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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김성수 2023-08-21 20:06:02 | 조회: 87
김성수




1945.10.15 민주국민당 전국대의원대회



[ ..... 유엔결의에 의하여 총선거를 북한에서도 실시했다면.....벌써 통일 .......

..... 그것은 거부하고 날마다 몰려와서 양민살해·방화·파괴·약탈을 .......... ]



[ ...... 화평통일을 운운하는 것은 다 무엇이며 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다 무엇입니까. ........ ]




民主國民黨, 제1회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



연월일 1949년 10월 15일
출전 서울신문,동아일보 1949년 10월 17일



民主國民黨, 제1회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


민주국민당 제1회 전국대의원대회 15일 하오 회의는 2시부터 의장 金性洙씨 사회로 속개되었다. 먼저 咸尙勳씨의 국제정치정세 보고, 金佑枰씨의 국제경제정세 보고, 李容稷씨의 국제군사 보고, 趙憲泳씨의 국내정세 보고가 있었다. 이어 당무·재무·감찰위원회 보고가 있었고 지방정세 보고가 있은 후 하오 6시 반 제1일 대회는 휴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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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일인 16일 대회는 상오 10시부터 의장 申翼熙씨 사회로 속개되었다. 먼저 金俊淵씨의 대회선언문 낭독이 있은 후 이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다음 정강정책에 있어서는 정치의 6항 ‘토지분배의 조속 실시’를 ‘농지개혁법의 조속 실시’로 수정 통과시킨 후 정책세목에 대해서는 문구수정 등은 中執에 일임할 것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黨憲에 있어서는 ‘원안대로 통과시키고 수정할 점이 있으면 차기 대회에서 수정할 것’의 동의가 성립되어 표결에 부친 바 과반수로 통과시켰다.
(서울신문 1949. 10. 17)



민주국민당 창당 이래 처음으로 개최된 제1회 전국대의원대회 석상에서 同黨 최고위원 金性洙씨는 제반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행하였다.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지 만 1년 2개월 되는 오늘 본 당대회를 열게 된 것을 특히 의의 깊게 생각하며 당원 동지와 함께 충심으로 경축하여 마지않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해방전은 말할 것도 없고 해방후 4년 간 우리는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위하여 실로 험난한 형극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첫째,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미·소 공동으로 우리에게 권해서 씌우려고 하던 신탁통치를 우리는 결사적으로 반대해서 이것을 벗었습니다. 둘째, 한국문제를 1 대 1인 미소공위에 맡겨서는 결정지을 수 없음을 지적하고 한국문제 해결을 유엔총회에 넘길 것을 주장해서 그것을 성공하였습니다. 셋째, 좌우합작이니 남북협상이니 해서 정당·사회단의 협의에 의하여 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공평해서 합의에 도달할 수도 없고 혼란만 더할 것이니 천하의 공론을 좇는 민주주의의 총칙에 의하여 총선거를 통해서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자고 주장해서 이것을 성공하였습니다. 북부지역의 선거를 소련이 방해하므로 다시 가능지역의 선거를 주장해서 이것도 또한 성공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우리 독립을 도와주려고 하면서 한국의 실정에 어두운 友邦諸國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고치게 하고 방침을 변경하게 해서 마침내 우리 나라가 신탁통치 없는 당당한 독립국가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을 수립한 공은 그 전부를 우리가 차지하더라도 결코 무리하다고 비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박수)

그렇다고 결코 그 공에 대한 갚음을 딴 데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그것으로써 우리는 벌써 우리의 노력에 대한 천배 만배의 갚음을 다 받은 것입니다. (박수) 실로 감개무량이며 다시금 감격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우리의 임무가 다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앞에는 더 험난한 길이 있음을 깨닫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열성을 다해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뛰어난 치적을 나타내고 실력을 길러서 국제적 신임을 두텁게 함으로써 하루빨리 失地를 회복해서 무서운 철의 장막 속에서 자유를 잃고 飢寒에 신음하는 북한 백만 동포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박수) 우리의 치적을 높이고 북방 모략을 분쇄해서 완전한 통일을 달성하는데는 官民一致·軍民一致·警民一致·軍警一致를 해야 합니다. (박수)


그런데 우리에게는 시급히 고쳐야 할 큰 병폐가 있으니 그것은 의무를 소홀히 하고 권리를 남용하며 互讓의 德이 부족한 것입니다. 이 시국에 일선의 군경과 관리의 노고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으며 오직 충심으로 감사하고 동정을 금할 수 없으나 그 중 소수분자의 탈선적인 권리의 남용·악용과 군경의 대립·알력 등으로 민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하는 말이 자주 들려오니 실로 우려되는 바 적지 않습니다.

本黨 출신인 관·군·경에 종사하시는 여러분은 특히 이 점에 유의해서 廉潔과 공정과 겸양과 과단으로써 솔선수범 하시기를 바랍니다. (박수)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 국민이 정치를 비판하고 충고하고 시정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해야 할 것은 어디까지든지 잘 하게 하기 위하여 바로잡기 위하여 건설적이요, 責善的인 충고나 비판을 해야할 것이요, 시기·질투의 감정이나 憂國自高의 심리에서 吹毛覓疵를 하거나 과장을 하거나 無根의 사실을 남의 말만 듣고 비난공격을 일삼는 것은 결과에 있어서 중상선전으로 관민을 이간하고 정부의 위신을 추락하고 국가를 전복하려는 음모와 통하는 것이니 깊이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소위 조국 화평통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인식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이 잠깐 듣기에는 귀에 달콤하나 그 뒤에는 실로 전율할 모략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조국이라 외치면서 조국을 부인하고 화평통일을 부르짖으면서 화평통일을 거부한 자는 곧 조국 화평통일을 떠드는 그 자들인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박수)


평양의 거리를 스탈린街라 개칭하고 말할 때마다 ‘英邁하신 스탈린 대원수께서’하며 ‘위대한 소련군대’가 하면서도 言必稱 조국이니 민족이니 합니다. 유엔결의에 의하여 총선거를 북한에서도 실시했다면 전세계가 환호하는 가운데 화기애애하게 통일이란 말조차 필요 없이 벌써 통일이 되었을 것인데 그것은 거부하고 날마다 몰려와서 양민살해·방화·파괴·약탈을 일삼고 있습니다. 선전포고를 한 전쟁에도 적의 비전투원은 죽이지 않으며 무방비 도시는 폭격을 않는 것이 전쟁도덕이요, 국제공약이거늘 이 반역도배들은 전쟁에서도 할 수 없고 인간이 할 수 없고 금수도 할 수 없는 잔인악독한 행동을 동족에게 동포에게 날마다 밤마다 감행하고 있습니다. 그 자들이 화평통일을 운운하는 것은 다 무엇이며 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다 무엇입니까. 그는 나라를 팔고 민족을 말살하려는 화평통일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박수)



‘정치는 모략이다’ 하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나는 이 말을 가장 싫어하고 위험시하고 한심하게 여깁니다. 큰일이 모략으로 성공하는 일이 없습니다. 모략으로 성공한 일이 오래가는 법도 없습니다. (박수) 만일 모략이 성공하여 오래 계속한다면 그 나라는 망하고 그 민족은 쇠퇴할 것입니다. 본 당은 천하의 公黨으로서 오직 國利民福을 위하고 자손만대의 대책을 꾀하는 책임을 지고 있으니 정치는 어디까지든지 정의요 성의요 노력이라는 것을 신조로 하고 사악한 모략을 배격하여야 할 것입니다. (박수)



끝으로 우리는 정당에 대한 인식을 바로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정당은 무슨 벼슬이나 이권을 구하는 사람들만이 다니는 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민주정치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국가에 관리는 그야말로 公僕 즉 민중을 위한 使用人이요 연락원이며 국민이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자기의 원하는 정치를 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박수) 가령 교통시설의 확충을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교통부의 관리된 사람이나 그 청원을 맡을 사람만이 아닐 것입니다. 누가 장관이고 누가 의원을 하든지 車掌이 누구며 운전수가 누구든지 기차만 다니면 모든 사람이 다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벼슬이야 누가 하든지 국민이 다 잘 살 수 있는 정치를 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할 수 있는 정당을 택해서 지지할 필요와 의무와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일반 민중을 지도계몽하는데 힘써 주기 바랍니다.”


◊ 민국당 전국대회 개막


민주국민당 전당대의원대회 제2일은 申翼熙의장 사회하에 상오 10시부터 금반 대회의 가장 중심적인 안건심의에 들어갔는데 벽두에 별항과 같은 대회선언서를 金俊淵씨가 낭독한 후 무수정 통과하고, 이어 梁源模씨가 낭독한 정강정책이 통과, 崔斗善씨의 간단한 설명이 있은 다음 당헌의 통과, 유엔에 보내는 메시지를 李弘俊씨가 낭독 통과한 연후, 임원선정에 들어가 그 선거방법은 최고위원 4씨와 각 도 대표 10명에게 일임하여 당헌에 의한 중앙집행위원(340명 이내)을 선출케 한 후 李榮俊씨의 결산 及 예산안 승인과 徐相日씨의 당면정책 심의를 끝마치고 일차 휴회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후 회의에서는 地方議案 심의와 기타 사항을 토의하고 池大亨 최고위원의 폐회사로 대회는 폐회되었고, 중앙학교 後庭에서 화기애애한 다과회가 있었다 한다.

(동아일보 1949. 10. 17)



민주국민당 상임당무위원 趙憲泳씨(국회의원)는 지난 15일 同黨 제1회 전국대회에서 국내 정세에 관하여 보고를 행하였는데 이는 혼돈한 현 정세를 간명하게 要述한 것으로서 讀者諸賢의 참고가 되겠기에 다시 소개한다.


작년 5월 10일 선거에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절대한 성공을 거두어서 국회가 성립되고 헌법이 제정되고 대한민국이 수립되어서 유엔의 승인을 얻고 이어 그에 가입한 다수 민주주의국가가 개별적으로 정식 승인을 하게 됨에 이에 따라 국내 정세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첫째, 미군정이 사뭇 계속되고 독립할 희망이 없지 않은가 의구하던 사람들이 그 의혹이 완전히 풀리는 동시에 우리도 우리 정부를 가졌다는 환희와 만족을 느끼게 되었다. 둘째, 해방후 4, 5년 동안 공산당이 모략을 선전한 것이 모두 허위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래서 민족적 자주독립을 얻는 길이나 정말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하는 길이나 국제적 지지와 승인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모두 민족진영노선이요, 공산당노선이 아님을 전국민이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 민주국민당의 발족


대한민국정부 수립은 곧 민족진영의 큰 승리를 의미하며 그 결과의 하나로 오늘 이 민주국민당의 제1회 전국대회를 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 이 모임은 한 정당의 대회라기보다도 갈려 있던 민족진영의 주력부대가 한 조직체가 되어서 한마음 한뜻으로 민족의 운명을 타개하고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려 결의를 굳게 하는 자리다.


해방후 오늘까지 소위 인민공화국을 배격하고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물리치고 5·10선거를 추진한 단체가 한국민주당이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요, 대동청년단임은 우리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전세계가 다 아는 바이니 대한민국은 진실로 이 세 단체를 기초로 하고 선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단체가 합동해서 민주국민당의 탄생을 보게 된 것은 실로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크게 경하할 일이다. 이 획기적 전환을 계기로 일부 인사의 탈락은 없지 않으나 이런 小類의 유동은 아무 단체에나 또는 평시에도 있는 일이요, 현하 당 최고위원에 대동청년단장·한국민주당위원장이 계신 것으로서 이 3단체의 합동은 명확한 것이다. 그런즉 민주국민당은 모름지기 대한민국의 지주로서의 중대한 책임을 지고 신중한 태도와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더욱 분발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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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동아일보 1949년 10월 17일










“어떤 독립투사도 해방 후 ‘조선·동아일보가 친일했으니 복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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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떤 독립투사도 해방 후 ‘조선·동아일보가 친일했으니 복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1920년대 동아·조선이 민족에 소중한 자산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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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2679

한홍구 “조선·동아 욕만 해선 안 바뀌어”
기자명 김도연 기자 입력 2019.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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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헌법 86조에 농지개혁이 명시되어 있다. 농지개혁은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자는 것이다. 조선 8도에서 땅을 제일 많이 가진 김성수가 제헌헌법을 만들 때 그 조항에 반대하지 않았다. 자기 땅을 다 뺏어서 나눠준다는데도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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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문제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장덕수는 보성전문 학생들에게 학도병 나가라는 연설을 했다. 내가 장덕수가 학도병 연설을 하고 젊은이를 군대로 내보내지 않았느냐라고 하니까 아버지께서 야 이놈아, 내가 그 연설을 들었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장덕수가 그 연설을 울면서 했고, 아버지와 학생들도 울면서 들었다는 거다. 장덕수가 진짜로 친일파여서 그런 연설을 했으면, 이철승 같은 깡패가 돌아와서 장덕수를 때려죽였지 가만뒀겠느냐며, 학도병으로 갔던 학생들이 살아 돌아와 장덕수를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하시더라. 학도병 연설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 학도병들은 장덕수를 아무도 친일파라고 보지 않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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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25480

..한홍구 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기사입력 201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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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헌법의 농지개혁 조항은 지주의 사적 토지소유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주세력의 결집체인 한국민주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인촌 김성수는 그 자신이 당시 조선 팔도에서 첫 손에 꼽히는 땅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보성전문 시절부터 교주와 교수로 김성수와 깊은 인연을 가진 유진오는 헌법조항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김성수를 만나 “농지개혁만이 공산당을 막는 최량의 길”이라고 설득했고, 김성수는 유진오의 말에 “그것도 그렇겠다”라며 결국 농지개혁에 찬성했다. (헌법기초회고록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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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의 김성수나 조선일보의 방응모가 친일을 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해방 후 어느 독립투사도 일제가 폐간시켜버린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친일을 했다고 복간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보험료’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겠지만, 만해 한용운 같은 많은 독립지사들이 풍족하지는 않아도 끼니를 때울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덕분이었던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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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885
[기고한홍구] 제헌헌법과 진보적 민주주의 中
농지개혁과 국민 만들기.. 땅부자 김성수도 동의한 농지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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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칼 밑에서 국민과 같이 울고 웃으면서
언제 해방될지 모르는 백년대계를 세웠다는 것은
해외 독립운동자보다 월등하게 어려웠다. 더 애국자다. ....... ]



소석 이철승, 인촌 김성수 선생과 ‘깊은 인연’


2016-02-27



소석 이철승 선생은 유년 시절 한국인을 무시하는
일본인 교사를 내동댕이쳤던 열혈 청년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던 소석을 보듬어준 사람은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습니다. 박준회 기자입니다.


[기사내용]


1922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지만,
전주에서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소석 이철승 전 헌정회장.

소석은 어렸을 적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끝까지 창씨 개명을 거부하며
일제에 항거했습니다.

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엔
한국인을 멸시하던 일본인 교사를
교실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상급학교 진학에 어려움을 겪던 소석을 받아준 곳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였습니다.


[인터뷰 이철승 前 헌정회장(2013년 채널A 인터뷰 中)]

(인촌 김성수 선생이) 하루종일 학생운동 뛰어다닌 놈이
졸려 죽겠는데 손님 다 가면 나를 부르셔.
막 졸면서 하면 저놈 또 존다 그러면서
요즘 학교가 어떻게 되느냐.
전북 학생은 어떻고 보성전문 고대는 어떠냐.



소석은 일제 치하 독립운동 못지 않게
학교를 세우고 운영한 건 대단한 일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총칼 밑에서 국민과 같이 울고 웃으면서
언제 해방될지 모르는 백년대계를 세웠다는 것은
해외 독립운동자보다 월등하게 어려웠다. 더 애국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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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ichannela.comnewsmainnews_detailPage.dopublishId=76712558-1

소석 이철승, 인촌 김성수 선생과 ‘깊은 인연’
2016-02-27









1945.9.



