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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부 이승만 2
이승만 2023-09-23 20:45:46 | 조회: 96
1946.4.



[ ...... 운동장 개설 이래 최대 인파인 20만여명이 운집 ........

....... 이승만을 ‘국부(國父)’라는 최고의 존칭으로 소개했다. ........ ]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이승만과 김구

86. 美蘇共委 파동 속에 지방 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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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地方巡廻로 지지기반 강화



이승만의 순회강연회는 독촉국민회 지방조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4월 15일 현재의 독촉국민회 지방조직 현황은 38도선 이남의 144개군 가운데 114개군에 지부가 조직되어 있었고, 회원수는 106만 8,479명에 이르고 있었다고 한다.52)


이승만의 지방순회에는 프란체스카도 동행했다. 첫 방문지는 천안(天安)이었다. 4월 16일 오후에 온양(溫陽)온천에서 일박한 이승만은 이튿날 오전에 천안제일국민학교 교정에 모인 3만여명의 군중 앞에서 50분쯤 감격적인 연설을 했다.53) 18일 오전 11시에 대전(大田) 독촉국민회 주최로 본정(本町) 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영연설회에는 4만여명의 군중이 모였고, 저녁에는 대덕(大德) 군수 주최로 유성(儒城) 온천호텔에서 간담회가 열렸다.54)



굿펠로가 급히 儒城溫泉으로 찾아와



이승만이 대전을 방문하기 직전인 4월 16일과 19일에 이승만 암살을 노린 일당 7명이 대전에서 체포되었다.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범인들은 일제 수류탄과 권총 등을 가지고 있었다.55) 이때부터 경찰은 이승만의 경호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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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후에 이승만의 승용차가 유성온천을 출발하여 경북 김천(金泉)으로 이동할 때에는 연도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열렬히 환영했다. 충북 옥천(沃川)에 도착한 이승만은 옥천국민학교에서 30분 가량 환영 나온 주민들에게 인사말을 했다. 이승만은 영동(永同)과 추풍령(秋風嶺)의 직지사(直持寺)를 거쳐 오후 5시께 김천에 도착했다.59)



地方紙 기자회견 통해 5호 聲明 대응책 제시해



22일 오전 11시에 독촉국민회 주최로 김천 동부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영강연회에는 남녀 학생들과 각 단체 등 군민 4만여명이 모여 이승만을 환영했다. 이승만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미소공위 진행상황 등 정국 정세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다.60)


23일 오전 10시에 김천을 출발한 이승만은 오후 1시쯤 대구 신동 가도에 들어섰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환영하는 시민들에게 이승만은 모자를 흔들어 화답했다. 숙소인 경북 내무부장 관사에 도착한 이승만은 도지사를 비롯한 지방유지와 미국인 지사 등 미군장교들을 접견하고, 해방 기념 식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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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國寺에서는 漢詩도 지어



이튿날 독촉국민회 경북지부 주최로 경북도민 환영대회가 대명동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대회장에는 10만여명의 군중이 운집했으나 대회도중에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이승만의 연설은 중지되고, 대신에 이날 저녁 7시반부터 대구방송국에서 30분가량 방송연설을 했다. 25일 오전 10시에 이승만은 시민들의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경주(慶州)로 향했다.62) 영천(永川)을 지나 오후 2시에 경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승만을 마중하러 나온 사람들로 옛 도읍 경주거리가 메워졌다. 이승만은 불국사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26일 오전 11시부터 경주중학교에서 열린 경주, 영천, 영일(迎日), 울산(蔚山) 4개군 연합환영회에는 5만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승만은 1시간반에 걸친 정열적인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았다.63) 이승만은 불국사에서 이틀밤을 묵으면서 아름다운 한시 한 수를 지었다.


宿泊佛國寺64)

小少旣聞佛國名
登臨此日不勝情.
群山不語前朝事
流水猶傳故國聲.

半月城中春草合
瞻星臺下野花明.
只今四海風塵定
古壘松陰臥戍兵.


불국사에서 묵다


젊어서 들은 이름 불국사
오늘에야 올라 감개를 가누지 못해.
산들은 지난 때 일 말이 없고
흐르는 물만 옛 왕국 소리 전한다.

반월성 안에는 봄풀이 어우러지고
첨성대 밑에는 들꽃이 밝다.
지금은 사해 풍진 다 평정되고
옛 보루 솔 그늘에 수병(戍兵)은 잠들었다.



27일 오전 9시40분에 불국사를 출발한 이승만은 11시에 울산읍에 도착했다. 울산에서는 울산제일국민학교 교정에 1만여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이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울산을 떠나 오후 4시쯤에 동래(東萊)를 통과할 때에는 남녀 학생들과 많은 주민들이 연도에 늘어서서 이승만을 환영했다. 이때에 동래 입구에서 이승만의 암살을 기도한 흉한 1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65) 이승만은 해운대에 도착하여 송도각(松濤閣)호텔에 들었다.




해운대에는 서울에서 민주의원의 백남훈 의원과 윤치영 비서실장이 급히 내려와 있었다. 미소공위 제5호성명과 관련하여 민주의원의 태도를 결정하기 위하여 이승만의 귀경을 종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귀경하지 않고 순회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 대신에 민주의원에는 미소공위 제5호성명에 따른 선서문에 서명하고 미소공위에 참가하라는 ‘친서’를 써서 백남훈에게 주었다. 이승만은 친서에서 신탁통치 문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민주의원이 서명하는 것은 신탁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신탁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토의에 협동한다는 뜻을 표함이니, 그 토의에 참여치 않으면 그 문제가 원만히 타결되기 어려울 것이며 설령 우리가 참가하고도 잘 타협이 못되면 그때에는 우리가 다른 보조를 취하기에 늦지 않을 것이다.”66)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남훈이 가지고 간 ‘이박사 친서’는 신문에도 공개되어 전문이 보도되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서울을 떠나 있으면서도 우익 진영의 최종 정책결정자였다.


같은 날 하지는 선언서에 서명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에는 신탁통치의 찬성 또는 반대의 의견을 발표하는 특전을 보장하되, 선언서에 서명하지 않는 사람은 미소공위의 협의대상에서 제외된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여 ‘이박사 친서’를 뒷받침했다.



“나를 國父라고 불러주니 …”



부산 방문의 성과는 컸다. 환영연설회는 29일 정오에 구덕산 아래의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되었는데, 운동장 개설 이래 최대 인파인 20만여명이 운집했다. 환영회 회장 김철수(金喆壽)의 개회사, 경남도지사 김병규(金秉圭)의 환영사, 부산기독교연합회 합창단의 ‘환영합창’ 등으로 이어지는 대규모의 환영회 행사를 보면서 이승만은 감개무량했다. 주최쪽은 이승만을 ‘국부(國父)’라는 최고의 존칭으로 소개했다. 1911년에 밀행하다시피 하며 기독교 관계자들을 만나고 간 지 30여년 만의 부산 방문이었다.



마이크 앞에 선 이승만은 먼저 “나를 위해서 성대한 환영과 더불어 국부라는 가슴에 넘치는 경어를 주어 눈물이 흐를 듯하다”고 말하고, “지금에 하신 환영사와 환영합창 중에 특히 동감되는 것은 한덩어리로 뭉쳐서 완전한 자주독립을 찾자라는 구절이었고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그 요지도 이것이다”라면서 단결을 역설했다.



이승만이 순회강연에서 역점을 두고 강조한 것은 공산당 비판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산강연이었다. 이승만은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그룹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나는 공산주의와 극렬파들이 나와 정치의견이 다르다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공산당과 극렬파가 하고 있는 것은 인민의 복리를 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지연시키고 자주독립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적으로 보아서 공산당과 과격파들이 하고 있는 것을 들어 말하자면, 그네들은 자본가 타도를 일삼아 부르짖고 있으나 자본과 노동과 토지가 발을 맞춰 가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상업도 공업도 발전할 수 없고 민생도 발전할 수 없다.”


“土地의 無償沒收·無償分配는 반대”


그러면서 이승만은 공산당 그룹이 노동자들에게 동맹파업을 하도록 선동하는 것은 “하루 일 안하면 살아 나가지 못하는 근로대중을 못살게 하는 것이고 국가에 큰 역할을 하는 산업을 파괴시키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국민적인 쟁점이 되어 있는 토지개혁 문제에 대해서도 중론과는 다른 자신의 소신을 분명히 밝혔다.


“일인토지고 조선인토지고 이것을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한다고 하나 이것은 … 국민의 재산소유권을 무시함이니, 장차 우리가 민주정부를 수립할 때에 국법을 제정하야 국민의 생활을 옹호함이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또 전날 밤에 있었던 굿펠로와의 통화에 근거하여 미소공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피력했다.


“가까운 장래에 수립될 임시정부의 진용은 아직 확실치는 않으나 북조선 5, 남조선 8 또는 북조선 3, 남조선 5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여하간 인구로 보아서 북조선보다 남조선이 많으니 임시정부의 진용도 남조선이 많을 듯하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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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州는 9개 군민이 몰려 초만원



이승만은 4월 30일에 동래중학교 교정에 모인 1만여명의 청중에게 강연을 한 다음 마산(馬山)으로 떠났다. 대전에 이어 4월 27일에는 동래 입구에서도 암살범 1명이 체포되었기 때문에 경찰은 이승만의 경호를 더욱 강화했다. 그리하여 이승만이 마산에 도착한 날 저녁에는 경찰 1,000명이 외부에서 투입되었다고 한다.69)



이승만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산시민들은 물론 멀리 남해(南海)와 거제도(巨濟島)에서도 범선을 타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5월 1일 오전 11시에 마산중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영연설회에는 4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이승만을 환영했다. 마산부윤 옥기환(玉麒煥)의 개회사, 미군정장관 매리크 프라이디의 축사가 있었고, 미해병대 800여명이 군악행진을 하여 이채를 띠웠다. 이승만은 연설회를 마친 뒤 오후 3시반에는 배편으로 진해(鎭海)를 시찰했다.70)



5월 2일 오전에 마산을 떠난 이승만은 오후 2시20분께 함안(咸安)에 도착했다. 함안의 가야국민학교 교정에는 읍민은 물론 의령(宜寧) 등 먼 곳에서도 흰 옷을 입은 촌로들이며 색색 옷가지의 부녀자들과 아이들까지 2만여명이 모여들어 조그마한 함안 촌읍은 무슨 큰 잔치나 벌어진 듯했다.



함안을 출발하여 진주(晋州)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고성(固城), 통영(統營), 하동(河東), 산청(山淸) 등 9개 군민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진주 시민들은 집집마다 친척 손님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다.71)


5월 4일 오전 10시에 진주를 출발하여 전라도로 향하던 이승만은 섬진강을 건너기 전에 하동에서 차를 내려 하동국민학교에 준비되어 있는 환영회에 들러 참석자들에게 인사말을 했다. 순천(順天)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반이었다.72)


이튿날 오전 11시에 순천남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영연설회에는 3만여명의 청중이 모였다. 1925년에 《조선일보(朝鮮日報)》기자로 하와이의 태평양회의에 참석했다가 미국에 눌러앉아 이승만의 동지회 일을 도왔던 김양수(金良洙)가 순천군수였고, 1944년에 주미외교위원부 활동에 참가했던 배민수(裵敏洙)는 미군과 같이 귀국하여 순천에서 목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감격적으로 두 사람을 만난 이승만은 이들을 청중에게 소개했다.

오후에 중앙교회에서 열린 이승만환영예배에는 800여명의 신도들이 참가했다. 이승만은 그 자리에서 “3천리강토의 광복을 위하여 생사의 지경이 수십 번이나 있었으나 하나님이 여러분과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까지 이와 같이 건강을 보호하고 우리 동포에게 좋은 독립할 기회를 허락하신 줄 안다. 우리는 이 기회를 잃지 말고 자주독립을 힘쓰고 자유신앙에 노력하자”고 말하고, “공산분자는 독재적 정치로 교회를 일정시대보다 더 구속한다”고 비판했다.73)



6일 오전 8시에 순천을 출발한 이승만은 벌교(筏橋), 보성(寶城), 장흥(長興), 영암(靈巖), 영산포(榮山浦)를 거쳐 목포(木浦)로 이동했다. 벌교를 지날 때에는 그곳 부인회에서 이승만 일행이 그냥 지나가는 것이 섭섭하다고 하여 꿀물을 풀어 가지고 대접했다. 보성에서는 1만여명이 모여 이승만 환영대회를 열었고, 이승만은 그곳에서 기념식수도 했다. 오전 11시20분께에 보성을 출발하여 장흥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쯤이었다. 장흥에서는 장흥국민학교 교정에서 환영회가 열렸다. 목포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40분.74) 8일 오전에 산수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목포환영강연회에는 3만여명의 청중이 모였다.



美蘇共委休會로 歸京 서둘러


이승만은 귀경을 서둘렀다. 교착상태에 있던 미소공위가 이날 무기연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5월 8일 오후 2시에 목포를 출발하여 광주(光州)로 향했다. 도중에 나주(羅州)에 들러 독촉국민회 주최의 환영대회에 참석했다. 환영대회에는 1만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광주에서는 9일 오전 11시에 서정(西町)국민학교 교정에서 5만여명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두 시간에 걸쳐서 환영연설회가 열렸다. 연설회에 이어 오후 2시반에 전남도청 응접실에서 광주지역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을 접견하고,75) 오후 4시에는 기자들을 만났다.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된 것과 관련하여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소련을 비판했다.


“소련인들이 세상의 공론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자기네들의 장래 이해가 어찌될 것을 각오하고 미국대표와 협동해서 순리적으로 … 해결할 줄 알았더니, 그 사람들이 그것을 양해 못하고 또 미국대표들이 좋은 기회를 준 것을 이용하지 못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38도선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단호하게 소련을 비난했다.


“38도선 문제도 소련 사람들이 자의로 우리 민의와 세계 공론을 따라 해결치 못하면 결국은 소련에 대해서도 이롭지 못할 것이니, 우리의 관계로만 아니라 소련관계로 보아도 큰 불행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미 우리는 전 국민의 결심으로 공산당의 제안을 접수치 않기로 하였고, 우리 강토를 단 얼마라도 남에게 양여치 않기로 결심한 만큼 이것을 소련 사람들이 하루바삐 각성하기를 바란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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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0.


[ ...... 김구는 “우리나라에 국부는 이 박사 한 분이면 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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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순회를 하면서 어느 도시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도시 입구에 들어서자 “국부(國父) 김구 선생 환영”이라고 쓴 플래카드가 길을 가로질러 걸려 있었다. 플래카드를 본 김구는 “우리나라에 국부는 이 박사 한 분이면 돼”라면서 수행하는 선우진에게 플래카드를 치우게 말했다. 김구는 평소에도 주위 사람들에게 “초대 대통령은 이 박사가 되어야 한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22) 김구의 이승만에 대한 의식이 이때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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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9.24. 동아일보



철의 장막 38선답사


기자협회시찰대보고
김호진 본사특파원



북조선인민은 남조선정부수립을 기대

이박사 김구 씨는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기자는 동수용소소장의 알선으로 수용소에서 월경상황과 북조선사정을 말하는 동포들의 좌담회를 열기로 하였다.



기자 어데서들 오셨소

김씨 여기 있는 사람들은 북조선 각지에서 왓습니다.


기자 어찌하여 남조선에 오시게 되었오.

윤씨 우선 식량의 배급도 주지 않고 월급이라야 1천5백원밖에 아니 주는데 그것으로는 콩가루도 못 사먹고 밀겨울도 못 사먹습니다. 그래 마른 창자를 견디다 못하야 최후의 결심을 하고 넘어 왔습니다. 또 추방을 당하여 오는 이도 있지요.


기자 남조선에도 식량사정이 대단이 곤난한데.

윤씨 압니다. 그러나 배가 곱하도 마음 편히 굶는 것과 불안속에 마음 조리며 굼는 것은 달으니깐요. 그래 굶어도 마음이나 편히 굴무려고 왓습니다.



이때 기자는 동포들 사이에 끼여 앉어 있는 중국인 두사람을 발견하여


기자 당신네들은 중국사람이지요.

진씨 네 그렀습니다. 사리원에서 왓읍니다.

기자 당신네들은 어찌하야 넘어 왓소.

진씨 몸도 앞우고 첫째 배급도 없고 밀가루를 사 먹을 수 없어 서울의 친구를 차저 가는 길입니다.

기자 당신네들도 38선을 숨어 넘어 오셨오.

진씨 그렀읍니다.


하고 기여 넘어 온 형용을 하여 보였다.



기자 당신네들이 본 북조선의 실정을 들리여 줄 수 없소.

진씨 나는 사리원에서 요리집을 하였는데 우리 중국사람들에게는 소련군이나 보안대원이 구찬케 굴지는 아니하였으나 조선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기자 팔노군이 북조선에는 만히 있다는데.

진씨 평양과 해주에 만히 있는데 불호(不好)어요. 이북 중국인들은 전부 악감정을 가젓소.

기자 북조선의 정치는 당신네들이 볼 때 었떠합디까.

왕씨 무어라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으나 조선사람들은 대부분 좋와하지는 아니합니다.


이상과 같이 말한 후 더 말하기를 실허 하였다.



기자 북조선동포는 남조선에 무슨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없오.

송씨 남조선만이라도 정부가 서길 바라고 있읍니다. 남조선의 보선(普選)이 실시된대서 북조선동포들은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자 당신네가 아시는 남조선의 지도자는 누구누구요.

박씨 이승만 김구 씨는 삼척동자라도 압니다.

기자 그외에는 정계인들은 모르시요.

박씨 김성수 장덕수 씨 등도 압니다.


