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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승만 2
청년 이승만 2023-04-01 17:38:42 | 조회: 220
1945.12.31.



[ ...... 서울 시내 상점은 거의 문을 닫고, 동대문 뒷산이 하얗게 덮일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어요. ........

...... 좌도 없고 우도 없고 완전히 자연발생적이었습니다 ........ ]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삼상회의 보도

200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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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탁을 반동으로 몰던 그들인데…


“12월 31일 서울운동장에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을 때 서울 시내 상점은 거의 문을 닫고, 동대문 뒷산이 하얗게 덮일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어요. 반탁운동은 누가 계획하고 주도해서 일어난 게 결코 아닙니다. 좌도 없고 우도 없고 완전히 자연발생적이었습니다.”


경교장 모임에도 참석했던 강원용 목사는 올해 초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2월 29일 경교장에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됐다. 각계 인사로 구성된 중앙위원 76명 중엔 박헌영 홍남표 이극로 김세용 같은 좌익 지도자들도 다수 포함됐다. 그와 동시에 좌익단체와 좌익인사들의 반탁 담화와 성명이 줄을 이었다. 12월 30일엔 40여 개의 좌익단체가 모여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결성대회를 갖고 신탁통치안철폐요구성명서를 채택했다.


● 찬탁을 반동으로 몰던 그들인데…


이 성명서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반동분자들이 갈망하는 신탁통치는 결코 실현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그 시점엔 좌익에게 있어서도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사람은 ‘반동분자’임이 분명했다. 조선공산당 서울시위원회는 12월 31일까지도 반탁 전단을 살포했다. 이쯤에서 확실히 가릴 것이 있다. 그것은 신탁통치를 제의한 쪽이 소련이었다고 해서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가 더 커졌다고 해석하는 논리는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좌익도 초기엔 신탁통치 자체를 반대했지 그것을 어느 쪽이 제의했느냐는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던 좌익의 태도가 해를 넘기면서 돌변했다. 1946년 1월 3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돌연 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담화문을 발표했다. 1월 4일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도 뒤를 따랐다. 이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은 1월 5일 기자회견에서 “김구 씨의 반탁데모는 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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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70000000600/3/all/20041212/8138197/1






[ ...... 시민들이 총동원을 하고 군정관리들이 그 뭐 거의 다 사표를 내버리고 서울 시에 있는 경찰서장들이 시외 경찰들이 사표를 ......... ]



이철승 편

제7회 신탁통치의 급보와 영도자들의 동향


1965.04.09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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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제 우리는 서울 운동장에서 전 시가 철수를 하고 12월30일 날 반탁 총궐기대회를 하지않았습니까? 그 당시에 뭐 시민들이 총동원을 하고 군정관리들이 그 뭐 거의 다 사표를 내버리고 서울 시에 있는 경찰서장들이 시외 경찰들이 사표를 냈으니깐요.


네 그리고 나니까 조병욱박사가 참 여기서 한가지 얘기하고 싶은것은 조박사는 당시 경무부장이란 말이죠. 그 경무부장의 입장이 고약하단 말이야. 그래서 가운데서 샌드위치에요. 우익에서는 우익대로 반탁을 하고 하치중장은 사령관으로서 미국과 소련이 국제회의에서 결정한 신탁을 말에요 우리가 반대하니까 그사람 그 중무장관을 통해서 질서를 위계해라. 또 반대를 못하게 해라. 이런 입장이 있고 그러니깐 그 양반이 가운데서 입장이 곤란한 입장이였단 말이지


특히 임시정부의 신이치가 포고 내무부장이었던 그때 내무부장 포고 1호 2호를 내가지고 적 쏜다고 포고를 해버렸는데요 바로 우리정부 행세를 한다고 그러니깐 하치가 조박사를 불러가지고 임정을 갔다가 그냥 추방시키겠다. 이 조박사가 하치한테 삶아가지고 결국 임정을 추방하더니 더 직설을 혼란할 작정이요 난 감당 못하겠소 우리 조국 광복을 위했던 이런분을 추방하다니 이런 반탁은 민중의 자유의사 아니요 이게 민주주의의 씨 프링스프런이 아니요 이렇게 하치한테 따지니깐 그 하치는 그걸 조박사 말씀을 들었다는 거에요 심지어 조박사한테 나중에 들었습니다만은 하치 사령관이 …도망갔기 때문에 군정관리 밥을 못먹었다는 그런 그 애피소드를 들은바 있습니다.