[ 朝鮮人民共和國 = 文敎部長 金性洙 ]



인공의 정부부서 발표


연월일1945년 09월 14일
출전매일신보 1945년 09월 15일


인공의 정부부서 발표


朝鮮人民共和國에서는 지난 6日 全國人民代表會議에서 선출된 인민대표들이 그동안 연일 정부조각에 주력한 결과 다음과 같은 부서를 결정 14日 政府로부터 발표하다.


◊ 朝鮮人民共和國政府 部署


主席 李承晩

副主席 呂運亨
國務總理 許憲
內部部長 金九
(臨時代理 許憲)
外交部長 金奎植
(臨時代理 呂運亨)
軍事部長 金元鳳
(臨時代理 金世鎔)

財政部長 曹晩植
保安部長 崔容達
司法部長 金炳魯
(臨時代理 許憲)

文敎部長 金性洙
(臨時代理 李萬珪)
宣傳部長 李觀述
經濟部長 河弼源
農林部長 康基德
保健部長 李萬珪

遞信部長 申翼熙
(臨時代理 李康國)
交通部長 洪南杓
勞動部長 李胃相
書記長 申康玉
法制局長 崔益翰
企劃局長 鄭栢







*


김성수를 친일파라 보았다면 인공이 문교부장으로 선정했을 리가 없습니다.


주목할 점은 빨갱이들이 뽕가는 위대한 수령은 인공 명단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 ...... 송진우 .... 일본은 반드시 패망한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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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은 송진우가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언급했다. 그는 송진우가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미일전쟁이 계속해서 일어나 일본이 전승가도를 달리고 있는 동안에도 일본은 반드시 패망한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송진우로부터 ‘수백번’은 들었다는 말을 적고 있다.



일본이 망하기는 꼭 망한다. 그런데 그들이 형세가 궁하게 되면 우리 조선 사람에게 자치를 준다고 할 것이고 형세가 아주 궁하게 되어서 진퇴유곡의 경우에 이르게 되면 그들은 조선 사람에게 독립을 허여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자치를 준다고 할 때에 나서지 아니할 것은 물론이려니와 독립을 준다고 하는 때에는 결코 나서서는 안된다. 그때가 우리에게 위험할 때다. 망해가는 놈의 손에서 정권을 받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불란서의 페탕정권을 보라. 중국의 왕조명 정권을 보라. 또 비율빈의 라우렐정권을 보라. 그들이 필경 허수아비 정권밖에 되지 못할 것이고 민족반역자의 이름을 듣게 된다.註 037



송진우가 제국주의세력의 꼭두각시 정권들의 사례를 들어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汪兆銘(1885~1944)은 국민당정부의 행정원장으로 있다가 중일전쟁 중에 반공과 대일화평을 기도하여 1940년 남경에 新國民政府를 수립하고 주석으로 취임했으나 일제의 괴뢰정부로 간주되었다. 페탕(H.P, Petain;1856~1951)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의 베르덩(Verdun)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국민적 영웅으로 존경받고 입각도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에 협력하여 비시(Vichy)에서 괴뢰정부를 세워 국가주석이 되었다. 종전과 함께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사망했다. 라우렐(J.P. Laurel ;1891~1959)은 상원의원과 대법관을 지내고 일제의 필리핀 점령기간인 1943년부터 1945년까지 괴뢰정부에서 대통령으로 일했다. 이 때문에 전후 전범으로 기소되었다가 석방되었다.註 038

송진우가 행정권의 일부든 전부든 그것을 받으면 일제의 협력자가 되고 괴뢰가 되며 민족의 지탄을 받는 만큼 그 길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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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가 일제말기에 동아일보 강제 폐간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나 공식적으로 모든 정보로부터 차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세계정세에 폭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동아일보 동료들과 재직시절에 알게 된 지인들을 통해 적지 않은 정보를 듣고 있었다.註 040


단파방송에서 청취된 정보를 제공 받은 것도 하나의 예였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출신인 홍익범은 1942년 하반기 이래 성기석과 송남헌 등으로부터 들은, 일본에 선전을 포고한 중경임시정부의 존재와 미주에서 이승만의 활약상 등 단파방송의 정보를 송진우와 김병로, 이인 등에게 전했다. 홍익범은 일경에 체포된 뒤 혹독한 고문에도 자신이 단파방송 정보를 전파한 인사들의 이름을 끝내 자백하지 않음으로써 송진우와 김병로, 이인은 무사할 수 있었다.註 041


‘일제 필망론’도 이러한 정보들에 근거한 판단의 결과였다. 송진우가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가 폐간된 뒤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 수수방관하지는 않았다. 1943년경 그는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동아일보 관계자 및 지방 유지들을 만났다. 이 전국 순회에서 그는 동아일보 관계자들의 내부결속과 태평양전쟁과 일본의 패전을 전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註 042 1944년 겨울 송진우는 자신을 찾아온 林炳哲에게 확신에 찬 어조로 “이제 독립은 몇 달 안 남았다”註 043고 자신 있게 말했다고 한다.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동맹의 사례와 비교하여 종전 후를 대비한 구체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대책이 무책’이라는 핑계로 침묵만을 지켰다고 보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국내에 동아일보만큼 전국적인 연락망을 가진 조직은 없었다.註 044 송진우는 동아일보 폐간 직후 구성된 淸算委員會를 중심으로 1942년 11월 부동산(사옥)의 임대차 및 이에 관련되는 부대사업을 위해 발족된 東本社 사장으로 취임해 동아일보 조직의 명맥을 유지하였다.註 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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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史館論叢 第108輯 8·15 전후 朝鮮總督府의 정책과 朝鮮政治勢力의 대응(이현주) Ⅲ. 치안대책 ‘위임’과 조선 정치세력의 선택 2. 국내 민족주의 우파의 선택








항일 단파방송 사건 (1942년 6월 13일)



항일단파방송 사건은 1942년에 일제치하 경성(오늘날 서울)의 경성방송국(현재 KBS 한국방송공사의 전신)에서 일어난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건으로 이승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활동으로 들 수 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에게 외국 정세가 알려지지 않기 위해 '외국 단파 방송 청취 금지령'의 공표 및 선교사 추방 등 단속을 강화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방지할 수는 없었고, 이렇게 몰래 듣는 사람들은 '미국의 소리'의 한국어 방송이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중국어 방송을 듣곤 했다. '미국의 소리'는 미국 정부가 전 세계의 청취자를 향해 방송운영하는 국제방송을 말하는데, 이승만은 6월-7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단파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매번 격려하는 방송을 활동했었다.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29일 처음 방송되었는데, 이는 이승만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이다. 당시 미국의 소리방송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전쟁상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었다.



여기서 이승만이 1942년 6월 13일, 미국의 소리 라디오로 통해 미국 워싱턴 D.C로부터 '일제는 전쟁에 패망할 것이다. 우리 임시정부는 연합군의 승인을 얻을것이다. 우리는 독립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다.'는 주요 내용으로 선전하였다. 당시 이 라디오 단파방송을 들었던 이들은 소수(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등)였는데, 이는 밀청했던 사람들로부터 입으로 전래되고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에 의하면 이 사건이 국내에서 이승만의 인지도에 대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워싱턴에서 항일단파방송을 하였던 이승만의 공식직함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었다.


이 항일단파방송을 몰래 밀청하다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 잡혀간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었는데, 이들 증언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중국이 아닌 미국에 있고,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기도 했다.'라고 한다. 조선일보 주필로 유명한 칼럼가 이규태 선생의 형제도 이걸 듣다가 처벌당했다고 한다. 이승만의 항일단파방송 육성원본은 오늘날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이 때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는 비석이 KBS 본관 앞에 있다.



경성방송국과 개성방송국의 단파 방송 청취 적발로 불거진 사건에 여운형, 허헌, 백관수, 함상훈 등 해방 후 건준과 한민당의 주역이 될 인물들이 폭넓게 연루되었다. 사건의 핵심 당사자였던 송남헌은 이렇게 회고했다.


'1942년 6월경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승만 박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2300만 동포들이여 조국 광복의 날이 멀지 않았으니 동포는 일심협력하여 일제에 대한 일체의 전쟁 협력을 거부하고 때를 기다리라고 한 연설을 나는 직접 들었다. 이 방송을 들은 나는 가슴이 마구 뛰었고, 흥분해서 변호사 사무실로 달려가 그대로 전했다.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서 모두가 금방 독립이라도 되는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시내로 퍼져나갔다.' (심지연, 송남헌 회고록(한울 펴냄), 40쪽)


이승만은 1942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몇 차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행했고, 독립을 간절히 바라던 국내 사람들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독립의 희망과 겹쳐져 울렸던 것이다.




《방송 원고》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어데서든지 내 말 듣는 이는 자세히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한 것은 제일 긴요하고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에게 일일이 전하시오. 또 다른 동포를 시켜서 모든 동포에게 다 알게 하시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2,300만의 생명의 소식이요,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악무도한 왜적의 철망, 철사 중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감옥 철창에서 백방 악형과 학대를 받는 우리 총애 남녀에게 이 소식을 전하시오. 독립의 소식이니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왜적이 저의 멸망을 재촉하느라고 미국의 준비 없는 것을 이용해서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야 여러 천 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을 미국 정부와 백성이 잊지 아니하고 보복할 결심입니다. 아직은 미국이 몇 가지 관계로 하야 대병을 동하지 아니하였으매 왜적이 양양자득하야 온 세상이 다 저희 것으로 알지마는 얼마 아니해서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일황 히로히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에 있어 애국 열사 김구,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제씨가 합심 행정하야 가는 중이며, 우리 광복군은 이청천, 김약산, 유동열, 조성환 여러 장군의 지휘하에서 총사령부를 세우고 각방으로 왜적을 항거하는 중이니, 중국 총사령장 장개석 장군과 그 부인의 원조로 군비·군물을 지배하며 정식으로 승인하야 완전한 독립국 군대의 자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미주와 하와이와 멕시코와 큐바의 각지의 우리 동포가 재정을 연속 부송하는 중이며, 따라서 군비·군물의 거대한 후원을 연속히 보내게 되리니, 우리 광복군의 수효가 날로 늘 것이며 우리 군대의 용기가 날로 자랄 것입니다. 고진감래가 쉽지 아니하나니 37년 간을 남의 나라 영지에서 숨겨서 근거를 삼고 얼고 주리며 원수를 대적하던 우리 독립군이 지금은 중국과 영·미국의 당당한 연맹군으로 왜적을 타파할 기회를 가졌으니 우리 군인의 의기와 용맹을 세계에 드러내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천추에 발포할 것이 이 기회에 있다 합니다.

우리 내지와 일본과 만주와 중국과 서백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타상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 버리시오. 언제든지 어데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순신, 임경업, 김덕령 등 우리 역사의 열렬한 명장, 의사들의 공훈으로 강포·무도한 왜적을 타파하야 저희 섬 속에 몰아넣은 것이 한 역사에 한 두번이 아니었나니 우리 민족의 용기를 발휘하는 날은 지금도 또다시 이와 같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지에서는 아직 비밀히 준비하야 숨겨 두었다가 내외의 준비가 다 되는 날에는 우리가 여기서 공포할 거이니 그제에는 일시에 일어나서 우리 금수강산에 발붙이고 있는 왜적은 일제히 함몰하고야 말 것입니다.

내가 워싱턴에서 몇몇 동포와 미국 친구·친우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정부와 교섭하는 중이매 우리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을 날이 가까워 옵니다. 승인을 얻는 대로 군비·군물의 후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희망을 가지고 이 소식을 전하니 이것이 즉 자유의 소식입니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씨의 선언과 같이 우리의 목적은 왜적을 파한 후에야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백배나 용기를 내야 우리 민족성을 세계에 한번 표시하기로 결심합시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 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파하며 준행하시오.

일후에 또다시 말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의 우리의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 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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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4월 18일 일본 도쿄 '두리틀 공습'



여운형 일생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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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제 말기의 독립운동과 광복 이후 정치활동


5.1. 조선건국동맹 결성과 광복 직후 치안 유지 활동


중앙일보가 폐간되고 할 일이 없어진 여운형은 결혼식 주례사로, 각종 행사 연사로 소일하다가 돌연 일본으로 떠났다. 이에 대해 자신의 아들이 일본 호세이대학에 입학하는 관계로 일본행을 결정했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중일전쟁이 터진 뒤 일본이 조선에서의 독립 운동 활동에 대해 탄압을 강화하여 활동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었고, 중일 전쟁과 관련해 일본 고위급 관료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1937년 일본이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을 때, 여운형은 그때부터 일제의 패망을 예견했다. 여운형은 중일전쟁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원료 및 소비시장을 둘러싼 제국주의 국가들의 각축 과정에서 일본이 정치·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중국의 상황을 이용하여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써 중국에서 일정한 이권을 확보하고 싶어하는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중국 독점을 절대 허용할 리 없고, 미국과 영국은 어떻게든 일본에 대항할 것이며, 일본은 양국의 공동 공격 앞에 결국 자멸할 것이라고 봤다.[25] 1937년 일본이 노구교 사건을 조작하자 여운형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영국·미국이 중국에서 장거리 경주를 하는데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영국이 패권을 잡았고, 전쟁 중에는 일본이 잡았고, 전쟁 후에는 미국이 패권을 잡아 미국의 차관이 단연 증가하니 일본은 자기가 독점하지 못한데 분개하여 노구교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독점은 영미가 절대 불허한다. 이때에 양국은 반드시 합작하여 일본에 대항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대요소인 원료시장 소비시장 투자시장 이 3가지가 중국에는 구비되어 있다. 이런 좋은 시장인 중국이 경제적 자립을 못하였으니 저기압이 생긴 곳에 공기가 밀려들 듯 자본주의 세력은 이 저기압 시장으로 밀려들어갈 것이고, 어느 일국의 독점은 불가능할 것이다. 각국이 침입하는 중에 일국의 세를 제지하고 중국은 갱생의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나 영국이 이런 시장을 어느 한 나라의 독점에 맡겨둘 리가 없는데 더욱이 저들이 만만히 보고 있는 일본의 독점이야말로 허용할 리가 절대 없다. 영미는 반드시 중국의 운동을 빌려가지고 일본과 싸울 것이다. 미국 혼자서도 일본을 대항하기에 넉넉할 터인데 황차 3국이리오. 그러므로 일본은 자멸하고 조선은 해방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기다리고 준비해야 한다.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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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간이 흘러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미군 공군 전투기들이 도쿄 시내를 공습하고 폭탄을 투하하는 모습을 본 여운형은 중일 전쟁 때부터 예견했던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고, 군부 쪽 고위 관료들의 요청으로 회담을 하였다. 특히 고노에 후미마로는 중일 전쟁 초기에 여운형의 제안을 거절한 바가 있었는데 국공합작이 전개되고 중국 전황이 매우 좋아짐과 동시에 일본 전황이 매우 나빠짐으로 여운형에게 중국 측 인사들을 설득하여 휴전 협상을 도와달라고 하지만 여운형은 이미 늦었다며 거절하였다.


지난 4월 18일 미국 비행기의 동경 공습을 직접 목격했는데 미국기의 성능은 일본기 성능보다 우수해 일본기가 미국기를 추적하지 못했다. 동경에서 미국 방송을 들으니 미국도 전쟁 준비에 광분해 최후의 승리는 미·영에 있게 될 것이며, 미·영이 승리하면 조선의 독립이 확실히 가능하고, 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독립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전쟁은 장기전이 될 것인데, 내 생각에는 일본의 물자 부족 때문에 뜻밖으로 빨리 종결될 것이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이 미국과 함께 일본에 선전을 포고했고, 나도 조선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
여운형이 친구 오건영에게 전한 말, 사상휘보 속간 26호, 1943년


1942년 4월 18일 일본 도쿄에서 '두리틀 대원 공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다.[27]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온 여운형은 도쿄에서 목격한 미군 공군 전투기들의 공습 상황을 자신의 친구들에게 설명하였고, 일본 패망을 예언하는 말을 주변인들에게 흘렸다가 일본 헌병대에까지 귀에 들리게 되었다.

