 거행하였다.


(남양) 남양면민들은 지난 13일 남양국민학교 교정에 모여 휴전문제 한국제안관철 총궐기대회를성대히 거행하고 시위 행진을 행하였다.


(춘천) 춘천시 춘성군민들은 지난 13일 춘천여자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휴전문제 한국제안관철 총궐기대회를 성대히 거행하고 이대통령을 비롯한 각요로 보내는 멧세-지를 결의하였다.


(예산) 당지 시민들은 지난 13일 덕산에 주둔한 유엔군 통신부대 근방에 모여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홍성) 당지군내 11개면에서는 지난 11일 북진통일 총궐기대회를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통일없는 휴전과 포로강제송환에 울분한 홍성군 장곡면(홍성군 장곡면 산성리53)에 거주하는 이(이재명=27)씨는 궐기대회 선두에서 '통일 없는 휴전은 죽음이다'라고 통탄한 나머지 집에 돌아와 미제 수류탄에 자폭자살하여 통일을 애원하는 선구자가 되었다. 그런데 전기 이씨는 청양 경찰서에 근무 당시 보?한 미제 수류탄으로 자폭한 것이다.








1953.6.18.



[ ...... 국민의 절대적인 호응에 힘입은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 7000명을 석방 ........

...... 미국은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 5개 항을 보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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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3월 하순 그 동안 정체되었던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으며, 이에 비례하여 휴전반대국민대회 또한 열기를 더해 갔다.


이러한 국민의 절대적인 호응에 힘입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서야 비로소 한국 국민의 동의 없이는 휴전의 실효성을 거둘 수 없음을 알게 된 미국은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 5개 항을 보장했으며, 한국 정부는 유엔군측의 휴전협상 조건에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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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6.18.


반공포로 석방



발생원인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던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에게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한국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휴전협상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의제의 하나는 포로송환 문제였다. 군사분계선에 관한 협상은 「휴정협정」 조인시 접촉선으로 하기로 일찍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1951년 12월 11일부터 시작된 포로 송환에 관한 협상은 1953년 6월 8일에 가서야 비로소 합의에 도달했다.


이 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은 포로 송환원칙을 두고 유엔군측과 공산측이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측은 포로가 돌아갈 국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자발적 송환원칙’을 주장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 중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을 경우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공산측은 포로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본국으로 반드시 돌려보내야 한다는 ‘강제적 송환원칙’을 내세웠다.


이러한 원칙의 대립 때문에 장기화되던 포로송환 문제는 귀한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송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될 경우 상당수의 반공포로들이 자유의 품에 안기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이승만대통령은 미국과 유엔참전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을 결정했다.



내용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을 때 남한에서는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승만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면 한반도에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을 매우 우려했다. 미국은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나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이 곧 바로 개시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이승만대통령을 설득했다. 사실 미국은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경우 공산측이 휴전협상을 중단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은 반공포로들에게 자유를 되찾게 해주려는 목적 뿐만 아니라 방위조약과 관련하여 미국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전후하여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던 부산, 마산, 대구, 영천, 논산, 광주, 부평 등의 반공포로 수용소에서 2만7천여명의 포로들을 석방시켰다. 부평수용소에서는 400명이 탈출하면서 30명이 사망했다. 6월 21일까지 계속된 반공포로들의 탈출과정에서 모두 61명의 포로가 희생되었고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휴전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태에서 일어난 반공포로 석방 사건은 미국과 유엔 참전국들을 경악시켰다. 공산측은 탈출한 반공포로들을 전원 재수용할 것을 요구하면서 「휴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엔군측과 공산측의 반응은 반공포로 석방 이전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은 휴전협상이 한국 정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서 이승만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는 휴전은 현실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유엔군측과 공산측 모두에게 분명히 하고 휴전협상 과정 및 체결 이후에도 한국 정부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다.


미국 내에서도 반공포로 석방을 지지하는 여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군 포로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을 때 소련 정부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을 사상이 오염되었을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처형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미국은 휴전협상에서 ‘강제적 송환원칙’에 반대했던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은 그들을 자유의 품으로 데려오기 위해 유엔 참전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취해진 조치로서 이승만대통령의 가장 훌륭한 외교 업적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2717







1953.6.19.



[ ..... 중학생 1만여명은 ......

.....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애국포로석방 만세' ......
..... 열광적인 시위를 ........ ]



1953.6.21. 동아일보



반공포로석방 지지

서울서 수만 남녀중학생 시위



[ 서울분실발 ] 19일도 반공포로의 석방을 지지하는 일대 시위행렬이 수만명의 서울시민과 학생들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이날 상오 9시 서대문 일대 중학생 1만여명은 동지구 배재중학에서 시위를 시작하여 시청앞을 비롯한 시내 중심지 일대에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애국포로석방 만세' 등의 프라카-드를 높이 들고 열광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성신 숙명 수도 창덕 계성 동성 보성 등 7개 남녀중학생들이 궐기하여 애국포로석방지지의 구호를 절규하면서 5시간에 걸쳐 시내일대에 열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1953.7.8. 경향신문


비장한 우중시위

6일 2만여 학생, 시민들 단행



전국적으로 홍수사태를 일으키고 있는 폭우 속에도 불구하고 6일 2만5천여 명의 서울 시민 학생들은 시내 수개처에서 봉기하여 통일 없는 휴전반대 데모의 비장한 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날 상오 9시부터 성북구민 8천7백명 마포구민 1만명과 용산구민 3천명 성동 10개동회 5천5백여명이 궐기하여 비장한 우중시위를 단행하였다.


한편 시내 경서 선린 용산 상명 계성 보성 동성 성동 덕수상업 한영 수도여중 등 12개교 남녀학생들도 비바다로 화한 장안 거리에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위를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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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8. 정,부통령선거



[ ....... 유효표 74.6% ... 압도적 지지로 쉽게 대통령에 재선 .......


...... 민국당은 ... 정치자금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고 ......

...... 조봉암 ... 이시영이 무소속으로 .... 10% 내외 ........ ]




1954.5. 3대 민의원선거


[ ...... 자유당이 재석 203석 중 과반수가 넘는 114석 ........

..... 민국당은 .... 불과 15명만 당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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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4.5월에 실시된 지방의회선거는 정당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기초의회(시,읍,면의회)의 경우 17,559석 중 무소속이 42.5%인 7,469석을 차지하여 자유당의 4,444석이나 야당세력인 대한청년단 2,843석, 국민회 2,621석 보다 다수였다. 그러나 광역의회(특별시,도의회)의 경우 선거 직전에 족청의 이범석이 내무장관에 임명됨으로써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료, 경찰의 지원까지 받았던 자유당이 306석 중 147석을 차지하여 무소속 85석이나 한청 34석, 국민회 32석 보다 월등히 많은 당선자를 냈다. 기초든 광역이든 정당조직으로는 자유당세력이 지방의회를 거의 장악하게 되었고 그렇게 구성된 지방의회는 지방주민을 동원하여 직선개헌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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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경찰과 계엄군을 동원한 가택수색이 시작되고 심지어 구속중인 의원들도 보석출감하여 국회에 호송되었다. 이리하여 7월 4일 경찰과 청년단에 의해 포위된 의사당에서 기립투표 끝에 마침내 찬성 163, 반대 0, 기권 3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 되었다.



직선제 개헌을 위해 이와 같은 무리수를 동원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52년 8월 5일의 정,부통령선거에서 유효표 74.6%에 해당되는 5,238,769만 표를 얻어 압도적 지지로 쉽게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경찰,관료,그리고 자유당 조직이 총동원된 선거였기도 했지만 전쟁 중의 국민들로서는 이승만 외에 마땅한 대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국당은 이승만에 대항하여 후보를 내세운다는 것은 정치자금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고 초대 농림장관을 지낸 조봉암과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각각 797,504표,764,715표를 얻어 10% 내외의 득표율을 보였다. 한편 부통령에는 자유당내 족청계의 지지로 후보에 나섰던 이범석을 제치고 이승만이 지지한 무소속의 함태영이 유효표의 41.3%인 2,943,813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원래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 족청계가 장악하고 있었던 자유당은 52년 7월 전당 대회를 개최하고 정,부통령후보에 이승만,이범석을 각각 공천하였다. 그러나 개헌성공 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정도로 강력했던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함으로써 자유당을 확실한 친정체제로 전환시키고 싶었던 이승만은 전당대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부통령에 무소속의 함태영을 지지하고 정,부당수제를 총재제로 바꿀 것을 요구하여 잠재적 경쟁자인 부당수 이범석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이범석과 경쟁관계에 있던 장택상총리는 전국의 지방행정조직 및 경찰조직을 동원하여 함태영을 당선시켰는데 이것은 족청의 조직력이라 하더라도 경찰,관료의 뒷받침 없이는 선거를 치를 수 없는 당시 정치의 한계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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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등의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2대 직선대통령 선거와 그 뒤를 이은 휴전반대운동 및 반공포로 석방 등에서 국민들의 동원이나 지지를 끌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선거사상 처음으로 정당공천 후보제를 실시했던 1954년 5월 20일 3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물론 관료와 경찰의 선거개입은 여전히 중요한 변수였으나 이승만의 권위에 도전했던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하고 이기붕을 중심으로 확실한 이승만의 친정체제를 확립한 자유당이 재석 203석 중 과반수가 넘는 114석을 차지하였다.



반면 민국당은 개헌파동 후 현저한 세력 약화 속에서 자유당의 족칭계 제거기를 이용하여 1953년 11월 혁신강화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종래의 집단지도체제를 신익희를 중심으로 한 단일지도체제로 개편하는 한편 소장파를 책임부서에 등용하는 등 당세 만회에 노력하였으나 3대 총선에서 불과 15명만 당선됨으로써 원내교섭단체도 구성치 못하게 되었다. 또한 1,2대 국회선거에서 압도적 다수가 당선되었던 무소속 제도의 변화와 자유당의 압승에 따라 67명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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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7.27. 휴전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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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것은 2대 국회 후기에 들어서다. 그러니까 1953년 휴전 협정을 맺을 무렵 거세게 일어나는 북진 통일 운동 때부터 이승만의 의회 장악력이 점점 커지고 1954년 5.20선거에 의해 그야말로 이제는 자유당을 완벽하게 좌지우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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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감금된 의원들, 화장실 가려다 뺨 맞은 총리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8> 조봉암과 진보당, 여섯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2015.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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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고받았네. 공부하러 가는 데야 말릴 수 있나. 미국 가면 군사학만 배우지 말고 경제학도 좀 배워라. 국내적으로 경제가 매우 중요하다.” ........ ]




[ ..... 이박사가 아니었던들 대한민국이 있었겠는가. .......

..... 분단, 민족분열 ... 독립투쟁 당시부터 분열했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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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는 나를 보자마자 “중동하고 아프리카에 대통령 특사로 다녀오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도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평소부터 대통령 특사로 외국에 나가려면 아무래도 참모총장과 국방장관 등을 지낸 인물이 적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나이도 어리고 선배님들도 계신데…”라며 머뭇거리자, 이박사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대로 할 일이 있고, 자네는 자네대로 거기에 다녀오면 돼”라고 못을 박았다.


당시 나의 군 선배로는 정일권·이형근·백선엽·유재홍·김일환·이종찬같은 분들이 계셨고, 이한림 같은 분들이 친구로서 나와 친하게 지냈다.내 짐작으로는 53년 차관 거부사태 때 이박사께서 나에 대해 ‘별난 놈’ 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이박사는 내 앞에서 일사천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씀하셨다.


“특사로 바깥에 다녀올 마음의 준비를 하게. 이제부터는 공산당과 싸운 경험을 세계와 나누는 일이 중요해. 중동지역 국가들은 알라신이 공산주의를 막아준다고 생각하는데 정말로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들에게 공산당과 싸운 경험을 전해 주고, 조언해 주는 것이 한국 외교에서 아주 중요하다네. 자네처럼 젊은 군인이 적임자야.

그리고 가는 길에 오키나와에 들러 따끔하게 독립정신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네. 오키나와가 원래 대한민국과는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 사람들이 또 일본 치하에서 살려고 그러는 모양일세(당시는 미군정). 그들에게 우리의 예를 들면서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게.”



이를 계기로 나는 이박사를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별 영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박사의 생각은 달랐다. 어떤 정치인과 관료들도 엄두를 내지 못할 때 그분은 자유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생각이 넓고 깊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전쟁을 치러본 젊은 장군을 ‘특사’로 내보내려고 마음먹은 것도 남달랐다. 요즘 젊은이들이 이박사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저평가하고 그러는데, 내가 아는 이승만은 요즘 우리 젊은 세대들보다 민족의 장래를 훨씬 멀리 내다보고, 깊게 생각하는 분이었다.


하지만 1957년 8월 나는 갑자기 미국 참모대학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주변에서도 병과 장교로 군에 있으려면 한번은 다녀와야 한다고 권했고, 마침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백선엽 장군이 나에게 “특사 문제가 걸려 있으니 각하를 한번 뵙고 인사드려라”라고 하길래 인사차 경무대에 들렀다. 나에게 특사 임무를 맡겼기 때문에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이박사는 또 한번 나를 놀래켰다.

“보고받았네. 공부하러 가는 데야 말릴 수 있나. 미국 가면 군사학만 배우지 말고 경제학도 좀 배워라. 국내적으로 경제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말씀을 듣고 경무대를 나오면서 나는 ‘이박사야 말로 이 나라를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느냐를 항상 고민하는 분이다. 이박사야말로 정말로 훌륭한 국가 지도자다’라는 생각을 굳혔다.



요즘 젊은 역사학자들이 이박사에 대해 광복후 친일파를 재기용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시각에는 감정이 배어있다고 생각한다. 이박사는 평소 “식민지 경험이 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그날, 한일관계가 진정으로 청산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요즘 친일파 기용 문제로 젊은이들 일부에서 이박사를 비판하는 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단견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하겠다는 깊은 안목



이박사가 독재를 했다는 비판도 그렇다. 당시 우리 국민 수준에서 그분만큼 국제정세를 꿰뚫어볼 만한 분이 어디 있었나. 전쟁중인 1951년부터 휴전회담을 했는데, 한번은 대통령 주재로 긴급 내각회의를 열었다. 그때 정세는 미국과 소련이 양쪽으로 갈려 의견이 충돌했는데 대한민국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때였다. 이박사가 내각회의에서 각료들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누구 하나 의견을 내놓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이박사가 독자적으로 결정해 처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독재를 했다면 그것은 독재라고 비판해도 무방하다. 미국이 우리에게 잉여농산물을 제공할 때에도 이박사는 결코 비굴하게 굴지 않았다. 당당했고 대등한 태도를 취했다. 무쵸 대사 시절이었는데 미국이 이것 저것 참견하니까, 이박사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우리를 도우려면 우리가 도움이 필요없어지도록 도와줘야지, 우리가 언제나 당신들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가도록 도와주면 뭐하나. 그런 식의 도움은 필요없으니 여기서 미국 것 다 거둬가라”고 호통친 일화는 유명하다. 나라의 주권을 지킨다는 견지에서 그분의 배짱은 정말 대단했고 높게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이박사가 아니었던들 대한민국이 있었겠는가. 공산화됐을 것이다. 분단, 민족분열의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나? 독립투쟁 당시부터 분열했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당시 군대까지 다 붉은 물이 들었었다. 공산당이 다 침투했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호언장담하지 않았는가. “남쪽에는 각계에 공산당이 다 침투해 있기 때문에 전쟁만 일으키면 금방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박사가 아니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지 걱정이다.


