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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수
장덕수 2023-07-28 16:26:27 | 조회: 89
1937 장덕수



[ ..... 「콤뮤니즘」도 또는 「팟씨즘」도 모다 독재주의 ....... ]





삼천리 제9권 제4호


1937년 05월 01일




張德秀氏의 「博士論文」, 「산업평화의 영국적 방법」과 그 학문적 가치



印貞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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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야 다시 씨는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규정에로 달려가서 그의 진실한 목적은- 『사회의 어떠한 成員도 총족하고 자유스러운 생활을 생활하기 위한 기회를 否定當하지 안는 데 있다 라는 고래의 진부한 명제를 인용한 후 다시 이 기회를 획득하기 위하야는 『근세 민주주의는 그럼으로 각 개인의 지위와 그의 고유한 권리가 정부에로의 참여와 선거제 자유비평 등을 통하야 보장되는 것인데 실로 그가 행복되고 문명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이리하야 그의 동포들의 동등한 요구와의 조화 밋헤서만 최대한도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p.15)



그러나 暫間 머리를 돌려라. 이러한 정치적 평등이 아무리 자유롭게 만인에게 보장된다 할지라도 경제상의 분열이 의연히 지속되고 있는 곳에 과연 「각 개인의 행복되고 문명된 생활」과 『그의 동포들의 요구와의 동등한 조화』 등이 실현될 수 있단 말인가.



16, 17세기에 있어서 영국의 신사들이 떠들고 단니든 민주주의의 이 따위 환상을 「히틀러-」와 「뭇소리니」와 같은 인간들이 몽둥이를 메고 단니는 오날 이 시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되푸리한다는 것은 세상 물정에 대한 완전한 무지의 표시가 아닐까 한다.(중략-원문)



씨는 다시 민주주의와 「콤뮤니즘」 또는 「파씨즘」과의 차이점의 규명에로 전진하엿다. 이리하야 이「콤뮤니즘」도 또는 「팟씨즘」도 모다 독재주의(Dictatorshiq)라는 것을 말한 후 「이 독재주의라는 것은 그것이 이태리판이건 또는 露西亞판이건 모다 한길가치 상부로부터 課要되여 자기 자신을 통제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일반 민중의 가정된 행복을 위하야 정부로부터 강제되는 명령과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간단하게 설명한다.



이 兩個의 독재형태를 이처럼 형이상학적으로 조잡하게 혼동하여버린 후 이 소위 「독재」(Dictatorshiiq)에 대한 영국적 「데모크라씨」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하야 씨의 논지는 다시 다음과 가치 전개된다.



『대영제국에서 실천되고 있는 것과 같은 「데모크라씨」의 근본적 원칙은 곳 관용성(tolerance)에 있다. 통일과 질서는 사회생활의 의상을 단일한 제복에로 재단하는 국가의 전능한 權 권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로 數多한 각양의 형태의 각종 사회적 시설을 거처서 나타나는 일반 영국 신민의 심오한 정신적 또는 사회적 성격의 표현을 통해서 달성되는 것이다.



다양성과 屈伸性은 사회 정의의 동요하는 균형의 일층 심각한 통일과 질서에 대응하는 자유의 兩個 특징이 된다. 「데모크라씨」의 이러한 諸특징은 산업평화의 영국적 企圖에 있어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다. 첫재로 그것은 분쟁의 해결에 적용될 직접적 방법을 규정하는 것이며 둘재로는 산업상의 현존 질서 그 자체로 하여금 산업 민주주의의 광범한 기초에로 향하야 서서하게 그러나 무저항적으로 움지기여 나아가게 하는 정신을 공급하는 것으로 산업평화와 사회보장에 대한 정부의 책임은 이에 따라서 더욱 증가되여 나아간다.



그럼으로 그 기술도 또 그 정신도 모다 영국적 민주주의 일반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이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요컨데 그들의 산업 평화의 諸방법에 대하여 특수한 異彩를 부여하는 자는 산업상의 諸관계의 특수한 분야에 있어서 적용되여 있는 일반 영국 민중의 태도와 기질 그것이다』(p.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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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공산당



사회주의와의 첫 번째 만남



미상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사회주의는 처세의 상식



1920년대 중반 조선의 서점가를 달군 베스트셀러 가운데 『사회주의학설대요』란 책이 있다. 이 책은 개벽사 출판부에서 발행하였는데 일본의 사회주의자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가 지은 것으로 정백(鄭栢)이 번역하였다. 개벽사에서는 자사에서 발행하던 잡지인 『개벽』과 『별건곤』 등의 지면을 통해 이 책을 대대적으로 광고하였다. 당시 이 광고의 메인 카피는 ‘사회주의는 처세의 상식’이었다.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지식인으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광고 전략이 주효했던 것인지 이 책은 꽤 많이 팔렸다. 1926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대구 무영당 서점에서 집계한 베스트셀러 가운데 사상 방면 1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 사회주의라는 신사상이 조선에 광범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바탕으로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어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었다. 1921년에 창당한 중국공산당, 1922년 창당한 일본공산당에 비해서 다소 늦은 편이다.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곡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지기까지 징검다리 역할을 한 조직들이 있었다. 연해주에서 만들어진 한인사회당, 국내에서 만들어진 사회혁명당 그리고 양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고려공산당이 바로 그것이다.




2 한국인, 러시아에서 혁명에 휘말리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 연해주 지역까지 파급되면서 그곳에 살고 있던 한인들도 여기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사회주의와 대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0월 혁명 이후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에는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소비에트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런데 당시 극동의 볼셰비키 가운데는 김알렉산드라를 비롯한 한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918년에 들어서면 이들 한인 볼셰비키들은 당시 신한촌에서 발행되던 『한인신보』를 중심으로 결집한 망명세력과 손을 잡기 시작하였다. 한인신보 그룹을 대표하던 인물이 이동휘(李東輝)였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1918년 4월 28일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한인사회당은 한국인들이 최초로 조직한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인사회당에는 이동휘와 김알렉산드라 이외에 박애(朴愛, 朴마다베이), 박진순(朴鎭淳, 미하이朴), 이한영(李翰榮), 김립(金立) 등의 인물이 참여하였다.



이동휘는 함경도 단천 출신 무관으로 일찍이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바 있다. 그는 석방된 후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하여 권업회에 가담하였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추방되었다가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후 연해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김알렉산드라는 러시아의 한인계 사회주의 운동가로 본명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이다. 시베리아 우수리스크에 태어나 블라디보스톡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한인 노동자들이 대거 우랄지방의 벌목장에 동원되었는데 이곳에서 통역으로 활동하면서 볼셰비키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917년에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정식 입당하였으며 극동의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자 외교부장으로 활약하였다.