기자 어떠케들 아시요.

사씨 너무 욕설 악선전을 하야 다들 머리에 젓다 십히 하였읍니다. 이분들의 욕설은 벽에다 뼁기로 써노았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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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1.


[ ......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 ........ ]



美軍政의 韓國政治指導者에 對한 政策硏究 (1945〜1948)

李 仁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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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美國務省은 10월 9일, 점령군의 철수문제는 統韓 獨立政府樹立問題 解決의 필수적 부분으로 알고 있으며 소련제의에 대해 유엔총회의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回信하였다.139) 그리고 유엔의 미국대표는 10월 17일, 臨時委員團의 감시아래 남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人口比例로 대표를 선출하고 국회와 정부를 수립해서 이 정부로 하여금 防衛軍을 조직하게 한 다음 占領軍을 철수하게 한다는 決議案을 제출하였으며 총회는 11월 14일 이 안을 採擇하였다.140) 그동안 소련에 대한 美側의 宥和政策으로 인해 북한을 共產化하고 남한마저 赤化하려는 소련의 팽창정책에 守勢만을 지키던 미국은 이제야 유엔을 통한 外交로 信託統治가 아닌 民族自決主義 原則에 입각한 한국의 통일독립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16萬의 赤軍을 투입하여 이미 共產政權을 수립해 놓고 있는 소련이 비록 유엔의 決議라 하여도 共產化를 막게 할 自由選擧를 북한에서 거부할것은 國際間 權力政治를 아는 사람이면 추측이 가능하였고, 그것은 통일을 갈망하는 한국민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한 것은 물론이다. 그동안 信託統治를 반대하며 즉시 독립을 주장해 온 민족진영에서는 이 유엔의 결의를 크게 환영하였으나 韓國獨立黨을 중심으로 하는 各 政黨協議會는 美蘇兩軍의 철퇴를 요구하며 南北政黨의 대표회의를 구성하여 統一政府를 세우라고 주장하였다.141) 이와 같이 金九를 추종하는 韓國獨立黨系列에서는 계속해서 선거를 기피하며 共產黨의 주장과 같이 兩軍撤收와
南北韓政黨代表들의 卓上會議로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1월 21일, 民族陣營 70개단체들이 이러한 주장은 共產黨의 대변자로 볼 수밖에 없다고 규탄하자 金九는 이 주장을 보류하게 하였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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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國後 李承晚과 政治路線을 같이 하면서도 그의 追從者들과 獨自的 路線을 취하기도 하였던 金九는 유엔選擧案을 반대하는 주장이 규탄을 받게되자 12월 1일 대체로 유엔의 안을 찬성하면서 이승만의 선거를 통한 政府樹立案을 支持하는 談話를 발표하였다.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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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1.30. 김구



[ ..... 만일 일보를 퇴하야 불행히 소련의 방해로 인하야 북한의 선거만은 실시하지 못할지라도 추후 어느 때든지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남한이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좀더 명백히 규정하자면 그것도 법리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요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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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11월 30일 오전에 이화장을 방문하여 이승만과 1시간 동안 회담했다. 그리고 오후 1시쯤에는 두 사람이 함께 천도교 강당에서 열린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했다.

이승만을 만나고 경교장으로 돌아온 김구는 준비된 담화를 발표했다. 먼저 정부수립 문제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자신으로서 즉시에 절대적 자주이며 남북을 통한 통일적인 독립정부를 우리나라에 수립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지 않는 국제적 제재가 있는 이상 우리가 우리의 요구를 달성하는 데 이 국제적 제재를 합법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제일 조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엔에 한국문제를 제기하야 정당히 해결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유엔이 한국문제를 정식으로 상정하야 토론한 결과 유엔감시하에서 신탁 없이 또 내정간섭 없는 남북을 통한 총선거로써 자주통일의 정부를 우리나라에 수립하도록 협력하자고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아직까지 한국의 정식 대표를 참가시키지 아니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지 아니하는 바는 아니나, 대체로 유엔 결의안을 지지하는 바이다.”



“南韓에서만 選擧해도 南韓 단독정부 아니다”



이처럼 신중하게 전제한 김구는 소련의 방해로 남한에서만 선거를 실시할 수밖에 없더라도 그것은 남한 단독정부가 아니라고 매우 주목할 만한 발언을 말했다.


“혹자는 소련의 보이콧으로 인하야 유엔안이 실시 못된다고 우려하나, 유엔은 그 자신의 권위와 세계평화의 건설과 또 장래에 강력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하야 기정방침을 변하기가 만무다. 그러면 우리의 통일정부가 수립될 것은 문제도 없는 일이나, 만일 일보를 퇴하야 불행히 소련의 방해로 인하야 북한의 선거만은 실시하지 못할지라도 추후 어느 때든지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남한이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좀더 명백히 규정하자면 그것도 법리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요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우리 독립을 전취하는 효과에서는 그 정부로 인정받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상술한 제이의 경우에 치중할 뿐이지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인데, 세인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 하는 것은 유감이다. 하여튼 한국문제에 대하야 소련이 보이콧하였다고 하여 한국 자신이 유엔을 보이콧하지 않은 이상 유엔이 한국에 대하여 보이콧할 이유는 존재치 아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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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2. 김규식


[ ..... 제주도 일우만을 차지하고서라도 중앙정부라고 할지언정 단독정부라는 것은 그 명칭부터 불가 ....... ]



1947.12.14. 동아일보


남조선만 총선거해도 단독정부 아니다


김박사의 견해



입법의원 원장 김규식 박사는 11일 왕방한 기자와 유엔 결의에 의한 남북통일총선거 문제에 관하야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하였다.



문 유엔위원단이 내한한 후 공정한 남북통일총선거를 보장하는 방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답 유엔 위원단이 와서 모든 일이 진행되기 전에는 하등 예언을 할 수 없으나 설혹 소련은 소위 '뽀이코트'를 실행한다 할지라도 나의 희망으로서는 북조선의 우리 동포들도 좌우를 막론하고 다 한인인만치 이번에 우리 한국문제에 있어서는 미소가 여하커나 국제결의에 의하야 남북통일선거에 협동하야 남북통일정부수립에 공동노력하기를 바란다.



문 만일 소련에서 북조선의 총선거를 거절하고 유엔위원단의 입경까지 거부한다면 ?

답 이런 경우에는 그 위원단이 여하히 할지 예언키 어려우나 혹 남북에 구역을 나누어 구역선거방법을 취할지도 모른다. 남북구역선거를 별개로 혹 별종의 방법으로 할지라도 유엔위원단이 입경하야 선거감시만이라도 허락되어야 할 것이다.



문 그러면 북조선에서 모든 것을 거절하고 남조선에서만 총선거가 시행되어 소위 '남조선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경우를 예상할 수 있는가


답 여사한 경우에는 나의 보는 바로는 유엔대표단이 직접 처리하기보다 먼저 유엔 소총회에 보고하여 그 결의를 요할 것이고 설혹 '남조선단독정부'가 수립된다고 할지라도 나의 견해로는 그 명칭만은 '남조선단독정부'라고 아니할 것이고 한국중앙정부라든지 한국정부라든지 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한민족으로서는 근본적으로 남한이니 북한이니 하는 분국이 없었고 미소양군이 점령하면서 생긴말인만치 더욱히 하국하민족을 물론하고 소위 단독정부라는 말은 듣지 못한 것이다. 혹 혁명정부니 임시정부니 하는 말은 적용된 바도 있고 국토의 일부분만을 차지하고 살아도 앞으로의 전국통일을 기도하며 중앙정부라 칭함이 역사적으로나 현금에도 타국에서 쓰는 말이다.

그런즉 제주도 일우만을 차지하고서라도 중앙정부라고 할지언정 단독정부라는 것은 그 명칭부터 불가할 것이다.






1947.12. 中國共產黨이 北朝鮮人民委員會를 正式政府로 승인









1948.1.1. 김구


[ ...... 우리에게 一條의 서광이 있으니 이는 UN 위원단의 내한이다 .......... ]



이승만, 김구 등 정계요인 연두사 발표


게재지명 조선일보,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8년 01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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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


“우리에게 一條의 서광이 있으니 이는 UN 위원단의 내한이다. 우리는 잠시라도 모든 비애를 잊고 새해에 새손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동시 최선을 다하여 그들과 공동 노력할 것이며 수시로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발표하므로서 기어히 우리의 염원을 관철하도록 하자. 따라서 우리가 기대하는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總選擧가 실시된다면 우리는 귀중한 一票를 유효하게 던져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新年劈頭에 있어서 과오를 청산하고 먼저 우리 민족이 단결하여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이며 단결된 역량으로써 UN 위원단도 맞이하고 그들의 도움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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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22.


유엔소련대표 그로미코, 조선위원단의 북한 입경 정식 거부



게재지명 조선일보,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8년 01월 25일



22일 UN에서는 蘇聯이 UN朝鮮委員團의 蘇占領下의 북조선 入境要求를 거절하였다고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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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25. 김구


[ ..... 蘇側의 거부가 있었다면 이는 최대의 불행이다 ......... ]



소련의 (UN委員團) 북조선 입경거부에 대한 각계 견해



게재지명 경향신문

게재일자 1948년 01월 25일




▷金九 談: 우리 3천만의 염원은 南北統一 총선거이다. 그러나 蘇側의 거부가 있었다면 이는 최대의 불행이다. 차후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言及하기를 삼가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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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2.5. 美軍政長官 헬믹小將



[ ..... 조선인은 공산주의에는 기울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들은 매우 개인주의적인 동시에 매우 국가주의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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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인은 공산주의에는 기울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들은 매우 개인주의적인 동시에 매우 국가주의적인 민족이다. 그리고 조선의 공산주의자에게 주요한 지장이 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某外國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다. [워싱턴4일발 AP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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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체재중인 헬믹, 조선문제에 대해 소신 피력


경향신문,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8년 02월 05일









1948.2.7. 남로당 '2·7 구국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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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南勞黨의 組織擴大와 '2·7總罷業' 指導



1948년 2월 들어 UN에서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 안'이 상정되고,49) 우익세력에 의한 단독정부 수립이 확실시되자 남로당은 이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저지 공작에 나섰다. 이들은 1948년 5월 10일로 확정된 선거를 저지하기 위하여 1948년 2월 7일을 기하여 소위 '2·7구국투쟁'이라고 일컫는 '총파업 투쟁'을 지령하였다. 당시 남로당의 주요 수뇌부는 이미 북한 정권에 참여하거나 혹은 북로당 주도하의 당조직에 실질적으로 예속됨으로써 남로당의 사령탑은 서울로부터 평양으로 옮겨져 있었다. 50)따라서 2·7투쟁은 평양에서 계획·지령한 것으로 서울의 남로당 중앙은 이를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이들은 민전을 통해 파업과 파괴, 경찰관서에 대한 습격, 그리고 선거방행을 위한 선전과 선동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제1단계로 유엔결의안 반대투쟁에 이어 제2단계인 선거 사건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2·7폭동은 남로당의 조직력과 동원역량을 과시한 사건으로 5·10선거 방해 투쟁의 서곡을 이루었다.51) 당시 남로당이 전면에 내세운 투쟁 구호는 다음과 같다.



- 조선의 분할침략계획을 실시하는 UN한국위원단을 반대한다!

-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 양군 동시철퇴로 조선통일민주주의 정부수립을 우리 조선인에게 맡기라!
- 국제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반동파를 타도하라!
- 노동자, 사무원을 보호하는 노동법과 사회보험제를 즉시 실시하라!
- 노동임금을 배로 올리라!
-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
-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라!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52)



이러한 남로당 중앙의 지령에 따라 제주도에서는 다른 지방에 비해 다소 늦은 2월 9일부터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대해 미24군단 G-2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월 9∼11일 밤 공산주의자 17명이 산발적으로 제주지역에서 폭동과 시위를 주동했다. 이 폭동을 유형별로 보면 6개의 경찰지서 습격, 삐라 살포, 칼과 곤봉으로 무장한 폭도들의 시위 등이었다. 주목할 점은 많은 폭도들이 소련국가를 불렀다는 사실이다. 보고된 사망자는 없으나 경찰 2명이 심하게 구타당했다. 경찰은 3일 동안 약 290명을 체포했다."53)


제주도에서 발생한 2·7폭동은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폭동에 비해 강도는 약했지만, 제주도에서 발생한 이전의 폭동 형태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폭력적인 투쟁 형태를 보이는 것이었다.54)

'2·7폭동'은 남로당 투쟁 전술이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전술로 넘어가는 주요한 계기였다. 이 때부터 각 지방에는 '野山隊'라는 무장 게릴라 소조가 만들어져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주도의 경우는 이보다 앞서 1947년 8월에 이미 '人民解放軍'이라는 무장 게릴라 소조가 결성되어 조직적인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55)



한편, 2·7 폭동에서 북조선최고인민회의가 2월 11일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임시헌법초안'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그들이 단순히 '단독선거'만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인공'수립에도 그 목표를 두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즉 2·7폭동은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것과 '인민공화국' 수립을 지지하는 '양면투쟁'을 동시에 전개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2·7투쟁'은 이후 '제주도4·3폭동'과 '5·10선거 반대투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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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資料에 의한 4·3事件의 實際

鄭 錫 均
(전 국방군사연구소 선임연구원)








1948. 2.7. 남로당



[ ...... 전국이 들끓을 것이야. 그것도 한꺼번에.


시위, 데모의 수준을 넘어 ‘적의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 ]




[ ..... 1. 조선의 분할침략계획을 실시하는 유엔조선위원단을 반대한다.

2. 남조선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다.

7.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세. ....... ]




봉기투쟁의 준비


<연재> 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 (77)



안재구 | tongil@tongilnews.com

201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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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은 어지간히 먹고 상을 한쪽 구석에 밀어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 동무, 봉기는 2월 7일 토요일로 잡혀졌네. 아마 전국이 들끓을 것이야. 그것도 한꺼번에. 시위, 데모의 수준을 넘어 ‘적의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라는 원칙으로 투쟁을 한 단계 높인다고 하더구나. 그 중 우리가 할 일은 밀양읍의 서너 곳의 주요장소에서, 시위와 아지프로를 하는 일일세.


이번은 한데 모여서 대회를 하는 것이 아니고 각 부문이 따로따로 하되, 지도부의 통일적 계획에 따라 집행함으로써 따로따로가 아니고 노•농•청•학 4자가 연합한다는 거야. 그래서 기밀유지가 절대적이라는 거야. 자기 일은 책임적으로 완수하되 시간과 장소는 꼭 지켜야 한다는 거야.
시간과 장소는 결행 시까지 알리지 말고 각 소조책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도록 한다는 것이야.”


처음 들었을 때는 감이 잘 잡히지 않았는데, 여러 번 묻고 이해를 하고 해서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다음 또 한 가지는 그 준비로 각 부분에서 전단을 준비하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번 봉기의 구호라는 것이다.
“구호는 이 문건에 있는 것이야.”라고 하면서 문건 한 장을 내놓았다.

9가지의 구호(주1)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조선의 분할침략계획을 실시하는 유엔조선위원단을 반대한다.
2. 남조선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다.
3. 양군 동시철퇴로 조선통일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우리조선인에게 맡겨라.
4. 국제제국주의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파를 타도하라.
5. 노동자, 사무원을 보호하는 노동법과 사회보험제를 즉시 실시하라.
6. 노동임금을 배로 올려라.
7.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8.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라.
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세.


인데, 우리 학생들은 1가지 더 보태어 10가지 구호로 했다.

10. 학생두발을 삭발하는 것을 폐지하고 두발의 자유를 달라.



전단에 들어갈 글은 바로 이 10개의 구호이라는 것이다.
전단제작은 우리 소조, 즉 ‘밀양고등공민학교 소조에서 맡으라.’ 해서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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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2.7구국투쟁 ①

<연재> 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 (78)



안재구 | tongil@tongilnews.com

2012.07.28




밀양읍의 노.농.청.학 4자연합의 봉기투쟁의 준비를 마치고, 이제부터 우리는 밀양고등공민학교 학생의 남조선 단독선거실시,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투쟁을 조직하고 이를 4자연합투쟁에 결합시키는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 이 문제를 자치회 회장인 강성호 동지가 자치회운영위원회에 안건을 상정하여 결의하고 투쟁조직을 꾸려야 하는 것이다.


강성호 동지는 6일 오후 방과 후에 안건을 제시하고 임시운영위원회를 정식으로 소집했다. 강성호 동지는 평소 학생자치회에서 발휘한 헌신적인 노력과 인기로 운영위원회에서만 아니라 학생 전체는 물론이고 교사들에게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번 투쟁의 제안은, 전국적인 총파업의 일환으로써 미제의 남조선 분할책동을 저지해야 한다는 민족적 당위로 만장일치의 동의로써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운영위원회를 바로 투쟁위원회로 편성하고 거기에다 나를 밀양고등공민학교 봉기의 선전선동부문을 담당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봉기조직을 맡은 강성호가 학년대표 2명과 함께 동원소조를 결성하여 봉기당일 학교운동장으로 쓰고 있는 ‘동사’마당에서 전교학생, 모두 합쳐 150명 쯤 될까 하는 숫자이지만, 이들을 한데 모우고 남조선단독선거반대, 단독정부수립반대의 결의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 결의 대회에서 강성호는 사회와 대회사를 맡고 나는 선언문을 낭독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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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의 날은 밝았다.