1942년 12월 21일, 일본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로부터의 회담을 마치고 귀국하려는 길에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또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당시 일제는 여운형을 다치게 하면 파장이 클 걸 염려하여 90시간 동안 잠을 못 자게 깨우는 고문을 했다. 그 때문에 한동안 신경 쇠약에 걸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옥살이 중 기력이 많이 떨어지고 머리가 하얗게 셌으며 일제의 징병 부분에서 협력을 하지 않은 대가로 늘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1943년 7월 2일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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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6.


미드웨이 해전

위키백과


미드웨이 해전(영어: Battle of Midway)은 1942년 6월 4일부터 6월 7일까지 벌어진 태평양 전쟁의 결정적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진주만 공격이 있은 지 6개월 뒤, 그리고 산호해 해전이 있은 지 1달 뒤에 발생했다.[3][4][5]

체스터 니미츠, 프랭크 잭 플레처,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가 이끄는 미국 해군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나구모 주이치, 곤도 노부타케가 이끄는 일본 제국 해군의 공격함대를 미드웨이 환초에서 격퇴하였고 일본군 함대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군사 역사학자인 존 키건은 미드웨이 해전을 "해전 역사상 가장 놀랍고 결정적인 타격"이라고 불렀고,[6] 해전 역사학자인 크레이그 사이먼즈는 미드웨이 해전을 "전술적으로 결정적이었고 전략적으로 영향을 남긴 살라미스, 트라팔가르, 쓰시마와 더불어 세계사에서 가장 중대한 해전 중 하나"라고 불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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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초기에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1942년 6월의 미드웨이(Midway) 해전의 패배를 계기로 전반적인 수세(守勢)에 몰리기 시작하였으며, 1943년에 들어와서는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하고, 독일도 수세에 놓이게 되는 등 일·독·이 3국의 공동전쟁수행의 기본구상도 무너져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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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출



1939 [ 쇠주전자 유기그릇 등의 회수를 강제 ]


東亞日報 1939.1.24


總督府에서 1月부터 3月까지의 새로운 物資動員計劃이 수립된 바, 종래 廢品回收運動에서 강제동원으로 전환되다.

작년에는 1戶1品運動을 위시하여 쇠부치를 모두 걷어드리고 솜 양털 냄비 가마솥 고무 신문지를 수집하였으며, 이를 위해 各郡에 蒐集組合이, 各道에 聯合組合이 조직되었었다. 今年에는 폐품수집과 물자사용제한을 더욱 강화하는 동시에 鐵 銅 羊毛의 動員計劃을 수립, 목도리 장갑 구두 버선 쇠주전자 유기그릇 등의 회수를 강제 하기로 되다.






每日新報 1941.6.1


이달 末에 파쇠·헌쇠를 回收하도록 朝鮮總督府에서 各道에 通牒이 발송되다.





每日新報 1942.9.29·30


京城府에서 一般家庭金屬類의 特別回收가 이날부터 11月 말까지 두 달에 걸쳐 실시되는 바, 回收對象金屬은 鐵·銅 각종 제품과 銅合金製 食器類 및 鐵·銅으로 만든 기둥과 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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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日本在住 朝鮮人



[ .... 時局에 對하여 極히 冷淡한 態度를 示하고 있을 뿐아니라, 남몰래 帝國의 敗戰과 朝鮮의 獨立을 希하며 支那事變의 究極에 있어서는 日本은 國際的 孤立, 財政의 脆弱에 依해 드디어는 敗戰에 陷하며 日本帝國主義는 崩壞할 것이라 .......

...... 一擧에 朝鮮의 獨立을 實現하려고 劃策 ....... ]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12권 > 1940년 연도말 > 朝鮮總督府 警務局이 조사한 今年度

연월일 1940년

출전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Ⅲ 713-717面



朝鮮總督府 警務局이 조사한 今年度 在日韓國人의 思想槪况은 다음과 같다.


一. 槪說


1940年末에 있어서의 日本在住 朝鮮人은 1,190,444名이다. 이를 昨年末에 있어서의 961,591名에 比하면 實로 1個年間에 228,813名의 激增을 示하고, 그 增加率의 急激함은 驚嘆에 値할 것이다. 그리고 本年은 昨年부터 계속하여 勞務動員計劃實施에 따라 日本에 있어서의 勞力不足을 補充하기 위해 募集에 의해 朝鮮人 勞動者를 日本으로 移住케 하기로 하고 右에 依해 本年度에 移住한 者는 38,171名이다. 이를 本年中에 있어서의 增加數 228,813名에서 控除해도 190,642名의 增加이며 例年의 增加率은 6萬 乃至 7萬인데 대해 約3倍半의 增加에 達한 狀况이다.


이를 보건대 支那事變에 伴하여 日本에 있어서의 勞力不足을 일으키고 더하여 重工業方面의 팽창을 招來한 탓으로 自然 朝鮮人 勞動者의 需要가 많아진 것과 他面 1939年 以降 朝鮮側에서 日本渡航證明書의 發給을 相當 緩和하게된 結果에 基因하는 것으로 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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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學生狀况


日本에 在學하는 朝鮮人 學生은 逐年增加하고 있으며 1940年末에 있어서의 在住朝鮮人 學生은 20,824名이다. 이에 小學兒童 129,513名을 加하면 150,337名이다.

이를 昨年末의 16,304名에 比하면 4,520名의 增加를 示하며, 또 1940年末에 있어서의 7,251名에 比하면 僅僅數年에 13,573名의 增加를 示하였다. 그리고 在住朝鮮人 學生은 그 半數 以上인 11,318名은 東京에 在學하고 大阪府의 3,054名, 京都府의 1,725名이 이에 버금한다. 又 이를 學校別로 觀하면 官立大學 261名, 私立大學 2,044名, 高等學校 又는 專門學校 3,624名, 中等學校 14,895名이다.


이와 같이 學에 志하고 鄕關을 出하여 日本에 渡來한 學生이 逐年增加함은 鮮內에 있어서의 德政普及에 伴하여 逐次 朝鮮人의 民度가 向上하여 그 向學心이 昂揚하고 있는 證左라 看되는 바이다.

그러나 이들 學生中에는 本籍地로부터 學費의 全額을 補給받지 못한 까닭에 渡來 便宜處에서 稼動하여 苦學하고 있는 者가 相當히 있다.


그리고 朝鮮人 學生은 授業料의 滯納으로 學校當局과의 사이에 問題를 起하고 또는 宿料不拂問題등을 生하여 或은 日本에 渡來한 것으로해서 갑자기 比較的 自由로운 生活을 許한 바 되어 自然 遊興에 耽하고 乃至는 日本人 婦女子와의 사이에 재미없는 風紀問題가 起하고 있다. 이리하여 學業 中途에 勞動者의 群에 投하고 或은 犯罪者 乃至 不良의 徒로 化하는 者가 相當히 있다. 甚한 것은 民族的 偏見을 挑發하여 思想運動에 狂奔하기에 이르는 등 이의 就學狀况은 總體的으로 觀하여 반드시 良好하다고는 認치 못하며 就中 彼等의 想思動向은 極히 注目할 것이 있다. 即, 彼等은 現下 朝鮮人의 生活狀態 其他 社會的 環境을 觀하고 所謂 直譯的으로 批判을 下하여 內鮮間에 甚한 差別이 있다고 論斷하여 필경 이는 朝鮮이 日本에 隷屬하는 까닭이라고 하며 敎育이 高度化하는데 伴하여 이러한 民族的 偏見은 더욱 拍車되는 것 같으며 將히 一部 民族急進分子 등은 執拗矯激한 策動을 逞하며 自己의 抱負를 朝鮮民族解放에 獻身할 것이라하여 所謂 救民的 英雄을 흉내내어 一般 在住學生에 대해 方途를 凝하여 그 啓蒙에 奔走하고 있다. 他面 一般 學生에 있어서는 積極的으로 斯種運動에 投하지 않으나 彼等의 策動에 依存하고 內心 其成就를 期待하며 觀望的 動向을 示하고 있는 것도 認되는 바이며 彼等의 策動에 대해 眞히 日本人의 觀念에서 이를 絶對的으로 排擊코자 하는 것 같은 動向은 極히 稀하다.


그리고 朝鮮人 學生의 思想運動의 胚胎하는 곳은 대개 各學校에 있어서의 朝鮮人學生留學生會이다. 從來 朝鮮人이 在學하는 學校에는 必히 朝鮮人學生의 團體가 있어 本年末에는 93團體, 會員 10,897名이다. 이 朝鮮人學生의 團體에서 彼等은 朝鮮人留學生會 或은 學友會 等의 名稱을 使用하고 있어 對日本的으로 마치 自己 等이 外國人인 것 같은 態度를 表示하고 있었다. 또 이들 學生團體는 從來부더 日本在住 朝鮮人의 民族主義 乃至 共產主義 等 思想運動의 源泉이 되고 있으며, 또 鮮內에 있어서의 思想運動에 對한 指導的 役割도 演하고 있는 바로서 가장 注目을 要하는 바이다.


今次 支那事變에 當하여도 在住朝鮮人 學生의 動向은 極히 寒心한 動向에 있다. 即, 彼等은 偏狹한 民族意識을 固執하고 時局에 對해 極히 冷淡한 態度를 持續하고 그 動向은 相當 容疑의 點이 있다. 事變下 朝鮮人의 思想 運動의 거의 全部가 學生層에 依해 策動되고 있는 實情이다. 이와같이 學生生徒의 思想動向이 재미없음은 彼等이 學校 卒業後 日本에서는 勿論 鮮內에서도 就職은 極히 困難한 것과 將來에 對한 希望을 갖지못하는 것 등이 큰 原因이 되고있는 것으로 認되는 바로서 將來 學生問題에 對하여는 相當 考究한 뒤에 適切한 對策을 樹立할 必要가 있는 것으로 思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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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思想運動의 狀况


朝鮮人의 思想運動은 民族主義, 共産主義, 無政府主義 等 一應 各種主義系統으로 別하는 策動을 表現하고 있으나, 그 基因하는 바는 대개, 潜在하는 民族意識에 温釀되어 所謂 民族的 反感에서 出發하는 것이며 이의 策動은 極히 執拗한 特異性을 持하였다.


그리고 日本在住 朝鮮人의 思想運動은 滿洲事變을 契機로 하여 1939年까지는 해마다 萎微衰退의 趨向을 걷고 있었으나 本年은 갑자기 活潑한 策動을 展開하는 바 있었다. 即, 이의 狀况을 檢擧人員에 就하여 觀컨대 1933年은 總檢擧人員 1,820名을 算하여 是를 最高로 하여 1934年은 884名, 1936年은 193名, 1938年은 117名, 1939年은 50名으로 해마다 遞減되었으나 本年은 165名을 算하며 昨年度의 3倍를 凌駕하였다.


由來 朝鮮人의 思想運動은 極히 執拗한 特異性이 있어 一面에서는 彼等은 所謂 事大思想에 基한 客觀情勢를 凝視하고 其의 如何에 따라 或은 蟄伏하고 或은 擡頭하는 等 巧히 其進出의 機를 窺하고 있는 實情이며, 特히 現時局下에서는 이의 動向은 前途 全히 閑却을 不許하는 것은 痛感하는 바이다.


本年中에 있어서의 在住朝鮮人의 思想運動을 槪觀하면 各種主義別 各各의 分野을 通해 相當 活潑化한 傾向을 示하며 그중 所謂 純然한 民族主義運動이 현저히 擡頭한 것은 注目할 必要가 있는 바이다. 또 이의 策動分子를 職業別로 觀컨대 檢擧人員 165名中 72名은 學生이며 思想運動의 大半은 學生層을 中心으로 하는 것이다. 即 朝鮮人學生層에 있어서는 事變發生 以來 極히 偏狹한 民族的 偏見下에 時局을 歪曲하는 見解를 採하고 時局에 對하여 極히 冷淡한 態度를 示하고 있을 뿐아니라, 남몰래 帝國의 敗戰과 朝鮮의 獨立을 希하며 支那事變의 究極에 있어서는 日本은 國際的 孤立, 財政의 脆弱에 依해 드디어는 敗戰에 陷하며 日本帝國主義는 崩壞할 것이라 하여 此機會에 一擧에 朝鮮의 獨立을 實現하려고 劃策하고 있다. 特히 本年은 各種經濟統制의 强化에 伴하여 物資의 需給에 不圓滑의 部面을 派生함과 乃至는 帝國의 國際關係의 復雜化 등의 事情에 對해 彼等은 이를 歪曲批判하여 위와 같은 見解를 더욱 信念化하기에 이른것 같고 그 策動은 현저히 活潑化한 바 있었다. 이들에 對하여는 嚴重한 警戒 取締를 加하였다.


2. 民族主義運動의 狀况


一. 槪說


朝鮮人의 民族主義運動은 極히 執拗하여 隨時 그 客觀情勢에 應하여 或은 擡頭하고 或은 蟄伏潜在하는 등 巧히 客觀情勢를 利用하고 又는 他運動에 便乘하여 策動을 持續하고 있는 實情으로 表面 好轉化하였다고 말하나 아직 樂觀을 難許하는 것이 있다. 即, 일찌기 滿洲事變의 勃發에 依해 當時 彼等은 我國力의 强大함을 直視하고 帝國信倚의 念 乃至 威服의 念을 抱하게 되어 그 對日感情은 一應 현저히 好轉된 것인양 認되었으나 마침 帝都反亂事件의 勃發을 보자, 帝國의 政治 中樞部에 動搖가 있다고 妄斷하고 그 信倚의 念에 些의 龜裂을 生케 된 것과 같이 갑자기 思想運動은 活氣를 呈하는 등의 事가 있었고, 또 今次 支那事變의 勃發에 依해 再次 帝國의 强大한 國力을 感得하고 一般 朝鮮人은 思想上 重大한 영향을 받아 이에 依해 皇民된 自覺을 一層 强하게한듯 一應 그 動向은 好轉을 示하고 民族主義運動에서도 一應 沈衰한 것 같이 認되었다.


그러나 學生層, 知識階層, 宗敎家方面에 있어서는 民族的 偏見을 固執하고 毫도 覺醒하지 않을 뿐 아니라, 支那事變을 觀望하고 남몰래 帝國의 敗戰과 朝鮮의 獨立을 希하고 各種劃策을 하고 있어 이의 動向은 相當 注意警戒의 必要가 있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本年에 있어서는 民族主義運動은 갑자기 活潑化를 加하고 愛知縣에서 檢擧한 「民族復興會事件」 警視廳에서 檢擧한「平安그룹事件」등과 같은 共産主義를 排擊하고 民族自決에 의한 獨立運動을 謳歌하고 있던 等 所謂 純然한 民族主義運動이 表面化한 것이 2, 3에 不止하는 狀况이다. 이를 要컨대 敍上과 같이 朝鮮人의 民族主義運動은 客觀情勢를 凝視하고 그 進出의 機를 窺偷하고 있는데 支那事變의 勃發에 依해 一應 沈衰하였으나 事變이 長期化하는데 件하여 特히 本年은 經濟統制에 伴하여 마침 諸物資配給의 不圓滑의 部面을 派生한 바 이를 觀察하고 이들 民族主義分子는 日本의 國力이 低下한 證左라 妄斷하고 事變過程에서 日本은 國內混亂을 招할 것이며 그 機會에 朝鮮獨立을 위해 蜂起할 것이라하여 今이야말로 朝鮮獨立을 위해 朝鮮民族은 自決하여야 한다고 모든 劃策을 推展하게 된 것으로 認되는 바이다.
그리고 本運動은 事變의 長期化에 伴하여 더욱 活潑化하기에 이르지 않나하는 趨向이 認되며 이의 査察警戒는 더욱 强化의 要있음을 痛感하였다.