나는 고향이 이북(평안북도 창성)이다. 해방후 고향에서 보니 소련 점령군 장교들이 들어와서는 성출미라는 명목으로 주민들 쌀을 거둬가고 압록강 수풍댐 등 수력발전소 5개 중에서 발전기 3개를 떼어가고 그랬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나는 그걸 보고 공산주의가 우리를 잘 살게 해줄 수 있겠나,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대학 시절(만주 건국대)에도 공산주의에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직접 경험한 셈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소련군이 발전기를 떼어가고 거지같이 남루한 차림으로 쌀을 빼앗아가는 것을 보고 우리 민족의 운명이 순탄치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는 군대가 필요하고, 내가 거기에 일조하겠다는 생각으로 군에 입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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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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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해 8월 8일 그는 경무대로 이사를 했다. 대통령 내외는 가구도 없었으므로 그때 처음 신접살림을 꾸미는 거나 다름없었다.


당시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가 손수 꿰멘 양말을 신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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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헌법에 따라 1948년 7월 20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국회의원들에 의한 간접 선거였는데, 이때 이승만은 재적의원 1백98명 중 1백80표를 얻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압도적인 지지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는 순간 「대통령 이승만 만세!」라는 소리로 의사당 안은 떠나갈 듯하였다. 그때 이승만의 눈에는 희미한 눈물이 괴었다. 그의 나이73세 때였다.


이승만은 1948년 8월15일, 그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그해 8월 8일 그는 경무대로 이사를 했다. 대통령 내외는 가구도 없었으므로 그때 처음 신접살림을 꾸미는 거나 다름없었다.


당시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가 손수 꿰멘 양말을 신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들은 두 사람의 가정부를 고용하였고, 1층 응접실과 두 개의 사무실, 2층에 침실과 식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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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해서 최초 18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번씩 내외신 기자들과 정례회견을 가졌다고 한다. 회견에 임해서는 보통 미리 성명서를 준비하는 것과는 달리 자유자재로 담화를 발표하고 기자들이 질문에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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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는 자기 친족과 재산을 챙기기 마련이지만 이 대통령은 하야 이후 사람 키 만한 박스에 막대기를 꽂아 옷장으로 사용했을 정도였다”고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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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 석 자를 팔지 말라』

그런가 하면 李承晩 대통령은 「냉정한 사람」이라고 한다.


『일가 친척들을 경무대에 얼씬도 못하게 했습니다. 대통령의 甥姪(생질) 가운데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생질 남매에게 금족령을 내려서 경무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 지요. 그런 분이었으니 당신께서 不正(부정)을 할 리가 없지요. 4·19 때 李대통령이 스위스 은행에 몇백억을 예치해 놓았다는 얘기가 나돌았지만 지 금까지 한 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금전적으로 깨끗한 분이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이 수행원들에게 늘 당부한 말이 있었다고 한다.



『「냉수먹고 된똥 싸라. 밖에 나가서 경무대 석 자를 팔지 말라」고 하셨어요. 경무대를 등에 없고 부정부패에 연루되지 말라는 의미였죠. 그 말씀을 자주 하셔서 항상 수행원들이 가슴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張勉(장면) 정권이 들어서서 강도 높은 조사를 했지만 경호원 가운데 부정과 연루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경호원이었던 곽영주씨가 사형을 당한 것은 4·19 때 발포 사건과 연루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 얘기인지 알 수 없는 일이죠. 어느 해는 비서실 예산을 반납시켰을 정도로 경무대 사람들도 검소하게 지냈습니다』



李대통령은 항상 뭔가 골똘히 구상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金正旭씨가 바라본 李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백성을 배불리 먹이는 일이었다. 당시 유일한 돌파구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많이 받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국무위원에 많이 기용되었으며 그들은 대부분 유학파로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대통령께서는 밀가루 한 포라도 더 원조받으려고 애쓰셨습니다. 국무위원 들과 한국말로 하시다가 긴밀한 얘기, 우리 수행원들이 들으면 안되는 얘기들은 영어로 하셨어요. 당시 국무위원들은 상당히 격조 있고 수준 높은 분이었어요. 또 연륜이 있는 분들이었죠』 당시 국무위원 중에 李範奭(이범석) 국무총리와 錢鎭漢(전진한) 사회부 장관이 영어를 좀 못했을 뿐 대부분 영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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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때면 수행원들에게 와이셔츠를 하사하곤 했는데 그것도 모든 수행원들에게 다 주는 것이 아니라 몇몇에게만 주었다.


『경호원들에게 봉투에 돈을 넣어서 준다든가 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어요 . 두 분이 워낙 검소하게 사셨기 때문에 남에게 선물을 줄 만한 물건이 없었어요. 저도 몇 번 와이셔츠를 받았는데 영광이었지요. 한번은 쓰시던 중 절모를 저에게 하사하셨습니다. 대통령의 중절모를 아버지께 갖다 드렸더니 몹시 기뻐하시더군요. 대통령께서 대신 나에게 충무로에 가서 중절모를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李대통령은 좀처럼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데 어느 해인가 공휴일에 북한 어선이 연평도를 침공했을 때 洪璡基(홍진기) 해무청장과 金貞烈 (김정열) 공군참모총장이 자리에 없어서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다고 한다 .


李承晩 대통령의 유일한 취미는 낚시였다. 광나루 워커힐 아래 강가나 경복궁 內의 경회루에서 매주 토요일 낚시를 했다. 낚시 외에는 가끔 비원을 산책하면서 깊은 상념에 젖곤 하는 것이 취미생활의 전부였다.

『술도 마시지 않으셨어요. 오로지 모든 시간을 나라 살리는 일에만 투자했기 때문에 지금 이 정도 살 만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은 國運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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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 사흘 후 1차 선발대가 대구로 떠나고 다음날 2차 선발대가 대전 으로 갈 때 金正旭씨도 합류했다. 李대통령은 대구에서 대전으로 옮겨와서 『왜 나를 멀리 보내려 하느냐. 나는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하지 만 戰勢(전세)가 좋지 못해 수행원들이 서울로 가려는 李대통령을 충남도지 사 관저에 모셨다.


『대전 모기가 대단합니다. 모두들 고생이 많았지요. 戰時여서 대통령 내외 를 편하게 모실 수가 없었어요. 두 분께 따로 식사를 차려드리긴 했지만 먹는 것은 우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李대통령은 대전에서 사흘 간 머무는 동안 수원으로 가서 미국 측과 회담을 하고 오기도 했다. 대전에서 다시 진해에 있는 대통령 별장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밤이면 등화관제 때문에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 어두운데다 초행길이어서 수행원들이 대통령을 안전하게 모시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그날 밤 비까지 오고 있었다. 수행원들이 그곳 지리에 밝은 충남도지사에게 안내를 부탁했지만 자유당 소속이 아니었던 그는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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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원들에게 별로 말을 건네는 일이 없는 李承晩 대통령이 전쟁중에 질문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맥아더가 왜놈들을 상륙시켜 北進하자고 하는데 자네들 어떻게 생각하나」 그렇게 물으셨어요. 모두들 묵묵부답이었지요. 그러자 「나는 왜놈이 한국에 발을 들여 놓으면 총부리를 왜놈들에게 대겠다. 왜놈은 우리 땅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대통령 일행은 仁川상륙 직후인 9·28 수복 때 서울로 돌아왔다가 1·4 후퇴 때 다시 피난을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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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말 듣지 않았다


金正旭씨는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퍼스트 레이디가 한국 부인이었다면 경무대가 조용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프란체스카 여사의 가족 가운데 아무도 한국에 살지 않아 외척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아예 없었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너무나 검소하고 부지런한 분이었습니다. 계절마다 옷이 한 벌씩밖에 없었어요. 거의 매일 같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경무대에서 모임에 초대되었다가 고픈 배를 안고 돌아가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경무대에 초대받았으니 점심을 주겠지 생각하고 왔던 분들이 간단한 다과만 대접받고 가면서 굶고 간다고 말하곤 했죠. 특히 과자를 프란체스카 여사가 직접 구워 대접하였는데 그 일로 초대받은 이들이 감격하곤 했습니다 』



그는 李起鵬씨를 모질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여자 같은 성격에 마음이 매우 곱고 음성이 조용하고 착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 李起鵬씨의 아내 朴마리아씨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조종하여 李承晩 대통령으로 하여금 잘못된 판단을 하게 하였다는 얘기에 대해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부인이 간섭한다고 해서 받아들일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중에 국회 부의장을 하셨던 任哲鎬(임철호) 비서관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그분이 대통령께 바른말을 잘했어요. 프란체스카 여사가 任비서관에게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면 대통령께서 흥분하고 심기가 불편해진다며 주의를 줬어요. 프란체스카 여사의 최대 관심사는 남편의 건강이었습니다. 그러자 任비서가 비서직을 그만두고 경무대를 나가 버렸어요.



대통령이 任비서가 필요하니 불러오라고 해서 찾아갔지만 두 번이나 거절하더군요. 또다시 대통령이 오라고 하자 그제야 任비서가 경무대로 돌아왔습 니다. 아내의 말을 듣는 사람이면 아내 때문에 나간 사람을 다시 불러올 리가 없지요. 李대통령이 연세가 많으셨어도 판단력은 흐리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 일에 참견을 하는 분이 아닙니다. 옆에서 조용히 돕는 분이었습니다. 任비서에게는 단지 남편의 건강이 걱정되어 그 런 얘기를 한 것뿐입니다』



朴마리아씨는 알려진 것과 달리 경무대에 자주 오지 않았다고 한다. 金正旭 씨는 이강석을 양자로 받아들인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자나깨나 남편 건강을 챙기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산책을 갈 때면 프란체스카 여사께서 꼭 스웨터를 챙겨서 들고 나오십니 다. 자신이 스웨터를 들고 다니면서 좀 쌀쌀하다 싶으면 바로 입혀 드리고 좀 덥다 싶으면 바로 벗겨 드렸어요. 그 정성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수행하면서 세심하게 배려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많이 배웠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챙겨 주니 대통령께서 스스로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틈나면 운동하고 장작을 패고 정원의 나무를 직접 자르면서 운동을 하셨죠. 두 분이 늘 산책을 하면서 많이 걸으셨어요』金正旭씨는 지금도 프란체스카 여사를 생각하면 항상 타이프치는 모습이 떠오른다고 전한다.


『한 번도 앉아서 편하게 쉬는 걸 못 봤습니다. 늘 분주하게 움직였지요. 집안일 뿐만 아니라 타이프를 치면서 대통령의 일을 많이 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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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에서 물러나지 않아도 되는데 백성이 원하면 물러난다며 대통령께서 이화장으로 향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입니다. 李대통령의 强點이라면 청렴하고 검소하고 지혜가 있다는 점입니다. 단점이나 아쉬운 점이라면 단지 나이가 많았다는 점이죠. 당시 대통령의 나이가 85세였는데 60代 정도만 되셨어도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자유당 정권을 3選 개헌을 제외하고는 나무랄 데가 없다고 평가했다.


李대통령이 정치를 잘했으며 특히 韓美 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은 높이 살 일이라고 말했다.


말에 좌지우지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도와 주러 왔으면 우리 필요에 의해서 미국이 움직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그러니 미국 측과 마찰이 잦았고 재임 시절 UN 사령관과 미국 대사가 자주 바뀌었어요. 미국측 인사들에게 항상 당당하셨지요』金正旭씨는 자유당 정권을 3選 개헌, 3·15 부정선거로만 볼 게 아니라 살기 어려운 시절, 외국 원조를 끌어들여 나라의 기틀을 잡고 어려운 일을 많이 했던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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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에서 근무한 사람은 옷을 벗으라고 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玉石을 가려야지, 무조건 경무대에서 근무했다고 그만두라고 하는 건 부당한 일이죠. 날짜를 소급하여 부정축재자를 가리는 조사를 하겠다고 할 때 나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조사받을 일이 뭐 있습니까?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했고 남 괴롭힌 일 없이 떳떳하게 살아왔습니다. 당시 경찰관들은 깨끗했습니다. 4·19 이후 부정축재자를 소급해서 찾았지만 경무대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적발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효가 지난 뒤 집으로 돌아왔고 그 뒤 조사받은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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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李承晩 대통령의 장례식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한다. 김포 비행장에서 이화장으로 운구할 때 연도에 너무 많이 운집한 시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원래 계획과 달리 자동차 속도를 올려야 했다. 장례식 당일 이화장에서 과학관이 있던 연근동까지 시민들이 꽉 들어차서 장례식을 거행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장례식 날 金正旭씨는 장의위원으로 선정되어서 영구차에 타고 함께 국립묘지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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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식 차량은 GMC 군용 차량이었는데 이화장 을 떠나 정동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시청 앞 광장으로 가서 李대통령의 육성을 들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 시청으로 가지 못하 고 바로 국립묘지로 가야 했다.

