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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부 이승만 3
이승만 2023-09-23 20:48:26 | 조회: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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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민군 진주에 대한 남한 민중의 더 주된 반응은 방관이거나 공포감이었다. ‘노동계급이 주인'이라고 말하는 북한이 서울을 점령했는데도 서울의 노동계급은 대거 수도를 떠나거나 직장을 이탈했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밀집한 영등포지구에 대한 전평의 보고를 보면 “고려방직, 제일방직, 경성방직을 포함한 섬유산업 종사 노동자는 서울 점령 전에는 1만 1천7백22명이었으나 8월 9일 현재 3천2백82명밖에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북한 인민군이 계속 남진하면서 더욱 확대됐다.


마이클 왈저는 “베트남과는 대조적으로 남한에서 반란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와다 하루키도 “거기서 남로당원을 중심으로 한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해방전쟁'에 대한 남한 민중의 수동성을 무엇보다 분명히 확인해 주는 것은 김일성 자신의 발언이다. 그는 “우리가 낙동강 계선까지 나아갔으나 남조선에서는 폭동 하나 일어나지 않았”고, “만일 부산에서 노동자들이 몇 천 명 일어나서 시위만 하였더라도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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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13


기도로 지킨 낙동강전선, 기도로 이루어낼 통일한국



해방직후 1945년 11월 서울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환영예배에 참석한 김규식, 김구, 이승만, 아놀드(좌로부터)


“제 늙은 목숨 조국통일의 제단에 바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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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기도 뒤에는 프란체스카 여사와 오스트리아 빈의 그의 어머니 언니 베티까지 전쟁이후 근심하며 밤을 새워 금식하며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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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매일밤 우리 민족이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갖게 해주시고 이 민족을 올바로 이끌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했다고 전한다.

“일본의 압제에서 우리민족을 해방시켜주신 하나님 아버지 저의 늙은 목숨을 조국통일의 제단에 바치겠나이다. 불쌍한 우리민족을 굽어살피사 통일과 재회의 기쁨을 안겨주시고 영세자유와 평강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저의 보잘 것 없는 영혼을 조국의 통일 제단에 바칠테니 원하실 때에 아버지 곁으로 거두어 주옵소서”(중앙일보 1984/3/1, 6·25와 이승만 대통령중)라는 기도는 당시 대통령이 전쟁속에서도 남북의 통일을 생각하며 시대를 초월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란중 대통령이 했던 많은 일중에 가장 간절히 했던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오진석기자 200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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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4.


[ ......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 ]



월남한 북로당원 유재민, 이북실정 폭로



동아일보

1948년 04월 30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요인이며 북로당원의 일인인 柳在敏은 북조선의 金日成정책이 비민족적임을 지적하고 25일 월남하여 시내 모 여관에 여장을 풀고 있는데 氏는 왕방한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 귀하가 월남한 이유는 무엇인가


(答) 나는 북로당원의 일원이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조선을 적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인민의 생활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어 인민들은 의식주 안정을 찾기 위하여 남하하는 것이다. 나도 유엔조위의 來朝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북조선의 유엔위원단에 대한 불협조에 불만을 품고 그리운 고향을 뒤로 남하하였다.



(問)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는가


(答)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에 하등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데 도리어 남조선 동포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다. 하여간 이북동포들은 여러번이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모략 선전에 속아왔기 때문에 이번 남북협상도 기대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면 총선거의 반대 공작이라는 것은 이북동포들도 잘 알고 있다.



(問) 金九씨는 현재까지 공산주의자들과 적대시하여 왔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金九타도라는 구호를 부르짖어왔던 것인데 최근의 金九씨 태도를 이북동포는 어떻게 보는가


(答) 남조선동포들은 북쪽 동포를 전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보는 듯하나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90퍼센트에 달하는 우익적 동포들은 李承晩·金九 양씨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숭배하여 왔다. 金九타도라는 구호에 우리 우익에서는 반감을 가지고 왔던 것인데 이제와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전조선에 공산주의정책을 감행하려는 金日成파의 책동에 추종한다면 3천만을 지도할 영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問) 이북동포들은 5월 10일 실시될 총선거를 어떻게 보는가


(答) 이에 대하여서는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으나 유엔위원단 입경을 거절한 소련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하루바삐 국제무대에서의 우리 독립국가가 실현될 방법을 갈망하느니만치 이번 선거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1949



[ ...... 매일 방과 후에 요일별로 있는 그놈의 각종 회의가 사람을 잡는 것이었다. ........

..... 회의는 보통 밤 9시가 넘어야 끝나는데 자정 무렵까지 갈 때도 많았다. ........

..... 교원과 학생 전원이 참가하는 합동토론회 ...... ]



[ ...... 결국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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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나와도 노동당원 아니라 취직 못해


주지하듯 북한 정권의 수립은 1948년 9월9일이지만 이는 형식적인 의미만 있을 뿐 시질적으로는 46년 2월 이미 정권이 세워진 거나 다름없다.청진수산전문학교를 졸업했지만 나는 요즘말로 고등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취직을 하려 해도 노동당원이 아니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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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위원장인 교양주임이 사상 평가


나는 함경남도 정평군에 있는 정평중학교에 배치되었다. 교직원 생활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매일 방과 후에 요일별로 있는 그놈의 각종 회의가 사람을 잡는 것이었다. 월요일은 직업동맹회의, 화요일은 독보회의, 수요일 교양발표회의, 목요일 자아비판회의, 금요일은 문맹퇴치사업 현지지도상황 평가회의, 그리고 토요일은 주간업무평가회의가 일주일 내내 계속 이어졌다. 회의는 보통 밤 9시가 넘어야 끝나는데 자정 무렵까지 갈 때도 많았다.


이 외에도 한 달에 한 번 교원과 학생 전원이 참가하는 합동토론회라는 게 있었는데 주로 북한의 시책에 대한 찬양, 김일성 우상화, 그리고 신문에 보도되는 남한 소식에 대한 토론이었다. 남한 소식은 믿어지지 않는 미군의 만행, 경찰의 양민학살, 민중봉기 등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은 교양주임이었다. 서열은 교장과 교무주임 아래였으나 노동당원으로서 노동당 정평중학교 세포위원장인 교양주임 앞에서는 누구도, 심지어 교장도 오금을 펼 수가 없었다. 그의 사상평가 여하에 따라 운명이 갈리기 때문이다.


동료 교원들하고는 어느 누구도 마음놓고 심중을 내보일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이고 감시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이심전심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동료교사가 있었으나 그는 오래 가지 않아 자아비판의 대상이 되어 결국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9년부터 병력·탱크 등 남하 시작


교직생활에 들어선지 8개월 되던 1949년 10월 초였다. 초가을의 화창한 날씨에 나는 우연히 창밖을 내다 보았다. 우리 학교는 정펑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있었는데 무개열차가 정평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 무개열차에는 포신을 길게 내민 육중한 탱크와 야포, 군용트럭 등이 시트에 덮여 실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정평중학교로 배치되어 올 때 역시 무개열차가 탱크와 야포 등을 싣고 남쪽으로 달리던 게 생각났다. 반대로 북쪽을 향해 올라가는 무개화차는 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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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7.



[ ...... 매일같이 심한 부역과 50%를 넘는 현물세에 살 수 없어 월남하였다 ........ ]



북한 한 마을 天道敎靑友黨員 100여 명이 집단 월남



경향신문

1949년 07월 08일




이북공산당정권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한 부락이 송두리째 월남한 사실이 있다.


즉 강원도 춘성군 공고리에 살고 있는 26가구 102명이 지난 7월 1일 밤 9시경 북한괴뢰군이 없는 틈을 타서 월남하여 왔다. 그들 가운데는 76세나 되는 노인도 있으며 그들은 소 21頭를 끌고 월남하여 강원도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청우당원으로 매일같이 심한 부역과 50%를 넘는 현물세에 살 수 없어 월남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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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 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 ........ ]


[ ...... "나도 군생활을 10년 했지만 북한 생활은 군대보다 더 들볶이는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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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살다가 6·25때 월남했다는 그는 "북한에는 언론, 집회, 종교 등 남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며 "뿐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의해 자아비판, 농민동맹 등을 수시로 해야했다…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고 회고했다.


이어 "나도 군생활을 10년 했지만 북한 생활은 군대보다 더 들볶이는 것이었다"라면서 "아마 휴전선에 구멍이라도 나면 이북엔 사람들이 한명도 없을 것…다 넘어오지"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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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1.


[ .... ‘와아, 38선이다. 저걸 넘어 김일성의 목을 받으러 가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 ........ ]




[ ...... 우리를 보자마자 20, 30명이 모여들어 ‘국방군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

...... 갑자기 가마니를 가져오더니 그 안의 사과를 길에 좍 깔아놓더군요. ........ ]




“와, 38선… 김일성 목 받으러 가자”




《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38선 이북으로 진격했다. 9·28 서울수복 후 미국 정부와 유엔이 전쟁 확대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단독의 38선 돌파 명령을 내렸다. 6·25전쟁 발발 후 계속 밀리기만 했던 국군이 ‘남한 사수’에서 ‘북진 통일’로 목표를 전환한 것이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은 여기서 유래한다. 》



■ 당시 박격포 탄약수로 강원도 양양서 북진



당시 보병 3사단 23연대 제1중화기중대 박격포 소대 탄약수로 강원 양양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었던 박한진 예비역 육군 대령(82세·당시 이등병)으로부터 1일 60년 전 북진 과정을 들었다.


“9월 18일 포항을 탈환한 뒤 승승장구하며 9월 30일 오후 강원 양양에 다다랐습니다. 38선이 보였어요. 병사들이 ‘와아, 38선이다. 저걸 넘어 김일성의 목을 받으러 가자’라고 환호하는데 갑자기 정지하라는 겁니다. 북진을 놓고 유엔군과 이견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죠. 하루 쉬고 기력을 충전한 뒤 진격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단독으로 38선 이북으로 북진했다. 동부전선을 관할한 육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오른쪽)이 38선 돌파 직후 기념비를 세우고 있다. 기념비에는 ‘아아 感激(감격)의 三八線(38선) 突破(돌파)’라고 적혀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사실 잇단 승전으로 사기는 충천했지만 보름 동안 매일 70∼80리 행군을 하며 북상한 장병들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물자 보급이 거의 안됐습니다. 군화도 고무신 밑창에 헝겊을 씌운 형태였어요. 그나마 고무 두께는 1cm도 되지 않았죠. 끔찍할 정도로 발에 물집이 생겨 쩔뚝이면서 행군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마밭에서 숙영을 마친 10월 1일 오전 진격명령이 떨어지자 장병들은 서로를 얼싸 안았다. “철모와 군복에 나뭇가지와 풀을 꽂고 신이 나서 38선을 넘었습니다.” 이 부대가 38선을 넘은 공식 시간은 오전 11시 45분으로 전사(戰史)에 기록돼 있다.


38선을 넘은 뒤 가장 처음 마주친 사람은 허름한 주막에 있던 마을주민이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20, 30명이 모여들어 ‘국방군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그때의 감격은 말할 수 없습니다. 발 아픈 건 까맣게 잊게 되더군요.”


선물은 또 있었다. “이 사람들이 갑자기 가마니를 가져오더니 그 안의 사과를 길에 좍 깔아놓더군요. 배 속으로 들어가는 사과가 어찌나 시원하고 맛있던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보급이 안돼 전날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거든요. 그렇게 북진의 첫날이 시작됐습니다.”


38선 이북의 북한군은 무력했다. 전쟁 초반 막강했던 인민군이 아니었다. “싸울 의지라는 게 거의 없었고 (전투라는 게) 패잔병 잔당을 소탕하는 수준이었죠.”

몇 차례 공방전을 치르며 그는 10월 9일 원산 시가지에 도착했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이날 가장 가슴 아픈 경험을 했다.

“아침에 시가지에 들어가니 미루나무에 70여 명이 죽은 채 매달려 있었습니다. 인민군이 퇴각하며 교도소에서 끌어내 죽인 것 같았어요. 시신을 살펴보니 몸이 채 굳지도 않았어요. 몇 시간만 더 일찍 들어갔으면 이들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자괴감이 전쟁 내내 저를 괴롭혔어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11월 말에는 함북 길주를 지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개마고원에도 올라갔다. “두만강이 코앞에 있었습니다. 통일이 왔구나 싶어 가슴이 설레 춥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12월 1일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영문도 모르고 남하하다가 함북 경성에 도착해서야 중공군에 밀려서 철수하게 됐다는 걸 알았어요. ‘부산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에 막막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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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Society/3/03/20101002/31554739/1

국군의 날 유래된 1950년 10월 1일 38선 첫 돌파… 박한진 예비역 대령의 ‘그날’ 증언

2010-10-02








1950.10.18. 평양



[ ....... 총탄 비가 오가는 사이를 뚫고 선교리로 다가서는 국군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 ‘국군만세!’를 외치며 달려 나온 시민들은

건물마다 널려 있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뜯어내 짓부수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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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아침 1사단이 평양 동남쪽 상원(祥原)으로 향하고 있을 때 미 제1기병사단은 신막(新幕)을 탈환, 평양에 접근 중이었으며 영연방군 27여단 선봉부대는 황주(黃州)를 점령, 계속 북진 중이었다. 18일 정오 상원을 탈환한 1사단은 적 탱크부대의 저항을 무찌르고 10월 19일 상오 10시 40분쯤 그 주력부대가 대동강변 선교리에 도달했다. 강 건너 본 평양을 향해 포격을 개시할 무렵, 건물 속에 숨어 앉아 반격을 시도하는 적들을 소탕하는 시가전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그처럼 총탄 비가 오가는 사이를 뚫고 선교리로 다가서는 국군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 ‘국군만세!’를 외치며 달려 나온 시민들은 건물마다 널려 있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뜯어내 짓부수기도 하고 국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장애물 철거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감격적인 장면이 벌어진 지 10여분이 지났을 때 황주쪽에서 올라온 미 제1기갑사단 ‘게이’ 소장이 선교리에 도착, 백 사단장과 역사적인 악수를 나누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때서야 미군에 종군한 외신기자들이 평양 돌입 상황을 우리에게 묻기도 하였다. ‘이 역사적인 승전보를 빨리 보도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내 머리는 꽉 찼다. 그래서 군 당국에 특별차편을 간청, 지프 한 대를 배정받았을 때 두 김(金)기자는 평양진격을 지켜본 후 기사를 ‘풀’하는 대신, 나는 서울로 먼저 가서 평양탈환 첫 보도를 ‘풀’하기로 타협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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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16. 함경남도 북청



[ ..... 거리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있었다. .....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내걸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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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 들고 거리에



10월16일 밤. 이때까지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읍내에는 유엔군이 곧 이곳에 상륙할 것이고 자정을 기해 김일성이 항복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이날 밤 10시 쯤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노동당과 읍인민위원회를 비롯해 내무서 등 각 기관이 중요한 서류를 모두 소각하고 도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노동당 리당 사무소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흥분한 상태였다. 나는 일단 집으로 돌아와 부친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온식구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새벽 동이 틀 무렵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거리로 나갔다. 거리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있었다. 진위를 가릴 수 없었지만 국군이 이곳에 입성하고 김일성이 항복한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내걸렸다. 8·15 광복과 함께 빛을 본 뒤 사라진 태극기가 다시 그 빛을 찾는 순간이었다. 날이 밝자 맑게 갠 하늘에 유엔 공군기가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는 사람들 위로 저공비행으로 선회하며 조종사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친구 한 명과 함께 인근의 신창여중으로 달려갔다. 도중에 주민들로부터 노동당 간부 몇이 과수원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과수원을 수색, 그들을 발견하여 학교로 끌고 갔다. 그들로부터 당원증을 빼앗고 난 뒤 숙직실에 가두고 부락 청년들에게 학교 주변을 지키도록 했다. 우리는 등사판으로 전단을 만들었다. 「쇠사슬에 묶여 살던 우리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자유의 종이 울려 퍼졌다」는 내용이었다.


한창 등사판을 밀고 있는데 바깥에서 총소리가 들려 왔다. 곧 이어 밖에 있던 친구가 달려들어오며 인민군이 학교를 포위하고 총을 쏜다고 알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부락 청년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긴급히 피신했으나 몇 시간인가를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가 너무 서두른 탓이었다. 아직 국군은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고, 인민군도 완전히 철수한 게 아니어서 1개 중대 병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1개 분대의 인민군에 둘러싸여 우리는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약 2킬로 정도 떨어진 신창인민학교로 끌려갔다. 가다 보니 그 많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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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24일, 국군과 유엔군이 利原에 들어왔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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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군의관이 싫어서 탈영, 미군 통역을 거쳐 영어 교사가 되다



가작 <인생의 갈림길에서 경주로 향하다>는 咸興醫大(함흥의대) 재학 중 인민군의 군의관이 되었으나 탈영했다가 국군의 북진 때 남하해 미군 통역관을 거쳐 영어교사가 된 분의 사연이다. 글쓴이 오윤근 선생(90세)의 고향은 함경북도 豆滿江(두만강) 남안의 국경마을 鍾城(종성)이다.



<해방 직후 고향 마을에 소련군이 들오던 날, 방학 중의 나는 귀향해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 나를 여동생이 흔들어 깨웠다. “오빠, 빨리 일어나. ‘마우재’가 오고 있대. 빨리 큰길로 나가봐.”