한인사회당은 창당 즉시 러시아내전에 휘말렸다. 한인사회당은 100여 명의 적위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부대는 하바로프스크 제1국제연대에 속해있는 블라디보스톡 국제군에 편입되어 볼셰비키와 함께 우수리전투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백군 편으로 기울었다. 극동의 소비에트정부는 붕괴되었고 한인사회당 구성원들은 흑룡강을 따라 후퇴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김알렉산드라는 백군에게 넘겨져 처형되었으며 유동열(柳東說), 김립 등 간부들은 중국인 노동자로 가장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한인사회당은 사실상 궤멸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3 3·1 운동 직후 만들어진 사회혁명당



한편 삼일운동의 파고가 한풀 잦아든 1920년 6월 국내에서 사회혁명당이란 정당이 조직되었다. 이 정당은 국내에서 최초로 계급과 사유재산의 타파를 주장한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사회혁명당은 김명식(金明植), 김철수(金錣洙), 장덕수(張德秀), 최팔용(崔八鏞), 이봉수(李鳳洙) 등 일본 유학생 출신과 윤자영(尹滋暎), 한위건(韓偉健) 등 국내에서 활동하던 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하였다.



이 가운데 일본 유학생 그룹은 대부분 신아동맹단이란 조직의 구성원이었다. 신아동맹단은 1916년 일본 동경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이다. 조선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중국, 타이완, 베트남 등 아시아계 유학생 30여명이 모여서 만든 단체이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 간 평등에 바탕한 새로운 아시아를 세우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을 결의하였다. 신아동맹단에 참여했던 중국인들은 귀국한 후 상해에서 대동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신아동맹단 조선 지부는 1920년 6월 제5차 대회를 통해 조직의 명칭을 사회혁명당으로 바꾸면서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



사회혁명당은 창립대회에서 선언서를 통해 ‘계급과 사유재산의 타파, 프롤레타리아독재와 전국 10분의 7이 되는 무산자와 함께 혁명운동을 실행할 것’ 등을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공산주의 정당임을 분명히 표방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비밀독서회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혁명당은 국외에서 조직된 한인사회당 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그 위상과 역할이 크게 확대되었다.



4 두 개의 고려공산당



한때 궤멸 직전까지 갔던 한인사회당은 1919년에 들어서면서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3·1 운동으로 인한 연해주 한인사회의 혁명적 고양,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이 반격을 시작한 점 등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한인사회당이 활력을 되찾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이동휘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추대된 것이었다. 한인사회당은 1919년 6월말 간부회합에서 이러한 계기를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동휘로 하여금 국무총리에 취임하도록 설득하는 한편 박진순을 모스크바로 파견하는 등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동휘가 상해로 건너가 국무총리에 취임하자 그는 일약 상해 정계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당시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은 러시아의 소비에트 정부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동휘가 소비에트 정부와의 연결고리를 선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동휘는 1920년 5월 초 상해로 건너온 대한국민의회 부의장 김만겸(金萬謙)과 함께 이른바 ‘한인공산주의그룹’을 형성하였다. 이 그룹은 박진순, 김립, 이한영 등 한인사회당 간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 그룹은 이후 여운형(呂運亨), 조완구(趙琬九), 신채호(申采浩), 안병찬(安秉瓚), 조동호(趙東祜), 선우혁(鮮于赫), 윤기섭(尹琦燮), 김두봉(金枓奉) 등 임시정부 관계자들까지 끌어들여 (가칭)한인공산당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당시 간부진은 책임비서 이동휘, 중앙위원 김립 이한영 김만겸 안병찬, 번역부 위원 여운형, 출판부 위원 조동호 등이었다.





한인사회당은 이른바 (가칭)한인공산당 단계를 거친 후 1921년 5월에는 고려공산당대표자 대회를 소집하여 정식으로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이 공산당은 상해에서 조직되었다고 해서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간부진은 위원장 이동휘, 부위원장 김규면(金圭冕) , 총서기 김립, 재무부장 박진순, 연락부장 김하구(金河球) 등이었다. 고려공산당은 명목상 (가칭)한인공산당을 확대 개편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탈하였다.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김만겸, 안병찬, 여운형 등 비한인사회당계 인사들이 대거 이탈하였다.





당시 러시아 바이칼호 연안에 있는 이르쿠츠크에서는 한인 사회주의자들이 또 다른 고려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이 정당은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되었다고 해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라고 부른다. 당시 2개의 고려공산당이 동시에 존재했던 셈이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이탈한 사람들은 이르쿠츠크파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상해 지부를 구성하였다. 김만겸이 책임비서, 여운형와 조동호가 위원, 김단야(金丹冶) 임원근(林元根) 박헌영(朴憲永) 등이 당원이었다. 이렇게 하여 2개의 고려공산당이 팽팽히 대치하게 된 것이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이탈한 세력도 있었지만 새로 참여한 세력도 있었다. 국내에서 조직된 사회혁명당 세력이 들어와 빈 자리를 채웠다. 고려공산당 창당대회 당시 사회혁명당은 김철수, 이봉수, 주종건(朱鍾建) 등 8명을 대표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고려공산당의 간부진에 사회혁명당 세력들이 대거 포진하게 되었다. 중앙위원 12인 중 7인, 내지간부 전원, 기관지담당 전원이 사회혁명당 출신이었다. 이렇게 연해주에서 출발한 한인사회당 세력과 국내에서 조직된 사회혁명당이 힘을 합쳐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만든 셈이다.



5 상해파, 먼저 주도권을 잡다





2개의 고려공산당 가운데 먼저 주도권을 잡은 것은 상해파였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이동휘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맡았기 때문에 임시정부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의 소비에트정부와의 외교도 박진순, 한형권(韓馨權), 김립 등 상해파가 도맡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레닌정부는 200만 루블의 자금 지원까지 약속하였다. 이 자금을 수령하여 배분하는 일도 상해파가 장악했기 때문에 타 정파에 비해서 재정적 기반이 튼튼한 편이었다.



상해파는 사회혁명당 계열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국내에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사회혁명당 계열 인사들을 주로 조직과 선전 부서에 배치하였으며 구 사회혁명당 조직을 고려공산당의 국내지부로 재편하였다. 장덕수, 김명식 등이 중심이 된 국내지부는 활동의 폭을 크게 넓혔다. 이들은 우선 『동아일보』를 자신의 표현기관으로 활용하였다. 국내 조직활동에서 역점을 둔 것은 서울청년회와 조선청년회연합회를 통한 청년운동이었다. 1920년대 초 청년운동은 상해파가 주도하였다. 이렇게 상해파는 일찌감치 국내외에 기반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이르쿠츠크파와의 경쟁에서도 앞서갈 수 있었다.