『국민들이 정말 李承晩 대통령을 사랑했습니다. 장례식 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모인 군중들이 그 증거지요. 모두들 통곡을 하며 울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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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사형을 당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법정 최후진술에서 「李박사 이상 존경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는데, 가까이서 뵌 분들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경무대 경호원들 중에 생존자가 몇 분 없어 요즘 만남이 좀 뜸하다고 한다. 과묵한 그는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서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을 때 그분 존경하는 마음을 안고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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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로는 일당 1달러 50센트를 받고 농장에서 교민들과 함께 일한 적이 ........ ]



윤치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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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부터 그는 미국 하와이대학교 국제법학과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1924년 다시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7월 10일 이승만이 그를 만나 자신의 독립운동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승만의 설득으로 윤치영은 대한인동지회에서 활동하며 동지회 기관지인 월간 태평양 잡지의 집필과 인쇄 과정을 맡아 봤고,발간, 발송, 광고, 수금 등의 일도 직접 맡아 보았다. 1924년 7월부터 1937년까지 대한인동지회 총본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미국 본토행을 단념한 그는 이승만의 요청대로 하와이에 눌러앉아 이승만이 교포 2세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한인기독학원에서 강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태평양 잡지의 편집을 맡았다.[16] 이 잡지는 이승만이 발행하던 것으로서 한국사(韓國史)와 한국 문화를 영어영문으로 소개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운전을 할 줄 몰랐던 미국생활 초기에는 이승만이 직접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함께 배달하러 다녔다. 후일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침은 15센트 짜리 빵 한 개, 4~5센트 하는 커피 한 잔으로 때우고, 점심에도 빵 한 개와 야채 스프가 고작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그 시절 대부분의 한국인 교민들은 사탕수수, 파인애플 농장에서 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고, 윤치영과 이승만도 때로는 일당 1달러 50센트를 받고 농장에서 교민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이승만은 대화와 언변에도 능했지만 잡다한 재주도 있었는데, '이 박사는 농사일 뿐만 아니라 어디서 익힌 솜씨인지는 몰라도 목수 일, 미장이 일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고 솜씨도 대단해서 샌님인줄 알았던 한국 교포들이 모두들 감탄했다'고 회상하였다. 뒤에 1920년대 후반에 가서야 몇인의 배달부를 채용하여 배달, 배송을 시켰지만 기타 제반사항은 윤치영 자신이 직접 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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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 시절 양말을 직접 기워 신는 등 절약 생활을 몸소 여준 모범적인 영부인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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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 시절 양말을 직접 기워 신는 등 절약 생활을 몸소 여준 모범적인 영부인이었다.


이화장에서 노년을 보낼 때에도 연료 절약을 위해 겨울철이면 본채 대신 경비실에서 추운 겨울을 지냈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였다.

술고래였던 청와대 요리사 양학준 노인은 프란체스카를 "깍쟁이 사모님"이라고 불렀고
모든 면에서 절제하고 아끼는 그녀를 "소금 조금","간장 조금" 이라고 하면서 흉내를 낸 적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상당히 근검절약하는여성이였다.(프란체스카, 1988:39-40)

이런 영부인 자리에서 물러난 후 그녀는 파란 눈의 거리감 있는 영부인이 아니라 알뜰하고 자상한 이웃 할머니와 같은 친근감으로 국민들에게 다시 다가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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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 음식은 검박하고 서민적이다. 새우젓은 으뜸으로 치는 음식 재료다. 찌개도 고기 대신 새우젓을 넣어 담백하게 끓여낸다.

"아버님께서 새우젓 들어간 음식을 아주 좋아하셨어. 우리 집 음식 중에 사치하는 게 있다면 이 새우젓이야. 한 깡통에 8만원 씩이나 하는 걸 1년에 세통은 사야 하니까.".

이화장 안주인인 이대통령 며느리 조혜자(56)씨는 시어머니 프란체 스카 여사 시절 입맛을 고스란히 잇고 있었다. 새우젓국에 집에서 만든 두부를 듬뿍 넣어 부드럽고 고소하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외국 국빈들 을 접대할 때도 평소대로 새우젓을 넣은 찌개를 올리곤 했다.

"우리네 음식이야말로 어머님,아버님이 장수하신 비결이었어. 아버 님은 아흔, 어머님은 아흔둘에 타계하셨는데, 두분 다 기름기를 멀리하 고 콩과 두부를 즐겨 드셨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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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찌개도 거의 빼놓지 않고 식탁에 오른다. 이대통령 양자인 이화 장 주인 이인수 박사 역시 부모 입맛을 그대로 닮았다. "우리집 비지찌개는 꼭 두부를 걸러낸 비지로 만들어. 뭐니뭐니 해도 그게 비지의 제 맛이라고 어른들께 배웠거든. 우리집 양반도 비지찌개 하나면 밥 한 그릇을 금방 비우시지.".


경무대 시절 주방에서 좀더 고급스럽게 만든다고 두부를 거르지 않은 비지를 썼다. 그랬더니 이대통령은 "이 맛이 아닌데…" 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조씨가 끓여낸 비지찌개는 맛과 모양새가 토속적이다. 걸쭉하고 투박한 "진짜 비지"와 풋고추, 홍고추가 어우러져 영락없는 시골집 어매 손맛이다.


"어머님은 김치를 담그시다가 무가 달고 맛있으면 깎아 나눠주시곤 했어.시루떡을 즐겨 드셨고 떡국 끓이는 솜씨는 전문가셨지. 하와이 망명시절에 어머님이 끓이신 떡국이 어찌나 맛있든지 아버님께서 단숨에 두그릇을 비우셨대. 전형적인 한국 아낙이셨지. 국민들이 못 먹고 못 입는데 어떻게 사치하느냐고 입버릇처럼 걱정하시던 분이야.".


프란체스카 여사는 평생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협립우산 한개를 30년 넘도록 사용했고, 옷은 물론 양말과 스타킹도 기워 신었다. 열두폭 스란치마를 휘날리지 않았어도 생활에서 배어나던 그의 기품이 아직도 이 화장 거실에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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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天堡 전투는 크게, 李承晩은 작게



2002년 8월, 북한이 金日成의 대표적 抗日 투쟁 업적으로 꼽고 있는 普天堡(보천보) 전투가 한국의 고등학교 검정 교과서에 실리게 됐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북한의 金日成이 普天堡 전투와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비록 金日成의 이름은 직접 언급되지 않았지만, 普天堡 전투가 교과서에 실리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논란이 야기됐다. 결국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는 『보천보 전투처럼 학계의 평가가 엇갈리거나 연구성과가 축적되지 않은 주제는 교과서 본문에서 직접 다루기보다는 脚注(각주)나 학습자료란을 통해 소개』하기로 했다.



현재 고등학교 검정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6종 모두 普天堡 전투나 이와 관련이 있는 동북항일연군(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들어진 抗日유격부대), 조국광복회(1936년 만주 및 함경도 일대에서 결성된 抗日지하조직. 普天堡 전투 당시 동북항일연군에 內應했다가 日帝의 탄압으로 붕괴) 등에 대해 記述하고 있다.



그중에는『1936년 이른바 동북항일연군이 결성되자 韓人 무장군도 이에 합세하여 1940년 소련으로 넘어가기까지 항일 전투를 전개하였다』(두산, 194쪽)고 간략하게 記述한 것도 있다. 금성출판사 刊 교과서(196쪽)는 본문 중에서 동북항일연군과 조국광복회에 대해 언급한 외에도 「역사의 현장」이라는 난에서 「항일 유격대의 普天堡 점령」이라는 제목으로 普天堡 전투에 대해 特筆(특필)하고 있다. 普天堡 사건을 보도한 東亞日報 사진도 함께 실었다. 2002년 8월 언론보도에 의하면 원래 제목은 「日帝의 간담을 서늘케 한 보천보 전투」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대한교과서刊 교과서(187쪽)에서도 「도움글」난에서 「항일유격대의 계속된 투쟁」, 「조국광복회의 결성」이라는 제목으로 東亞日報 사진과 함께 普天堡 전투에 대해 상세히 記述하고 있다.



普天堡 전투 외에도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투쟁에 대해 상세히 記述하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金元鳳(김원봉) 義烈團(의열단), 조선의용대 등 과거 교과서에서도 언급됐던 抗日투쟁들에 대한 記述이 한층 자세해졌고, 원산노동자 총파업·암태도 소작쟁의 등이 관련 자료들의 풍부한 인용과 함께 깊이 있게 다루어졌다.



반면에 李承晩(이승만)의 경우를 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든가, 외교독립론과 관련해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정도로 간단하게, 비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독립운동 시절 李承晩의 사진을 실은 교과서는 단 하나도 없었다. 천재교육刊 교과서(191쪽)는 李承晩이 1919년 윌슨 미국대통령에게 보낸 「위임통치청원서」와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 李承晩 彈劾 주문」을 소개하고 있다. 금성출판사刊 교과서(187쪽)에서는 申采浩(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과 李承晩의 「위임통치론」을 나란히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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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흉상




내년에 개원 50년을 맞는 국회가 초대 의장 이승만 전대통령의 흉상을 세우려다 몇몇 의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공과와 대한민국 건국사의 법통수호 필요성을 구분하지 않은 매우 유감스런 처 사가 아닐 수 없다. 2대 의장 신익희 선생의 흉상을 함께 세우려던 안이 24명의 위원중 신한국당 이신범, 국민회의 국창근 한영애 의원등 3인이 막고나서 좌절됐다니 먼저 세 의원에게 묻고 싶다. 광복후 좌우 대립속 에서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세워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의원직이 가능했겠는가. 그들은 먼저 의원직부터 거부해야 했다.



헌법이 제정되고 정부가 수립되어 오늘에 이르렀기에 건국 대통령이자 초대 국회의장인 이승만 박사의 흉상을 국회내에 건립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세 의원은 과거 독재를 했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 했다. 이는 부분만을 내세워 전체를 부정하는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이 승만 전대통령을 평가할 때, 종신집권을 위한 개헌과 3.15 부정선거를 빼놓을 수 없다. 또 독재자란 비판도 가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잣대로도 1948년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자체의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의 주권을 누리고 삶을 영위하게된 것도 나라를 설계하고 주춧돌을 놓은 이승만이라는 선견지명의 인물이 있었기 때문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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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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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22. 백범 김구 기념관 건립



[ ..... 백범 김구의 기념관은 건평 3000평에 총사업비 180억원으로 2002년에 건립됐음에도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기념관이 없다 ....... ]



[ ..... 김일성에게는 깍듯이 '주석'을 붙이고 김정일은 예외 없이 '위원장'으로 부르는 ....... ]



[김대중 칼럼] 건국 대통령의 기념관 누구 눈치 보나


2010.09.05




이젠 나라 됨됨이 챙겨야 할 때

이승만 기념관 하나 없는 건 수치 좌파 눈치가 그렇게 두렵나



가난해서 삶이 어려웠던 집(家)이라도 여유가 생기고 먹고살 만한 정도가 되면 자신의 집안과 주위를 살펴 빚을 갚고 사람살이의 앞가림을 하게 되는 것이 세상사의 순리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나라가 어려웠을 때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이라도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성숙한 국민과 건강한 나라가 우선적으로 할 일이다.



그것은 곧 대한민국 탄생의 '족보'를 정리하는 일이다. 오늘을 있게 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 그들의 기여와 희생에 대한 보훈의 뜻을 잊지 않는 것―그것이 곧 민족 됨됨이를 가늠하는 척도다. 6·25전쟁 60주년인 올해, 우리는 정말 어른스러운 일들을 했다.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켜준 자유세계인들의 노고와 희생을 잊지 않고 그들을 찾아가거나 모셔오고 또 추모하는 훌륭한 행사들을 치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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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의 나라 됨됨이 또는 나라다움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곧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고 지켜나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건국의 역사, 건국의 인물들에 대한 우리의 자부심을 통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에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것은 나라의 수치다.


상징물로 보면 우리나라에 '조선'은 있어도 '대한민국'은 없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세종로를 지키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은 이 땅의 지난 500년 역사가 무의미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째서 우리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의 기념관 하나 못 만들고 있는 것일까?


우파는 이승만이 4·19를 촉발한 독재정치인이었기에 건국의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고 말하고 있고, 좌파는 그가 분단의 주도자였고 그래서 통일을 저해한 사람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승만은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어 냈고 정부를 세웠으며 6·25를 이겨냈고 우리를 미국을 매개로 세계로 나아가게 만든 지도자였다. 그것은 이 민족을 살린 성공의 역사였다.

그가 없었으면 이 땅은 일찌감치 '공산국가'가 됐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지금도 땅을 치고 원통해하며 이승만을 배척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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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의 기념관은 건평 3000평에 총사업비 180억원으로 2002년에 건립됐음에도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기념관이 없다는 것은 그 어떤 '정치적 궤변'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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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은커녕 기념관조차 없는 것이 그가 보수·우파의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라면 그럼 지금 이 나라는 무슨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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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대한민국 역사의 주역들인 이승만·박정희의 호칭에는 인색하면서 이미 '역사'가 된 지 오래인 북한의 김일성에게는 깍듯이 '주석'을 붙이고 김정일은 예외 없이 '위원장'으로 부르는 일부 언론에 익숙해 있는 풍토에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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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이승만 기념관 세우는 일에 결단을 내릴 수 없다면 어디 재벌 하나쯤 나설만도 한데 모두 좌파들 눈치가 그토록 두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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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에서는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이 10년 가까이 각광을 받았다. 범여권 대표주자를 표방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또한 대선 투표 전날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등 백범김구기념관이 있는 효창공원을 중요한 상징 장소로 활용하곤 했다.



김대중 정부는 2002년 10월22일 "백범 김구의 삶과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함"을 표방하면서 백범김구기념관을 개관했다.


국민의정부가 주도한 이런 백범 현창사업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개인적인 성향과도 밀접하다. 그가 가장 존경한다고 거론한 인물이 바로 백범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에 투신하다 암살된 백범의 정치적 성향이나 행보는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가 남북관계 기조로 채택한 '햇볕정책'과 손쉽게 결합한 측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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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3.1. 노무현


[ .....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습니다.

..... 이제 비로소 역사적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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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의 출범으로 이제 아픔의 근, 현대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은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좌절과 굴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역사적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국민이 진정 주인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참여정부에서는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설 땅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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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a.go.kr/research/contents/speech/index.jsp?spMode=view&artid=1309352

제84주년 3·1절 기념사

연설일자 2003.03.01






* 2005.7. 노무현



[ ..... 역사의 고비마다 ... 분열 세력이 승리 .......

..... 무엇보다 남북 간 분열을 극복해야 ..... ]



[ ..... 이승만 대통령의 남한 단독정권 수립, 이후 지역주의 조장 세력의 장기집권 등을 지칭 ........ ]



“역사 고비마다 분열세력이 승리”노대통령 언급

입력 20050701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1일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평통 12기 전체회의’ 대회사를 통해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하는 것은 지난날 역사의 고비마다 통합을 주장한 사람들은 항상 좌절하고 분열 세력이 승리해왔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나라가 외세에 무릎을 꿇고 국민이 고통을 받았던 국난의 시기마다 내부에는 분열이 있었고 그렇게 겪은 치욕의 역사는 우리에게 분열을 강요해왔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무엇보다 남북 간 분열을 극복해야 하고, 우리 내부의 지역주의와 남남갈등도 극복할 때가 됐다”면서 “이제 배제와 타도가 아니라 공존하는 문화, 대결이 아니라 협력하는 문화, 투쟁과 타협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 독선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고 다른 주장과도 합의를 이뤄내는 관용의 문화를 키워가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분열세력 승리’ 언급의 의미와 관련, “이승만 대통령의 남한 단독정권 수립, 이후 지역주의 조장 세력의 장기집권 등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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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70170367






"KNCC 마저" 여권 당혹감


[한국일보 2004-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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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총무는 또 “얼마 전 속초에 갔다가 김일성 별장을 수리하는 사람에게 주민들이 ‘왜 이승만 대통령 별장은 수리하지 않느냐’고 묻더라”며 “국민들이 매사 그런 식으로 보고 있다”고 국보법 폐지에 대한 국민정서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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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


[ ...... 지난해 가을 문을 닫았어요.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한다고 야단이고 ........