-하여튼 한국인 종업원 일체가 전부 파워를 했…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요 그러다가 그 1월3일날 그 민족 통일 자주 독립 촉성 서울 시민대회든가요? 그런 이름으로서 그 자익계통에서 서울 운동장에서 궐기 대회를 한다그랬어요. 그러니깐 전부 시민들이 1월 3일날 전부 거기 가지 않았겠습니까?

그 대대동호에서 근 십만명이 왔다. 서울 운동장에 그러다 보니깐 별안간 그 사람들이 우리는 자중해야 하고 우리는 그 감정적으로 하면 안되고 이 신탁통치를 반대한다. 이러는 그 연설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난리가 나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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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 모두는 신탁통치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이 日帝의 지배와 너무 유사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이를 격렬히 비난하였다 ......... ]



美軍政의 政策과 國內政治狀況

金 雲 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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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信託統治問題와 美·蘇 共委에 대한 美軍政의 對應



한국인이 解放의 實體를 올바로 파악하기 시작한 것은 신탁통치 소식에 접하면서부터이다. 한국에 5년 동안 신탁통치가 실시될 것이라는 모스크바 三相會議 決定書 내용이 처음으로 국내에 보도되자, 한국인은 이때부터 해방이 반드시 즉시 독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강력하게 전개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37) 당시 좌·우익을 포함한 한국인 모두는 신탁통치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이 日帝의 지배와 너무 유사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이를 격렬히 비난하였다.38)


그렇지만 좌익측이 1946년 1월 2일 蘇聯의 指令에 의해 신탁통치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갑 작스럽게 바꾸자,39) 새로운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후 좌·우익은 각기 신탁통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논리40)를 전개하면서 격렬하게 대립하였고, 마침내 이들의 대립은 감정의 싸움으로까지 深化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해방 정국이 信託統治 論爭으로 인해 昏迷를 거듭하자, 누구보다도 가장 곤혹스러운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은 바로 美軍政이었다. 왜냐하면 본국 정부의 國務長官이 참석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인이 이토록 격렬하게 반대하는 신탁통치 결정이 내려졌으므로 미군정은 본국 정부의 對韓政策과 한국인의 民族主義的인 感情 사이에서 뚜렷한 묘안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군정은 자신과 정치적인 이념을 같이 하는 우익 세력이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오히려 자신이 견제해야 될 세력인 좌익이 신탁통치에 찬성하였기 때문에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統治權을 행사해야 될 미군정의 입장에서 볼 때, 좌·우익이 신탁통치 문제로 인해 극도로 분열·대립되어 政局의 緊張을 초래하는 것 자체가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했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미군정의 이와 같은 우려는 金九가 이끄는 臨政 세력에 의해 現實化되기 시작했다. 反託 運動을 가장 먼저 주도한 김구는 이 운동에 대해 국민들이 절대적으로 호응하자, 이 기회를 이용해 臨時政府의 名義로 정부의 기능을 수행하려고 기도하
였다. 이러한 기도는 ‘臨時政府 布告第 1號’를 발표함으로써 비롯되었는데, 이 포고의 제1항은 “현재 전국 軍政廳 소속의 警察 機構 及 韓人 職員은 전부 본 임시정부 지휘하에 예속케 함”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41) 이것은 바로 미군정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서, 미군정은 이를 ‘쿠데타’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42)


때문에 미군정으로서는 이러한 金九의 企圖를 분쇄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군정이 이에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대처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했다. 바로 이와같은 상황에서 발표된 것이 번즈(James F. Byrnes) 美 國務長官의 성명이었다. 번즈는
‘임시정부 포고 제 1호’가 발표된 바로 그 날(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한국 내의 사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한국의 臨時 民主 政府와 함께 일할 美·蘇 共 同委員會가 신탁통치의 폐지 가능성을 발견할지도 모른다”고 言明하였던 것이다.43) 이 성
명은 김구 세력의 反託 熱氣는 물론 쿠데타 기도까지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는 데에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그 이튿날 臨政의 宣傳部長인 嚴恒燮이 “앞으로 반탁 운동은 평화적 인 방법으로 수행할 것”이라고 발표44)한 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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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1.


