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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이승만 2023-09-23 20:39:48 | 조회: 81
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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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후 수많은 신생 독립국가들이 예외 없이 사회주의의 노선을 따라 시행 착오를 거듭할 때, 이 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고, 또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꿰뚫어 본 선견지명의 지도자였다. 이 전 대통령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헌신과 자유민주국가를 건국한 공로만으로도 전국민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며, 민족의 지도자로서 추앙받을 충분한 자격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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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자신이 내무부차관보로 재직시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1987년 헝가리를 방문했던 당시를 언급했다.


"그 때는 헝가리도 공산국가 시절인데 수상실로 들어가자 수상의 첫 인사가 '축하합니다'였다"며 "당신네 나라는 2차대전후 선조를 잘 만나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켰기에 오늘날 발전한 게 아니냐. 2차대전 전 산업화를 했음에도 완전 평등이라는 달콤한 이론에 넘어가서 동구권은 이렇게 살고 있다"면서 "세계사를 미리 예측한 사람은 이승만과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자부심을 가졌다" 고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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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대통령 이승만"
written by. 이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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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대한 역사의 교훈은 다름 아닌 소비에트 러시아의 마지막 대통령 고르바초프(Mikhail S. Gorbachev)에 의하여 표명된 적이 있다. 1991년 11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현대그룹의 정주영(鄭周永)과 이명박(李明博)에게 고르바초프가 물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될 당시에는 북한이 공업이 더 발달하고 국민소득도 높았습니다. 남한은 겨우 농업에 의존하는 수준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북한이 남한보다 가난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어리둥절해 하는 두 사람에게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공산주의를 채택했고, 남한은 자본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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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이명박,《신화는 없다》, 김영사, pp.3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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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마지막회 에필로그> 이승만과 김구의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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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우리는 이승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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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독립을 쟁취하고도, 정치·경제적 발전과 안정을 달성할 수 없었는가.


李光耀 선임장관은 『1960~1980년대까지 많은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을 실패로 몰아간 것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라고 결론지었다. 국가개입 경제정책은 자원분배의 효율성을 저해하고 부패를 심화시킴으로써, 開途國(개도국)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제3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환상에 사로잡혀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 ]


월간조선
2000.12.

하버드에 온 李光耀의 특별 강연








2008 김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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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날 북한 주체사상의 이론적 뼈대에 대해서도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 비판해 설명함으로써 참석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결국 북한의 주체사상은 독재자 1인을 절대자로 숭배하기 위한 사상으로 김일성, 김정일 절대 독재자 한사람을 위해 만인이 죽어야 한다는 사상이 주체사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북한에서는 '미국놈 때문에 못 산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체제유지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하는 말"이라고 평하고 "북한 사람들은 반세기 이상 이중 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북한이 잘 살기 위해서는 개혁개방을 해야 잘 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겉으로는 내색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개혁개방을 한 나라는 다 거지가 되었지만, 미국과 함께 한 독일, 일본, 한국은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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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 1910 이승만 '독립정신'



[ .....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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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의 李承晩,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李承晩이 1904년 獄中에서 썼다가 출옥한 뒤 출판했던 '독립정신'을 읽어보면 그는 20代 후반에 이미 정신적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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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정신’ 에는 ‘요약과 결론’에 해당하는 ‘後錄’이 있다. 여기서 뽑은 말들을 소개한다. 이 글이 104년 전 29세의 조선 청년에 의하여 쓰여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자.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1. 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2. 通商(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3. 오늘날 通商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다. 4.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5. 외국인들을 원수같이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둘째, 새로운 文物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1.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2.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3. 외국인의 압제에 대해선 싸워야 한다. 외국인에게 뭇매를 맞은 한국인이 그 외국인을 죽이고 경찰에 자수한 일은 칭찬할 것이 못 되지만 그 의지는 본받을 만하다. 4. 동양의 옛날 책보다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책들을 공부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국제법, 통상조약,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5. 과거의 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조차도 버리고 바꿀 수 있다는 각오를 가지고 사람과 가정과 나라가 모두 새롭게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영국과 미국과 같이 되도록 한마음으로 힘쓰면 일본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6. 물건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긴급하다. 7. 신학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사람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8. 공부하는 것은 잘 살기 위한 투자이다. 9. 유학을 간 사람은 나라를 위해 시급한 것부터 공부하여야 한다. 귀국할 형편이 못 되더라도 뿌리치고 반드시 귀국하여 어두운 세상에 등불이 되어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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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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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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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1.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2. 다른 사람의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 우리 집 종이나 다른 사람들의 하인, 또는 부녀자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존중해야 한다.

3. 개화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어서 폐단이 있더라도 윗사람들이 어느 정도 손해를 보는 것이 옳다.

3. 부디 깊이 생각하고, 고집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의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스스로 활력이 생기고, 관습이 빠르게 변하여 나라 전체에도 활력이 생겨서 몇 십 년 후에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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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rea318.com/client/board/view.asp?sEtpnum=7342&sEtpTp=BA01&cPage=11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哲人통치자 李承晩이 선물한 자유가 국가경쟁력의 源泉이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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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후로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지난 3월 26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1941년판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 (일본, 그 가면의 실체)의 번역출판 기념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송방용 헌정회(憲政會) 회장은 “내가 95세를 살면서 역사를 좀 알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좌우합작’이다 ‘찬탁(贊託)’이다 라고들 할 때 이승만 박사의 ‘단정(單政)’노선이 관철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의 자유와 번영도 없었을 것”이라며 원로로서 애국충정을 토로하였다.


이어 강영훈 전 국무총리는 “이승만 박사는 호놀룰루의 병상에서 아들 이인수 박사에게 우리나라 사람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을 경계하시고, ‘이제 후로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전하였다.

자유인이라면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값을 치른다. 자유는 공짜로 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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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


[사설] 남·북한 운명을 가른 60년 전 건국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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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日帝일제의 35년 강점에서 벗어난 지 3년이 지난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한 달 뒤인 9월 9일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했다. 당시 북한은 핵심 지하자원인 석탄과 철 광산에다 일제가 만든 비료공장과 발전소들이 서 있는 산업지대를 차지했고, 남한은 공업이라곤 신발공장과 정미소가 고작인 평야지대에 둥지를 틀었다.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지금 남한의 국민총소득(GNI)은 8873억 달러, 북한은 256억 달러로 남한이 북한의 34.7배다. 1인당 국민소득은 남한이 1만8372달러, 북한은 1108달러로, 남한이 북한의 16.6배다. 무역은 남한이 6348.5억 달러, 북한은 30억 달러다. 남한이 211.9배다. 발전용량은 남한 6551만㎾, 북한은 782만㎾, 원유도입량은 남한 8억8843만 배럴, 북한은 384만 배럴이다. 경제성장률은 남한 5.0%, 북한은 -1.1%로 남북한의 경제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경제자유도 순위도 남한은 36위인 데 비해 북한은 157위로 세계의 바닥이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 속에서 남북 정치지도자들의 정치적 결단과 안목 차이가 이런 格差격차를 낳았다. 남북의 이런 격차는 또 ‘자유의 존재’와 ‘자유의 결핍’이 만든 차이기도 하다. 자유가 단순히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모든 資源자원에 앞서는 ‘기본 자원’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러나 남·북한의 운명을 가른 1948년 8월 15일과 9월 9일에 대한 남북의 대접은 정반대다. 북한은 9월 9일을 국경절로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데 비해 남한은 같은 날인 광복절에 가려 건국일이라는 사실조차 잊혀져 가고 있다. 지난 8월 조선일보 여론조사 결과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언제인지 아느냐?”라는 질문에 ‘알고 있다’라고 답한 사람은 32%에 지나지 않았다. 대통령은 대한민국 建國史건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시절”로 규정했고, 좌파들은 左右合作좌우합작의 통일정부를 만들지 못했다는 이념 공세를 앞세워 건국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있다. 내년 8월의 건국 60년 기념행사는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의를 재확인하고 건국 元勳원훈들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자산인 자유와 시장경제의 토대 위에 통일의 길을 열어가는 출발점으로 삼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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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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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건국이래 구축해온 엄청난 정신적"물질적 자산... 이건 아마 상당수 국민이나 현집권층도 제대로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건 뭐냐하면 첫째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씨를 심었고, 이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려는 공산주의와 싸워 이를 지켰으며, 신생 자유민주주의 독립국으로서 토지개혁을 감행했습니다. 이승만은 세계사상世界史上 유례드믄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신생 독립국에서 토지개혁을 해서 농민에게 분배해준 나라는 전세계에서 우리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남미각국이나 동남아, 예컨대 민주주의를 잘한다는 필리핀도 아키노(전대통령)가 국토의 상당부분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몇몇 사람들만이 국토를 분할"소유하고 있습니다. 동남아가 대체로 다 그렇습니다. 토지개혁이 된 나라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6.25남침을 당하고서도 우리가 위대한 이승만대통령과 함께 반공정신으로 싸워 이길수 있었습니다.


이승만 다음으로 위대한 인물이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그는 근대화를 성취한 우리나라 최초의 지도자였는데, 그는 아무도 언감생심 생각조차 할수없던 중화학공업을 이 후진적인 농경국에 뿌리내렸습니다. 전세계에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키고 있는 나라가 몇 됩니까? 스칸디나비아각국이 잘산다고 하지만 우리와 같은 중화학공업은 없습니다. 유럽 선진권에서도 영국 "프랑스" 독일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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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전쟁의 와중에서도 선거가 중단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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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쟁중에도 언론 검열, 간섭 안해"

鄭晉錫 한국외대 교수, "그는 끝까지 언론자유의 신념을 지켰다"



뉴데일리


“이승만, 끝까지 자유민주언론 신념 지켰다”

鄭晉錫 한국외대 교수 “韓末엔 국제잠각 뛰어난 기자로 활약”
6.25동란 등 국가 위기에서도 검열이나 논조 간섭 전혀 안해



온종림 기자



“이승만 建國대통령은 끝까지 언론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根幹)이라는 신념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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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수는 6.25 전쟁 기간 기사 검열을 실시한다는 공고가 잠시 잇었지만 검열기구를 두거나 제도적으로 운영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국가가 어렵고 혼란할 때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고 야당지가 여론을 주도하는 형국에서도 이 대통령은 신문의 논조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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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30016&C_CC=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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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건국,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국가의 건설과 해체과정에서 빚어지고 있는 엄청난 流血사태를 보면 될 것입니다. .........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학살사건에서 원인 제공자이자 선제공격자는 북한공산당과 그들에 의해 조종된 세력이었음 ........ ]




[ ....... 李承晩이 주도한 建國, 强軍건설, 農地개혁, 교육확충, 韓美 상호방위조약 체제 구축. .......

...... 근대화를 추진하도록 지켜주고 떠받쳐준 울타리이자 주춧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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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이 主導한 국민국가로서의 대한민국 건국,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국가의 건설과 해체과정에서 빚어지고 있는 엄청난 流血사태를 보면 될 것입니다. 東티모르 사태, 러시아와 체첸 사이의 전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爭鬪, 舊유고연방의 내전 같은 일들은 모두가 한 민족국가가 탄생하고 해체되는 과정에서 치러지는 통과의례인 것입니다. 19세기 유럽의 後發國인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국가를 건설해간 과정, 2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들이 독립을 쟁취해갈 때 일어났던 流血사태도 같은 경우입니다.

민족국가는 祝砲나 祝歌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砲煙(포연)과 학살의 피범벅 속에서 피어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프러시아는 독일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1864년엔 덴마크와, 1866년엔 오스트리아와, 1870년엔 프랑스와 결전을 벌였습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46년의 대구 10월 폭동, 1948년의 제주도 4·3 공산폭동, 그해 10월의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그리고 6·25 남침. 이런 流血 속에서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지켜내는 한가운데 있었던 李承晩을 평화시의 기준으로써 평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李承晩 시절에 벌어졌던 학살사건으로 요사이 말이 많습니다만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학살사건에서 원인 제공자이자 선제공격자는 북한공산당과 그들에 의해 조종된 세력이었음을 잊어버려선 因果關係(인과관계)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에다가 포용력이 큰 토착종교 샤머니즘의 영향이 강해 유럽이나 중동에서 되풀이되었던 인종·종교학살의 전통이 없었습니다(19세기에 천주교 박해가 있었지만 규모면에서 유럽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未曾有(미증유)의 살육극이 벌어진 것은 「증오의 과학」인 공산주의 이념이 들어와서 계급간의 적대의식을 고취시키고 「계급의 원수들」에 대한 보복을 위대한 혁명과업이라 선동함으로써 인간양심을 마비시킨 때문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촉발된 학살에 대한민국측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많은 무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잉방어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朴正熙가 인터넷 月刊朝鮮 독자들로부터 받은 지지표의 상당수는 李承晩에게 갖다 바쳐야 할 것들입니다. 李承晩이 없었으면 朴正熙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李承晩이 주도한 建國, 强軍건설, 農地개혁, 교육확충, 韓美 상호방위조약 체제 구축. 이것들은 1960, 70년대에 朴正熙가 근대화를 추진하도록 지켜주고 떠받쳐준 울타리이자 주춧돌이었던 것입니다. 民主主義의 형식은 선거이고 실질은 안보, 복지, 자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보, 복지, 자유가 보장되어야 민주주의, 즉 글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제도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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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에서는 이미 1945년 末부터 정권기관들이 만들어지고 소비에트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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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의원께서는 李承晩 대통령에게 單政수립의 책임을 돌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미 1945년 末부터 정권기관들이 만들어지고 소비에트化 과정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單政문제를 먼저 공론화했다고 해서 분단의 책임을 李承晩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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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 ........ ]


[ ..... 미군은 ....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남북한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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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소련군과 분할 점령을 위해 군사분계선으로 38선을 책정한 것은 이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38선을 책정한 사실이 곧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終戰(종전) 직후의 서독과 오스트리아에서 확인된다. 서독에는 美·英·佛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는 美·英·佛·蘇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으나 그것이 곧바로 국토분단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광복 직후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38선을 순수한 군사분계선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데 반하여,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38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켰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스탈린은 1945년 9월20일 비밀지령에서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정권의 수립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10월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고, 이어 이북5도행정위원회를 수립한 뒤 산하에 10개 행정국을 두었다. 이는 북한에 이미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소련은 金日成을 내세워 북한지역에서 1946년 2월에 토지개혁과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뿐만이 아니다. 미군은 美·蘇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몇 차례 단절된 남북 간의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남북한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미국이 남한지역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지역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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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24. 소련 경원선 차단

1945.8.25. 소련 경의선 차단

1945.9.6. 소련 통신 우편 차단


1945.9.6. 미군 진주





"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2009.06.29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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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28/2009062800858.html






* 당연히 이런 사실은 전국민 공지의 사실이었읍니다.

또한 전국민이 수시로 얘기하고 성토하던 사실이었읍니다.









[ .... 9월 8일 ... 미국 제24군단은 배편으로 인천에 상륙 ....