.... '통일기원관'은 문틀의 창호지가 떨어져 나갔다. ........ ]




`문 잠긴` 이화장 … `빈약한` 구미 생가

[중앙일보]



`YS 기록·전시관` 예산 부족으로 착공 못해
`문서 썩기 전에 정부 나서고 민간 협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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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잠긴 건국 대통령 전시관=서울 종로구 이화동 1-2번지 이화장(梨花莊).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유품이 전시된 곳이다. 지난해 12월 11일 대학로 뒷골목 이화장의 대문은 잠겨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신분을 확인한 뒤 문을 연다.


"많을 땐 하루에 관광버스가 99대나 왔었는데 지난해 가을 문을 닫았어요.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한다고 야단이고 관리할 이도 없고…."

이 전 대통령의 며느리 조혜자(63)씨는 입구 쪽 한옥을 보여줬다.


서울시 지원으로 다시 지었다는 '통일기원관'은 문틀의 창호지가 떨어져 나갔다.

"예산 지원이 안 돼 내부공사가 3년째 중단돼 있어요. 아버님 재임 시절 문서 일부가 골방에 쌓여 있지만 난방도 안 되니 이곳으로 옮길 수가 없네요."


1904년 이 전 대통령이 밀사로 미국에 갈 때 사용한 여권과 이듬해 현지에서 보낸 외교 보고서 등이 진열된 본관도 전문적 관리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이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국도 실크 양장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외국인사 부인들에게 알리려고 손수 디자인해 봉제소에서 제작한 옷은 세탁소용 비닐에 싸인 채 벽에 걸려 있다.


전시 공간이 없어 본관 창고에 신문지를 깔고 쌓아 놓은 유품도 상당수다. 이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75)씨는 "건국 대통령의 전시관이 이 지경인 나라는 한국뿐일 것"이라고 말했다.



80년대 중반 도둑이 들어 자료를 잃은 이화장은 사진 2만여 장과 A4용지 15만 쪽 분량의 자료를 98년 연세대에 기탁했다. 연구를 맡고 있는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오영섭 교수는 "그대로 있었더라면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임시정부 관련 문서 등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관리인 없는 대통령 생가=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 한 해 45만 명이 찾는다는 이곳엔 지난해 12월 12일에도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유품이라곤 나무 책상과 책꽂이.호롱이 전부다. 분향소 입구에 걸린 사진 10여 장이 그나마 볼거리다.


충북 청주에서 온 김대곤(56)씨는 "박 전 대통령의 생가가 초라해 놀랐다"며 "우리도 이젠 대통령을 기릴 정도는 되지 않느냐"고 씁쓸해했다. 구미시 관계자는 "시와 경북도가 기념공원을 조성하려고 생가 주변 2만 평을 사들였지만 예산이 없어 착공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경남 합천과 대구에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생가는 관리인도 없다. 그저 빈 집일 뿐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도 충남 아산에 생가 고택(古宅)이 있지만 전시물은 없다. 자손들이 사는 서울 안국동 자택에 있는 유품 일부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최근 작고한 최규하 전 대통령의 생가 터엔 원주시립박물관 부속건물이 들어섰다. 서울 서교동 자택의 자료가 한 대학 측에 기탁될 것으로 알려진 게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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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553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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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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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시절 남편과 내가 방문했더 미주의 우리동포들은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어떤 집에서는 먹을것이 없어서 젖을 빨리고 있는 엄마와 아기가 다 영양실조에 걸린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때 너무나 가슴아파하던 남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토록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오직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서 보내는 한국동포의 뜨거운 애국심에 나는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남편이 왜 3등열차나 3등선실만을 골라서 타고 다니며 그토록 오랫동안 필사적인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는지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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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초부터 남편과 나는 매일 새벽 함께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생활을 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은 남편이 독립운동을 할때나 대통령직에 있을 때나 하와이 병실에서 돌아가실때까지 한결같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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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결혼하자 남편의 비공식 여권을 내줄때마다 신경을 써야했던 미국무성의 미시즈 시플리는 지겨운 나머지 나에게 남편을 설득하여 미국시민권을 받도록 하라고 말했으나 남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한국이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 주시오]

그리하여 나는 남편의 조국독립에 대한 집념과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한국인 특유의 위엄과 민족적 자부심에 언제나 압도 당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이 됐지만 그분과 결혼하러 빈에서 미국으로 건너갈때도 나는 입국비자를 얻기 위해 남다른 고충을 겪어야만 했다. 그분이 끝까지 미국시민권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 당당한 무국적인 남편과 내가 이로 인해 겪은 고초는 그분이 대한민국 건국을 이룰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이 내건 30만달러의 현상금이 목에 걸린채 비공식 여권을 가지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하와이와 상해, 제네바, 모스크바등 오대양과 각대륙을 종횡무진 나그네 생활을 하였었다. 그리고 중국인 시체를 운반하는 배안에 누워서 태평양을 건넌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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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지도자의 위신을 지키며 모든 면에서 남모르는 내핍생활을 지속했던 독립운동시절에 우리는 하루 두끼를 절식할 때도 있었다. 나와 단 둘이 식사할 때는 남편은 늘 기도를 했다.

[우리가 먹는 이 음식을 우리동포 모두에게 골고루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루 한끼의 식사에도 감사하며 머리숙여 기도하는 남편이 측은하게 느껴져서 목이 메인 일이 이제는 먼 옛날 얘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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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하느라 밤낮없이 넓은 미국땅을 누비고 다닐때 였다.

남편은 이곳저곳의 강연시간과 방송이나 신문기자와의 약속시간에 대느라고 운전대만 잡으면 과속으로 차를 몰아 태풍처럼 질주했다.



그의 과속운전은 먼거리를 짧은 시간에 가야하는 바쁜 일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음껏 달려야??직성이 풀리는 혁명가적 기질 탓으로 보였다.



워싱턴의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기 위해 남편이 차를 몰고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달리던 때의 일이다. 시간이 급박했기 때문에 남편은 그 격렬한 과속운전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러워서 과속을 제지했지만 남편은 아랑곳없이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켠채 신호를 무시하고 논스톱으로 마구 달렸다.



곧 두대의 기동경찰 오토바이가 사이렌을 울리며 우리차의 뒤를 따라왔다. 남편은 더욱 무섭게 속력을 내며 달렸다. 나는 간이 콩알만해지고 등과 손에 땀이 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렸으나 남편은 태연하고 의기양양했다.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끝까지 따라왔던 두대나 되는 기동경찰의 오토바이에 붙잡히지 않은채 남편의 차는 정시에 프레스클럽 강연장에 도착했다.



남편이 연단에 올라서서 열변을 토하며 청중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며 수십번 박수갈채를 받았다. 강연장 입구에서 나편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벼르고있던 두대의 기동경찰도 어느새 열렬히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아마 그들도 남편의 연설에 무척 감동된 모양이었다. 연설을 끝내고 나오는 남편을 붙잡을 생각도 않고 나에게 다가와서 한마디 충고를 해주었다.



[기동경찰 20년에 우리가 따라잡지못한 유일한 교통위반자는 당신 남편 한사람뿐이오. 더 일찍 천당가지 않으려면 부인이 단단히 조심시키시오]하고 그들이 남편을 향해 승리의 신호를 보내고 웃고 돌아가자 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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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편은 늘 [욕심내고 화내고 남을 미워하는 것이 건강에 제일 해롭고,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말했다. 건강을 유지하는 최선의 비결은 언제나 마음을 편안히 갖고 잠을 잘 자는 것이라고 남편은 말해주었다. 미국에서 남편은 많은 사교모임에 나갔지만 술과 담배는 일체 입에 대지 않았다.



청년시절 집안 어른들로 부터 술 마시는 법을 배웠다는데 구국운동할때부터 술과 담배를 끊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해방후 귀국해서 가끔 윤석오씨와 이기붕씨 집에서 정성껏 담가보낸 막걸리를 [불로장수주]라고 남편은 나에게도 조금씩 권하며 즐긴적은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후 [굶는 국민이 있는데 어찌 쌀로 만든 막걸리를 마실수가 있겠는가]고 막걸리는 물론 다른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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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가슴에 울분이 쌓이면 장작을 열심히 팼다. 장작패는 일은 남편이 젊었을 때부터 해왔다고 했다.

약소민족의 지도자로서 나라없는 설움과 냉대를 받으며 강대국의 횡포에 시달려 온 남편에겐 장작패는 습관이야 말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건강을 지켜준 비결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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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통 나물 두가지에 국 한가지로 식사를 했다 .......

...... 저녁 식사 때면 낮에 먹던 반찬 갖고 오라고 말하셨어요.......

..... 생활하시는 게 일반 서민들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았어요.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궁핍하게 살았어요 ........ ]



[ ..... 「재옥아 이 꿰맨 걸 나더러 또 입으라 그런다」 ...... ]
2023-09-23 20:5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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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 2023-09-23 20:53:08 삭제





[ ..... 보통 나물 두가지에 국 한가지로 식사를 했다 .......

...... 저녁 식사 때면 낮에 먹던 반찬 갖고 오라고 말하셨어요.......

..... 생활하시는 게 일반 서민들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았어요.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궁핍하게 살았어요 ........ ]



[ ..... 「재옥아 이 꿰맨 걸 나더러 또 입으라 그런다」 ...... ]



『저렇게 살려면 우리는 대통령 안한다』고 했지요




1947년 이화장 뒷집에 살았던 인연으로 李承晩 대통령 일가와 14년간 생활 했던 方在玉(71)씨를 만났다. 이화장을 시찰하러 왔던 李起鵬씨가 그녀에게 청소를 부탁했고 그 일을 계기로 이화장에서 경무대, 다시 이화장까지 대통령 내외와 가장 가까이서 지내게 되었다. 경무대 禹石根(우석근) 경사와 결혼했다.



方在玉씨는 李대통령을 매우 자상한 분, 프란체스카 여사는 매우 알뜰한 분 이라고 기억했다. 方在玉씨가 맹장염에 걸렸을 때 대통령은 方씨의 아버지를 경무대로 불러서 수술을 시켜도 좋은지 물은 다음 수술하게 했다. 처녀의 몸에 칼을 대려면 아버지의 허락을 받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소탈한 성격의 李承晩 대통령은 보통 나물 두 가지에 국 한 가지로 식사를 했다고 한다.



『저녁 식사 때면 낮에 먹던 반찬 갖고 오라고 말하셨어요. 손님을 초대했을 때 외에는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지 않았어요. 생활하시는 게 일반 서민들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았어요.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궁핍하게 살았어요』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에 있을 때도 미장원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실핀으로 머리를 감았다가 드라이로 말리는 게 고작이었다. 옷도 산 적이 없다고 한다. 천을 구입해 와서 비서인 김신영씨와 함께 블라우스를 만들어서 입었다. 경무대에서도 옷을 꿰매 입는 건 여전했는데 어느 날 대통령이 方在玉씨에게 이렇게 하소연을 했다.



『대통령께서 내복을 들고 저에게 「재옥아 이 꿰맨 걸 나더러 또 입으라 그런다」하시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던 기억이 나요. 너무나도 알뜰하신 영부인이었죠. 양말도 기워 신고 가루비누도 숟가락으로 재서 썼어요. 무섭게 절약하셨어요. 오스트리아에서 영구 귀국하실 때는 다 떨어진 행주까지 갖고 오셨더군요』



14년간 한집에서 생활하면서 대통령의 수발을 들었던 方在玉씨는 두 사람이 부부싸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대통령이 급한 성격이어서 화를 내면 할머니(方씨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할머니라고 지칭했다)가 일단 피하기 때문에 부부싸움이 되지 않아요.


할머니가 李대통령의 음식을 일일이 만들어 드리고, 또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을 일일이 확인해 봤다는 얘기들을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할머니가 우리들에게 지시를 하면 우리들이 알아서 척척 했지요. 우리들에게 많이 맡겼어요. 소탈한 성격이어서 아랫사람들 하는 일에 별로 간섭을 하지 않았어요.


다만 두 분 내의와 양말은 항상 할머니께서 직접 손으로 세탁하셨어요. 언제나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어요. 사람 차별하지 않고 일하는 우리들에게도 늘 「고맙습니다」하고 인사하셨지요. 한국말을 배워서 우리들에게 간단한 명령어와 단어를 사용해 말씀하셨어요.


두 분은 아랫사람들과 격의없이 지내셨어요. 그야말로 인정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 셨어요. 제가 허리가 아파 고생할 때 할머니께서 허리에 안티프라민을 바르고 손으로 맛사지해 주셨던 일을 잊을 수가 없어요. 할머니는 명절 때 선물이 들어오면 모아두었다가 일하는 사람들 생일이 되면 나눠주셨어요』



方在玉씨는 李대통령이 나이가 많아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고 말하는 것은 와전된 얘기라고 전한다. 아침마다 자신이 직접 일간신문과 경제신문을 갖다 드렸고 신문을 꼭 읽었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李起鵬씨의 아내 박마리아와 유일하게 친분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 것도 잘못된 점이라고 지적했다. 김정열 국방장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윤치영 내무장관의 부인들과도 친밀하게 지냈으며 정운수 의원 부인 편정희 여사, YWCA 총무였던 박에스더, 이화여대의 金活蘭 박사, 김신실·김영의 교수, 중앙대 설립자 임영신씨 등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이 경무대로 프란체스카 여사를 자주 찾아왔다고 한다. 김활란 박사와 임영신씨는 李承晩 대통령 영결식 때 흰족도리를 썼을 정도로 친밀하게 지냈다.



方在玉씨는 李대통령이 하야하던 날 경무대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울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고 일러주었다. 이화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기름이 없어서 총무처에 기름을 좀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쌀을 살 돈이 없어서 온실의 화초를 팔아서 쌀을 사기도 했다.