[ 송진우 --- 민족불멸론 ]


[동아광장정윤재] 신나게 단군을 이야기하자


200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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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단군사당 혹은 단군릉이 만들어졌는데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철거된 뒤 1936년 전국적인 모금운동에 의해 복원됐다. 그러나 일제는 동화정책을 밀어붙이며 각종 문헌이 전하는 단군 이야기들을 허황된 것으로 낙인찍고, 이에 대한 공적인 언급과 교육을 금지했다. 총독부와 관변 학자들은 조선민족이 본래 고대사가 허술한 민족이며 타율적이고 정체된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열등한 민족이라고 묘사하면서 조선사 말살을 기도했다.


그러던 1932년 여름 어느 날. 당시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은 현진건 기자를 불러 평양 출장을 명했다. 송 사장은 벌써부터 민족불멸론에 입각해 단군, 세종, 이순신을 함께 모시는 삼성사 설립을 추진했다. 그리고 그해 7월부터 전국적으로 시작된 단군성적(檀君聖蹟) 순례에 동아일보도 적극 참여하도록 했고, 그 일환으로 현 기자에게 평양 강동면의 단군유허지를 취재하도록 한 것이다. 1934년 1월에는 단군릉 수축(修築)을 위한 기금도 모았다. 동아일보의 이 같은 단군현양사업도 역사적 유래가 있는 것이었다.


조선 태종 때 변계량(卞季良)은 우리나라는 중국 천자의 분봉국(分封國)이 아니고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와 개국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환단((원,환)壇)에서 직접 하늘에 제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수천 년간 지속된 이 전통에 따라 세종도 원년에 환단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구월산 삼성사에 신하를 보내 제사지냈다. 세종 7년 9월 25일, 평양에 들른 정척(鄭陟)은 단군조선이 기자조선보다 시기상 앞서는데도 불구하고 오가는 중국 사신들이 참배하는 기자사당 안의 단군신위가 곁방살이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문제 삼아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단군신위를 남향하게 하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제대로 제사하게 하는 것이 왕조의 체통에 맞는 일”이라는 글을 올렸고 세종은 즉시 이를 허락했다.


그런가 하면 정조 10년 8월 9일에 임금은 승지 서형수(徐瀅修)에게서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고 단군묘의 알뜰한 관리를 명했다. “신이 강동(江東)에서 벼슬할 때 고을 서쪽 300리쯤에 둘레가 410척쯤 되는 무덤이 있었는데 고을 노인들이 단군묘라 했고, 이는 유형원이 쓴 ‘여지지(輿地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나, 중국 사람들은 죽은 후에 신령이 되었다는 황제(黃帝)가 교산(喬山)에 신발을 남겼고, 공동산(공동山)에 그의 무덤이 있다고 믿고 이를 전하고 있는 터이니, 이렇게 전해지는 국조의 묘에 대한 일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흠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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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6100483577901










[ 송진우 ]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유공자정보
관리번호2883


성명
송진우
한자宋鎭禹

생년월일1890-05-08사망년월일1945-12-30
본적전라남도 담양




포상정보

운동계열문화운동포상년도1963훈격독립장

관련정보
2021년 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공훈록




공적개요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전라남도 담양(潭陽) 사람이다.


1906년 창평(昌平)의 영학숙(英學塾)에서 김성수(金性洙)와 함께 수학하고, 1908년 김성수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에 명치(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유학기간중에 유학생친목회(留學生親睦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했으며 「학지광(學之光)」을 편집하였다.


1915년에 김성수를 도와 당시 경영난에 빠져 있던 중앙학교(中央학교)를 인수하여 학감(學監)이 되었다가 김성수의 뒤를 이어 1918년 3월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송진우의 관리 아래 중앙학교의 교육은 민족교육을 관철했으며 수많은 애국적 청소년들을 배출하였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宋繼白)이 2·8독립선언 준비차 귀국하여 송진우를 만난 것을 계기로 하여 송진우·현상윤(玄相允)·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 등이 빈번히 회합을 열고 초기의 3·1운동을 기획하기 시작했으며 송진우는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연합을 주선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이 운동을 초기에 기획한 48인의 하나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감옥에 구금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겪었다.



1921년 9월 14일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주식회사 동아일보」로 개편되자 제3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11월 이상재(李相在)를 대표로 하고 지도급 인사 47명이 조선민립대학 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발기할 때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이 사업을 적극 추진했으며, 동아일보를 통하여 민립대학설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1923년 3월 29일 각계 대표 400명이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모여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여 전국적으로 1천만원의 기금을 모집하여 재단을 구성하고 민립종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의한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친일파 박춘금(朴春琴)의 권총협박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하고, 1924년 동아일보사 고문, 1925년에는 동아일보 주필(主筆)로 취임하여 언론활동을 하였다.


1925년 7월 미국 하와이에서 태평양연안 기독교청년회 주최로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가 개최되자 미국으로부터 참석한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국내대표로 암석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9월 일제 총독부가 「개벽(開闢)」잡지를 발행정지 시키자 한기악(韓基岳)·민태원(閔泰瑗) 등과 함께 일제의 언론탄압을 비판하고 교섭하여 발행정지의 해제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신천지(新天地)」와 「신생활(新生活)」의 필화사건이 일어나자 박승빈(朴勝彬) 등과 함께 언론자유의 옹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5년 11월에 함경남도 함흥경찰서가 시대일보(時代日報) 지방부장 홍남표를 불법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안재홍(安在鴻)·이종린(李鍾麟) 등과 함께 무명회(無名會)의 교섭위원으로서 그의 석방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1926년 3월에 국제농민회 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게 전하는 글을 동아일보 3월 5일자에 게재했다가 동아일보가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함과 동시에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그와 편집 겸 발행인 김철중(金鐵中)이 일제 검찰에 구속 기소되어 1926년 3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그는 징역 6월형, 김철중은 징역 4월형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0월 제6대 동아일보사장에 취임했으나,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가 손기정선수의 우승사진을 게재하면서 손선수의 앞가슴에 붙인 일장기(日章旗)를 지우고 실은 「일장기 말소사건」이 문제가 되자 동아일보는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그도 사장을 사임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조직하여 수석총무로서 활동하다가 한현우(韓賢宇)에게 암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2&pageTitle=Merit&mngNo=2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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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촌(仁村) 김성수(金成洙,1891~1955)의 증언 기록


「중앙학교의 숙직실은 새로 지은 교사 앞 운동장의 동남 편에 있었다. 조그만 기와집이었다. 오늘날에는 화강암 석조 대강당이 있는 터였다. 지금은 다른 곳에 옮겨서 옛날의 숙직실을 복원했고 원래 숙직실 자리에는 ‘3.1운동 책원지(策元地)’라는 기념비가 서있다.

이 숙직실은 일제 초기 가장 우수했던 민족의 수재들이 드나들었던 아지트였을 뿐 아니라 후에는 3.1운동의 모의 장소가 되기도 했고 인촌(仁村)과 고하(古下)의 살림집이기도 했다. (중략)


1918년 12월 어느 날 워싱턴에서 재미 동포들과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이 밀사를 보내왔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

밀사(密使)는 이런 내용의 밀서(密書)를 휴대하고 있었다.

仁村-古下-幾堂 등 세 사람은 ‘이제야 말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숙직실 방안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어떻게 할까를 논의했다. 그러나 당장 묘안이 없었다. 거국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해야 된다는 목표는 설정되었다.」

(동아일보사 발행 [仁村 金性洙-사상과 일화] 1985.6.25.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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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01072023010700038.html

이승만 건국사(13) 김성수가 말하는 이승만의 '3.1운동 밀사'
인보길 기자

2023-01-07









이아주 여사 독립만세 시위 주도 … 仁村선생 부인


2005-02-23



22일 독립유공자(대통령 표창)로 확정 발표된 이아주(李娥珠·1899∼1968·사진) 여사는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뒤 재판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이다.


이 여사는 동아일보 사장과 중앙학교·보성전문 교장을 지낸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부인이기도 하다. 국가보훈처 포상 신청 당시 여사의 이름을 이아수(李娥洙)로 잘못 표기했다고 유족 측은 밝히고 있다.


이 여사는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당시 20세)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이 여사는 혹독한 경찰 조사 때는 물론 공판 과정에서도 “다시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면 관대히 처분하겠다”는 재판관의 회유를 일축한 채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다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 여사는 “정숙한 이 내 몸에 포박이 웬 말인가. 청춘의 끓는 피 참기 어려워 울음이 목맺히도다”는 옥중 시로 세인의 가슴을 울리기도 했다(동아일보 1920년 4월 20일자 3면).


인촌 선생은 일본 도쿄유학생 시절부터 친했던 김우영(金雨英) 변호사의 첫 변론을 지켜보러 나왔다가 당당하고 정연하게 진술하는 이 여사의 모습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부인과 사별했던 인촌 선생과 이 여사는 1921년 1월 결혼했다.













중앙학교와 보성전문에서 영재를 키우다



식민지 조국의 독립은 진정한 교육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인촌 김성수의 일관된 신념이었다. 1914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인촌 김성수는 사립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안재홍(安在鴻1892-1965) 등 일본 유학시절 만났던 친구들과 함께 관련 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첫 시도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좌절당해야 했다.


그러던 차에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던 중앙학교로부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김성수는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겠다는 신념에 따라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중앙학교 인수를 지나친 모험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를 설득하고 인수 비용을 얻어내 1915년4월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김성수가 동경 유학시절부터 키워왔던 민족교육의 꿈이 처음으로 실현된 것이다.


중앙학교를 인수한 김성수는 근대적인 경영방식을 도입, 학교 운영을 근대적 합리적으로 바꿔나갔다. 김성수는 그곳에서 직접 영어와 경제를 가르쳤으며 1917년엔 중앙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해 12월엔 서울 종로구 화동에서 종로구 계동의 근대식 건물로 학교를 옮겼다.


김성수의 노력에 힘입어 중앙학교는 사학의 명문으로 성장해나갔다. 특히 한국어 교습이나 민족주의 교육을 통해 민족 교육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다. 그것은 3·1운동에서 수행했던 중앙학교의 역할을 보면 잘 드러난다. 김성수는 물론이고 당시 중앙학교 교장이었던 송진우(宋鎭禹 1894-1945) 등은 3·1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18년 겨울부터 중앙학교의 숙직실은 3·1운동의 준비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김성수와 중앙학교는 이처럼 막후에서 3·1운동에 큰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순종의 국장일에 있었던 6·10 만세운동도 중앙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었다. 김성수는 중등교육 못지않게 고등교육의 중요성도 절감했다. 식민지라는 여건 때문에 유능한 젊은이들이 고등교육을 포기하거나 외국으로 나가야 하는 현실을 지켜본 김성수는 그것이야말로 민족의 손실이라고 생각했다. 김성수는 1932년6월 재정난을 겪고 있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다. 그는 유럽과 미국 유수의 대학을 둘러보고 그들의 선진적인 제도와 시스템을 보성전문학교에 도입하는 등 광복 때까지 보성전문학교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


김성수의 노력으로 보성전문학교는 발전을 거듭했고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1938년 이후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면서 보성전문학교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보성전문의 민족교육에도 탄압이 가해지면서 그 교육이 직업교육의 수준으로 제한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성수와 보성전문학교의 교수진은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한국 이름을 끝까지 지켜냈다. 그것은 보성전문학교의 힘이었다. 김성수와 보성전문학교는 일제의 탄압을 뚫고 민족 정신을 지켜냈다. 보성전문학교는 1946년엔 종합대학 고려대학으로 발전, 지금까지 한국의 민족대학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리고 있다.


httpwww.inchonmemorial.co.krhtmlinchonm_inchon_think2.html









삼천리 제4권 제10호

1932년 10월 01일


金性洙氏에게 民立大學를 만드서요, 一代의 最大事業으로


金性洙氏에게 民立大學를 만드서요, 一代의 最大事業으로
지금 多數의 사람들은 半島에 權威잇는 대학 하나가 출현되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만슴니다.<8> 그리고 그 기대를 達하여주는 큰 교육가와 사업가가 하로 급히 출현하기를 바라고 잇슴니다.


생각건대 선생은 10여년래로 中央학교을 위시하야 普成전문학교 등 큰 학원을 여러개 붓드시고 수십만의 巨財를 投하야 영재교육에 진력하시는 터이라 更進一步하야 다수한 사회인민이 기대하는 이 대학을 창설하시지 안으렴니까.

벌서 지난번 선생이 普成전문학교를 인수 경영하자 다수한 世人은 그를 대학창설의 첫 階段이라고 보고서 압날을 기대하는 경향이 잇섯슴니다. 듯건대 대학이 창설되자면 100만원의 巨財가 잇서야 하리라데 이만한 거금을 움지길 수 잇는 분으로는 선생도 유력한 그 중의 한분이 될 줄 암니다.
선생은 대학을 만드러 이 민족의 문화에 큰 광명을 던저 주시지 안으렴니까.


金性洙氏 答


나에게 그러케 과분한 기대를 가저주신다니 감사함니다. 2천만명이나 사는 큰 땅더리안에 官立대학이 겨우 한낫밧게 업다는 것은 前代의 찬란한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잇는 우리니만치 더욱 붓그러운 일이외다.


年前 民立대학운동이 起할때 얼마나 그의 실현을 기대하엿든가 함은 방방곡곡의 數萬人士의 열성을 통하야 넉넉히 짐작할 수 잇는 일로 그동안에 비록 세월이 흘너지낫스데 대학창설을 기대하는 생각에는 조곰도 변함이 업섯다고 생각함니다.


그런데 대학에 대하여는 나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하여보지 못하엿슴니다. 그러나 單科대학 하나 만들재도 건물 基地에 20만원, 도서관 30만원, 정부에 바치는 보증금 50만원 그리고 年年 유지비의 재원으로 100만원 그려니 적어도 200만원을 쥐고야 실현이 됨니다, 그 거액의 돈이 잇서지리까 그러기에 지금 무에라고 책임잇는 답변은 하기 어럽슴니다만은 나도 그의 출현을 열열히 희망하고 잇는 이 땅 사람중의 한아인줄만 아려주십시오.










민족자본 민족기업 ‘경방’을 세우다



인촌 김성수는 청년기 일본유학의 경험을 통해 민족자본으로 만든 기업이 있어야만 민족의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신념은 경성방직 설립으로 이어졌다. 경성방직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방직공장이자 민족기업이었다.


김성수는 식민지시대 의류와 직물 섬유 대부분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국의 산업 활성화를 위해 방직산업부터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경성방직 설립의 첫단계는 1917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한 것이었다. 김성수는 2년전인 1915년 중앙학교를 맡으면서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했을 때 이미 한국의 직물 발전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각오했던 터였다.


김성수는 경성직뉴를 근대적 면 옷감 생산 시스템으로 개조, 중앙상공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1918년부터는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19년10월 그는 경성직뉴와 별도로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한국 자본으로 세워진 순수한 민족 기업이었다. 김성수는 민족 기업의 의미를 살리려면 더 많은 한국인들이 경성방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경성방직을 주식회사로 만들었던 것이다.