.... 9월 9일 경성에 도착 ....... ]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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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주둔 초기​


1945년 9월 2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쇼와 천황의 항복 성명을 수용, 일반명령 제1호로 점령지역 연합군의 분할진주를 발표했다. 이어 바로 한반도 남부에 미군을 보내고 일본의 항복문서를 정식으로 받아냈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미국 육군 제24군단을 조선 지역 관할 부대로 정한다. 이때의 남한은 점령지의 성격이었다. 다만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인과 조선인들은 별개로 취급할 것을 특별 지시한다.


9월 8일 존 리드 하지 미육군 중장 휘하의 미국 제24군단은 배편으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파견한 여운홍 등은 교섭을 시도하였지만 하지는 이를 거절하고 정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9월 9일 경성에 도착한 하지 사령장관은 포고령 제1호로 "38°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민에 대하여 미군이 군정을 펼 것"이라고 정식 포고하고, 9월 12일 아치볼드 V. 아널드 미육군 소장을 미군정장관에 임명하여 군정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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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 .......

.....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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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웅기와 나진을 점령한 직후이며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 출간된 소련의 국제문제전문지 ‘노보예 브레미야(새로운 시대)’는 이승만을 비롯한 임정 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조선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야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만은 결코 반소친미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기도 했다.



●더욱 구체화되는 친소정권 수립 의도



소련군이 청진 원산 함흥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향하던 8월 23일 작성된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의 보고서 역시 같은 논지였다. 조선에서 반소적인 정치인들이 영향력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되며,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군은 38선을 공식 봉쇄했다.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남북간에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막았다. 9월 6일엔 남북간의 전화와 통신마저 끊었다. 소련군사령부는 “분단이 빚어낸 심각한 경제문제들에 관해 협의하자”는 미군사령부의 제의를 묵살했다. 미군사령부는 거듭 “석탄의 수송과 전기의 공급 및 통화의 조정 등에 관한 문제들을 협의하자”고 제의했지만 허사였다. 이는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분단 상황을 개선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소련이 비협조적이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9월 12일 런던에서 열린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장관 회담을 계기로 소련의 의도는 한층 노골화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처음 열린 연합국 외무장관회담의 소련대표단을 위해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이 작성한 ‘조선에 관한 제안’이라는 정책건의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제주도와 대마도까지 넘본 소련의 야심



이 건의서는 약 2년 후 미소(美蘇)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끝난 뒤 부산-진해, 제주도, 인천 등 세 지역을 소련군의 관할 아래 둘 것과 대마도를 조선에 넘겨줄 것을 미국에 요구하라고 제안했다. 만약 첫 번째 제안이 받아들여진 상태에서 대마도가 조선에 넘어온다면 대마도까지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소련은 동해만 아니라 서해도 지배하게 된다. 나아가 제주도는 동해와 서해의 중간지점에 놓여 있으므로 그곳을 소련 극동해군의 핵심기지로 만들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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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70000000600/3/70070000000600/20040905/8103336/1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④소련은 야심이 없었을까

기사입력 2004-09-05








[ .....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 ....... ]


[ ..... 미군은 ....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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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소련군과 분할 점령을 위해 군사분계선으로 38선을 책정한 것은 이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38선을 책정한 사실이 곧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終戰(종전) 직후의 서독과 오스트리아에서 확인된다. 서독에는 美·英·佛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는 美·英·佛·蘇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으나 그것이 곧바로 국토분단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광복 직후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38선을 순수한 군사분계선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데 반하여,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38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켰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스탈린은 1945년 9월20일 비밀지령에서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정권의 수립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10월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고, 이어 이북5도행정위원회를 수립한 뒤 산하에 10개 행정국을 두었다. 이는 북한에 이미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소련은 金日成을 내세워 북한지역에서 1946년 2월에 토지개혁과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뿐만이 아니다. 미군은 美·蘇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몇 차례 단절된 남북 간의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남북한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미국이 남한지역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지역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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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의 고백] 리영희는 내 인생을 보상하라
이동호
2010-12-06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0/12/06/2010120600024.html









[ ....... 남북의 인적 왕래와 물적 교류를 차단 ........

.....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선 이런 봉쇄가 일어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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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한반도 분단’에 적용했을 때 그 정확한 원인은 1945년 8월부터 12월까지 취해진 소련군의 38선 봉쇄 조치에서 시작된다. 소련은 진주 직후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38선 이북에 연접한 북한의 교통 요지를 모두 점령했고, 이어 남북의 인적 왕래와 물적 교류를 차단했다. 당시 소련이 분할 점령했던 다른 지역인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선 이런 봉쇄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소련은 북한 각 지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간부를 양성하는 등 남한과는 대단히 이질적인 통치를 실시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들어선 북한 지역만의 ‘새로운 주권적 통치체제’가 1946년 2월 설립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였다. 이 위원회는 스스로를 ‘정부’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정부였다. 법령을 결정·집행하는 중앙행정주권기관의 학술적 명칭은 ‘정부’밖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북한만의 단독 정권’이 먼저 수립됨으로써 분단의 두 가지 핵심사항이 모두 실현됐다는 것이다.



양 교수는 “따라서 남·북한 정부 수립을 분단의 원인으로 보는 시각은 ‘사망의 증상을 사망의 원인으로 주장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좌우합작운동·남북협상의 실패 같은 내인이 외인과 함께 분단의 원인이 됐다는 견해(강만길) ▲분단이 미국의 책임이라는 견해(강정구) ▲미·소의 공동 책임이라는 견해(신용하) 등은 모두 실제로는 사망 판정에서 필연적이지 않은 유사원인(類似原因)을 원인으로 오판했거나, 역사적 상황을 잘못 해석한 결과라고 양 교수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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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2/31/2007123100032.html

소련의 38선 봉쇄→북한 인민위 수립”
“한반도 분단의 근본적 원인이다”
양동안 교수 논문서 밝혀

48년 남·북 독자정부 수립을 분단 원인으로 보는 시각은
사망의 부수적인 증상을 사망 원인이라 주장하는 오류








[ ..... 좌익진영은 ... 통일만 주장했을 뿐 .... 남북한간 교통 통신 단절의 해제를 주장해본 일이 단 한번도 없다 ....... ]



[ ...... 이승만은 귀국과 동시에 민족의 무조건 단결과 38선 철폐를 주장 ........


...... 38선을 경계로 남북한간 교통 통신을 일방적으로 단절시킨 소련의 조치도 옹호해온 공산당의 입장을 수세로 ....... ]



1945.10.


무조건 단결과 38선 철폐를 주장




해방정국에서의 우익진영의 초기 열세는 45년 10월 중순 이승만이 귀국하면서부터 다소 만회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귀국과 동시에 민족의 무조건 단결과 38선 철폐를 주장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장기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옴으로써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로 알려진 이승만이 귀국과 함께 천명한 2가지 사항은 대중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동안 공산당과 좌익으로부터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아온 한민당은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인 이승만의 “먼저 단결하여 완전독립을 달성하고 그 다음에 친일파 문제를 정당한 절차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 구원받게 되었다.


또한 이승만이 38선 철폐를 공공연하게 주장해줌으로써 소련의 행동은 무엇이나 옳다고 옹호하고 따라서 38선을 경계로 남북한간 교통 통신을 일방적으로 단절시킨 소련의 조치도 옹호해온 공산당의 입장을 수세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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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귀국 이후 우익진영은 기회 있을 때마다 38선의 철폐를 주장하고, 38선을 경계로 소련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남북한 주민간 교통 통신 단절을 해제할 것을 반복하여 주장했다.


그에 반해 좌익진영은 48년 남북한에 2개의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통일만 주장했을 뿐 38선을 경계로 남북한간 교통 통신 단절의 해제를 주장해본 일이 단 한번도 없다.

좌익진영은 단지 남한에서도 북한에서와 같이 인민위원회에 정권을 넘겨주고 친일파 숙청과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면, 다시 말해서 남한사회가 북한사회처럼 되면 38선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고만 주장했다.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해방정국의 좌·우익 중 어느 쪽이 보다 자주적이며 통일지향적이었던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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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그러합니다. 통일만 주장하며 자유왕래는 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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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소련군과 분할 점령을 위해 군사분계선으로 38선을 책정한 것은 이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38선을 책정한 사실이 곧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終戰(종전) 직후의 서독과 오스트리아에서 확인된다. 서독에는 美·英·佛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는 美·英·佛·蘇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으나 그것이 곧바로 국토분단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광복 직후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38선을 순수한 군사분계선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데 반하여,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38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켰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스탈린은 1945년 9월20일 비밀지령에서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정권의 수립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10월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고, 이어 이북5도행정위원회를 수립한 뒤 산하에 10개 행정국을 두었다. 이는 북한에 이미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소련은 金日成을 내세워 북한지역에서 1946년 2월에 토지개혁과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뿐만이 아니다. 미군은 美·蘇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몇 차례 단절된 남북 간의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남북한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미국이 남한지역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지역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이는 미국합동참모본부가 1947년 9월22일에 작성한 평가서에 나타나 있다. 미국은 1948년 남한에 통일정부 구성이 불가능해지자 서둘러 남한에 정부를 수립하고 주둔미군을 조속히 철수하고자 했다.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9월15일부터 駐韓美軍 철수를 비밀리에 개시하여 1949년 6월29일 군사고문단 500명만을 남기고 철수를 완료했다.

미국은 1947년 여름까지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저지해 왔다.



美 군정은 李承晩과 金九를 제외한 左右합작운동을 주도했고, 과도입법 의원에도 이들을 배제했다는 데서 확인된다. 美군정은 1947년 4월에 李承晩의 정부수립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그를 연금하기까지 했다. 미국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결심한 것은 제2차 美·蘇공동위원회가 남한 內 우익진영을 배제하자는 소련의 주장으로 결렬된 직후인 1947년 9월 이후이다.


한반도 분단을 기획하고 먼저 추진한 것은 소련이고 이에 동조한 金日成 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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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86의 고백] 나의 사상적 스승 리영희를 비판한다
李東湖 前 전대협 연대사업국장·現 북한민주화 포럼 간사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64336







[ ...... 이승만 전 대통령도 한 민족 안에 인위적인 선을 반대하고 남북 자유왕래를 주장했다.

공산주의는 폐쇄사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3.8선을 국경화해야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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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좌파는 서양의 좌파와는 다른 것이다. 근본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좌파이기에 한국에서 좌파다 우파다 논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것이다.”



-역사가 왜곡됐다는 부분들 중 몇 가지 사례를 지적해 달라.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분단의 주범이라고 하는 주장들이 있었다. 또 우리나라의 분단이 외세에 의한 분단이라고 하면서 반미를 조장하는 여론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왜곡된 역사에 근거한 것들이다. 사실 3.8선은 구소련에 의해 고착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3.8선을 두지만 어떻게든 우편물도 오가도록 하는 등 서로 문을 열도록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한 민족 안에 인위적인 선을 반대하고 남북 자유왕래를 주장했다. 공산주의는 폐쇄사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3.8선을 국경화해야 했다.


김일성 단독정부는 이러한 배경 가운데 일방적으로 세워지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미 북한이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우리 민족이 정당성을 갖는 정부를 가져야겠다고 판단하면서 그 이후에 세워졌다. 우리나라 정부가 세워질 때에도 북한에 대항하는 단독정부가 아니라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따른 통일국가의 미래를 바라보며 대한민국을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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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191255

“이승만 업적 긍정과 부정 구분하자”… 아들 이인수 박사 주장
‘한국교회 핍박’ 재출간 앞두고 정직한 역사해석 부탁
[ 2008-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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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1


[ ......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 ........ ]



美軍政의 韓國政治指導者에 對한 政策硏究 (1945〜1948)

李 仁 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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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美國務省은 10월 9일, 점령군의 철수문제는 統韓 獨立政府樹立問題 解決의 필수적 부분으로 알고 있으며 소련제의에 대해 유엔총회의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回信하였다.139)


그리고 유엔의 미국대표는 10월 17일, 臨時委員團의 감시아래 남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人口比例로 대표를 선출하고 국회와 정부를 수립해서 이 정부로 하여금 防衛軍을 조직하게 한 다음 占領軍을 철수하게 한다는 決議案을 제출하였으며 총회는 11월 14일 이 안을 採擇하였다.140) 그동안 소련에 대한 美側의 宥和政策으로 인해 북한을 共產化하고 남한마저 赤化하려는 소련의 팽창정책에 守勢만을 지키던 미국은 이제야 유엔을 통한 外交로 信託統治가 아닌 民族自決主義 原則에 입각한 한국의 통일독립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16萬의 赤軍을 투입하여 이미 共產政權을 수립해 놓고 있는 소련이 비록 유엔의 決議라 하여도 共產化를 막게 할 自由選擧를 북한에서 거부할것은 國際間 權力政治를 아는 사람이면 추측이 가능하였고, 그것은 통일을 갈망하는 한국민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한 것은 물론이다. 그동안 信託統治를 반대하며 즉시 독립을 주장해 온 민족진영에서는 이 유엔의 결의를 크게 환영하였으나 韓國獨立黨을 중심으로 하는 各 政黨協議會는 美蘇兩軍의 철퇴를 요구하며 南北政黨의 대표회의를 구성하여 統一政府를 세우라고 주장하였다.141) 이와 같이 金九를 추종하는 韓國獨立黨系列에서는 계속해서 선거를 기피하며 共產黨의 주장과 같이 兩軍撤收와
南北韓政黨代表들의 卓上會議로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1월 21일, 民族陣營 70개단체들이 이러한 주장은 共產黨의 대변자로 볼 수밖에 없다고 규탄하자 金九는 이 주장을 보류하게 하였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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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國後 李承晚과 政治路線을 같이 하면서도 그의 追從者들과 獨自的 路線을 취하기도 하였던 金九는 유엔選擧案을 반대하는 주장이 규탄을 받게되자 12월 1일 대체로 유엔의 안을 찬성하면서 이승만의 선거를 통한 政府樹立案을 支持하는 談話를 발표하였다.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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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1.2. 하지



[ ......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를 지지하거나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는 실제로 민족주의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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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John R. Hodge) 장군은 11월 2일에 도쿄(東京)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심각한 국면에 이르렀음을 보고하는 전보를 쳤다. 하지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들이 지배권을 장악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대부분의 과격분자들이 소련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나, 확실한 증거를 포착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는 또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를 지지하거나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는 실제로 민족주의자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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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80. 美軍政府의 「國家非常事態宣言」을 지원하다








1948.2.5. 美軍政長官 헬믹小將



[ ..... 조선인은 공산주의에는 기울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들은 매우 개인주의적인 동시에 매우 국가주의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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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인은 공산주의에는 기울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들은 매우 개인주의적인 동시에 매우 국가주의적인 민족이다. 그리고 조선의 공산주의자에게 주요한 지장이 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某外國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다. [워싱턴4일발 AP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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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체재중인 헬믹, 조선문제에 대해 소신 피력


경향신문,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8년 02월 05일









1945.11.



[ ....... 국도 넓은 길은 환영인파로 메워졌고 연도에는 부근 촌락민들이 도열하여 120리 거리에 인파가 들끓었다. 그리고 진남포 수십리 앞길까지 환영인파가 물결쳤다.