『대통령께서 돈이 없어서 우리들에게 월급을 못 주실 거라는 걸 알았지만 두 분을 너무 존경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모두들 이화장까지 따라왔어요. 함께 생활하면서 두 분에게서 무엇 하나 어긋난 점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검소하고 소박하고 너무도 존경할 만한 분들이었지요』



대통령 내외가 하와이로 떠나자마자 경찰서에서 나와 물건에 딱지를 붙이고 물건을 실어 내갔다. 모두들 어쩔 줄 몰라 그저 발만 동동 구르며 울었다고 한다. 짐을 실어 내가고 폐가처럼 되어버린 이화장에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경무대 식구들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다시 한국에 돌아온 후 정기적으로 찾아뵈었고 方在玉씨를 비롯해 경무대에서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프란체스카 여사 영결식 때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경무대 식구들은 아들 李仁秀씨 가족들과 내왕을 하고 있다.



『전 정치적인 건 잘 몰라요. 하지만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기운 옷을 입고 아끼느라 물건 하나 제대로 못 쓰는 모습은 모든 국민이 본받아야 돼요. 그때 경무대에서 일하던 사람들끼리 그랬어요. 저렇게 살려면 우리는 대통령 안한다고요. 높은 자리에서 그렇게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方씨는 부정부패가 만연한 세상에서 새록새록 李대통령 내외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 ..... ''식사 기도를 하실 때는 우리나라에 밥 굶는 국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 하셨어요.'' ...... ]



이승만 전 대통령도 기운 속옷 입었어요


CBS TV 황민규 수습PD
2009-01-12


이승만 전 대통령의 며느리 조혜자 여사가 말하는

''이화장式 절약법''


이승만 전 대통령의 며느리이자 이화장의 안주인인 조혜자 여사(67)가 CBS TV 새롭게하소서(1월14일 방송분)에서 자신의 솔직한 가족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이화장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았던 사저(私邸). 196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와 결혼한 조혜자 여사는 프란체스카 여사가 세상을 떠난 1992년까지 22년간 프란체스카 여사를 시어머니로 모시며, 오늘날까지 이화장의 안주인으로 살아왔다. 늘 근검절약이 몸에 베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모시고 살면서 많은 어려움과 고비도 있었지만, 묵묵히 대통령의 며느리로 충실히 살아 온 그녀. 그녀는 시어머니의 검소함을 배워 후원이 뜸한 요즘도 여전히 이화장에서 옛 정취와 역사의 숨결을 보존하며 검소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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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자


▣ 근검절약이 몸에 베인 깐깐한 시어머니


밥알 한 톨, 두부 한 조각, 콩나물 한 가닥도 함부로 못 버리게 하셨어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프란체스카 여사는 평소 성품이 검소하고 수수한 여인이었다. 아들 이인수 박사가 출장을 갔다가 사다준 양산을 30년 가까이 사용했고, 40년간 아껴서 입은 검정예복을 며느리 조 여사에게 고스란히 물려줄 정도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속옷이 닳아 구멍이 나도 실로 꿰매 다시 내 놓기도 했단다. ''''시아버님이 시어머님 앞에서는 고맙다 하셨지만 뒤로는 ''''에휴... 이것도 한두 번이지''''하고 푸념을 하곤 하셨어요.'''' 조혜자 여사는 1976년 한 회사에서 에어컨을 기증했을 때도 전력난이 이렇게 심한데 에어컨을 사용할 수 있겠냐며 돌려보낼 정도 였어요''''라고 하며 시어머니 지독한 절약 습관을 회상했다.



▣ 서민들의 생활수준에 맞춘 절약 습관



''식사 기도를 하실 때는 우리나라에 밥 굶는 국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 하셨어요.'' 조혜자 여사가 밝히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늘 국민을 위해고 기도하는 시부모님이셨다. 아침마다 기독교 방송을 시청하시고 나면, 손을 잡고 남북통일과 집 없는 서민들을 위해 기도했던 프란체스카 여사. ''''어머니는 아이들 목욕도 마음껏 씻지 못하게 하셨어요.'''' 평소 근검절약이 몸에 베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달동네 아이들은 식수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고생하는데 우리도 아끼자''''라고 하면서, 이화장의 모든 생활수준을 서민들에 맞추어 생활하게 했다고 말했다.



▣ 시루떡을 좋아하던 진정한 한국인, 프란체스카 여사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을 뽑자면 호두과자, 시루떡이에요. 오스트리아 인이었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진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모습이었다. 남편 이승만 전 대통령을 하늘 같이 받들고 순종했으며, 며느리 앞에 있던 고기반찬을 슬쩍 아들 쪽으로 밀어 놓는 극진한 한국인의 모성도 가지고 있었다. 쪽진 머리와 한복을 입고 이화장의 손님들을 맞이했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제2의 고향인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도 강했다. 임종을 앞두고 성경책과 태극기를 함께 넣어 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대한민국에 대한 짙은 애국심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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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hristian.nocutnews.co.kr/news/538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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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붓글씨로 [안빈낙업(安貧樂業)]이라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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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내로서 가장 행복했을 때는 남편이 대통령이 된 후 첫월급을 받았을 때였다. 그 때 남편은 붓글씨로 [안빈낙업(安貧樂業)]이라는 글씨도 함께 써주었다.

[어려운 나라실정과 자기분수에 맞는 검소한 생활을 즐기고 일하는 것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는 뜻이 담긴 이 붓글씨를 나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남편의 대통령 재임시 경무대에서 식사는 주로 내가 마련했고 우리의 내의와 양말도 꼭 내손으로 빨았다. 남편의 뜻에 따라 비싼 고기류는 명절과 축일 또는 손님접대할 때만 사왔다. 대통령은 보통가정의 평범한 음식인 물김치.콩나물.두부.김.된장찌개.생선구이 같은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우리집의 단골반찬은 이런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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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튼 하나도 바꾸지 않고 일본 시대 쓰던 그대로였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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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월급을 건넬 때 李박사는 아내에게 「安貧樂業」(안빈낙업)이라는 글씨를 써주면서 『어려운 나라 실정과 자기 분수에 맞게 생활하라』고 일러주었다. 이미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12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그 일은 힘들지 않았다. 돈암장에서 마포장, 이화장을 거쳐 대통령 관저 경무대의 주인이 된 李대통령은 스스로가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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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는 일본식과 미국식이 뒤섞인 불편하고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일본인 총독 미나미가 지은 이 건물에는 역대 조선 총독들이 살았으며 李대통령이 입주하기 전에 미군 하지 장군이 살았다. 일본식인 다다미방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李대통령은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경무대를 개조하지 않았다. 목욕탕의 욕조가 너무 좁아 욕조 한편을 파내 다리를 뻗을 수 있게 했을 뿐이다. 李대통령은 『나라 일 보는 사람이 자기 집을 고치다 보면 그런 데서 부정부패가 싹트게 된다』며 이화장은 물론 경무대도 손대지 못하게 하였다. 대통령이 진해에 내려가 있는 동안 경무대의 베란다 수리를 했다가 혼이 난 직원들은 다시는 대통령의 허락 없이 경무대를 수리할 수 없었다. 경무대 공보실장을 지낸 吳在璟(오재경·前 공보부 장관)씨는 어느 날 밤 경무대 갔다가 이층에서 내려오는 대통령 부부를 보고 이렇게 느꼈다고 한다.


『2층에서 가운을 입고 내려오시는데 어느 양로원에서 온 것 같았어요. 커튼 하나도 바꾸지 않고 일본 시대 쓰던 그대로였죠. 경무대를 하나도 수리하지 않고 사용할 정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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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는 자기 친족과 재산을 챙기기 마련이지만 이 대통령은 하야 이후 사람 키 만한 박스에 막대기를 꽂아 옷장으로 사용했을 정도였다”고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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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곤 칼럼] 修己治人


200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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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이화장’이 있다. 그러잖아도 자료를 찾으러 언제 한 번 같이 가자고 약속했던 터여서 20여분 빗길을 걸었다. 찾던 자료는 못 찾았지만 그냥 나오기가 뭣해서 이방 저방 기웃거리는데,아! 눈에 익었으면서도(신문 TV 등을 통해) 새삼스런 광경이 충격을 안긴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속옷들이다.


옛날 신라 적 백결 선생은 깁고 기운 옷을 입어서 그렇게 불렸다더니 이분의 속옷도 기운 위에 덧 기운 자리가 역력하다. 스무 자루는 좋이 넘을 듯한 몽당연필들, 하와이 시절 장롱으로 사용했다는 포장용 종이상자가 또 눈길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치밀을 극한 해부과학, 철저히 물질화로 환원된 인체가 주는 충격으로 한껏 처졌던 마음이 이분들의 흔적과 거기에 밴 고결한 영혼으로 해서 크게 위안받는다. 기회 있을 때마다 정치적 측면에서 비판을 주저치 않았던 입장이 한참이나 곤혹스러워진다.


수기치인(修己治人).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야 남을 다스린다’고 했다. 이는 유학이 가르치는 정치의 요체다. 우리에게 이를 솔선수범해 보인 이가 이국 태생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부인이다.


그 놀라운 검소 절약의 생활은 이웃,국민 나아가 인간에 대한 사랑의 다른 표현일 것임에 틀림없다. 정치에서도 정말로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사랑’이다. 어떤 거창한 구호와 청사진도 국민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을 땐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정치기술에 불과하거나 그것도 못되면 거짓 구호에 그치고 만다.


사랑에 덧붙여져야 할 것은 진지함과 겸허함이다. 자신의 책무에 대해,또 이웃과 국민에 대해 경박하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 못할 때 이 전 대통령 부부와 같은 생활은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일이 못된다. 가식으로 시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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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5/0000138981?sid=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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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7일 새벽 2시 申性模(신성모) 국방장관 과 李起鵬(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씨가 李대통령에게 南下(남하)를 권유했을 때 『 서울을 사수해야 해. 나는 안 떠나겠네』 하며 화난 걸음으로 침실문을 닫고 들어갔다. 곧이어 따라 들어간 프란체스카가 『어려운 때 국가원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라가 위태롭다고 합니다. 수원으로 잠시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시면 어떨까요?』하고 간곡히 말했다. 李대통령은 아내에게도 화를 내면서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냐고 소리질렀다.


그때 경무대 경찰 간부가 청량리까지 적군이 들어왔다는 긴급보고를 했고 申장관이


『잠깐만 수원까지 내려가 주시면 훨씬 유 리하게 싸울 수 있고 꼭 서울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다시금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간다는 긴급보고가 이어지자 대통령 일행은 새벽 3시 30분 경 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경무대 금고를 다 털었을 때 5만원밖에 없어 그 돈을 가지고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5만원은 요즘 화폐 가치로 따졌을 때 2만원 남짓한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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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피난갔을 때 曺在千(조재천) 경북지사 관저에 머물렀다. 대통령 부부와 정부각료 국회의원 등 70여 명이 함께 지냈다. 수발을 드느라 曺지사 부인이 유산을 하기까지 했다. 李대통령은 부인의 일을 덜어주기 위해 아침에 사과와 토마토, 날달걀을 먹고 모시옷에도 풀을 먹이지 않고 그냥 입었다. 일선장병 위문을 가거나 피난민 수용소를 갔다가 때를 놓쳐 굶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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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부부는 모기에 물린데다 땀띠까지 나서 고생이 심했다. 워커 장군에게 땀띠연 고를 부탁하자 다른 상비약과 영양제 한 박 스까지 보내왔다. 이 약상자를 본 대통령은 아내에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보고를 하러 들어온 申性模 국방장관에게 『일선의 우리 아이들에게 갖다 주라』고 건네주었다. 李대통령은 평소 군인들을 「우리 아이들 」이라고 불렀다. 워커 장군이 보낸 약에다가 오스트리아 처가에서 보내온 비타민까지 몽땅 들려보냈다. 프란체스카가 申장관에 게 땀띠연고 하나만 놓고 가라는 사인을 보냈으나 李박사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아 申장관은 즉시 떠나야 했다. 전쟁 중에 빈의 친정집에서 언니 베티가 「 디 프레세」紙 특파원 편에 보내온 비타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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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해 자신이 사용하던 삼베 홑이불까지 싸보냈다. 대통령 부부는 밤새워 미국에 있는 친지들에게 거적 위에서 신음하고 있는 부상병들의 형 편을 알리고 구호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오스트리아 친정에서 보낸 구호품 을 필두로 속속 금품이 도착하였다. 李대통령은 식료품이 많이 들어오면 경무대 주방장인 양학준 노인을 데리고 가서 군인 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李대통령은 양노인을 시켜 계속 쌀값을 체크하면서 전쟁 중의 물가동향을 주시했다. 남편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 프란체스카도 언니의 편지를 받으면 혼자서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시집온 후 17년 동안 한번도 뵙지 못한 어머니였다. 그녀는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꼭 찾아뵈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였으나 어머니는 한국전쟁 기간에 세상을 떠났다. 대통령 부부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李대통령은 아내에게 장례식에 다녀오라고 했지만 여비도 없는데다 한시라도 대통령 의 곁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9·28서울 수복으로 경무대로 돌아왔을 때 대통령 집무실에 고급양복 웃저고리와 양 말, 소련제 양주 등이 널려 있었고 바닥은 온통 대변투성이였다. 어디서 약탈해 왔는 지 세탁기 10여 대, 양복장 일곱 개도 있었다. 대강당 바닥에는 말똥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화장은 침대 하나만 남겨놓고 몽땅 털어가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李대통령은 공산군을 『敵(적)이라기보다는 강도 집단』이라고 표현했다.



그해 겨울, 이화여대 金活蘭(김활란) 박사가 워커 장군의 동상기금으로 써달라며 교수들의 월급을 모아 경무대를 방문했다. 난로도 안 피우고 온몸을 담요로 감싼 채 일 하는 李대통령을 보며 金活蘭 박사는 눈물 을 글썽였다. 金活蘭 박사가 『연세도 있으 시니 난로 정도는 피우고 일하시라』고 권 고하자 대통령은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수많은 피난민 동포들을 생각하면 이것도 과분하다』면서 『찬 손을 따뜻하게 해줄 테니 내게 가까이 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란체스카가 『내 허락 없이는 안 된다 』고 농담하여 오랜만에 대통령 부부는 파안대소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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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때 프란체스카는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 한동안 고생했다. 중요한 기밀서신 을 타이핑해야 했던 아내가 몹시 괴로워하자 대통령은 마늘껍질과 대를 삶은 물을 미 지근하게 식혀서 손발을 담그도록 했다. 프 란체스카는 그런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잠자코 남편의 뜻을 따랐다. 당시 부산 임시관저에 미국 무초 대사와 미국 장군 들이 드나들었는데 그들에게 부탁하면 동상 치료 연고를 쉽게 구할 수 있었겠지만 李대 통령은 외국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신세 지는 일을 몹시 싫어했다. 결국 李대통령이 가르쳐 준 민간요법으로 동상을 치료할 수 있었다.