학교 상학시간 9시에서 30분 전에 둘은 학교로 갔다. 플래카드는 보자기에 샀고 종이나팔은 포개어 놓아서 부피가 그리 크지 않았다. 나는 교실로 들어가지 않고 동사마당으로 바로 갔다.
거기에서 보자기에 산 플래카드를 꺼내어 각목에 꿰어 둘둘 말아 한쪽 담 모퉁이에 세워두고 모두 다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9시가 다 되었는지 학생들이 동사마당으로 오는 골목이 미어지도록 나왔다. 그들 속에 성호 동무는 운영위원회의 성원으로 이루어진 투쟁위원회의 성원들로 둘러싸여 의기양양하게 마당으로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선생님들이 함께 들어오셨다.
자치회 회장인 성호 동무가 서쪽 담에서 5미타 쯤 거리를 두고 놓여있는 단으로 올라가 사회를 시작했다.


“오늘 우리들 학생들은 먼저 미 제국주의를 규탄합니다. 미제는 통일임시정부수립을 파탄시키고, 38도선 이남에 일본군 항복을 받는다는 구실로 들어와서 조국의 이남 땅을 잘라 그들의 제국주주의적 침략으로 식민지화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앞잡이 이승만과 김성수로 하여금 미제의 꼭두각시로 해서 그들의 꼭두각시정부를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미제는 우리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유엔을 난데없이 끌어와 유엔헌장에 위배하면서까지 해서 그들 거수기로서 이른바 「유엔조선위원단」을 만들어 우리 땅에 들여놓고 총선거를 한다고 설치대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의 의도대로 총선거라는 놀음을 해서 정부를 만든다면 삼천리강산 우리 조국의 반으로 잘라서 나라를 반동가리 내는 것으로 됩니다.
우리 청년들의 끓는 피가 이를 어찌 그대로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이로써 이승만은 이완용과 같은 만고역적이 되고 김성수는 그 공범자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학생 여러분, 우리는 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온 몸, 옴 마음을 다하여 죽음으로써 반대해야 할 것입니다.”

15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의 소리라고 할 수 없는, ‘옳소!’라는 함성이 진동을 했다.



이어 자치회장 성호 동무의 소개를 받고 나는 어제 받은 『2.7구국투쟁선언문』을 낭독했다.

그것은 남조선단독선거.단독정부수립 반대 「구국투쟁선언문」이라는 제목으로, 내용은,


미제는 조선반도를 분단 점령하여 여기에다 식민지.군사기지화하려는 음모로 그들의 앞잡이요 거수기나라로 구성된 「유엔조선위원단」를 만들어 남조선 단독선거로 미국의 꼭두각시정부를 만들려고 한다.

우리는 조국의 분단을 반대하고 미.소 양군을 즉시철퇴하고 우리민족문제를 우리민족의 의사에 의하여 조국의 주권을 방위하고 통일, 자유, 자주독립을 쟁취하려고 일어났다.

이 투쟁이 아무리 희생을 요구하는 투쟁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국의 국토와 주권을 방위할 것이고 민족의 생명을 지켜나갈 것이다.

우리 조선인민은 모든 계급.계층, 당파와 사상의 차이를 극복하고 정의의 구국투쟁에 총궐기하여, 단선.단정을 반대하여 분쇄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전인민이 일치단결해서 단선을 보이콧한다고 선언한다.



이런 내용을 가진 선언문이었다.


다음에는 2학년 대표 학생이 나와서 이번 투쟁의 10대구호를 선창하고, 모든 학생이 이를 지지한다는 뜻으로 끝 구절을 두 번 씩 복창했다.


마지막으로 1학년 대표 2명이 나와 플래카드를 들고 선두에 서서 대오를 이끌었고, 어깨를 겪고 행을 이루었으며 열을 지어 좁은 동사마당을 나가 신작로로 빠져나갔다. 신작로로부터 행과 열을 다시 정리하여 짧은 구호를 외치며 남천강 밀양교로 나가다가 읍사무소 쪽을 향해 나갔다.


그곳에서 농민조합 청년들과 전평 밀양지부 청년들과 합쳐 그 앞 시목전 일대를 빙빙 돌며
“단선반대! 단정반대!”, “양군철수! 통일정부!”
이를 외치며 나갔다. 길가의 모든 시민들과 장에 온 모든 장꾼이 이에 따라 이 박수를 치며 구호를 따라 외쳤다.

“단선반대! 단정반대!”, “양군철수! 통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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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2.7구국투쟁 ③


<연재> 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 (80)



안재구 | tongil@tongilnews.com

201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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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종숙과 두 분의 재종조부는 항열의 차이는 있어도 연령대는 차이가 그리 나지 않는 모두 다 30대 초반의 나이다. 삼종숙은 당시 남노당의 초동면당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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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투쟁에 폭력적으로 나오는 반동들의 폭력에 폭력적으로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나온 것이 2.7구국투쟁인데, 이 투쟁에서 밀양군 민중의 투쟁은 동북산악지대는 인구가 드문드문해서 군중투쟁은 할 수 없고 유격투쟁으로 나가야 하지만 당시의 역량으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서남지역은 밀집된 군중으로 반동을 포위하여 타격할 수 있지만 투쟁 후 그 역량을 보존하는 문제가 어렵다. 그리하여 이 역량이 동부산악지대로 들어가서 유격투쟁으로 발전되어야 하는데 그 준비는 거의 없었다.
그 결과 군중투쟁으로 노출된 역량은 지리멸렬되어 소멸되고 말았다.


아무튼, 초동면 오방동 지서습격은 사전에 면밀한 작전을 세워 습격 그 자체로는 성공했다.
사전에 본서경찰의 후원을 차단하기 위해 전화선을 단절하고 도로를 차단해서 함정을 설치하여 지서를 완전히 고립시켰다. 군중이 지서를 포위하고 5, 6명의 특공대가 흑색화약을 장진한 사제폭탄으로 위협하여 무장해제시켰고, 항거하는 경찰을, 엉성하기 짝이 없게 만든 사제권총으로 사살함으로써 제압했다.


청도면 오산지서습격도 역시 같은 방법이었는데, 여기는 멋모르고 덤벼든 축북경찰청 후원부대의 차량이, 군중이 설치한 함정에 빠져 숫한 부상자를 내었다고 한다.

이 두 경찰지서의 습격으로 빼앗은 무기는 가량의 카빈소총 약 20여정과 그 실탄 다수, 수류탄 다수, 4.5구경권총 10여정과 그 실탄 다수. 경찰관 관복, 모자, 군화 등 개인장비와 신분증 등의 소지품을 빼앗았다고 한다.


이 투쟁으로 인하여 그 후 우리 집안의 두 재종조부 한 분은 일본으로 밀선을 타고 도망했고, 또 한 분은 항복하여 보도연맹에 들었다가 전쟁 때 이승만의 대학살로 희생되었다. 일본으로 가신 재종조부는 북 공화국으로 돌아가는, 재일동포귀국선을 타고 북 공화국으로 귀국했다.
삼종숙은 밀양군당의 서남지역책으로 활동하다가 아지트가 발각되어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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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구국투쟁은 .... 처음부터 사전에 계획한 조직적이며 무력에 대한 최소한의 폭력적인 준비를 갖춘 투쟁이었고, 이를 계기로 하여 무장투쟁으로 전환해가는 주요한 계기 .......


...... 유격소조가 ‘야산대’(野山隊)라는 이름으로 생겨나고 ..... 제주도에서는 4.3인민항쟁으로 이어나갔고 그리고 5.10선거반대투쟁으로 ..... 나아가 「남조선인민유격대」로 ........ ]





봉화투쟁으로 「야산대」의 시작


<연재> 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 (81)



안재구 | tongil@tongilnews.com
2012.08.18



나와 순희 그리고 강성호는 동내청년들과 함께 7, 8명쯤이 함께 나섰는데 그 가운데는 카빈총을 멘 두 청년도 있었다. 두 청년은 일제 때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일제 패망과 더불어 귀향한 일본군 일등병 군인이었다. 그래서 무기를 다룰 줄 알아서 조직에서는 카빈총을 주어서 초동면 봉기 후 면당을 호위하는 임무를 주었다. 이 둘은 낫과 톱 그리고 도끼를 들고 산으로 가는 우리들을 호위하는 임무를 받고 우리들과 함께 가는 것이었다.


나와 순희는 아침에 할머니가 만든 주먹밥으로 점심요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은 오후 2시경이나 되었다. 성호는 다른 청년들과 함께 점심을 마치고 있었다.

우리들은 종남산 정상에 정월 대보름날 하는 달집을 커다랗게 지어 ‘달불’처럼 불을 놓아 봉화를 올리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남조선 단독선거로, 이승만•김성수를 우두머리로 하는 친미사대주의자들과 친일파무리들을 끌어 모아 미제의 예속정권을 만들어서 조국의 남반부를 분단하여 영구점령하려는, 미제의 음모를 반대하여 전 민중이 궐기하여 일어 나설 것을 호소하는 봉화를 올리려고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 봉화는 저녁 어둠이 온 천지에 깔리는 시간 8시를 기해서 올리기로 했다. 마침 내일모레가 그믐이라서 봉화의 빛은 어둔데서 더욱 빛날 것이다.
이 봉화가 오르면 이를 신호로 산 아래 민중들은 동내 야산에 올라 함성을 올릴 것이다. 밀양읍내에서는 북과 징 그리고 꽹과리를 치면서, ≪단선반대≫, ≪단정반대≫의 구호로 아우성을 쳐서 모두 투쟁에 궐기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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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밀양읍 어느 곳에서든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이곳 종남산의 정상에서 2.7구국애국투쟁의 불길을 지펴 올리는 모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들의 투쟁의 의의를 이곳 초동면의 당책동지께서 간단히 말씀해주셔서 오늘 여기에서 올리는 봉화의 의미를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의 면책은 앞에 나서시어 아주 간략하게 2.7구국투쟁의 의미를 해설하시고 그 투쟁에서 봉화투쟁의 의의를 말씀해주셨다.


“8.15해방과 더불어 우리 땅에 올라온 미제는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한 국제협약을 마치고서는 물러날 생각은 않습니다. 그들의 제국주의침략을 본성을 발동시켜 기어이 38도선 이남의 조선 땅을 영구히 강점하기 위하여 남조선단독선거를 하여, 친미사대의 무리들과 그들이 군정에서 부려먹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로 남조선단독정부를 세워서, 반만년을 하나의 나라로 살아온 우리민족을 둘로 갈라놓으려도 획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갈라진 나라로 만들어 미래의 자손에게 결코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미국 놈과 그 앞잡이들이 총으로 단선•단정을 획책하면 우리도 총을 쥐고 저항할 것이며. 기어이 하나의 나라 조선을 지킬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올리는 봉화는 그 새로운 해방투쟁을 3천만 동포들에게 알리고 온 세계에 알리는 불길이 될 것입니다. 조선의 통일된 자주독립을 결의하는 만세소리로 봉화의 횃불과 더불어 투쟁을 선언합시다.

조선통일독립만세! 조선민주주의통일공화국 만세! 조선의 노동자, 농민, 민중의 완전독립의 나라 만세!”

모두 이 만세의 선창을 따라 만세를 불렀다.



점화는 면책의 손에 들린 커다란 관솔에 달린 불을 봉화의 움집 안에 있는 마른 풀에, 소나무 갈비에 붙였다. 그 불씨를 그곳에 참가한 여러 청년들이 돌려가면서 이곳저곳에 붙여 불길이 점점 세어지고 높이 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이 높이 올라가자 누구의 입에선지 ≪해방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노래 .......”

노래가 끝나자 모두 만세를 불렀고, 만세의 손이 내려지자 그 손은 저절로 옆 사람의 손과 잡혀져 곧 봉화를 둘러싸고 돌기 시작했으며, 노래는 국제노동해방의 노래인 「인터내셔널」(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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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7단선•단정반대구국투쟁」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경인일대를 비롯헤서 경남•북, 전남•북,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규모로 폭동과 파업이 일어났다. 파업으로 생산은 정지되었고 동시에 교통•수송은 곳곳에 정지되고 교량도 폭파되었고 철도에서는 파업단을 탄압하자 기관차까지도 파괴되었다.


전신•전화의 파업으로 통신이 두절됨은 물론이고, 이를 탄압하자 전신선이 절단되고 전신주도 도괴되었다. 이 결과 행정기관도 경찰행정조차도 마비되었다.
부산항만의 파업은 물론이고 해상파업도 일어났다. 장성탄광, 화순탄광도 파업했다.


각급학교도 「민주학생연맹」의 주도로 거의 전부가 동맹휴학으로 들어갔고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들과 합세해서 경찰관서를 습격했다.
심지어 목포와 인천, 강릉 등지의 관상대와 측후소도 파업에 가담했다. 이들 모두는 ≪단선반대≫. ≪단정반대≫를 구호로 외쳤다.


이들 투쟁의 내용을, 한 종합된 어떤 자료에서 본다면 48년 2월 7일부터 20일 사이에, 파업 30건, 맹휴 25건, 반동단체와의 충돌 55건, 시위 103건, 봉화 204건, 총검거인원은 8,479명이라 한다.


서울지구만 보더라도, 철도파업에서 용산•수색기관구는 전원파업, 경성방적, 종방, 대한방적, 용산공작, 조선피혁, 경기염직, 신문사도 거의 전부, 출판사도 전부 참가, 시위는 영등포 지역 20건, 종로 35회, 남산과 북악산에 봉화 53회라고 한다.



폭력적 항쟁은 경남지방만 보더라도 그 수와 내용으로도 엄청났다. 이 숫자도 당한 경찰 측에서 실제와는 줄여서 발표한 것이다.


진주: 2월 7일 오전 4시, 100여명의 군중이 진성지서 습격, 무기 다량 탈취.

밀양: 2월 7일 오전 7~8시 30분 200명의 군중이 청도 오산지서와 초동 오방지서를 습격 점거 경찰 1명, 극우청년 2명 타살. 습격 때 경찰발포로 민중 측 사망 4명, 중상 10명, 나중에 마구 검거, 검거자수 109명.

합천: 7일 오전 10시에 200명이 봉진지서 습격, 오후 2시 4,000명이 청덕•봉산지서 전화선을 절단하고, 교량 폭파한 다음 습격.

함안: 7일 오전 10시, 약 4,000명이 산서출장소 습격
고성: 오전 2시께, 500명이 대하지서 습격•포위•투석.



2.7구국투쟁은 1946년의 10월인민항쟁과는 달리 처음부터 사전에 계획한 조직적이며 무력에 대한 최소한의 폭력적인 준비를 갖춘 투쟁이었고, 이를 계기로 하여 무장투쟁으로 전환해가는 주요한 계기로 된 것이다. 이때부터 각 지방에는 폭력을 상비하는 유격소조가 ‘야산대’(野山隊)라는 이름으로 생겨나고 있었고 이는 곧 제주도에서는 4.3인민항쟁으로 이어나갔고 그리고 5.10선거반대투쟁으로 이어져갔다. 나아가 「남조선인민유격대」로 발전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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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3.



[ ..... 당에서는 2.7투쟁보다 더 과감히 민중을 궐기시켜 적을 무장해제 시켜 그 무기로 유격대를 결성하자는 ........ ]



[ ..... 머리 한 가운데에 커다란 못이 박혀 죽었던 것이다.

세상이 이쯤 되니 살벌한 공기가 시골 농촌에까지 쫙 ........ ]




있는 총으로 실탄 없는 사격학습인가...

<연재> 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 (93)



안재구 | tongil@tongilnews.com

2012.11.10



있는 총으로 실탄 없는 사격학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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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훈련과 학습을 열성적으로 하고 있는 가운데 다음 포스트연락의 날 첫날(아마 2월 24일)에, 우리들의 총기학습을 실탄 사용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 군당에서는 일단 비준했다. 그 이유는 3월에 들어 중앙당의 유격대 간부 양성정형을 변경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우리들은 기대에는 어그러졌으나 지도원 동지는 거기에서 보유하고 있는 총기로써 학습하고 실탄사격은 나중에 실탄을 공급 받을 때 실컷 하자고 우리들을 달랬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총 쏘는 일 빼고 그밖에 모든 군사훈련과 사상이론, 실습 등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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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총기에 대해서 분해결합과 조준사격연습을 조를 짜서 매일 차례대로 연습을 했다.
그리고 사격자세도 엎드려 쏘아, 무릎 꿇어 쏘아, 서서 쏘아, 지물(地物)에 의지해서 쏘아, 특히 권총은 아주 다양한 자세로 쏘는 연습을 했다.
마침내 총 한방 안 쏘고 훌륭한 사격자세, 훌륭한 사격을 익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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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3.1절을 맞이하여 당은 모두 투쟁으로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2.7투쟁」에서 궐기한 민중으로부터 진탕 당한 경찰은 3.1절에 어떤 투쟁이 일어날 것을 예감했는지 평소보다 몇 배나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당에서는 2.7투쟁보다 더 과감히 민중을 궐기시켜 적을 무장해제 시켜 그 무기로 유격대를 결성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궐기문과 선전선동의 문건이 당 조직을 통해 우리들에게도 전해졌다.


이러한 투쟁의 낌새를 느낀 경찰의 검색도 그 정도가 엄청났다고 했다. 읍성이나 큰 동내에는 집총경찰이 거리마다 섰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뒤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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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3.1절에는 봉기하자는 벽보가 붙어 분위기가 했고, 한 달 전 2.7투쟁에서 당한 일도 있어서 경찰과 이들은 미리 겁을 먹고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그래서 투쟁의 실제 조직일군들은 이번에는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다.


실제 3.1절 봉기투쟁, 바로 그것은 그야말로 헛방이 되고 말았다.