대한민국 만세, 조민당 만세 ........ ]




孫世一의 비교 評傳 (8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朝鮮民主黨의 創黨과 新義州學生들의 蜂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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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民黨보다 더 保守的인 朝民黨의 「政策」



창당대회는 11월 3일 오후에 구 일본인중학교 교정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채택된 조선민주당의 「선언」과 「강령」 및「정책」은 조선민주당의 정체성을 둘러싼 민족주의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6개항의 「강령」은



(1)국민의 총의에 의하야 민주주의공화국의 수립을 기함(제1항),

(2)종교, 교육, 노농(勞農), 실업, 사회 각계 유지의 결합을 요함(제4항),

(3)반일적 민주주의 각 정파와 우호협력하야 전민족의 통일을 도모함(제5항),

(4)소련 및 민주주의 제 국가와 친선을 도모하야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제6항) 등으로서, 친일파 배제와 소련과의 우호 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게다가 반일적 민주주의 각 당파와 우호협력하여 전 민족의 통일을 도모한다는 「강령」(제5항)의 규정은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정당 및 조직의 광범한 연합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확립”하라는 스탈린의 비밀지령과 일치한다.


그러나 12개항의 「정책」에는 조선민주당의 보수적인 성향이 그대로 표명되어 있다.


먼저 정치면에서는 국민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신앙의 자유와 선거 및 피선거권이 있고(제1항), 의회제도와 보통선거제를 실시하며(제2항), 교육과 보건의 기회균등을 보장한다(제3항)고 하여 의회제 민주주의를 천명했다. 그러나 소작제도의 개선, 자작농 창정(創定)의 강화, 농업기술의 향상(제8항)이라고 애매하게 표명된 토지문제나 노자문제(勞資問題)의 일치점을 득하야 생산의 지장이 없기를 기함(제11항)이라고 한 노동문제의 비전 등은 극히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31) 그것은 좌익정당들로부터 지주들과 친일파의 정당이라고 비판받던 남한의 한국민주당의 정강정책보다도 더 보수적인 것이라고 할 만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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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당은 창당되자 “요원의 불처럼 단시일내에 경이적인 숫자의 당원을 획득”37)할 만큼 큰 호응을 얻었다. 창당하고 한 달 뒤인 12월 1일 현재 북한지역의 공산당원수는 4,000명 미만이었는데 비하여 조민당의 당원수가 5,406명이었다는 사실38)은 조민당의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북한 전역의 도-시-군-면에 지부가 결성되어 당원수는 결당 3개월동안에 50만에 이르렀다고 관계자들은 주장한다.39) 그것은 물론 과장된 숫자일 것이나, 조민당이 급속한 성장세를 보인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지방지부가 결성되는 상황의 한 보기로 진남포(鎭南浦)시당을 결성할 때의 상황을 이윤영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중앙당부에서 수백명의 당원이 … 트럭에 분승하고 악대를 선두로 진남포로 향하였다. 국도 넓은 길은 환영인파로 메워졌고 연도에는 부근 촌락민들이 도열하여 120리 거리에 인파가 들끓었다. 그리고 진남포 수십리 앞길까지 환영인파가 물결쳤다. 대한민국 만세, 조민당 만세 소리가 들끓었다.”40)


이를 시기하여 지방의 공산당은 조민당 지방당부를 습격하고 폭행을 가하는가 하면 허무맹랑한 사건을 날조하여 조민당의 지방당간부를 경찰에 구금시키는 등 온갖 방해공작을 벌였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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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9.



[ 朝鮮人民共和國 = 財政部長 曹晩植 ]



인공의 정부부서 발표


연월일1945년 09월 14일
출전매일신보 1945년 09월 15일


인공의 정부부서 발표


朝鮮人民共和國에서는 지난 6日 全國人民代表會議에서 선출된 인민대표들이 그동안 연일 정부조각에 주력한 결과 다음과 같은 부서를 결정 14日 政府로부터 발표하다.


◊ 朝鮮人民共和國政府 部署


主席 李承晩

副主席 呂運亨
國務總理 許憲
內部部長 金九
(臨時代理 許憲)
外交部長 金奎植
(臨時代理 呂運亨)
軍事部長 金元鳳
(臨時代理 金世鎔)

財政部長 曹晩植
保安部長 崔容達
司法部長 金炳魯
(臨時代理 許憲)

文敎部長 金性洙
(臨時代理 李萬珪)
宣傳部長 李觀述
經濟部長 河弼源
農林部長 康基德
保健部長 李萬珪

遞信部長 申翼熙
(臨時代理 李康國)
交通部長 洪南杓
勞動部長 李胃相
書記長 申康玉
法制局長 崔益翰
企劃局長 鄭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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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점은 인공명단에 조만식은 있으나 빨갱이들이 뽕가는 "위대한 수령"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인공도 인정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수령"은 이승만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김성수를 친일파라 보았다면 인공이 문교부장으로 선정했을 리가 없습니다.









1945.9. 한경직 목사의 증언



[ .....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


......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 ]



[ .....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 ........ ]



[ ..... 먼저 은행에 가서 현금을 강탈 .......

......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 ....... ]




[단독] "소련군에게 무기 넘겨받은 공산주의자들, 라디오 방송국과 지역신문 빼앗고 있다… 반대세력 학살 위협하고 대낮에 총살"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

2017.08.16



[오늘의 세상]


故한경직 목사가 1945년 9월 평안북도 상황을 알린 비밀청원서 발견


"청원서 받은 美군정 정치고문… '소련군 활동, 믿을 만한 첫 증언'
소련군, 도시에 들어가면서 현금 강탈·부녀자 강간 일삼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리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련군이 진주해 우리 백성을 약탈하고 많은 비행을 자행하고 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공산당 지배를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공산 한국'을 원하지 않는다(We do not want red Korea).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북한 지역은 완전히 황폐질 것이다. (연합군이) 즉각 위원회를 파견해서 상황을 조사해 달라."



20세기 후반 한국을 대표하는 개신교 지도자인 한경직(1902~2000) 목사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26일 서울의 미군정에 소련군이 점령한 평안북도 일대의 정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영문(英文) 비밀청원서가 발견됐다.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는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가 최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에서 찾아낸 이 문서는 일본이 패망한 뒤 신의주에서 소련군 및 공산당과 마찰을 빚던 한 목사가 서울로 내려와 미군정 당국에 제출한 것이다. 당시 미군정 정치고문이었던 베닝호프는 비밀청원서를 자신의 평가를 담은 보고서와 함께 미국 국무부에 보냈다. 베닝호프는 이 청원서가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의 정치 활동에 관한 최초의 믿을 만한 목격자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베닝호프의 보고서는 미 국무성 외교문서집(FRUS)에 수록됐지만 한 목사의 비밀청원서는 포함되지 않아 그동안 전문이 알려지지 않았다.



한경직 목사가 신의주 제1교회 담임인 선배 윤하영(1889~1956) 목사와 연명으로 작성한 A4용지 3장 남짓 분량의 청원서에 따르면, 일본이 항복한 다음 날인 8월 16일 신의주의 지도급 인사들은 질서 유지를 담당할 자치위원회를 구성했고, 8월 25일 평안북도 각 시·군 대표들이 참여하는 평북 자치위원회로 확대됐다. 8월 30일 소련군이 신의주에 들어오면서 시태가 급변했다. 소련군은 인민정치위원회를 새로 만들고 급조된 두 개의 소규모 공산주의 조직과 자치위원회가 함께 참여하도록 지시했다. 곧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정치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뒤 그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었다. 며칠 뒤 조직된 공산당은 법원 건물을 무력으로 차지해 본부로 사용했고 라디오 방송국과 유일한 지역신문을 빼앗아 공산주의 선전 선동을 시작했다. 공장과 농촌 마을에는 공산당 조직이 만들어져 무력으로 공장과 농지를 접수했다. 소련군은 비행기로 선전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공산당을 지원했다.


이런 사태 전개에 놀란 개신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었다. 이를 알게 된 공산당은 그들이 공식 활동을 하면 소련군이 대량 학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에서 벌어진 테러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9월 16일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살인자는 풀려났고, 평상시처럼 일하고 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이에 항의하자, 다음 날 경찰이 몰려와 체포했다."



비밀청원서는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고 적었다.



이어 소련군의 비행이 "상상을 넘어선다"며 자세히 설명한다. 소련군은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은행에 가서 현금을 강탈한다고 했다. "신의주에서 소련군은 (은행에서) 120만엔을 가져갔다.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사례는 셀 수조차 없이 많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38선을 넘으면서 소련군에게 약탈과 강간을 당한다고 폭로했다.



1932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에서 돌아와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하던 한경직 목사는 일제 말 교회를 사임한 뒤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광복 후 신의주 자치위원회 부위원장, 기독교사회민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한 목사는 비밀청원서를 제출한 뒤 평양으로 돌아갔지만 10월 말 윤하영 목사와 함께 북한을 탈출했다. 그가 북한을 떠난 뒤 용암포 지역의 기독교사회민주당 창립 모임을 공산당이 습격하자 신의주 일대의 개신교 학생이 중심이 돼 저항한 사건이 신의주학생의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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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6/2017081600252.html








1945.9.20. 스탈린



[ .....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협조할 것 ........ ]



북조선에서 소련군과 현지정권기관 및 주민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소련 극동사령관 및 제25군에 내린 소련군최고사령관(스탈린)의 훈령



적군 군대에 의한 북조선 점령과 관련하여 최고 총사령부는 다음의 지시에 따를 것을 명령한다.



1. 북한 영토 내에 소비에트나 소비에트 정권의 다른 기관을 수립하거나 소비에트제도를 도입하지 말 것.

2.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단체의 광범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협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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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안토노프

1945년 9월 20일


- 소련방 과학 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 편, (1981), 『소련과 북한과의 관계, 1945-1980: 문헌 및 자료』, 국토통일원 번역(서울: 국토통일원, 1987.









집단강간과 '다와이'… 짐승만도 못한 ‘야만적인 소련軍’


[88세 老記者의 現代史 체험①] 개가 交尾(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드는 데,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 강간을 하고 있었다.




金鏶(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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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鏶



1928년 평양 출생으로, 1948년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1955년 <대구매일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부산 <국제신문>을 거쳐 <동양방송> 기자로 재직했다. 1974년 KBS 對北방송 사회교육 전문위원을 지냈고, 1988년 정년퇴직하였다. <동양방송> 기자로 판문점을 담당하고 있던 1967년 3월22일, 李穗根(이수근)의 북한 탈출 全과정을 생생하게 취재해 보도하는 역사적인 특종을 했다.




소련軍의 만행



16세, 중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日帝(일제) 식민지 때에도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듣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를 못했다. 하지만 해방이 된 지 보름도 안 되어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방된 지 이틀 후인 17일 평양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중학교 3년 이상 남학생들은 학생 治安(치안)대원이 되어 평양의 주요거리들에 배치되었는데 22일부터 소련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USA 표시가 분명한 미국제 지프와 트럭을 탄 소련 군인들이 평양거리에 밀려들어오자 거리 곳곳에서는 ‘다와이(약탈)’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전차길이 있는 평양의 번화가를 걷고 있었는데 지프를 타고 접근해 온 소련군 장교가 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다와이’를 연발하기에 그 시계를 벗어 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입학기념으로 아버지가 사준 ‘스위스 12석’ 손목시계였다.


자기들이 해방시켜 주었다는 식민지의 중학생 손목시계를 ‘다와이’하는 이 장교를 보면서 ‘공산주의는 사람 못살 주의로구나’라고 직감하게 되었다.



손목시계를 ‘다와이’ 당한 지 이틀 후, 나는 평양에서 가장 번화한 조선은행 앞 네거리에서 대낮에 소련군 병사들이 집단 강간을 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개가 交尾(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드는 데,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 강간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소련 군인 하나가 다발총을 하늘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쏘면서 고함을 치는 소리가 ‘카레스케 노- 야폰스키’(조선 사람 아니다. 일본 사람이다) 참으로 짐승보다도 못한 야만이었다.


소련 군인들의 집단 强姦(강간)소동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밤에는 조선인 거주지역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큰 거리에서 주택가로 들어오는 골목길 입구에는 나무판자와 철조망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작은 출입구를 만들어 놓고 보초를 서게 되었는가 하면 한옥집 조선인 거주지역들에서는 소련 군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부엌에 들어가 가마솥 뚜껑을 들고 나와 두들겼다.


그러면 집집마다 가마솥 뚜껑을 부지깽이로 두드리게 되고 여자들은 숨고 남자들은 골목 밖으로 나와서 침입해온 소련 군인들을 다른 곳으로 쫓아내었다. 이래서 해방이 된 평양에서는 편하게 잠잘 날이 드물었다.



내가 다니던 평양사범학교의 경우는 수업시간에도 소련 군인들의 ‘다와이’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평양 비행장 옆에 있었던 탓으로 소련군이 점유한 까닭에 평양역 부근 일본인 소학교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2층인 이 학교의 아래층에는 만주에서 철수해 온 일본인 피난민들이 있었고 우리는 2층에서 공부를 했다.


소련 군인들은 우리가 수업중인 대낮에도 이 피난민들을 습격했다. ‘마담 다와이‘(여자를 내놔라)를 연발하며 소련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옥상(부인) 야라렛다요(당했다)’ 등 비명소리와 함께 이리저리 도망치는 피난민들로 온 학교 건물이 소란스러웠다. 이래서 일본인 피난민 속의 젊은 여자들은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소련군인들의 행패는 일본 피난민만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 음악실에 있던 온갖 악기들을 한밤중에 몽땅 털어간 사건도 있었다. 이러니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위대한 소비에트를 향하여 배우자’는 소련 앞잡이 공산주의자들의 말이 학생들의 귀에 담아질 수가 없었다.



‘소련製 김일성’의 등장과 反蘇 학생운동



1945년 10월14일 ‘소련製 김일성’이 등장하면서부터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이날 모란봉 공설운동장에서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는데 처음에는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라고 하더니 ‘김일성 장군 환영 군중대회’로 둔갑하였다.



이 군중대회에서 소련 軍政 장관 ‘로마넨코’는 30대 초반의 젊은이를 내세워 김일성이라고 하면서 ‘민족적 지도자요 절세의 애국자’라고 소개를 했다. 순간 군중들 속에서는 ‘가짜다…’라는 소리가 실망어린 한숨소리처럼 퍼져 나왔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김일성 장군’이라는 항일투쟁 영웅에 관한 전설이 1920년대부터 널리 전해져 왔었으니 30대 초반의 ‘소련製 김일성’을 가짜라고 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소련製 김일성’은 이때부터 이른바 ‘민주기지 노선’을 앞세우며 소련 군정의 지시에 따른 북한지역의 공산화 작업을 강행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게 된 학생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1월7일 함흥 ‘反共학생사건’에 이어 11월23일에는 신의주에서 反共反蘇(반공반소) 학생의거가 대규모로 터져 나왔다. 맨 주먹으로 봉기한 중학생들에게 인민위원회나 보안署(서) 공산 당사들에서는 처음부터 기관총과 小銃(소총) 심지어 소련군의 비행기로 機銃掃射(기총소사)까지 감행했다.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학생 23명이 피살되고 700여 명이 부상을 당했고, 1000여 명이 검거되어 그 중 100여 명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대규모 反共反蘇 학생시위는 1946년 3월13일 함흥에서 또 발생, 일반 시민들까지 학생 편에 가세하여 보안署와 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평양학생의 경우는 신의주나 함흥과는 그 양상을 달리한다. 평양에서는 소련군정이 左右同數(좌우동수) 인사로 구성되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曺晩植)을 앞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 초기에는 공산당과 학생들이 부딪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민족진영과 함께 모스크바 3相회의 결정인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공산당이 소련의 지시로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변하자 판세는 급변했다.