마우재는 소련군인을 가리키는 함경도 사투리로서, 그 어원은 “말이나 소같이 미욱하다”는 뜻의 馬牛者(마우자)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說(설)이 있다.


큰길로 나갔더니 소련병사 10여 명이 나타났다. 그들 중 하나가 내게 다가오더니 대뜸 시계를 찬 내 왼 팔목을 붙잡았다. 그 자가 몇 시인지 알려고 그런 줄 알고 시계를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그런데 그 자는 강도로 돌변했다. 그는 시계를 찬 내 팔목을 비틀어 시곗줄을 풀고 자기 손목에 나의 시계를 찼다. 그의 팔목에는 이미 세 개의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소련군의 노략질은 갈수록 심해졌다.>



1946년 3월13일, 함흥에서 학생들이 소련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3
·13 함흥 反共(반공)학생사건으로, 1945년 11월23일의 신의주 反共학생사건 다음으로 규모가 컸던 反소련 데모였다.



<1950년에 들어서자 내가 보기에도 남침전쟁의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함흥에도 인민군 1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6월로 접어들자 모두 38선 지역으로 전진 배치되어 함흥의 주둔지엔 1개 소대 병력만 남아 있었다.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자 바로 ‘전쟁 승리를 위한 궐기대회’가 개최되었고, 결의문도 채택되었다. 그 결의문은 “인민군에 지원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의실에 들어온 정치보위부 요원은 강의실 앞뒷문을 막고 입대지원서를 학생들에게 돌렸다.>



임상 경험이 없었던 그를 포함한 함흥의대 2학년생들 중 11명은 함흥시내 국·공립병원에 3개월간의 실습을 거친 후 신설 중이던 北靑(북청)의 예비사단으로 배치되었다. 함흥에서 200리 북쪽인 北靑으로 동문들과 트럭을 타고 함께 이동했다.


<인민학교의 교사를 징발해 막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30∼40대의 장정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군복도 지급받지 못하고 학생복을 입고 장교식당에서 숙식을 하며 장정들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대기했다. 그런 지 1주일 되던 날, 평소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던 친구 범은이가 나에게 탈영을 제의했다.>



그의 고향은 북청에서 북쪽 100리 거리의 利原(이원). 둘은 걸어서 다음날인 10월8일 집 근처의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이웃사람 몰래 집에 들어갔다. 숨어 지낸 지 15일 만인 10월24일, 국군과 유엔군이 利原에 들어왔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12월6일(1950년)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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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3881&C_CC=AZ

광복 70주년 현대사 체험수기 심사 後記









1950.10.29.


이대통령 평양 방문


감개 더욱 무량히....39년동안 그리든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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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시청에 이르는 연도에는 피난갔다가 돌아오는 짐을 진 주민들도 포함한 시민 다수가 손에 태극리를 휘날리며 이날의 세기적인 대통령 방문을 만세소리도 우렁차게 환영하였으며 거리에는 ‘대한민국 국부 이대통령 만세’ 등 대통령을 한영하는 프랑카드와 아치 문이 처처에 보였다.


오전 10시 대통령 각하께서는 과거 5년간 김일성 도당이 선량한 민중을 억압하고 쏘련에의 예속을 위하여 온갖 혹독한 짓을 다해 오던 살인 방화의 마전이었든 지금은 평양시의 새살림집이 된 평양 시청에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39년만의 평양...환호성 천지를 진동



평양시에 무사히 역사적인 제일보를 드딘 이대통령은 평양시청에서 박현숙 권옥희 양씨의 인사를 받은 다음 평양시 관리위원회 위원장 임정득씨를 비롯하야 부위원장들을 인견하고 간단히 시 운영상황을 청취한 뒤에 그들을 치하하면서 앞으로도 성심성의 노력하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이어 미국 임시민정관 벨파이어 대좌와 힐 중좌도 인견하고 위무한 다음 약 5만여명에 달하는 운집한 시민들의 열광적 환호리에 발코니에 나섰다.



“맹세하자 민주 쟁취를”

이대통령 환영대회서 유시


조국이 일제기반으로부터 광복된 지 5년동안 그리고 그리웠던 이대통령을 처음 맞이하는 시민들의 환호성은...(판독불가)....태극기의 바다로 화하였으며 오랫동안 간판을 내걸지 못하였든 조만식 선생이 영도한 조선민주당을 비롯하야 서북의용대 학생단체들....(판독불가)....

이날 식은 먼저 주악대의 대통령 환영주악.....(판독불가)......대통령을 처음 모시고 애국가를 봉창하는 평양 시민의 제창소리는 온천지를 울릴만큼 웅장하고도...(판독불가)..한복의 대통령은 마이크를 손에 들고 감개무량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약 한시간에 걸쳐 간곡한 인사말씀과 유시를 하시었다.




“본인이 39년 만에 다시 한번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찾아보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무한히 기쁩니다.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시었습니까.


제2차대전후 적국 일본이 패망하자 자유조국이 독립하여 즐거운 신생활을 할 줄 알었드니 세계 정복을 꿈꾸는 쏘련이 하등 정당한 이유도 없이 비법적으로 우리나라를 양단하여 38선이란 운명의 선을 그었습니다. 쏘련은 김일성 공산도당을 시켜 한국의 쏘련 예속화를 위한 충성을 다하도록 교사하는 한편 방화 약탈을 감행하도록 하여 아름다운 우리 향토 국토를 더럽혔습니다.

그동안 2백만 이상의 북한 동포들이 재산과 가족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우리는 없는 것은 너로 노나 먹으면서 화해롭게 살아왔습니다. 이북에서 피난해온 동포들은 그 동안 대한민국의 헌법을 준수하면서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공산당의 비행을 지적하면서 눈부신 활동을 해왔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친척중 많은 사람들이 민주활동을 많이 해왔습니다.


쏘련은 소위 막부(모스크바) 삼상(三相)결정이라 하여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에 두고 자기의 위성국가화 하려고 가진 모략과 술책을 다하여 왔으나, 우리는 죽음을 걸고 한마음 한뜻으로 싸워왔습니다.


좌우합작이니 뭐니 가진 방법을 쓰다못해 실패에 돌아가자 쏘련은 무기를 김일성에게 주어 급기야는 지난 6월25일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침범하야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전국을 정복하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돈을 가지고 무기를 사려하여도 여러 가지 국제관계상 무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쏘련이 대한민국의 무비가 약한 것을 보고 침략을 한 것은 어느면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들은 목전의 침략에 눈이 어두어 대한민국 뒤에 53개국의 자유민주진영이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의 우방 53개국의 평화애호 국가는 24시간 내에 자유을 위해 총궐기하여 오늘날 우리국군을 도와 용감히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쏘련은 필시 한국 같은 조그만 나라를 위하야 전세계가 다 같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것이요, 지금은 머리를 싸매고 앓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를 다시 분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은 한국 내에서 축출되었으며 앞으로 중공이나 쏘련이 나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등 겁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싸울 뿐이오, 우리가 합하면 감히 덤벼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와 같이 맹세합시다.

자유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것을!

우리 대한민국은 앞으로 국토를 튼튼히 방어하기 위하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것이며 유엔은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세계는 우리 대한사람들이 얼마만큼 훌륭히 잘 일을 해나갈 것인가 많은 기대를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속히 부흥건설에 노력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여러분, 이제는 도지사도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의사로 선량한 대표를 선출하여 임명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도지사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의식주인데 우리 다 같이 모자라는 것은 노나먹고 서로서로 살아나갑시다. 정부는 하루 속히 교통이 통하는 대로 쌀과 광목을 남에서 가져와 여러분에게 나눌 작정인데 모자랄 경우에는 외국에서 쌀과 광목같은 것이라도 우선 사다가 보내드릴려고 합니다. 정부는 현재 만반준비를 가지고 여러분과 같이 한 살림을 하려고 하는 바 유엔을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우리를 지지하고 있으므로 그다지 멀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무초 대사가 워싱턴에 가서 모든 것을 협의하고 있습니다. 유엔도 만사를 잘 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와서 누가 남쪽사람이니 북쪽사람이니 하거든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을 저해하는 사람으로 지목해두어 규탄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든지 본인이 필요하시거든 청해주십시오.

다 같이 의논하야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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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러분! 다시 한번 나와 같이 맹서합시다.

통일된 자유조국을 위하야 싸워나갈 것을!“



약 한 시간에 긍한 대통령의 간곡한 유시가 끝나자 시민들은 감격의 열루를 흘리면서

“우리 대통령 만세”를 연속 절규하며 대통령의 유시에 보답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리하야 식은 오전 11시55분 국방부 전훈국파견 군악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원만히 끝났는데 자유의 종소리는 자유로운 행복된 금일을 축복하면서 계속하여 울렸다.



식 종료후 대통령은 이별을 아까워하는 시민들 속을 지나 열광적 환송속에 “대통령각하 만세” 소리를 뒤에 들으시면서 수행원을 대동하시고 비행기에 탑승하야 일로 서울로 귀환 하오 한시 반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조선일보, 1950. 10.31)



이처럼 이승만은 평양에 가서도 당장의 민생고 해결과 더불어 ‘도지사 직접선거’를 힘주어 강조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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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② 통일의 눈앞에서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 포럼 대표










[ ..... 수십만 평양시민과 이북동포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가운데 감격적인 연설을 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왜 전혀 언급하지 않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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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6.25전면남침 당시에도 나이 아직 40이 채 안되었던 김일성이 무려 석달동안이나 서울을 점령하고도 위장된 군용차를 타고 쥐새끼처럼 비밀리에 서울시내 곳곳을 시찰한 적은 있으나 (이같은 사실은 박헌영 직계측근으로서 박헌영 월북 이후 남로당지하총책이었던 朴甲東의 회고록뿐만 아니라, 그 어떤 기록에도 김일성이 이미 적화된 서울에서 단 한번도 군중에게 모습을 공개한 적이 있다는 기록이 없다!) 단한번도 감히 환영군중대회를 개최하거나 군중앞에 모습을 드러낸적이 없는 반면,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성공을 기점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 국군과 유엔군이 마침내 3.8선을 돌파 , 파죽지세로 북진하기 시작하여 한 때나마 평양을 수복하였을 때 , 당시 이미 80을 바라보는 노구를 이끌고 당당히 평양을 방문! 수십만 평양시민과 이북동포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가운데 감격적인 연설을 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왜 전혀 언급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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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신문 김기백, 프레시안에 강력한 공개장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가 광화문에서 열렸다면…"기사에 7가지문제제기!

빅뉴스, pyein2@hanmail.net
등록일: 2011-05-10







1950.12.


‘끊어진 대동강 철교’ 찍은 기자 별세


[중앙일보] 2018.02.21

김나현 기자



.1950년 12월, 한파가 몰아치던 한국전쟁 당시. 끊어진 대동강 다리를 건너던 피란민의 사진을 찍어 전 세계에 전쟁의 참상을 알린 전 AP통신 기자 맥스 데스포(사진)가 19일 세상을 떠났다. 104세.


104세 AP통신 기자 맥스 데스포

퓰리처상을 받은 끊어진 대동강 철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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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22383360








[ ..... 끊어진 대동강철교를 아슬아슬 타고 넘어가는 피난민들이 보였다. 그러다 힘에 부쳐 강으로 떨어지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필사의 탈출이었다 ....... ]



“대동강철교 이읍시다…내 제안에 선우휘가 나섰다”

2017-08-10



[짬] (29회) 평양 탈환과 대동강 후퇴작전


1950년 ‘9·28 서울수복’ 이후 김병기는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에 돌아가 북한문총 등 예술단체를 복원하던 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철수해야 했다. 그해 12월3일 김병기는 선우회·이용상과 함께 유엔군이 폭파시킨 대동강철교의 복구작업을 감행해 수만명의 피난민을 안전하게 도강시켰다. 미군 종군기자 막스 데스퍼가 찍어 1951년 퓰리처상을 받으며 ‘한국전쟁 상징 장면’으로 기록된 대동강철교 피난행렬 사진은 이날 복구 이전 상황으로 보인다고 김병기는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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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일 아침, 나는 마지막 트럭을 타러 육로문 쪽 대동강변으로 나갔다. 황염수는 커다란 이부자리까지 등에 지고 나왔다. 다만, 정훈국에 체포돼 있다고 들었던 김만형을 구출하지 못한 것이 가슴 아팠다. 피난 보따리를 짊어진 평양시민들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부교마저도 더 이상 건널 수 없었다. 유엔군의 스코틀랜드 병사가 총을 쏘면서, ‘노 모어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는 필요 없다)라고 소리치면서 부교를 막고 있었다. 난감했다. 나는 정훈장교인 선우휘에게 ‘우리를 공산주의자로 보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 하소연했다. 다른 방법을 찾고 있으려니, 끊어진 대동강철교를 아슬아슬 타고 넘어가는 피난민들이 보였다. 그러다 힘에 부쳐 강으로 떨어지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필사의 탈출이었다. 게다가 12월초라 날씨는 매섭고 강물엔 살얼음이 떠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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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철교를 어떻게 넘을 수 있었는가.


“나처럼 남한에서 올라왔던 경찰이나 군인들은 이미 철수한 뒤였다. 군복 입은 사람은 딱 3명, 선우휘, 이용상 그리고 나뿐이었다. 미술동맹 가족 등 수백명이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강변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중공군이 모란봉 서북쪽 기림리까지 넘어오고 있다고 했다. 긴박한 상황이었다. 12월3일 오전 10시께, 나는 선우휘에게 ‘우리가 다리를 고치자’고 제안했다. 마침 대동강철교의 아치 한 구간이 끊긴 채 강물 속에 잠겨 있었다. 소설가 선우휘는 정훈장교였고, 이용상은 시인이었고, 나는 화가였다. 그런 절박한 진공상태에서는 예술가들이 오히려 용감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나는 ‘노 모어 코뮤니스트’ 구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는 대동강철교 도강작전을 시작했다. 12시 무렵, 다리 옆으로 피난민을 모이게 했다. 제복을 입고 있는 평북 경찰대 10여명이 질서유지를 하는 가운데 피스톨(권총)을 옆구리에 찬 선우휘가 연설을 했다. 영웅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뒤에 서 있는 참모 역이었다.


‘여러분, 지금부터 우리가 대동강다리를 고칩시다. 우리가 살길은 다리를 고치는 것뿐입니다. 이제부터 재목을 모아 끊어진 다리를 이읍시다’ 철교를 고치자는 제안에 피난민들이 ‘와’ 찬성했다. 피난민들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힘을 모았다. 다리의 끊어진 부분이 나무뭉치로 두둑해졌다. 우리는 전선을 끊어 사다리를 이었다. 계단식 유(U)자형 길이 만들어졌다. 장쾌한 순간이었다. 다리 잇기를 주도한 공로로 예술인 가족을 제일 먼저 넘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나와 예술인 가족이 앞장섰다. 그렇게 밤새도록 피난 행렬이 다리를 넘었다. 수만명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흥남 철수와 비교될 만한 민족의 대이동 작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작전에 동참했다는 사실이 내내 뿌듯했다.

그날 낮 끊어진 대동강철교의 난간을 붙들고 넘어가는 피난민 행렬을 찍은 <에이피>(AP) 종군기자 맥스 데스포의 사진은 1951년 퓰리처상을 받으며 한국전쟁의 상징적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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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06255.html#csidx40877d372b0f95db1bbb406582163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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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5.15. 경향신문


최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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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40세 이상인 국민들은 김일성의 우상화를 믿지 않고 있으며 그 이하 세대는 70%가 김일성의 선전을 그대로 믿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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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 자세히 보니 눈물을 흘리며 환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개 나이든 사람들이었다......... ]



[역사의 현장을 보았다-강만길교수] <상>'하나됨의 결정'…14일 만찬

국민일보 200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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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타고 평양시내로 가면서 또 한번 크게 놀랐다.우리는 비행장에서의 환영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평양시내에 들어서는 경계지점에서부터 양쪽 길에 역시 붉은 조화를 들고 만세를 연호하는 인파가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었다.곳에 따라서는 길가 뿐만 아니라 뒤편 언덕까지 사람으로 채워져 있었다.

손을 흔들어 답하면서 자세히 보니 눈물을 흘리며 환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개 나이든 사람들이었다.계속 손을 흔들다보니 팔이 아팠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동원하다니’ 하는 생각을 잠시 했으나 그들의 눈물을 보고,또 진심 어린 표정들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동족애가 느껴지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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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5&aid=0000007278








1950.10.26.



[.... "야! 압록강이다".......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이었다 .......

..... 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 만세"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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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0월 24일 맥아더 원수는 다시 "모든 작전 제한선을 없애고 국군과 UN군은 모든 지상부대를 투입해 신속히 한·만 국경선까지 밀고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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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6사단 7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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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무제한 북진 명령의 선봉에 선 것은 임부택 대령이 이끈는 국군 6사단 7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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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4일 김종오 6사단장은 임부대 7연대장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국경도시 초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이때부터 7연대는 인민군에게서 노획한 차량을 타고 초고속으로 진격했다.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 당시 평북(지금은 자강도) 강계 쪽으로 후퇴하던 인민군 부대를 앞지르기도 했다.