경성방직은 당시 한국의 산업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본으로부터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김성수의 경성방직 설립은 식민지 조국의 그같은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대규모 생산을 시작한 일본인회사 조선방직에 맞서 한국의 면직물 산업과 한국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은 경성방직이 민족자본으로 세운 민족기업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단순히 하나의 기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조국을 근대화시키고 민족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결국 독립운동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김성수는 이후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경성방직을 발전시켰다. 1923년부터 1935년까지 경성방직은 민족 산업의 파수꾼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1939년엔 중국 만주에도 공장을 세움으로써 국내를 넘어 해외에도 투자를 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httpwww.inchonmemorial.co.krhtmlinchonm_inchon_think3.html










민족의 표현 기관 ‘동아일보’



인촌 김성수의 민족언론운동은 동아일보 창간으로 대표된다. 김성수는 일본 유학 이후 민족언론의 중요성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3·1운동 이전에는 일제의 철저한 언론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의 소위 문화정치로 인해 한글 신문 출판이 가능해지자 신문 창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1919년 경성방직을 설립한 직후여서 재정적으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문 창간은 한국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이라는 신념은 확고했다. 담보물을 저당 잡혀 대출을 받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1920년 4월1일 드디어 동아일보 창간호를 냈다. 동아일보는 당시 한국인들의 억눌린 한을 풀어주고 민족정신을 고양시켜주는 터전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일제 탄압이 가중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창간호가 간행된 지 보름밖에 되지 않은 1920년4월15일 총독부는 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이후 처음 동아일보의 판매와 배포를 금지했다.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을 당하는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김성수는 동아일보를 통해 민립대학 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문맹 타파 운동, 한글 운동 등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민족주의 문화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나갔다.


그는 또 1931년과 1933년 월간 신동아와 신가정을 창간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같은 문화운동을 펼쳐나갔다. 김성수와 동아일보의 민족정신은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1936년 8월25일자 동아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없앴다. 일제가 가만 있을리 만무했다. 총독부는 곧바로 동아일보를 무기한 정간시키는 등 갖은 탄압을 자행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그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인 37년6월3일 다시 발행되었다.


동아일보는 일제의 영구 폐쇄 음모로 인해 결국 40년8월10일 폐간됐고 광복 후인 45년12월1일 다시 발행됐다. 5년간의 공백기였지만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고양시키려는 김성수와 동아일보의 민족정신까지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httpwww.inchonmemorial.co.krhtmlinchonm_inchon_think4.html










1920.4.1. 동아일보 창간사



[ 主旨를 宣明하노라 ]




주지를 선명하노라



창천에 태양이 빛나고 대지에 청풍이 불도다. 산정수류 하며 초목창무 하며 백화난발 하며 연비어약 하니 만물 사이에 생명과 광영이 충만하도다.

동방 아세아 무궁화 동산 속 2천만 조선 민중은 일대 광명을 견하도다, 공기를 호흡하도다. 아, 실로 살았도다, 부활하도다. 장차 혼신용력을 분발하여 멀고 큰 도정을 건행코자 하니 그 이름이 무엇이뇨, 자유의 발달이로다.


세계 인류 운명의 대륜은 한번 회전하도다. [쯔아]는 가고 카이사는 쫓기도다. 자본주의의 탐람은 노동주의의 도전을 받고 강력에 기본한 침략주와 제국주의는 권리를 옹호하는 평화주의와 정의를 근본한 인도주의로 전환코자 하는도다.

그런 즉 인민으로 말미암은 자유 정치와 노동으로 말미암은 문화 창조와 정의 인도에 입각한 민족 연맹의 신세계가 전개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오인은 몽상가가 아니라 또한 현실에 즉 한 자로다. 어찌 이상과 하늘만 보고 사실과 땅을 망각하리오. 세계의 대세를 여실히 논할진대 일편에 신세력이 있는 동시에 우일편에 차와 대립하는 구세력이 있어 서로 쟁투하난도다. 환언하면 정치로나 경제로나 사회로나 문화로나 각 방면에 해방과 개조의 운동이 있는 동시에 곧 이 모든 것을 억압하려하는 일대 운동이 존재하도다. 이는 사실이라 뉘 감히 부인할 바이리오. 오호라 신구 충돌과 진보 보수의 다툼이 어찌 이 시대에 만 특유한 바리오, 온 역사를 통하여 상존하는 것이로다.


그러하나 일양내복에 적설견빙이 융해하고 백화만물이 각서기생함은 그때가 옴이라 누가 능히 팽연한 춘의 힘을 억거하리오. 이와 같이 신구의 충돌은 이미 신의 올 때 됨을 표시함이오 구의 갈 때 됨을 명고 함이라, 필연의 세는 인력으로 좌우하지 못할 바라, 신이 기필코 성공하고 구가 반드시 퇴거하리니.

오인은 신시대가 이미 왔다 아니하노라, 신세계가 벌써 전개되었다 아니하노라, 오직 흑암중으로서 쟁투로써 해산의 고를 가지고 웅웅한 신문명의 파와 명명한 신시대의 서광이 멀리 수평선상에 보이도다 하노라.


보이도다 보라, 2천만의 남녀 민중이 그를 향하여 노력하는 것을.

이러한 때에 동아일보는 생하도다, 회라 그 생이 어찌 우연하리오.


회고컨대 일한합병 우자십년 그 사이에 조선 민중은 일대 악몽의 습한 바 되었도다. 그가 또한 사람이라 어찌 사상과 희망이 없었으리오. 그러나 능히 서치 못하며 그가 또한 사회라 어찌 집합적 의사와 활력의 충동이 없었으리오. 그러나 능히 달치 못하며 그가 또한 민족이라 어찌 고유한 문명의 특장과 생명의 미묘함이 없었으리오. 그러나 감히 발치 못하였으니, 실로 개인이 간혹 경험하는 바 부르짖고자 하되 개구치 못하며 달음질하고자 하되 용신치 못하는 그 악몽에 조선 2천만 무고 민중은 빠졌었도다.


이는 곧 사지라, 함정이라, 자유와 발달을 기하지 못할 곳이었도다. 조선 민중은 실로 고통을 감하도다. 혹은 울고 혹은 노하였도다. 어찌 현대 민중뿐이라 하리오. 4천년 역사적 생명이 분개하도다. 그는 조선 인민이 홀로 그 생을 달치 못하며 그것을 득지 못함으로 말미암음이라.


그러나 때가 한번 변하여 언론 자유가 다소 용인된다 하매 조선 민중은 그의 의사를 표현하며 그의 전도를 인도하는 친구가 될 자를 열망으로 기대하였도다.

이에 동아일보가 생하였으니 그가 어찌 우연하다 하리오. 실로 민중의 열망과 시대의 동력으로 생하다 하노라.


주지를 좌에 선명함으로써 창간사에 대하고자 하노라.



(1)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소수 특권 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단일적 전체로 본 2천만 민중의 기관으로 자임한 즉 그의 의사와 이상과 기도와 운동을 여실히 표현하며 보도하기를 기하노라.


(2)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이는 국체나 정체의 형식적 표준이 아니라 곧 인류 생활의 일대 원리요 정신이니 강력을 배청하고 인격에 고유한 권리 의무를 주장함이라, 그 용이 국내 정치에 처하여는 자유주의요, 국제 정치에 처하여는 연맹주의요, 사회생활에 처하여는 평등주의요, 경제 조직에 처하여는 노동 본위의 협조주의라. 특히 동아에 재하여는 각 민족의 권리를 인정한 이상의 친목단결을 의미하며 세계 전국에 재하여는 정의 인도를 승인한 이상의 평화 연결을 의미함이라. 경언하건대 그 체는 폭력 강행을 불가라 하고 양심의 권위와 권리의 주장으로써 인생각반의 간계를 규율코자 함이니 고자의 소위 왕도의 정신이 곧 이것이라, 오인은 천하 인민의 경복과 광영을 위하여 이를 지지하노라.


(3)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생활 내용을 충실히 하며 풍부히 함이니 곧 부의 증진과 정치의 완성과 도덕의 순수와 종교의 풍성과 과학의 발달과 철학 예술의 심원오묘라, 환언하면 조선민중으로 하여금 세계 문명에 공헌케 하며 조선 강산으로 하여금 문화의 낙원이 되게 함을 고창하노니 이는 곧 조선 민족의 사명이 요 생존의 가치라 사유한 연고라.


요컨대 동아일보는 태양의 무궁한 광명과 우주의 무한한 생명을 천리 강산 천만 민중 가운데 실현하며 창달케 하여 자유발달의 국을 맺고자 하노니 (1) 조선 민중이 각정성명하여 보합대화하는 일대 문화의 수립을 기하며 (2) 천하 만중이 각득기소 하여 상하여 천지로 동류하는 일대 낙원을 건설함에 동력공조 하기를 원함은 본 일보의 주지로다.


그러나 본사의 전도가 심히 험하도다, 그의 운명을 누가 가히 예측하리오, 오인은 오직 민중의 친구로서 생사 진퇴를 그와 더불어 같이 하기를 원하며 기하노라.










[동아일보 30000호] 칠흑 어둠속, 해방의 열망으로 동아일보가 태어
2023-08-21 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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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 2023-08-21 20:08:12 삭제



[동아일보 30000호] 칠흑 어둠속, 해방의 열망으로 동아일보가 태어났노라


2018-01-26


1920년 4월 1일자 창간사, 현대 문장으로 소개합니다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창간은 역사의 책무이자 시대의 희망이었습니다. 1920년 4월 1일자 창간호 1면에 실린 창간사는 이러한 취지에 걸맞게 생명력 가득한 명문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 시대의 우리가 옛 문투의 창간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소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쉽고 편안한 문장으로 바꿔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그 의미를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푸른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드넓은 대지에 맑은 바람이 불도다. 산하엔 초목이 무성하고 온갖 꽃들이 만발하며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힘차게 뛰어오르니 천하 만물에 생명과 광명이 충만하도다.


동방의 무궁화동산, 2000만 조선 민중은 새로운 공기에서 호흡하며 새로운 빛을 목도하노라. 이는 실로 살아 있음이고 부활이다. 혼신의 힘으로 저 먼 길을 가고자 함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의 발달이다.


세계 인류의 운명은 지금 일대 전환점을 맞았도다. 차르 황제나 카이저 황제 같은 구시대의 발상은 떠나가고, 자본의 탐욕은 신성한 노동의 도전에 직면했으며, 무력에 기초한 침략주의 제국주의는 평화 정의 인도주의에 길을 내주는 형국이다. 인민 노동 정의에서 비롯된 자유정치 문화창조 민족연맹이 우리 앞에 신세계를 펼쳐 보이도다.



강제병합 10년, 민중은 악몽의 늪에


우리는 몽상가가 아니라,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찌 하늘과 이상만 바라보고 이 땅과 현실을 망각하리오. 세계의 대세를 있는 그대로 논하고자 함이니, 한쪽엔 새로운 세력이 있고 또 한쪽엔 이와 대립하는 구세력이 있어 서로 투쟁하는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해방과 개혁의 운동이 있는가 하면 이를 억압하려는 움직임이 분명 존재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아, 신구의 충돌과 진보 보수의 다툼이 어찌 이 시대에만 있는 일일까. 그건 인류 역사 어느 시대에도 늘 있어 온 일이었다.



추위가 가고 볕이 다시 드니, 쌓인 눈과 단단한 얼음이 녹고 온갖 만물이 하나둘 다시 살아나도다. 이는 분명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 의연한 봄의 전령을 누가 감히 거부할 것인가. 신구의 충돌은 그 자체로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북소리를 울려 옛 시대의 몰락을 알리는 것이다. 저 도도한 흐름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새로운 시대가 분명 승리할 것이다.



억압 뚫고 新시대의 서광 한줄기가


물론, 이미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새로운 세계가 벌써 전개되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지만, 투쟁과 진통을 거쳐 저 멀리 수평선에 신문명의 웅대한 한 자락과 신시대의 서광 한 줄기가 보이기 시작하도다. 자 보라, 서광 한 자락을 위해 수천만 민중이 하나같이 모두 몸부림치고 있음을.


이러한 시대에 동아일보가 태어났도다. 아, 동아일보 창간을 어찌 우연이라 할 것인가. 돌아보건대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난 지 10년, 그 사이에 조선 민중은 일대 악몽의 늪에 빠져야 했다. 조선 민중은 그 또한 사람인지라 어찌 사상과 희망이 없었을까만 그것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 또한 사회인지라 어찌 집단적 의사 표현의 충동이 없었을까만 능히 이뤄내지 못했다. 그 또한 민족인지라 어찌 고유한 문명의 특장과 생명의 미묘함이 없었을까만 그것을 드러내지 못했다. 부르짖고 싶어도 부르짖을 수 없었고, 달음질치고 싶어도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지난 10년, 2000만 조선 민중은 그렇게 악몽에 빠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곳은 바로 사지(死地)였고 함정이었다. 자유가 사라져 발전을 기약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조선 민중은 실로 고통스러웠다. 혹은 울고 혹은 노하였다. 그 분노, 어찌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들만의 분노일 것인가. 조선 민중의 삶은 늘 이 땅의 역사와 함께했으니, 4000년 역사적 생명까지 모두 분개하도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언론의 자유가 다소 용인된다고 하니, 조선 민중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그것을 전달해주는 친구를 열망하고 기대하고 있다. 이에 동아일보가 세상에 태어났으니 그것을 어찌 우연이라 말할 수 있으리오. 실로 민주의 열망과 시대의 동력으로 태어난 것이다.



민주-문화주의 지지하는 민족 언론


이에 그 뜻을 선명하게 밝힘으로써 창간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1.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소수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특권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2000만 민중 전체의 기관으로 자임한다. 그 민중의 의사와 이상과 목표와 희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보도할 것을 약속하노라.


2.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이는 국체(國體)나 정체(政體)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삶의 원리이자 정신을 의미한다. 무력을 배척하고 개인의 인격에 기초한 권리와 의미를 주장한다. 따라서 국내 정치에서는 자유주의요, 국제 정치에서는 연맹주의다. 사회생활에서는 평등주의요, 경제에서는 노동 본위의 협조주의다. 특히 동아시아에 있어선 각 민족의 권리를 인정하며 친목과 단결을 추구한다. 전 세계에 있어서는 정의와 인도를 승인하고 평화를 추구한다. 다시 말하건대, 폭력과 무력을 거부하고 양심을 존중함으로써 삶의 다양한 관계를 규율코자 함이니, 옛 왕도의 정신이 바로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만천하 백성들의 경복(慶福)과 광영을 위하여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3.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삶을 충실하고 풍부하게 하기 위함이다. 곧 부를 증진하고, 정치를 완성하고, 도덕을 순수하게 하고, 종교를 풍요롭게 하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철학과 예술을 심원하고 오묘하게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선 민중이 세계 문명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하고 삼천리강산을 문화의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니, 이는 곧 우리 조선 민족의 사명이요 생존의 가치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동아일보는 태양의 무궁한 광명과 우주의 무한한 생명을 삼천리강산, 2000만 민중 속에서 실현하고 나아가 자유의 발달에 이르고자 한다. 그리하여 1) 조선 민중이 각자의 인성과 천명을 바르게 하고, 서로 화합하는 문화를 수립하도록 하고 2) 조선 민중이 자신의 위치에서 차별 없이 일대 낙원을 건설하는 데 힘을 모으도록 하는 것이 동아일보 창간의 근본적인 취지다.