[ ......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 ........ ]



美軍政의 韓國政治指導者에 對한 政策硏究 (1945〜1948)

李 仁 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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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美國務省은 10월 9일, 점령군의 철수문제는 統韓 獨立政府樹立問題 解決의 필수적 부분으로 알고 있으며 소련제의에 대해 유엔총회의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回信하였다.139) 그리고 유엔의 미국대표는 10월 17일, 臨時委員團의 감시아래 남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人口比例로 대표를 선출하고 국회와 정부를 수립해서 이 정부로 하여금 防衛軍을 조직하게 한 다음 占領軍을 철수하게 한다는 決議案을 제출하였으며 총회는 11월 14일 이 안을 採擇하였다.140) 그동안 소련에 대한 美側의 宥和政策으로 인해 북한을 共產化하고 남한마저 赤化하려는 소련의 팽창정책에 守勢만을 지키던 미국은 이제야 유엔을 통한 外交로 信託統治가 아닌 民族自決主義 原則에 입각한 한국의 통일독립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16萬의 赤軍을 투입하여 이미 共產政權을 수립해 놓고 있는 소련이 비록 유엔의 決議라 하여도 共產化를 막게 할 自由選擧를 북한에서 거부할것은 國際間 權力政治를 아는 사람이면 추측이 가능하였고, 그것은 통일을 갈망하는 한국민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한 것은 물론이다. 그동안 信託統治를 반대하며 즉시 독립을 주장해 온 민족진영에서는 이 유엔의 결의를 크게 환영하였으나 韓國獨立黨을 중심으로 하는 各 政黨協議會는 美蘇兩軍의 철퇴를 요구하며 南北政黨의 대표회의를 구성하여 統一政府를 세우라고 주장하였다.141) 이와 같이 金九를 추종하는 韓國獨立黨系列에서는 계속해서 선거를 기피하며 共產黨의 주장과 같이 兩軍撤收와
南北韓政黨代表들의 卓上會議로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1월 21일, 民族陣營 70개단체들이 이러한 주장은 共產黨의 대변자로 볼 수밖에 없다고 규탄하자 金九는 이 주장을 보류하게 하였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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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國後 李承晚과 政治路線을 같이 하면서도 그의 追從者들과 獨自的 路線을 취하기도 하였던 金九는 유엔選擧案을 반대하는 주장이 규탄을 받게되자 12월 1일 대체로 유엔의 안을 찬성하면서 이승만의 선거를 통한 政府樹立案을 支持하는 談話를 발표하였다.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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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承晩 1,024표 .... △朴憲永 62표, △金日成 33표 ......... ]



동아일보 1948년 06월 27일

조선여론협회, 초대대통령 선출 가두여론조사



조선 여론협회에서는 23일 서울시내 5개소에서 초대 대통령은 누구를 원하오하는 설문으로 통행인 1천5백명의 여론을 조사한 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李承晩 1,024표, △金九 568표, △徐載弼 118표, △金奎植 89표, △朴憲永 62표, △金日成 33표, △許憲 30표, △李靑天 26표, △曺奉岩 18표, △申翼熙 12표, △이외 23명 45표, △무효 475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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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상전인 소련의 지령으로 선거를 반대하고 있다. 그들은 절대적인 공산당의 형식과 지배 이외에는 여하한 형식의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를 원하지 않는다. 왜그러냐 하면 그들은 선거를 행하면 자기의 국가를 공산주의의 일위성국가로 팔아 먹고자 하는 조선인의 수효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될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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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대한 사실은 공산당과 밑走狗들의 선거에 대한 모든 선전 및 위반 또는 선거를 배척하고 반대하는 자들의 온갖 수단에도 불구하고 남조선내의 전유권자의 90% 이상이 등록을 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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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인민공화국’ ....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 ........

...... 공산당의 朴憲永도 이승만의 귀국 후 그를 찾아가 당수가 되어 줄 것을 요청 ........... ]



[ ...... 국회의장으로 .... 재석 198명 중에서 188표를 .....대통령선거에서도 180표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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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3·1 운동 직후 수립된 漢城임시정부에서 執權官總裁, 統合임시정부 임시대통령,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블라디보스톡임시정부 국무총리 등으로 선출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李王家의 후예, 미국과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한국인 최초의 미국 프린스턴대학 정치학박사 등의 화려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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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방송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9월 5일에 전국인민대표회의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정부수립을 선포했던 呂運亨이 9월 14일 발표한 조각에서 김구·허헌·김규식·여운형 등 국내외의 지도적 정치가들을 모두 망라한 중에서도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한 것은, 이승만이 귀국하기 이전에도 그는 국내 정치인들 로부터 가장 높은 위치의 정치인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3)