초산에서는 오일용(吳日龍)이 이끄는 인민군 8사단이 패잔병으로 부대를 꾸려 일시 저항을 시도했으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월 26일 드디어 7연대는 한·만국경지역인 초산군을 점령했다. 초산읍에서 압록강까지는 6km였다. 임대령은 1대대장 김용배(金龍培) 소령에게 "국경까지 진출하라"고 명령했다.



1대대가 30여 분을 더 진격하자 인민군 패잔병들이 고지에서 사격을 가해 왔지만 일거에 제압되었다. 그 직후 중토동 마을 고개에 올라선 1대대원들은 수풍댐 때문에 거대한 호수가 된 압록강을 발견했다.

"야! 압록강이다"

병사들이 어울려 고함치는 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임부택 대령에게 전달되었다.



마침내 압록강



잠시 후 1대대 1중대 수색소대가 신도장이라는 마을 앞 강변으로 달려가 태극기를 꽂았다. 이때가 정확히 1950년 10월16일 오후 2시15분이었다.

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압록 강변에 도달한 7연대 1대대 1중대장은 이대용(李大鎔) 대위였다. 압록강변 수색에 나선 이대위는 만주 통천구로 이어진 뗏목다리 위로 인민군이 도주하는 것을 발견하고 57mm 대전차포를 쏴 뗏목다리 를 끊어버렸다.



이대용대위는 그 후 준장으로 전역해 베트남 주재 한국 공사가 된다. 주월공사시절 한국군과 미군이 월남에서 철수하고 베트남이 공산화되었다(1975년). 이때 이대용 공사는 마지막까지 사이공에 남아있다가 월맹군에 붙잡혀, 감옥살이를 하다 197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7연대 본대가 압록강에 도달했다. 그러자 김종오 6사단장이 임대령에게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께 보내라"고 지시했다.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온 것도 이대용 대위가 이끄는 1 중대였다.이때 누군가 수통에 압록강 물을 채우는 국군 병사의 모습을 촬영했다.



그러는 사이 미 10군단 예하 미 해병1사단은 장전호에 접근했고, 미 육군 7사단은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에 도착해 사단에 부여된 작전을 거의 완수해 놓았다.국군 3사단은 함북 길주를 지나 함수-백암-보천보를 거쳐 백두산으로 진격하고 있었다.국군 수도사단은 청진을 장악한 후 나진-무산을 지나 회령-온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선에는 인민군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어쩌다 발견되는 인민군들도 잠시 저항하다 황급히 도주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일성은 모든 인민군들에게 평북 강계로 모이라는 지시를 내려놓고 있었다.인민군들을 강계를 향해 황급히 모여드는데 국군과 UN군은 강계를 무시하고 국경선으로 진격하는 데만 진력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전선에서 중공군 포로가 잡히기 시작했다.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추워지는데 전선 분위기는 전과 다르게 긴장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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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UN군의 패배는 맥아더 원수의 해임으로 이어진다(1951년 4월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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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종신 원수이기 때문에 전역을 신청하지 않는 한 원수계급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하지만 명예를 존중하는 그는 해임 즉시 전역을 신청했다.그해 4월19일 그는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장문의 고별연설을 발표했는데 말미에 이런 대복이 들어 있었다.



"전세계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한국인들이 보여준 대단한 용기와 불굴의 투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그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자고 한다.그들이 내게 던진 마지막 말은'(미국은) 태평양을 포기 하지 말라'였다.(중략)


나는 20세기가 시작하기 직전에 꿈과 희망을 갖고 군에 입대했다. (줄약)그 후로 세상이 여러 번 바뀌면서 그 꿈과 희망은 사라졌지만,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군가 후렴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나는 이 군가처럼 나의 군 생활을 마치고 사라지려고 한다.신이 주신 의무를 끝까지 다하려고 한 노병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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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60주년 맞는 ‘압록강 물 다시 마시자’


[중앙일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26일. 국군과 UN군 가운데 가장 먼저 압록강 초산에 진격한 6사단 7연대 1중대 소속 초병은 사단장의 명령으로 압록강 물을 2개의 수통에 담았다. 이 물은 바로 이승만 대통령과 육군본부에 각각 보내졌다. 유명한 압록강 물 헌수다. 이 일로 6사단은 ‘압록강 물 다시 마시자’를 구호로 쓰고 있다.


이 부대가 창설 60주년을 맞았다. 6사단이 창설된 것은 대한민국 창군 이전인 1948년 6월14일. 충주에서 한국군 창건 모체인 제 4여단으로 창설된 6사단은 한국전쟁 기간 중 최다 전투(154회), 최다 적 사살(9만2669명) 기록을 세운 부대. 특히 전쟁이 발발한 날부터 벌어진 전투에서 춘천을 사흘 동안 방어, 북한의 전쟁 시나리오를 수정하게 했다. 음성지구 전투에서는 적 2개 연대를 섬멸해 7연대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했고, 용문산 전투에서는 중공군 3개 사단을 무찔렀다.


전쟁 후 66년부터 철원에 자리잡은 6사단은 대 간첩작전으로 17명을 사살하는 등 적 침투를 한번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75년에는 초병이 제2땅굴을 발견한 구국의 부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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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1








1950.12.2. 국방부장관, 국민 총궐기에 대해 성명



친애하는 국군장병과 애국동포 여러분!



저 잔인무도한 공산비적의 침략을 받아 민족과 조국이 공전의 고난을 맛보게 된지도 이미 만 5개년을 경과하게 되었습니다.

이 동안 우리가 경험한 바를 회고하여 본다면 저 역도들의 독수에 걸려 국군과 경찰과 청년과 학도와 기타의 비무장 남녀노유까지 합쳐서 100만 가까운 인명이 학살 혹은 납치당하였고, 도시와 농촌의 주요시설이며 주택·가재 등의 파괴·灰爐 당한 손실까지 계상한다면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처절 참절한 현실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점에 생각이 미치고 저 폐허를 살필 때마다 본관은 끝없는 통분과 아울러 위로 대통령 각하에 대하여서나 다시 전국 동포에 대하여서나 항상 죄송스러운 느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무후무한 민족적 수난을 치르게 된 반면 우리는 국군장병과 UN군 장병의 용전감투한 혜택으로 그처럼 발호하던 공산역도배도 거의 무찔러 버리고 만 5년 동안 철의 장막에 가로막혀 격리 당하고 말았던 이북동포들도 다시 찾아 자유로 상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서로 합심하여 조국통일의 대업도 완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민족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감격도 새로운 바 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명하신 이대통령 각하께서도 張勉 대사 같은 훌륭한 공로자를 국무총리에 등용하는 동시 정부 각 부처의 인사도 쇄신 강화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이북통일의 위대업을 완성하고자 日夜 고심하고 계신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의 수난을 완전히 극복하고 오로지 통일 재건의 민족적 대업만을 달성하고자 우리 국민은 상하 일치하여 싸우며 또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국군장병과 애국동포 여러분!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근본 염원이 이러하였고 우리의 건국실천이 또한 이 범위를 초과하지 않았던 만큼 미국을 위시한 세계 민주우방도 6·25사변 이래 적의 잔인한 침략과 살상에 분격하여 우리와 함께 이 땅에서 피 흘려 싸워준 것이오, 나아가 우리 국가의 통일재건을 조속히 달성시킴으로써 적색제국주의의 세계 제패 야망도 분쇄코자 기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하여 9월 15일 국군과 UN군이 맥아더장군의 직접 지휘아래 경인지구를 탈환한지 불과 1개월 우리는 평양·원산까지 수복하고 다시 전진하여 서에서는 청천강 건너 압록강으로, 동에서는 함흥과 길주·명천을 지나 청진까지 탈환할 수 있으며 혜산진까지 만주벌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포여러분!

昨今에 이르러 戰局의 모든 양상과 성질은 급변하게 되었으니 다름 아니오 중국의 외적이 패잔의 김일성 역도배와 결탁하여 越境入寇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역사에 대해 이 무리의 침략행위는 저 소위 공산의용군이라는 명목아래 이미 오래 전부터 행동을 개시하였던 것입니다 만은 이제 와서는 20만 넘는 대부대가 UN군과 우리 국군의 정면에서 모든 가면을 벗어부치고 적색침략의 毒牙를 벌리게 되었습니다.



동포 여러분!

솔직히 알려드립니다. 이 외적의 무리가 공산도배의 잔당을 대신하여 대량의 인해전술로 남하하기 때문에 용감무쌍한 우리 국군이나 UN군도 서부전선에 있어 청천강 남안으로 후퇴를 부득이 하였고, 기타의 전선에 있어서도 예전의 진격을 중지하며 차기 작전에 대비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외적 중공 오랑캐의 입구로 인하여 민족과 조국은 국토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기 일보직전에서 또다시 방해 당하고 53개국의 민주우방으로 더불어 새로운 세계적인 중대국면에 봉착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국과 민족의 운명은 물론 민주우방으로 더불어 자유민주세계의 존망을 위하여 중공은 물론 그 이상의 적색제국주의와도 감연히 싸워 이를 격멸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저들의 노예로 민주세계의 멸망을 앉아서 기다리느냐 하는 중대 계단에 직면한 것입니다.



동포 여러분!

민족국가의 번영을 위하고 세계적인 최후 승리를 위하여 우리는 최후 일인 최후 일각까지 싸울지언정 이 오랑캐 무리의 유린에 민족과 국가를 내맡길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트루만 대통령이나 맥아더장군은 물론 UN의 민주열강 대표들도 이미 저들의 야망과 저들의 침략을 간파하고 자유민주세계의 안전을 위하여 20만의 중공군이 우리를 침입하면 20만의 UN군으로써 이를 격멸하고 100만의 중공군이 우리를 범한다면 100만의 UN군이 우리를 지원하기로 각오도 새로운 터이니 충용무쌍한 우리 국군장병이나 삼천만 애국동포가 그 무엇을 주저하며 그 무엇을 겁낼 것입니까.



국군장병과 애국동포 여러분!



조국의 통일재건을 위하여 민족의 기백, 민족의 영예를 세계만방에 선양할 날도 이제는 닥쳐왔으며 자유민주세계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대한청년의 위대한 투쟁으로 잔인무도한 공산비적을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섬멸하여 볼 날도 닥쳐왔습니다. 이날 이 판국에서 전 민족이 총동원 총무장하여 혈투로써 임하지 않고 다시 어느 시절을 기다리겠습니까.



충용무쌍한 국군장병과 애국일념에 불타는 동포 여러분!


강철 같은 민족의 단결로써 우리는 모든 외적에 임하여 주도 치밀한 작전아래 무장·비무장을 막론하고 공산비적들을 뿌리 채 뽑아치웁시다.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가가호호 총궐기하여 도끼와 낫이든 호미나 괭이라도 들고 나서 싸웁시다.

그리하여 이 간악한 적도가 제아무리 애국자로 가장하고 감언이설로 임하더라도 모조리 적발 타도하며, 제아무리 위협 공갈하며 약탈과 파괴로써 임하더라도 감연 혈투하여 모조리 섬멸하여 치웁시다.



중공은 그만두고 그 이상의 외적들을 산길에서 오면 산길에서 무찌르고 공중에서 오면 공중에서 쳐부수고 바다로 오면 바다에서 깨칩시다.



국군장병과 애국동포 여러분!

끝으로 우리 자신의 핏줄기를 다시 한번 더듬어 보십시다. 우리 혈맥에는 요동벌과 살수인 청천강에서 수·당의 100만 대군을 무찔러버린 고구려의 선민들과 을지문덕·연개소문의 핏줄이 아직도 뛰고 있으며, 우리의 혈맥에는 남해 한산도에서 왜적 왜함을 모조리 깨쳐버린 이충무공의 핏줄도 뚜렷이 남아있습니다.



산이며 바다이며 공중이요 지하이든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세계 우방의 젊은 용사들로 더불어 공산비적이라면 모조리 잡아 소탕하고 자손만대의 행복과 인류사회의 자유를 위하여 끝까지 이겨봅시다.


우리 민족이나 우리 국가만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세계와 인류를 위하여서도 최후 승리는 반드시 우리의 것입니다.










[ ..... 소련과 중국 공산군이 우리나라에 가져온 공산 괴질을 청소해야만 될 것입니다 ........ ]




1950.12.2. 新戰局에 대하여 대통령 특별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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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괴뢰인 한인공산당을 우리 국군과 연합군의 능력으로 다 소탕시키고 서울과 평양과 함흥을 다 해방시킨 것입니다.


전장에는 적군의 잔재만 남았으므로 군인들과 평민들이 다 일체로 기대한 바는 전쟁은 다 지나가고 평화를 회복해서 통일이 완수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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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이렇게 됨에 이 공산제국주의자들이 다시 이 전쟁을 시작키로 결정한 것입니다.


거대한 중공군이 한국에 침입하고 또 의외에 비밀이 넘어와서 우리를 공격함으로 약간 승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 국군과 모든 UN군에 많은 손실을 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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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은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는 최후 결전임을 일반 애국동포들은 다 각오해야 될 것입니다.


모든 애국남녀가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의 근본적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 꿋꿋이 싸우자는 것입니다. 이 정신이 기미년에 모든 애국자를 궐기시킨 것이오, 또 오늘 우리 모든 애국자들을 다시 궐기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남녀를 물론하고 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강폭한 원수를 대항해서 우리의 역량을 있는 대로 전장에 공헌해야 될 것입니다.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이든지 안전을 유지하는 경찰이든지 기관차나 모든 기계창에서나 또는 군기 군물을 제조하고 운반하는데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학교와 병원이나 또는 도로상에서나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우리나라를 위하고 우리 자유를 위하며 전 세계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직책과 영광을 다 가져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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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은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될 것이므로 전 국민이 한사람처럼 일제히 궐기해서 어깨를 겨누고 소련과 중국 공산군이 우리나라에 가져온 공산 괴질을 청소해야만 될 것입니다.








1950.12.20. 신문기자 총궐기대회


[ ...... 적색제국주의의 살육과 공포와 노예화정책을 분쇄하고 조국과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총궐기 ........ ]


신문기자 총궐기대회 개최


동아일보 1950년 12월 21일



오랑캐가 쳐들어오고 있다. 조국은 지금 위기에 직면하였으니 만주벌판에서 꿈틀거리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이 돼지의 무리가 삼천리 강토를 짓밟고 3천만 민족의 앞가슴에 청룡도를 내밀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당 태종과 수 양제의 백만 침략군을 무찌른 선조의 영광과 5천년 불패의 역사가 연면히 계승되어 우리의 혈관을 줄기차게 흐르는 조국애로 총단결 총궐기하여 손에 손에 정의의 총칼을 들자!


오랑캐를 무찌르려는 민족의 기백은 이제 전 민족을 궐기시켰으니 일찍이 민주주의 생활의 자유와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싸워온 우리 한국의 전 언론인도 위기에 대한 인식을 더욱 새롭게 하여 전선에 궐기할 때는 왔다.


언론의 자유가 박탈된 공산당 전제하에서는 늘 헐벗음과 굶주림과 노예화의 길 밖에 없으니 우리는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서도 이 空前絶後의 위기를 극복하여 조국과 민족의 영예를 보존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에 한국의 전 언론인은 궐기하였으니 어제 20일 시공관에서 열린 신문기자 총궐기대회는 자유옹호의 굳은 결의 있음을 전 세계에 선포하는 선언을 채택하였으며, 유엔사무총장, 미국 대통령, 유엔군총사령관 및 일선 장병에게 각각 별항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었다. 이날 오전 10시 조금 지나서 계획된 신문기자 총궐기대회는 순서에 따라 다음과 같은 회순을 원만히 진행시켰다.