1951년 부산 임시관저에서 생일을 맞았을 때 李대통령은 미역국과 안남미 쌀밥 외에는 단 한 가지도 더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프란체스카는 그때를 가장 잊혀지지 않는 생일날이라고 6·25 비망록에 기록했다.


전쟁 중에 李대통령은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다. 나는 자유와 민주제단에 생명을 바치려니와 나의 존경하는 민주국민들도 끝까지 싸워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다만 後嗣(후사) 없이 죽는 게 先塋(선영)에 죄지은 불효자일 뿐이다」라는 유서를 써 서 갖고 다녔다. 프란체스카는 「後嗣 없는 불효자」란 대목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李박사는 화가 나면 가끔 『아들도 못 낳는 주제에…』라고 소리를 쳐 아내를 울렸다고 한다. 李대통령은 모제르 권총 한 자루를 머리맡에 두고 『이것은 공산당 서너 놈을 쏜 뒤에 우리 둘을 천당으로 보내줄 티켓』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잠자리 들기 전에 프란체스카가 『우리 두 사람 티켓은 잘 간수 했어요?』 하면 『잘 있지』 하며 크게 웃곤 했다. 두 사람은 극약도 몸에 지니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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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여사는 「대통령의 건강」에서 남편의 모습을 이렇게 기술했다.


『웃음을 잃지 않았고 질투나 노여움, 분노의 감정을 갖지 않았다. 남편은 유머가 풍부해 늘 주변을 즐겁게 하였으며 모함하고 중상하는 자들에게도 늘 관대했다. 나에게도 항상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타일렀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진 것이 건강을 가져왔다. 「독립 미치광이 노인 」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확고한 신념과 사명감을 갖고 굽히는 일 없이 일했다. 늘 젊은이처럼 활기에 차서 일했다.


그는 언제나 배우는 자세를 견지했다. 80이 넘은 후에도 새로운 영어단어를 손바닥에 써 가지고 외우기도 했다. 남편이 건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민족의 소원인 남북통일을 기어이 이룩해야겠다는 굳건한 의지와 신념을 갖고 불철주야 일하며 노력 한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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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한 것도 건강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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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4.



[ ...... 내가 받아야 할 총탄을 너희들이 받았구나,

청년이 불의에 항거하지 않으면 그 나라에는 희망이 없는 거야! ........ ]



[편집자에게] '건국 대통령'을 다시 역사 속으로



김일주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2010.04.26



4·19 학생시위에 의해 정국이 요동치고 있을 때 우남(雩南) 이승만 대통령은 시위 학생들이 입원하고 있었던 서울대학병원을 찾았다. 내가 받아야 할 총탄을 너희들이 받았구나, 청년이 불의에 항거하지 않으면 그 나라에는 희망이 없는 거야! 부상한 학생들을 위로하면서 우남은 그들과 함께 울었다.


임기 후반의 과오 때문에 우남은 마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적(敵)인 양 비난받고 있으나, 그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공산침략으로부터 목숨을 다해 지켜낸 주역이다. 그리고 자신이 생명을 걸고 지켰던 그 체제의 제도에 의해 하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의 위대성을 학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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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을 보고 궐기하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니
이런 날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이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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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인 대목이 그의 대선 당시 야당 후보 조병옥이 유세 도중 급서(急逝) 했고, 때문에 우남이 무리해서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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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4월 22일, 시위 중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을 방문하여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은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젊은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라는 말을 남기고 하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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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의 이런 고귀한 뜻은 퇴임 후 각국 수반의 위로 편지에 대해 쓴 답장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를 위로하는 편지는 안 받겠소.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오. 부정을 보고 궐기하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니 이런 날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이오”.


이야말로 그가 20대 시절에 썼던 『독립정신』에서 “무식하고 천하며 약한 형제자매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국민정신이 바뀌기를 원하고 또 원하는 바이다.”라고도 말했던 것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새삼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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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 하야 결정, 민주주의 초석되다
독립정신의 실현…‘착한 권위주의 통치자’의 위대한 결단

조우석 201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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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1.1. 주간신문 「협성회회보」 주필 이승만

1898.3.10. 종로 네거리 萬民共同會 연사 총대 이승만

1898.4.9.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사장 주필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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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02년 4월호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204100063&ctcd=&cpage=1



1999 국사편찬위,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신용하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1960.4.29. 하야



[ ....... "평안하시라 여생" "할아버지 만세" .......

...... "위대한 이승만 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모십시다" ........ ]



1960.4.29.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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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가 들어간 이화장 대문 옆담엔 "평안하시라 여생" "할아버지 만세"라고 쓰여진 백지가 붙어 있었다. 이화장 정문앞엔 50명 이상의 보도원들과 다수의 노인 부녀자들이 경비헌병의 제지를 무릅쓰고 모여 들어 있었다.


하오 3시 20분 경 돌연 모대학생이라고 자칭하는 23세의 한 청년은 ? 위에 올라가 "위대한 이승만 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모십시다"라고 외쳤을 때 군중 가운데서 박수 소리가 났다.


이를 본 고대의 일 학생이 그 ? 위에 올라가서 "우리는 깨끗이 하야 한 이박사의 정치적 양심을 받아 들입시다. 우리는 값싼 동정심에서 벗어납시다. "라고 외치자 군중은 다시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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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박사의 모습이 보이자 그때마다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그를 맞았고 이박사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대답 ........ ]



1960.4.29.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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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모셔야 한다"고 선동하다 다른 학생들에게 끌려 내린 한군은 기자에게 "나도 지난번 데모를 한 사람입니다. 이기붕 정권이 부패한 것도 잘 압니다.그러나 할아버지만은 건실한 애국자입니다"라고 말 하였는데 한편 이를 말린 학생들은 "이제야 데모가 겨우 가라 앉아서 지금부터는 수습을 해야만 나라가 바로 서겠는 데 저런 자가 나타나서 민심을 동요시키고 가뜩이나 흥분된 국민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지금은 냉각이 필요합니다. 흥분만 해서는 나라가 망합니다"라고 기자에게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러한 약간의 혼잡이 있은 후 이박사가 허장관과 박찬일 비서를 대동하고 이화정 정원을 산책하며 화초를 가꾸는 모습이 담 너머 넘겨다 보였다.


몇번인가 이박사의 모습이 보이자 그때마다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그를 맞았고 이박사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대답하였는 데 이제는 10여년간 에 걸친 파란 많던 정부 수반의 자리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한가로운 여생의 보금자리를 찾은 안도된 평민으로서의 이박사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차라리 욕된 자리에 모시는 것보다 얼마나 노박사를 위해 좋은 것인가"하고 가슴속 깊이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역시 모든 권력을 떠난 인간 이승만은 멋있는 사람이었고 독재를 씻고 돌아가는 그에게 박수로 환송하는 동포들도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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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송건호는 ‘4.19’학생들이 기존 체제를 뒤엎는 혁명의 주역이 되지 못한 점을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송건호의 안타까움과 반대로, 바로 이러한 점이 바로 4.19가 자유민주 헌법 수호의 저항권으로서 충족 요건의 충족이 된 것이다.




4,19의 결과에 대해서는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보는 학생이 32%였고, 데모 당시의 소망에 비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고 답한 학생이 39.7%였으며, 전혀 우발적으로 생긴 결과라고 보는 견해 7.3%까지를 합한다면 이승만의 하야, 자유당정권의 붕괴 등 거창한 정변을 학생들의 반 이상이 전혀 예기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4.19 데모가 과격한 점이 없지 않았다고 본 학생이 40.9%, 무리였다고 보는 학생도 7.3%나 되며, 앞으로 학생들의 사회참여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학생이 겨우 9.5%에 불과한데, 이념적인 뒷받침만 해야 한다고 답한 학생이 70.2%에 달하고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4.19 당시의 학생들의 의식상황이 이러했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타도한 이승만의 계승정권이 들어앉았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조금도 모순을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제 우리의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하며 “질서유지”를 외치고 다녔다. (송건호,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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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李起鵬씨의 아들 康石(강석)을 양자로 맞은 후에 집안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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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 내실에서 일했던 方在玉씨는 康石이가 깍듯하고 반듯한 청년이었다며 「귀하신 몸」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경무대 이층의 낡고 초라한 방에서 지냈다고 일러주었다. 겨울에는 李대통령이 손수 창호지를 오려서 문풍지를 발라주었지만 돈이 든다며 도배도 안 해주고 침대나 家具도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하지만 정을 쏟았던 아들이 자결하고 자유당 정권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아들의 자결 소식은 프란체스카가 그토록 지키려고 애썼던 대통령의 건강을 영원히 빼앗아 가고 말았다. 李대통령은 아들의 자결 소식을 접하고 실어증까지 겹쳐 유창한 영어를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대통령직을 사임해야겠다는 결심이 이미 서 있었을 때 그토록 사랑했던 양자 康石이 경무대 안에서 자기 권총으로 부모와 동생을 쏘고 함께 자결했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 노인의 슬픔과 충격이 너무나 깊었다. 자살 소식을 듣고 李대통령은 심한 안면경련을 일으키며 눈이 충혈되더니 『이 불쌍한 늙은이를 버리고 죽다니』라며 비통해 하면서 『아들 하나 제대로 못 지키는 주제에 살아서 무엇 하나』 하며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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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9일 대통령 부부는 하와이로 떠나면서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늦어도 한 달 후에는 돌아올 테니 집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길로 李承晩 대통령은 살아서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짐은 전부 네 개였는데 옷을 담은 트렁크 두 개와 마실 것과 점심, 약품을 담은 가방 하나, 타자기 가방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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還國(환국)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자 崔伯烈씨에게 『나를 20년간 여기다 붙잡아 둘 작정이냐, 나는 걸어서라도 떠날 테야』라며 신발을 찾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李대통령은 여비를 崔伯烈씨와 윌버트 최씨가 대주기로 했다고 누차 얘기해도 여비가 없어서 돌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아껴야 한다며 이발을 하지 않아 프란체스카가 집에서 머리를 잘라주어야 했다. 시장에서 식품을 사올 때 봉지가 크면 『귀국할 여비를 쓴다』며 나무랐다. 李대통령이 물건을 구입하면 걱정을 많이 해서 일주일에 한 번만 식료품을 사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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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비행기 여행조차 불가능해진다는 李대통령 주치의의 판정에 따라 1962년 3월17일, 부부는 귀국을 결정했다. 출발 사흘 전부터 보행이 불편하여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었으나 李대통령은 섭섭해 하는 교포들에게 『우리 모두 서울 가서 만나세』라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출발 당일 간단한 아침식사를 끝낸 뒤 외출복을 입고 소파에 앉아 있을 때 金世源(김세원) 총영사가 찾아왔다. 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총영사가 귀국을 만류하자 조용히 듣고 있던 李承晩 대통령의 눈이 발갛게 충혈되기 시작했다.『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정말 잘해가기 바라오』그렇게 말하면서 휠체어에 몸을 기댄 李대통령은 다시는 혼자 일어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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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7. 이승만 대통령 가족장 장례




[ ..... 장례식 때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참배를 하는 바람에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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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秀 박사는 李承晩 대통령이 국민에게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을 자주 하시면서 국민들께 남기는 유언이라고 하셨어요.


다시 나라를 잃고 침략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제적, 문화적 침략에 대비해 정체성을 해칠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해가 운구되고 이화장에 빈소가 마련되자 전국에서 추모객이 몰려들었다.



장례식 때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참배를 하는 바람에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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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경은 .... 고 이박사의 장례행렬을 보러 나온 서울 시민의 수를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 .......... ]





[ ..... 시청앞에 모인 약 35만명(경찰 추산)의 인파로 막혀 ......

..... 시민과의 고별절차는 취소 ...... ]






1965.7.27.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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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정오 무렵 정동 교회에서 나와 동작동으로 향해 떠난 영구차는 시청앞에 모인 약 35만명(경찰 추산)의 인파로 막혀 한동안 나아가지 못하다가 낮 12시 25분경 길이 트여 남대문쪽으로 빠져 나갔다. 시청앞에서 있을 예정이던 이 박사의 녹음 방송 등 일반 시민과의 고별절차는 취소됐다.



연도


ㅇ 이화동 입구에서부터 광목줄로 영구차를 매어 앞뒤로 사방에 남녀 90명씩 7백 20명의 남녀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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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종로 5가 로타리에는 수천 시민이 운집해서 교통은 완전두절, 종로에 접어들자 영구행렬은 제대로 틀이 잡히기 시작 , 호상 변영태 씨가 선두에 섰으며 그뒤에 태극기 초상화 행장 만장을 든 배재중학생들 해군조악대에 이어 영구차가 따라 영구차량쪽에는 2대의 경찰 백차와 기마대가 호위했다.



국립묘지


ㅇ 삼각지에서부터 차로 운구하려던 예정을 바꾸어 영구행렬은 계속 도보로 오후 2시 40분 한강 인도교를 통과 , 3시반경 동작동 국립묘지에 도착하여 용사문 앞에서 정부 주관으로 영결식을 가졌다.이 식전에서 박치순 목사의 기도와 박대통령의 조사(정총리 대독)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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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최대인파


연도의 만송시민
경찰은 백만추계


서울시경은 27일 고 이박사의 장례행렬을 보러 나온 서울 시민의 수를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라고 밝히고 이날 연도 경비를 위해 관하 3천명의 경관을 동원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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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는 달리 이박사 장례식행렬이 세종로 그 자리를 지나갈 때의 연도광경은 그의 영구가 하와이로부터 돌아 오던 그날의 성관보다 한층 장관을 이루었다. 이박사의 사면초상화를 앞세운 그뒤로 5백여개를 헤는 만장과 4백여개의 조화대열 그리고 소복에 상장을 두른 수천백명의 남녀수상객과 악대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황국 꽃으로 뒤덮힌 영구차 그만하면 고 우남에게 영광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국장은 그 보다 더 성할 것이며 국민장인들 그 이상 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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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서울인구 380만
1966년 전체인구 2916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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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0. 박정희 대통령




[ .... 30일 하루동안 2백88만여명 ...... ]




鳴咽(명인)속 焚香(분향)5일째


1979.10.31

매일경제



鳴咽(명인)속 焚香(분향)5일째


全國(전국)서 총 5백85만명 30일 하루동안 2백88만여명



故(고) 朴正熙(박정희)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추모행렬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2천1백59개 분향소에 줄을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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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의 분향인파는 1일까지 1천3백28만7천명 (내무부집계) ......