몇 군데 궐기한 곳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압도적인 탄압역량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다. 결국 투쟁세력은 우익 폭력단체와 경찰의 사전 진압으로 압도당하고 말았고, 결국 투쟁전선에서는 많은 군중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2.7투쟁에서 움츠려있던 단장면의 소재지에서 지주로, 우익 폭력단체인 「대동청년단」등의 뒷배로 행세하던 허 모라는 자는 그의 졸개들로 하여금, 소위 좌익인사(해방직후 「건준」위원장 집을 습격해서 집을 엎어버리는 폭력을 자행했다.

그런데 어느 누가 했는지는 몰라도 어느 날 아침에 사랑에서 눈을 번히 뜨고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이자가 일어나지 않자 가족이 들어가 깨웠으나 머리 한 가운데에 커다란 못이 박혀 죽었던 것이다.
세상이 이쯤 되니 살벌한 공기가 시골 농촌에까지 쫙 퍼지게 되었다.


민주진영이나 반동진영이나 모두 서로 죽이자고 하는 발광으로밖에 되지 않는 망동의 하나인 것이다. 결국 세상분위기는 서로 죽이자는 것으로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3.1절 봉기투쟁」은 가열했던 「2.7구국투쟁」으로 많은 상처를 받은 「반분단 민주세력」이 그 상처도 아물 기도 전에 엄청난 상처를, 역량으로도 조직으로도 받고 만 셈이다. 앞으로의 투쟁에서 엄청난 그 후과를 받아 우리들의 역량을 거의 괴멸적 파괴로까지 불러오는 결과로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건은 우리 고향 밀양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당은 이에 대한 책임을 아무도 지지 않았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니 운동이 좌편향으로만 달리게 되고 그에 대한 비판 세력을 멀리할 수밖에 없으니 당은 종파의 손에만 놀아나게 되며 결국 운동은 엄청난 해악을 조직𐤟사상적으로 받게 되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되고 마는 것이다.


3.1 투쟁의 결과는, 결국 앞으로 밀양지역의 우격투쟁의 장으로 역할을 놀 우리 ‘트’ 무릉동과 사자평 일대의 근거지로서 그 종심은 더욱더 얕아지고 이곳에서 간부훈련을 할 장소로도 적합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밀양지역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그 근거지로서 숫한 가능성이 없어지고, 반미 민족해방의 역량은 날이 길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


「3.1절 투쟁」을 겪은 후에도, 훈련에서 물질적 조건이 여의치 못하는 상황에서 훈련을 더욱 발전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맨날 하는 일을 그대로 습관적으로만 하는 훈련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 훈련만이라도 몸에 익히겠다는 생각으로 그 훈련을 되풀이 되풀이했다.

4월에 들어서자 반미구국의 운동은 제주도에서 커다란 횃불로 다 올랐다.








1948.3.1. 남로당의 「3.1절 봉기투쟁」



[ ...... 제주도의 「3.1절 봉기투쟁」은 제주도의 「4.3인민항쟁」의 커다란 불씨로 지펴졌다. .........


..... 남로당은 산하조직에게 전국적으로 경찰관서를 습격하여 무장봉기로까지 발전하기를 요구 ....... ]




무기를 손에다 들고

<연재> 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 (94)



안재구 | tongil@tongilnews.com

2012.11.17




남로당의 「3.1절 봉기투쟁」은 1948년 3원 1일, 전남 각지의 경찰관서를 습격하여 무장을 탈취하고 「힌민당」 본부, 「대동청년단」 본부 등, 단선지지 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경찰관 18명이 타살되고, 단선지지 청년단원 19명 등이 살해되었다.

또 3월 7일에는 대전경찰서 「가수원」지서를 공격하여 무장을 탈취하고 경찰 수명이 중상을 입었다.


3월 8일에는 고성군의 각 면의 경찰지서가 밤 12시를 기해 초등학교 교원과 면 서기까지 합세하여 포위하고 기세를 올리기도 했다. 이날 경남 동래지방에서는 군중 200여명이 8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했고, 12일에는 포항-부산 간 전화시설을 폭파했다. 15일에는 전남 창평, 충남 신탄진의 경찰지서가 파괴되었다. 22일에는 남로당은 전평산하 노동조합에게 총파업을 지령했다.
그밖에 광주와 서울의 여러 학교에서는,

『유엔조선위원단 물러가라!』
『단독선거 반대한다!』

라는 구호를 적은 전단을 거리에 나가 뿌렸다.


남로당은 원래 대대적인 투쟁으로 경찰관서를 점령하고 무장을 탈취해서 무장함으로써 유격대를 확대하거나 무장을 강화하려고 했으나 그 목적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많은 조직역량이 노출되고 파괴되고 말았다.
하지만 제주도의 「3.1절 봉기투쟁」은 제주도의 「4.3인민항쟁」의 커다란 불씨로 지펴졌다.


「2.7구국투쟁」으로 미군정과 군정경찰은 그들이 당내에 심어놓은 첩자인지 당내의 변절자인지는 몰라도 그들로부터 3.1절을 기해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폭력적인 봉기가 있다는 정보를 사전에 가지게 되어, 3.1일절 기념식의 옥외집회를 전국적으로 일체 금지시키고 있었다.


남로당은 산하조직에게 전국적으로 경찰관서를 습격하여 무장봉기로까지 발전하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전국적으로 이를 막아나서는 군정경찰과 폭력충돌이 일어났고 경찰지서도 점거당하여 무장 해제된 곳도 많았다.



3.1절 날에 제주도에서는 광덕정 앞 광장에 모인 천명이 넘는 군중을 포위한 군정경찰은 옥외집회 금지라는 강력한 집회해산과 집회 당사자인 대회 측의 강행이라는 대결에서 발생한 충돌로 경찰이 발포하여 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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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단」의 행패에 대항해서 민중들은 「건준 치안대」가 자율적 조직으로 남겨두게 되었고 이를 자위대로 조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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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대의 무장은 일제가 패망되어 돌아갈 때 그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무기만 해제되고, 일제가 미군의 상륙에 대항하기 위하여 진지와 동굴을 만들어 그 속에 비치해놓은 많은 무기와 탄약은 그냥 남아있었다. 그 중에는 경기관총, 중기관총도 있었고 박격포도 있었다. 제주도 민중들은 일제가 숨겨놓은 무장은 그들의 강제노동으로 끌려가서 노동했던 현장이라 잘 알고 잇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일제의 징병으로 일본군에 복무했던 군사훈련을 받은 많은 청년들이 귀환해 왔고, 또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인 김달삼(본명: 이승진-李承晉), 이덕구(李德九)는 일본군 장교로 있어서 곧장 군사지휘를 할 수도 있었다.


이리하여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인 김달삼의 조직적인 주동으로 500명의 무장대원들과 여성동맹의 맹원들 그리고 소년단원 3,000명에다,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에서 민중봉기에 동참한 일부 사병들도 있어서 이들도 연합하여 제주도내의 15개 경찰지서 중 14개의 지서를 습격하여 점령하고 본격적인 유격전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달삼 사령관은, 4개월 후 제주도를 떠나 1948년 8월 21일~26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해서 「4.3인민봉기」를 보고하여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까지 추대 당선되었다.


그 후 김달삼은 「강동정치학원」에 입학하여 군사학습을 하고 졸업했고, 49년 3월 북조선에서 남조선에서 입북한 청년들로 조직된 「조선인민유격대」가 창설되었을 때, 제3병단의 사령관으로 되었다. 부사령관으로 남도부(남도부-南道富 또는 南到釜, 본명: 하준수-河準洙)로 해서 300명의 유격대를 이끌고 이남으로 넘어왔다. 이리하여 김달삼은 안동․영덕지역에서, 남도부는 신불산, 운문산지역에서 유격전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다시 월북했다가 6.25전쟁 초기 동해안으로 침투하여 교전 중에 전사했다.


남도부 부사령관은 전쟁 중 계속 유격전을 전개했고, 휴전 후 1954년에 부하 차진철의 밀고로 대구에서 채포되었다. 1955년 여름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김달삼 사령관이 해주로 간 다음 그 후임으로 역시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이덕구 사령관이 「제주도인민해방군 사령」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유격전을 진두지휘하다가, 마지막으로 단신 제주도를 탈출하던 중 군경과 전투가 벌어져 1949년 6월 7일 전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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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2.18. 뉴욕타임즈



[ ...... 소련이 UN조선위원회의 업무를 방해 .... 만주에서 지배권을 획득하려는 .......

..... 조선의 지배는 만주에 대한 접근을 더 밀접화할 것 ........ ]




뉴욕타임즈 사설, 극동에 대한 소련의 정책 논평



조선일보, 경향신문

1948년 02월 20일



뉴욕타임즈지는 극동방면의 소련 동향에 관하여 18일 여좌한 사설을 게재하였다.


“소련이 UN조선위원회의 업무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조선을 지배하려는 것보다도 조선에 인접한 만주에서 지배권을 획득하려는 데 있다. 장차 만주는 극동지방에 있어서의 최대 원료생산지인 동시에 최대공업지대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지방이다.



현재 UN소총회는 정치적 정세의 여러 滋味없는 사실에 당면하고 있다. 만주는 소련에 가장 귀중할 것이며 조선의 지배는 만주에 대한 접근을 더 밀접화할 것인데 만주는 중국에 대해서도 중국의 戰災復與上 중요한 것이다. 이 만주를 중심으로 한 중소간의 갈등은 사소한 외교적 분쟁이 아니라 극동 장래에 대한 최초의 결전일 것이다.” [뉴욕 19일발 AP합동]









1948.3.23. AP기자 화이트



[ .... 만주는 ... 최근 득세를 한 중공군에게 함락될지도 모르며 ......

소련의 견지로 보면 만주와 조선은 이를 분리시켜 고려할 수는 없다. .......


북조선의 소련의 위성국가인 독립국가의 형성을 촉진시킬 것이며 ..... 만주는 이로부터 引力을 받게 될 것이다. ]




AP기자 화이트, 조선과 만주사태 등에 대해 논평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8년 03월 23일



AP기자 제임스 D. 화이트는 만주 급 조선의 사태를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중대시기에 당면한 아세아주의 두 지역이 있다. 그것은 만주와 조선인데 그 이유는 만주는 근근 최근 득세를 한 중공군에게 함락될지도 모르며 또한 조선은 5월 9일에 총선거를 시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에 있어서의 선거는 대체로 동국의 반에서만 실시될 것이다. 냉혹한 전쟁에 있어서의 미국의 노력이 구주에 집중되고 있는 이상 동양에 있어서의 일종의 전략상의 주도권은 소련측에 귀할 것이다.



소련의 견지로 보면 만주와 조선은 이를 분리시켜 고려할 수는 없다. 즉 한편에서 발생하는 여하한 사태도 다른 편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이 유력한 세력에 의하여 지배되면 이는 곧 소련 세력하의 만주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일제시대에 그 예를 볼 수 있음) 또한 만주가 그러한 세력의 지배하에 서게 되면 소련은 만주로부터 철퇴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 先例로서는 조선이 舊北京에 대하여 朝貢하는 청조시대에 볼 수 있다.


환언하면 만주는 단독으로 독립하든지 또는 소련의 원조하에 자립하게 될 시기가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는 조선에 있어서 이 선거를 항구적으로 둘로 분할하려는 때에 도래할 것이다. 이 선거는 미국의 추진에 의하여 UN 주재하에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소련에 의하여 최초부터 보이코트 당하고 있다. 소련의 정책이 급변하지 않는 한 이 선거는 미국점령하의 남조선에서만 실시될 것이다. 이는 북조선의 소련의 위성국가인 독립국가의 형성을 촉진시킬 것이며 여차한 경우에는 만주는 이로부터 引力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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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군은 46년 5월 북한 지역으로 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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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런던 외무장관회담에서 미국과의 협조관계가 대결관계로 바뀌게 된 45년 10월 스탈린의 중국정책이 완전히 바뀝니다. 스탈린은 팔로군 30만 명의 만주 진출을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후 만주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팔로군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어요. 처음에는 국민당군이 열세였어요. 그러다가 국민당군이 새로운 병력을 투입해 팔로군을 밀어버렸습니다. 불리한 형세에 놓인 중국 공산군은 46년 5월 북한 지역으로 퇴각합니다.”



 -중국 내전이 북한으로 확산되었다는 겁니까.



 “46년 5월부터 북한은 중국 공산군의 후방기지로 변한 겁니다. 스탈린의 지령에 의한 것이지요. 북한은 중국 내전의 연장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6·25전쟁 때 만주가 미군이 넘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던 것처럼 46년 5월부터 48년까지 북한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범할 수 없는 일종의 성소(聖所)였습니다.



북한으로 들어간 팔로군은 소련군의 훈련을 받으며 재편됐고, 이후 국민당군을 물리칠 힘을 비축했습니다. 북한은 46년엔 팔로군의 대피소였다가 47년부터는 국민당군에 반격을 위한 기지로 변합니다. 북한을 팔로군의 후방기지로 제공한 스탈린의 조치로 인해 한반도의 분단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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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6619303

1946년 스탈린 “북한, 중공군 후방기지로” 지령 … 분단,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중앙일보] 2011.11.09












1948.3.22



미군정청 귀속농지불하

" 歸屬農地賣却令 및 新韓公社解散令"



[ ...... 농민들의 호응은 열광적이었다. ........

...... 귀속농지 불하는 급속도로 추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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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選擧 이전에 小作農家 절반가량이 농지 불하받아



3월 22일자로 발족된 중앙토지행정처는 설립과 동시에 행정기구 개편과 농지매각에 관한 실무자 교육을 실시하여 4월 8일에는 토지분양개시식을 거행하고, 서울에서 가까운 양주군과 고양군의 100여 농가에 매호마다 450여평씩 15정보가량을 분양했다.19) 그리고 전국적으로는 5,000호의 경작농가에 양도증서를 교부하고 등기절차를 끝냈다.


농민들의 호응은 열광적이었다. 4월 1일부터 시작된 귀속농지 매각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4월 13일 현재 양도수속이 완료된 건수는 토지행정처 서울지청 관할이 8,162건, 대구 관할이 8,343건, 부산은 937건, 그리고 이리는 무려 20만 5,775건에 이르렀다. 한편 신한공사 토지의 전 면적 가운데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전남북의 일부 지주는 귀속농지 불하에 대해 맹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20)



이 조치에 좌익 정파들의 입장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논평에 집약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이번 군정당국이 동척(東拓)의 후신인 신한공사 소유지를 비롯하여 일본인이 강점했던 전답을 방매 처분하게 된 것은, 첫째로 괴뢰적 반동 단정 조작을 위한 남조선 단선을 앞두고 농민의욕을 사서 득표를 노리자는 것이요, 둘째는 전농안(全農案)에 표시된 민주적 토지개혁을 요망하여 투쟁하고 있는 남조선인민의 투쟁의욕을 토지를 농민에게 준다는 허울 좋은 기만으로 거세하자는 것이요, 셋째는 반동적 기만적 토지개혁의 전례를 만들 음모로써 소위 ‘입법의원토지개혁안’과 같은 지주의 특권 옹호적 반동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봉건적 지주토지제도를 영구화하여 지주를 미제의 침략과 식민지화의 앞잡이로 충실화하여 괴뢰 단정의 물질적 토대를 튼튼히 닦자는 기만적 모략적 술책이다. …”21)


그러나 귀속농지 불하는 급속도로 추진되어 총선거 이틀 뒤인 5월 12일 현재 전 농가의 44.6%가 귀속농지를 분양받았고, 8월까지는 86%의 농지가 불하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수립 이후에 실시해야 된다는 명분으로 반대하던 우파인사들도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농지개혁의 기념행사에 참여하는 등 협조적인 반응을 보였고, 좌익 그룹은 이에 대한 반대 캠페인의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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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년 수확물과 동일가격(평년소출의 20%를 15년간 현물로 분납)으로 농지를 구입하게 된 농민들은…낮은 가격을 기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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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의원의 와해로 ‘토지개혁법안’이 유산되자 미군정은 1948년 3월 22일자로 歸屬農地賣却令 및 新韓公社解散令을 공포, 이 날짜로 商法體制였던 신한공사를 정부기구로서의 中央土地行政處로 재발족시켰다. 이러한 재발족에 앞서 이미 5일간(1948.3.16∼20)에 걸쳐 직원들에게 토지매각 요령을 특별히 교육시키어, 4월 8일부터 토지매각을 개시했다. 이와같이 미군정이 토지매각을 서두른 이면에는 철군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즉 군정당국은 5·10총선을 앞두고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수 십만장의 항공삐라를 농촌 전역에 살포하고 또한 전국적으로 포스터를 부착했다. 그런데 “이 항공삐라와 포스터에는 귀속농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그 토지를 시세에 합당한 가격으로 팔 것이며, 상세한 내용은 지방토지행정처나 마을의 農監들에게 문의하라고 했다.


이에 대한 농민들의 반영은 대단했다. 여러 곳의 행정처 앞에는 설명을 듣기 위한 농민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C.C. Mitchell, 1949, p.127). 이와 같이 군정당국은 5·10총선의 弘報物에 토지분양을 함께 선전했다. 말하자면 귀속농지가 미군정의 5·10총선에 선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5·10 총선까지 적어도 10만호에 토지를 분양할 목표였다. 이것이 어떤 목적이었는가는 다음의 G-2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귀속농지의 대부분은 신속히 판매될 전망인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종래의 小作契約을 賣買契約으로 대체하면 되고 또한 1948년 첫번째 수확까지 상환이 유예되었기 때문이다(4월 9일자).