▵개회 ▵주악(서울시 음악대) ▵묵념(전몰 장병에게) ▵개회사:서울신문 吳宗權 ▵격려사:국방장관(張차관 대독), 공보처장(李차장 대독) ▵선언 及 메시지:1. 선언(동아일보, 金三奎), 1. 유엔총회에(조선일보, 成仁基), 2. 미 대통령에(연합신문, 林元圭), 3. 맥원수에(경향신문, 민재정), 4. 일선장병에(승리일보, 具常) ▵기념강연(정훈국장 이선근) ▵격려사(시경국장 李益興), 동(유엔 공보관 메레델) ▵주악 ▵만세삼창



▹선언문



이 나라의 민주주의적 자유를 수호하고 확립하는 것을 유일한 사명으로 하는 우리 언론인 일동은 6·25사변을 계기로 이 자유가 얼마나 귀중한 가를 더욱 통감하였고 중공의 도발적인 참전에 의하여 전 인류가 막대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 이때에 인류의 운명을 살육과 공포와 노예의 함정으로부터 구출하는 유일한 길은 민주주의적 자유를 단연코 사수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지난 10월 하순경 중공이 월경 침입하려 할 때에 유엔과 미국은 국경지대에 있는 중공의 권익을 존중하겠다고 언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법한 침입으로 허다한 살육을 감행하였고 한국전쟁을 국지화하려는 유엔의 기본방침에 의하여 한국정전안이 52대 2의 절대다수로 유엔 총회를 통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견강부회의 요구조건을 고집할 뿐 하등의 반성도 보이지 않음은 적색제국주의의 침략성과 괴뢰성을 노골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기에 추호도 주저하지 않는 바이며 동시에 이러한 평화교란자를 지구상에서 말살해 버리기를 전세계의 민주여론에 호소하는 바이다. 우리는 전세계 민주우방과 더불어 민주주의적 자유를 수호하기에 전력을 다할 것을 굳게 결의하는 한편 대내적으로 군·경민이 뜨거운 동족애에 입각하여 서로서로 얽히고 설켜서 불타는 애국심을 12분으로 발휘하기 위하여 먼저 전 언론인이 사소한 이해와 구구한 소아에 국척함이 없이 대국적 견지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총 단결을 垂範함으로써 衝天의 火柱가 되어야 할 것을 엄숙히 요청하는 바이다. 이것은 언론계 자체의 권위를 위하여서 뿐만이 아니라 민주국가의 권위를 위하기 때문이요, 나아가서는 이러한 성실성과 권위 없이 3천만 동포와 더불어 이 중대한 시국을 돌파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


동지 제군! 적색제국주의의 살육과 공포와 노예화정책을 분쇄하고 조국과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총궐기할 때는 왔다.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동포를 기아와 결핍에서 구출하는 자유를 위하여, 인권과 평화를 위협하는 공포를 제거하기 위한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진실한 보도와 비판으로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위하여 총 궐기할 때는 왔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자유를 수호하는 데 노력과 성의와 정열을 경도하는 것만이 조국과 인류를 현재의 위기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길임을 여기에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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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쟁중에도 언론 검열, 간섭 안해"

鄭晉錫 한국외대 교수, "그는 끝까지 언론자유의 신념을 지켰다"



뉴데일리


“이승만, 끝까지 자유민주언론 신념 지켰다”
鄭晉錫 한국외대 교수 “韓末엔 국제잠각 뛰어난 기자로 활약”
6.25동란 등 국가 위기에서도 검열이나 논조 간섭 전혀 안해


온종림 기자




“이승만 建國대통령은 끝까지 언론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根幹)이라는 신념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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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수는 6.25 전쟁 기간 기사 검열을 실시한다는 공고가 잠시 잇었지만 검열기구를 두거나 제도적으로 운영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국가가 어렵고 혼란할 때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고 야당지가 여론을 주도하는 형국에서도 이 대통령은 신문의 논조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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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30016&C_CC=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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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큰 공은 6·25전쟁을 치르면서 우리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나아가 군을 육성·발전시켜 .......


...... 나라 없는 설움만은 참을 수 없었다 .......

......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10억 달러 경제원조, 70만 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아 ......... ]



그때 그 이야기


<961>老兵이 걸어온 길-211-위대한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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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창설식 참석 등 군 사랑 각별


해방 후 귀국한 그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해 정부 수립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지(Hodge) 중장과 불화로 한때 미국에 잠시 가기도 했으나, 유엔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케 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이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에 해방정국의 혼란기를 비교적 무난히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2년간 대통령으로 집권하는 동안 그의 가장 큰 공은 6·25전쟁을 치르면서 우리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나아가 군을 육성·발전시켜 대한민국을 오늘날과 같은 국가가 되게끔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늘 우리에게 “배고픔도 참을 수 있고, 어떠한 굴욕도 참을 수 있는데, 나라 없는 설움만은 참을 수 없었다”고 역설하면서 “우리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며 국민의 대동단결을 강조했던 애국자였다.


그는 군에 대해서는 자다가도 일어날 정도로 깊은 관심과 애틋한 감정을 갖고 대했다. 그 때문에 군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서울대학교 졸업식에는 못 가더라도 사단급 이상 부대 창설식에는 반드시 참석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혹자는 이 대통령이 군을 잘 모른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미국 독립전쟁시 민병대(militia)에 대한 깊은 지식과 아울러 이의 역할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또 그는 미국 남북전쟁에 대해서도 제3자가 들으면 탄복할 만큼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장군이 이 대통령의 깊은 학문적 지식에 대해 자신보다 미국 역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했을까!


6·25전쟁 때 나와 우리 군은 이와 같이 뛰어난 이승만이라는 위대한 대통령을 모시고 전쟁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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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총장이 되고 나서는 수시로 전선 상황을 비롯해 군 현안을 보고하러 나는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예방했다. 전쟁 중 이 대통령은 휴전에는 적극 반대하면서 오로지 북진통일만을 추구했다.


특히 휴전의 막다른 길목에서 그는 미국 대통령 특사로 방한한 로버트슨을 상대로 18일간의 협상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10억 달러 경제원조, 70만 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아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영명한 대통령이었다.


http://kookbang.dema.mil.kr/kdd/ColumnTypeView.jsp?writeDate=20090603&writeDateChk=20090525&menuCd=2001&menuSeq=16&kindSeq=1&menuCnt=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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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7.29.



[ .... 부세도 200만 석(石)이 못되고, 군사도 수천 명에 불과하니 ..........

...... 중국 .... 정병이 30만이고 전선(戰船)도 100여 척(隻)이 되며 해마다 들어오는 수입도 6,000만 석(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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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袁世凱)가 ‘조선 정세를 논함〔朝鮮大局論〕’이라는 글을 써서 의정부(議政府)에 보냈다.

그 글의 내용에,


“조선은 동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 나라로서 영토는 3,000리(里)에 불과하고 인구는 1,000만 명도 못되며 거두어들이는 부세도 200만 석(石)이 못되고, 군사도 수천 명에 불과하니 모든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빈약한 나라입니다.


지금 강대한 이웃 나라들이 조여들고 있는 때에 사람들은 안일만 탐내고 있습니다. 역량을 타산해보면 약점만 나타나서 자주 국가로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강국의 보호도 받는 데가 없기 때문에 결코 자기 스스로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자연적인 이치로서 천하가 다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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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병력이 구주만 못하지만 정병이 30만이고 전선(戰船)도 100여 척(隻)이 되며 해마다 들어오는 수입도 6,000만 석(石)이나 되므로 만약 일부 부대를 출동시켜 조선을 점령하려고 한다면 돌로 달걀을 깨듯이 쉬울 것이다.’ 라고 하니,


어떤 사람이 비웃으면서, ‘공의 말과 같다면 이것은 조선이 중국를 몹시 두려워한다는 말인데 중국도 조선이 중국를 두려워하듯이 오히려 구주를 두려워하는데 어떻게 구주를 방비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므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렇지 않다. 중국은 영토가 넓고 백성들이 많으며 나라 안은 태평하다. 그래서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사람들을 죽여 들판에 차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진 사람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지 구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프랑스와의 전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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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3권, 23년(1886 병술 / 청 광서(光緖) 12년) 7월 29일(경신) 3번째기사

원세개가 조선 정세를 논함이란 글을 써서 의정부에 보내다









[ ...... 해산 당시 한국군은 ..... 도합 8,800여 명에 불과 ........ ]



신편 한국사 42 대한제국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3. 군대해산과 사법권 피탈 > 1) 군대해산과 의병봉기




1) 군대해산과 의병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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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무년간 고종은 꾸준히 군비증강에 힘써 왔는데, 이러한 군비증강사업은 국방력 강화뿐 아니라 대내적으로 황제의 친위세력을 보강하려는 의도로 추진된 것이었다. 1898년 6월 육해군 친총을 천명한 고종은 육군 증설과 해군 定制에 관한 조칙을 잇달아 내리고 친위 각대 편제를 개정하였으며, 1898년 7월에는 武官學敎를 창설하고 1899년 6월에는 元帥府를 설치하였다.註 769

신무기·군함의 도입에도 막대한 비용을 썼을 뿐 아니라註 770 1903년 3월에는 징병제 실시 계획을 발표하기도 하였다.註 771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고 군사적 공수동맹이라는 미명하에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을 합법화하였다. 한국 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대규모 군대를 파견함과 동시에 고문협약으로 군부고문 野津鎭武를 파견하여 갖가지 명목으로 대한제국의 군비를 축소하였다.


1904년 5월 일제가 파악하기로 실병력수 16,000여 명에서 1905년 4월과 1907년 4월 2단계에 걸쳐 대대적인 감축을 실시한 결과 해산 당시 한국군은 시위보병 2개 연대 약 3,600명, 기병·포병·공병·치중병 약 400인, 지방군대 8개 대대(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해주·안주·북청 8개소) 약 4,800인, 도합 8,800여 명에 불과하였다.註 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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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8국제여단 ..... 조선인 ... 약 60여 명 ........ ]



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혁명 1세대"의 모태이다.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전투 이후 만주에서 일본군의 항일세력 토벌작전이 심화됨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도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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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 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조선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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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년 ..... 광복군은 300명의 인원을 확보 ........ ]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무장독립군으로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항일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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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41년 3월 강남일대 초모공작을 위해 김문호를 단장으로 4명의 특파단을 설치하여 장시 성으로 파견했다. 이러한 초모공작의 결과, 총사령부 창설 1년 만에 광복군은 300명의 인원을 확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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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편된 광복군의 1942년 10월을 전후한 시기 병력은 제1·2지대 270여 명, 제3지대는 70명 내외였다. 광복군의 재편성은 곧 중국관내 한인무력의 통일을 뜻하며, 광복군 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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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개 사단 60만 대군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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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은 국군이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전쟁초기 8개 사단
105,752명에 불과했던 육군은 휴전 당시 3개 군단 18개 사단으로 증강되었고 휴전 이후에는 5개 군단에 20개 사단 60만 대군으로 확충되었다.


해군 역시 6개 전대를 가진 함대로 성장하였고, 공군은 독립작전 능력을 구비한 1개 전투비행단과 1개 훈련비행단 및 전투기 80대를 포함하여 11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해병대는 전쟁 중 귀신 잡는 해병,무적해병의 전통을 쌓으며 1개 사단 규모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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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사원조는 1955년에만 4억2000만달러 ......

...... 그 한 부분이 100대의 제트 전투기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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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한국이 세계 10위권 안팎의 경제 국가이지만 6·25전쟁 직후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심지어 아프리카 국가들만도 못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한때 아시아 최고 수준의 공군을 보유했다. 그 사연은 이렇다.



6·25전쟁이 장기화하자 미국은 적당한 휴전으로 발을 빼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동맹 없이 휴전되면 북한이 다시 침공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봤다. 이 대통령은 한국군 단독 북진이라는 배수의 진을 치고 미국에 한·미 동맹 체결을 강요했다. 미국 대통령 이하 당국자들은 '이승만이 칼을 물고 뜀을 뛴다'(외교의 세계·최병구)고 혀를 찼지만 '같이 죽자'는 한국 대통령의 결의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내키지 않던 한·미 동맹을 체결하고 한국에 막대한 군사원조를 해야 했다.


군사원조는 1955년에만 4억2000만달러에 달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로 우리가 일본에서 받은 돈이 5억달러이고 그게 경제 발전의 밑천이 된 것을 생각하면 4억2000만달러는 엄청난 돈이었다.

그 한 부분이 100대의 제트 전투기였다. 1949년 창군 때 전투기 0대의 우리 공군이었다. 아마도 세계 공군 역사에 이렇게 가난한 나라의 공군이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렇게 성장한 기록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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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훈 칼럼] F-35 스텔스 공군의 오늘엔 현명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
2019.04.04








건군60주년, 국군의 사명-북한해방·자유통일

맨 주먹으로 시작, 세계 9위의 군사력 확보



김필재 기자 2008-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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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국은 ‘밴 플리트 계획’으로 명명된 국군 확장계획을 클라크(Mark W. Clark, 前 UN군 총사령관) 대장이 적극 추진함으로써 1954년 11월 무렵에 육군 66만 명, 해군 1만5,000명, 해병대 2만7,500명, 공군 1만6,500명 등 72만 명의 대군으로 늘어났다.


무기와 장비도 육군은 M-36 전차나 155㎜ 곡사포를, 해군은 전투용 함정(PF·PT·PCS·LSSL) 50척을, 공군은 F-51 무스탕 전투기 80대를 갖추게 됐다.


특히 정전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안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현대화를 전제로 국군 정원이 63만 명 수준으로 확정했다. 이와 함께 부대의 합리적인 지휘 관리를 위해 최초의 야전사인 제1군사령부(사령관 백선엽 대장) 창설을 필두로 후방지원의 제2군사령부와 교육훈련 전담의 교육총본부를 창설해 육군의 군 구조를 정비했다.


이로써 1960년 기준으로 육군은 제1군(5개 군단 18개 사단), 제2군(4개 군관구, 10개 예비사단,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군수기지사령부로 재편됐고, 해군은 제1함대를 대한민국 함대로 증편 2개 전단 2개 전대로, 해병대는 제1해병사단을 비롯한 1개 여단으로, 공군은 제트화를 추진한 제10전투비행단과 제11전투비행단 등을 구비한 전술 공군체제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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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1.20. 『이젠 마음 놨어!』



[특별기고] 영욕의 陸士 60년


『이젠 마음 놨어!』

(李承晩 대통령, 정규 陸士 1기 입교 때)



월간조선



老애국자의 평생 恨

1952년 1월20일 진해 陸士에서 열린 정규 陸士 1기(11기) 입교식.



花郞臺(화랑대) 60년 역사상 가장 감격적인 날은 1952년 1월20일이었다. 그날은 바로 4년제 정규陸士 제1기생(1955년 졸업時 「陸士 11기」로 호칭을 바꿈)의 입교식 날이었다.


입교식을 위해 참석한 美 극동군사령관 리지웨이 大將(대장)을 비롯해 16개 참전국 將星(장성) 등 內外 귀빈들의 수가 入校(입교)하는 4년제 陸士 1기생 200명보다 더 많았다. 성대하고 뜻있는 잔치였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오늘은 여러분이 獻身(헌신)의 式典(식전)에 몸을 바치는 날』이라고 말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 대통령 말씀, 군악대의 연주 그리고 생도대장 이승우 중령(5기)의 『부탁한다』는 심각한 당부와 발진, 『우로 봐!』를 외치면서 우리를 이끄는 구대장 신현수·이상익·홍완표 대위의 구령….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칼이 솟는 듯했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식전이 끝나고, 모든 귀빈이 떠났다.



그런데 갑자기 생도들에게 「小강당으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귀빈들 가운데 제일 먼저 떠난 줄 알았던 李承晩 대통령께서 우리 신입생 생도들을 한번 가까이 보겠다고 부르신 것이었다. 우리들은 긴장했다.


나는 동기생 중에서 키가 제일 작았다. 맨 앞줄에서 허리를 펴고 앉아 있는데 李대통령께서 바로 내 앞에 오셨다. 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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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 2023-09-23 20:49:44 삭제



1952.1.20. 『이젠 마음 놨어!』



[특별기고] 영욕의 陸士 60년


『이젠 마음 놨어!』

(李承晩 대통령, 정규 陸士 1기 입교 때)



월간조선



老애국자의 평생 恨

1952년 1월20일 진해 陸士에서 열린 정규 陸士 1기(11기) 입교식.



花郞臺(화랑대) 60년 역사상 가장 감격적인 날은 1952년 1월20일이었다. 그날은 바로 4년제 정규陸士 제1기생(1955년 졸업時 「陸士 11기」로 호칭을 바꿈)의 입교식 날이었다.


입교식을 위해 참석한 美 극동군사령관 리지웨이 大將(대장)을 비롯해 16개 참전국 將星(장성) 등 內外 귀빈들의 수가 入校(입교)하는 4년제 陸士 1기생 200명보다 더 많았다. 성대하고 뜻있는 잔치였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오늘은 여러분이 獻身(헌신)의 式典(식전)에 몸을 바치는 날』이라고 말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 대통령 말씀, 군악대의 연주 그리고 생도대장 이승우 중령(5기)의 『부탁한다』는 심각한 당부와 발진, 『우로 봐!』를 외치면서 우리를 이끄는 구대장 신현수·이상익·홍완표 대위의 구령….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칼이 솟는 듯했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식전이 끝나고, 모든 귀빈이 떠났다.



그런데 갑자기 생도들에게 「小강당으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귀빈들 가운데 제일 먼저 떠난 줄 알았던 李承晩 대통령께서 우리 신입생 생도들을 한번 가까이 보겠다고 부르신 것이었다. 우리들은 긴장했다.


나는 동기생 중에서 키가 제일 작았다. 맨 앞줄에서 허리를 펴고 앉아 있는데 李대통령께서 바로 내 앞에 오셨다. 그분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李대통령의 얼굴에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한참 우리들을 바라보시던 李대통령은 낮은 음성으로 우리들에게만 들리게, 마치 긴요한 당부라도 하듯이 한 말씀 하셨다.

『이젠 마음 놨어!』

그리고는 떠나셨다. 그 한마디 속에는 老애국자의 평생의 恨이 서려 있었다.



軍의 法統 세우려 교장에 安椿生 장군 임명



진해에서 4년제 陸士가 개교하기 이전, 陸士는 1946년 5월1일 入校한 제1기부터 제10기까지 5735명의 장교들을 배출했다. 이들 가운데 1310명이 戰死했다. 세계적으로도 그 나라 陸士 출신이 한 전쟁에서 3년 만에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린 사례가 없었다. 특히 생도 1기(나중에 「陸士 10기」로 호칭)와 생도 2기는 6·25전쟁이 터지자 사관생도 신분으로 戰線(전선)에 투입됐다가 커다란 희생을 치렀다. 그들이 이 나라를 지킨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 일시 休校(휴교)했던 陸士가 다시 문을 열고 4년제 정규 생도들을 모집한 것은 李承晩 대통령의 恨 맺힌 집념과 國權수호 의지의 소산이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李鍾贊(이종찬) 장군이었다. 일본 陸士 출신인 李鍾贊 장군은 부산 정치파동 당시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李承晩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한 곧은 분이었다.