또한 공산당의 朴憲永도 이승만의 귀국 후 그를 찾아가 당수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으며,4) 우익세력의 최대정당이었던 韓民黨도 1945년 9월 16일의 창당대회에서 이승만을 서재필·김구·이시영·문창범·권동진·오세창 등과 함께 당의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외에도 1945년 11월 2일에 좌우익의 모든 정당 및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獨立促成中央協議會 에서도 이승만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5)


1946년 2 월 미 군정하에서 공산당을 제외한 임시정부요인, 한민당, 신한민족당, 국민당, 인민당, 무소속,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모든 정치세력들이 참가한 비상국민회의 최고위원회가 성립되었다.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으로 구성된 민주의원은 처음에는 하지중장의 자문기관으로 발족하였으나 곧 정부수립을 준비하는 과도정부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비상국민회의 최고위원회에서도 이승만 은 민주의원의 의장으로, 김규식은 부의장으로, 그리고 김구는 총무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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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5·10선거로 수립된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될 때에도 재석 198명 중에서 188표를 얻어 당선된 점이라던가 대통령선거에서도 180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당선된 것들은 당시의 정치인들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이승만의 집권은 이변이 아니라 정상적인 절차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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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24.



"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입력 : 2009.06.29 03:23 / 수정 : 2009.06.30 10:03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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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 ]


[ ..... 미군은 ...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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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소련군과 분할 점령을 위해 군사분계선으로 38선을 책정한 것은 이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38선을 책정한 사실이 곧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終戰(종전) 직후의 서독과 오스트리아에서 확인된다. 서독에는 美·英·佛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는 美·英·佛·蘇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으나 그것이 곧바로 국토분단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광복 직후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38선을 순수한 군사분계선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데 반하여,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38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켰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스탈린은 1945년 9월20일 비밀지령에서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정권의 수립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10월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고, 이어 이북5도행정위원회를 수립한 뒤 산하에 10개 행정국을 두었다. 이는 북한에 이미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소련은 金日成을 내세워 북한지역에서 1946년 2월에 토지개혁과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뿐만이 아니다. 미군은 美·蘇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몇 차례 단절된 남북 간의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남북한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미국이 남한지역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지역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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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익진영은 ... 통일만 주장했을 뿐 .... 남북한간 교통 통신 단절의 해제를 주장해본 일이 단 한번도 없다 ....... ]



1945.10.


무조건 단결과 38선 철폐를 주장




해방정국에서의 우익진영의 초기 열세는 45년 10월 중순 이승만이 귀국하면서부터 다소 만회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귀국과 동시에 민족의 무조건 단결과 38선 철폐를 주장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장기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옴으로써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로 알려진 이승만이 귀국과 함께 천명한 2가지 사항은 대중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동안 공산당과 좌익으로부터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아온 한민당은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인 이승만의 “먼저 단결하여 완전독립을 달성하고 그 다음에 친일파 문제를 정당한 절차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 구원받게 되었다.


또한 이승만이 38선 철폐를 공공연하게 주장해줌으로써 소련의 행동은 무엇이나 옳다고 옹호하고 따라서 38선을 경계로 남북한간 교통 통신을 일방적으로 단절시킨 소련의 조치도 옹호해온 공산당의 입장을 수세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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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귀국 이후 우익진영은 기회 있을 때마다 38선의 철폐를 주장하고, 38선을 경계로 소련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남북한 주민간 교통 통신 단절을 해제할 것을 반복하여 주장했다.


그에 반해 좌익진영은 48년 남북한에 2개의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통일만 주장했을 뿐 38선을 경계로 남북한간 교통 통신 단절의 해제를 주장해본 일이 단 한번도 없다.

좌익진영은 단지 남한에서도 북한에서와 같이 인민위원회에 정권을 넘겨주고 친일파 숙청과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면, 다시 말해서 남한사회가 북한사회처럼 되면 38선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고만 주장했다.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해방정국의 좌·우익 중 어느 쪽이 보다 자주적이며 통일지향적이었던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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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0.14.



김일성을 고발한다

김일성 직속 기자의 수기 8


한재덕

고당의 명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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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대회에서도 '로마넹코' 소장이 '다와리시치'(동무) 김일성을 소개하고 그가 마치 일제와 가장 영웅적으로 싸운 최고의 애국자인 듯이 장황하게 늘어 놓고 "이러한 애국영웅을 지도자로 맞이하는 조선 민족을 축복한다"는 환영사인지 축사인지 모를 독단적 연설을 내리 읽었다. 후일 입증된 바와 같이 그실 이것은 이 김일성을 자기들의 공산위성국=북한의 영주로 임명하는 '사령장'의 낭독인 셈이었던 것이다.