…중앙토지행정처는 土地分讓式을 거행하여 이 날로 5,000 농가에 경작농지의 양도증서를 교부했다. 이 계획에 대한 농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열열하며…3년 수확물과 동일가격(평년소출의 20%를 15년간 현물로 분납)으로 농지를 구입하게 된 농민들은…낮은 가격을 기뻐했다. 실제로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매각계획에 대해 비난성명을 발표했지만 이 계획에 대한 농민들의 호의적인 반응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4월 23
일자)

…4월 한 달에 10만 농가의 목표를 훨씬 초과하여 16만 농가에 농지를 매각했다…이 계획을 불신시키려던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은…소유권을 인수 하려는 농민들의 열망에 직면하여 명백히 실패했다. 또한 우익 지도자들의 초기저항도 점차 사라졌다(5월 7일자). (〈미군정정보보고서〉《자료집》6, pp. 15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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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3.


[ ...... 남하하는 동포는 매일 8백명 내지 1천명으로 날마다 그 수가 늘어 ....... ]



38선 월남자수 급증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8년 03월 04일



3천만 민족이 갈망하던 조선중앙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국제연합소총회에서 가결 결정되어 오는 5월9일 조선위원단 감시 밑에 그 실시를 보게 되었거니와 이 반가운 소식이 電波를 통하여 북조선 동포들에게 알려져 그 모진 억압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안고 남북통일의 날을 기다리며 또 한편 성급한 겨레들은 보따리짐짝이나마 죽음의 고개 38선을 넘어 오고 있는데 요즈음 開城 議政府 春川 注文津 등 각처 수용소를 통하여 남하하는 동포는 매일 8백명 내지 1천명으로 날마다 그 수가 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보건후생부와 외무처에서는 새봄과 함께 늘어갈 남하 동포들의 수용 구호에 만전을 기하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48.4.4.


[......경찰관서 습격이 11개소 경찰관 사망이 4명 일반 청년 사상이 8명 ....... ]



제주도에서 총선거 반대 폭동 발생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8년 04월 07일



5일 시공관에서 개최된 총선거촉진대강연회석상 趙경무부장이 연설한 바에 의하면 4일 제주도에서는 총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좌익분자들의 파괴행동이 있었다는데 그 피해상황은 경찰관서 습격이 11개소 경찰관 사망이 4명 일반 청년 사상이 8명 경찰지서 습격이 5개소나 있었다 한다.








1948.4.11.


한민당, 선거문제에 관해 임위에 메시지
2023-09-23 20: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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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 2023-09-23 20:46:54 삭제


1948.4.11.


한민당, 선거문제에 관해 임위에 메시지 전달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8년 04월 11일, 1948년 04월 13일, 1948년 04월 15일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유엔총회에서 결의한 총선거를 온전히 수행하도록 할려는 귀 위원단의 가지 가지의 고심과 노력에 대해서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귀 위원단이 늘 고조하시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선거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다. 특히 본당은 이에 대하여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당은 과거에 있어서 당수 宋鎭禹씨와 정치부장 張德秀氏를 살해당한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금번 선거에 있어서도 입후보자를 암살할 계획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의 절대적 요망은 안심하고 입부호도 하고 선거운동도 하고 투표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 위원단이 특히 이 점에 유의하시는 것은 크게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금번 귀 위원단이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취한 방침은 결과에 있어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파괴하게 될 우려가 많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할려는 목적과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선거를 잘하기 위해서 선거에 협력하는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입후보도 하고 마음대로 투표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민중으로 하여금 강제로 선거에 보이코트시킬 목적으로 폭동·파괴·방화·살육 등 수단을 不擇하는 사람들에게 그 행동을 마음대로 하도록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해서 제공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유엔의 결의에 보이코트하는 모국의 지령을 받아서 이번 총선거를 방해할려는 북한의 인민위원회에서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해서 총선거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라는 지령을 내리고 平壤에서는 거의 매일 이것을 방송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 자신의 귀로 직접 듣고 있습니다. 이 지령을 실행하기 위해서 2월 7일 이후 그들이 범한 폭동·파괴·살인·방화 등 건수(3월 23일 현재)는 다음과 같이 전율을 금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경찰관서 108개소
테러 102건
경관피살 24인
동 부상 75인
경찰가족 피살 1인
동 부상 9인
관공리 피살 3인
동 부상 16인
양민 피살 12인
동 부상 131인
총기 피탈 79건
탄환 피탈 1,305발
기관차 파괴 61량
객차화차 파괴 11량
기차노선 파괴 13건
전화선 절단 214건
통신기구 파괴 9건
전주 절달 72본
동력선 절단 5건
경찰관서 방화 5건
관공서 방화 3건
양민가옥 방화 28건
관공서 파괴 13건
양민가옥 파괴 15건
도로교량파괴 29건



그리고 최근 북한에서 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선거 때는 북한의 공산군이 38이남으로 쳐내려 온다는 것을 선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신경전을 위한 일종의 모략적 풍설이라고 하더라도 선거일 임박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치열하게 더욱 광범위로 파괴·방화·살육 등 소위 무자비한 투쟁을 할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연백지방에서는 음료수 우물에 독약을 투입하는 등 행동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안 공포속에서 어떻게 안심하고 입후보를 할 수 있으며 안심하고 선거운동을 할 수 있으며 안심하고 투표장소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입후보하는 사람은 전쟁에 출전하는 병사처럼 비장한 결의를 가지지 않고는 입후보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선거운동자중에도 많은 희생자가 날 것을 미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유권자중에는 위협을 느껴서 본의 아닌 기권을 할 사람이 무수히 있을 것도 틀림없는 일입니다. 투표소의 파괴·방화·유권자등록명부의 파기·소실·투표함의 운반도중 피탈 등으로 선거를 몇 번이고 반복하지 않을 수 없는 위험성이 도시를 제한 전선거구에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거울 드려다보듯이 명확히 알면서도 거기 대응할 방안을 강구할 자유를 가지지 못한 것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나라 없는 약소민족의 억울한 심정이 이런데서 일어나는 것을 깨달을 자유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한가지 방도가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이에 대한 적당한 조치를 기대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귀 위원단은 이러한 사태를 몰각하고 그 시선과 고려를 전연 딴 방면에 집중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때 실망과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서 파괴·방화·폭행·살인을 마음대로 하는 방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치 않고 그 폭동과 방해를 방지할 책임을 가진 경찰의 수족을 결박하고 선거를 수행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청년의 단체행동을 구속하기에만 주력한다면 그 결과는 선거일을 기하여 남북일대를 수라장화하고 생지옥화하는 것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을 여러분이 시인하실지 안 하실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5월 10일까지 이것이 사실로 증명될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사실로 증명되는 때는 우리의 희생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금번에 改變된 형사소송법은 그 주안이 귀 위원단의 요청에 응하는 데 있는 모양인데 그것이 이상적 법이론으로는 훌륭하나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는 도리어 부적당한 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준전시상태 半계엄상상태에 있는 것이 사실인데 재판소에서 원거리에 있어서 심판관의 영장을 가져오는데 3일이나 걸리는 경찰관서에서는 도피하는 범죄자를 보고도 손을 댈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임시조치의 방법이 있다하나 그런 짓을 하다가는 피의자의 교묘한 법정 진술에 의해서 체포한 경찰관은 억울하게 1일 80원 미만의 봉급을 받아가지고 피의자에게 1일 1천원의 보상금을 물어주게 될 터이니 어떤 경관이 그런 모험을 하겠습니까?


더욱이 1일 80원을 받는 경관은 어느 나라 국민이며 1일 천원 보상금을 받을 범죄피의자는 어느 나라 국민이겠습니까? 범죄피의자는 언제든지 경관에 비해서 13배 이상의 수입이 있는 사람이요 그만큼 고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란 이론이 어디서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법률을 초안해낸 사업당국자가 벌써 경찰에 대해서 편견 내지 모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여기에 경찰은 사법관을 신뢰하고 범인을 취급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결국 경찰의 활동을 극도로 견제하고 공산당원들에게 파괴·방화·살인 등 행위를 마음대로 하도록 무경찰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밖에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귀 위원단 여러분 우리의 말을 냉정히 친절히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위에서 여러분과 가장 친절히 가장 빈번히 접근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복면한 공산주의자(당원)와 그 공산당의 충실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우리는 그 인물들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교묘하고 적극적인 끊임없는 중상적 소개에 의하여 여러분이 韓國民主黨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우리는 짐작합니다.


유엔보고서에 본당을 극우라고 규정한데서 그것을 알았습니다. 또 여러분의 주위에 공산당계열 분자들이 싸고 돌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실정을 바로 보지 못하신다는 것은 금번의 자유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조치로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정말 자유분위기를 파괴하는 것은 공산당인데 그 공산당의 자유분위기 파괴공작을 방지하는 경찰과 청년단체를 자유분위파괴자로 오인한 것이 곧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여러분에게 불쾌감을 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런 말을 솔직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다시 한 말씀드릴 것은 선거법 제12조와 제44조에 특히 유의해서 고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개정 형사소송법과 선거법 제12조 제44조를 연락해서 생각할 때 극렬파괴분자들의 원하는대로 된 감이 있습니다.


2천명 미만을 한 區로 한 투표구 총수가 1만2천 이상이 되고 경찰서 지서 출장소 파출소 수가 2천4백 이상이요 군청 읍 면 동회사무소가 2천4백 이상이니 합계 1만4천8백이나 됩니다. 여기에 세무서 등기소 등을 합하면 요경계 장소가 도시를 제하고도 1만5천에 달할 것입니다. 그런데 남한의 경관총수는 4월에 증원이 되어가지고도 3만5천5백명밖에 안 된다고 하니 그렇다면 1만5천개소에 평균 2명의 경관배치도 곤란하며 그들은 행동을 극도로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5월 10일에는 총선거를 방해하는 자들이 활동을 마음대로 할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벽지에 있는 투표소가 등록완료후 투표일까지 25일간에 한 번만 습격을 당해도 그 기일에 선거는 불가능할 것인데 습격한 의사를 가진 분자가 있기만 한다면 이것을 피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맹렬히 습격을 기도하는 분자가 있는 것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분께서 기어히 그대로 한다고 하면 우리는 오직 독립을 위해서 깊은 한숨을 쉬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가면서라도 이 무방비의 희생을 각오하고 선거에 최선을 다할 결심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한국의 현실사태를 좀더 이해하실 수 있다면 다음 세가지를 특히 재고려하여 주시기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1) 형사소송법의 變改를 연기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2) 선거법 제44조의 투표구인원수(2천명)을 늘려서 투표구수를 줄이고 경비를 좀더 안전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3) 선거법 제44조 제2항의 사건이 발생할 때는 그 선거구 전체를 무효로 하지 말고 그 투표구만 다시 선거하도록 하기를 청합니다.









1948.5.13. 조선일보



[ ..... 현재 만주에는 우리 동포가 ... 백만명 가량은 중공군 점령지역에 거주 ....... 실로 절박한 사태 ...... ]



과정 외무처 중국과장이 재만동포의 참상 피력


11일 1천백명의 재만동포가 미국 상륙용 선박으로 귀환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 이어니와 현재 전쟁 틈바구니에서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살길을 찾고 있는 동북동포의 상황은 어떠한 것인가 귀환선으로 天津까지 다녀온 외무처 金중국과장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金 중국과장 담

“즉 현재 만주에는 우리 동포가 약 13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그 중 백만명 가량은 중공군 점령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요구호자는 安東·奉天부근 중앙군 지역내에 있는 약 30만명이라는 바 현재 奉天에는 약 2만명이 직접 생명의 위협을 받고 부랴부랴 귀국을 하고자 하고 있으나 그 중에는 자비로 비행기를 타고 天津까지 피신할 수 있는 사람은 1,200명에 불과하며 이미 약 2,000명은 도보로 錦州까지 나오기도 하였지만 실로 절박한 사태에 있다 한다.



그리고 현재 북경이나 천진에 나와 있는 이재동포들은 불과 250명밖에 되지 않은 거류동포들의 구호를 받고 있으나 앞으로 또 구호를 받는다면 재류동포들 자체가 파손할 지경이므로 일반 국내 동포의 구호의 손만 고대하고 있다 한다.


한편 현재 중국 국민정부에서는 수 많은 자기 나라의 이재민으로 있건만 제일 우선적으로 우리 동포 귀국 알선에 주력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로 하여금 우방의 따뜻한 정에 감격케 하고 있다 하며 구호 제2선이 또 23일내에 떠날 것이나, 한 행차에 7백만원씩 드는 이 구호사업은 앞으로 일반의 협력이 없으면 대단히 곤란할 것이라 한다.”









1948.5.16.



[ ...... 남조선일대에 전면적으로 시위 폭동야기를 지령 ........


...... 神人共怒할 잔학무도의 원시적 만행을 자행하면서 성스러운 인민의 구국항쟁이라고 일반을 선동 ........

..... 소련을 배경으로 하는 남북로동당의 일관된 구체적 지령에 의하여 전선적 규모에서 조직적으로 ........ ]



[ ...... 조선사람으로는 감행하지 못하였을 것 .......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흉악무도한 소련식 공산주의의 테로형식과 방법에 감화된 야만적 소수인간들의 범죄 ........ ]




조병옥, 남로당계 총선반대투쟁 진상 발표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8년 05월 18일




지난 3월 30일 이후 선거일까지 선거방해 실황에 대하여 趙경무부장은 16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조선역사상 초유에 총선거가 국제적 環視裡에 좌익계열의 갖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유례가 드문 모범적 성과를 擧揚한데 대하여는 실로 민족적 自誇를 不禁하는 바 치안담당자의 입장에서 차제에 특히 치안면에 나타난 좌익계열의 소위 총선거반대투쟁의 진상과 그 파괴적인 본질을 규명하여 일반비판에 資하려 한다.



금반의 총선거실시가 국제적으로 결정됨에 경악한 남로당계 지도자들은 去 2월 7일을 기하여 남조선일대에 전면적으로 시위 폭동야기를 지령하였다. 그들의 조직망에 의하여 총선거반대의 구호밑에 무고한 다수의 생령은 참혹히 희생되고 경제력이 빈약한 조선의 귀중한 시설과 많은 건설재료가 逐次로 파괴 상실되었다.


3월 29일 선거인등록이 시작되자 그 제2단계로 선거사무소의 습격·방화·선거위원 및 입후보 내지 그 가족에 대한 살해·협박·경찰관서습격 및 경찰관의 살해등 선거방해에 직접적 행동을 개시하는 일방 全鮮的 파괴폭동의 계기를 조성하기 위한 제주도소요를 야기하고 神人共怒할 잔학무도의 원시적 만행을 자행하면서 성스러운 인민의 구국항쟁이라고 일반을 선동하였다.


중간파와 완미한 일부 우익정객들이 소위 남북정치협상 운동이 구체적으로 추진되자 그들은 이것을 선전공세의 절호한 조건으로하여 순진한 다수 청년학도들의 애국심을 역용왜곡된 지도원리로서 이를 동원하여 맹휴 내지 폭동에 직접 助勢케 하였다.


5월 10일 선거일이 박두함에 따라 다시 전조직망을 총동원하여 최후최대의 결정적 파괴계획을 수립하고 선거전야 5월 8·9양일에 亘하여 전교통통신기관의 시설파괴 및 파업으로서 其機能의 전면적 마비를 기도하고 선거당일 폭력으로서 남한전투표소를 습격하는 일방 투표에 동원된 각 부락에 방화약탈을 자행하여 총선거실시를 최후적으로 파괴할 기도이었으나 일반국민이 높이 평가될 판단력과 향보단을 위시한 民間諸團作의 불민부휴의 필사적 노력에 의하여 남로당계열의 此戰慄할 매국적 기도는 一夕히 수포에 귀한 것이다.


그러나 기간의 인적 물적 피해는 左記와 여히 실로 국립경찰치안사상 초유의 것으로 금반 폭동음모의 본질의 전율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금반 남로당계열의 총선거반대폭동음모의 본질을 분석하면 다음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조선의 총선거를 보이코트한


1) 소련을 배경으로 하는 남북로동당의 일관된 구체적 지령에 의하여 전선적 규모에서 조직적으로 행해진 것


2) 중간파 및 일부 우익불평정객을 중심으로 한 소위 남북정치협상운동이 결과적으로 남로당계열의 금반음모계획에 절호의 영양소적 역할을 담당한 점


3) 금반 폭동의 구체적 범행이 10일 대구폭동시와 여히 극히 잔인무도한 것으로 인간성을 무시한 남로당계열의 본질을 연구하는데 好資料가 될 것 등이다.



기실례를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1) 제주읍 오라리에서는 임신 9개월된 부인을 경찰관에 협력한 大靑員의 형수가 된다는 이유로 죽창으로 자살하였다.

2) 전남 순천에서는 투표구 후보선거위원을 방망이로 타살하고 그 처까지 치명상을 준 후 가옥에 방화까지 하였다.

3) 경북 달성군 東村面에서는 선거를 지지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무식한 농민을 단도로 자살하였다.


이런 만행은 동방의 예의국민으로 자타인정된 전통을 가진 조선사람으로는 감행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성공을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흉악무도한 소련식 공산주의의 테로형식과 방법에 감화된 야만적 소수인간들의 범죄임이 틀림없다.”



(被害狀)


선거사무소피습 134

관공서피습(주로 경찰지서) 301

테로 612

선거공무원피살 15

동 부상 61

후보의원피살 2

후보의원부상 4

경찰관피살 51

동 부상 128

관공리피살 11

동 부상 47

경찰관가족피살 7

동 부상 16

양민피살 107

동 부상 387

선거사무소방화 32

경찰관서방화 16

관공서방화 16

양민가옥방화 69

도로급교량피살 48

기관차파괴 71

객화차파괴

철도노선파괴 65

전화선절단 541

전신주절도 543

선거관계서류피탈 116








1948.6.2.