6 문제점도 적지 않았던 상해파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조직이나 이념적인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상해파는 자신들이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 전체를 대표한다고 표방하였지만 대표성이라는 측면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창당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탈하였으며 이르쿠츠크에 별도의 고려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이렇게 2개의 고려공산당이 난립하게 된 책임이 상해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상해파의 대표성에 약점이 있는 것은 명백하였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사회주의 정당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조직체계와 운영방식이라는 측면에서도 취약점이 있었다. 당시 상해파의 조직은 러시아 볼셰비키로 대표되는 전위정당과는 전혀 거리가 먼 느슨한 조직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국내에서 만들어진 사회혁명당의 경우도 초기에는 비밀독서회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념적인 측면에도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사회주의 정당을 표방하였지만 이론적 학습의 수준이 높지 못했고 심지어 사회주의적 정체성까지도 의심받을 정도였다. 한인사회당을 이끈 이동휘의 경우 과거 계몽운동 시절 기독교인으로 행세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사회주의도 단지 독립운동을 위한 방편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사회혁명당계의 핵심인물이었던 장덕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찍이 1910년대부터 노동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한 바 있다. 하지만 분배구조를 개선하여 ‘합리적’으로 통제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지향하는 영국 신자유주의자 홉하우스(Hobhouse)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사상으로 결코 사회주의 자체는 아니었다. 장덕수의 경우도 사회주의적인 주장을 일부 수용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사회주의자라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물론 김명식 같은 인물은 이후 학습을 통해 사회주의를 수용하였다. 하지만 사회혁명당이 초창기 이념적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7 두 고려공산당, 간판을 내리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활동 과정에서 많은 반발에 부딪쳤다. 가장 먼저 모스크바 자금 문제를 둘러싼 분란이 일어났다. 이 자금은 소비에트정부가 한인사회당에 제공한 것이었으므로 상해파가 이 자금을 수령하여 관리하였다. 그런데 이동휘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맡는 바람에 일부에서는 임시정부에게 준 자금을 이동휘 일파가 횡령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주로 임시정부 내부에서 이러한 비판이 일었으며 경쟁하고 있던 이르쿠츠크파도 이 비판에 가담하였다.





상해파는 국내에서도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사기공산당사건이었는데 돈 문제와 정체성 문제가 뒤섞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앞서 언급한 모스크바 자금의 일부가 국내에도 들어왔다. 구 사회혁명당 계열의 인사들이 이 자금을 주무를 수밖에 없었다. 사기공산당사건이란 진정한 사회주의자도 아닌 자들이 공산당인척 하면서 이 자금을 마음대로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사기공산당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것이 장덕수였다. 횡령이라는 비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장덕수가 진정한 사회주의자가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구 사회혁명당 계열의 인사들은 사상적 정체성을 분명히 할 것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렇게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국내외에서 많은 비판과 공격에 직면해야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심각한 분파투쟁이 발생하였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연해주 지역의 무장세력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유시참변이 일어났다. 결국 코민테른에서는 1922년 12월 고려공산당의 해산을 명령했다. 해산 명령의 대상에는 상해파 고려공산당뿐 아니라 이르쿠츠크파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신 코민테른 산하에 꼬르뷰로(高麗局)를 설치하여 조선에서의 공산당 창당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꼬르뷰로는 상해파 이동휘, 윤자영과 이르쿠츠크파 한명서(韓明瑞), 장건상(張建相), 김만겸 등으로 구성되었다. 코민테른에서 두 고려공산당을 강제로 결혼시킨 셈이다. 이렇게 두 고려공산당은 징검다리 역할을 마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1923.3. 이승만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동아시아의 반공주의



입력 2023.06.08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이승만은 자신이 하와이에서 발행하던 ‘태평양잡지’에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글을 게재했다(1923년 3월호). 당시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세워진 소련이 전 세계 피압박 민족의 희망으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조선의 많은 독립운동가, 지식인들도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소련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 비판을 감행한 것이다. 그는 먼저 양반, 상놈 하는 신분제가 없어진 자리를 자본가-노동자 간의 빈부격차가 대신해버린 세태를 비판하며, 공산주의의 평등 주장을 일단 평가했다. 그러나 재산을 나눠 갖게 되면 소수의 부지런한 사람이 다수의 게으른 사람을 먹여 살리게 될 것이고, 자본가를 없애버리면 혁신과 진보는 중지될 것이며, 보통 사람의 학식을 높여 지식인과 대등하게 만들어야지 지식인을 아예 없애자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등의 이유를 대며 공산주의의 부당성을 갈파했다.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미국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당 간에 피를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며 공산주의자와 소련을 경계했다(한표욱, 이승만과 한미외교). 그의 반공주의는 철두철미하여 해방 후 정국을 주도할 때는 “공산주의자들은 콜레라와 같다”(방송연설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고 했고, 미국인들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투쟁에 있어서는 중립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훈계()했다. 이 때문에 소련에 대해 온건했던 하지 미군정 사령관이나 미국 국무부와 자주 갈등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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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6080300025










* 1924.1.1. 동아일보 「새봄을 當하야」



[ ...... 가튼 朝鮮人間의 계급적 대립을 보게함은 策의 可한 者아니라. 朝鮮人은 위선 대동단결 ..... 위선 ... 朝鮮민중의 실생활 조건을 향상케 함이 가하다 ..... 경제는 진화하는 것이오. 躐等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은 조건이 잇서야 되는 것이오. .... 절급한 것은 朝鮮人 자체의 생산력 발전을 기도하는 一事 ......... ]



개벽 제43호

1924년 01월 01일



皆自新乎 - 最近一年中의 社會相



新元劈頭의 新事端續出


大正 9년 以降, 은근히 朝鮮社會에 세력을 가진 엇던 新來의 사회주의가 大正 12년인 작년에 이르러는, 아조 깨즛하게 머리를 들어 내엿다. 신년벽두의 제1일에는, CC당의 일홈으로 사회혁명 만세의 불온 연하장이 서울 안에 퍼지여, 관민의 눈이 다-가티 휘둥굴엇스며, 4일에 國一館에서 열닌 紳士給의 新年懇親會席上에 고학생 一群의 노호가 잇고, 8일에 주간 新生活이 발행 금지를 당하며, 仍해서 16일에는 「新生活」사건에 관계된 朴熙道, 金明植, 辛日鎔, 兪鎭熙, 자유노동자 조합사건에 관계된 李時雨, 金思民등에 대한 판결 언도가 잇서,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는 극도도 성행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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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目되는 東亞日報의 論調


사회주의의 사조가 경향을 통하야 불니듯이 일어나는 이 때에, 朝鮮에 유일한 언론기관인 東亞日報는 이에 대한 정면으로의 사회혁명 불가론을 제창하엿다. 신년 제1호의 「새봄을 當하야」의 사설에, 朝鮮人은 정치적 파멸로부터 다시 경제적 파멸에 드러간다는 말을 하고, 다시 「이를 구제키 위하야는 혹은 정치혁명을 주장하고, 혹은 사회혁명을 주장하나, 徒히 계급의식을 고취하야, 가튼 朝鮮人間의 계급적 대립을 보게함은 策의 可한 者아니라. 朝鮮人은 위선 대동단결하되, 어느 정도까지의 유 무산자 兩級의 타협을 도하고, 위선 할 일로서는, 각양의 문화적 노력에 의하야 朝鮮민중의 실생활 조건을 향상케 함이 가하다하고, 尙 又 제2일의 사설에는 논조를 또 한 번 나위여, 「경제는 진화하는 것이오. 躐等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은 조건이 잇서야 되는 것이오. 결코 조건이 업시는 되는 것이 아니라 하야, 생산력이 발달치 못한 朝鮮에는 도저히 무산자 사회의 現出을 기할 수가 업다고 논단하고 다못 절급한 것은 朝鮮人 자체의 생산력 발전을 기도하는 一事라 하엿다.