..... 1일 하룻 동안의 분향자수는 3백82만 ...... ]





"마지막 날"…분향 늘어


[중앙일보] 1979.11.02




고 박정희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전국의 분향인파는 1일까지 1천3백28만7천명(내무부집계)에 이른다. 1일 하룻 동안의 분향자수는 3백82만8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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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522786






* 1980 南韓人口(남한인구) 3744만명







[ ..... 영결식 당일에는 광화문 인근에만 200만명이 모였다 ....... ]




연합뉴스

장례식 조문 최대 인파는?


2009-02-19



김구 200만 훌쩍..박정희는 추산 불가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16일 오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대단한 인내가 요구된다. 명동성동에 진입하기 위한 조문행렬은 통상 2~3㎞ 정도. 특이한 건 시간이 흐를수록 추모열기가 더 뜨거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19일 김수환 추기경 장례위원회에 따르면 조문 첫 날 1천500명으로 '단출하게' 시작된 조문객 수는 17일 9만6천500명, 18일에는 15만2천500여명으로 급증했다.


이 때문에 2-3시간은 기본이고 많게는 5시간을 기다리는 지난한 과정을 감수해야 김 추기경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다리에 쥐가나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등 '기다리는 사람들'은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발을 동동거리면서도 10초라는 짧은 조문시간을 위해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적으로 추앙받았던 다른 저명인사의 장례식에는 어느 정도의 인파가 몰렸을까.


조계종에 따르면 지난 1993년 열반한 성철 큰스님의 영결식(11월10일)에는 10만여명이 모인 것으로 추산된다.

조계종 관계자는 "장례 당일에만 10만여명이 참가한 점에 비춰 7일장으로 치러진 장례 기간에 수십 만명이 다녀갔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장례가 끝난 후 3주간에 걸쳐 진행된 사리친견법회 동안 40만명이 다녀갔다고 조계종은 밝혔다.





해방 이후 100만 이상의 많은 조문객이 다녀간 경우는 1949년 6월26일 안두희의 총탄에 순국한 김구의 장례식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김득중 편사연구사에 따르면 26일 오후 12시30분께 서거한 후 28일 오후 1시까지 약 75만명이 종로구 평동의 빈소인 경교장을 다녀갔다.


김 연구사는 "장례가 10일장으로 치러진 만큼 조문객수는 200만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며 "영결식 당일에는 인근 상가가 영업을 중지했고, 경교장에서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까지 인파가 가득찼다"고 말했다.




이후 유일하게 국장으로 치러진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 당일(1979년.11월3일)에는 광화문 인근에만 200만명이 모였다. 전국 곳곳에 분향소가 마련됐고, 장례기간이 9일간 지속됐기 때문에 정확한 인원은 추산이 불가능하다고 김 연구사는 밝혔다.


또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 영결식(1974년 8월18일) 때는 빈소가 마련된 청와대에 10만명이 모였다. 육 여사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5일장이었다.



아울러 국민장으로 치러진 김성수 전 부통령의 장례식에도 전국 각지에서 100만여명의 인파가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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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장일인 3일 청와대에서 국립묘지에 이르는 연도에는 2백여만 명의 시민등이 나와 ....... ]




국향에 묻혀 정든 청와대 떠나


[중앙일보] 1979.11.03




『잘 가십시오』-. 고 박정희대통령의 국장일인 3일 청와대에서 국립묘지에 이르는 연도에는 2백여만 명의 시민등이 나와 고인의 마지막 길을 보냈다. 18년5개월동안 나라를 이끈 지도자를 잃은 국민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안개가 자욱이 깔린 서울거리에는 소복을 곱게 차려입은 칠순할머니에서부터 철부지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이날만은 미움과 노여움을 버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청와대∼중앙청



박대통령, 소나무 울창한 영부인 곁으로|마지막 길에 상복 2백만 명 | 조포 62발 은은히 말없는 유족행렬



3백여m에 이르는 장의행렬이 이날 상오9시25분 청와대 문을 나서자 이른 아침부터 연도를 메웠던 시민들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영구차는 전후 40명씩, 좌우 10명씩의 3군사관생도 1백 명이 앞뒤에서 이끌었으며 그 뒤에 친족대표 10명·최규하 장의위원장등 추모제에 참석했던 장의위 일행· 친척·청와대비서실·경호실 간부의 순서로 영결식장인 중앙청으로 향했다.


장의행렬이 지나는 청와대 본관에서부터 정문까지는 1백 명의 3군 사관생도가 길 양쪽에 앞에총자세로 도열했다. 정문부터 삼청동까지는 비서실·경호실 직원 5백여 명이 검은 옷에 흰 장갑차림으로 서서 떠나는 박대통령을 배웅하며 흐느꼈다.


상오 9시l5분 박대통령의 영구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평소 박대통령을 가까이 볼 수 있었던 주방직원·청소부 아주머니들이 통곡을 터뜨려 또 한 차례 흐느낌의 파도를 일으켰다.


영구가 청와대 정문을 나서서부터 영결식장에 이르는 동안 박대통령의 나이수대로 62발의 조포가 경복궁 안에서 울렸다.


영구차 앞 영정을 모신 선도차에 탄 친족대표 박재석씨는 시종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연도에서 마지막 배웅을 한 청와대비서실·경호실 직원들의 슬픔을 더 북받치게 했다.



청와대주변은 이날 아침 자욱한 안개로 뒤덮였고 「아스팔트」위에는 낙엽이 흩날려 대통령을 잃은 슬픔을 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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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522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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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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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고 박연차와 친분이 있던 노무현의 가족들이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고,[12] 노무현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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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일 오후 5시까지 공식 집계된 조문객은 432만 ...... ]



‘지못미’ 노무현 추모인원 전국 500만 돌파 “미안해서..아까워서..”


2009-05-29



[뉴스엔 글 박세연 기자/사진 정유진 박준형 기자]



노무현 前 대통령의 분향소에 500만 명의 조문객들이 다녀간 것으로 파악된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에 따르면 28일 오후 5시까지 공식 집계된 조문객은 432만1,306명으로 집계됐다.


빈소가 마련된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는 120만명 가량의 조문객이 찾았다. 집계 시간까지 94만5,726명이 조문을 해 29일 자정까지 총 120만에 육박하는 조문객이 다녀올 것으로 전망된다.


이밖에 경기도와 서울 지역에선 각각 86만271명, 82만8776명이 조문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 전날인 28일 밤 늦게까지도 덕수궁 대한문 시민분향소에는 수많은 추모 인파가 모여 밤을 지새웠고, 국민장이 29일 자정까지 진행되는 만큼 조문객 숫자는 더 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날 노 전 대통령의 노제가 거행된 서울광장 앞 덕수궁 대한문 시민분향소에는 미처 조문하지 못한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민간 운영 통계엔 종교기관, 대학교 및 개인운영 분향소 등이 제외됐기에 실제 조문객은 5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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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5292203534100







2009-05-29


역대 최대 추모 인파 몰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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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노제로 향하는 운구 행렬에 상당 수 추모객들이 뒤따르면서 인파는 크게 늘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은 최대 수용 인원을 서울 광장 5만 명, 광화문 일대 12만 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수십만 명이 시청 앞 서울광장과 주변에 모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뒤 엿새동안 통제됐던 서울광장에서 노제가 열리는 점이 큰 변수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난 1987년 서울 광장에서 열린 고 이한열 열사 노제 때는 경찰 집계로 15만명, 주최 측 집계로 100만 명이 참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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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 전 대통령의 노제(路祭)와 서울역까지 이어진 거리 운구행사에서는


최대 18만여명(경찰 추산, 노제 주최측 40만~50만명 주장)의 시민들이 ....... ]





<김前대통령서거> 되돌아본 전직 대통령 장례


노무현·최규하 국민장, 박정희 국장, 윤보선·이승만 가족장



연합 | 2009-08-18



전직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장(國葬)이나 국민장(國民葬)으로 거행될 수 있다.


18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노무현·최규하 전 대통령은 국민장,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장, 윤보선·이승만 전 대통령은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5월 23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 7일만인 5월 29일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 주요 인사, 권양숙 여사를 포함한 유족 등 2천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했다.


특히 서울광장에서 거행된 노 전 대통령의 노제(路祭)와 서울역까지 이어진 거리 운구행사에서는 최대 18만여명(경찰 추산, 노제 주최측 40만~50만명 주장)의 시민들이 참석해 노 전 대통령을 애도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유해는 이어 경기도 수원시 연화장에서 유족과 추도객들의 애도 속에 화장식이 치러진 뒤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사저 인근의 봉화산 정토원에 임시로 안치됐고, 49재를 마친 뒤 봉화산 사자바위 아래에 조성된 묘역에 안장됐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 전국 102곳의 정부 분향소에는 약 100만명이 조문하고, 서거 이후 안장식까지 봉하마을 분향소와 묘역에는 160만명 가량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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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국민장은 노무현·최규하 전 대통령과 1983년 미얀마 랑군 국립묘지에서 북한의 폭탄테러로 순직한 당시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의 장례식을 포함해 총 13회 엄수됐다.




반면 국장은 1979년 10월26일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가 유일하다.


박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9일간의 장의 기간을 거쳐 11월3일 중앙청 광장에서 엄수됐고,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됐다.


박 전 대통령의 장의기간 전국에는 조기가 게양되고 중앙청 광장뿐 아니라 일선 읍ㆍ면ㆍ동사무소와 재외공관까지 분향소가 설치됐으며, 국장 당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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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의 장례도 1965년 7월 가족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연합






* 2009 서울시 인구 1046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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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조문객 수는 총 500만여 명.....

.... 김 前대통령... 조문객 수는 70만여 명......

..... 박정희 ... 정부 추산 조문객 수는 무려 1천979만여 명. ...... ]






故 노무현·김대중 前대통령 조문객수 큰 차이, 왜?



충격적인 자살과 고령에 병환··· 서거 원인 큰 영향

전두환· 노태우 前대통령, 국장 또는 국민장 힘들어





장기영 학생기자

2009.08.26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함께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지난 29일 영면(永眠)한 김대중 前대통령이 서거 두 달여 전인 5월 29일 작성한 일기에는 노무현 前대통령을 떠나 보내는 슬픔과 함께 그 규모에 대한 감탄이 묻어난다.




노 前대통령 국민장(國民葬) 조문객 수는 총 500만여 명. 노 前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만 약 100여 만 명의 조문객이 다녀갔다. 그러나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지난 18일 서거한 김 前대통령의 국장(國葬) 조문객 수는 70만여 명.



단순히 숫자만 놓고 보자면 국민장 보다 한 단계 높은 국장의 신세가 초라하다. 지난 1979년 박정희 前대통령 국장 당시 정부 추산 조문객 수는 무려 1천979만여 명. 조문객 동원 논란 등으로 부푼 거품을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숫자다.




노·김 前대통령 추모객 7배 이상 차이···서거 원인 주 배경




이처럼 두 前대통령의 장례기간 조문객 수에 큰 차이가 나는 데에는 서거 원인, 서거 당시의 국내 정서 등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노 前대통령의 경우 갑작스레 스스로 목숨을 끊어 큰 충격을 안겼다. 또한 노 前대통령은 ‘박연차 게이트’ 관련 수사로 現정부의 정치보복, 검찰의 강압수사 등 크고 작은 논란을 증폭돼 정부와 여당에 대한 반감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에서 서거해 파장이 컸다.



반면 김 前대통령은 서거 당시 86세의 고령이었던 데다 폐렴 등 건강악화로 인한 입원소식이 수 차례 언론을 통해 보도돼 국민들은 비교적 담담한 분위기 속에 그를 떠나 보낼 수 있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업적에 대한 논란도 거국적 추모 분위기를 이끌어 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분석된다. 특히 당시 ‘국민의 정부’가 주도했던 대북화해정책은 찬반논란을 낳으며 여론분열 양상을 띠었다.


전북 C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생 Y씨는 “경직된 남북관계를 풀어나갈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며 ‘햇볕정책’을 김 前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았다. 실제 김 前대통령은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고, 남북화해를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 불리는 햇볕정책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이견이 존재한다. 상당수 햇볕정책 비판론자들은 이른바 ‘퍼 주기’식 대북정책이 북한의 ‘간’을 키웠다는데 동의한다. 핵 문제를 배제한 채 진행된 각종 논의와 원조가 굶주린 북한의 배를 채웠고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 등 대남, 대미 도발의 도화선이 됐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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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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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관리소 방송이 조기를 달자고 수차례 호소했지만 그 숫자는 1%도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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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TV를 통해 영결식장의 의자를 눈 여겨 보았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3분의2가 비어있었지만, 조선일보는 2만여 명이라고 부풀렸다. 24,000개의 의자를 놓았는데 2만 명 이상이 앉았다면 저렇게 텅 비어있을 리 없다.


필자는 방송을 따라다니면서 연도에 사람들이 있는가를 보았다. 필자가 보기에는 썰렁한 거리였는데 무슨 애도하는 시민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서울시청 앞에도 겨우 17,000명 정도가 모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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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먹구구





박정희 분향 2000만 : 노무현 분향 500만

= 4 : 1

인구보정 5.2 : 1






이승만 장례 인파 경찰 100만 : 노무현 18만

= 5.6 : 1

인구보정 경제교통보정 20 : 1





노무현 조문 500만 : 김대중 조문 70만

= 7 : 1





종합하면,


이승만 : 박정희 : 노무현 : 김대중


= 140 : 36 : 7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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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7일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가 발족



[ ...... 이승만은 정부수립 선포식이 끝나자마자 농지개혁법의 제정을 다그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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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정부수립 선포식이 끝나자마자 농지개혁법의 제정을 다그쳤다. 그리하여 농림부 직제가 공포되기도 전인 1948년 9월7일에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가 발족했는데, 위원장은 농림부 장관 조봉암, 부위원장은 기획처장 이순탁(李順鐸)과 농림부 차관 강정택(姜鋌澤), 그리고 위원은 갓 발령받은 농림부 농지국장 강진국(姜辰國)과 지정과장 윤택중(尹澤重), 분배과장 배기철(裵基澈), 사정과장 안창수(安昌洙) 세 담당과장들이었다.3)


법안기초에 착수는 하였으나 참고자료도 아쉽고 각종 통계도 신빙성이 희박하여 필요한 자료를 농촌으로부터 직접 수집해야 할 형편이었다. 초안을 기초했던 강진국은 “농촌 부락의 머슴방이 농지개혁법안 기초의 산실이었다.… 민국정부 수립 후에도 좌익분자가 농촌지대에 많이 묻혀 있다고 짐작했던 까닭에 중앙 관리가 왔다면 경계하고 함구하리라는 예감에서 신문기자를 가장했다”라고 썼다.4)


농림부가 자료수집으로 시일을 끌자 1949년 봄갈이까지 농지개혁을 실시한다고 공언하고 있던 이승만은 11월 중순에 조봉암을 불러 불호령을 내렸다. 이승만이 격노한 것은 농지개혁 계획이 늦어지면서 신문지상에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분쟁이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림부의 농지개혁법 시안은 이렇게 쫓기는 상황 속에서 11월19일과 20일 이틀 동안 강진국의 집에서 강진국과 세 담당과장이 꼬박 이틀 밤을 새워 만들었다. 이 시안을 다시 강진국과 차관 강정택이 머리를 맞대고 이틀 재검토했다. 초안을 들고 가서 조봉암에게 보고하자 조봉암은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소작인이 잘된다지만 지주도 살아야 할 것 아니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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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 ........