경무부장 조병옥, 선거반대소요와 경찰업적에 대해 담화 발표


서울신문 1948년 06월 06일



2·7이후 총선거 실시까지의 경찰의 업적에 관하여 2일 조경무부장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1) 서론 = 조선문제가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인하여 국제연합에 예속하여 독립안이 가결되자 남북공산당은 소련의 시사에 의하여 국련결정을 무효케 하기로 결의하였고 국련조선위원단이 북조선입경을 거부당함으로 말미암아 가능지역 총선거가 결정된 후에는 선거파괴 행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2) 선거방해공작의 방법과 규모 = 선거방해공작은 선전모략과 파괴행동의 두가지로 나눌수 있다.


남로당은 각세포단체에 지령을 발하며 38이북 이미 인민공화국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

남조선에는 국방력이 미약함에 반하여 북조선에는 강력한 수십만의 군대가 조직훈련되어 있다는 것

金日成이 이미 혹은 불일내로 남조선을 무력 접수한다는 낭설을 유포하고 민심이 동요되는 기회를 포착하며 이때에 총궐기하여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경찰관을 살해하며 우익지도층을 타도하고 총선거를 반대하지 않으면 민족반역자로 처단을 받게 된다고 단순우매한 민중을 기만선동함


남로당지령하에 반선투쟁위원회를 조직 그 세포조직을 남조선전역에 포진하는 일방 남북공산당의 연석회의인 소위남북협상을 개최하여 민족진영의 분열을 꾀함과 동시 총선거의 파괴를 기도함.


지령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공장·학교·기타생산기관에 대한 총파업 지령


가) 파업선동

나) 학생맹휴

다) 데모(비행기데모)

10명이내의 인원으로 1조를 편성 시가지역은 군중집합처에 至하여 총책임자의 신호로 3인식 어깨를 맞추고 급속 총집합하여 군정반대 기타 예정한 구호를 부른후 사방으로 분산 도주함.

라) 아지푸로

5인내지 20인으로 조를 편성 시가지 혹은 미조직 부락에 至하여 징·꽹가리 등을 쳐서 군중을 집합 선동연설을 함

마) 산업기관 파괴

기계의 일부파괴 또는 중요부속품을 盜取하여 운전을 불능케 함.(略)



2) 선전선행대의 정체


殺戮과 파괴를 담당한 소위 선전선행대는 그 책임이 남로당에 귀속함과 기밀누설을 방지키 위하여 금년 4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결정으로 조직되었다.


同隊는 선전선행대의 최고기관이 남로당최고기관의 지령을 받을뿐 남로당과는 별개의 독자적 전조선통일체로 남로당의 정예분자로 조직되어있다.


同隊의 보조조직으로 백골대 투탄대 인민청년군 등의 특수조직체가 있으며 공격대상은 경찰을 주로한 관공서 통신기관 운수기관 특히 기관차 철교등 언론보도기관 생산기관 말단행정급 동회관계자 우익진영요인 및 경찰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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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정 칼럼] 대한민국, 주권자의 용기가 만든 나라


선우정 논설위원

20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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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 교수는 어제 ‘조선칼럼’에서 대한민국의 첫 민주 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아니라 ‘1948년 정부’라고 했다. 5·10 총선거를 통해 수립된 정부다. 공감했다.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당시 선거는 전쟁 같았다. 선거를 파탄 내려는 좌익 폭동으로 선거 직전 나흘 동안 투표소 57곳이 공격받아 민간인 72명과 경찰 7명이 숨졌다. 그럼에도 등록 유권자의 95.5%가 투표에 동참했다.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주권자의 용기가 만든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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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6.9.


조병옥, 제주소요사건과 관련 공산계열의 만행 폭로


경향신문 1948년 06월 09일



조경무부장은 공산계열이 감행한 만행의 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남조선의 질서를 교란하고 치안을 파괴하여 북조선과 같이 소련에 예속시키려는 공산계열의 목적달성을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무자비한 폭동만행은 총선거실시에 따라 민중에 대한 공포심 주입과 단말마의 최후 발악으로 더 한층 포학과 잔인성을 나타내었으니 그 일예를 제주도 폭동에서 들면 다음과 같다.



폭동이 일어나자 1읍 12면의 경찰지서가 빠짐없이 습격을 받었고 저지리 청수리 등의 전 부락이 폭도의 방화로 전부 타버렸을 뿐만아니라

그 살상방법에 있어 잔인무비하여 4월 18일 신촌서는 6순이 넘은 경찰관의 늙은 부모를 목을 짤러 죽인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대동청년단 지부장의 임신 6개월된 형수를 참혹히 타살하였고 4월 20일에는 임심중인 경찰관의 부인을 베를 갈러 죽이였고


4월 22일 모슬포에서는 경찰관의 노부친을 총살한 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임신 7개월된 경찰관의 누이를 산채로 매장하였고


5월 19일 제주읍 도두리서는 대동청년단간부로써 피살된 김용조의 처 김성히와 3세된 장남을 30여명의 폭도가 같은 동리 김승옥의 노모 김씨(60)와 누이 옥분(19) 김중삼의 처 이씨(50) 16세된 부녀 김수년 36세된 김순애의 딸 정방옥의 처와 장남 20세된 허연선의 딸 그의 5세 3세의 어린이등 11명을 역시 고히숙집에 납치 감금하고 무수 난타한 후 눈노름이라는 산림지대에 끌고가서 늙은이 젊은이를 불문하고 50여명이 강제로 윤간을 하고 그리고도 부족하여 총장과 죽창·일본도 등으로 부녀의 젖·배·음부·볼기등을 함부로 찔러 미처 절명되기전에 땅에 생매장하였는데 그중 김성히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어왔다.


그리고 폭도들은 식량을 얻기 위하여 부락민의 식량 가축을 강탈함은 물론 심지어 부녀에게 매음을 강요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등 천인이 공노할 그 비인도적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









* 1948.6.3 노력인민



[ ..... 반동숙청에 영웅적 혈전 벌어진 제주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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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 (1948년6월3일)에 4.3에 대한 기사 중 다음과 같은 제목과 부제목으로 4.3에 대하여 보도했다


"조국의 식민지 분쇄전에 全島 순국열정으로 작열(灼熱)

- 반동숙청에 영웅적 혈전 벌어진 제주도 -


"조국을 방어하기 위하여 민족의 선두에서 사투하는 제주도 애국동포를 구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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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6. 남로당


* 제주 투쟁에 대한 격려문



친애하는 제주도 인민대중들이여! 조국해방의 전사들이여!


우리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조국의 통일과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미제국주의와 침략자 그 주구들이 음모하는 단선단정을 쳐부수기 위하여 영웅적으로 항쟁하는 여러분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과 끓는 형제적인 인사를 드립니다.--


당신들은 오늘 위대한 조국해방의 역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장에는 구국의 뜨거운 피가 끓고 있으며, 여러분의 팔뚝은 영웅적 항행의 공격정신에 뛰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숭리할 것이며, 또 승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승리를 확신하고 돌진합시다! 우리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여러분과 함께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용감하게 싸울 것입니다.


1.위대한 구국항쟁에 돌진하는 제주도 인민에게 승리와 영광을 드리자!

2. 단선분쇄투쟁에 육탄돌격을 감행한 인민영웅들의 뒤를 따르자!

3. 망국민족 침략으로부터 조국주권방어를 위한 구국인민항쟁만세!

4. 통일적 민주주의 조선 완전자주독립만세!



1948년 6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 黨 中央委員會 메시지에 答함



--우리는 이 고귀한 메시지를 방방곡곡 모든 항쟁대열에 전하였으며, 또한 이미 원수들의 총칼에 쓰러진 존귀한 동지들과 인민영웅들의 무덤에 이 영광의 꽃다발을 드렸습니다.

----제주도 항쟁이 “조선인민의 모범적 항쟁이며”"우리조선민족의 영예와 불굴의 애국심을 전 세계에 선양하였으며, 따라서 “조선인민은 제국주의적 폭압과 학살로도 멸할 수 없는 것을 천하에 公示”하는 역할을 놓았다고 평가하여 주신 것은 과분의 명예로 생각함과 동시에 존귀한 지하의 영웅들과 항쟁하는 전사들의 의사를 대표하여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조국해방 투쟁사상에 불멸의 금자탑’을 이루는 영예를 실지에 관철할 것을 지표로 하여 망국멸족의 단선분쇄의 가열한 초소를 죽엄으로써 지킬 것이며, 통일독립을 우리의 손으로 전취할 때까지 과감히 투쟁할 것을 확언하고 맹세합니다..


1.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만세!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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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93233

[제36회 이승만 포럼] 제주4.3사건의 진실 /현길언 교수
제주4.3 '반란폭동' 지우기, 노무현 정권의 의도적 역사 파괴 폭력
2014.02.22








1948.6.23



[ ...... 근본원인은 조선의 소련방화 내지 위성국화를 기도하는 공산당의 남조선파괴공작의 강행된 그 일단으로 총선거방해공작 ........


...... 북조선을 그 세력하에 두고 남조선을 窺視하는 소련이 그 야심과 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한 如斯暴動은 제주도에 국한되지 않고 ........ ]




조병옥, 제주사건 수습 담화 발표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6월 24일



조병옥, 제주사건 수습 담화 발표



23일 趙경무부장은 제주도 치안수습에 대하여라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제주도 치안에 관하여 정부기관의 책임자 또는 정치사회단체 혹은 언론기관에서 그 의견을 발표함에 있어 폭동이 발발하고 치안이 교란 파괴된 원인을 행정·사법기관의 인사행정이 편파 혹은 처사의 원만성 결여 등에 대한 불평불만 및 경찰관의 비민주적 과오 등에 돌리어 추상적이고 잠깐 동포애를 고조하고 인정론을 부르짖는 바 있으나 如斯諸論은 사고와 판단의 착오 및 피상적 관찰에 기인한 本末顚倒의 謬見이라고 사료하는 바이다.


물론 여사제론은 폭동의 간접적 또는 보충적 원인을 지적함에는 족하다 할 것이다.

즉 제주도의 역사적 특수성과 도민의 배타심과 그리고 경찰말단의 민주주의 원리에 대하여 범한 과오도 그 원인의 일부로 사료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이는 보충적 원인에 불과하다.



그 근본원인은 조선의 소련방화 내지 위성국화를 기도하는 공산당의 남조선파괴공작의 강행된 그 일단으로 총선거방해공작에 불과한 것이다.


그 유래가 요원하고 규모에 있어 방대하고 치밀하니만큼 북조선을 그 세력하에 두고 남조선을 窺視하는 소련이 그 야심과 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한 如斯暴動은 제주도에 국한되지 않고 남조선 일대에 전파만연됨으로 당분간 남조선에는 정상적 치안의 복구를 기대할 수 없는 사정이다.


그럼으로 치안수습책은 법을 무시하고 살인·방화등 파괴만행에 전념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독립을 방해하는 자는 엄중처단하고 무지몽매로 인하여 부화뇌동한 자는 善撫善導하는 방침 외에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법을 범한 자라도 飜然悔悟하여 자수속죄하는 자는 사법당국에서 그 정상을 작량하여 형을 관대히 처리할 것이다.


국립경찰은 이 원칙에 의하여 제주도경찰을 강화하고 인사의 공정과 경찰행정의 민주화를 도모하여 인권유린을 방지하고 警民의 융화를 두텁게 하여 경찰과 사회의 원만한 소지를 만들기에 노력할 것이다.


폭동 만행수습의 근본방침은 종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거듭 천명하는 바이다.”








1948.9.10.


국토완정론



김일성은 1948년 정권수립 다음날인 9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강'을 발표하고 국토완정과 민족통일의 선결조건으로 미·소 양국 군대의 동시철수를 내세웠다. 여기서 국토완정이라고 함은 전 한반도를 공산화 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민주기지론에 입각한 북한 지역에서의 혁명기지 구축이 어느 정도 이루어짐에 따라 전 한반도의 공산화를 통한 통일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북한은 그들이 이른바 전 조선혁명을 위한 혁명기지를 건설했으나 남한은 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강점되어 미(未) 해방지구로 남아있는 만큼 미 제국주의 침략 군대를 몰아내고 식민지 통치를 청산하여 남조선 인민들을 해방시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치하에 조국통일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국토완정인 것이다.


이 국토완정이야말로 당시 북한 정권의 일차적 사명이었으며 이를 위해 화전 양면의 전략을 택하였다. 그 하나는 북한군을 강화하고 소련의 군사적 지원을 으면서 무력남침을 준비해 나가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발족시켜 연석회의, 남북총선거, 남북 국회 통합 등 일련의 평화공세를 전개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마침내 1950년 남한에 대한 전면 기습공격으로 이른바 '민족해방전쟁'을 일으켜 국토완정을 실행하고자 했으나 유엔군의 참전으로 그들의 목표는 좌절되었다. 그 이후 북한은 1960년대 다시 군사노선으로 돌아설 때까지 당분간 평화통일을 내세우며 경제적 기반을 복구하고 정치적 안정을 기하는 등 체제 정비에 진력하면서 이 국토완정이라는 말도 잠적했다.


통일부 통일교육원 - Education Center for Unification









[ ..... 제주도 반란 진압을 위해 파견을 준비 중인 여수 14연대가 여순반란을 ...... 갓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여순반란과 제주반란의 진압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 ]



[ ...... 목전에 다가온 중국의 공산화와 날로 강성해가는 북한 정권, 그리고 예정된 주한미군의 철수 ......... ]



“제주 4.3은 총선-건국 깨려는 남로당 봉기”



온종림

2009-08-17



“제주 4.3은 남로당이 5.10 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조직한 무장 봉기였다.”


손경호 국방대 교수가 17일 오후 서울 정동교회 아펜셀러홀에서 열린 우남이승만연구회 제47차 콜로퀴엄 강연을 통해 이같이 제주 4.3의 의미를 정의했다.


손 교수는 이날 강의를 통해 “제주의 공산주의자들은 남로당 중앙당과 북한의 지원과 지도 아래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한국 정부는 출범 이후 공산주의 세력으로 삼면이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제주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제주도 반란 진압을 위해 파견을 준비 중인 여수 14연대가 여순반란을 일으켜 결국 제주도 반란은 전국적으로 파장을 끼치게 되었다”며 “이로 인해 1948년 8월에 갓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여순반란과 제주반란의 진압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은 목전에 다가온 중국의 공산화와 날로 강성해가는 북한 정권, 그리고 예정된 주한미군의 철수로 인해 심각한 안보적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제주도마저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넘어가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김달삼을 비롯한 제주 반군의 지도자들이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자 제주 사태는 단순한 지역 공산주의자들의 봉기가 아니라 이미 정권을 수립한 남과 북의 공식적인 대결의 장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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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9.10. 김일성 국토완정론 정강

1948.10.15. 중공 금주 함락

1948.10.19. 여순반란사건

1948.10.23. 중공 장춘 함락

1948.10.24. 이덕구 선전포고

1948.11.1. 중공 심양 함락

1948.11.2. 제주 인민유격대가 국군 9연대 6중대 공격, 국군 21명 사망

1948.11.2. 대구 제6연대 반란

1948.11.17. 대통령 계엄선포
강경진압작전 전개

1949.1.22. 중공 북경 함락

1949.8.29. 소련 핵실험 성공

1949.10.1.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1948.10.8.



[ ..... 모든 地域을 필境 中共軍에 占領할 것이라고 確信 ........ ]




內蒙古·河北·山西一帶 中共軍 馬蹄에 蹂躪

滿州의 國軍後方을 攪亂 濟南錦縣長城도 中共이 掌握





抗日八年 어든 것은 무엇인가

各地重要鉄道運行不能 北平·南京도 陷落前夜 國軍依持는 單只空路




남조선민보


1948년 10월 08일




【北平六日發電文延着AP合同】 中國에 있어서의 國府軍側 戰局現況은 內戰 發生한 以來 가장 惡化되어 잇어 卽 中共軍側은 南京을 陷落시킬려면 前途遙遠하다고는 하나 現在의 進軍速度가 制止되지 않고 그것도 繼續된다면 國府軍은 致命的打擊을 입을 것이고 南京이 現在 危險한 狀態下에 노여있다는 것은 疑心할 餘地가 없다. 將介石氏는 空路 華北을 訪問한 것도 이 点을 如實히 證明하고 있거니와 지난 週日間의 中共軍戰果는 赫赫한 것이다. 卽 中共軍은 山東省首府 濟南市를 占領하는 한便 滿주의 國府軍廻廓地區에 一大裂決을 지엇으며 또 內蒙古에 進擊하여 華北의 後門을 事實上 封鎖해버렀다. 그리고 濟南占領으로 말미아마 中共軍은 山東半島로부터 하北 山西를 거처 內蒙古에까지 미치는 油狀地帶를 形成하야 實際的으로 華北의 廣大한 範圍를 完了하엿다. 뿐만아니라 中共軍은 滿주에서의 勝戰에 依하여 國府軍 地上輸送을 麻비시키고 滿주國府軍 第二의 基地인 금縣을 孤立化시키고 호盧島港도 危險化하엿다.




萬若에 中共軍이 금縣과 호盧島를 占領하고 금縣 萬里長城間 鐵道를 完全히 장握한다면 滿주의 國府軍은 完全히 封鎖되어 기끝해야 奉天에 ◈하는 空路박에 維持할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케 되면 中共軍은 그 强力한 部隊를 滿주作戰으로부터 他地區에 移動시킬수 있으며 中共軍은 全內蒙古를 장握하거나 不遠萬里長城을건너 華北의 中心地 卽 北京과 天津方面에 衝擊을주기 爲하여 그 主力을 移動할 것이다. 그리고 또 萬若 中共軍이 內蒙古의 슈遠省 主要都市 안 歸슈의 包頭를 占領한다면 그들은 華北에 ◈한 致命的一擊을 加할수 있는 더욱더 有利한 地位를 갖이게 될 것이다.