신탁통치를 완강히 반대해 온 曺晩植을 고려호텔에 감금하고 공산당 一色으로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평남인민위원회’로 개편했는가 하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했다. ‘임시’字만 붙어있을 뿐 사실상의 ‘북한단독 공산괴뢰정권’의 시초다.



평양서 불 붙은 학생운동


이로 말미암아 민족진영 인사들이 대거 38선 이남으로 넘어가게 되어 평양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 할밖에 없었다. 이 같은 변혁은 해방 이후 학생들의 첫 겨울방학 동안 있었던 일이다. 개학이 되자 각 학교의 학생 자치회 활동이 활발해지고 소련의 지시로 신탁통치 찬성을 선전하더니 토지개혁 등 공산화작업에 몰두하게 된 김일성 일당을 주시하게 된다. 여기서 당면하게 된 게 1946년 3·1절 행사이다. 김일성 일당은 해방 이후 첫 3·1절 행사를 북한 공산화 작업의 기폭제로 계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 학교 학생들을 3·1절 행사에 동원할 것을 지시하면서 이날에 사용될 구호까지 배정했다. 그 첫번째가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위대한 소비에트 만세’였고 두 번째가 ‘…스탈린 대원수 만세’로 20개에 달하는 구호가 모두 소련과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공산화 개혁을 촉구하는 것들이고 맨 마지막 하나가 ‘조선자주독립만세’였다.



각 학교 자치회가 분개했다. 우리의 선열들이 ‘소비에트 만세’니 ‘스탈린 만세’나 부르자고 3·1운동을 일으켰단 말인가? 3·1절을 하루 앞둔 2월28일 각 학교 자치회장들은 평양 神學校(신학교)에 모여서 3·1운동을 모독하며, 북한공산화에 狂奔(광분)하는 공산도당에 항거하기 위해 무기한 동맹휴학을 결의, 이날 오후 각 학교별로 즉시 단행했다. 이래서 평양 驛前(역전)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는 단 한 명의 학생도 참가하지 않았고 그 후 40일 가까운 동맹휴학이 계속되었다.



한편 3·1절 기념행사는 평양 驛前 광장에서 열려 김일성이 주석단에 등장하여 연설을 시작하자 한 反共청년이 수류탄을 던졌으나 아쉽게도 김일성은 처단하지 못하고 소련 군인 한 명만이 부상하는 사건이 있었다.



소리 없이 끌려간 학생들



4월 초부터 학생들은 동맹휴학에서 벗어나 학교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날이 가도 보이지 않는 학생들이 있었다. 38선 以南(이남)으로 넘어갔는지 아니면 시베리아로 끌려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양 학생들은 ‘공산당에 항거하는 동맹휴학은 했지만 신의주나 함흥에서처럼 공산당과 싸우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시베리아로 끌려가기야 했겠는가’하고 자위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5월1일 ‘메이데이’ 행사에 동원되어 街頭(가두)행진을 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행진하는 평양거리의 요소마다 공산당이 배치한 선동원들이 학생대열을 향하여 親蘇공산구호를 선창하며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도록 선동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마치 사전에 약속이나 한 듯이 전혀 호응하지 않고 묵비권 행진을 하였다.


행사 주최 측은 無言(무언)행진을 해온 각 학교 학생들을 평양시청 앞 광장에 집합시켜놓고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격렬한 어조로 연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나서 구호들을 선창했다. 그래도 親蘇 공산구호에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마지막에 한 간부가 ‘조선자주독립만세’를 선창했는데 이때는 모든 학생들이 시청광장이 떠나갈 듯한 우렁찬 함성으로 ‘조선자주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공산당은 각 학교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사범학교의 경우는 여름방학이 끝나자 강동군 보안서장을 하던 자가 교장으로 부임해 왔으며 교실마다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 낯선 전입생이 늘어나더니 공산당의 하부조직인 ‘民靑’(민주청년동맹)이 침투해 왔다.



1946년 가을부터 1947년 봄에 걸쳐 각 학교들에서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없어지는 학생들이 생기게 되었다. 각 학교들에는 학생들의 동호인 모임이나 서클이 있기 마련인데 反共反蘇(반공반소) 사상 경향인 서클을 탐색해서 소리 없이 한밤 중에 잡아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反共反蘇사상이 있다고 해도 아무런 행동이나 표현도 하지 않은 동호인 모임이나 서클에 가담했다는 것만으로 한밤중에 집단체포해, 소련군 軍犯(군범)재판에 넘겨 시베리아로 끌어간다.


나의 경우는 ‘희망단’이라는 이름의 서클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10여 명 회원이 모두 反共反蘇 행동을 한 바 없고, 단지 공산당 때문에 세상이 어렵게 되고 있지만 희망을 갖고 살자는 취지일 뿐이었다. 우리 회원들은 아침에 등교하면 모이는 장소가 있었다. 밤새 안녕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등교를 해서 모임장소에 갔더니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큰일 난 사건을 직감하고 담임선생에게 조퇴를 하겠다고 알리고는 학교를 뛰쳐나왔다. 내 숙소이던 누님 집에 가려고 하는데 그 누님이 골목 앞에 나와 있다가 나를 보자 ‘어젯밤에 너 잡으러 왔었다’고 했다. 나는 그날 밤 숙소이던 누님 집에 가지 않고 친구 집에서 자고 학교에 나갔던 것이다.



10여 일이 지난 뒤 한 회원 집에서 소련군 통역관을 통해 알아본 즉 체포된 회원 모두가 ‘反動罪(반동죄)’로 7~8년 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끌려갔다는 소식이다. 나는 생각 끝에 시골에 있는 내 유모 집에 숨어 있기로 했다.




‘김집’에서 ‘김원휘’로 改名



나는 ‘어떻게 하면 잡혀가지 않고 북한에서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1947년에 만 17세가 되는 나는 公民證(공민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유모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내 본적지의 面사무소를 찾아가 내 호적을 떼어 보았다. 나는 크게 놀랐다. 日政 때 ‘창씨개명’을 했던 석 자 이름이 그대로 되어있었다. ‘김집’이란 외자이름은 없어지고 ‘김원휘’라는 석 자 이름이다. 面사무소가 어떤 착오를 일으켰는지는 알 바 없고 나에게는 천우신조였다. 나는 그 호적을 근거로 공민증을 발급받아 ‘김원휘’로 행세할 수가 있게 되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學制(학제)개편이 단행되어 중학교 3학년과 4학년이 동시에 졸업을 하게 되어 1947년 여름에 졸업시험을 일제히 치르게 되었다.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고 해도 졸업시험에 합격만 하면 졸업자격을 주게 되는데 졸업시험 문제집이 두 달 전에 배포되었다. 나는 4학년 졸업시험 문제집을 구입해 공부를 했다. 4학년 졸업시험에 합격하면 대학에 진학하든가 새로 생기는 고급 중학교 3학년에 진학할 수가 있다. 學制개편 덕택에 중학교 4학년 졸업시험을 쳐서 평양 교원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평양 교원대학은 중국에서 온 공산당 연안파 두목 김두봉(한글학자)이 학장이었고 이름만 대학이지 실은 중학교 敎員(교원)양성소나 다름없었다. 나는 수학과를 선택했는데 1년 동안은 별 탈 없이 다닐 수가 있었는데 1948년 학년 초를 앞두고 문제가 발생했다. 대학 再배치 사업으로 평양교원대학이 황해도 해주로 나가게 되었는데 38선에 근접한 해주인 까닭에 학생들의 思想(사상)을 검열한다는 것이었다.



38선을 넘다



출신 성분에서부터 성장과정을 면밀히 조사하는 思想검열에 ‘김집’을 ‘김원휘’로 위장한 내가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여 조심스럽게 학교에 나갔더니 학생과에 근무하는 내 친척이 다가와서 ‘보안부에서 네 일건서류를 갖고 갔다. 뛰라’고 했다. 이제는 38선 以南(이남)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급히 아버지를 찾아가 이남으로 넘어가자고 말씀드렸다. 한참동안 침묵하던 아버지는 ‘이북은 조선 땅이 아니냐? 日帝 36년도 견뎠는데 참아 보자꾸나…’고 하셨다. 더 이상 아버지에게는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너는 잡히면 시베리아로 끌려간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뛰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본가집 친척이 초년 과부로 아들 하나를 키우며 살았는데, 광성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그 아들이 한밤 중에 잡혀가 시베리아로 끌려간 사실도 말해주었다. 어머니가 38선 안내비 등 급히 旅費(여비)를 마련해 주셔서 8월 한여름 밤에 38선을 넘었다. 그날은 황해도 청단의 장날이었는데 ‘가거라 38선’ 노래가 구슬프게 반복되고 있었다.



개성수용소를 거쳐 서울에 왔다. 서울에는 내 오촌 숙부가 일정 때부터 살고 있었다. 서울 용산에서 材木商(재목상)도 하고 개성 부근의 인삼밭도 갖고 있는 부자였다. 해방 후에는 서울 역전에 있는 옛 총독부 館舍(관사)를 점유하고 있었다. 내 어머니도 서울에 가거든 네 오촌집에 가 있으라고 하며 주소도 가르쳐 주었다. 서울에 온 나는 오촌 숙부집으로 들어갔다. 숙부님은 외출중이고 숙모만이 있었는데, 숙부님의 처남이 공부하는 방에 들어가 숙부님이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갱이 냄새를 맡다



나는 책장에 있는 책들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북에서 소련이 각 학교에 朝蘇(조소)문화협회를 통해 공급한 《볼세비키당사》와 《사회 발달사》 등 소련에서 우리말로 제작된 공산주의 포교用 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책들이 이남에까지 배본이 되었다는 사실과 내 숙부님의 처남이 그 책을 꽤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 있었기에 나는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이 집에서 빨갱이 냄새를 맡은 것이다.


얼마 후 숙부님이 귀가했다. 나를 보자마자 ‘영보(본인의 兒名)야, 이북은 조선 땅이 아닌가? 왜 넘어왔냐?’고 했다. 북에서 아버지가 ‘이북은 조선 땅이 아니냐’고 한 말과 똑같은데 나에게는 몹시 서럽고 실망스러운 충격이었다. 눈물이 나오려고 하기에 얼굴을 돌리며 ‘작은아버지 나는 이 집의 食客(식객) 노릇하려고 온 게 아니요. 시베리아에 끌려가지 않고 조선 땅에서 살려고 왔어요’라고 말하고는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그 집에서 나와 서울역 쪽으로 맥없이 걸어가고 있는데 숙모님이 따라와서 호주머니에 얼마간의 돈을 넣어주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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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빨갱이’와 ‘수박 빨갱이’


이럭저럭 몇 날을 보낸 뒤 서울대학교 교수인 학교 선배를 찾아가 대학에 들어가는 문제를 상의하게 되었다. 선배 교수님은 평양에서 넘어온 나와 같은 처지의 학생 두 명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지금 대학은 제대로 공부할 형편이 못 된다’고 하면서 우리더러 학과를 따질 것 없이 商科(상과)대학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우리 3人 일행은 교수님의 말씀대로 상과대학에 가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고, 교수님은 우리를 상과대학 쪽에 연락해 놓았다.



그래서 우리 3人은 청량리 電車(전차) 종점에서 한참 걸어서 상과대학을 찾아갔더니, 학교 국기 게양대에는 인민공화국旗가 펄럭이고 있었다. 북한의 인민공화국이 아직 정식으로 수립도 되지 않았는데 북한에서 배포한 인민공화국 헌법초안에 있는 깃발을 이곳 빨갱이 학생들이 만들어 걸어 놓은
2023-09-23 20: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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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 2023-09-23 20:41:57 삭제


‘사과 빨갱이’와 ‘수박 빨갱이’


이럭저럭 몇 날을 보낸 뒤 서울대학교 교수인 학교 선배를 찾아가 대학에 들어가는 문제를 상의하게 되었다. 선배 교수님은 평양에서 넘어온 나와 같은 처지의 학생 두 명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지금 대학은 제대로 공부할 형편이 못 된다’고 하면서 우리더러 학과를 따질 것 없이 商科(상과)대학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우리 3人 일행은 교수님의 말씀대로 상과대학에 가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고, 교수님은 우리를 상과대학 쪽에 연락해 놓았다.



그래서 우리 3人은 청량리 電車(전차) 종점에서 한참 걸어서 상과대학을 찾아갔더니, 학교 국기 게양대에는 인민공화국旗가 펄럭이고 있었다. 북한의 인민공화국이 아직 정식으로 수립도 되지 않았는데 북한에서 배포한 인민공화국 헌법초안에 있는 깃발을 이곳 빨갱이 학생들이 만들어 걸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우리 3인은 눈에 불이 나서 그 깃발을 끌어내려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학교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이 학교에는 태극기도 없소?”라고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태극기를 국기 게양대에 걸어놓고는 학교 입학에 관한 서류와 절차 등을 확인하고 나서 학교를 나와 청량리 전차 종점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10여 명의 학생들이 길을 막고 우리를 에워싸더니 몰매를 쳐서 우리는 땅에 엎드린 채 매를 맞게 되었다.



이 몰매 소동은 경찰이 호각을 불며 출동하자 끝났는데 학생들은 모두 도망을 쳐서 매맞은 우리 3인만이 경찰과 대면하게 되었다. 우리는 경찰관들을 향해 말했다.

“이북에서 사과 빨갱이를 피해 이남에 왔는데 여기는 수박 빨갱이가 판을 치는구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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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4174&C_CC=AP








1945.11.2. 하지



[ ......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를 지지하거나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는 실제로 민족주의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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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John R. Hodge) 장군은 11월 2일에 도쿄(東京)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심각한 국면에 이르렀음을 보고하는 전보를 쳤다. 하지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들이 지배권을 장악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대부분의 과격분자들이 소련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나, 확실한 증거를 포착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는 또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를 지지하거나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는 실제로 민족주의자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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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80. 美軍政府의 「國家非常事態宣言」을 지원하다







1945.11.



[ ....... 국도 넓은 길은 환영인파로 메워졌고 연도에는 부근 촌락민들이 도열하여 120리 거리에 인파가 들끓었다. 그리고 진남포 수십리 앞길까지 환영인파가 물결쳤다.