東亞日報의 이러한 주장은 일부 중산급 이상의 편에서는<131> 물론 환영하엿스나, 신진주의자를 위시한 대다수의 민중은 날이 감을 따라서 점차 이를 반대하게 되엿다. 심한 자는 東亞日報로써 朝鮮에 대한 白色運動의 前衛라고 말하기 까지에 니르럿다.(이상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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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덕수 (張德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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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부터 미국 유학을 하는 동안 미주지역 한인유학생의 단체인 북미한국유학생총회(北美韓國留學生總會)에 가입하여 부회장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특히 이승만의 지지 단체인 동지회(同志會)에 가입하고, 1927년부터 허정(許政) 등과 함께 『삼일신보』의 창간 및 발간을 위해 노력하는 등 이승만을 지지, 지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 무렵 그는 박은혜(朴恩惠 ; 훗날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장)와 결혼했다.



1936년 귀국하여 이듬해 김성수의 도움으로 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거쳐 교수로서 활동하였으며, 『동아일보』의 취체역도 겸직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에 연루되었으며,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의 간부를 지내면서 기관지 『사상보국(思想報國)』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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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흥업구락부

[ 興業俱樂部 ]



요약



흥업구락부는 1925년 3월 이승만의 독립혁명동지회와 연계되어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단체이다. 서울 신흥우의 집에서 비밀리에 흥업구락부가 조직되었으며, 창립회원 대부분은 YMCA와 밀접하게 연관을 가진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이었다. 이들은 실력양성운동을 수행하였으며, 사회주의 계열과 함께 민족연합전선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관련자 54명이 체포되었다. 1938년 9월 일제는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에게 ‘전향 성명서’를 받은 후, 이들을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하였다.




정의



1925년 3월 이승만의 독립혁명동지회와 연계되어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단체.



변천 및 현황


1925년 3월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운동 노선에 따라 구자옥(具滋玉), 박동완(朴東完), 신흥우(申興雨), 유억겸(兪億兼), 이갑성(李甲成), 이상재(李商在) 등이 서울에서 조직한 비밀 독립운동단체이다.



당시 미국에는 이승만 중심의 독립혁명동지회(獨立革命同志會)와 안창호(安昌浩) 중심의 국민회(國民會)가 각각 활동하고 있었다. 하와이 독립혁명동지회와 국내 사이의 연락 책임자는 신흥우였다.


1924년 10월에 북감리파총회(北監理派總會)와 기독교청년회 간부협의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한 신흥우는 귀국길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에 관해 논의하였다.


신흥우는 국내 동지와 상담하여 “조선의 정세에 적응한 단체를 조직하고, 동지회 본부와도 연락해 조선 독립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는 이승만의 권유에 따라 귀국 후, 같은 해 12월 15일 서울기독교청년회에서 단체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회를 결성하고 운동의 목적 및 방법을 결의하였다.



1925년 3월 23일 서울 신흥우의 집에서 비밀리에 흥업구락부가 조직되었다. 창립회원은 구자옥, 박동완, 신흥우, 이상재 등 12명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YMCA와 밀접하게 연관을 가진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이었다.


흥업구락부원들은 지식인과 자산가층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농사 개량에 대한 강연, 한글 보급 등의 실력양성운동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친일파들의 자치운동을 저지하고, 사회주의 계열과 함께 민족연합전선인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흥업구락부 사건’은 1938년 2월 연희전문학교 ‘경제연구회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조사를 받던 연희전문학교 부교장인 유억겸의 집에서 동지회와 연관된 문서가 발견되어 흥업구락부의 실체와 활동이 발각되었다. 이어 YMCA연합회 총무 구자옥이 체포되었고, 흥업구락부 명부와 활동이 기록된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흥업구락부 관련자 54명이 체포되었다.



일제는 흥업구락부에 대하여 탄압을 가하면서 회유 정책을 병행하였다. 1938년 9월 일제는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에게 ‘전향 성명서’를 받은 후, 이들을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하였다. 이후 흥업구락부원들은 친일단체에 가입하거나, ‘내선일체(内鮮一体)’ 정책에 협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흥업구락부 [興業俱樂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장덕준 -- 장덕진 ]



동아일보 창간 100년, 역사에 새긴 순간들


신동아
2020.04.02.


일제강점기 민족혼 고취 독재에 맞서 ‘언론자유’ 수호

● 한국 최초 순직 기자, 동아일보 장덕준

● 충무공 이순신 유적 보존
● 문맹퇴치, 농촌계몽 운동 선봉
● 3·15 부정선거 고발, 정치깡패 퇴출
● 잡지 창간, 방송 진출로 보도·비판 기능 강화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가 100주년을 맞았다. 지난 100년은 민족과 함께한 고난과 영광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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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초의 순직 기자 장덕준


추송(秋松) 장덕준(張德俊·1892~1920)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직기자다. 그는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이었고, 고향 황해도에서 동아일보 창간을 위한 주금(株金)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창간 뒤에는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했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이상협, 논설주간은 장덕준의 동생 장덕수였다.


장덕준은 동아일보 창간 다음 날인 1920년 4월 2일자부터 13일자까지 10회에 걸쳐 ‘조선 소요(騷擾)에 대한 일본 여론을 비평함’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여기서 소요란 3·1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장덕준은 이 칼럼을 통해 3·1운동을 왜곡하는 일본 각계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일본 교토제국대학 법학교수 오가와 고타로(小川鄕太郞)는 1919년 11월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 신문’에 ‘조선통치론’이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 글에는 “조선에는 다수의 무식자가 있으며, 다수한 무식자는 독립의 이상이 없다”는 내용이 있다. 장덕준은 이에 반박하며 “조선인의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은 혈액과 뇌수에 의해 발생한다. 결코 소수 야심가와 선동가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선각자와 유식자를 단속, 압박하더라도 조선혼과 독립사상은 추호도 타격받을 리 없다”고 강조했다.


장덕준은 당시 지병인 폐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논설을 동아일보에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전방위적인 취재 활동도 펼쳤다. 1920년 여름에는 동아시아를 방문한 미국 의원단을 취재하고자 중국 베이징에 다녀오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그해 9월 26일 일제로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9월 24일과 25일자에 연속으로 실은 사설 ‘제사(祭祀)문제를 재론하노라’가 직접적 이유였다. 총독부는 이 사설이 일본인이 신념의 중추로 삼는 거울, 구슬, 칼 등 이른바 신기(神器) 3종을 모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황실의 존엄을 모독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가 8월 30일부터 14회에 걸쳐 연재한 ‘대영(大英)과 인도’ 기사도 문제 삼았다. 영국이 인도에서 저지른 악정을 논하면서 암암리에 이를 조선과 대비했다는 것이다.