國府軍華北總司令官 傅作儀將軍은 數個月前부터 보다더 多量의 優秀한 武器를 供需하여 줄것을 要求하엿으나 언제나 他地區의 要請에 먼저 優先權이 賦與되었든 것이다. 如此한 理由로 말미아마 同將軍은 中共軍을 馳逐할수 없었을 것이다. 同將軍 統管下의 五個省은 總計四〇萬平方哩의 面積을 갖이고 있으니 現在 中共軍은 하北省의 三分之二 以上과 山西省의 거이 全部를 包含하야 그 地域의 過半을 点領하고 있다. 傅將軍은 前線部隊에 新武器를 供給하고 그 舊式器는 地方軍에게 移讓할것을 要望하고 있다.




中央軍의 傳將軍部隊의 相互連락을 斷絶시켜버려고 北京及包頭間의 鐵道의 大部分은 現在 中共軍의 手中에 드러가 있거나 또는 運行不能狀態에 잇다. 熱하省에 通하는 鐵道는 方今 北京으로부터 北方 三〇哩 地點間에서만 運行되고 잇고 萬里長城以南의 北部奉天間鐵道는 겨우 北京 天津間에서만 圓활하게 運行되고 잇다. 天津 唐山以遠은 全혀 交通杜絶狀態에 있다. 그리고 北京 漢口間의 鐵道는 때에 따라 北京으로부터 二〇哩 乃至 六〇哩地點까지박에 運行되지 못하고 있다. 天津 浦口間鐵는 天津으로부터 겨우 二〇哩地點박에 運行이 되고 잇다. 要컨대 華北의 政府支持者들은 憂鬱한 얼골을 보이고 있으며 그들의 大部分은 北京 天津等을 包含하는 모든 地域을 필境 中共軍에 占領할 것이라고 確信하고 있다.










[ ..... 북한인민공화국은 민족의 절대한 自由를 부인하고 외세에 아부하는 도배들이 某國의 지령을 盲從하여 교묘한 선전과 무자비한 강압으로 수립된 것은 천하 주지의 사실이다 ....... ]




勤勞大衆黨, 새 출발을 성명


국민신문 1948년 09월 26일



勤勞大衆黨에서는 작25일 그 간의 노선을 버리고 민족적 이익에 입각하여 새 출발한다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북한인민공화국은 민족의 절대한 自由를 부인하고 외세에 아부하는 도배들이 某國의 지령을 盲從하여 교묘한 선전과 무자비한 강압으로 수립된 것은 천하 주지의 사실이다.


본당은 發黨 이래 기회주의·추수주의로 방황하다가 금번 重要部들이 북한정권에 가담하였으나, 본당 소장 간부를 선두로 튼튼히 집결된 전 당원은 과오를 범한 간부들과 단호 결렬함과 동시에 과거의 기만적 정치노선을 飜然히 버리고 오직 민족적 이익에 입각하여 신출발할 것을 엄숙히 성명한다.”







19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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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김달삼의 행적은 여러 갈래의 설이 전해진다. 강동정치학권에서 빨치산 간부교육을 받은 뒤 인민유격대 태백산 지구 총수(總帥)가 되어 남하, 유격투쟁을 벌이다가 사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 로서아에서 한국에 온 강동정치학원 원장이었던 박병율도 “강동정치학권에서 지리산 빨치산 지도자 이현상, 제주도 빨치산 지도자 김달삼 등을 포함해서 빨치산 간부들을 교우시켰다.”고 말했다.


김달삼이 남하한 것은 1949년 8월초로 알려졌다. 직책은 인민유격대 제3병단 태백산지구 사령관, 그는 3백명의 유격대와 함께 경북 영덕과 안동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춘천발 고려】지난 8일경 홍천군 화촌면 방면에 무장 폭도 약 50명이 출현하여 우리 군경은 이를 포위 추격 중에 있거니와 19일 강원도 경찰국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금번 출현한 공비는 지난번 제주도 사건 총지휘자였던 소위 남한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이 지휘하는 유격대라 하며, 그중 13명은 이미 사살하였다 한다.’-서울신문 1949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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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9. 소련



[ ...... 첫째로 빨치산 운동을 개발하고, 해방 지구를 만들어 내고, ........ ]



소련 정부가 1949. 9. 24일 자로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보낸 훈령:


“한반도 통일을 위한 투쟁을 하는 현 시점의 임무는, 첫째로 빨치산 운동을 개발하고, 해방 지구를 만들어 내고, 반동 정권을 쫓아내 한국 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전반적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둘째로, 인민군을 모든 면에서 좀더 강화하는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 할 것이 요구된다.”









1948.3.


[ ...... 새로운 희망을 안고 남북통일의 날을 기다리며 .......


...... 남하하는 동포는 매일 8백명 내지 1천명으로 날마다 그 수가 늘어 ....... ]



38선 월남자수 급증



동아일보

1948년 03월 04일




3천만 민족이 갈망하던 조선중앙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국제연합소총회에서 가결 결정되어 오는 5월9일 조선위원단 감시 밑에 그 실시를 보게 되었거니와 이 반가운 소식이 電波를 통하여 북조선 동포들에게 알려져 그 모진 억압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안고 남북통일의 날을 기다리며 또 한편 성급한 겨레들은 보따리짐짝이나마 죽음의 고개 38선을 넘어 오고 있는데 요즈음 開城 議政府 春川 注文津 등 각처 수용소를 통하여 남하하는 동포는 매일 8백명 내지 1천명으로 날마다 그 수가 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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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3.


[ ...... 월남동포가 약 150만 명이고 그후도 계속적으로 매달 2, 3만 명이 월남중 ....... ]



월남자 140만 명, 귀환동포 200만 명 등 이재민 실태



대한일보

1948년 09월 11일




해방 이후 해외 각지로부터 귀환한 해외동포, 38이북으로부터 남하한 월남동포 또는 그 동안 마비상태에 빠진 각 생산공장에서 수없이 밀려나온 실업자군, 기타 친족·가족 등을 잃어버리고 거리를 방황하는 어린이·노인 등 300여만 명이 지금 남조선 각지에서 조국애도 동포애도 인정도 모르는 채 정처없이 헤매이고 있다.


즉 그 동안 보건후생부·외무처·노동부 등에서 지난 3월말까지 조사한 숫자로만 보더라도 월남동포가 약 150만 명이고 그후도 계속적으로 매달 2, 3만 명이 월남중에 있다고 하며 해외귀환동포는 모두 212만 7,503명, 세궁민이 약 1백만 명, 실업자가 약 103만 명 그밖에 孤子·불구자 등의 구호를 요하는 자 약 21만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구호를 요하는 자 수는 실로 남조선 총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300만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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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4.


[ ......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 ]



월남한 북로당원 유재민, 이북실정 폭로



동아일보

1948년 04월 30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요인이며 북로당원의 일인인 柳在敏은 북조선의 金日成정책이 비민족적임을 지적하고 25일 월남하여 시내 모 여관에 여장을 풀고 있는데 氏는 왕방한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 귀하가 월남한 이유는 무엇인가


(答) 나는 북로당원의 일원이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조선을 적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인민의 생활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어 인민들은 의식주 안정을 찾기 위하여 남하하는 것이다. 나도 유엔조위의 來朝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북조선의 유엔위원단에 대한 불협조에 불만을 품고 그리운 고향을 뒤로 남하하였다.



(問)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는가


(答)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에 하등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데 도리어 남조선 동포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다. 하여간 이북동포들은 여러번이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모략 선전에 속아왔기 때문에 이번 남북협상도 기대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면 총선거의 반대 공작이라는 것은 이북동포들도 잘 알고 있다.



(問) 金九씨는 현재까지 공산주의자들과 적대시하여 왔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金九타도라는 구호를 부르짖어왔던 것인데 최근의 金九씨 태도를 이북동포는 어떻게 보는가


(答) 남조선동포들은 북쪽 동포를 전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보는 듯하나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90퍼센트에 달하는 우익적 동포들은 李承晩·金九 양씨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숭배하여 왔다. 金九타도라는 구호에 우리 우익에서는 반감을 가지고 왔던 것인데 이제와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전조선에 공산주의정책을 감행하려는 金日成파의 책동에 추종한다면 3천만을 지도할 영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問) 이북동포들은 5월 10일 실시될 총선거를 어떻게 보는가


(答) 이에 대하여서는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으나 유엔위원단 입경을 거절한 소련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하루바삐 국제무대에서의 우리 독립국가가 실현될 방법을 갈망하느니만치 이번 선거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1948.5.31. 제헌국회


[ ..... 이승만을 188표라는 압도적 표수로 의장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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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5월 31일 국회 개원 축하행진이 온 시가를 누비는 가운데 오전 10시에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198명의 당선자 전원이 참석하여 제헌국회가 개원되었다. 최고령자로서 임시의장을 맡은 이승만은 회의 진행에 앞서 종로 갑구 출신의 목사 이윤영(李允榮) 의원에게 기도를 올리게 했다.


이어 제1차 본회의에서는 국회법과 국회규칙이 제정될 때까지 사용할 ‘국회준칙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곧바로 의장단 선거에 들어가 이승만을 188표라는 압도적 표수로 의장으로, 신익희와 한국민주당 김동원(金東元) 두 의원을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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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承晩 1,024표 .... △朴憲永 62표, △金日成 33표 ......... ]



동아일보 1948년 06월 27일

조선여론협회, 초대대통령 선출 가두여론조사



조선 여론협회에서는 23일 서울시내 5개소에서 초대 대통령은 누구를 원하오하는 설문으로 통행인 1천5백명의 여론을 조사한 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李承晩 1,024표, △金九 568표, △徐載弼 118표, △金奎植 89표, △朴憲永 62표, △金日成 33표, △許憲 30표, △李靑天 26표, △曺奉岩 18표, △申翼熙 12표, △이외 23명 45표, △무효 475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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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상전인 소련의 지령으로 선거를 반대하고 있다. 그들은 절대적인 공산당의 형식과 지배 이외에는 여하한 형식의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를 원하지 않는다. 왜그러냐 하면 그들은 선거를 행하면 자기의 국가를 공산주의의 일위성국가로 팔아 먹고자 하는 조선인의 수효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될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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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대한 사실은 공산당과 밑走狗들의 선거에 대한 모든 선전 및 위반 또는 선거를 배척하고 반대하는 자들의 온갖 수단에도 불구하고 남조선내의 전유권자의 90% 이상이 등록을 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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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날 짜 2003년 7월 26일


이승만: "인간은 콜레라와 타협할 수 없다"




金正日에게 체제보장을 해주고 돈을 주면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라고 믿는 바보 겸 위선자들에게 李承晩 건국 대통령이 미리 남긴 말이 있다.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타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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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유일한 독립 운동가임 !!!!



글쓴이 우익만이 살길 날 짜 2004/04/29




독립운동가들중에,,,,
좌익도 있었고 무정부주의자도 있었다!
그들은 결국 이나라를 더 어렵게 했다!

이승만만,,,,독립운동가라고 할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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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시? 이승만이 나라를 망쳐?


글쓴이 대중이




이승만 시대에 들끌던 빨갱이 때려잡은 공이 얼만데 나라를 망쳐?

그분 없었으면, 박정희 시대도 들어가기 전에
이나라는 빨갱이화 했다..


정말 고약한 심뽀 아님,
역사관이 0 점 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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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


제목 : 미군부터 죽이고 전진해라 !!!

미군부터 죽이고 전진해라 !!!



6.25 전쟁후 한국에는 - 정말 피폐하고, 자원도 없고, 과부, 고아들이 득시글대던 - 미군기지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구의 역사상 유례없게 초강대국가 미국이 자국군 일개 사단을 바로 적들의 코앞에 trip wire 란 명목으로 늘 주둔하게 만들어서, 한국인을 죽이려거든 우리 미군부터 죽이고 전진해라 하는 희안하고도 기막힌 정책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은 대체 한국인의 무엇을 보았기에, 우리부터 죽이고 나서 한국인을 죽여라 라는 정책, 또는 한국인에게 손대면 너희들 먼저 요절날 것이다 는 정책 소위 인계철선 이라는 정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자녀를 외국, 아주 먼 나라, 예를 들면, 지금의 콩고 같은데에다 적들이 총부리를 겨누는 바로 코앞에 그대들의 자녀를 배치하고 우리 자녀부터 죽인 후 콩고 흑인들을 죽여라 하는 그런 일을 감히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천만에 이지요. 아마 절대로 그런 요상한 일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듯 합니다.


그럼 한국인들은 대체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아름답게 보였기에,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국민들은 키작고 색깔도 노란 가난하기 그지없던 한국인들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한국인의 생명을 그처럼 고귀하게 취급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정책을 시행하게 된 것입니까 ?



한국전을 치룬 후 맥아더 원수는 미국 의회로 돌아가 고귀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국민들에 대한 극찬이 들어있습니다.


"전세계 국가들 중에서 한국만이 지금까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워온 유일한 나라입니다. 한국국민들이 보여준 그 대단한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노예상태를 택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무릅쓰고자 ?습니다. "


북진통일을 요구하던 고집스런 이승만대통령에게 하루 빨리 휴전에 동의하게 만들기 위해서 한국을 찾았던 미국무부 월터 S. 로버트슨 차관보는 그의 정부에다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 대통령은 전 국민을 분발시켜 공산주의와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미국을 포함해서 세계 어느 나라의 지도자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정신과 의지는 보존해야 하며, 파괴해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장비를 제공한 그의 군대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가장 크고 강력한 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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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노XX 정권과 X대중의 반역죄를 보며 낭패감과 울분과 좌절에 젖는 여러분과 저의 피속에 13척의 배로, 백여척의 왜적배를 몰사시킨 이순신 장군의 분노가 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피속에 전세계에 유례없이 공산당들에 강인하게 대항해 죽기까지 싸운, 죽음을 두려워않고 치열하게 싸운 한국인의 피가 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부패와 타락에 찌들어 살 핏줄들이 아니고, 여러분의 삶은 보다 고상한 이상과 목표를 위하여 진행되고 설계된 한반도 역사의 자랑스러운 후손들, 작품들입니다.
여러분들의 피 속에 맥아더 원수가 극찬한, 미국인들이 감동한, 고귀함, 정의에의 용기,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 깨어 나십시오.
잠자는 당신들의 영혼을 깨우십시오.
정의를 향하여, 고상함을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총이든 칼이든 부여잡고,
기울어가는 이 나라, 죽어가는 이 나라의 운명을 살리기 위하여 그만 잠에서 깨어 일어나라고 명하십시오.


우리들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인입니다.
우리들은 불의에 굴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은 연방제통일주의자들의 농간에 속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은 한총연,전교조, 범민련의 농간에도 속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은 공산주의자들을 기필코 한반도에서 쓸어낼 것입니다.


미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신뢰가 아직 남아 있을 적에
저 강대국가의 도움을 빌릴 수 있을 적에
얼른 벌떡 일어나 조국을 구하기 위해 분연히 싸웁시다.
싸우지 않고는 우리에게 죽음만이 남을 터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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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 대통령은 처칠과 맞먹는 지도자



사회 月刊朝鮮(월간조선)이 인터넷으로 20세기 20명의 대표적 한국인을 제시하고 여론 조사를 실시한 결과, 1등은 朴正熙 대통령으로 약 52%, 2위는 金九(김구) 선생 16.6%, 3위는 金大中(김대중) 대통령 10.7% 등입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1%에도 미달합니다. 건국과 독립 운동의 상징인 이승만 대통령이 20세기 전반부의 대표적 인물이 되어야 할텐데도 일반의 평가는 전혀 다르게 나옵니다. 여기에는 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만….


南悳祐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일반의 낮은 평가가 대단히 의외인데, 해방 이후 좌파적 이데올로기가 강한 시대를 지나면서 근 20년 동안 그를 독재자로 매도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그런 의식을 가지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李대통령이 아니었더라면 남한만이라도 자유 민주체제로 이끌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쓴 「국제화 시대와 한국경제」라는 책에 李박사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내가 왜 그런 걸 썼냐 하면, 李대통령 고문을 지낸 올리버를 하와이에서 만나서 나도 몰랐던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李박사는 정말 자주적이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러시아는 한국을 赤化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것을 막지 못하면 미국이 나중에 크게 후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자주적이고 앞을 내다보고, 국제 정치를 올바르게 판단한 것이지요. 올리버는 李대통령이 처칠이나 루스벨트에 맞먹는 지도자라고 썼어요. 그런데 그런 전체적인 이야기를 우리 젊은이들이 잘 몰라요. 그래서 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읽히기 위해서 내가 요약을 좀 했어요.


姜英勳 李대통령이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反共(반공)주의자로 사니까 공산주의자들이 비판하고, 매도한 것입니다. 민족을 반역했다든가, 친일파라고 욕했습니다. 1956년인가, 내가 육군 본부에 근무할 때(관리부장 중장)인데 어느날 갑자기 李 대통령에게 불려갔어요. 중동과 남미 지역 특사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느라 특사로 가지는 못했지만 그때 그분이 하신 말씀은 이랬습니다.