戰線에서 勇名(용명)을 떨친 일본 陸士출신 장성들은 새로 문을 여는 4년제 정규 陸士의 교장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李鍾贊 장군은 李대통령에게 安椿生(안춘생) 准將(준장)을 새 교장으로 추천했다. 중국 黃浦(황포)군관학교 출신인 安장군은 安重根(안중근) 義士의 조카였다. 李承晩 대통령과 李鍾贊 장군은 한국軍의 法統(법통)을 安重根 義士 등 애국지사들의 독립정신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李대통령은 安椿生 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교훈을 「智(지)·仁(인)·勇(용)」으로 정하고, 친필 휘호를 내려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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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 온 서울大 교수들이 출강



1950년대의 진해 陸士 교육은 철저한 西歐式(서구식) 교육이었다. 당시 부산으로 피란 와서 산꼭대기에 천막을 치고 교육했던 일반 대학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陸士 11기생 200명을 교육하는데, 20여 명씩 소단위 교실교육을 실천했다. 피란을 내려와 있던 서울大 교수들이 陸士에 출강했다. 최윤식(수학)·정봉협(수학)·이숭녕(국문)·차상원(국문)·강봉식(영어)·이장환(영어)·송욱(영어)·방성희(물리학)·이두겸(물리학) 교수 등 쟁쟁한 분들이었다. 황찬호·조순·문원·엄장익·오윤용·김영전·임재규·유광열 교수는 대위나 소령으로 우리들을 가르쳤다.



후일 조순 교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경제학자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거쳐 民選(민선) 서울시장을 지냈다. 당시 空士 교수였던 이현재 교수는 서울大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냈고, 海士 교수였던 송욱 교수는 영문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3軍 사관학교는 우리나라 知性(지성)들의 집결지였고, 士官(사관)문화의 요람지였다.


당시 陸士에서는 매일, 매시간 일일시험을 치르고 채점을 했다. 생도들의 명예를 존중해서 시험감독은 없었다. 그래도 부정행위는 없다. 만일 부정행위를 저지르다가 고발되면 당장 退校(퇴교) 된다.



매일 시험을 보고 채점을 하는 데 부담을 느낀 교수들은 기말시험이나 章末 시험으로 제도를 바꾸자고 건의했다. 학교 본부의 美 고문관들의 답변이 왔다. 미국에서는 陸士와 海士가 축구시합을 응원하러 필라델피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일일시험을 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西歐 군사교육 제도였다.



그래서 陸士 생도들은 4년간의 재학기간에 약 1000번의 시험을 치렀다. 그 평균성적이 67점을 넘지 못하면 퇴교해야 했다. 교관은 낙제생 후보를 불러 놓고, 『자네 평균을 계산해 보라』고 해서 66.9999점이 안 되면 퇴교시켰다.



눈물도 인정도 없는 시험 또 시험



참으로 눈물도 인정도 없이 이 전통이 지켜져서 보통 한 期에 약 27%가 도태됐다. 물론 50년 동안 한 시간의 휴강도 없었다. 사회가 아무리 혼란해도 모든 교과서는 진도대로 마쳐야 했다. 흔히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入學이 곧 卒業』이라고 말하지만, 陸士는 예외였다. 陸士 생도들은 졸업식을 하고 나서야 마음을 놨다.


나는 대령 때 美 프린스턴大로 교환교수로 갔었다. 그 대학의 「교수 對 학생」 비율이 「5 對 1」이었다. 한국 陸士도 「교수 對 학생」 비율이 「5 對 1」 비율로 생도들에게 「기초가 넓고 철저한」 교육을 했다.



이 陸士 교육의 진가를 일찍 인정한 분이 서울高와 경기高 교장을 지낸 김원규 선생이었다. 그분은 서울高 교장 재직 시절, 조회 때마다 陸士 교육의 미래를 높이 평가하고 우수한 학생을 陸士로 보냈다. 그래서 陸士 16기에는 서울高 출신이 20여 명이나 입학했다. 1등 학생이 서울法大에 가지 않고, 陸士로 진학했다.


陸士 17기, 18기에는 경기高 출신도 많았다. 吳明 前 과학기술부총리가 경기高 출신 18기이다. 전국의 유명한 고등학교 수재들이 陸士로 모였다. 李承晩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강석씨도 陸士에 입교했다. 이때 입교한 생도들이 후일 월남戰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했다.



李대통령, 『무엇이 무서워서 제3차 세계대전에서 꽁무니를 빼겠소?』



1953년 정월이 왔다. 아무리 陸士에 대한 기대가 높아도, 전쟁 중인 가난한 나라 형편은 어쩔 수 없었다. 배는 고팠고, 난로도 없이 겨울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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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거리에서는 休戰(휴전)반대 데모가 매일같이 열렸다. 陸士도 反共北進통일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생도들의 90% 이상은 전투를 경험했던 병사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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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06-05







<건국62주 특집> 이승만의 대한민국 만들기

"제주도 못가!" 美대사에 권총 빼든 李대통령


최종편집 2010.08.20


『6.25와 이승만,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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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6월 27일


숨 막힐 듯한 긴장과 긴박감 속에 하루가 지났다. 대통령이나 나나 자정을 넘겨 막 잠자리에서 눈을 붙였을 때 비서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맡의 시계는 27일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어 서울시장 이기붕(李起鵬) 씨와 조병옥(趙炳玉) 씨가 들어왔다.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겠습니다.”
신 장관이 간곡히 남하를 권유했다.
“안 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대전 사수해, 난 여기서 죽겠다" 유서 남겨

7월 1일 오전 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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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차라리 대전에서 죽는 게 낫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 경멸을 당하지는 않겠다며 대전 사수를 고집했다. 침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대통령은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리고 기도하는 자세였다. 그의 얼굴은 불행한 국민들에 대한 연민의 정과, 잇단 패전에 대한 분노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당장 상황을 뒤바꿀 어떤 대책이 있을 수도 없었다.

대통령은 노트를 꺼내 내게 건네주며 메모를 부탁했다. 나는 조용히 그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다. 나는 자유와 민주제단에 생명을 바치려니와 나의 존경하는 민주국민들도 끝까지 싸워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다만 후사 없이 죽는 게 선영에 죄지은 불효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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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길엔 너나없이 단벌신사들이었다.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고위관리고 간에, 양복이나 와이셔츠를 아끼려고 지사관저에 들어오면 팬츠만 입고 웃옷은 옷걸이에 모셔놓았다. 그러다가 회의가 있거나 외국손님이 올 때면 옷을 챙겨 입고 나타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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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망명정부를..." 美대사 말에 권총 꺼내

"이 총으로 적을 죽이고 처를 쏘고 나를 쏘겠소"



무초 대사는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가자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의 주장은 그곳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고, 최악의 경우 남한 전체가 공산군에 점령된다 해도 망명정부를 지속시켜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무초가 한참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권총을 꺼내들었다. 순간 무초는 입이 굳어져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살 때 고속순찰 오토바이를 따돌리고 과속으로 달릴 때 가슴이 떨린 이후 그렇게 놀란 적이 없었다.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히 말했다.

대통령이 권총으로 어쩔 것은 아니었지만, 긴장한 무초 대사는 더 이상 아무 말을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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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5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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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한국을 미국의 '부하'에서 '동맹자'로 끌어올리려고 한 점이다.


6.25개전 초기 북한군이 대전을 포위하자 무초 미 대사는 한국정부를 제주도로 옳길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이 박사는 권총울 꺼내 들고 한반도를 떠나기보다는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제주도로 정부를 옳기고 트루먼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들을 대한해협에서 저지했으면 한반도는 동구처럼 공산화되는 선에서 해결되었을 것이다. 이 박사는 이러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한국군의 훈련과 무장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고, 압록강까지의 진격을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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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상호방위조약 .....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동시에 .....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욕도 저지 ........ ]




조갑제 날 짜 2003년 5월 25일 일요일


독후감/이승만의 벼랑끝 전술과 韓美방위조약




오늘 오전 감동적인 논문을 읽었다. 유영익-이채진 편 [한국과 6.25전쟁](연세대학교 출판부)에 실린 [李承晩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읽으면서 金大中 전 대통령과 盧武鉉 현 대통령이 꼭 보아야 할 글이란 생각을 했다. 金씨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미동맹을 약화시킨 자신을 자책해야 할 것이고 盧 대통령은 "부모가 나무를 심으면 자식이 그늘 덕을 본다"는 중국 속담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 논문의 著者는 충남대학교 사학과 차상철 교수이다. 그는 李承晩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승만은 분명히 철저한 反蘇주의자요, 동시에 철저한 反日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맹목적인 친미주의자도 결코 아니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자신의 日記에 이승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승만]이 철저하게 비협조적이고, 나아가 반항적이기까지 한 사례를 담은 긴 목록을 여기서 열거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승만]은 지금까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은 동맹자였기 때문에 그를 가장 심한 말로 통렬히 비난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서두는 미국을 북진통일과 작전지휘권 환수란 카드로 견제하면서 자신의 말이 공갈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하여 1953년6월18일 유엔군이 관할중이던 반공포로 25000명을, 한국 헌병들을 시켜 석방했다. 휴전협정이 깨질 지경에 이르렀다. 휴전협상이 2년간 끈 가장 큰 이유는 반공포로를 강제송환할 것인가, 그들의 자유의사에 의해 송환 여부를 결정할 것인가에 대한 유엔군과 공산군의 이견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날 열린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이승만이란) 또 다른 적을 만난 것 같다.">



6월19일 주한 미국 대사 브릭스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는 후일의 역사가 판단해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자살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저자 차상철 교수는 이런 말로 논문을 끝내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매개로 하여 미국은 남한에 대한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위협을 봉쇄함과 동시에 이승만의 北進무력통일 의지도 단념시키는 이중봉쇄의 효과를 기대했으며 반면에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동시에 그가 심각하게 우려해온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욕도 저지시키는 이중봉쇄의 효과를 지닌 법적 장치를 확보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안보가 확실하게 보장되기를 기대했다. (중략).


이승만은 신생 독립국인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나아가 그것을 심는 데 성공했다. 한국민은 그 "나무"의 그늘 덕을 아직까지 보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그것은 이승만에게 있어서 한국의 생존이 걸린 정녕 포기할 수 없는 생명줄이었다>


이 논문을 읽어보면 이승만이 미국의 멱살을 잡고 벌인 벼랑끝 전술에 아이젠하워나 덜레스나 로브트슨 특사는 진저리를 쳤지만 결국 그 뒤 한미동맹이 해낸 일들을 보면 미국의 3인방은 저승에서 이승만의 억지와 위협이 한미 양국의 국익은 물론이고 자유진영, 나아가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란 감회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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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3월 미국 정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을 정치적인 해결, 즉 휴전협정을 맺고자 했다. 李承晩은 휴전의 전제조건으로 韓美방위조약의 체결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李承晩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1953년 6월18일 일방적으로 反共포로를 석방하는 강수를 두었다.


미국은 독자적인 北進(북진)통일을 주장하고 휴전에 非협조적인 李承晩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李承晩과 타협하기 위해 그가 요구하는 군사방위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韓美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1월17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휴전의 성립과 李承晩이 주장했던 단독 北進 무력통일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고, 반면에 李承晩은 공산주의 세력과 일본의 팽창주의로 인해 위협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미국으로부터 보장받는 데 성공했다.

韓美상호방위조약은 그후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가장 큰 밑받침이 됐다. 이 조약으로 인해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 전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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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6.17. 반공포로석방



[ ..... 밀고 당기던 반공포로 2만6000명을 일방적으로, 기습적으로 석방........ ]


[ ..... 팽덕회가 美측에게 李대통령으로부터 휴전보장을 받아 내도록 요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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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을 통일기회의 소멸로 볼 수밖에 없는 李承晩 대통령은 온 국민들의 열화같은 휴전반대 데모를 주도했다. 한국군을 UN군 사령부로부터 빼내어 비록 집단자살이 될지라도 북진을 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한편에서 李대통령은 휴전회담의 포로교환 교섭이 자유·공산 兩진영의 이데올로기의 전장인 것에 눈이 가 있었다.

회담의 양측 대표가 군사분계선에 합의하여 조인 절차만 남겨놓고 있던 시점인 1953년 6월 17일, 李대통령은 全세계 앞에 카드를 제꼈다. 회담 양측간에 밀고 당기던 반공포로 2만6000명을 일방적으로, 기습적으로 석방해 버린 것이다.


자유라는 상징이 갖는 전략가치를 李대통령만큼 절묘하게 활용한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휴전을 빨리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세계의 頂上 아이젠 하워, 처칠, 毛澤東으로 하여금 李承晩 대통령이 결심만 하면 그들의 다급한 목표인 휴전을 파기할 가능성을 가졌음을 현실로서 절감케 해버렸다.


국면전환의 열쇠가 일거에 李承晩 손 안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 순간 한국전쟁은 한번 한국化됐던 것이다. 당시 소련의 한 잡지가 反語的으로 그 정도를 일러주고 있다.



당당하게 받아낸 한미상호방위조약



『한국전쟁이 일어나고서 지난 3년 동안은 도대체 李承晩이란 이름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이 3년 동안 남한의 모든 문제는 미군 사령관에 의해서만 지시되고 李承晩은 부산의 한 모퉁이 미군 병사의 뒤뜰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李承晩은 너무도 강대·강력하기 때문에 유엔군사령관이나 美대통령도 그리고 미국 의회도 그와 겨룰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꼴불견의 연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歷史의 證言」에서 재인용)


金日成과 중공군사령관 팽덕회가 美측에게 李대통령으로부터 휴전보장을 받아 내도록 요구해 왔다. 공산측까지 나서서 李承晩 대통령의 對美협상 입지를 강화시켜 준 것이다.



아이젠하워 美대통령이 워싱턴으로 李承晩 대통령을 초청했으나 시간이 없다고 거부했다. 미국은 대통령 특사를 서울로 보냈다. 월터 로버트슨 美대통령 특사는 6월26일부터 이후 보름 동안 매일 경무대로 출근하다시피 李대통령과 회담하고, 그동안 미국이 소극적이던 한미 방위조약 체결, 2억 달러로 시작되는 전후 복구 원조개시, 20개 사단으로 한국군 증강 등의 틀을 잡게 된다. 전쟁기간중 몇 번이나 버릴 생각을 했던 한국한테, 쫓아낼 생각을 했던 李承晩한테 미국은 한국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7·27 휴전협정 조인이 있고 나서 일주일 만에 강경한 반공주의자인 델레스 미 국무장관이 서울로 와 李대통령과 회담하고, 8월8일 변영태 외무와 더불어 한미 방위조약에 가조인했다. 李대통령은 이 만족을 성명으로 표시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조치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


李承晩은 휴전의 묵인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맞바꾸어 놓았다. 이후의 경과를 보면 거인 李承晩은 전화에 휩쓸려 초토와 폐허만 남은 나라에 세계에서 가장 탄탄한 울타리를 주문해다 쌓아 올려 번영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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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국군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장군과 반공포로 석방

李대통령 비밀지령 받고 철저한 보안속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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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국군헌병총사령관 원장군은 이대통령을 적극 보좌해 국가적 난제를 해결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대통령의 용단과 원장군의 적극적인 수명(受命)으로 꽃을 피운 반공포로 석방이다. 아침에 이 뉴스를 듣고 면도하던 영국 처칠 수상은 놀란 나머지 얼굴을 베었고, 덜레스 국무장관은 잠자고 있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깨울 정도로 이것은 ‘빅(big) 뉴스’였다.


이는 자유우방국뿐만 아니라 적대국 공산 측에도 일대 사건이었다. 이제까지 공들여 온 휴전이 파산될까 봐 미국 등 자유우방국과 공산권 국가들도 대책 마련에 부심할 정도로 그 파장은 넓고 깊었다. 그것은 누구도 예측 못 한 휴전협상 막바지에 몰아닥친 ‘이승만의 해일(海溢)’이었다.


이렇게 대담하고 엄청난 일을 이대통령과 원장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냈다. 이대통령은 국군지휘관에게 혹여 해가 될까 봐 백선엽 육참총장을 비롯해 군 수뇌부에게 비밀로 했다.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비밀지령을 받은 원장군이 철저한 보안속에 이 일을 처리했다.


이대통령은 이를 위해 이미 3개월 전인 53년 3월 24일 대통령령 제153호에 의거 국군헌병총사령부를 국방부 내에 설치했고, 원용덕 육군소장을 중장 진급과 동시에 헌병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휴전협상의 마지막 관문인 포로문제가 타결되기 2일 전인 53년 6월 6일 원장군을 경무대로 불러 포로석방 문제를 비밀리에 연구하도록 지시했고, 원장군은 포로문제가 타결된 6월 8일 경무대로 이대통령을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나의 명령이니 반공한인애국청년들을 석방하라. 가만(可晩)”이라는 친필명령서를 전수했다.