대한민국 만세, 조민당 만세 ........ ]




孫世一의 비교 評傳 (8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朝鮮民主黨의 創黨과 新義州學生들의 蜂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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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民黨보다 더 保守的인 朝民黨의 「政策」



창당대회는 11월 3일 오후에 구 일본인중학교 교정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채택된 조선민주당의 「선언」과 「강령」 및「정책」은 조선민주당의 정체성을 둘러싼 민족주의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6개항의 「강령」은



(1)국민의 총의에 의하야 민주주의공화국의 수립을 기함(제1항),

(2)종교, 교육, 노농(勞農), 실업, 사회 각계 유지의 결합을 요함(제4항),

(3)반일적 민주주의 각 정파와 우호협력하야 전민족의 통일을 도모함(제5항),

(4)소련 및 민주주의 제 국가와 친선을 도모하야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제6항) 등으로서, 친일파 배제와 소련과의 우호 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게다가 반일적 민주주의 각 당파와 우호협력하여 전 민족의 통일을 도모한다는 「강령」(제5항)의 규정은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정당 및 조직의 광범한 연합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확립”하라는 스탈린의 비밀지령과 일치한다.


그러나 12개항의 「정책」에는 조선민주당의 보수적인 성향이 그대로 표명되어 있다.


먼저 정치면에서는 국민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신앙의 자유와 선거 및 피선거권이 있고(제1항), 의회제도와 보통선거제를 실시하며(제2항), 교육과 보건의 기회균등을 보장한다(제3항)고 하여 의회제 민주주의를 천명했다. 그러나 소작제도의 개선, 자작농 창정(創定)의 강화, 농업기술의 향상(제8항)이라고 애매하게 표명된 토지문제나 노자문제(勞資問題)의 일치점을 득하야 생산의 지장이 없기를 기함(제11항)이라고 한 노동문제의 비전 등은 극히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31) 그것은 좌익정당들로부터 지주들과 친일파의 정당이라고 비판받던 남한의 한국민주당의 정강정책보다도 더 보수적인 것이라고 할 만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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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당은 창당되자 “요원의 불처럼 단시일내에 경이적인 숫자의 당원을 획득”37)할 만큼 큰 호응을 얻었다. 창당하고 한 달 뒤인 12월 1일 현재 북한지역의 공산당원수는 4,000명 미만이었는데 비하여 조민당의 당원수가 5,406명이었다는 사실38)은 조민당의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북한 전역의 도-시-군-면에 지부가 결성되어 당원수는 결당 3개월동안에 50만에 이르렀다고 관계자들은 주장한다.39) 그것은 물론 과장된 숫자일 것이나, 조민당이 급속한 성장세를 보인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지방지부가 결성되는 상황의 한 보기로 진남포(鎭南浦)시당을 결성할 때의 상황을 이윤영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중앙당부에서 수백명의 당원이 … 트럭에 분승하고 악대를 선두로 진남포로 향하였다. 국도 넓은 길은 환영인파로 메워졌고 연도에는 부근 촌락민들이 도열하여 120리 거리에 인파가 들끓었다. 그리고 진남포 수십리 앞길까지 환영인파가 물결쳤다. 대한민국 만세, 조민당 만세 소리가 들끓었다.”40)


이를 시기하여 지방의 공산당은 조민당 지방당부를 습격하고 폭행을 가하는가 하면 허무맹랑한 사건을 날조하여 조민당의 지방당간부를 경찰에 구금시키는 등 온갖 방해공작을 벌였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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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5. 조만식 연금






* 1945 폴란드



[ ..... 나치에 저항한 세력을 비롯하여 비공산주의자와 빨치산은 조직적으로 처형 ......

....... 인민 해방 위원회가 자신들이 정부에 참여시키길 원하는 사람을 고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 .......



...... 1945년 3월 정부 재구성 협상에 참여하려는 폴란드 반체제 인사 16명을 소련으로 잡아가 그해 6월에 전시 재판 ........

...... 스탈린은 미코와이치크의 폴란드 인민당이 의회에 할당된 의석의 1/4만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억압과 정치적 고립이 뒤따르리라 ........



....... 국민 투표에서 대규모 공산주의식 토지 개혁과 산업 국유화 등 제시된 개혁에 지지한 비중이 폴란드 인구의 1/3도 되지 않아 부결 ........ ]




폴란드 인민공화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폴란드 인민공화국(폴란드어: Polska Rzeczpospolita Ludowa 폴스카 제치포스폴리타 루도바[*], PRL)는 1952년부터 1989년까지 존속했던 폴란드의 공식 정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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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집]



폴란드 동부(회색)은 소비에트 연방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오데르-나이세 선 서쪽 독일 땅 대부분(분홍색)은 남은 폴란드(흰색)에 할양되었고, 이 두 지역이 새로이 창설한 폴란드 인민공화국을 이루게 되었다.


1944년 7월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에 소련이 침입한 뒤 폴란드 망명 정부의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 (Stanisław Mikołajczyk) 는 처칠과 함께 모스크바에 가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서 정한 폴란드 동부를 소련 영토로 병합하는 데 반대하였다. 폴란드는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스탈린에게 "제시한" 위장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對소련 정책의 첫 시험이 되었는데, 루즈벨트는 미코와이치크가 모스크바에 가기 전에 "걱정하지 마시오. 스탈린은 당신들의 자유를 뺏을 뜻이 없소."라고 말하였으며, 미국의 지지를 확보한 뒤 "나는 당신네 나라가 이번 전쟁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겠소."라고 말하였다.



미코와이치크는 더 작은 영토를 제시하였으나, 스탈린은 거부하였고, 그에게 자신은 폴란드 인민 해방 위원회(PKWN, 나중에는 "루블린 위원회")에 망명 정부가 참여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는데, 인민 해방 위원회는 소련의 전권대사 니콜라이 불가닌 상장이 직접 감독하는 위성 정당들과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얄타 회담(1945년 2월)에서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서 규정한 폴란드 동부 영토 대부분을 소련 영토에 병합하기로 합의되었고, 한편 폴란드에게는 동독의 일부 지역을 대신 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각각 폴란드 동부 영토 일부를 얻게 되었다. 소련은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독일 땅(이곳은 독일의 비옥한 지역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을 폴란드에 양도하였다. 또 얄타에서 인민 해방 위원회로 구성된 소비에트의 과도 정부가 망명 정부를 포함하여 "폭넓은 민주적 기반에 따라" 재구성하며, 재구성한 정부는 가장 먼저 선거 준비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폴란드 인민해방위원회는 자신들이 폴란드 사회를 대표하는 지역 자생의 단체로 가장하면서, 정부 당국의 역할을 가지고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 정부에 도전하였다. 얄타 회담에서 약속한 "자유롭고 공명정대한 선거"가 치러질지에 대한 의심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나치에 저항한 세력을 비롯하여 비공산주의자와 빨치산은 조직적으로 처형되었다. 인민 해방 위원회가 자신들이 정부에 참여시키길 원하는 사람을 고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자, 새로이 자유롭게 정부가 들어서리라는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고, 소비에트의 내무인민위원회는 1945년 3월 정부 재구성 협상에 참여하려는 폴란드 반체제 인사 16명을 소련으로 잡아가 그해 6월에 전시 재판에 넘겼다.


이들 반체제 인사들이 장기 복역을 선고받는 사이, 정치범이 풀려나고 소련군이 물러나리란 기대는 강한 수비대나 실행 계획이 없어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코와이치크를 비롯한 폴란드 망명 정부 요인들은 다시 대중의 지지를 얻고 여러 세력들을 자신들의 대의에 끌어들여 블록 정치를 잠식하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미코와이치크의 폴란드 인민당이 의회에 할당된 의석의 1/4만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억압과 정치적 고립이 뒤따르리라고 명령하였다.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와 볼레스와프 비에루트가 주도하는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지지가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특히 "3번의 동의"(3 razy TAK; 3xTAK)이라는 정책에 대한 국민 투표에서 대규모 공산주의식 토지 개혁과 산업 국유화 등 제시된 개혁에 지지한 비중이 폴란드 인구의 1/3도 되지 않아 부결되었다.[8] 미코와이치크의 인민당은 공산당 세력 바깥에서 자신들의 몫을 빼앗으려는 압력에 계속 저항하자, 선거구 1/4에서 인민당 후보가 자격을 박탈당하는가 하면 1,000,000명 이상의 인민당 활동자들이 체포되는 등 공공연히 테러를 당하게 되었으며, 면밀하게 조작된 부정 선거로 고무우카의 공산주의 세력은 다수를 확보하였다.



미코와이치크는 희망을 잃고 나라를 떠났다. 그의 지지자들은 무자비한 억압을 끊임없이 당하게 되었다. 1946년 10월 날조된 국민투표로 새 정부는 고용인 50명 이상의 모든 기업 뿐 아니라, 두 곳 이외의 모든 은행을 국유화하였다. 특히 1946년에 대중의 반대는 진압당하였으나 지하 활동은 여전히 잔존하였다. 1947년 1월에 열린 부정 선거로 1949년 비민주적인 공산주의 국가인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들어섰다. 저항군은 우크라이나에 병합된 폴란드 동부 지역에서 계속 공산주의자들과 싸웠으며, 이에 소련은 1944년에서 1952년 사이에 600,000여 명의 사람들을 체포하고 이 가운데 1/3 정도를 처형하였으며, 나머지는 구금 또는 망명되는 등의 조치로 대응하였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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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2.17.



[ ..... 러시아를 저의 조국이라 부른다니 ........

.....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 ........ ]



이승만,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 방송


게재지명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5년 12월 21일



李承晩은 17일 7시반 ‘共産黨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하에 그 대변인으로 하여금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방송을 하였다.



“共産黨에 대한 나의 입장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공산주의를 排斥하는 것이 아니오 공산당 극렬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4천여년의 오랜 역사를 가졌으나 우리가 다 잘못한 죄로 거의 죽게 되었다가 지금 艱幸히 살아나서 다시 발을 땅에 디디고 일어나려고 애쓰는 중이니 까딱 잘못하면 밖에서 들어 오는 병과 안에서 생기는 병세로 생명이 다시 위태할 터이니 먹는 음식과 행하는 동작을 다 극히 조심해서 어린애기처럼 간호해야 할 것이고 건강한 사람처럼 대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산당 극렬분자들의 행동을 보시고 우선 동서 각국에서 遂要되는 것만 볼지라도 폴란드 극렬분자는 폴란드 독립을 위하여 나라를 건설하자는 사람이 아니오 폴란드獨立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이번 전쟁에 독일이 그 나라를 점령한 후에 애국자들이 임시정부를 세워서 영국의 수도인 런던에 의탁하고 있어 백방으로 지하공작을 하며 英·美의 승인까지 받고 있다고 급기야 러시아가 독일軍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한 후에 폴란드 공산분자가 외국의 세력을 藉托하고 공산정부를 세워서 각국의 승인을 얻고 또 타국의 軍機를 빌려다가 국민을 위협해서 민주주의자가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 놓아 지금도 정돈이 못되고 충돌이 쉬지않는 중이며 이외에도 歐羅巴의 해방된 모든 나라들을 보면 각각 그 나라 공산분자들이 들어가서 제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의 권리범위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위주하는 고로 전국 백성이 처음으로 그자들의 선동에 끌려서 뭣인지 모르고 따라가다가 차차 각오가 생겨서 죽기로써 투거하는 고로 구라파의 각 해방국은 하나도 공산분자의 파괴운동으로 인연하여 분열 분쟁이 아니된 나라가 없는 터입니다.



동양의 중국으로 보아도 蔣介石總統의 애국심과 용감한 軍略으로 전국 민중을 합동해서 왜적에 항전하여 실낱 같이 위태한 중국운명을 보호하여 놓았더니 연합 각국은 다 그 공적을 찬양하며 극력 후원하는 바이어늘 중국의 공산분자는 백방으로 파괴운동을 쉬지 아니하고 공산정부를 따로 세워 중국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놓고 무장한 군병을 양성하여 중앙정부와 蔣總統을 악선전하여 그 세력을 뺐기로 극력하다가 필경은 내란을 일으켜 관병과 접전하여 동족상쟁으로 피를 흘리게 쉬지 아니하는 고로 타국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이권을 도모하기에 기탄치 않기에 이르나니 만일 중국의 공산분자가 만분지일이라도 중국을 위하여 독립을 보존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어찌 차마 이같은 파괴적 행동을 취하리오.



우리 대한으로 말하면 원래에 공산주의를 아는 동포가 내지에는 불과 몇명이 못되었다니 공산문제는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중에 공산당으로 지목받는 동포들은 실로 독립을 위하는 애국자들이요 공산주의를 위하여 나라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따라서 시베리아에 있는 우리 동포들도 다대수가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생명까지 희생하려는 애국자들인줄 우리는 의심없이 믿는 바입니다.



불행히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憑藉하고 국경을 없이하여 나라와 동족을 팔아다가 이익과 광영을 위하여 浮言僞說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軍機를 사용하여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를 조작하여 국민전체에 분열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다가 지금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이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여 민심을 현혹시키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로 만들고 저의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의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의 것을 만들어 가지고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대로 만들어 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왜 조선사람의 形容을 쓰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다가 저의 조국에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치 않는 것이니 우리 3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 놓고 싸울 입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남녀들은 어디서든지 각기 소재지에서 합동해서 무슨 명사로든지 애국주의를 조직하고 분열을 일삼는 자들과 싸워야 됩니다. 우리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과 우리 가족을 팔아 먹으려는 자들을 방임하여 두고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과 우리가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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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사람들을 회유시켜서 이 위급한 시기에 합동공작을 형성시키자는 주의로 많은 시일을 허비하고 많은 노력을 써서 시험하여 보았으나 종시 각성이 못되는 모양이니 지금은 중앙협의회의 조직을 더 지체할 수 없이 협동하는 단체와 합하여 착착 진행중이니 지금이라도 그중 극렬분자도 각성만 생긴다면 구태어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파괴운동을 정지하는 자로만 협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에 이 문제를 우리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우리나라도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切分으로 나누어져서 동족상쟁의 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노릇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각처에서 모든 애국 애족하는 동포의 합심합력으로 단순한 民主政體下에서 국가를 건설하여 만년무궁한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합시다.”







巨惡 스탈린과 공산당을 조롱한 李承晩의 대연설


트루먼 독트린을 2년 앞선 이 연설은 建國 지도자에 의하여 이뤄진,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공산당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이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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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설은 70세 老鬪士(노투사)의 위대한 先制공격이었다. 급소를 얻어맞은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중앙위원회 대표 명의로 ‘세계민주주의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반박함’이라는 長文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표현은 극렬했지만 守勢的(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 등 공산세력이 주도한 좌익의 통일전선체인 조선인민공화국은 李承晩이 귀국하기 전에 그를 主席으로 추대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래 놓고 그를 파시스트라고 공격하니 국민들에겐 잘 먹히지 않았다. 대중의 李承晩에 대한 신뢰는 공산당의 선전 선동이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李承晩이 공산당을 賣國세력으로 규정한 지 1주일이 지난 12월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美, 英, 蘇 3國 外相 회담은 남북한에 대한 5년 기한의 신탁 통치안을 발표하였다. 金九, 李承晩이 주도한 反託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은 熱火(열화)와 같은 민심에 동요하여 贊反(찬반)을 정하지 못했다. 지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을 찾아가 지침을 받으려 했으나 영사관측은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박헌영은 12월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그는 김일성 등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간부들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남한의 민심이 반대쪽이라고 설명하였다. 김일성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모스크바에 갔던 북한주둔 소련군 民政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으로 돌아온 다음날 朴憲永에게 지침을 하달하였다. 신탁통치를 결의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朴憲永은 1946년 1월1일 밤 평양을 출발, 2일 새벽 서울에 도착, 김일성과 보조를 맞추어 조선공산당 이름으로 모스크바 협정, 즉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李承晩의 1주일 전 예언대로 극렬공산주의자들은 民心을 거스르고, 소련의 지령에 충직하게 복무함으로써 민족반역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그들은 회복이 불가능한 敗着(패착)을 두었다. 좌익은 賣國세력, 우익은 民族진영이 된 것이다. 右翼(우익) 주도의 反託, 좌익 주도의 贊託(찬탁) 政局은 김구의 臨政(임정)세력을 오른쪽으로 몰았다. 그 뒤 한 동안 李承晩-金九 연합전선이 형성되면서 좌익은 더욱 고립된다.