2000만과 생사진퇴 함께하길 약속


그러나 동아일보의 앞날은 심히 험난하도다. 그 운명을 과연 누가 예측할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오직 조선 민중의 동지로서, 그들과 더불어 생사 진퇴를 함께하기를 약속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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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80125883657291








* 1924.1.1. 동아일보 「새봄을 當하야」



[ ...... 가튼 朝鮮人間의 계급적 대립을 보게함은 策의 可한 者아니라. 朝鮮人은 위선 대동단결 ..... 위선 ... 朝鮮민중의 실생활 조건을 향상케 함이 가하다 ..... 경제는 진화하는 것이오. 躐等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은 조건이 잇서야 되는 것이오. .... 절급한 것은 朝鮮人 자체의 생산력 발전을 기도하는 一事 ......... ]



개벽 제43호

1924년 01월 01일



皆自新乎 - 最近一年中의 社會相



新元劈頭의 新事端續出


大正 9년 以降, 은근히 朝鮮社會에 세력을 가진 엇던 新來의 사회주의가 大正 12년인 작년에 이르러는, 아조 깨즛하게 머리를 들어 내엿다. 신년벽두의 제1일에는, CC당의 일홈으로 사회혁명 만세의 불온 연하장이 서울 안에 퍼지여, 관민의 눈이 다-가티 휘둥굴엇스며, 4일에 國一館에서 열닌 紳士給의 新年懇親會席上에 고학생 一群의 노호가 잇고, 8일에 주간 新生活이 발행 금지를 당하며, 仍해서 16일에는 「新生活」사건에 관계된 朴熙道, 金明植, 辛日鎔, 兪鎭熙, 자유노동자 조합사건에 관계된 李時雨, 金思民등에 대한 판결 언도가 잇서,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는 극도도 성행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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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目되는 東亞日報의 論調


사회주의의 사조가 경향을 통하야 불니듯이 일어나는 이 때에, 朝鮮에 유일한 언론기관인 東亞日報는 이에 대한 정면으로의 사회혁명 불가론을 제창하엿다. 신년 제1호의 「새봄을 當하야」의 사설에, 朝鮮人은 정치적 파멸로부터 다시 경제적 파멸에 드러간다는 말을 하고, 다시 「이를 구제키 위하야는 혹은 정치혁명을 주장하고, 혹은 사회혁명을 주장하나, 徒히 계급의식을 고취하야, 가튼 朝鮮人間의 계급적 대립을 보게함은 策의 可한 者아니라. 朝鮮人은 위선 대동단결하되, 어느 정도까지의 유 무산자 兩級의 타협을 도하고, 위선 할 일로서는, 각양의 문화적 노력에 의하야 朝鮮민중의 실생활 조건을 향상케 함이 가하다하고, 尙 又 제2일의 사설에는 논조를 또 한 번 나위여, 「경제는 진화하는 것이오. 躐等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은 조건이 잇서야 되는 것이오. 결코 조건이 업시는 되는 것이 아니라 하야, 생산력이 발달치 못한 朝鮮에는 도저히 무산자 사회의 現出을 기할 수가 업다고 논단하고 다못 절급한 것은 朝鮮人 자체의 생산력 발전을 기도하는 一事라 하엿다.


東亞日報의 이러한 주장은 일부 중산급 이상의 편에서는<131> 물론 환영하엿스나, 신진주의자를 위시한 대다수의 민중은 날이 감을 따라서 점차 이를 반대하게 되엿다. 심한 자는 東亞日報로써 朝鮮에 대한 白色運動의 前衛라고 말하기 까지에 니르럿다.(이상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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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총독부 탄압 견디며 자주역량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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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의 독립운동은 직접적인 운동과 간접적인 운동으로 나누어진다. 직접적인 운동은 중앙학교를 중심으로 3·1운동을 준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간접적인 운동은 교육, 산업, 언론을 일으킴으로써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중앙학교 숙직실은 새로 지은 교사 앞 운동장 동남 편에 있었다. 기당(幾堂) 현상윤(玄相允)이 1916년에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인촌의 부름을 받고 중앙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은 숙직실에서 침식을 같이 하면서 학교일을 상의하고 민족의 장래를 설계했다.



1918년에 독일이 항복으로 1차 대전이 종료됨과 더불어 6월에 열린 베르사유 회담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들고 나온다. 이러한 제창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 지도자들의 독립에 대한 의식을 더욱 제고시켰고 국내에서도 일본의 무단정치에 시달리던 국내 각계 지도자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고취했다.


인촌, 고하, 기당 등의 중앙학교 팀도 이러한 분위기에 젖어서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 숙의에 숙의를 거듭하게 된다.


여러 기관별로 독립운동에 대한 숙의가 일어났지만 그것은 실천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여기서 그러한 의식과 숙의를 결집시켜 행동으로 옮기는 데 중앙학교의 3인방 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천도교, 기독교, 동경유학생들, 학생단체 등이 서로가 만나게 하고 연결시켜 주고, 한데 모여서 합의를 도출케 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데 중앙학교 팀이 중심적 역할을 하고, 모의장소도 주로 숙직실이나 사택 또는 인촌의 가택이었다.


이 무렵 동경에서 2·8운동을 주도하던 백관수는 송계백에게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중앙학교 숙직실로 인촌, 고하, 기당을 찾아가도록 한다. 이들은 최남선을 불러 독립선언서를 읽어보도록 한다. 최남선은 감격하여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는 활자 보따리를 내주고 송계백에게 동경으로 가져가게 한다. 이때 인촌은 송계백에게 넉넉한 여비를 마련하여 준다.


인촌은 기왕 독립운동을 벌이려면 전국 방방곡곡의 백성들과 더불어 각계각층 지도자들을 전부 동원해서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천도교의 손병희 이외에 민족의 대표자들로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한규설, 윤용구 등을 설득해서 합류시키기로 한다. 설득작업은 주로 고하와 육당이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거절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에 적극적이던 최린과 최남선마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때 인촌은 종교단체가 천도교만 있는 게 아니고 기독교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기당(幾堂)으로 하여금 기독교계의 원로 지도자이자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南崗) 이승훈(李昇薰)을 교섭토록 한다. 기당은 이승훈과 동향인 김도태를 만나 이승훈으로 하여금 이 운동에 참가하도록 진지하게 부탁한다. 김도태는 정주에 내려가 이승훈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그런데 같은 날 같이 일으키자고 한 동경 유학생 측에서 2월 8일에 거사했다는 연락이 왔다. 초조와 불안 속에 있던 중 드디어 1919년 2월 11일 이승훈이 인촌 집으로 찾아오게 된다. 남강도 이미 2·8독립선언을 알고 어린 학생들까지 독립운동을 외치는데 국내에서 가만히만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다짐한다. 남강은 기독교계에는 감리교파와 장로교파가 있는데 이 두 파가 합치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하며 자기가 앞장서겠다고 20대의 젊은이들을 안심시킨다. 이때 인촌은 활동자금으로 수천 원의 돈을 내놓았다.


기독교 단체로만 거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중앙학교 숙직실 팀은 몸이 달았다. 우선 이렇게 되면 거국적인 운동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하는 이승훈을 찾아가 천도교와 같이해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다급해진 고하는 육당 최남선을 찾아가 사정을 알리자 육당은 남강, 고하, 기당과 같이 최린의 집을 찾아 간다. 여기서 우여곡절을 거쳐 비로소 기독교와 천도교가 연합전선을 펼치면서 구체적인 거사계획과 방법을 숙의하고 결정한다. 그리고 최린, 이승훈, 함태영 세 사람이 불교단체에도 참가할 것을 권유함으로써 한용운과 백용성이 합류하게 된다.


인촌이 이러한 모의과정에서 처음부터 일이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않을까를 걱정하던 것을 이 모임에 참여한 이병헌의 기록을 보면 여실히 알 수 있다. 당시 인촌이 이야기한 내용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사(百事)에 유시(有始)면 유종(有終)이니 초지를 관철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면 성실 정려(精勵) 근면해야 하고 백절불굴의 일심으로 임사무의(臨事無疑)하며 물위심급(勿爲心急)하고 의리를 존중하고 친우 간에 신의를 잃지 말아야 한다. - 이병헌 “내가 본 3·1운동의 일 단면”


위의 글은 인촌의 평소 생활과 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하는데 그 끝을 보려면 성실하고 정성을 기울여야 하고 백절불굴의 마음가짐으로 일단 일에 착수하면 의심하지 말고 일하는 사람끼리 신의를 생명처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인촌의 실천에 대한 강한 뜻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운동에 찬성과 더불어 참여한다고 말은 하여 놓고 나중에 소극적이고 회피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심정도 담겨져 있다. 여기서 인촌의 실천의지가 얼마나 강한가를 알 수 있다. 인촌의 후속사업인 동아일보, 경성방직, 보성전문 등에도 3·1정신이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훗날 경성방직이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될 때 인촌은 3·1정신을 생각해서라도 경성방직은 문을 닫을 수 없다고 주위 사람들을 격려하게 된다. 중앙학교는 3·1운동 후에도 계속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예컨대 3월 5일에 서울역전 광장에서 전개된 제2차 학생운동에도 전교생이 참가하였고 1926년의 6·10 만세운동에서도 중앙학교 5학년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1 동아미디어센터 인촌기념회

httpwww.inchonmemorial.co.krhtmlinchonm_inchon_think5.html











삼천리 제10호

1930년 11월 01일


朝鮮 大財閥 總解剖(一), 金性洙系의 500萬圓, 事業體系=京城紡績, 京城商工, 海東銀行, 東亞日報, 中央學校


朝鮮 大財閥 總解剖


柳光烈



朝鮮에서 자못 近代式으로 事業을 버리인 財産家가 잇다면 누구든지 人村 金性洙氏를 첫 손에 곱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學校로 新聞社로 紡績會社로 여러 가지 事業에 손을 내밀어 朝鮮經濟界에 한 王國을 세운 金性洙氏는 全南 扶安 茁浦의 한 地主의 아들이다. 封建的 春睡가 方濃한 中 더욱 急激한 外來資本이 들어와서 朝鮮의 産業革命을 밀고 나갈 때에 모든 封建的 蓄積인 地主가 漠然히 그 所措를 알지 못하고 枕을 列하야 넘어지면서 그 蓄積한 財産의 正比例로 蓄妾과 遊蕩을 일삼을 때에 微弱하나마 外來資本家와 相對하야 一矢를 應酬하는 것이 金氏外 幾人뿐이다. 氏는 地主의 아들로 오래 家庭에서 舊學에 힘썻고 느께야 芨을 負하고 東京에 渡하야 早稻田學窓에 螢雪의 功을 싸흐니 當時 20內外의 多感하든 氏는 滿目荒凉한 故國을 돌아보며 時時로 深慮에 잠기고 感情에 激하엿섯다. 學業을 마치고 그의 平生莫逆인 安鎭禹氏와 歸國하니 一妙小한 25,6歲의 靑年이며 歸國하자 곳 着手한 것이 敎育界이니 그것이 現在 中央學校이다.



中央高等普通學校


兩氏가 京城에 돌아오자 곳 自由學校를 經營키로 하여 그 設立願을 當時 尖頭總督 寺內氏에게 提出하엿스나 그때는 日韓倂合된지 얼마 안되여 私學에 대하야는 警戒할 때이며 몃개 잇는 私學도 財政難 其他로 一種 受難時代이엿다. 學校認可가 容易히 되지 못한 것을 본 兩氏는 그때 몹시 財政難에 빠지엇던 中央學校를 引繼하게 되엿다. 中央學校는 前畿潮學校 後身이니 一時 熱血志士의 손으로 校運이 隆盛하엿스나 一陣霜風에 萬華가 俱하듯이 或은 亡命 或은 慴伏하고 經營이 困難케 되엿섯다. 兩氏가 이를 引繼는 하엿스나 元來 靑年이라 巨大한 財政을 投함에는 父兄의 承諾을 엇지 아느면 안되게 되엿다.


守成에 長한 父兄이 뉘-巨萬의 大金을 投하야 不生産的 學校를 經營하는데 질겁게 許諾하리요. 이에 金氏는 몃칠 조르다 못하야 畢竟 最後的으로<24> 身命을 睹하며 待命하엿다. 븨인房에 門을 疊疊히 닷고 몃칠을 굶으며 自殺할 뜻을 보이엿다. 그의 父親은 體面上으로라도 가만히 잇서 버틔여 보앗스나 慈愛깁흔 그 母親은 『미음』그릇을 들고 감긴 門고리에 매달리여 『성수야-』를 連呼하며 盡日 痛哭하야 집안은 亂家가 되엿섯다 한다.


이리하야 承諾을 어든 氏는 松林이 鬱蒼한 現桂山에 校舍建築을 計劃하고 또 父親 압헤 가서 數日을 痛諫하야 8萬圓의 巨額을 어더 新築하엿다. 以來 春風秋雨 十餘星霜에 數千의 英俊을 社會에 보내고 7,8百의 健兒가 校庭에 뛰게 되엿다.
이 靑年敎育家 金氏가 經營하는 中央學校에는 海外에서 돌아온 敎育家들이 만이 모히여 一時는 新思想 鼓吹의 叢林이 되엿섯다. 年前에 30萬圓의 財團法人을 만들어 萬年不敗의 基礎가 完成하엿다.



東亞日報社


東亞日報社는 株式會社이라. 氏의 單獨事業이라 할 수는 업스나 現在 70萬圓 株式會社에 그 株數過半이 金氏의 一門 또는 姻戚, 同志의 所有이니 氏의 事業이라 하여도 過言이 아니다. 己未年 三一運動이 朝鮮의 山河를 震憾한 後 10年緎日하엿던 朝鮮의 言論界는 길고 긴 冬眠期를 지나 一陽來復의 春光을 보게 되엿다. 言論界의 元老 枊瑾, 新進 李相協, 靑年政論家로 名聲놉흔 張德秀氏 等이 모히여 發刊하엿스나 元來 數字的 採算에 어두운 老士書生의 일이라 一年有餘에 10餘萬圓이 들어가고 經營은 困難하게 되엿다. 돈을 대이다가 지치인 金氏는 家用金 幾千圓을 들고 와서 『여러분! 이 돈을 내가 家用쓰는 마지막 돈을 털러 왓스니 이것을 다쓰면 나는 어쩔수 업소』라고 最後의 말까지 하엿섯다고 한다.


이때에 그의 莫逆인 安鎭禹氏는 己未事件으로 服役을 마지고 出獄하자 이 經營困難한 東亞日報社를 復興키 爲하야 東奔西走하야 畢竟 株式會社를 完成하엿다. 이리하야 幾多의 劫運을 지나며 奮鬪한 結果 이제는 光化門通에 한 4層社屋을 建築하고 朝鮮言論界의 一大權威가 되엿다. 10年을 자란 이 新聞은 風雨을 지나며 힘잇게 그 步武를 옴기인다.



京城紡績會社」


朝鮮人의 衣服次로 年 5千萬圓이 海外로 流出한다. 이에 着眠한 金氏는 大正 8年에 紡織會社를 發起하야 第1回 拂込 25萬圓으로 事業을 始作하엿다. 그러나 이것도 這間에 어떠한 事情으로 當時 企業의 責任을 마탓던 李康賢氏는 븨인 손을 털어 쥐게 되엿다. 이에 金氏는 다시 第2回 拂込을 劃策하야 50萬圓으로 現在는 年産額 220萬圓으로 氷登浦 넓은 별판에 濛濛히 그 工場煙氣를 吐하고 男女職工 450名이 일을 한다. 그 製品은 全朝鮮布木商에게 퍼지엿스며 6種의 廣木은 朝鮮人의 衣服次로 需用된다. 不遠에 第3回 拂込을 하야 明年부터는 年額 500萬圓의 産品을 내여 朝鮮總供給量이 10分의 一을 占領하리라 한다. 同時에 全朝鮮에 朝鮮人經營의 紡績會社는 이 會社 하나뿐임을 附記한다. 만일 金氏가튼 朝鮮人 財産家 10人이 잇섯드랴면 衣服次로는 朝鮮人이 外來品을 안쓰게 되엿쓸가


海東銀行


이 銀行은 원래 貴族 尹德榮 外 諸氏가 創立 經營하엿스나 中途에 經營困難에 빠진 것을 金氏의 令弟 金秊洙氏가 마튼 것이니 資本金 100萬圓의<25> 株式會社이다. 一時 失하엿던 信用도 漸次恢復하고 現在는 文尙宇氏가 釆配를 쥐고 堅實하게 經營하야 昨年도에는 6分의 配當을 하엿다 한다. 不幾年에 朝鮮財界에 相當한 地盤을 占할 것이다.