원장군은 대통령의 밀명을 은밀히 진행시켰다. 이 일은 국방장관과 육참총장에게도 비밀로 했다. 모든 일은 육군헌병사령부와 포로경비부대를 통해 진행됐다. 작전은 6월 18일 0시에 개시돼 반공포로 2만7000명이 석방됐다. 6월 19일 새벽 6시 원장군은 중앙방송국에서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의 목숨을 건 대명(大命)이 성공한 순간이었다.


이를 들은 애국학생들은 헌병총사령부 정문 앞으로 몰려들어 “원용덕 장군 만세 !”를 외쳤다. 대통령은 원장군에게 ‘의로운 용기(義勇)’라는 휘호를 하사하며 그의 공을 치하했다. 그 후 그는 풀려난 반공포로들로부터 ‘포로의 아버지’ 대우를 받으며 1968년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공과(功過)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기대해 본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2008.08.11








창랑 장택상 편

제39회 반공포로석방과 이대통령


1965.03.26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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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어저께 저 반공포로 석방때 얘길 좀.


- 네. 그 양반이 잘 아시지만은 침착하시고 말이야. 또 그 무슨 참 자기 신변에 관한 일이라든지 모든 일에 관해서 조금도 그 양반이 그 참 공포라는건 전혀 모르시는 분이에요.


- 아마 적어도 내색하지 않는 분이셨죠.


- 아 내색이라니 실지로 그 양반이 거기에 대해선 참 무관심한 양반이에요. 내가 실지로 하나 봤어요. 부산서 그 언젭니까. 그 저 권총저격을 당하지 않았어요? 다행히 발사는 안됐습니다만 마침 그 어느 연설회장인데 그때 내가 그때 국무총리고 그때 철기도 내무장관으로 그때 현직으로 있었고 할 땐데 당장 그 연설 그 양반이 지금 연단에 올라가 가지고 연설을 하는 중인데 누가 뒤에서 총을 발사를 했는데 그게 불발이 돼서 마침 다행이지. 그때 그 유 뭐라는 사람하고 또 그때 현직 국회의원으로 있던 김신연 씨 라고 그 양반들이 나중에 그 걸려들어가가지고 여러해 동안 고생하지 않았어요?

- 네.



- 근데 그 범인을 현장에서 포착하자니 그 뭐

- 떠들썩 했겠지요.

- 떠들썩하고 그 뭐 굉장한 소란이 일어나니까 아 이 양반이 연설을 그냥 계속 그러니까 한 사람이 불발해서 다행히 그 양반이 맞질 않으니까 또 어떤 사람이 제 2차로 나올지 안나올지 그걸 누가 보증할 수 있나.

- 그렇지요.


- 그러니까 우린 쫓아 올라가서 아 어서 내려오시라고. 철기가 올라갔지 그때 뭐 여럿이 인제 올라가 내가 연설 도중에 올라가서 그만 두시고 내려가십시다 하니까 아니야 이거 다 마쳐야 그 양반이 끝날까지 그 연설 다 마쳤습니다.

- 네.




- 네. 그렇게 그 양반이 고집이 센 양반이에요. 또 평생 무슨 겁이라는건 모른다고 자기가 늘 하시는 말씀인데. 한번은 언젠가 1953년 그게 6월이던가요? 반공포로 석방이.

- 6월 18일인가 그렇죠.


- 그 6월인가 그렇게 기억이 납니다. 그 반공포로 석방한지 그 2,3주일이 못 지났어요. 그때 그 영국 국회에서 이승만이를 체포하라고 영국 정부에다 건의하고 유엔군 사령관실에서 즉시 체포해서 형무소 수감하라고 그때 야단 법석이 나지 않았습니까. 또 그거에 트루먼 대통령의 친서가 오고 뭐 굉장한.

- 네. 이 박사 독단으로 한거니까.


- 그렇죠. 인제 그 야단이 났는데 하루는 제가 내가 그 딴 무슨 부 사사부일로 내가 그때 그 임시관저를 들어갔어요. 가니까 이 양반이 그 서재에 앉아서 뭐 쓰시고 앉아 계시더구만요. 그래 가서 인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가 이 양반이 갑작스럽게 날 보더니

이봐. 네. 나 겁이 없는 사람이지? 그 저희들이 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내 겁을 모르는 사람인데 내 이번엔 혼났어. 아니 무슨일로 혼이 나셨어요. 아니 반공포로를 하긴 해놓고 내 혼났어. 내가 일생을 통해서 이 참 독립운동에 말이야 잠 못 자본 적은 없다. 언제든지 누우면 내가 즉시 잔다. 그래서 내가 건강이 유지된 사람이야. 한데 이 반공포로를 해놓고 내가 이틀밤을 고대로 세웠어.

- 아.

- 그래 내가 아니 영국 국회에서 각하를 잡아 가두라고 이런 건의까지 나오니 그게 겁이 나셨습니까. 내가 웃으면서 그러니까 천만에 그걸 내가 겁을 낼리 있나 우리 국가에 혹 어떠한 그 헤나 돌아오지 않을까.

- 음.

- 내 그 말씀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 네.

- 난 이틀밤을 못 주무시고 당황하고 참 겁을 지금 잡수셨다고 하길래 자기 지금 신변 혹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가진 않을까 혹은 또 신변에 무슨 이런 염려인줄 그 누구든지 그렇게 짐작할 것 아니에요. 천만의 말이다 이거야. 그걸 내가 겁낼 사람이야? 우리나라 혹 무슨 헤나 돌아오면 어떡하지 아 내가 일은 저질러 놓고 말이야. 응? 이틀밤을 내가 고스란히 세웠어.

- 영도자로서의 그 책임감 때문에 그랬다 이말이야.


- 네. 애국심이지요. 참 그런 점에야 밉다가도 고운 생각이 문득 문득 납니다. 미운짓도 많잖아요? 근데 내 개인이 당한 일도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너무 섭섭한 일이 하지만은 그런걸 한번 우리가 상기해 볼 때 말이야. 우리 사천년 역사가 둘도 없는 애국자라는건 우리가 잊어서는 안됩니다.


- 그 양반의 그 독특한 그 성격 이것이 언제나 말썽이었지 근본 그 사리판단 어떠한 국제정세에 대한 그 자신의 그 어떠한 그 시책강구 이런건 뭐.


- 아니 나는 미스터 신, 이승만 박사가 4·19혁명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고 동시에 조국을 등지고 외국에 망명까지 했지만은 그 분이 과오가 있다면은 모든 과오를 전부 한 산통에다 집어 넣어가지고 우리가 흔들어 볼 때에 아무런 일을 그 양반이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 평화선을 설정해가지고 생명선이라고 할 수도 있고 국방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거를 무리하게 설정을 해가지고 그걸 그대로 당신이 12년 동안 이 나라를 통채해 가면서 추호의 참 양보도 없이 일본 사람하고 대항했고 동시에 미국하고도 기타 그 한국을 지지하는 그 우방국가와도 그 문제에 대해서 조금도 굽히는 일이 없이 그대로 그 양반이 끌어 나갔던 그 공로야 불후의 업적이지요.


- 최근에 저 이 한일교섭의 실무을 종사하고 있는 외무부 직원들 당사자들도 말이지요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자기네들로서는 그때 상상도 못했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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停戰 60주년 특집


휴전 반대한 李承晩의 목숨 건 도박, 韓美상호방위조약

安保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보다 중요하다는 신념 관철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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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마리 토끼’를 잡은 이승만의 승리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변영태 외무장관(오른쪽)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내세우고 반공포로를 석방한 이승만 대통령의 강수에 미국은 두 손을 들고 휴전에 대한 반대급부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동의했다.


이승만과 로버트슨은 1953년 7월 11일까지 모든 문제에 합의했다. 첫째, 휴전성립 후 한미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이를 위해 덜레스 국무장관이 상원의원들을 설득한다. 둘째, 미국은 장기간의 경제원조와 우선 2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한다. 별도로 유엔군사령관은 95만 달러어치의 식료품을 한국민에게 공급한다. 셋째,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이에 합당한 해·공군력을 지원한다. 넷째, 정치회담에서 90일을 경과해도 구체적 성과를 얻지 못하면 한미 양국은 철수한다. 다섯째, 정치회담 이전에 공동 목표를 토의하기 위해 한미 간 고위급회담을 개최한다.



이승만의 승리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뿐만 아니라 경제원조와 한국군 증강까지 얻어냈다. 그것도 전혀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냈다. 대한민국의 희망이자 생존인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이제 시간문제가 됐다. 2년간 미국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국제적 외톨이를 감내하며 미국을 압박해 승리했다. 로버트슨 특사 일행은 7월 12일 한국을 떠났다. 이때 서울과 워싱턴에서는 이승만-로버트슨 회담 결과를 발표했다. 이승만이 그토록 갈망하던 미국과의 ‘동맹’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8월 4일, 조약체결을 위해 덜레스 국무장관이 8명의 고위사절들을 대동하고 방한해 한국 대표와 방위조약에 대한 내용을 검토했다. 그때 이승만은 덜레스에게 “한국은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으며, 소련과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는 한 진정한 휴전이나 평화는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한국이 도움을 요청할 유일한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은 또 “한국의 운명은 세계적 문제이며, 한국이 공산화되면 다른 나라들도 곧 공산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약내용에 대한 검토가 끝나자, 1953년 8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이 중앙청에서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했고, 그해 10월 1일 워싱턴에서 양국 외무장관이 정식으로 서명했다.



10개 사단 추가신설 등 한국군 증강도 얻어내



한미동맹이 시작됐으나 발효까지에는 아직 절차가 남아 있었다. 양국 국회의 비준을 받아야 했다. 먼저 한국 국회가 1954년 1월 15일에, 그리고 미 상원외교위원회가 1954년 1월 19일에 “대외적인 무력공격이 있을 때에만 상호 원조할 책무를 갖는다는 조항을 첨가한다”는 조건부로 가결했다. 이로부터 1주일 뒤인 1월 26일, 미 상원이 비준했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인 비준서 교환이 양국의 입장차이로 연기됐다. 원래 비준서 교환은 1954년 3월 28일 하려 했으나, 이승만이 즉각적인 군사력 증강을 요구함에 따라 미국이 연기했다. 비준서 교환은 그해 11월 17일 이뤄졌다. 이로써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정식으로 발효됐다.


이날 양국은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합의의사록에도 조인했다. 합의의사록에는 미국이 한국에 1955 회계연도에 4억2000만 달러의 군사원조와 2억8000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하고, 10개 예비사단의 추가 신설과 79척의 군함, 그리고 약 100대의 제트 전투기를 제공한다고 했다.


한국은 미국의 지원조건에 “유엔군사령부가 한국 방위에 책임을 부담하는 동안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의 작전지휘권하에 둔다”고 합의했다.


합의의사록의 조인으로 한국은 육군 66만1000명, 해군 1만5000명, 해병대 2만7500명, 공군 1만6500명 등 72만명의 상비군을 유지하게 됐다. 이로써 이승만은 1949년 주한미군 철수를 전후해 미국에 끈질기게 요구했던 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 증강의 실현을 보게 됐다. 이승만의 오랜 꿈이 실현됐다.


이로써 한미동맹이 그 ‘거보(巨步)’를 내딛게 됐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났다. 한국은 놀랄 만큼 발전했고, 미국은 그런 한국을 “안보적·경제적 우등생”이라며 치켜세웠다. 한미동맹을 있게 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한미 양국 모두의 승리였다. 한미동맹 60년의 쾌거였다. 그 중심에는 대한민국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군사적 안보가 정치적 민주주의나 경제적 발전보다도 우선돼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위대한 지도자’의 ‘위대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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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승만은 스탈린의 소련이 제2차 대전에 승전국으로 참여함에 따라 나타나는 국제질서의 성격을 이해하고 소련 공산제국주의의 본질을 꿰뚫으며 이에 대한 미국과 세계의 대응을 선구자적으로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의 세기적 정치적 식견과 노선은 결국 동유럽의 소비에트화와 중국 공산화를 포함한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과 수많은 희생, 그리고 대한민국의 분단과 한국전쟁(6.25)을 겪고서야 확인되었고 이승만이 건국한 대한민국의 성공 역사로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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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 김일성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1950년 6.25 남침 직후 서울 시내에 뿌려진 김일성의 호소문, 출처: "꽃피는 산하-6.25의 흔적을 찾아서")








[ .....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 ]



다물칼럼/ 내가 본 6.25 당시의 인민재판


노희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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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민군은 산 속으로 숨었을 뿐 철수한 것이 아니었다. 동네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마치 테러 직전의 음산한 기분 같은 그런 것이었다. 인민군은 보이지 않았지만 동네 빨갱이들은 더 기승을 부리고 다녔다. 붉은 완장을 찬 대 여섯 명의 빨갱이들이 우리 집에 쳐들어와 온 집을 죽창으로 쑤시며 아버지를 내놓으라고 을러대는 장면이 지금도 눈에 또렷하다.



며칠 뒤에는 인민재판을 한답시고 동네 한 가운의 밭으로 다 모이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집에 남고 할머니만 갔는데 나는 몰래 따라갔다.


옥수수 밭 한 가운데서 벌어진 인민재판은 다름 아닌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말뚝에 묶인 채 서 있는 누군지 모를 사람을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나는 무서워 옴짝달싹 못하고 숨어 있다가 집으로 도망쳐왔다. 방 안에 들어가서도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한 채 숨만 할딱거리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채근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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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우리 동네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밝은 공기가 감돌았다. 인민군이 완전히 물러갔다는 얘기가 한 바퀴 돌고나서야 사람들은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서천읍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사람들은 또 공포에 질려 있었다. 장에 갔다 온 사람의 말로는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읍내 유지들을 교회당에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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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사람을 일렬로 운동장에 뉘어놓은 다음 ......

.... 일렬로 죽은 사람을 밟고 가도록 하였다....... ]



[ ..... 이 참혹한 현장에는 그 가족들도 다 참석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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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50년 6·25를 맞았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으로 기억된다.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나는 전과 다름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모든 것이 평화롭기만 하였다.


그런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며칠 있으면 신대초등학교(예산군 광시면 신대리 소재)에서 연극공연이 있으니 우리 학교에서도 모두 다 참가해야 한다고 하셨으며 몇 학생을 모아 음악 연습도 시키셨다.


그때 나도 그중에 끼게 되었으며 며칠간은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으며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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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찌는 듯한 더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연극을 보러 간다는 기쁨에 그런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드디어 목적지 운동장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으며 정문을 통하여 일렬로 순서 있게 들어갔다. 나는 우측 제일 앞줄에서 두 번째 줄에 자리하여 연극을 보기에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을까. 넓은 운동장은 각 동네에서 모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이제 조금 후에는 기대하는 연극이 시작되겠지, 초조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기다리며…. 조금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연극을 하려면 그럴 듯한 무대가 있고 무대가 있으면 주위에는 그림이나 연극에 필요한 시설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교단 위에는 무명치마 저고리를 입은 여인 서너 명이 앉아 있었고 교단 아래쪽에는 젊은 청년 두서너 명이 서 있을 뿐이다. 운동장에는 각 동네에서 모인 사람들로 꽉 차 있건만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흐르고 잠시 후, 젊은 청년 한 사람이 종이로 말아 접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누군가를 호명하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호명된 사람이 관중을 헤치고 교단 앞으로 나왔다.


젊은 청년이 종이로 말아 접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이 사람을 죽여야 옳소, 살려야 옳소』하고 묻는다.


넓은 운동장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8월의 뜨거운 태양은 작렬하건만…. 지금 여기는 시베리아의 혹독한 한파가 몰아닥친 듯 누구 하나 살려야 옳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민재판



아…, 이럴 수가. 이것이 인민재판이란 말인가! 호명된 사람을 교단 앞 운동장에 무릎 꿇리고 어깨 오른쪽, 왼쪽을 사정없이 몽둥이로 내려친다. 참혹한 현장. 총으로 죽이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몽둥이로 사람을 패 죽이는 현장 .….


나는 몸서리가 쳐지고 내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있었건만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이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보기 위해 나는 지난밤 잠도 설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단 말인가.

이 끔찍한 현장을 피하여 도망이라도 하였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었다. 운동장 주위에는 인민군이 총을 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살육은 계속되고 죽은 사람을 한쪽으로 밀어 놓는다.


죽은 사람 가운데는 설죽어서 꿈틀거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단상에 앉아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무명치마 저고리의 여인이 쏜살같이 내려와 설죽은 사람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욕설을 퍼부으며 다시 끌어내어 죽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잊었고, 떨어야만 했다.


도중에는 도망가다 잡힌 사람들도 있었는데(2~3명으로 기억됨) 그 사람들은 포승줄로 결박하여 무대앞에 무릎을 꿇려 놓았다. 그날 저녁 시냇가 모래사장에 생매장되었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일인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8월의 긴긴 낮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연극은 계속되고 나는 친구의 손을 잡고 그저 떨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우리 아랫마을에 사는 구장 어른이 호명된 것이다. 그 어른이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먼저와 똑같은 방법으로 어깨 우측과 좌측을 사정없이 내려친다. 순간 연세가 높으신 구장 어른이 물구나무서듯 거꾸러지면서 호주머니에서 옥수수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연극을 보시면서 간식으로 드시려고 삶은 옥수수 몇 개를 호주머니에 넣고 오신 것이다.