이 무렵 만주 훈춘(琿春)에서는 일본군이 조선 동포를 무차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데 대한 보복으로 그 지역에 사는 조선인 5000여 명을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학살한 것이다. 장덕준은 이 소식을 듣고 10월 중순 현지로 달려갔다. 당시 신문이 정간 중이라 취재를 한다 해도 보도할 지면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혈담(血痰)을 토할 만큼 건강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동포가 대량학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며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후 장덕준은 간도의 중심 도시 쥐쯔제(局子街)에서 좀 더 들어간 곳에 숙소를 잡고 일본군 만행을 취재했다. 당시 그가 쓴 글에는 “살풍경이 일어나 공포의 기운이 가득한 간도 일대에는 죄가 있고 없고 간에 남녀노소가 살육의 난을 당하고 있다”는 대목이 있다. 그렇게 취재에 매진하던 12월 어느 날 아침, 장덕준은 일본인 두세 명에게 불려 나간 후 영원히 소식이 끊어졌다. 이리하여 우리 언론사상 첫 순직 기자가 됐다. 나이 29세의 일이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64년 4월 30일 언론 발전에 공이 많은 언론인 다섯 명을 선정해 신문회관에 초상화를 봉안했다. 이때 김인승 화백이 그린 장덕준의 초상화가 현재는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클럽에 걸려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이 변색됐지만 불굴의 기자 정신만은 결코 퇴색하지 않고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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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수의 형 장덕준이 한국 최초의 순직 기자가 된 것은 앞서 살펴봤다. 동생 장덕진(張德震·1898~1924)은 상하이임시정부 의경단원(義警團員)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려다 중국인 총에 맞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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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단파방송 사건 (1942년 6월 13일)



항일단파방송 사건은 1942년에 일제치하 경성(오늘날 서울)의 경성방송국(현재 KBS 한국방송공사의 전신)에서 일어난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건으로 이승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활동으로 들 수 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에게 외국 정세가 알려지지 않기 위해 '외국 단파 방송 청취 금지령'의 공표 및 선교사 추방 등 단속을 강화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방지할 수는 없었고, 이렇게 몰래 듣는 사람들은 '미국의 소리'의 한국어 방송이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중국어 방송을 듣곤 했다. '미국의 소리'는 미국 정부가 전 세계의 청취자를 향해 방송운영하는 국제방송을 말하는데, 이승만은 6월-7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단파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매번 격려하는 방송을 활동했었다.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29일 처음 방송되었는데, 이는 이승만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이다. 당시 미국의 소리방송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전쟁상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었다.



여기서 이승만이 1942년 6월 13일, 미국의 소리 라디오로 통해 미국 워싱턴 D.C로부터 '일제는 전쟁에 패망할 것이다. 우리 임시정부는 연합군의 승인을 얻을것이다. 우리는 독립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다.'는 주요 내용으로 선전하였다. 당시 이 라디오 단파방송을 들었던 이들은 소수(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등)였는데, 이는 밀청했던 사람들로부터 입으로 전래되고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에 의하면 이 사건이 국내에서 이승만의 인지도에 대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워싱턴에서 항일단파방송을 하였던 이승만의 공식직함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었다.


이 항일단파방송을 몰래 밀청하다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 잡혀간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었는데, 이들 증언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중국이 아닌 미국에 있고,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기도 했다.'라고 한다. 조선일보 주필로 유명한 칼럼가 이규태 선생의 형제도 이걸 듣다가 처벌당했다고 한다. 이승만의 항일단파방송 육성원본은 오늘날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이 때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는 비석이 KBS 본관 앞에 있다.



경성방송국과 개성방송국의 단파 방송 청취 적발로 불거진 사건에 여운형, 허헌, 백관수, 함상훈 등 해방 후 건준과 한민당의 주역이 될 인물들이 폭넓게 연루되었다. 사건의 핵심 당사자였던 송남헌은 이렇게 회고했다.


'1942년 6월경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승만 박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2300만 동포들이여 조국 광복의 날이 멀지 않았으니 동포는 일심협력하여 일제에 대한 일체의 전쟁 협력을 거부하고 때를 기다리라고 한 연설을 나는 직접 들었다. 이 방송을 들은 나는 가슴이 마구 뛰었고, 흥분해서 변호사 사무실로 달려가 그대로 전했다.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서 모두가 금방 독립이라도 되는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시내로 퍼져나갔다.' (심지연, 송남헌 회고록(한울 펴냄), 40쪽)


이승만은 1942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몇 차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행했고, 독립을 간절히 바라던 국내 사람들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독립의 희망과 겹쳐져 울렸던 것이다.




《방송 원고》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어데서든지 내 말 듣는 이는 자세히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한 것은 제일 긴요하고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에게 일일이 전하시오. 또 다른 동포를 시켜서 모든 동포에게 다 알게 하시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2,300만의 생명의 소식이요,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악무도한 왜적의 철망, 철사 중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감옥 철창에서 백방 악형과 학대를 받는 우리 총애 남녀에게 이 소식을 전하시오. 독립의 소식이니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왜적이 저의 멸망을 재촉하느라고 미국의 준비 없는 것을 이용해서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야 여러 천 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을 미국 정부와 백성이 잊지 아니하고 보복할 결심입니다. 아직은 미국이 몇 가지 관계로 하야 대병을 동하지 아니하였으매 왜적이 양양자득하야 온 세상이 다 저희 것으로 알지마는 얼마 아니해서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일황 히로히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에 있어 애국 열사 김구,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제씨가 합심 행정하야 가는 중이며, 우리 광복군은 이청천, 김약산, 유동열, 조성환 여러 장군의 지휘하에서 총사령부를 세우고 각방으로 왜적을 항거하는 중이니, 중국 총사령장 장개석 장군과 그 부인의 원조로 군비·군물을 지배하며 정식으로 승인하야 완전한 독립국 군대의 자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미주와 하와이와 멕시코와 큐바의 각지의 우리 동포가 재정을 연속 부송하는 중이며, 따라서 군비·군물의 거대한 후원을 연속히 보내게 되리니, 우리 광복군의 수효가 날로 늘 것이며 우리 군대의 용기가 날로 자랄 것입니다. 고진감래가 쉽지 아니하나니 37년 간을 남의 나라 영지에서 숨겨서 근거를 삼고 얼고 주리며 원수를 대적하던 우리 독립군이 지금은 중국과 영·미국의 당당한 연맹군으로 왜적을 타파할 기회를 가졌으니 우리 군인의 의기와 용맹을 세계에 드러내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천추에 발포할 것이 이 기회에 있다 합니다.