京城商工會社

이것은 並木町에 잇서 織紐 등을 經營하던 것을 金秊洙氏가 마타 經營케 되여 고무신 製造와 貿易을 經營하게 되엿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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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제7권 제8호

1935년 09월 01일


百萬長者의 百萬圓觀

滄浪客


작고 쓰고 십다는 김성수


8월 수무닷샛날 오후의 쩔쩔끌는 해볏은 서울 桂洞 막바지 金性洙씨 洋舘住宅의 응접실을 녹일 듯이 빗최는데 나는 화초 욱어진 정원으로부터 흘너들이는 매암소리를 드러가면서 벽에 걸닌 山水畵를 처다 보왓다.


언제 보아도 방안을 이러틋 質素簡潔하게 차렷슴은 이 집 어룬의 氣風을 나타냄인 듯 조곰도 百萬長者란 어리어리한 대저택에서 늣겨지는 압박감이라고 업서서 우리들 평민으로도 마음노코 출입할 수 잇는 듯 유쾌하엿다.


조곰 뒤에 명함 전하려 드러간 계집하인의 뒤를 따라 仁村 金成洙씨가 우스면서 나타난다. 저쪽 방에서 서도 인저끼 잇슬제는 아마 나보다 몬져 차저온 先客이 잇는 듯 하엿스나 나를 몬저 맛나줌은 레포타의 時間 존중을 이해하심인가.
내가 氏를 처음 맛나든 10여 년 전이나 지금 보는 오늘이거나 氏는 언제든지 대모테 안경에 국다란 北베周依를 입엇섯다. 錦衣를 입는적 업는 이 백만장자, 금테단경을 써 본적 업는 이 백만장자, 이분의 「黃金哲學」은 엇더하엿든가, 「人生觀」또한 엇더하엿든가, 나는 第一矢를 발하여 보앗다.


나, 「이 세상에선 돈이 제일임니까, 돈우에 더 귀한 것 업고 더 갑가는 것 업다고 보심니까」

金, 「천만에요, 돈이 무에관데요, 돈가치 천한 것이 업고 돈가치 더러운 것이 업는데 무엇하자고 이 세상에서 돈이 제일 간다고 하겟서요 나는 아직 돈이 제일 간다고 생각하여 본적이 업서요, 돈 우에 인정도 잇고 의리도 잇고.....」

나, 「그러나 돈 아니면 선생인들 엇더케 은행을 경영하고, 학교와, 신문사와, 공장을 경영하겟서요, 천하에는 뜻이 백두산 가치 놉흔 이가 데글 데글 굴너다니지만 돈 한가지가 업스니까, 빈주먹만 부르들고 청천하늘을 처다보며 한숨만 짓는 이 엇더케 만은데요」

金, 「그야 그러치요 돈이란 무엇임니까, 그 자체는 조히쪽이요, 구리쇠요, 금은鑛物일 뿐 깨긋한 물건도 못되건만, 다만 이 세상에서는 사라가재도 압서는 것이 돈, 무슨 사업을 하재로 역시 돈이 압장을 서야 하게 꾸미여 젓스니까, 拜金宗도 생기고, 황금만능론자도 생 기나봅데만은 내 자신은 일즉 拜金宗의 심경을 가져본 때가 업섯슴니다. 돈 잇스면 일하고 돈 업스면 말뿐이지, 돈 때문에 노예되려고 생각을 가지고 잇지는 안어요,


黃金을 엇더케 보시는가


나, 「일전에 미국서 온 신문을 보면 록펠라는 제재산 40억 만원 중 2억 3천 만원을 사회사업에 내노으면서 聲明書를 발표하엿는데 이 세계적 大富豪의 黃金觀이란 敬聽할 만합데다그려

金, 「엇더케요」

나, 「무에라고 하엿는가 하면 내가 가진 40억만원을 나는 내 돈이라고 생각지 안노라, 다만 내 수중에 보관되어 잇는 여러분의 돈이라고 보노라 하고 또 요행 조흔 운명을 태가지고 낫기 까닭에 내가 맛터두게 되엇슬 뿐」이라고 첫곡지를 말햇습데다.

金, 「그말이 올치요, 실상 맛터잇슬 뿐이지, 제것이 다하고 고집할 맛이야 잇서야지요 돈 관리자라는 그 黃金觀에는 나도 共鳴함니다.


나, 네 그러고 그 뒤를 게속하엿는데, 「그럼 이 돈을 내가 마타가지고 잇는 것이 낭비를 피하고 압흐로 더 그 돈을 뿔굴 수 잇스니까, 내 수중에 의연히 두어야 올타고 보기에 남저지 30 몃 억만원은 아직 내어 노치 못하겟노라 하엿고, 또 今后 어느 시기에 이 돈을 내어 놋는 때문에 세상이 더 밝어질 기회가 온다면 저보다 나온 딴 사람이 그 돈을 마터 관리하게 되어도 무방하다구요.

金, 「글세오, 그러케 보는 것이 올켓지요, 그만한 자신이 업서야 엇더케 돈을 지니고 가겟습니까, 그리고 늘 생각하는 일이지만요, 세상사람은 흔히 부자라면 바버요, 멍텅구리로 아는 경향이 잇지만은, 남들이 버을지 못하는 大金을 모아 쥐는 그 當者에게는 무엔가-例하면 智力이나 體力에 잇서서 무엇인가 뛰어난 점이 잇는 법임니다. 그러킬래 몃 10 만명중 오직 그 사람에게만 돈이 가지고, 몃 100 만명중 오직 그 한사람에게만 부자소리가 가지는 것이 안여요 또 10만명이나 100만명 속에서 뽑히여지는 그 부자에게는 남이 모르는 고심이 잇담니다. 결단코, 우연히 하늘에서 금덩이가 뚝떠러저 부자가 되여지는 것은 아니지요.


나, 「네 알겟서요, 그런데 선생은 오늘까지 얼마나한 돈을 쓰섯서요, 얼마나한 돈을 자긔 손으로 만저보고 또 지출하여 보섯서요,」
이 말에 氏는 呵呵대소하면서 손을 헤헤 둘너 입을 막으란 표정을 한다.
나, 「엇재서 말슴 안하세요, 50만원임니까, 100만원임니까」
金, 「그런말 내가 엇더케 대답해요. 글세 돈 쓴 제 자랑갓해서」
나, 「웨 말슴 못하세요」
金, 「세상더러 뭇구려 하하하」


나의 이 질문은 실패인 듯 또다시
내, 「그러면 선생의 재산은 지금 얼마나 되서요, 백만원 아니 세상에서는 두분 아버지의 재산을 함처서 500만원은 넘는다 하든데요」
金, 「나 몰나요, 내가 그런걸 엇더케 알어요」


앗불사 못난 질문을 연겁허 두번이나 發하엿다가 완전히 실패를 보고 말앗다, 질문을 發하엿다가 그 대답을 엇지 못하는 것은 완전히 탐방기자로서의 낙제다, 에-덥다, 땀이나 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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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



[이런 剖棺斬屍(부관참시)] 백완기 '인촌 김성수의 삶'.. 그들이 인촌을 아는가?



정부는 지난 13일,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인촌 김성수 선생의 건국공로훈장 서훈을 취소하기로 의결했다고 한다. 그들이 인촌을 아는가?


백완기 교수가 쓴 책 '인촌 김성수의 삶'을 보면, 인촌(1891~1952)은 자기가 기획을 돕고 후원했던 3·1운동이 실패하자 국권 회복을 위해 민족 역량을 길러야 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양부와 친부를 설득해서 가산을 국가의 경제력 증진과 국민 계몽, 인재 양성에 쏟아 부었다. 조선 최초의 기업인 경성방직을 설립할 때 청년 김성수는 전국을 돌며 주주(株主)를 모집해 국민에게 산업화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깨우치려 노력했다. 동아일보를 창간해서 국민의 눈을 띄워주고 민족정기를 고취했고 중앙학원을 설립하고 보성전문(고려대학교의 전신)을 인수해서 민족 사학을 열었다. 뛰어난 인재들을 만나면 해외 유학을 보내 지도자로 양성했다.



그 엄혹한 시기에 어떻게 일제의 '협조'를 얻지 않고 민족 기업, 언론, 교육 기관을 운영할 수 있었겠는가? 일장기 말소 등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누차 정간, 폐간 위기에 놓였다. 반일 데모로 다른 학교에서 퇴학당한 학생을 모두 입학시켰던 중앙고보, 일제가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로 지목했던 보성전문은 자주 폐교 위기를 맞았다.


그럴 때, 인촌이 호기롭게 총독부를 꾸짖어서 경방, 동아일보, 보성전문이 폐업, 폐간, 폐교했으면 우리 민족에 도움이 되었겠는가? 인촌이 굴욕을 참고 이 기관들을 살렸기에 일제하 조선이 덜 춥고 덜 어둡고 덜 빈약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인촌 선생은 독립운동가라면 사상·노선·방법을 막론하고 지원했고, 창씨개명도 끝내 거부했고, 일제가 주겠다는 남작 작위도 거절했다. 그러나 보성전문 농장의 닭들이 굶주려 비실거리는 꼴을 보고는 총독부 축산과 서기를 찾아가 '사정'해서 사료를 얻어다 먹였다고 백 교수는 전한다.


굶주린 닭을 먹이듯 민족 기업, 언론, 학교를 살리고자 일제에 고개 숙인 것이 민족 반역인가? 총독부에 불려갔을 때, 탄원하러 갔을 때 인촌 선생의 굴욕과 비애를 생각하면 죄스러워진다. 중앙고보, 보성전문 교장으로 학교 건물을 지을 때 인부들과 함께 막일을 하고 청소도 해서 학생들이 수위 영감으로 알았다는 인촌 선생은 절대 훼손해서는 안 되는 민족의 은인이다.











“인생의 스승,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인촌 사랑방’ 발족식



고창=조건희기자 , 고창=박영민기자

2019-07-17



“제 인생의 스승을 두 분만 꼽으라면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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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9)는 ...... 1950년 중앙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할 당시를 떠올리며 “그때 만난 인촌 선생은 살면서 만난 누구보다도 인간애가 많았다”며 “3·1운동의 주역인 인촌 선생이 없었다면 독립도, 대한민국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또 “누구나 잘한 일도, 실수한 일도 있다. 정치적으로 찍은 낙인은 시일이 지나면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진 강연에서 백완기 고려대 명예교수(83)는 인촌 선생이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송계백 선생에게 독립선언서 인쇄 및 여행 비용을 몰래 지원한 일화를 소개하며 “독립운동에 누구보다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인촌 선생이 보성전문학교에서 키우던 닭에게 먹일 사료를 구하려고 조선총독부 축산과 서기에게 고개를 숙였던 사례를 들며 “자존심이나 명예보다 굶주린 동포를 더 중시했다”고 강조했다.


인촌 사랑방이라는 이름은 서울 종로구 계동의 인촌 고택 사랑방에서 건국헌법(제헌헌법)과 농지개혁법의 초안이 사실상 탄생한 점에서 착안했다. 모임을 제헌절에 발족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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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사랑방은 광복절인 다음 달 15일 조강환 동우회장(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의 고창군 본가에서 현판식을 열고 매달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는 강연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90717965285581









“상하이 잠입한 인촌 김성수, 안창호 만나 독립자금 전달”


박효목 기자 , 상하이=권오혁 특파원
입력 2019-02-21



평화당 ‘임정 100주년’ 상하이세미나 ‘인촌-임정요인들 회합’ 증언 소개

정동영 “100년전 선열정신 기려야”



“인촌 김성수 선생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을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전달했다.”


20일 오후 상하이 영안백화점 옥상. 양영두 민주평화당 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공동대표)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이같이 밝혔다. 양 위원장은 “도산 선생 일기에 따르면 이곳 영안 숙소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회합이 빈번했다. 인촌 선생도 이곳에서 비밀 회동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고 말했다. 도산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 영안백화점 내 여관에 주로 머물렀다.


양 위원장은 “도산 선생의 일기에 인촌 선생의 존함이 빠진 건 인촌 선생을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는 도산 선생 비서 역할을 했던 장이욱 전 서울대 총장이 김재순 전 국회의장에게 말한 내용”이라며 “장 전 총장을 모셨던 김 전 의장은 이를 (2013년) 흥사단 10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증언했다”고 설명했다.


인촌 선생은 1929년 12월 서울을 출발해 부산, 일본을 거쳐 상하이로 갔다는 기록이 있지만 중국에서의 구체적인 활동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양 위원장은 “인촌 선생이 비밀리에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도산 선생을 면담했다는 증언은 역사의 기록”이라고 했다. 양 위원장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장 전 총장에 따르면 인촌 선생은 도산 선생이 1938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경성제국대 부속병원(서울대병원) 입원비에도 도움을 줬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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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newshomearticleall20190221942179111











'이철승의 추억'


2005-01-26


이철승(李哲承)의 추억

▽민족의 지도자를 만나다▽


抗日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全州北中(전주북중·전주고등학교 전신) 재학 시절부터 日帝가 강요하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고, 국어(國語-일본어)도 하지 않으면서 민족차별을 하는 일본인 학생들을 두들겨 패 가정근신 또는 정학을 당해 2학년 때 낙제를 하고 말았다.


1942년 5학년 졸업반 때에는 『한글은 야만인이 쓰는 부호이다』라며 조선인을 극도로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 노다(野田)를 교실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사건을 일으켜 무기정학을 당했다. 不逞(불령) 조선인 학생으로 낙인 찍혀 출세길이 열리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전문대학에 진학할 수 없게 되었다.


나의 仲父 李錫柱(이석주 제헌의원)는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사상이 나쁜 너는 평생 형무소생활을 거듭하거나 불량배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지도자, 우리 힘으로 세운 민족학교인 普成전문학교(普專·고려대학교 전신)에 진학하라』고 권유해서 普成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마침 당시 仁村 金性洙(인촌 김성수) 선생이 교장으로 계셔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었다.


仁村 선생님은 1914년 일본 와세다大를 졸업하고 기약 없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많은 人材를 양성해야 한다는 敎育立國의 신념 아래 중앙학교(중앙고등학교 전신)를 인수하여 1917년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2년에는 1905년에 李容翊 선생이 설립한 普成전문학교가 경영난에 봉착하자 이를 인수, 교장에 취임했다. 나는 모교를 방문할 때마다 지금 고려대학교 仁村 동상 아래 잔디밭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잡초를 뽑았던 仁村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仁村 선생은 學兵지원을 권유한 적이 없다▽



당시 普專에는 민족진영의 金性洙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張德秀(장덕수), 安浩相(안호상), 兪鎭午(유진오), 陳承錄(진승록), 孫晉泰(손진태) 선생 등과 사회주의 진영의 尹行重(윤행중), 朴克彩(박극채), 崔容達(최용달) 선생 등이 있었다.