아― 이럴 수가. 몽둥이를 든 젊은 사람의 다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살려줄 사람들인가. 발길질을 하며 다시 몽둥이로 사정없이 패 죽인 것이다. 이 참혹한 현장에는 그 가족들도 다 참석했다.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한 그 가족들은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연극은 계속되었고 8월의 긴긴 해도 서산을 넘을 무렵 그 끔찍한 연극도 막을 내렸다.

죽은 사람을 일렬로 운동장에 뉘어놓은 다음 맨 우측렬부터 일렬로 죽은 사람을 밟고 가도록 하였다. 물론 몽둥이를 들고 직접 사람을 죽인 장본인이 대열을 지켜본다. 한 사람이라도 건너뛰면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



나도 순서가 되어 죽은 자를 밟고 지나가는데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명치 부위는 더욱 더 아파 왔다. 엉겁결에 한 사람을 건너뛰어 다음 사람의 정갱이 부위를 밟는 순간 뒤에서 몽둥이를 든 사람이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너무도 무서웠고 하루 종일 떨고만 있었기에….



9·28 수복의 감격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들판을 지나 서낭당 고개를 넘어야 했다. 10여 리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나는 어떻게 집에 왔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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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0910&C_CC=AZ

6.25 手記/초등학생이 본 인민재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2> 휘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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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놈은 일부러 죽을 자리 찾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옮겨간 지 며칠 안돼서 동네에 두 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하나는 나 다니던 산정국민학교의 유명한 공산주의자 박선생의 시국강연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날 그 동네출신 전직 경찰관에 대한 인민재판이었다.



동네방죽 옆에 있는 너른 마당에서 박선생 강연이 먼저 열렸다. 한창 더울 때인데도 박선생은 검은 중절모에 검은 양복을 반듯이 차려입고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피를 토하듯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영용한…영웅적인…위대한…쓸어버립시다…만세, 만만세…

이런 단어들밖엔 기억이 없다.

그리고는 박수, 또 박수….



인민재판은 끔찍했다. 어린 나에겐 잘 이해 안되는 논고, 동의, 동의의 함성이 지나고 죽창으로 처형을 할 차례인데 아무도 나서질 않는다. 피고의 얼굴은 백짓장 단계를 지나 송장모냥 시커멨다.


한 사람이 불쑥 앞에 나섰다.

술에 취한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요렇게만 하씨요, 죽창을 저놈 아랫뱃대기에다 요렇게 대놓고 눈을 질끈 감고 기합을 준단 말이씨! 요렇게! 야아아앗!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내빼버렸다. 도망가는 내 뒷등어리에 갑자기 솟아난 네 개의 눈동자에는 모두들 눈을 질끈 감고 죽창을 피고의 아랫배에 갖다대고 야아아앗! 기합을 넣고 힘을 주는 모습이 선명하게, 붉은 피 번지듯 선명하게 비쳐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인민재판의 실상을 꼭 눈으로 본것처럼 기억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천길 구덩이 속에서 솟아오른 도철의 얼굴들이었다. 사람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실제로 본 것이 아니다.

나처럼 방상씨(方相氏)의 네 눈이 상상으로 본 것. 그것이 인민재판이다.

그것을 실제로 본 사람들은 다 죽었다. 혼이 죽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보고 나서도 혼이 살아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렇다.

그것은 죽임이 아니라 산자에 대한 검은 저주였다.









[ ..... 인민재판을 거쳐 죽창이나 칼·낫과 같은 원시적 무기로 난도질하여 처형하거나 고문 및 학살을 ........ ]



[ ..... 반동분자로 낙인찍히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친척까지 몰살 ........ ]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특집]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 및 左翼측의 민간인 학살 행위


학살당한 민간인 총 122,799명, 납북자 수 84,532명




Written by. 김필재 2005-09-05



6.25 전쟁당시 북한 인민군과 좌익(左翼)측의 학살 유형은 주로 비무장한 적(敵)에 대한 대량의 보복 처벌이었다. 그 형태는 대개 '인민재판' 혹은 '처형'의 형태를 취했다. 특히 인민군 점령지역에서는 인민군의 전폭적 후원을 받은 지방 좌익들이 활개치면서 우익인사 및 그 가족들을 인민재판을 거쳐 죽창이나 칼·낫과 같은 원시적 무기로 난도질하여 처형하거나 고문 및 학살을 자행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경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경찰이나 군인 그리고 이들의 가족들을 체포해 그 자리에서 인민재판에 회부했으며, 체포를 거부할 시에는 즉결처형을 했다. 인민군은 공무원, 군, 경찰, 학자 등 소위 인텔리 계층을 최우선 대상으로 학살했다. 그 대상에는 부녀자와 어린이들까지 대거 포함되었고, 반동분자로 낙인찍히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친척까지 몰살 당했다.



1950년 9월 20일 김일성은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살려둔 수감인사들에 대한 '제거' 조치를 전체 점령지역의 행정기구에 하달했다. 후송을 하되, 후송 곤란시에는 즉결처치하라는 것이 주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장 먹을 군량미도 다 떨어져가는 마당에 어떤 인민군이 우익을 먹여가며 재워가며 후송하겠는가. 이것은 사실상 '전면적 학살'을 지시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학살 당한 민간인 총 122,799명, 납북자 총 84,532명



전남에서도 800여 명의 양민이 무참하게 학살당했으며, 전북 무안에서는 퇴각하는 인민군이 주민 80명을 묶어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은 후 태워죽이기도 했다. 목포시의 경우 목포시 연동의 미곡 창고에서 300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되었으며, 전남 임자도의 경우 전 주민의 절반 이상이 인민군과 지방 좌익에 의해 처형됐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6·25 사변 피살자 명부'(공보처 통계국. 작성일 1952년 3월31일)에는 59,964명의 피살자 명단이 실려 있다. 이 명부는 범례(凡例)에 "6·25 사변 중 공무원 및 일반인이 잔인무도한 괴뢰도당에 피살당한 상황을 조사 편찬하였다"면서, 대상을 "군경(軍警)을 제외한 비(非)전투자에 한하였다"고 밝혀, 인민군 등 좌익에 의해 피살된 사람들의 명단만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라남도' 지역 피살자만 43,511명 (전체의 72.6%)



명부에는 5만9964명의 피살자 가운데 전남 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라북도(5,603명), 충청남도(3,680명), 경기도(2,536명), 서울시(1,383명), 강원도(1,216명) 順이다. 그 외 경상남도 689명, 충청북도 633명, 경상북도 628명, 제주도 23명, 철도경찰 62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됐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남자가 44,008명, 여자가 15,956명이다.


여성 피살자 15,956명 가운데 1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다.



영광군 인근 지역의 피해도 컸다. 전북 지역 피살자 5,603명 중 2,364명이 피살된 고창은 행정구역은 전북에 속해 있지만 영광과 이웃해 있는 지역이다. 전남 지역에서도 영광과 이웃한 郡인 나주(3,596명), 장성(4,306명), 함평(1,954명) 등에서 피살자가 많았고 영암 지역에서도 7,175명이 피살됐다.



이외에도 6.25 전쟁 당시 소위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가장 큰 피해자집단 중 하나는 종교인들이었다.


지금까지 정리된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6·25 당시 인민군과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학살당한 목사·신부·장로·수녀들은 신원이 밝혀진 사람만 174명에 달한다. 또한 인민군이 퇴각하며 납북된 종교인들도 184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남 영암읍 교회사건 등 3개월 이하의 인공치하 동안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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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평양 칠골리에서만 2,500여명 학살



한편 미군의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자 인민군은 북으로 후퇴하면서 북한 지역에서도 숱한 학살극을 벌였다. 김일성은 6.25남침 때에 북한지역에서 이른바 북한 내 불순분자 색출을 모토로 '예비검속'(豫備檢束)을 했는데, 이들에 대한 성분조사는 악명높은 '정치보위부'에서 실시했다. 김일성은 미군이 압박해 들어오자마 모조리 이들을 학살했다.


국군과 미군의 평양 입성 후에야 확인된 사실이지만, 김일성의 북한정권은 사람들을 새끼줄로 묶어 총살한 다음 시체를 우물 속이나 창고, 방공호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구체적으로는 평양의 칠골리에서 2,500여명, 평양 승호리 인근의 사도리 뒷산에서 4,000명 정도가 학살당했고, 평양의 기림 공동 묘지터와 용산 공동묘지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함흥에서는 함흥감옥에서 700명, 충령탑 지하실에서 200명, 정치보위부가 있는 3곳의 지하실에서 300명, 덕산의 니켈 광산에서 6,000명, 반룡산 방공굴에서 8,000여 명이 학살당했다. 또한 함흥시에서만 모두 1만 2,000여 명이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학살당했다. (출처: "자유공화국 최후의 날", '지옥유폐 130일-원산 대학살 사건의 전모', 박계주 著)



이처럼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학살을 당한 민간인이 122,799명(‘대한민국통계연감’, 1952년 발간)이고, 납북자 수는 84,532명, 전쟁 중에 죽은 민간인이 244,633명이다.



<자료1. 김일성의 대량 학살 책임을 보여주는 戰時하 김일성의 발언 및 지시>



-"후방을 철옹성같이 다져야 한다. 도피분자, 요언(妖言) 전파 분자와 무자비하게 투쟁하며 밀정 및 파괴분자를 적발, 가차없이 숙청하고 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 (1950년 6월 26일, 방송을 통한 김일성의 지시하달, 출처: "남북한 관계 사료집 22권")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1950년 6.25 남침 직후 서울 시내에 뿌려진 김일성의 호소문,출처: "꽃피는 산하-6.25의 흔적을 찾아서")


-"국군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하고,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인민재판에 부친다"(1950년 6월 30일 포고문, 출처: "정치범은 자수하라"와 "반동분자 처리지침")


-"숨어 있는 반동도배들이 자수하기를 기다리면서, 그 반동분자들과 투쟁하지 않는 경향이 당일꾼들에게 만연되고 있는 현상은 극렬히 비판해야 한다." (1951년 1월 21일, "적에게 일시 강점 당하였던 지역에서의 반동단체에 가입하였던 자들을 처리함에 관하여"라는 군사위원회의 결정 3개항을 설명하면서)


-"악질반동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입니다." (195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대회에서 진술한 김일성 동지의 보고/”한반도 분단의 재인식”-신일철 著)




<자료 2. 남한 지역에서 발생한 북한군 양민 학살 현황>


(출처: 공보처 통계국 '6.25 사변 민간 피해 조사표'. 단위 : 명)


지역 사망 학살 납치
서울 29,688 8,800 20,738
경기 62,621 7,511 16,057
충북 24,320 3,409 6,312
충남 23,707 5,562 10,022
전북 40,462 14,216 7,210
전남 14,193 69,787 4,171
경북 35,485 6,609 7,534
경남 19,963 6,099 1,841
강원 17,122 6,825 10,528

총계 사망-244,663 학살-28,945 납치-84,532
(교전이 직접 벌어지지 아니한 제주는 제외)




<자료 3. 북한지역에서 발생한 북한군 양민 학살>


아래는 주로 UN군의 북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인민군 주력부대가 퇴각하며 발생한 학살이다.


1. 함남 원산(元山)학살


- 발생장소 : 원산시 시내, 신풍리 여왕산, 원산 앞바다, 원산인민교화소
- 방식 : 4명 1개조로 묶어 방공호에 집어넣고 집단총격으로 사살
- 희생자 수 : 1,700여명


2. 함남 함흥학살


- 발생장소 : 함흥인민교화소, 충령탑 지하실, 정치보위부 지하실, 함흥북쪽 덕산니켈광산 반용산
방공호
- 방식 : 집단 무차별 총살, 방공호의 경우 폭사, 우물 생매장, 투석
- 희생자 수 : 12,000여명 (납치자, 실종자 포함되지 않은 수임)


3. 강원 고성(高城) 학살


- 발생장소 : 교외 저수지
- 방식 : 저수지로 몰아넣은 후 폭사
- 희생자 수 : 800명


4. 함남 영흥(永興) 학살


- 발생장소 : 영흥국민학교 운동장, 영흥 방공호
- 방식 : 무차별 난사
- 희생자 수 : 1,520명


5. 함남 순천(順川) 학살


- 발생장소 : 순천 북서쪽 터널
- 방식 : 무차별 난사
- 희생자 수 : 200명


6. 함남 신고산(新高山) 천주교도 학살

- 발생장소 : 인근 과수원(사과밭)
- 방식 : 장작 몽둥이로 집단 가격 후 살아남은 자는 총살
- 희생자 수 : 190명


7. 황해 해주(海州) 학살


- 발생장소 : 해주형무소 등
- 방식 : 독살, 해주지역 우물에 집단 생매장 후 돌로 무차별 가격, 소사(불 태워 죽임)
- 희생자 수 : 아이 업은 부녀자들 포함 1,200여명 (이 학살은 종군기자들에 의해 UN에 보고됨)


8. 함북 갑산군(甲山郡) 학살


- 발생장소 : 양유리 줄버드나무 밑, 부흥리 굴, 지경리 느티나무 밑, 읍내 우물 다수
- 방식 : 총살, 우물에 집단 생매장
- 희생자 수 : 420명


9. 함남 고원군(高原郡) 학살


- 발생장소 : 운곡면 차탄 다리밑, 관평역과 흑토령 중간 저지대, 성내리 뒷산 공동묘지
- 방식 : 무차별 총살
- 희생자 수 : 800명


10. 황해 수안군 학살


- 발생장소 : 운곡면 차탄 다리밑, 관평역과 흑토령 중간 저지대, 성내리 뒷산 공동묘지
- 방식 : 무차별 총살
- 희생자 수 : 1,100명
(konas)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7199









『자꾸 와서 쳐라! 매일 와서 폭격을 해야 한다니까!』


죽음을 싣고 오는 폭격기를 반갑게 기다리는 북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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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타의에 의해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해방된 지 5년, 공산 치하 북한에서 공산 교육을 받아야 했다.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계급은 있어서 안되며 全세계 인간은 평등해야 하며 부르주아를 타도하고 무산계급의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공산당사를 줄줄 외우도록 공부했었다. 그러나 온 누리가 빨갛고 그 속에서 배운 것이 비록 마르크스 레닌의 유물사관이었다고는 하나, 이론과 현실의 모순성을 직접 보고 느꼈기에 결코 속속들이 붉게 물들 수 없었다. 죽음을 무릅쓴 많은 사람들이 38선을 넘기 시작했다. 북한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남한에 의한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6·25 남침으로 공산군은 오히려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귀를 기울였다.

『어느 부대 어디까지 진군! 무슨 부대 어느 곳을 점령!』

의기양양한 인민군의 전황을 들으며 애꿎은 라디오만 두들긴다.


『북쪽만 가지고 모자라 남쪽까지 빨갱이를 만들겠단 말인가』

무더위 속에 라디오를 솜이불 안에 들여놓고 잡음 섞인 남한 방송을 초조한 마음으로 몰래 도청한다.

『어느 부대 어디까지 후퇴. 무슨 부대 무사히 어느 지점까지 철수!』

맥없이 밀려가는 남쪽 뉴스를 들으며 다시금 라디오를 두들긴다.

『도대체 남한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무섭고 억압된 북한 사정을 상상이나 하는지』



자꾸만 밀려가는 정세에 실망하며 그래도 매일같이 날아와 폭탄을 투하하는 남한 비행기를 후련한 마음으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자꾸 와서 쳐라! 매일 와서 폭격을 해야 한다니까!』


죽음을 싣고 오는 폭격기를 반갑게 기다리는 북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제트기 편대의 하늘을 찢는 소리, 공중을 선회하며 차례 차례 목표를 향해 급강하, 로켓 포탄의 작렬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몇 번인가 반복하고 전투기 날아가면 이윽고 고공비행의 폭격기 소리와 함께 점선을 그으며 줄지어 폭탄이 떨어진다. 기분 나쁜 바람과 함께 대지가 진동한다.



무섭고도 아름다운 야간 공중 폭격



밤은 밤대로 말로만 듣던 조명탄이 캄캄한 밤하늘에 보름달같이 둥글게 수없이 공중에 걸린다. 낮보다 더 밝은 밤에 공중 폭격이 시작된다. 정말 무서웠다.


그러나 꿈많던 소녀 시절이기에 둥근 조명탄이 아름다운 만월같이 터지는 폭탄의 불똥이 무수한 반짝이는 별들처럼 공포 속에 순간의 착각을 일으킨다.


9·28 수복. 마음이 떨린다. 戰勢(전세)가 호전되기만 바라며 차츰 치열해가는 전쟁, 그리고 폭격 속에 국군과 UN군의 전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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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접어들었다. 국군이 입성했다. 태극기를 들고 어른 아이 목청 돋워 만세를 부른다. 탱크 소리 요란하고 줄 잇는 군용트럭 그 양옆을 땀에 젖은 군복에 총부리를 겨누고 北으로 전진한다.


젊은 국군장병들과 UN병사들이 여유 있는 웃음 속에 윙크를 하며 손을 흔든다.
쫓겨가는 인민군, 전진해가는 국군 다 같은 우리네 귀한 아들들인데 그들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눈과 생각이 평등하지 않았다. 인민군을 미움의 눈으로 바라보고 국군에겐 힘찬 박수를 보냈다.