李承晩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先制공격으로 역사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가 2010년 한국 대통령이었다면 연평도 도발 직후 평양의 금수산 기념궁전을 폭격하도록 명령하여 김일성의 屍身(시신)을 날려버리고 김정일-김정은을 昏絶(혼절) 시켰을 것이다.


李承晩의 공산주의자 배격 연설은 한반도 정세를 賣國者와 愛國者, 파괴자와 건설자, 敵과 동지, 善과 惡으로 가른 역사의 分水嶺(분수령)이었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는 그 연설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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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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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4.



[ ..... 현재 우리의 최대의 과업은 이남의 반동분자를 철저히 숙청하고 남북통일을 ........

..... 그 다음의 최대과업은 .... 우리 조선을 쏘련방에 가입시키는 문제입니다. ......... ]



1948.11.4. 동아일보


소련기행 박원민



이북의 소련방화 6

일부 한인유학생이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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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의 나라 쏘련! 그리고 노동자들을 위한 오락실이니 도서관이니 침실이니 하는 것도 그야말로 선전에 불과한 형식뿐이었다.

기술노동자를 양성하는 직업학교에도 수개소나 가 보았으나 설비도 한심하고 사용하는 기계도 영국제나 독일제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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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공장 등의 규율은 순전히 군대식이었고 주력을 군수공장에 두고 있었다.

4월 21,2일 경의 일이다. ..... 그날 북조선에서 간 쏘련유학생 약삼백명의 대표자가 '까잔'에서 우리 일행을 만나 보러 차저왔엇다.

그는 '까잔'종합대학 법과학생이며 해방전까지 감옥생활을 8년동안이나 한 30세 청년이였다.쏘련유학을 가기전까지는 북조선민정 간부였었고 김일성이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중의 하나이었다. 이청년이 우리가 투숙하고 있는 북부 여관에 와서 현재 평양 제이 여자중학교 교장인 조여사와 이야기를 하던 중 다음과 같은 말을 강조하였다.


" 물론 현재 우리의 최대의 과업은 이남의 반동분자를 철저히 숙청하고 남북통일을 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의 최대과업은 무엇인지 아시요. 동무들은 실익양성이니 문화향상이니 산업개발이니 하지만 .... 물논 이것도 큰 과업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 보다도 더 중하고도 큰 과업은 우리 조선을 쏘련방에 가입시키는 문제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모-든 것을 깨다를 수 있었다.

쏘련의 정책과 현재 북조선의 근본 정책은 이 한마듸로서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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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논 '모스크바'에는 공창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시내 각처에 있는 '바자루'(서울 야시장과 같으나 그 보다도 더 급이 낮은 시장)에는 사창이 무수히 있는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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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 소련


[ ..... 대소변 사이에 간이 마켜 있지 않고 대변 보는 데는 다만 구멍들이 둥글둥글 뚤려 있을 뿐 .......


..... 명색만은 침대차이였으나 밑바닥은 '스프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무 판자로 만드러젓고 또 열리지 않도록 안전장치도 해노치 않은 ......... ]



1948.10.29. 동아일보


소련기행 박원민


중공군 뒤에 소군 2

서백리아 철도는 원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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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기다리는 23일동안 우리는 여관이 아닌 여관에서 즉 '크라스키노'에서 우리가 타고 온 ..철도침대차 속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쏘련에는 여관이 있기는 있어도 극히 수효가 적은 모양이었다. 이것은 '보로씨로브'역을 가보면 많은 소련 사람이 떼를 지어서 마치 서울역 앞에서 사람들이 자듯이 역안 땅바닥에서 자면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역안에 있는 공동변소에 들어가 보면 세계일등국이 이러한 변소를 사용하는가 하고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남녀용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대소변 사이에 간이 마켜 있지 않고 대변 보는 데는 다만 구멍들이 둥글둥글 뚤려 있을 뿐이고 환기장치라고는 유리창 하나 없기 때문에 항상 가득 잠기어 있는 그 고약한 냄새에는 지금 생각하여도 골치가 또 아파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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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질문

'현재 중국 공산군은 대단히 불리한 전쟁을 하고 있으며 특히 연안이 함락(1947년 4월에 함락하였음)될 위험이 있는 데 어찌하여 쏘련은 원조하지 않고 있는가?'

답 우스면서 '물논 원조하고 있다. 내가 방금 만주에서 나오는 길인데...'

문 '그러면 소련군은 정복을 입고 원조해 주느냐?'

답 또 우스면서 ' 중국 사람같이 변장한다'


이로 보건대 지금도 역시 쏘련군인들은 중공군과 같이 변장하고 중국말을 사용하면서 중공군을 원조하고 있다는 것이 틀림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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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밤 아홉시편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에 올났다. 기차는 명색만은 침대차이였으나 밑바닥은 '스프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무 판자로 만드러젓고 또 열리지 않도록 안전장치도 해노치 않은 참으로 위험 천만한 것이였다. 하는 수 없이 중단과 상단에서 자게 되어 우리는 끈으로 자기 침대를 묶은 다음 그 끈의 한쪽을 모자 거는 못에다 매여 놓고서야 겨우 조끔 안심을 하고 잘 수가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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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 소련



[ ..... 대소변 사이에 간이 마켜 있지 않고 대변 보는 데는 다만 구멍들이 둥글둥글 뚤려 있을 뿐 .......



..... 명색만은 침대차이였으나 밑바닥은 '스프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무 판자로 만드러젓고 또 열리지 않도록 안전장치도 해노치 않은 ......... ]





1948.10.29. 동아일보



소련기행 박원민




중공군 뒤에 소군 2


서백리아 철도는 원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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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기다리는 23일동안 우리는 여관이 아닌 여관에서 즉 '크라스키노'에서 우리가 타고 온 ..철도침대차 속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쏘련에는 여관이 있기는 있어도 극히 수효가 적은 모양이었다. 이것은 '보로씨로브'역을 가보면 많은 소련 사람이 떼를 지어서 마치 서울역 앞에서 사람들이 자듯이 역안 땅바닥에서 자면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역안에 있는 공동변소에 들어가 보면 세계일등국이 이러한 변소를 사용하는가 하고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남녀용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대소변 사이에 간이 마켜 있지 않고 대변 보는 데는 다만 구멍들이 둥글둥글 뚤려 있을 뿐이고 환기장치라고는 유리창 하나 없기 때문에 항상 가득 잠기어 있는 그 고약한 냄새에는 지금 생각하여도 골치가 또 아파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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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질문


'현재 중국 공산군은 대단히 불리한 전쟁을 하고 있으며 특히 연안이 함락(1947년 4월에 함락하였음)될 위험이 있는 데 어찌하여 쏘련은 원조하지 않고 있는가?'


답 우스면서 '물논 원조하고 있다. 내가 방금 만주에서 나오는 길인데...'



문 '그러면 소련군은 정복을 입고 원조해 주느냐?'

답 또 우스면서 ' 중국 사람같이 변장한다'



이로 보건대 지금도 역시 쏘련군인들은 중공군과 같이 변장하고 중국말을 사용하면서 중공군을 원조하고 있다는 것이 틀림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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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밤 아홉시편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에 올났다. 기차는 명색만은 침대차이였으나 밑바닥은 '스프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무 판자로 만드러젓고 또 열리지 않도록 안전장치도 해노치 않은 참으로 위험 천만한 것이였다. 하는 수 없이 중단과 상단에서 자게 되어 우리는 끈으로 자기 침대를 묶은 다음 그 끈의 한쪽을 모자 거는 못에다 매여 놓고서야 겨우 조끔 안심을 하고 잘 수가 있었다.(계속)








1948.10.31. 동아일보


소련기행 박원민



도처마다 걸인군 3

감시의 열차생활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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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가 될 무렵에 어느 조끄마한 역에 기차가 정거를 하였다. 이때였다. 쏘련 사람들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우유, 마늘, 생선, 찐 감자 등을 들고 우- 하고 모여든다. 우리나라의 정거장 풍경을 상상하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때때로 거지들이 차속으로 들어와 애걸을 하는데 이 역시 우리나라 거지 이상이였다. 여기서 일행중 여교원 하나가 먹다 남은 빵 한개를 가지고 나갔더니 이것을 사려고 무려 백여명의 사람이 모여 들었다. 심지어 나종에는 기차안에 있던 손님들까지도 그것을 사려고 모여든다. 그리하여 빵 한개가 백50 루-부를에 팔렸다. 백오십 '루-부를'이라 하면 그 당시 이북돈으로 환산하여 육백원이다. 그때 육백원이면 이북서 대두 한말반의 쌀을 살 수 있었든 것인데 이로 미루어 보드레도 쏘련의 식량난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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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다도 우리는 수백명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역안 땅바닥에 누어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발사하는 코를 찌르는 썩는 냄새와 같은 체취에 더욱 얼굴을 찌프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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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랄산맥 이산맥의 서쪽 구주 쪽에 '쓰벨노블스크'라는 큰 공업도시가 있다. 이곳에는 북조선서 보낸 유학생이 약이십명 가량 공부하고 있다. 기차가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 일행이 이곳을 통과하는 것을 알고 유학생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들은 우리를 붓잡고 이구동성으로 '여기에는 쏘련 각처에서 모여 든 많은 유학생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 조선 유학생이 가장 성적이 우수합니다. 그러나 무어니무어니 하여도 제일 배고픈 데에는 못견디겟읍니다. 지금 우리들 중 약 이할이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읍니다. 이 학생들은 멀지 안어 조선으로 호송당할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밖에도 곤난한 점이 많겠지만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였다. 우리 일행은 가지고 있던 우리 식량중에서 시큼하고도 씁쓸한 검은 빵을 나누어 주었더니 무엇보다도 좋은 선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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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공산당의 청년동맹규약 .......

..... " 사회주의조국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무한의 충성을 다하도록 교육한다. " .......... ]




1946.5.28.동아일보


사회주의조국에 충성하라

조공청년동맹의 지도강령




한때 조선을 소련의 일연방 되기를 희망한다고 외국기자단에서 말한 조공책임비서 박헌영에 대한 사실이 미국 뉴욕타임쓰지로부터 세간에 보도되자 세인의 공노를 사게 되엇슬대 변명이 구구하엿는데 요지음 조선공산당의 청년동맹규약을 들추어보면 막쓰 레닌의 리렴과 모순되는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사회주의조국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무한의 충성을 다하도록 교육한다."


이것은 조선혼이 사라있고 조국재건에 피끓는 조선청년남녀에게는 이따위 얼빠진 지도가 감히 손을 대지 못할 것으로 밋으나 일방 상심할 일이 아닐수 없다.







* 1946.3.10. [ 조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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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면회 때 주신 당신의 두발(頭髮)



제가 방에 들어가니까 그간의 안부를 물으시더니 누런 종이의 편지봉투를 제 앞에 꺼내 놓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접히고 속에는 뭔가 들어있는 듯 약간의 두께를 지녔는데, 제가 집어보니 눈에 익은 그분의 만년필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檀紀四二七九年 三月十日
西紀 一九四六年 三月十日
頭髮



저는 가슴이 철렁하고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최후를 준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족과 영영 이별하실 때가 가까워졌음을 판단하신 것이었습니다. 눈물을 참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눈물을 애써 참았습니다. 그리고 그 봉투가 무엇인지, 왜 이런 것을 저에게 주시는 것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묻지 않아도 그분이 하고 싶으신 말씀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봉투에 적으신 날짜로 보아 연금되신지 2개월쯤후, 그러니까 이미 반년 전에 준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망설이시며 품고 계시다가 이젠 때가 됐다고 판단하셨던 것입니다.



조 선생님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눈 끈 장님을 만드느니, 위험이 따르겠지만 애들을 서울로 데려다 공부를 시키는게 좋겠어요."


'눈 뜬 장님'말씀은, 당시 북한 당국이 북한공산화 작업을 서두르는 한편 반대세력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탄압을 점점 심하게 할 때인데, 그 일환으로 소위 '반동분자'의 자녀들은 국민학교 이상의 교육을 제도적으로 봉쇄하도록 준비하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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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봄 연흥(然興)이 국민학교에 입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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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학교 교육 이란 것이 문제였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공산당이 세상권력을 잡고 나니 늘 학교에서 배워준다는 것이 '김일성 장군'노래 아니면 붉은 군대 노래이고,'이승만 원수', '김구 원수'이런 구호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늘 그런 것만 배워 갖고 오니, 도강 선생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월남하라는 말씀의 뜻을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도 1년여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조 선생님이 어디로 끌려가셨는지, 어떻게 지내시고 있는지 전혀 소식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분 걱정에 저는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됐습니다. 게다가 시골생활이란 것이 아무 대책도 없는 것이어서 생계마저 위협 받게 됐습니다.



그 분 말씀 따라 어린 세 자녀 데리고 월남


48년 가을, 이제 더 이상 월남을 미룰 수는 없게 됐습니다. 저 선생님의 생사조차 모른 채 소식이 끊긴지 언 2년이 가까워진 때였습니다. 6남매를 이끌고 먼저 월남한 장녀 선부(善富)는 인편에 우리도 월남할 것을 권해 왔습니다. 세 자녀를 데리고 월남하는 것이 고당 선생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월남을 서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북한에 '통행증'이란 제도가 곧 생겨나 몇 달 후부터 군(郡) 경계를 벗어나려면 면(面) 인민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반동세력은 물론 주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저하고 있는 동안 몇 달 후 이 통행허가 제도가 실시되면 우리는 영영 그 강서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같은 '반동'의 여행을 허가해 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이 곳을 벗어날 수 없다면 "아이들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지 말고 서울로 데려가 공부시켜라"는 조 선생님의 마지막 당부조차 받들지 못하게 될 것같았습니다. 저는 '월남하는 것만이 조 선생님께서 남기신 세 자녀를 위하는 길' 이라고 판단, 조 선생님을 북한 땅에 남겨둔 채 38선을 넘기로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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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3.