이분들은 이념은 달랐지만 仁村 선생 밑에서 抗日운동에는 대립 없이 서로 합작하면서 후진양성과 자주독립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었다. 광복 후에는 바로 左右翼 진영의 지도자로 갈라져 각 진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때 그곳 우리 普專은 「민족의 향기가 풍기는 젊은이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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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0월20일 學徒志願制(학도지원제)가 실시되자 조선총독부는 경찰, 헌병, 기타 행정기관 각급 전문대학 당국을 총동원하여 학병지원을 강요했다. 그들은 지원성적이 부진하자 지도적 인사들을 총동원해 학병권유를 강요했다. 崔南善, 李光洙 선생 등은 국내에서는 물론 일본 東京까지 건너가 학병지원을 권유했고, 尹致昊 선생은 『조선 학도들에게도 일본동포들과 어깨를 겨누어 싸움터로 나설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길이 열렸다』라고 권유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仁村 선생의 입장은 어떠하였겠는가 일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仁村 선생은 『나는 그들의 교육을 맡았지, 전쟁터로 가라 말라고 맡은 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였다. 그런데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가 일제에 아부하려고 무단히 仁村 선생의 이름을 판 기사가 실렸다. 뒷날 학병에 끌려가게 된 나는 우리들이 출정하는 날까지 仁村 선생으로부터 학병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仁村 선생과 管鮑之交(관포지교)의 동지요, 당시 동아일보 시장이었던 古下 宋鎭禹(고하 송진우) 선생도 병 치료를 핑계삼아 학병 권유운동을 일절 기피하였다.


어느 날 내가 仁村 선생을 찾아뵌 자리에서 宋선생이 말씀하기를 『일제가 학병지원을 서두르는 것은 그만큼 전황이 불리하다는 증거야. 그들은 이 기회에 교육을 받은 조선인의 싹을 없애 버리려는 것 같다. 알아서들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전국적으로 학병거부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또 다른 날 내가 尹元求 교우와 함께 칭병을 하고 입원 중인 安浩相 선생을 문병했을 때 선생은 내 귀를 끌어당기며 『패전이 확실해, 기피해』라고 말했다.

나는 바로 연희전문학교 羅군의 하숙집에서 경성제대 李赫基(이혁기·광복 직후 좌익의 국군준비대 사령관)군과 학병거부운동을 결의, 이 운동을 조직화해서 강력히 전개하기로 했다.



▽조선 총독도 다루기 힘들었던 仁村 선생▽



그러나 이 비밀이 혜화전문학교의 金모 군에 의해 새어나가 金군의 친척인 文모라는 親日거두에 의해 고이소(小磯 ) 당시 조선총독에게 알려졌다. 그는 일의 심각함을 感知(감지)한 탓인지 바로 文씨를 통하여 우리 대표들과의 면담을 요청해 왔다.


우리들은 난상토의 끝에 면담에 참석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총독과의 면담은 이루어졌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핵심적인 질문을 분담해서 하였다.

우리는 『일본은 대동아 聖戰(성전)이라고 하면서 동남아의 다른 나라들은 모두 독립을 인정하면서 왜 2000만 명의 朝鮮만 독립시키지 않는가 나라의 독립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개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학병거부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고이소 총독은 『조선과 일본은 同祖同根(동조동근)이다. 그러기에 조선과 일본은 內鮮一體(내선일체)가 되어야 해, 제군들의 말에 일리는 있어. 그러기 때문에 내가 부른 게 아닌가. 조선인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게 바로 내 직책이야』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고이소는 옆에 있던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 학교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보성전문 李哲承입니다』라고 크게 대답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나를 이모저모 살피더니 『金性洙군은 물샐 틈 없는 인물이지』하고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순간 「仁村 선생은 총독까지도 다루기 거북한 존재이구나」 싶었다. 『이번에 전문대 정비에 보성전문도 폐쇄되는 겁니까』라고 다그쳐 물었으나 분명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총독의 설득에 『못 알아 듣겠습니다. 우린 이제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큰소리로 말하고 총독 관저에서 나왔다.


그 뒤 1944년 조선총독부는 보성전문을 폐쇄시키지 못하고 보성전문을 京城拓殖經濟專門(경성척식경제전문)으로, 연희전문을 京城工業經營專門(경성공업경영전문)으로, 그리고 梨花女專(이화여전), 淑明女專(숙명여전)을 농업지도원 양성소로 바꾸었다. 京城法專(경성법전), 明倫專門(명륜전문)과 惠化專門(혜화전문)은 폐쇄시켰다. 결국은 조선의 전문대학도 창씨개명을 당한 격이 되었다.



▽正義는 실현될 것이다▽


1944년 12월5일 거행된 壯行會(장행회)는 죽음의 길로 떠나는 우리들을 전송하는 행사였다. 이 장행회에는 李娥珠(이아주 仁村 선생 부인) 여사, 朴恩惠(박은혜 장덕수 선생 부인) 여사도 참석하였다. 仁村 선생은 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교장실에 심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식이 시작되자 연단에 올라 『나는 여러분의 교육을 맡았지, 입영을 맡은 게 아닌데 오늘 이렇게 모였다』며 비통한 심정을 말씀하셨다.


학생감 張德秀 선생은 『여러분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비극이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우리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 집단적인 훈련을 받고 행동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 죽으러 간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내일을 위해 여러분이 심신을 단련하러 간다고 생각하라』 라고 말씀하였다.


이어 安浩相 박사는 『하늘에는 태양이 있고 땅에는 민족의 정기가 있다. 그리고 사람 가슴속의 양심은 그 어떤 총칼로도 결코 꺾을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양심대로 행동하면 땅에는 정의가 가득할 것이요, 하늘의 태양은 더욱 빛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자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도서관장이었던 孫晋泰 선생은 『나는 어제 밤 꿈을 꾸었는데 제군들이 나를 번쩍 들어 하늘에 헹가래치며 만세를 불렀다. 나도 따라 만세를 부르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그것은 꿈이었다』고 했다. 「言中有骨(언중유골)」, 우리나라의 독립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장행회가 끝나자 본관 앞 운동장에서 우리들은 장작으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마지막 술잔을 들며 李娥珠 여사가 손수 만들어 주신 「카레라이스」를 먹었다. 우리들은 통한의 울분을 「스톰(storm·폭풍)」으로 폭발시켜 스크럼을 짜고 「입실렌트·체이호」의 校號(교호)를 외쳤다. 그 순간 누군가 『일본놈의 경찰서를 쳐부수자』 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시위대를 형성하여 안암동을 빠져나갔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되자 金性洙 교장선생이 나를 급히 부르셨다. 『이 사람들 일을 저지르겠어. 자네 흥분해서 일을 저지르면 학교는 폐쇄되고 그나마 후배들은 배울 곳조차 없게 돼』 하면서 『오늘이 있듯이 내일도 있네. 설움 속에서 시름을 씻고 일어서는 것이 우리 조선민족이야! 단칼에 베려 하지 말고 매사를 길게 보게』라고 하였다. 나는 흥분된 시위대의 선두를 다시 학교로 돌리고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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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5012681538721












인촌 김성수 선생, 각계 지도자들의 증언


2002-03-31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1891∼1955) 선생은 우리 겨레가 일제의 압제 아래 신음할 때 교육 언론 산업분야에서 민족의 역량을 키워 독립의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했던 선각자였다.

동아일보는 창간 82주년을 맞아 동아일보 창간을 주도했던 인촌과 동(同)시대를 살았던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인촌의 참모습을 재조명한다. 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평가하는 데 있어서 동시대인들의 증언은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창씨개명-훈장 거부▼


1891년 전라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현 전북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에서 태어난 인촌은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해 민족교육의 기초를 마련했다. 1919년에는 경성방직을 설립해 민족기업을 일으켰고,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해 억눌린 민족의 염원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인촌은 이어 1932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인재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언젠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민족의 역량과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김수환(金壽煥·80) 추기경은 1991년 10월11일 인촌 탄생 100주년 추념사에서 “인촌 선생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없이 길러낸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라고 추모했다. 김 추기경은 특히 “스스로 몸을 낮추어 항상 겸양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뒷자리에서 남의 공로를 드높여 주는 것이 인촌 선생의 인품이자 경륜이었다”고 회고했다.


1960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급서한 야당 지도자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1894∼1960) 선생은 1958년 펴낸 회고록에서 “인촌 선생은 일제 암흑정치하에서도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해 교육기관 언론기관 산업기관 등을 창설해 우리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도 야당 시절 인촌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인촌은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인촌은 동아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을 계몽하여 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큰 힘을 주었다. 그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인촌은 오늘의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치하에서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다. 인촌은 또한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1993년 8월15일 광복 48주년 특별기고)



인촌은 특히 동아일보를 창간하면서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함’으로써 우리 겨레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는 민족의식 자체가 희박했다는 점에 비추어 인촌의 선각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또한 2000년 3월31일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인촌 선생은 민족 민주 문화주의 3대 강령을 내건 동아일보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며 “동아일보의 3대 사시(社是)는 그때뿐만 아니라 21세기를 맞는 새천년에도 참으로 합당하다”고 말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인촌은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했다. 인촌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자 창씨개명 아이디어를 낸 총독부 학무국장이 직접 창씨개명을 종용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인촌은 또 일제로부터 어떤 훈장이나 작위도 받지 않았다.


동아일보가 창간 이후 1940년 8월 강제 폐간될 때까지 20년 동안 정간 4회, 발매금지 2000회 이상, 신문압수 89회, 기사삭제 연 2423회의 제재를 당했던 것도 ‘민족의 입’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고초였다.



▼ 투병 안창호선생 도와 ▼


인촌은 국내에서 활동하면서도 해외로 망명해 독립투쟁을 하던 독립운동가들을 음양으로 지원했다.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1889∼1930) 장군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강훈(李康勳·99) 전 광복회장은 인촌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91년 11월11일 경기 과천시 서울대공원에서 열린 인촌 동상 제막식에서 인촌의 독립운동을 이렇게 평가했다.

“총칼로써 왜적 몇 사람을 해치울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거대한 국력을 등에 업고 밀어닥치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저지할 수는 없다. (중략) 인촌 선생의 언론 교육 산업활동은 바로 독립의 길로 국민을 인도하는 독립자강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강훈옹의 회고는 계속된다.

“인촌께서는 1929년 말 구미 여행길에 상하이 임시정부에 들러 임정이 운영하던 학교에 큰 돈을 기부했다. 임정 요인들의 노고에 대한 인촌 선생의 진심어린 경의에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1878∼1938)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크게 감동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正大) 스님은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37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병원에서 투병 중일 때 가족들이 인촌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인촌은 남들 앞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했으나 뒤로 몰래 사람을 보내 거액을 전달했다”고 회고했다. 이에 대해 도산은 “인촌이 따로 사람을 보내 많은 협조를 했어. 정말 인촌은 사려 깊은 사람이야”라고 측근을 통해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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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조(徐丙(·80) 전 연합신문 편집부국장은 회고록 ‘정치사의 현장증언’(1981)에서 기자 시절 취재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한 독립단원이 인촌의 집에 찾아가 독립자금을 달라고 조르자 인촌은 신분을 확인한 뒤 사랑방에 있던 금고 문을 열어놓고 자리를 비켜줬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그제서야 자신이 없는 사이에 돈을 가져가도 좋다는 뜻이었음을 알아차리고 독립자금을 가져가 요긴하게 쓴 일이 있었다. 이때 인촌 집에 찾아갔던 사람은 바로 광복 후 제헌의회 의원을 지낸 장홍염(張洪琰) 의원이었다. 반민특위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던 장 의원이 이 일화를 동료 의원들에게 뒤늦게 털어놓자 모두들 감탄했다.”


광복 직후 국회 반민특위에서 가려낸 친일인사 명단에 인촌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정치 경제 언론 교육분야 등 다방면에 걸친 업적뿐만 아니라 이런 숨은 활동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서재필 “인촌은 대통령감”▼


인촌은 일제 치하에서도 주도면밀하게 ‘광복 이후 조선’을 준비했다.
‘독립신문’을 창간했던 서재필(徐載弼·1866∼1951) 박사가 광복 후인 1947년 10월 고려대에서 강연했을 때의 일화. 한 학생이 서 박사에게 “초대 대통령감으로는 누구를 생각하느냐”고 묻자 서 박사는 빙그레 웃더니 “왜 멀리서 찾느냐”며 옆에 있는 인촌을 가리켰다. 그리곤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 그리고 일제 치하에서 체포, 투옥되었던 독립투사들은 분명 애국자들이다. 그러나 인촌과 같이 국내에 남아 장래 한국의 독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자신의 생을 바친 사람들 역시 애국자라 아니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촌은 또 고려대 학생들에게 ‘전인적 인간’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완전한 한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니다. 이 (완전한) 사람은 권리를 아는 동시에 의무를 알며 자유를 아는 동시에 책임을 알고 개인을 아는 동시에 사회를 알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까닭이다. (중략) 또 이 완전한 개인이란 자기가 자기를 결치(結治)할 줄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1947년 11월3일 인촌이 고려대신문 창간호에 기고한 ‘민주주의는 자치를 기초로’ 중에서 고려대 인촌기념관 내 인촌상 뒤 현판에 기록된 내용)



▼ 독재정권에 단호히 저항 ▼



광복이 되자 인촌은 자유민주주의 원칙하에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진력했다. 조선민족청년단장 등을 지낸 이범석(李範奭·1900∼1972) 초대 국무총리에 따르면 인촌은 해외 독립운동세력으로부터 건국을 같이 준비하고 싶은 국내 지도자로 손꼽혔다.


이범석은 자신이 주도한 1945년 8월20일 광복군의 국내 침투작전인 ‘독수리 계획’이 일제의 항복으로 무산되자 같은 해 8월18일 서울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귀국을 시도했다.

“우리는 (비행장을) 감시하는 헌병 중에 한국 사람을 발견하게 됐다. 그래서 한국 국내에서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김성수씨 등에게 연락의 쪽지를 부탁하고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범석의 회고록 ‘우둥불’ 중)




소련이 북한을 점령하자 인촌은 소련과 김일성(金日成)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이승만(李承晩·1875∼1965)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했다. 좌우합작에 매달려 있다가는 남한마저 공산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건국 후 이승만이 독재권력을 휘두르자 야당 육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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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은 번영된 민족통일국가의 염원을 안은 채 1955년 2월18일 6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인촌이 별세하자 각계 각층 조문객들이 빈소에 운집했고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전국 각지에서 100만 인파가 몰려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계동 사저에 마련된 빈소를 방문해 고인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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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2033178030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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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국제연합의 전신인 국제연맹의 창시자였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자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이 새로운 국제 질서를 제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천자의 나라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의 다른 나라들을 조공의 대상으로 삼는 중국식 국제 질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형성된 근대적 주권국가 체계를 전 세계에 동등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원칙론에 식민지 조선인들은 즉각 호응했다. 3·1 운동은 단지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중국의 망령을 떨쳐내고, 미국이 제시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에 동참하고자 하는 거대한 몸부림이었다.


대한민국은 그 출발부터 새로운 국제질서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이는 대한국민이 대한민국을 형성해온 역사를 돌이켜보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낸 최초이자 최고의 작품인 것이다.


해방된 한반도에 단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다. 미국은 1947년 10월 유엔 총회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했다. 그리하여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8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1948년 1월 9일 서울에 입국했다.


단독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를 이루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좌파 계열의 정치, 사회 단체들은 선거 보이콧을 넘어 폭력과 테러로 새로운 정부 수립을 막으려 들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38선 이북으로 가지 못한 건 소련의 반대 때문이었지만, 유엔은 그저 미국의 꼭두각시일 뿐이라며, 그러니 분단의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유엔 회원국 중 21국이 군대 파견을 신청했고 그중 16국이 실제로 병력을 보냈다. 반대로 북한의 편에서 전쟁을 한 나라는 소련과 중국뿐이었다. 유엔의 선거로 만들어진 나라 대한민국은 유엔의 전쟁으로 지켜낸 나라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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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v.daum.netv20230717032124092

[朝鮮칼럼] IAEA 음모론… 75년 전에도 그랬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3.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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