『우선 중동으로 가는 길에 오키나와에 들러 독립정신을 고취해 줘. 옛날에는 오키나와가 우리나라와 제일 가까운 나라인데, 다시 일본에 붙어서 살겠다고 하니 정신들이 어떻게 된 것인가. 중동에 가서는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철저히 가르쳐 주어야 해. 우리 경험을 통해서 말이야. 내가 군인들을 특사를 보내는 것은 공산당하고 직접 싸워보았기 때문이야. 우리가 전쟁을 통해서 얻은 귀중한 경험을 세계 평화를 위해 써야 해. 공산주의자들의 음모가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라고…』


李대통령은 한반도 안에 가두어두기 어려운 분이에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언제나 세계를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한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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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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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가 후년의 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토대를 실용주의(자유시장경제+친미) 쪽으로 확실히 잡아 놓은 것은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워도 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수교를 재개하고 월남파병을 통해 미국과의 굳건한 혈맹관계를 재확인하고, 미국의 핵우산 안보보장 아래서 북한과 휴전 대치 상태의 국가적 핸디캡을 현명히 극복하며 경제개발의 초석을 굳건히 놓아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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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재 기자가 작성한 것임.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근대화의 기수 박정희]


-이승만, 대한민국의 기틀 확립, 팍스 코리아의 꿈 키워-




해방이후 극심한 혼란 속에서 한국사에 있어 최초의 공화제 민주국가를 세운 이승만 대통령. 그는 공산주의와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를 기치로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수립해 오늘날 대한민국의 큰 틀을 확립했다. 그는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헌법제정을 주도하고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1948년 7월 24일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 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해방 기념일인 8월 15일까지 기다렸다가 ‘대한민국정부수립식’ 행사를 치렀다.



세계史 유례없는 고도성장기틀 마련


이렇게 시작된 대한민국은 1948년 이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이 대통령이 추구했던 국가 전략은 부국강병과 영세자유(永世自由)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그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혼란을 수습하고 치안을 확립, 경제성장의 기초를 만들었다. 또한 미국과의 끈질긴 협상을 통해 육성한 60만 대군은 경제가 안정될 수 있는 또 다른 여건을 조성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들에게 부여된 병역의무는 한국청소년들의 의식수준을 향상시켰고 급속하게 동질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승만 대통령


이 대통령은 상공업 장려와 농지개혁 등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했으며 의무교육제도입 등 근대적 교육제도의 완비를 통해 교육적 기적을 이뤄냈다. 특히 이 대통령의 혁명적 교육개혁결과 해방직후 78%였던 문맹률은 1959년에는 10%로 급감됐으며 대학생의 수는 12배나 증가해 고도성장의 기초가 됐다. 휴전직후 엄청난 재정적 압박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으로 초등학교교사들의 봉급을 삭감하는 안건을 이 대통령이 강력하게 제지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교육에 대한 이 대통령의 열정은 탁월했다.


한편 이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농을 자영농으로 전환시키면서 농민들의 의욕적 영농을 가능케 했으며 한국사회의 평등화를 위해 공헌했다. 이밖에도 그는 재임기간동안 일민주의(一民主義), 양반제 종식, 여권신장 등 평화 주의적 사회개혁을 이뤄냈고 한글과 기독교 장려 등을 통해 문화적 개혁도 달성했다.



美 반대 설득,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 주의자였으며, 동시에 지미(知美)주의자였다. 그는 해양국가인 미국을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 한국민이 의존해야만 하는 유일한 나라라고 여겼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초기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물론 공산주의의 위협과 일본의 팽창주의에 대한 사전봉쇄와 신속한 대응이 한국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거듭되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덜레스 국무장관, 그리고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등은 모두 방위조약의 체결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특단의 조처는 방위조약의 신속한 체결을 재촉하기 위한 최후의 승부수였다. 비록 이승만의 일방적인 행동은 모험적인 것이었으나, 휴전의 성립을 위해 이승만의 협조가 절실했던 미국은 이승만에 대한 ‘경고’이외의 다른 제재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승만의 ‘벼랑끝’ 외교 전략의 궁극적인 승리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방위조약의 신속한 비준약속을 받아냈고, 미국도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이승만의 약속을 얻어냈다. 그 결과 1953년 8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했다. 이 조약을 매개로 하여 미국은 남한에 대한 공산주의 세력이 침략위협을 봉쇄하는 동시에 이승만의 북진통일의지도 단념시키는 ‘이중 봉쇄’의 효과를 기대했다. 반면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동시에 그가 심각하게 우려해온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욕도 저지시키는 또 다른 ‘이중 봉쇄’의 효과를 발휘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서 대한민국의 안보가 확실하게 보장되는 튼튼한 울타리를 마련했다.



한편 일본의 팽창과 관련해 이승만 대통령은 6.25 동란 중 유엔군 사령부가 군사상의 목적으로 선포한 소위 ‘맥아더라인’이 휴전과 함께 철폐될 것을 예상하고 재빨리 공산세력이 침투방지와 일본어선의 불법침입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평화선’을 선포해 일본을 당황케 만들었다. ‘평화선 선포’에서 그는 “日人들이 맥아더 선을 넘어 우리 해안까지 침입하여 우리의 해중자원(海中資源)을 불법으로 빼앗아 가고 있으므로 우리는 참을 수 없어 공평히 그어진 해상획정선을 설정해 우리의 어권(漁權)을 보호 한다”고 말해 대일 강경론을 표면화했다. 실제로 이 ‘평화선 선포’는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을 추진하는데 있어 한국 측을 유리한 입장에 서게 만들어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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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지적했습니다만, 정치경제체제가 이렇게 선택되는데 있어서는 한국이 그 속에 속했던 서구문명과 서구문명을 충분히 흡수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시장경제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실시한 중요한 정책은 농지개혁과 귀속 재산의 불하입니다. 농지개혁은 유상몰수(有償沒收)・유상분배였기 때문에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無償分配)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만, 북한은 무상분배였기 때문에 농민적 토지소유가 성립할 수 없었던데 대하여 한국은 유상분배였기 때문에 자작농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자작농체제는 농민들에게 정치적 자유와 상품생산자적 지위를 보장하는 세계보편적인 경제제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귀속재산의 불하는 시장경제제도의 골간인 자유기업제도를 창출하는 획기적인 조치였습니다. 귀속재산불하에 있어서는 부정부패가 격심하고 불하를 받은 기업인이 정상적인 기업경영인이 아니라 정상배(政商輩)가 많았다는 결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당시 우리나라에 기업경영 능력이 일천한 상황 하에서 민간기업을 정려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결함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대통령은 은행마저도 민영화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진실로 한국에서 최초로 한국인의 손으로 자유시장경제제도를 정비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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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2003년 4월 19일


최고 지성인이 최고 권력자가 된 축복 - 이승만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될 당시 한국인들 중 知的 수준이 가장 높았던 인물은 누구일까. 李承晩일 것이다. 지능, 동서양의 학문에 대한 종합적 능력, 세계사의 흐름을 보는 시각, 미국 朝野의 인사에 대한 영향력, 특히 공산주의에 대한 통찰력, 언어구사 능력, 판단력 등 모든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능력을 종합했을 때 2위와는 상당한 차이로 李承晩이 1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한국 최초의 박사, 수많은 漢詩에서 보듯이 동양학문에 대한 깊은 지식, 조지 워싱턴 대학 학사-하버드 석사-프린세튼 박사가 말해주는 영어 학문의 조예, 여기에다가 찬란한 독립투쟁 이력.



세계 역사상 그 나라의 최고 지성인, 최고 지능인이 정권을 잡은 예는 흔치 않다. 나폴레옹 정도일까. 대한민국의 축복은 그런 최고 지성인이 정권을 잡아 낙후한 국가와 국민들을 이끌어가면서, 가르쳐가면서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평균적인 국민들보다 월등한 지도자를 만난 행운을 우리는 지금도 보고 있다. 농지개혁, 국군 양성, 한미동맹 구축, 교육투자, 원자력 연구 시작 등 이승만 대통령의 어려운 결단들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보통 국민들보다 수십년을 멀리 내다보는 그를 올리버 박사(대통령 고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위인"이라고 말했다.



박정희도 평균적인 한국인보다는 훨씬 앞선 지성과 추진력과 국제감각을 가졌던 인물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세 대통령도 그런 일류 인간이었던가. 어떤 점에선 그렇다. 김영삼은 빠른 정치감각과 행동력에서, 김대중은 술수에서, 노무현은 선동성에서 월등한 재능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종합적인 지능에서도 이승만, 박정희처럼 정상급이었을까.


아니다. 확실히 아니다. 이 세 사람의 종합적인 知的 능력과 판단력은 국민 평균 수준일 것이다. 이는 선거를 통해서 지도자를 선택하는 민주정치에선 불가피하다.


인천 갑문의 원리를 보면 알 수 있다. 배의 높이는 水位와 같다. 수위보다 높은 배는 날아다니는 비행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국민의 평균 수준을 수위에 비교한다면 지도자는 그 물위에 떠 있는 배이다. 국민의 평균적 수준이 水位처럼 높아져야 배의 높이도, 즉 지도자의 수준도 높아진다. 국민들의 평균적 수준이 높아지려면 시행착오와 교육이 필요하다. 보통 인간은 수많은 실수를 통해서 현명해진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현명해지는 사람은 드물다.


민주주의는 일부 엘리트에 의해서 지도자가 뽑히는 제도가 아니라 평균적인 수준의 사람이 지도자를 뽑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 정직한 사람, 특출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기란 매우 어렵다.

우리는 대통령을 원망하기 전에 우리의 수준을 탓하고 공부를 더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우리의 평균 수준과 같은 대통령만을 뽑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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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2001년 7월 4일


이승만과 김대중, 그 숙명의 대치관계




1948년 7월24일 74세의 李承晩 대통령은 중앙청 광장 연단 위에 올라가 초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한 뒤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번 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 은혜와 동포들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에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은 나로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감당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李박사가 연설의 첫 문장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시작한 것은 이해 8월15일에 있었던 정부수립 기념축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박사를 이해하는 데 그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였다는 점을 빠뜨려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이승만은 북한의 김일성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북 동포중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부속하자는 불충한 사상을 가지고 공산당을 빙자하여 국권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우리 全민족이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나니 남의 선동을 받아 제 나라를 결단내고 남의 도움을 받으려는 반역의 행동을 버리고..."


그는 김일성 집단을, 스탈린의 소련에 종속되어 조국을 배신한 사대매국노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은 지금 가짜 민족주의를 앞세워 남한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한다는 통일전략을 구사하려 하고 있다. 父子가 합쳐서 600만의 동족을 살육함으로써 민족반역자가 되었는데도 민족주의자를 자처하고 또 이 악마적 父子를 맹종하는 자들이 대한민국에도 수두룩한 상황에서 다시 읽어본 이승만의 연설은 김정일의 가면을 벗길 수 있는 명쾌한 논리를 제공한다.


이승만이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진정한 크리스찬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크리스찬의 사랑이 공산주의자의 증오를 간파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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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8월호


6·25 전쟁 50년의 재조명 ⑤-人民軍 참전자들의 證言


『환영 인파를 볼 수 없었다. 그때서야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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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民軍의 시각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컵도 보는 사람의 위치나 각도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 차이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수록 개인이 처한 입장이나 가치관에 따라서 더 크게 나타난다. 같은 민족이 서로 敵(적)이 되어 싸웠던 6·25 전쟁을 보는 見解(견해)는 아직도 南(남)과 北(북), 양쪽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民族(민족)의 전쟁, 6·25 전쟁에 人民軍(인민군)으로 참전했던 사람들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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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첫날에 대한 安鼎一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6월25일 오전에 목이 말라서 물을 얻어 먹으러 民家(민가)에 들어갔는데 그 집 마루에 태극기랑 이승만 박사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더군요.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우리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좀 얻어먹자고 하니까 바가지에 물을 담아주는데 갑자기 北에서 교육받은 내용이 떠올라 멈칫거렸습니다. 그때 우리는 北에서 남쪽에 가면 독약을 탔을지 모르니까 물과 밥 같은 것을 얻어먹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꺼림칙해서 멈칫멈칫하고 있으니까 그 노인이 알겠다는 듯이 자기가 먼저 마시고 난 다음 자기들이 먹던 밥도 먹으라고 내놓더군요. 그때서야 北에서 교육받은 것과 조금은 다르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뚜렷한 敵意(적의)를 표하지도, 환영도 하지 않는 무표정 그 자체였습니다』



『환영 인파는 없었다』



崔泰煥씨가 배속된 인민군 6사단 13연대는 개성을 점령하고 그 기세를 몰아 계속 南進한 끝에 6월25일 밤을 개풍군 영정포라는 조그만 나룻가에서 보낸다. 이튿날 아침에는 인근에 있던 어선들을 징발해 한강 하류를 건너 아침 10시경 김포반도의 걸포리로 상륙한다. 국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12시경 김포읍을 점령한 그의 부대는 저녁 7시 무렵에는 현재 김포국제공항이 내려다보이는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까지 진출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남진해 38선을 돌파한 지 이틀 만에 서울 남쪽까지 진출한 것이다.


『北에서 교육받을 때는 남쪽에 내려가면 환영행사가 있을 줄 알았는데 환영인파를 전혀보지 못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비관적인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 저녁에 수색을 나갔다가 갑자기 「중대장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보초들이 위협사격을 해서 체포해보니 1개 분대 가량의 국군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산쪽에서 후퇴한 국군 1사단 소속이었는데 행주나루터에서 한강을 건너기 전에 중대장과 헤어졌다는 거였습니다. 개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설만 하고 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우리 부대는 국군 포로를 전원 석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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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199908100024








1950.6.28



[ ..... 시민들에게 동참하라고 악을 쓰고 있다. ........

..... 시민들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멍하니 서서 이 광경을 바라봤다. ........ ]



2008.06.01 신동아 통권 585호


[6·25 58주년 특집]


사학자 이현희 교수가 겪은 전란 속 서울

눈 부릅뜬 시체더미, 남녀 포로 나체 연행… 30년보다 긴 3개월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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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에 나가보았다. 로터리에는 군가를 부르며 트럭을 몰고 인공기를 휘둘러대는 인민군이 신바람 난 무당처럼 소리를 내질러대면서 시민들에게 동참하라고 악을 쓰고 있다. 어린 인민군의 얼굴에서는 평화로움마저 느껴진다. 시민들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멍하니 서서 이 광경을 바라봤다.


차에 올라탄 한성중학교 학생 30여 명이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면서 동조했다.


담벼락에는 ‘김일성 장군 만세, 영용한 인민해방군 만세!’ 라는 벽보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아직 풀이 마르지도 않았다. 누구의 소행일까.


인민군 병사들은 대부분 10대 소년들이고 온몸에 풀잎, 참나무를 꺾어 위장한 채 시가지를 누빈다. 인민군 7개 사단과 탱크부대가 서울을 빼앗았다고 한다.



유엔 안보리가 북의 수중에 들어간 한국을 위해 무력사용을 여러 나라에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유엔이 우리나라를 승인했기 때문이다. 미국 등 16개국 친구의 나라가 한국을 도우러 온다고 한다. 감사한다. 큰길가에 국군의 시체가 덩그러니 누워 있으나 누가 나서서 치울 생각도 않는다.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살벌하다. 이게 전쟁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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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6/10/200806100500001/200806100500001_1.html







1950.7.


북한군 점령 하의 서울 상황



7월 8일 서울을 떠난 한 경찰관이 오늘 이 곳에 도착하였다. 다음은 그의 진술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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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지만 도시는 거의 죽어 있고, 간간히 청년단만이 공산당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화신과 미쯔코시 등 두 개의 백화점과 채소가게를 제외하고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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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민들의 사기는 높다. 그들은 미국의 원조로 결국 해방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들은 트루만의 6월 28일 성명서에 대해 알고 있으며, 미군의 북한 폭격 사실에 매우 고무되어 있다. 용산이나 서울 안에 밀집해 있는 적에 대해 미 공군이 폭격을 해 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무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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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대한민국사 제18권 > 1950년 > 북한군 점령 하의 서울 상황
제목 북한군 점령 하의 서울 상황
연월일 1950년 7월 8일
출전 미 국무부 한국 국내 상황관련 문서 Ⅴ ; 한국전쟁 자료총서 43, 541~542쪽








[ ...... 부녀자들만 나온 부락민들은 두려움에 질려 쥐죽은듯 조용히 .......


..... 간나새끼 있으문 왜 우리 농군하는식 있지요, 솔갱이 낫으로 도리치는 식으로 목아지를 내려 치시라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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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에서 금산으로 가는 유일한 도로인 신작로를 따라 연산 황룡재를 넘어 진산 경유 남진하는 북한군 탱크 부대였다. 아마도 부락민 전부가 대환영을 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듯했으나 누구 하나 반기는 기색 없이 특히 젊은이는 없고 대부분 부녀자들만 나온 부락민들은 두려움에 질려 쥐죽은듯 조용히 있자 한 병사가 탱크위에서 "여러분 여기 국방군 간나새끼 없이요? 우리는 여러분 해방시키러 왔시오" 라고 의기양양하게 말을 걸어왔다. "없어요".하고 대답하자 "간나새끼 있으문 왜 우리 농군하는식 있지요, 솔갱이 낫으로 도리치는 식으로 목아지를 내려 치시라요" 하며 노래를 부르고 만세를 불렀다. 섬뜻했다. 그리고는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탱크가 20여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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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cyhtv.com/news/articleView.html?idxno=329

1129일간의 6.25전쟁, 그리고 900일간의 대둔산 공비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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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민군 진주에 대한 남한 민중의 더 주된 반응은 방관이거나 공포감이었다. ‘노동계급이 주인'이라고 말하는 북한이 서울을 점령했는데도 서울의 노동계급은 대거 수도를 떠나거나 직장을 이탈했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밀집한 영등포지구에 대한 전평의 보고를 보면 “고려방직, 제일방직, 경성방직을 포함한 섬유산업 종사 노동자는 서울 점령 전에는 1만 1천7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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