우리 내지와 일본과 만주와 중국과 서백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타상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 버리시오. 언제든지 어데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순신, 임경업, 김덕령 등 우리 역사의 열렬한 명장, 의사들의 공훈으로 강포·무도한 왜적을 타파하야 저희 섬 속에 몰아넣은 것이 한 역사에 한 두번이 아니었나니 우리 민족의 용기를 발휘하는 날은 지금도 또다시 이와 같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지에서는 아직 비밀히 준비하야 숨겨 두었다가 내외의 준비가 다 되는 날에는 우리가 여기서 공포할 거이니 그제에는 일시에 일어나서 우리 금수강산에 발붙이고 있는 왜적은 일제히 함몰하고야 말 것입니다.

내가 워싱턴에서 몇몇 동포와 미국 친구·친우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정부와 교섭하는 중이매 우리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을 날이 가까워 옵니다. 승인을 얻는 대로 군비·군물의 후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희망을 가지고 이 소식을 전하니 이것이 즉 자유의 소식입니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씨의 선언과 같이 우리의 목적은 왜적을 파한 후에야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백배나 용기를 내야 우리 민족성을 세계에 한번 표시하기로 결심합시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 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파하며 준행하시오.

일후에 또다시 말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의 우리의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 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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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겨울 총독부 만찬회



장덕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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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전 (1942~1945)


이후 그는 보성전문학교의 철학, 사회과학 교수로 활동했다.


한편 그의 형 장덕준이 독립운동가이자 일제의 만행을 취재하러 만주로 가다가 암살됐고, 동생 장덕진 역시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되었으므로 요시찰인물로 간주되어 총독부 경무국은 그의 행적을 일일이 감시하였다.


1942년부터 그는 미국의 라디오 방송인 미국의 소리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했다. 이는 미국의 소리 방송에 이승만이 출연,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는 방송을 하였고, 그는 송진우, 장택상, 안재홍, 여운형, 김성수, 장택상 등과 같이 이를 비밀리에 청취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허위보도로서 각 학교의 지원자가 속출한 듯이 전하였고, 각계 지도층 인사들의 이름을 도용하여 학병 지원 권유의 담화문이라는 것을 연일수록 보도하였다.[28] 그러나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학도병 징집 실적이 좋지 않자, 총독부는 각 학교의 교수들을 소집하여 훈시를 한다. 장덕수는 소극적으로 협력하는 척 하면서 칼럼 기고 압력을 기피하는 등의 수동적인 저항을 하였다.



1943년 겨울 총독부의 오오노 학무국장과 단게 경무국장이 보성전문 전임교수 전원을 당시 부민관에서 열린 만찬회에 초대하고 학병 강요를 하고자 출석을 지시했었다.[29] 이 자리에는 당시 친일로 유명한 한국인 기업인 한상룡, 조병상도 참석했다.


회의 전에 음식과 술이 나왔지만 식사가 맛있을 리 만무하여 형식적 식사가 되었다. 그런데 장덕수는 평소에 안하던 술을 동석했던 상과 과장 이상훈에게도 권하고, 스스로 마시더니 자작자음하여 안색이 홍당무가 되었다.[30] 회의가 한참 진행 중일 때 설산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일으키며 우선 친일분자들을 꾸짖으며, 너희들이 그렇게 충성스러우면 왜 (학생들보다 먼저) 솔선수범하여 지원하지 않느냐고 하고, 다음에는 양 국장(학무국, 경무국장)을 질타하였다.[30]



너희들이 나쁜 놈들이다. 관등 하나쯤 승진하려고 그런 무리한 짓을 하고 있는데 조선 청년들이 무엇이 답답해서 일본을 위해 목숨을 던지려 나가겠는가 너희들이 그렇게 애국심에 불탄다면 연령이야 많고 적고 간에 너희들이 솔선해서 출정[30] 해야 할 것이 아닌가[31]

지원이면 지원에 맡기는 것이지 왜 강요를 하는가 만주국(滿洲國)의 생성,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權)의 형성 등등은 모두일본의 속임수에서 나온 것이고, 표방하는 아시아 제 민족의 공영(共榮)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천황은 실은 인자한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너희놈들이 잘못 보좌해서 욕을 보이는 것이다. 내가 일본의 집권자라면 이런 모든 협잡은 안시키겠으며, 만주국, 남양, 기타 대동아 각지 각민족에 대해서 정말로 공영할 정책을 취하겠다.[31]

설산은 약 40분 간이나 열변을 토했다. 그의 발언에 회의장에 참석했던 동료 교수들은 사색이 되었다.

그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그들은 그 위압에 눌리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나니 서슬이 퍼렇던 경무국장은 쥐구멍에라도 숨어야 할 처지라 몸둘 곳을 모르다가 궁여지책으로 '서울역에 손님을 맞이하러 나가겠다'고 용서를 빌면서 장화를 부지런히 찾아 신고 나갔다.[31] 학무국장은 초청자인 입장이므로 도망칠 수가 없었던지 그대로 앉아서 ;장덕수 교수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라고 때때로 장단을 맞춰 주었다. 혹은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아첨조로 응대를 하여 끊일 줄 모르게 이야기가 계속되었다.[31]



다음날 새벽 두 시에 산회하였는데, 보성전문 교수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면서 불안하고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설산의 발언이 너무나 당돌하고 강경하였으므로 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들이 앞섰다.[31]

동료들의 걱정으로는 (경무국장이라는 자가 먼저 나간 것은 실은 설산을 연행해 가기 위한 준비공작일는지 모른다.....), (내일 아침 설산을 잡으러 왜놈 형사가 학교에 쳐들어 올 것이 분명하다.)[31]


인촌을 가운데로 하여 설산과 이상훈이 광화문을 지나 북쪽으로 함께 걸어 올라갔다.[31]

인촌이 그에게 속시원하긴 해도 지나치지 않았느냐[32] 며 책망하였다. 그러나 장덕수는 제놈들이 일구이언은 못할 것이 아니냐[32] 며 받았다.