[ ...... 월남동포가 약 150만 명이고 그후도 계속적으로 매달 2, 3만 명이 월남중 ....... ]



월남자 140만 명, 귀환동포 200만 명 등 이재민 실태


대한일보 1948년 09월 11일



해방 이후 해외 각지로부터 귀환한 해외동포, 38이북으로부터 남하한 월남동포 또는 그 동안 마비상태에 빠진 각 생산공장에서 수없이 밀려나온 실업자군, 기타 친족·가족 등을 잃어버리고 거리를 방황하는 어린이·노인 등 300여만 명이 지금 남조선 각지에서 조국애도 동포애도 인정도 모르는 채 정처없이 헤매이고 있다.


즉 그 동안 보건후생부·외무처·노동부 등에서 지난 3월말까지 조사한 숫자로만 보더라도 월남동포가 약 150만 명이고 그후도 계속적으로 매달 2, 3만 명이 월남중에 있다고 하며 해외귀환동포는 모두 212만 7,503명, 세궁민이 약 1백만 명, 실업자가 약 103만 명 그밖에 孤子·불구자 등의 구호를 요하는 자 약 21만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구호를 요하는 자 수는 실로 남조선 총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300만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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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안 : 남북한 정치세력끼리 알아서 해라 그러면 선거절차도 마련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당시 좌익과 우익은 어느 한 문제에 있어서도 합의를 이룰 수 없는 완전히 대립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 좌익세력이 우익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했고, 그걸 위해 우익을 친일파로 매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일선거를 위한 절차도 마련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협상 테이블에 앉기는 앉되 합의되는 것 없이 세월만 보내고 계속해서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했을 겁니다. 이런 점은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라오스에서 외부의 개입 없이 내부에서 알아서 해라 하니까 합의를 모색하지만 합의를 못합니다. 협상은 질질 끌다가 물리력에서 앞선 공산세력에 의해 공산화됩니다.



한반도에서도 한민족이 알아서 해라 그랬으면 아마 똑같이 됐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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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더구나 한반도에 인접해 있는 당시 중국대륙의 상황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47년 하반기에 이미 중국 공산군이 국민당 정부군을 수세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49년에 가서는 중국대륙이 공산화됩니다. 바로 그런 상황이 한반도에 영향을 미쳐서 중국에서의 상황이 한반도에서 그대로 재연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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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안 : 이승만 박사는 단독선거다 단정이다 하는 말을 한번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렇게 규정을 했느냐. 좌익이 그렇게 규정을 했습니다. 좌익의 용어가 일반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박사가 좌우합작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1930년대 이래 세계 모든 나라에서 좌우합작을 해서 좌익에게 주도권이 넘어가지 않은 예가 단 한 건도 없습니다. 그래서 좌우합작을 하면 결국은 좌익에게 말려든다는 것을 다른 나라의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한지역에서 자율정부를 수립하자고 한 것은 당시 민족의 현실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소련과 소련의 앞잡이인 남북한의 공산세력은 남북한 전체를 공산화하거나 그것이 안 되면 북한지역을 분단해서 공산화하는, 그런 전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놓을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남북한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럼 북한까지 비공산지역으로 만들면 될 것 아니냐? 그렇게 되면 좋지만 그럴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선 남한지역에서라도 정부를 수립하려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승만 박사가 46년 6월 정읍에서 연설을 했을 때 우리는 그걸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반박하는데도 안재흥 씨가 발행인으로 있는 한성일보는 이 박사의 그런 발언이 뭐가 나쁘냐며 이 박사를 옹호했습니다. 북한엔 이미 5도행정국이라는 분단정권이 수립되어 있고, 어차피 통일정부가 서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남한에서만이라도 임시정부, 또는 선거에 의한 정부가 들어서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며 옹호를 했던 것입니다. 안재흥 씨는 중도파인데 이렇듯 중도파에서도 현실적인 사람은 평가했다는 겁니다. 그런 점들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박사가 권력욕 때문에 남한에서 단독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민족 분단을 영구화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이 박사를 나쁘게 보는 관점에서 왜곡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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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6.7.


한민당, 좌익계열의 남조선단독정부수립설 비난에 대해 반박성명



조선일보 1946년 06월 08일



한민당, 좌익계열의 남조선단독정부수립설 비난에 대해 반박성명



韓國民主黨宣傳部長 咸尙勳은 7일 오전 11시 同黨宣傳部에서 기자단과 회견하고 다음과 같이 담화를 발표하였다.


“李承晩博士의 民族統一機關設置 云云의 연설을 일부에서는 무슨 역적질이나 한 것 같일 선전하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첫째, 民族을 분열시킨다고 하나 南北이 분단된 것은 美蘇兩軍의 분할점령 때문이오, 38선의 撤廢를 반대한 것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左右가 분열된 것은 獨立促成中央協議에서 共産黨이 탈퇴하고 그 후 共産黨方面에서 독립 대신에 信託을 받고 某聯邦이 되기를 희망한 때문이다.



둘째, 政黨慾에서 나왔다하나, 누구나 自主政權樹立을 희망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왜 共産黨에서는 미리부터 이 統一機關에 참여할 생각을 가지지 않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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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北朝鮮에서 피난해 온 사람이 65만 지금도 매월 수천 인씩 南下한다. 이 避難民을 親日派·民族反逆者라고 낙인을 찍는 사람이 있으니, 그네들은 이것이 양심적인 朝鮮人의 말인가 자문해 보라.”






1946.6.


[ .....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발언이 정치적 통일에 미치는 영향이 긍정적이겠느냐 .... “그렇다”... 58%, “아니다”가 28%, ....... ]



[ ..... 이승만이 최고의 정치지도자이다 ..... 69% ... “그렇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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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방된 한국에서 이승만의 존재는 설화적인 권위에서나, 국제정치에 대한 통찰력에서나, 대중선동력에서나, 그리고 이른바 정치술수에서나, 그야말로 족탈불급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1946년 들어 군정청 공보부가 주기적으로 실시한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공보부는 3월 16일에서 21일까지와 22일에서 29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서 각 정당 및 인물에 대한 지지도를 조사했다. 1차조사에서는 1,908명이, 2차조사에서는 2,269명이 질문에 응했는데, “다음의 인물 가운데 누가 한국인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가장 열심히 일하겠는가?”라는 질문에 1차조사에서는 이승만 32%, 김구 22%, 김규식 9%, 여운형 13%, 박헌영 10%, 김일성 3%였고, 2차조사에서는 이승만 30%, 김구 20%, 김규식 8%, 여운형 15%, 박헌영 11%, 김일성 2%로 나타났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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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초에 한국에 와서 하지 장군의 정치고문으로서 민주의원 창설에 산파역을 했던 굿펠로 대령은 5월 24일에 귀국했다.


굿펠로는 서울을 떠나기에 앞서 외신기자들과 회견했는데, 국내신문에는 AP통신 특파원 로버츠 기자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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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펠로는 또 “한국에 총선거가 실시된다면 나의 관측으로는 90%는 민주주의가 차지하고 10%는 공산주의가 차지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고도 썼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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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가 “이승만이 최고의 정치지도자”라고 응답



6월 5일 오전 11시에 이리공업학교에서 열린 환영강연회에는 7만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우리는 오직 자주독립만을 원한다. 이에 3천만은 이 길을 향하야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하고 역설했다.37)


이튿날 오전 9시에 이리를 출발한 이승만은 보리가 익어 가는 김제평야를 거쳐 오전 11시에 군산(群山)에 도착했다. 군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연설회에는 군산부민, 옥구(沃溝)군민 등 20여만명의 군중이 모였다. 김제 만경평야를 본 소감으로 연설을 시작한 이승만은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정신을 가지고 나아가자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공산 극렬분자에 대해서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손을 잡고 말리기 바란다. 미소회담을 기대했으나 소련의 고집으로 무기휴회가 되었다. 우리는 냉정히 참고 참되 끝이 아니 날 때에는 내가 명령을 내릴 터이니, 이때는 죽음으로 독립을 찾아야 한다.”38)


이승만은 이제 “내가 명령을 내릴 터이니…”와 같은 언사를 공공연히 구사함으로써 그의 대중강요형 지도자의 풍모를 자연스럽게 과시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이 크게 파문을 일으키고 있던 6월 7일과 9일 사이에 군정청 공보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승만의 지지율이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서울 시민 1,049명을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실시한 것인데, 좌익정파들의 맹렬한 비난과는 반대로 많은 응답자들이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발언이 정치적 통일에 미치는 영향이 긍정적이겠느냐는 문항에 대해 “그렇다”고 응답한 사람이 58%, “아니다”가 28%, “무응답”이 14%였고, 이승만이 미군정부의 반공식적인 대변인이냐는 문항에 대해 “그렇다”가 24%, “아니다”가 59%, “무응답”이 17%였으며, 이승만의 활동이 정치적 통일에 기여할 것이냐는 문항에 “그렇다”가 46%, “아니다”가 36%, “무응답”이 18%였다. 그리고 이승만이 최고의 정치지도자이다는 문항에 대해서는 무려 69%의 응답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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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87. 李承晩의 井邑발언과 민족통일총본부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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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증오가 중요한 정치적 요소로 처음 등장한 것은 러시아의 공산당 혁명이 성공해서 공산주의가 널리 퍼진 1920년대 이후였다. 공산주의가 反제국주의적이고 反식민주의적 이념으로 인식되었으므로, 다른 식민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공산주의는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고 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들이 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전투적 신조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드러내놓고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공산주의의 세력이 커질수록, 좌우 대립은 심해졌다. 김좌진 장군의 암살과 金九 선생의 암살 기도는 1930년대에 이미 좌우 대립이 화해할 수 없는 정도로 치달았고 두 세력들이 서로 극심한 증오를 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광복으로 권력 투쟁이 시작되자, 좌우 대립은 당연히 더욱 격렬해졌고, 두 세력들 사이의 증오도 커졌다. 그리고 그런 대립과 증오는 한반도의 분단을 확고하게 만드는 데 한몫을 했다. 좌우익 사이의 대립이 그렇게 격화되지 않았고 두 세력들이 서로 품은 증오와 불신이 그리 크지 않았더라도, 이미 세계 정치에서 냉전 구도가 굳어진 상태였으므로, 분단은 필연적이었을 터이다.


그래도 좌우익이 서로 품었던 증오와 불신이 분단 구도를 좀더 확고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남한과 북한에서 세력을 잃은 소수에 대한 박해가 나왔다. 북한 정권에 의한 地主 계급에 대한 혹심한 박해는 많은 북한 주민들의 南下를 불렀다. 그리고 남한 지역에서 일어나 좌익 세력의 반란들은 혹심한 진압을 불렀고, 그 과정에서 양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6·25 전쟁은 좌우익의 대립으로 생긴 증오가 거침없이 분출될 곳을 제공했다.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은 그들이 점령한 곳에서 그들이 적이라고 인식한 사람들에 대해서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종류의 증오를 드러냈다. 그들은 주민들 사이의 증오를 의도적으로 키웠고 그것을 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그들의 그런 非인간적 정책은 북한군이 물러간 지역에서 우익 세력의 처절한 보복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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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유능했던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2년 만에 졸업하면서 각국 외교관을 포함해 800여명의 청중 앞에서 유창한 영어로 졸업생대표 연설을 할 정도로 수재였다. 당시 졸업연설의 제목이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었는데 이는 이후 그의 일관된 목표였다.


급진개혁을 도모하다가 체포돼 6년여의 옥살이를 하고 나와 러일전쟁 직후 구국의 사명을 띠고 미국에 보내져 한국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또 조지 워싱턴대와 하버드, 프린스턴대를 거치며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5년만에 받았다.


귀국해 전국을 돌며 독립사상 고취에 주력한 그는 105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미 체포대상 1호였다.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교포를 대상으로 교육과 언론사업에 주력한 그가 정치가로 떠오른 것은 3·1운동(1919년) 이후 생겨난 5곳의 임시정부에서 모두 그를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로 추대하였다. 그만큼 그는 독립운동가 중에서 유능한 인재였다.



● 공산화를 막아낸 용미주의자


1946년 6월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들어 그에게 한반도 분단 고착화의 책임이 있다고 지탄하는 것은 오해다.

1993년에 공개된 소련측 자료를 보면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이미 북한에 친소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는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인민군 창군 등 실질적 정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분단 고착화의 원흉은 소련이다.


이승만은 한반도를 공산화하려 한 소련의 속셈과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한반도를 포기하려 했던 미국의 속내를 동시에 읽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길은 남한이라도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국제법을 전공한 그는 미국이 아닌 유엔을 떠올렸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로 탄생한 세계에서 드문 신생국이 됐다.


이승만은 ‘미제의 앞잡이’가 아니었다. 그는 광복 전부터 미국의 기피인물이었다. 미국은 1947년 중반까지 말 안 듣는 이승만보다는 김규식을 더 지지했다. 이승만은 미국식 제도를 지지했다는 점에서는 ‘숭미(崇美)주의자’였지만 실제 외교에서는 철저히 미국을 이용하는 ‘용미(用美)주의자’였다.



● 대한민국의 합법적 설계자


이승만은 1948년 제헌국회의 의장으로서 대한민국 헌법제정의 총책임자였다. 당시 제헌국회에서는 내각책임제를 구상했지만 이승만은 건국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그는 또한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었다. 1948년 총선거는 유엔의 감시 하에 평화롭고 민주적으로 진행됐다. 당시 총선에 반대한 사람이 있었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이 여기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이승만은 총선을 통해 구성된 국회의 압도적 지지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대한민국을 공산화로부터 막아내고 민주주의의 틀을 구축함으로써 오늘날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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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


....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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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은 40대 중반에 이른 李承晩과 金九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李承晩은 3·1 운동 이후에 국내외에서 선포되거나 논의되던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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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外地의 인심이 李承晩에게 瀑注해』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는 현순의 표현대로 이때는 이미 李承晩은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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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31. 임시정부 국무총리 李承晩








1923


[ ...... 東亞日報 現代人物投票 .....

李承晩 49票, 崔麟 25票, 安昌浩 22票, 崔南善 18票, 徐載弼 17票, 李春載 12票, 李商在 10票順 ...... ]



東亞日報 1923. 5.11·12




東亞日報社에서는 지난 25日에 同報 創刊 第1,000號 紀念行事의 하나로 現代 人物投票를 실시하여 오던 중 이날 第1回 發表를 하였는 바 警察當局에서는 治安에 妨害가 된다는 現由로 投票紙의 發賣를 禁止하고 또 結果를 발표함에 있어서도 制限을 加하겠다는 通報를 하여옴에 따라 該社에서는 現代人物投票를 중단하다.


그런데 第1回 發表에 의하면 李承晩 49票, 崔麟 25票, 安昌浩 22票, 崔南善 18票, 徐載弼 17票, 李春載 12票, 李商在 10票順으로 得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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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9.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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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귀국시켜달라고 요청했던 이는 남한 점령 미군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장군이었다. 하지는 이승만과 상하이 臨政(임정) 사람들이 귀국해야 한국의 혼돈 상황이 정리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45년 9월 13일자 하지 사령부 일일보고서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이승만을 한국의 孫中山(손중산·孫文)으로 여기고 있다”고 했다.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익 사람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 중장은 인천에 상륙한 9월 8일,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말을 잘하는 해군중령 윌리엄즈를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윌리엄즈는 비행기를 타고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민심동향을 파악했다. 한국의 서민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있다는데 왜 모셔오지 않는가?”