공산체제를 싫어하고 자유를 갈망하던 5년 간의 억압 속에서의 나온 마음의 발로였다. 겁먹고 쫓기는 인민군, 뒤쫓는 국군. 同族(동족)끼리의 이 가슴 아픈 현실이 UN군의 진격으로 통일로 이어지길 바랐던 희망과 기쁨도 잠시, 북 치고 피리 불며 압록강을 건너 중공군이 물 밀듯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우리 북한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전세는 다시 바뀌었다. 추위와 피로에 지친 국군과 UN군이 묵묵히 철수하기 시작했고 인민군은 또다시 총부리를 겨누고….



아버지 따라 대동강 다리 건너다


찬바람 부는 겨울날 길을 메우며 피난민 대열이 이어졌다.

『우리도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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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도 우리는 비행기가 더 자주 뜨기를, 바다 쪽으로부터 들리는 함포사격이 더 치열해지기를 기다리고 거기 희망을 걸었다 ....... ]



[ ..... 우리 세대 대부분의 평범한 노인들 공통의 정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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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공포의 나날이 계속됐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미군 비행기가 서울 상공에 뜨기 시작했다. 굶주림과 공포정치의 무서움을 그 여름의 혹서는 더욱 잔인하게 달구었고 혹서가 누그러질 무렵 서울 상공은 밤낮없이 미군 폭격기 차지였다. 오폭도 잦아 민가 밀집 지역이 불바다가 되기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을 구하러 교외로 빠져나가던 민간인들이 머리 꼭대기까지 하강한 전투기의 무차별 기총소사를 맞고 잔혹하게 살해되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아마 따발총 맞고 죽은 수효보다 기총소사 맞고 희생된 민간인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비행기가 더 자주 뜨기를, 바다 쪽으로부터 들리는 함포사격이 더 치열해지기를 기다리고 거기 희망을 걸었다.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열렬하게 미국의 병력이 이기라고 응원한 것은 따발총보다는 비행기가 더 강해 보이니까 이왕이면 강자 편에 붙으려는 비겁한 마음에서였을까. 아니다. 폭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학정(虐政)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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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라기보다는 꽃다운 나이에 6.25를 겪은 우리 세대 대부분의 평범한 노인들 공통의 정서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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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620667

[중앙시평] 초여름 망필(妄筆)
[중앙일보] 입력 2005.06.21

박완서 소설가








1950.12.4. 평양



[ ...... 모여드는 남하 피난민의 수는 무수하였는바 그들은 파괴된 가교를 드럼통과 부서진 가교의 木片 등으로 얽어매가지고 건너는 것이었다. ........


...... 도강하는 시민들을 중공군 게릴라부대로 오인하고 다시 기총탄을 내려 부어서 도강 중도에 쓰러지는 시민도 있었으나 쓰러지는 사람의 시체를 넘으면서도 도강하는 시민들 .......


..... 평양에서 남쪽으로 .... 연도는 약 50만으로 추측되는 피난민으로 덮여 ....... ]




유엔군 철수 직후의 평양 전경



조선일보

1950년 12월 13일



[본사 특파원 全東天 記] 12월 5일 유엔군 및 국군의 전략적 철수로 적의 손에 떨어지기 직전의 최후의 평양은 폭음과 화염 그리고 그 충천하는 흑연 속에서 도강하여 남하하려는 시민들의 아우성으로 뒤덮여 있었다. 일반시민에 대한 피난 권고는 12월 3일에 내려져서 대부분의 시민은 4일까지 피난을 하였으나, 4일 저녁 대동강의 가교가 최후 철수부대의 손으로 끊긴 다음에도 이 가교로 모여드는 남하 피난민의 수는 무수하였는바 그들은 파괴된 가교를 드럼통과 부서진 가교의 木片 등으로 얽어매가지고 건너는 것이었다.


이렇게 피난민들이 건너는 동안 하오 3시가 되자 유엔군 전투기들은 모란봉 근처의 중공군 게릴라부대를 기총 소사한 다음, 도강하는 시민들을 중공군 게릴라부대로 오인하고 다시 기총탄을 내려 부어서 도강 중도에 쓰러지는 시민도 있었으나 쓰러지는 사람의 시체를 넘으면서도 도강하는 시민들의 광경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등을 이들 평양시민들이 죽음으로써 찾는 광경이기도 하였고, 괴뢰집단의 행악이 그들에게 얼마나 심독하였는가를 실증하는 광경이기도 하였다.


전투기들은 계속하여 시내의 군사시설 비행장 등을 폭격하여 피난민들이 寺洞 근방의 언덕에 올랐을 때는 맹렬한 화염이 평양을 뒤덮었는데 때마침 저녁노을이 화염에 반사하여 그 처절한 평양의 최후는 평양을 떠나는 시민들의 발을 몇 번이고 멈추게 하고 눈물을 뿌리게 하였다. 허나 이렇게 평양을 바라보며 눈물 뿌리는 시민들도 국군과 유엔군의 최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지극히 마음 든든한 점이었다. 대동강의 가교가 끊길 때까지 강을 건너지 못한 피난민들은 강서·용강쪽으로 흘러내려갔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진남포·광량만을 경유해서 해로로 인천에 상륙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중화에서부터 신막에 이르는 300리 길의 연도는 약 50만으로 추측되는 피난민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들 일렬종대의 피난민의 대군은 하루 60리 내지 70리의 평균속도로 남하하고 있었으며, 이 피난민의 수는 그들이 한 마을 한 시정을 지날수록 늘어만 가고 있었다. 그들의 이동속도로 추측하여 오는 15일이면 그 선두부대는 서울에 들어올 것으로 보이는 바 불에 뒤덮인 자기 집을 돌보지 않고 최후의 평양에서 죽음으로써 대한민국을 찾아 남하하는 그들의 피난행렬은 정의의 승리를 시위하는 인민의 행렬 같기도 하였다.


조선일보 1950년 12월 13일









[ ..... 그러나 조씨가 복원한 ‘1952년 여름 부산’은 다르다. 대립의 중심축은 이승만과 미국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을 등에 업은 이승만과 미국을 등에 업은 야당의 대립이다. ........ ]



[ ..... 서둘러 휴전하려는 미국과 이를 방해하며 궁극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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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등에서 정치부기자로 일했던 원로 언론인 조용중(74)씨는 기자의 필치로, 그러나 52년이라는 시간의 거리를 두고서 ‘1952년 여름 부산’을 복원했다. 그동안 부산 정치 파동을 바라보는 시각은 단순했다. 정권 연장욕에 눈먼 노독재자 이승만의 폭거와 그에 항거했으나 무력하게 당해야 했던 야당의 대립구도가 그것이다. 독재와 민주주의의 이분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씨가 복원한 ‘1952년 여름 부산’은 다르다. 대립의 중심축은 이승만과 미국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을 등에 업은 이승만과 미국을 등에 업은 야당의 대립이다. 이승만이 국민을 등에 업었다는 말은 당시 이승만의 개헌 시도는 다름아닌 직선제였기 때문이다.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만 국회에서는 지지받지 못하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무리한 개헌 시도를 해야 했던 것이다.


중심축을 이승만과 야당에서 이승만과 미국으로 바꾸는 순간 핵심 쟁점도 달라진다. 정권 연장 음모보다는 휴전 여부를 둘러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이 훨씬 본질적이다. 하긴 이승만과 야당의 대립으로 당시 사건을 풀게 되면 그 시절이 전시(戰時)였다는 엄중한 사실마저 배제된다.



조씨는 이번 작업을 위해 그동안 비밀 해제된 미국과 영국측의 방대한 자료들도 함께 조사를 했다. 서둘러 휴전하려는 미국과 이를 방해하며 궁극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려 한 이승만의 벼랑 끝 신경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심지어 이승만을 무력으로 축출하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전쟁을 끝내려는 미국에 의지해 권력을 잡으려는 야당 지도자들의 행태도 실증적 자료를 통해 그대로 보여준다. 그 동안 피해자라는 이유로 가혹한 평가를 피하려 했던 학계의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국은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해 이승만을 눌러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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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7월 - 8월 중순 중공군 제4야전군 18개사단 25만 여명으로 동북 변방군 편성, 만주일대 배치

1950.10.7. 인민해방군 4만여 티베트 침공

1950.10.19. 유엔군 평양 점령. 이날 밤 중공군 압록강 건너기 시작

1950.10.25. 중공군 공세 시작
1950.10.26. 6사단 7연대 압록강 초산 도달

1950.12.4. 평양철수
1950.12.7. 흥남철수작전 시작.








1950.12.20. 신문기자 총궐기대회


[ ...... 적색제국주의의 살육과 공포와 노예화정책을 분쇄하고 조국과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총궐기 ........ ]


신문기자 총궐기대회 개최


동아일보 1950년 12월 21일



오랑캐가 쳐들어오고 있다. 조국은 지금 위기에 직면하였으니 만주벌판에서 꿈틀거리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이 돼지의 무리가 삼천리 강토를 짓밟고 3천만 민족의 앞가슴에 청룡도를 내밀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당 태종과 수 양제의 백만 침략군을 무찌른 선조의 영광과 5천년 불패의 역사가 연면히 계승되어 우리의 혈관을 줄기차게 흐르는 조국애로 총단결 총궐기하여 손에 손에 정의의 총칼을 들자!


오랑캐를 무찌르려는 민족의 기백은 이제 전 민족을 궐기시켰으니 일찍이 민주주의 생활의 자유와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싸워온 우리 한국의 전 언론인도 위기에 대한 인식을 더욱 새롭게 하여 전선에 궐기할 때는 왔다.


언론의 자유가 박탈된 공산당 전제하에서는 늘 헐벗음과 굶주림과 노예화의 길 밖에 없으니 우리는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서도 이 空前絶後의 위기를 극복하여 조국과 민족의 영예를 보존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에 한국의 전 언론인은 궐기하였으니 어제 20일 시공관에서 열린 신문기자 총궐기대회는 자유옹호의 굳은 결의 있음을 전 세계에 선포하는 선언을 채택하였으며, 유엔사무총장, 미국 대통령, 유엔군총사령관 및 일선 장병에게 각각 별항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었다. 이날 오전 10시 조금 지나서 계획된 신문기자 총궐기대회는 순서에 따라 다음과 같은 회순을 원만히 진행시켰다.



▵개회 ▵주악(서울시 음악대) ▵묵념(전몰 장병에게) ▵개회사:서울신문 吳宗權 ▵격려사:국방장관(張차관 대독), 공보처장(李차장 대독) ▵선언 及 메시지:1. 선언(동아일보, 金三奎), 1. 유엔총회에(조선일보, 成仁基), 2. 미 대통령에(연합신문, 林元圭), 3. 맥원수에(경향신문, 민재정), 4. 일선장병에(승리일보, 具常) ▵기념강연(정훈국장 이선근) ▵격려사(시경국장 李益興), 동(유엔 공보관 메레델) ▵주악 ▵만세삼창



▹선언문



이 나라의 민주주의적 자유를 수호하고 확립하는 것을 유일한 사명으로 하는 우리 언론인 일동은 6·25사변을 계기로 이 자유가 얼마나 귀중한 가를 더욱 통감하였고 중공의 도발적인 참전에 의하여 전 인류가 막대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 이때에 인류의 운명을 살육과 공포와 노예의 함정으로부터 구출하는 유일한 길은 민주주의적 자유를 단연코 사수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지난 10월 하순경 중공이 월경 침입하려 할 때에 유엔과 미국은 국경지대에 있는 중공의 권익을 존중하겠다고 언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법한 침입으로 허다한 살육을 감행하였고 한국전쟁을 국지화하려는 유엔의 기본방침에 의하여 한국정전안이 52대 2의 절대다수로 유엔 총회를 통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견강부회의 요구조건을 고집할 뿐 하등의 반성도 보이지 않음은 적색제국주의의 침략성과 괴뢰성을 노골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기에 추호도 주저하지 않는 바이며 동시에 이러한 평화교란자를 지구상에서 말살해 버리기를 전세계의 민주여론에 호소하는 바이다. 우리는 전세계 민주우방과 더불어 민주주의적 자유를 수호하기에 전력을 다할 것을 굳게 결의하는 한편 대내적으로 군·경민이 뜨거운 동족애에 입각하여 서로서로 얽히고 설켜서 불타는 애국심을 12분으로 발휘하기 위하여 먼저 전 언론인이 사소한 이해와 구구한 소아에 국척함이 없이 대국적 견지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총 단결을 垂範함으로써 衝天의 火柱가 되어야 할 것을 엄숙히 요청하는 바이다. 이것은 언론계 자체의 권위를 위하여서 뿐만이 아니라 민주국가의 권위를 위하기 때문이요, 나아가서는 이러한 성실성과 권위 없이 3천만 동포와 더불어 이 중대한 시국을 돌파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


동지 제군! 적색제국주의의 살육과 공포와 노예화정책을 분쇄하고 조국과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총궐기할 때는 왔다.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동포를 기아와 결핍에서 구출하는 자유를 위하여, 인권과 평화를 위협하는 공포를 제거하기 위한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진실한 보도와 비판으로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위하여 총 궐기할 때는 왔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자유를 수호하는 데 노력과 성의와 정열을 경도하는 것만이 조국과 인류를 현재의 위기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길임을 여기에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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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쟁중에도 언론 검열, 간섭 안해"

鄭晉錫 한국외대 교수, "그는 끝까지 언론자유의 신념을 지켰다"



뉴데일리


“이승만, 끝까지 자유민주언론 신념 지켰다”
鄭晉錫 한국외대 교수 “韓末엔 국제잠각 뛰어난 기자로 활약”
6.25동란 등 국가 위기에서도 검열이나 논조 간섭 전혀 안해


온종림 기자




“이승만 建國대통령은 끝까지 언론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根幹)이라는 신념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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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수는 6.25 전쟁 기간 기사 검열을 실시한다는 공고가 잠시 잇었지만 검열기구를 두거나 제도적으로 운영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국가가 어렵고 혼란할 때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고 야당지가 여론을 주도하는 형국에서도 이 대통령은 신문의 논조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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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 개최


동아일보 1951년 12월 13일



통일 없는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는 12일 상오 10시부터 충무로 광장에서 10시부터 愛協주최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먼저 金一休씨의 개회사가 있은 다음 유엔총회(毛允淑 여사), 릿지웨이 사령관(崔仁順여사), 트루만 대통령(김철수씨)에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대회 결의문을 金賢大씨가 낭독하여 통과하였다. 이어 尹致暎, 白南薰 양씨로부터 휴전회담은 한국분할을 재판시키는 것이므로 전국민이 거족적으로 반대하자는 요지의 궐기사가 있은 다음 대회를 끝마쳤는데, 동 대회에서 결의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한국의 통일과 평화 없는 유엔군의 철수를 반대한다. 중공군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북한괴뢰군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함으로써 한국의 평화가 수립될 것이며 세계의 평화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2. 우리는 38선의 재판인 휴전선을 용인할 수 없다. 백두聖峰에 태극기가 휘날릴 때까지 침략자를 격퇴하고야 말 것을 다시금 맹서한다.


3. 우리는 국토분할과 재침략의 위험성 있는 모든 결정과 우리의 주권과 통일을 침해하는 어떠한 결정에도 결사반대한다.


4. 우리는 약탈과 학살의 대상으로 되어 있는 재이북 700만 동포를 구출하기 위하여 조속한 대책이 있기를 전 자유세계에 호소한다.


5. 우리는 자유통일 신민주주의적 한국을 건설한다는 유엔의 결의를 하루속히 관철하도록 촉진한다.






1953.4.26. 북진통일 국민총궐기대회



[ .....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민들의 힘찬 행렬이 거리를 .......

...... 전시민이 한뭉치가 되어 국민들의 결의를 피력한 것은 저 신탁통치반대대회 이후 처음 .......


...... 백만 시민이 참집 ........ ]




1953.4.27. 경향신문



장! 휴전반대의 의기충천

휴전결사반대 서울시민궐기대회



공산괴뢰들의 6.25남침으로 조국의 강토가 전화속에 휩쓸려 수백만 인민이 죽고 상하였으며 수천만동포가 재산을 잃은 채 거리에서 방황한지 이미 4년이 되었으나 한가지 국토통일 조국독립이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참고 견디며 싸워왔는데 다시 공산침략군과 타협함으로써 휴전회담이라는 일방적인 결정으로 조국은 다시 두동강에 짤리울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휴전을 반대하고 통일 없는 타협을 규탄하는 국민적인 감정은 임시수도 부산을 비롯한 전국방방곡곡에서 폭발되고 있는데 서울에서도 각정당사회단체 주도 아래 26일 오전 10시 반부터 중앙청광장에서 북진통일국민총궐기대회가 열려 휴전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용소슴 치는 북진의 맥박

침략자를 축출 북진통일을 결의



이날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꽃철을 맞아 시민을 불으던 창경원 덕수궁도 문을 굳게 닫고 시내 상가는 자진 철시를 단행 일체의 가무음곡이 정지된 가운데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민들의 힘찬 행렬이 거리를 메웠는데 이같이 전시민이 한뭉치가 되어 국민들의 결의를 피력한 것은 저 신탁통치반대대회 이후 처음 보는 대회이었다. 백만 시민이 참집한 가운데 대회는 김(김일)씨의 사회로 장중한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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