...... 부호에 노예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된다면 ........ ]




[ ...... 자본가가 있어야 국내에 경제가 유통되어서 민중이 다 살 수 있다 ........

..... 공장에 일을 얻어 생활방도를 만들어 주어야 .......

...... 공업과 산업은 자본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것이니 .........

...... 토지를 내어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 ......... ]





李承晩 대통령, ‘토지개혁문제’라는 제목으로 방송연설



게재지명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8년 12월 07일



지난 4일 오후 8시 이승만 대통령은 ‘토지개혁문제’에 관하여 23분간에 걸쳐 중앙방송국 마이크를 통하여 대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강연방송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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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 소위 국유지라는 농토와 적산토지를 합하여 다 민유지로 분배시킬 것인데 땅 없는 농민들에게 넉넉히 나누어서 作農하게 하되 그 땅을 그저 내주는 것이 아니고 정당한 가격을 정하여 매년 얼마씩 정부에 보상하기로 約條를 정하고 팔게 할지니 보상하는 條理와 몇 해만에 다 갚는다는 등 細節目은 다 국법으로 정하게 될 것이니 미리 말할 수 없으나 대체로 말하자면 농민이 그 땅에서 自農하여 묵히는 땅이 없고 그 所出미곡으로 가족에 1년 計糧을 제하고는 여유를 팔아서 돈으로 바치거나 미곡을 대신하여 몇 해만에 다 완납한 후에는 정부에서 문서를 주어서 영구히 농민에 사유지로 만들 것이니 이것이 즉 우리 정부에서 주장하는 토지개혁책의 요점이요, 모든 농민은 이대로 되기를 바라며 또한 노력할 것입니다. (서울신문 1948. 12. 7)




다소간 문제되는 것은 소위 대지주에 소속인 큰 농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 대지주들로 말하면 혹은 몇 대 조상적부터 遺傳하여 내려오는 소유지도 있고 또 혹은 돈을 주고 사서 차지한 토지도 있는 것이니 이상에 말한 바 공공한 천연적 재원을 부자들이 사유로 만들었다는 것은 몇 천년 전에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요, 중간에 와서 무슨 방식으로든지 소유권을 가지게 된 것은 누구나 인정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 대지주들의 땅을 무조건하고 몰수한다는 것은 法理도 아니오 公義도 아닐 것이므로 이 지주들에 소유권은 인정할 뿐만 아니라 국법으로 보호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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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제도를 행하는 나라에서는 지주의 땅을 乾沒해서 소작인에게 나누어 준다 하나 실상은 농민에게 주는 것이 아니오 농민들에게 맡겨서 경작하게 하고 그 땅은 정부에서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 실상을 말하자면 공산제도가 토지를 인민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빼앗아서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해서 정부에 받기만 할 뿐이니 부유한 대지주에게 세를 물고 얻어 경작하느니보다 정부의 땅을 얻어서 경작하는 것이 더욱 자유롭지 못하고 속박을 받는 것이니 전에는 부호에 노예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된다면 경제상 이해에 무슨 차별이 있으며 농민생활에 아무 도움도 없을 것이다. (서울신문 1948.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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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들의 토지개혁책이라는 것이 우리와 같지 아니한 외에 또 한가지 우리와 같지 아니한 것은 소위 자본주의라는 문제입니다. 그 사람들의 말은 토지분배로 많은 경제력을 공평히 조정하기에 부족한 모든 금융과 각종 재산을 다 평균히 분배해서 자본가가 없게 만들어야 한다 하나니 우리 주의는 이와 상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가가 있어야 국내에 경제가 유통되어서 민중이 다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자고로 농업을 근본으로 삼아서 자족자급할 능력을 가졌었지마는 지금은 인구가 해마다 증가되어 토지는 한정이 있으므로 그 땅의 소출만 가지고는 그 민중이 먹고 살 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공업을 숭상해서 생산력이 발전되어야 땅 속에 묻힌 재산을 패어서 인류생활에 공헌할 것이요, 공업의 소출 물산으로 우리도 쓰고 또한 국외에 수출해서 남의 물건을 바꾸어다가 우리의 생활을 돕게 할 것이며 기계공장을 시설해서 國中에 땅이 없이 농사 못하고 일없이 굶게 되는 사람들이 공장에 일을 얻어 생활방도를 만들어 주어야 될 것이니 이것은 공업과 산업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것이고 공업과 산업은 자본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자본가를 다 없이 해다가 노동자만 살 수 있게 하자는 것은 우리가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니 우선 예를 들어 말할지라도 자본이 없어서 기계공장이 문을 닫게 된다면 다수 실업자가 먼저 타격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罷工罷業 등 행동으로 자본가와 충돌을 내며 농민으로 지주와 충돌을 내서 모든 민중이 서로 싸우는 중에 정부가 모든 것을 차지하게 하는 폐단을 우리는 절대 포용치 아니하는 것이니 세계 모든 재원에 세 가지 근본되는 토지와 노동과 자본, 이 세 가지가 서로 충돌을 내지 말고 피차 도와서 합류하여 나가는 중에서 모든 것이 和意로 진전되며 부강전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니 우리는 농민이 지주를 질시하거나 노동자가 자본가를 원수로 여기거나 하여 自相충돌하는 것을 피하고 서로 제휴 공헌하는 중에서 다 잘살 수 있기를 도모하자는 것입니다. (서울신문 1948. 12. 9)


우리 나라의 자본은 대부분이 토지에 있나니 지주들이 다 토지를 내어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므로, 정부에서는 토지대가를 갚아 줄 것이 큰 문제가 되니 이것은 정부와 국회에서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어서 지금 지주들로 하여금 상당한 자본을 얻게 하는 것이 긴요한 문제이니 이것은 많은 연구로 해결책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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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1948.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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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 재임 중 국회는 지주 출신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박사가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장관에 임명해 농지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다는 점은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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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에 걸친 법개정을 통한 우여곡절 끝에 개정안은 1950년 2월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농지개혁법은 최종 확정되어 정부는 이것을 3월 10일 법률 128호로 공포했습니다. 같은 달 25일 이 법의 시행령이 공포되며, 4월 28일에는 시행규칙이, 그리고 농지분배에 관한 세부규정과 요령을 담은 농지분배 점수제규정은 6월 23일에 공포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이틀 후에 전쟁이 터졌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농지에 대한 실질적 매수 및 분배는 전쟁 전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생각했고, 북한으로부터 서울을 되찾은 그 해 가을에나 가서야 실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 동안 널리 알려진 중론이었습니다.


북한도 이와 유사하게 남한 정부는 어떻게든 농지분배를 하지 않으려다가 '조선전쟁' 개시 후 인민군이 전체 면의 78.5%에 해당되는 1,198개 면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한 후'에야 마지못해 실시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로서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정부수립 이전부터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고 이러한 그의 의지 덕분에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50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적어도 농지의 70~80% 정도에 대한 분배가 단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1980년대 중반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의해 그 동안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완성을 보지 못했던 농지개혁사 편찬사업이 다시 추진되면서, 농지의 실제 분배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한 결과 농지의 분배가 시행령이 공포(3월 25일)되기도 전에 거의 완료되었음을 밝혀낸 것입니다.(김성호, "한국토지제도의 연속성과 단절성(하)", 『농촌경제』, 8권, 4호, 1985년 12월, p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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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 ..... 시행령 공포 하루 전인 1950년 3월 24일 이미 농지분배 절차가 완료되어 4월 10일부터 분배 통지서가 발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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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당이 지연전술로 나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4월 농림부에 ‘농지개혁 지침’을 내려 보내 “비록 입법이 되지 않아 추진상 곤란이 없지 않으나 만난을 배제하고 단행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당시 문서를 보면 시행령 공포 하루 전인 1950년 3월 24일 이미 농지분배 절차가 완료되어 4월 10일부터 분배 통지서가 발급됐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관련법규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 결단으로 밀어붙인 일종의 월권행위이자 초법적 행위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관련법규도 없이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인해 전 농지의 92% 이상이 자작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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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의 토지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월간조선 2006






[ .... 작년 12월 13일 국무회의에서 특별 교시로 금년 춘경기 이전에 완수하게 하라 .......


..... 1월 17일에는 국회의장에게 공한을 .... 농지개혁관계 추가예산안을 우선 상정케 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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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전쟁 전에 분배가 단행될 수 있었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에 농지의 상당 부분이 분배되었다는 사실은 부인되기 어려울 것 같다. 문제는 어떻게 관련법규가 정비되기도 전에 정책이 먼저 시행되는 일이 발생했는가이다. 정상적인 근대국가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1950년 봄 한국에서 발생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



이러한 헤프닝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소관부처의 행정적 판단과 李承晩의 독려가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1949년 6월 21일 우여곡절 ?퓻?농지개혁법(당초법안)을 공포하지만, 그 법안은 내용상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곧 이어 국회에서 개정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행정부의 관련부처에서는 개정안의 국회통과가 시간 문제일 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판단 아래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마련하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세부규칙들은 형식상 공포되지 않았을 뿐 내부적으로는 이미 분배 시행 훨씬 전인 1949년 후반에 마련되어 있었다. 1950년에 들어서자마자 농지개혁 시행에 관한 통첩뿐 아니라 그에 필요한 각종 용지 등이 일선 행정관서에 보내질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김성호 외,『농지개혁사연구』, 서울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pp. 648, 998~999)



주무부서인 농림부로서도 농지개혁 사업이 순조롭게 추진되려면 농지분배가 늦어도 보리수확 및 모내기 작업이 시작되는 6월 이전에 끝마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농민들이 곧 누구의 소유가 될지도 모를 농지에 파종하려 들지 않아 올 한 해 농사가 망쳐질 우려가 있었다. 또한 농림분는 농민들에게 서둘러 농지를 분배하고 그들로부터 하곡을 대상으로 상환을 받아야 한편으로는 곧 닥쳐올 지주들에 대한 보상에 충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식량수급과 관련하여 중요한 행정수단인 양곡수집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이러한 관련 부서의 과잉신속을 부추긴 것은 李承晩의 독려였다. 당시 李承晩이 농지분배를 조속히 시행토록 재촉한 증거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는 1950년 2월 22일에 있은「서산군 농지개혁 사무 주무자회의 서류」와 1950년 4월 25일 농림부에서 작성한 「농지개혁지침」의 해당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농지개혁 사무는…예산의 불성립과 지방기구 및 각급 농지위원회 미구성으로 천연 중이었던 바 대통령각하께서는 이에 대하여 각별히 진념하시어 작년 12월 13일 국무회의에서 특별 교시로 금년 춘경기 이전에 완수하게 하라는 분부가 있었고 또 1월 17일에는 국회의장에게 공한을 보내시어 농지개혁관계 추가예산안을 우선 상정케 하라 하였으며…사무추진에 적극 매진함을 요함(「서산군 농지개혁사무 주무자회의 서류」, 김성호 외,「농지개혁사연구」, 서울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p.936에서 재인용)



춘경기(春耕期)가 촉박하였으므로 추진상 불소(不小)한 곤란이 유(有)하였으나, 만난(萬難)을 배제하고 단행하라는 대통령각하의 유시를 받들어 정부로서는 최선을 다하여 실행단계에 돌입한 것이다. 제1단계로서는 소작인에게 파종기전, 즉 4월 10일까지 농지분배 예정통지서를 교부하여 장차 자기 농지가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안심하고 파종하라는 것이다.(「농지개혁지침」4쪽, 김성호외, 위의 책 p603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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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대통령과 농지개혁 3

한국전쟁 전에 농지의 상당부분이 분배되었다
김일영 성균관대학교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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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萬甲 선생의 관찰에 따르면 토지개혁과 함께 정부가 발행한 地價(지가) 증권이 대학 설립의 자본으로 집중되면서 새로운 私立 대학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더구나 6·25 전쟁과 함께 대학생 軍 징집 보류 정책이 대학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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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클럽] 브라질 대통령도 인정한 李承晩의 농지개혁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ironheel@chosun.com)



최근 중앙일보의 南美 특집을 읽다가 흥미로운 얘기를 발견했다. 중앙일보 기자가 룰라 브라질 대통령에게 『브라질처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어째서 5000만 명이 넘는 절대빈곤층이 존재하는 겁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은 과거 19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순간 기자는 李承晩 대통령을 떠올렸다. 李承晩 정부는 제헌헌법 제정 당시부터 『농지개혁이야말로 공산당을 막는 最良의 길』(헌법 기초위원 兪鎭午의 말)이라는 인식 아래 헌법에 농지개혁에 대한 근거 조항을 마련하고, 의욕적으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李承晩 정부의 농지개혁 추진 소식을 전해 들은 金日成은 술잔을 내던지면서 『만일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되면 남한의 농민을 다 대한민국에 뺏기고 말아, 우리들이 이제껏 해왔던 赤化운동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고 개탄했다고 한다.



기득권층의 반발이 있었지만 李承晩 대통령은 『萬難(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하라』고 독려했다. 정부는 관계 법령이 제정·정비되기도 전에 불도저식으로 토지개혁을 밀어붙여 1950년 4월15일까지 농지개혁과 관련된 행정절차를 마무리지었다. 그로부터 두 달 열흘 뒤에 6·25가 발발했다.


金日成은 전쟁 전부터 준비해 온 남한지역에서의 토지개혁 프로그램을 내밀며 남한 민중(농민)들의 봉기를 선동했다. 하지만 농지개혁 이후 『李박사 덕분에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던 남한 민중들에게 金日成의 선동은 먹혀 들지 않았다.

농지개혁 결과 전체 농지의 92.4%가 自作地(자작지)가 됐다. 이는 농지개혁으로 전체 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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