이정식 교수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들은 해방과 독립을 동일시했고, 미군과 공산세력과의 갈등이 표면화하기 전이라 좌익도, 우익도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9월 14일 좌익들이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명단에 이승만은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순진한 한국인들은 해방되고 독립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승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승만이란 이름은 오랫동안 많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위대한 독립투사’라는 傳說的(전설적) 이미지의 뿌리를 내려놓고 있었다.

이런 民心(민심)보고를 받은 하지 중장이 본국에 이승만을 귀국시켜달라고 건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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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board/view_turn.asp?tnu=200810100078&catecode=C&cpage=1

2008년 10월호

다시 생각하는 國父 李承晩 - 李承晩의 미국다루기
“공산주의자와 대결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賢人” (리처드 닉슨 前 美 대통령)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위원·조갑제닷컴 대표








[ ..... 이승만 32%, 김구 22%, ......

..... 박헌영 10%, 김일성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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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지도자 지지도를 묻는 조사에서는 이승만 32%, 김구 22%, 김규식 9% 등 우파 쪽이 72%인 반면, 여운형 13%, 박헌영 10%, 김일성 3% 등 좌파 쪽은 28%에 그쳤다. 같은 해 “미국인이 소련인보다 더 심한가”란 질문에는 ‘아니다’(68%)가 ‘그렇다’(16%)를 압도했다(전상인, ‘고개숙인 수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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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朴憲永 84인 1% 强 ........ ]



동아일보 1946년 07월 23일


한국여론협회, 초대 대통령과 식량정책 등에 대한 여론조사결과



韓國與論協會는 (略) 17일 서울시내 鍾路 南大門 鍾路 4정목의 3개소 통행인 6,671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문으로 여론조사를 하였다는데 그 結果는 다음과 같다.


(問)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金九 主席 702인 11% 弱

金奎植 博士 694인 10% 强

呂運亨 689인 10% 弱

朴憲永 84인 1% 强

其他 110인 2% 弱

모르겠다 2,476인 37% 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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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정보보고서는 조봉암이 1946년 9월 신당 창당과 관련된 집회에서 "5퍼센트밖에 지지층을 가지지 못한 공산당이나 극우세력이 정권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나는 95퍼센트의 중간층을 중핵으로 한 정당을 조직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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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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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공산주의는 공산국가 소련과 결부되어 폭동, 혁명, 테러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공산당 대신 영국의 노동당(勞動黨)과 같은 온건한 복지정당으로 위장하는 것이 편했다. 그 때문에 김일성은 자신의 조직을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바꾸고, 남한에서도 박헌영, 여운형, 백남운의 좌파 3당을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통합하게 했던 것이다.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 사건에서 많은 학생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고 다치자, 김일성은 현지로 찾아가 유감을 표시하면서,“우리 노동당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지, 공산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요”라고 자신을 감추었던 것이다.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로 위장한 김일성의 전술은 성공했다. 그러므로 그는“그때에(해방 직후에) 우리가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만족스럽게 회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공산주의 혁명’도 ‘민주적 개혁’으로 둔갑했다. 그리하여 토지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몰수된 지주들의 토지에 대한 경작권이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리고 화폐 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상인들의 자본이 몰수되었다. 그 결과로 기득권을 가진 식자층과 유산계급은 뿌리가 뽑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 사회에 인재 부족의 재앙을 가져 왔다. 이른바‘민주개혁’으로 불리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사라졌는가는 김일성대학을 비롯한 대학들의 이공계(理工系) 신입생이 부족한 사실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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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1002&num=390

2010년 여름호
[특집] 이승만 시기의 보수세력과 민주제도

[이주영 | 건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 김일성도 ‘전국을 통치할 분은 이 박사밖에 없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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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촉에는 누가 참여했습니까.

“정확한 기억은 못하는데 대부분 참여했지.”


―이 박사가 만든 단체에 어떻게 공산당까지 참여했습니까.

“당시 이 박사는 민족의 어른이었어. 임시정부 대통령을 했고 대한제국 때부터 독립운동을 한 분이니 다들 이 박사를 모시려했지. 건준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에 주석으로 추대됐고, 북의 김일성도 ‘전국을 통치할 분은 이 박사밖에 없다’고 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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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8/200508070248.html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이야기]<6> "당시 이승만박사, 백범과 소홀했다고? 친형제 같았어"

이을식옹이 말하는 이승만과 '독촉'
요즘 사람들 건준만 알고 독촉은 몰라… 해방정국 주도했지

입력 : 2005.08.07








[ ...... ‘조선인민공화국’ ....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 ........

...... 공산당의 朴憲永도 이승만의 귀국 후 그를 찾아가 당수가 되어 줄 것을 요청 ........... ]



[ ...... 국회의장으로 .... 재석 198명 중에서 188표를 .....대통령선거에서도 180표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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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3·1 운동 직후 수립된 漢城임시정부에서 執權官總裁, 統合임시정부 임시대통령,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블라디보스톡임시정부 국무총리 등으로 선출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李王家의 후예, 미국과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한국인 최초의 미국 프린스턴대학 정치학박사 등의 화려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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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방송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9월 5일에 전국인민대표회의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정부수립을 선포했던 呂運亨이 9월 14일 발표한 조각에서 김구·허헌·김규식·여운형 등 국내외의 지도적 정치가들을 모두 망라한 중에서도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한 것은, 이승만이 귀국하기 이전에도 그는 국내 정치인들로부터 가장 높은 위치의 정치인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3)


또한 공산당의 朴憲永도 이승만의 귀국 후 그를 찾아가 당수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으며,4) 우익세력의 최대정당이었던 韓民黨도 1945년 9월 16일의 창당대회에서 이승만을 서재필·김구·이시영·문창범·권동진·오세창 등과 함께 당의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외에도 1945년 11월 2일에 좌우익의 모든 정당 및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獨立促成中央協議會 에서도 이승만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5)


1946년 2 월 미 군정하에서 공산당을 제외한 임시정부요인, 한민당, 신한민족당, 국민당, 인민당, 무소속,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모든 정치세력들이 참가한 비상국민회의 최고위원회가 성립되었다.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으로 구성된 민주의원은 처음에는 하지중장의 자문기관으로 발족하였으나 곧 정부수립을 준비하는 과도정부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비상국민회의 최고위원회에서도 이승만 은 민주의원의 의장으로, 김규식은 부의장으로, 그리고 김구는 총무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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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5·10선거로 수립된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될 때에도 재석 198명 중에서 188표를 얻어 당선된 점이라던가 대통령선거에서도 180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당선된 것들은 당시의 정치인들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이승만의 집권은 이변이 아니라 정상적인 절차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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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0.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 ......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의 추대는 조선인민 총의이며 ........

......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치는 것이다. ........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이승만 귀국환영 담화 발표


매일신보
1945년 10월 18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제1차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주석으로 추대된 이승만의 귀국을 환영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는 동시에 환영준비위원을 선출하고 환영회 준비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이승만박사는 드디어 귀국하였다. 3천만 민중의 경앙대망이었던 만큼 전국은 환호에 넘치고 있다. 우리 해방운동에 있어서의 박사의 위공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의 추대는 조선인민 총의이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해방 조선은 독립조선으로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치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17일 오후 2시 부주석 呂運亨, 국무총리 許憲 양씨가 崔容達, 李康國 양씨를 대동하고 조선호텔로 이박사를 방문하여 환영의 인사를 드린 다음 8월 15일 이후 경과에 대한 보고로 문서와 참고자료를 수교하였다. 원로여정에 피로하실 터이므로 후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일행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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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4.



[ ...... 운동장 개설 이래 최대 인파인 20만여명이 운집 ........

....... 이승만을 ‘국부(國父)’라는 최고의 존칭으로 소개했다. ........ ]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이승만과 김구

86. 美蘇共委 파동 속에 지방 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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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地方巡廻로 지지기반 강화



이승만의 순회강연회는 독촉국민회 지방조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4월 15일 현재의 독촉국민회 지방조직 현황은 38도선 이남의 144개군 가운데 114개군에 지부가 조직되어 있었고, 회원수는 106만 8,479명에 이르고 있었다고 한다.52)


이승만의 지방순회에는 프란체스카도 동행했다. 첫 방문지는 천안(天安)이었다. 4월 16일 오후에 온양(溫陽)온천에서 일박한 이승만은 이튿날 오전에 천안제일국민학교 교정에 모인 3만여명의 군중 앞에서 50분쯤 감격적인 연설을 했다.53) 18일 오전 11시에 대전(大田) 독촉국민회 주최로 본정(本町) 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영연설회에는 4만여명의 군중이 모였고, 저녁에는 대덕(大德) 군수 주최로 유성(儒城) 온천호텔에서 간담회가 열렸다.54)



굿펠로가 급히 儒城溫泉으로 찾아와



이승만이 대전을 방문하기 직전인 4월 16일과 19일에 이승만 암살을 노린 일당 7명이 대전에서 체포되었다.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범인들은 일제 수류탄과 권총 등을 가지고 있었다.55) 이때부터 경찰은 이승만의 경호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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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후에 이승만의 승용차가 유성온천을 출발하여 경북 김천(金泉)으로 이동할 때에는 연도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열렬히 환영했다. 충북 옥천(沃川)에 도착한 이승만은 옥천국민학교에서 30분 가량 환영 나온 주민들에게 인사말을 했다. 이승만은 영동(永同)과 추풍령(秋風嶺)의 직지사(直持寺)를 거쳐 오후 5시께 김천에 도착했다.59)



地方紙 기자회견 통해 5호 聲明 대응책 제시해



22일 오전 11시에 독촉국민회 주최로 김천 동부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영강연회에는 남녀 학생들과 각 단체 등 군민 4만여명이 모여 이승만을 환영했다. 이승만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미소공위 진행상황 등 정국 정세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다.60)


23일 오전 10시에 김천을 출발한 이승만은 오후 1시쯤 대구 신동 가도에 들어섰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환영하는 시민들에게 이승만은 모자를 흔들어 화답했다. 숙소인 경북 내무부장 관사에 도착한 이승만은 도지사를 비롯한 지방유지와 미국인 지사 등 미군장교들을 접견하고, 해방 기념 식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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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國寺에서는 漢詩도 지어



이튿날 독촉국민회 경북지부 주최로 경북도민 환영대회가 대명동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대회장에는 10만여명의 군중이 운집했으나 대회도중에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이승만의 연설은 중지되고, 대신에 이날 저녁 7시반부터 대구방송국에서 30분가량 방송연설을 했다. 25일 오전 10시에 이승만은 시민들의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경주(慶州)로 향했다.62) 영천(永川)을 지나 오후 2시에 경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승만을 마중하러 나온 사람들로 옛 도읍 경주거리가 메워졌다. 이승만은 불국사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26일 오전 11시부터 경주중학교에서 열린 경주, 영천, 영일(迎日), 울산(蔚山) 4개군 연합환영회에는 5만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승만은 1시간반에 걸친 정열적인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았다.63) 이승만은 불국사에서 이틀밤을 묵으면서 아름다운 한시 한 수를 지었다.


宿泊佛國寺64)

小少旣聞佛國名
登臨此日不勝情.
群山不語前朝事
流水猶傳故國聲.

半月城中春草合
瞻星臺下野花明.
只今四海風塵定
古壘松陰臥戍兵.


불국사에서 묵다


젊어서 들은 이름 불국사
오늘에야 올라 감개를 가누지 못해.
산들은 지난 때 일 말이 없고
흐르는 물만 옛 왕국 소리 전한다.

반월성 안에는 봄풀이 어우러지고
첨성대 밑에는 들꽃이 밝다.
지금은 사해 풍진 다 평정되고
옛 보루 솔 그늘에 수병(戍兵)은 잠들었다.



27일 오전 9시40분에 불국사를 출발한 이승만은 11시에 울산읍에 도착했다. 울산에서는 울산제일국민학교 교정에 1만여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이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울산을 떠나 오후 4시쯤에 동래(東萊)를 통과할 때에는 남녀 학생들과 많은 주민들이 연도에 늘어서서 이승만을 환영했다. 이때에 동래 입구에서 이승만의 암살을 기도한 흉한 1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65) 이승만은 해운대에 도착하여 송도각(松濤閣)호텔에 들었다.




해운대에는 서울에서 민주의원의 백남훈 의원과 윤치영 비서실장이 급히 내려와 있었다. 미소공위 제5호성명과 관련하여 민주의원의 태도를 결정하기 위하여 이승만의 귀경을 종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귀경하지 않고 순회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 대신에 민주의원에는 미소공위 제5호성명에 따른 선서문에 서명하고 미소공위에 참가하라는 ‘친서’를 써서 백남훈에게 주었다. 이승만은 친서에서 신탁통치 문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민주의원이 서명하는 것은 신탁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신탁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토의에 협동한다는 뜻을 표함이니, 그 토의에 참여치 않으면 그 문제가 원만히 타결되기 어려울 것이며 설령 우리가 참가하고도 잘 타협이 못되면 그때에는 우리가 다른 보조를 취하기에 늦지 않을 것이다.”66)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남훈이 가지고 간 ‘이박사 친서’는 신문에도 공개되어 전문이 보도되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서울을 떠나 있으면서도 우익 진영의 최종 정책결정자였다.


같은 날 하지는 선언서에 서명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에는 신탁통치의 찬성 또는 반대의 의견을 발표하는 특전을 보장하되, 선언서에 서명하지 않는 사람은 미소공위의 협의대상에서 제외된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여 ‘이박사 친서’를 뒷받침했다.



“나를 國父라고 불러주니 …”



부산 방문의 성과는 컸다. 환영연설회는 29일 정오에 구덕산 아래의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되었는데, 운동장 개설 이래 최대 인파인 20만여명이 운집했다. 환영회 회장 김철수(金喆壽)의 개회사, 경남도지사 김병규(金秉圭)의 환영사, 부산기독교연합회 합창단의 ‘환영합창’ 등으로 이어지는 대규모의 환영회 행사를 보면서 이승만은 감개무량했다. 주최쪽은 이승만을 ‘국부(國父)’라는 최고의 존칭으로 소개했다. 1911년에 밀행하다시피 하며 기독교 관계자들을 만나고 간 지 30여년 만의 부산 방문이었다.



마이크 앞에 선 이승만은 먼저 “나를 위해서 성대한 환영과 더불어 국부라는 가슴에 넘치는 경어를 주어 눈물이 흐를 듯하다”고 말하고, “지금에 하신 환영사와 환영합창 중에 특히 동감되는 것은 한덩어리로 뭉쳐서 완전한 자주독립을 찾자라는 구절이었고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그 요지도 이것이다”라면서 단결을 역설했다.



이승만이 순회강연에서 역점을 두고 강조한 것은 공산당 비판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산강연이었다. 이승만은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그룹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나는 공산주의와 극렬파들이 나와 정치의견이 다르다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공산당과 극렬파가 하고 있는 것은 인민의 복리를 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지연시키고 자주독립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적으로 보아서 공산당과 과격파들이 하고 있는 것을 들어 말하자면, 그네들은 자본가 타도를 일삼아 부르짖고 있으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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