김성수 속시원하긴 해도 지나치지 않았어
장덕수 괜찮니다. 제놈들이 일구이언은 못할 것이 아니겠소
김성수 설산이 오늘 따라 술을 많이 마시기에 무엇인가 벌어질 것으로는 짐작되었지만 그 경무국자이란 놈 꽁무니 빼는 것이 가관이긴 하더군.
장덕수 저희들 입으로 (책임은 묻지 않을테니) 무슨 말이든 해보라고 했으니까 그게 후회됐겠죠. 아무튼 이런 자리에서 우리쪽 생각을 분명히 말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를 점점 더 얕잡아 볼 겁니다. 학생들이 강제로 끌려가건 강요에 따라 지원형식을 취하건 간에 왜놈들 생각과 같은 생각에서 출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못박아 줘야 합니다.
김성수 바로 그것이 중요한 점인데... 아뭏튼 설산의 그 아슬아슬한 발언에 모두들 식은 땀을 흘렸을 거요
장덕수 날씨도 추운데 땀을 흘렸다면 잘됐구먼요.[32]
설산은 크게 웃었으나 인촌과 이상훈은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32]


그의 친지들은 그를 염려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 등교한 직원들은 벌써 등교한 장덕수를 만났다. 그러나 속이 좁은 일본인들이라 결국 보복의 검거가 있을 것을 염려하였다. 하지만 좌담회를 시작할 때 약속한 고노 바쇼 가기리란 말, 즉 아무 이야기도 이 자리에 한하며 추후에 따지지 않겠다고 한 언약을 그들은 지켰다. 설산은 해방되기까지 잡혀가지도 않았고 그 발언으로 박해를 당하지도 않았다.[32]


1945년 초 조선총독부에서 요시찰로 분류된 인사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자, 그는 비밀리에 지하로 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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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286

32) 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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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日本在住 朝鮮人



[ .... 時局에 對하여 極히 冷淡한 態度를 示하고 있을 뿐아니라, 남몰래 帝國의 敗戰과 朝鮮의 獨立을 希하며 支那事變의 究極에 있어서는 日本은 國際的 孤立, 財政의 脆弱에 依해 드디어는 敗戰에 陷하며 日本帝國主義는 崩壞할 것이라 .......

...... 一擧에 朝鮮의 獨立을 實現하려고 劃策 ....... ]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12권 > 1940년 연도말 > 朝鮮總督府 警務局이 조사한 今年度

연월일 1940년

출전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Ⅲ 713-717面



朝鮮總督府 警務局이 조사한 今年度 在日韓國人의 思想槪况은 다음과 같다.


一. 槪說


1940年末에 있어서의 日本在住 朝鮮人은 1,190,444名이다. 이를 昨年末에 있어서의 961,591名에 比하면 實로 1個年間에 228,813名의 激增을 示하고, 그 增加率의 急激함은 驚嘆에 値할 것이다. 그리고 本年은 昨年부터 계속하여 勞務動員計劃實施에 따라 日本에 있어서의 勞力不足을 補充하기 위해 募集에 의해 朝鮮人 勞動者를 日本으로 移住케 하기로 하고 右에 依해 本年度에 移住한 者는 38,171名이다. 이를 本年中에 있어서의 增加數 228,813名에서 控除해도 190,642名의 增加이며 例年의 增加率은 6萬 乃至 7萬인데 대해 約3倍半의 增加에 達한 狀况이다.


이를 보건대 支那事變에 伴하여 日本에 있어서의 勞力不足을 일으키고 더하여 重工業方面의 팽창을 招來한 탓으로 自然 朝鮮人 勞動者의 需要가 많아진 것과 他面 1939年 以降 朝鮮側에서 日本渡航證明書의 發給을 相當 緩和하게된 結果에 基因하는 것으로 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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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學生狀况


日本에 在學하는 朝鮮人 學生은 逐年增加하고 있으며 1940年末에 있어서의 在住朝鮮人 學生은 20,824名이다. 이에 小學兒童 129,513名을 加하면 150,337名이다.

이를 昨年末의 16,304名에 比하면 4,520名의 增加를 示하며, 또 1940年末에 있어서의 7,251名에 比하면 僅僅數年에 13,573名의 增加를 示하였다. 그리고 在住朝鮮人 學生은 그 半數 以上인 11,318名은 東京에 在學하고 大阪府의 3,054名, 京都府의 1,725名이 이에 버금한다. 又 이를 學校別로 觀하면 官立大學 261名, 私立大學 2,044名, 高等學校 又는 專門學校 3,624名, 中等學校 14,895名이다.


이와 같이 學에 志하고 鄕關을 出하여 日本에 渡來한 學生이 逐年增加함은 鮮內에 있어서의 德政普及에 伴하여 逐次 朝鮮人의 民度가 向上하여 그 向學心이 昂揚하고 있는 證左라 看되는 바이다.

그러나 이들 學生中에는 本籍地로부터 學費의 全額을 補給받지 못한 까닭에 渡來 便宜處에서 稼動하여 苦學하고 있는 者가 相當히 있다.


그리고 朝鮮人 學生은 授業料의 滯納으로 學校當局과의 사이에 問題를 起하고 또는 宿料不拂問題등을 生하여 或은 日本에 渡來한 것으로해서 갑자기 比較的 自由로운 生活을 許한 바 되어 自然 遊興에 耽하고 乃至는 日本人 婦女子와의 사이에 재미없는 風紀問題가 起하고 있다. 이리하여 學業 中途에 勞動者의 群에 投하고 或은 犯罪者 乃至 不良의 徒로 化하는 者가 相當히 있다. 甚한 것은 民族的 偏見을 挑發하여 思想運動에 狂奔하기에 이르는 등 이의 就學狀况은 總體的으로 觀하여 반드시 良好하다고는 認치 못하며 就中 彼等의 想思動向은 極히 注目할 것이 있다. 即, 彼等은 現下 朝鮮人의 生活狀態 其他 社會的 環境을 觀하고 所謂 直譯的으로 批判을 下하여 內鮮間에 甚한 差別이 있다고 論斷하여 필경 이는 朝鮮이 日本에 隷屬하는 까닭이라고 하며 敎育이 高度化하는데 伴하여 이러한 民族的 偏見은 더욱 拍車되는 것 같으며 將히 一部 民族急進分子 등은 執拗矯激한 策動을 逞하며 自己의 抱負를 朝鮮民族解放에 獻身할 것이라하여 所謂 救民的 英雄을 흉내내어 一般 在住學生에 대해 方途를 凝하여 그 啓蒙에 奔走하고 있다. 他面 一般 學生에 있어서는 積極的으로 斯種運動에 投하지 않으나 彼等의 策動에 依存하고 內心 其成就를 期待하며 觀望的 動向을 示하고 있는 것도 認되는 바이며 彼等의 策動에 대해 眞히 日本人의 觀念에서 이를 絶對的으로 排擊코자 하는 것 같은 動向은 極히 稀하다.


그리고 朝鮮人 學生의 思想運動의 胚胎하는 곳은 대개 各學校에 있어서의 朝鮮人學生留學生會이다. 從來 朝鮮人이 在學하는 學校에는 必히 朝鮮人學生의 團體가 있어 本年末에는 93團體, 會員 10,897名이다. 이 朝鮮人學生의 團體에서 彼等은 朝鮮人留學生會 或은 學友會 等의 名稱을 使用하고 있어 對日本的으로 마치 自己 等이 外國人인 것 같은 態度를 表示하고 있었다. 또 이들 學生團體는 從來부더 日本在住 朝鮮人의 民族主義 乃至 共產主義 等 思想運動의 源泉이 되고 있으며, 또 鮮內에 있어서의 思想運動에 對한 指導的 役割도 演하고 있는 바로서 가장 注目을 要하는 바이다.


今次 支那事變에 當하여도 在住朝鮮人 學生의 動向은 極히 寒心한 動向에 있다. 即, 彼等은 偏狹한 民族意識을 固執하고 時局에 對해 極히 冷淡한 態度를 持續하고 그 動向은 相當 容疑의 點이 있다. 事變下 朝鮮人의 思想 運動의 거의 全部가 學生層에 依해 策動되고 있는 實情이다. 이와같이 學生生徒의 思想動向이 재미없음은 彼等이 學校 卒業後 日本에서는 勿論 鮮內에서도 就職은 極히 困難한 것과 將來에 對한 希望을 갖지못하는 것 등이 큰 原因이 되고있는 것으로 認되는 바로서 將來 學生問題에 對하여는 相當 考究한 뒤에 適切한 對策을 樹立할 必要가 있는 것으로 思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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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思想運動의 狀况


朝鮮人의 思想運動은 民族主義, 共産主義, 無政府主義 等 一應 各種主義系統으로 別하는 策動을 表現하고 있으나, 그 基因하는 바는 대개, 潜在하는 民族意識에 温釀되어 所謂 民族的 反感에서 出發하는 것이며 이의 策動은 極히 執拗한 特異性을 持하였다.


그리고 日本在住 朝鮮人의 思想運動은 滿洲事變을 契機로 하여 1939年까지는 해마다 萎微衰退의 趨向을 걷고 있었으나 本年은 갑자기 活潑한 策動을 展開하는 바 있었다. 即, 이의 狀况을 檢擧人員에 就하여 觀컨대 1933年은 總檢擧人員 1,820名을 算하여 是를 最高로 하여 1934年은 884名, 1936年은 193名, 1938年은 117名, 1939年은 50名으로 해마다 遞減되었으나 本年은 165名을 算하며 昨年度의 3倍를 凌駕하였다.


由來 朝鮮人의 思想運動은 極히 執拗한 特異性이 있어 一面에서는 彼等은 所謂 事大思想에 基한 客觀情勢를 凝視하고 其의 如何에 따라 或은 蟄伏하고 或은 擡頭하는 等 巧히 其進出의 機를 窺하고 있는 實情이며, 特히 現時局下에서는 이의 動向은 前途 全히 閑却을 不許하는 것은 痛感하는 바이다.


本年中에 있어서의 在住朝鮮人의 思想運動을 槪觀하면 各種主義別 各各의 分野을 通해 相當 活潑化한 傾向을 示하며 그중 所謂 純然한 民族主義運動이 현저히 擡頭한 것은 注目할 必要가 있는 바이다. 또 이의 策動分子를 職業別로 觀컨대 檢擧人員 165名中 72名은 學生이며 思想運動의 大半은 學生層을 中心으로 하는 것이다. 即 朝鮮人學生層에 있어서는 事變發生 以來 極히 偏狹한 民族的 偏見下에 時局을 歪曲하는 見解를 採하고 時局에 對하여 極히 冷淡한 態度를 示하고 있을 뿐아니라, 남몰래 帝國의 敗戰과 朝鮮의 獨立을 希하며 支那事變의 究極에 있어서는 日本은 國際的 孤立, 財政의 脆弱에 依해 드디어는 敗戰에 陷하며 日本帝國主義는 崩壞할 것이라 하여 此機會에 一擧에 朝鮮의 獨立을 實現하려고 劃策하고 있다. 特히 本年은 各種經濟統制의 强化에 伴하여 物資의 需給에 不圓滑의 部面을 派生함과 乃至는 帝國의 國際關係의 復雜化 등의 事情에 對해 彼等은 이를 歪曲批判하여 위와 같은 見解를 더욱 信念化하기에 이른것 같고 그 策動은 현저히 活潑化한 바 있었다. 이들에 對하여는 嚴重한 警戒 取締를 加하였다.


2. 民族主義運動의 狀况


一. 槪說


朝鮮人의 民族主義運動은 極히 執拗하여 隨時 그 客觀情勢에 應하여 或은 擡頭하고 或은 蟄伏潜在하는 등 巧히 客觀情勢를 利用하고 又는 他運動에 便乘하여 策動을 持續하고 있는 實情으로 表面 好轉化하였다고 말하나 아직 樂觀을 難許하는 것이 있다. 即, 일찌기 滿洲事變의 勃發에 依해 當時 彼等은 我國力의 强大함을 直視하고 帝國信倚의 念 乃至 威服의 念을 抱하게 되어 그 對日感情은 一應 현저히 好轉된 것인양 認되었으나 마침 帝都反亂事件의 勃發을 보자, 帝國의 政治 中樞部에 動搖가 있다고 妄斷하고 그 信倚의 念에 些의 龜裂을 生케 된 것과 같이 갑자기 思想運動은 活氣를 呈하는 등의 事가 있었고, 또 今次 支那事變의 勃發에 依해 再次 帝國의 强大한 國力을 感得하고 一般 朝鮮人은 思想上 重大한 영향을 받아 이에 依해 皇民된 自覺을 一層 强하게한듯 一應 그 動向은 好轉을 示하고 民族主義運動에서도 一應 沈衰한 것 같이 認되었다.


그러나 學生層, 知識階層, 宗敎家方面에 있어서는 民族的 偏見을 固執하고 毫도 覺醒하지 않을 뿐 아니라, 支那事變을 觀望하고 남몰래 帝國의 敗戰과 朝鮮의 獨立을 希하고 各種劃策을 하고 있어 이의 動向은 相當 注意警戒의 必要가 있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本年에 있어서는 民族主義運動은 갑자기 活潑化를 加하고 愛知縣에서 檢擧한 「民族復興會事件」 警視廳에서 檢擧한「平安그룹事件」등과 같은 共産主義를 排擊하고 民族自決에 의한 獨立運動을 謳歌하고 있던 等 所謂 純然한 民族主義運動이 表面化한 것이 2, 3에 不止하는 狀况이다. 이를 要컨대 敍上과 같이 朝鮮人의 民族主義運動은 客觀情勢를 凝視하고 그 進出의 機를 窺偷하고 있는데 支那事變의 勃發에 依해 一應 沈衰하였으나 事變이 長期化하는데 件하여 特히 本年은 經濟統制에 伴하여 마침 諸物資配給의 不圓滑의 部面을 派生한 바 이를 觀察하고 이들 民族主義分子는 日本의 國力이 低下한 證左라 妄斷하고 事變過程에서 日本은 國內混亂을 招할 것이며 그 機會에 朝鮮獨立을 위해 蜂起할 것이라하여 今이야말로 朝鮮獨立을 위해 朝鮮民族은 自決하여야 한다고 모든 劃策을 推展하게 된 것으로 認되는 바이다.
그리고 本運動은 事變의 長期化에 伴하여 더욱 活潑化하기에 이르지 않나하는 趨向이 認되며 이의 査察警戒는 더욱 强化의 要있음을 痛感하였다.
2023-07-28 16: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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