이 날 조만식 선생도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어차피 연설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조선생은 전날 밤과 같이 김일성에 대해서는 마지 못해서 그를 환영한다고 간단히 언급한 다음 자기가 일상 생각하고 있던 바를 이 기회에 한마디 하련다고 전제하고 일장의 연설을 베풀었다.사람들은 오래 간만에 대망의 조만식 선생의 열변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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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하여간 지금도 기억나는 고당의 연설의 한 항목에 이런 것이 있었다.



" 일제시대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 보고 하도 못살게 굴다 못해 나중에는 정오 싸이렌이 나면 어디서든지 엄숙히 서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묵도를 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이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정오 싸이렌 때마다 엄숙히 서서 하나님께 빈것은 일제의 무운장구가 아니라 일제가 하루 빨리 망하게 해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불의하고 무리한 일제의 뱃심 좋은 소원을 들어 주신것이 아니라 우리들 약소민족의 지당하고도 절실한 염원을 들어 주셨다. 그 어떤 자라도 사람의 마음까지를 정복할 수는 없는 것이며 정당한 염원은 하나님의 은덕으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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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62.5.10.목요일.






1945.11.23. 신의주 의거



전국학련 ―나의 학생운동 이철승<제47화>


[중앙일보] 1975.08.27



< 신의주 학생사건 >



남한에서의 학생운동이 「반탁」의 기치를 들고 확대되기 이전 북녘땅 신의주에서는 소련점령군의 만행에 항거하는 학생의거가 전개됐다.



소련점령군에 항거…「자치대」결성 |11월23일 의거에 24명 죽고 3백50명 중상 | 일부학생들 월남…반탁투쟁에 활력소



그러니까 1945년 11월23일. 이날 의거에 나섰던 신의주학생들중 일부는 뒤에 사선을 넘어와 월남학생을 거점으로해서 반공대열에 나섰고 이것은 반공·반탁투쟁에 활력소를 불어 넣었다.

신의주학생의거의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소련 점령군의 만행과 약탈.


1945년8윌20일 성진, 21일 원산과 함흥, 23일 개성, 24일 평양, 30일 신의주등으로 진주해온 소련군은 선진강대국의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서의 행패를 부렸다.


살인 폭행 강간 강도 약탈 무전취식이 백주의 노상에서 자행됐고 이와같은 만행은 함흥 신의주 평양등 소군이 진주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새로운 질서」인냥 횡행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신성해야 할 학원도 소련군의 병영이나 공산당의 정치훈련소로 징발됐다. 여기서 오랫동안 기독교적 저항정신과 강인한 서북기질로 다져진 학생들의 울분이 폭발했다. 11월3일의 광주학생의거일을 맞아 신의주학생들은 기념식을 갖고 학생대표들이 제일공업학교 강당에 모여 「평북학생자치대」를 결성했다.


날로 불안해져가는 정정속에서 학원·학생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켜 보자는 뜻에 자치대가 결성됐다.



이 자치대의 한 대표가 11월21일 상오10시 「용암포 주둔 소련군 위로환영대회」에 참석하게 됐다.
대회는 각본에 따라 몇 사람의 아부발언이 진행됐다.

그러나 막상 학생계를 대표하여 학생자치대대표가 연단에 나서자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여러분, 해방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피땀 흘려 거두어 들인 곡식을 약탈해가는 자들이 해방군입니까. 공공건물과 심지어 학생들의 배움의 터전인 학교건물까지 징발하여 자기들의 노략질 창고로 쓰는 자들이 해방군인입니까. 그 해방군들은 짐승처럼 이 겨례의 순박한 처녀를 짓밟았습니다. 우리의 쌀뒤주를 뒤졌습니다.』


이 선동연설은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사태는 순식간에 악화됐다. 좌우학생이 격돌했고 공산당원들이 이에 가세했다. 12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괭이와 몽둥이질에 중상을 입었고 이를 말리던 제일교회 홍석황장로가 그자리에서 타살됐다.


이 비보는 삽시간에 신의주시내로 번졌다.


학생대표들은 윤순호군(당시제일공업대표)집에 모여 긴급회의를 열고 사후대책을 논의, 22일에 항의「데모」를 갖기로 했다. 노송동 동중강당에서 박선봉(평안중대표·재미) 윤순호 이도명(제일공업·교육계) 조병건·이신일(제이공업대표)등 학생대표들이 당시 도학무국장 함석헌씨를 만나 이 거사를 귀띔했다. 그러자 함선생은 『의로운 일은 그 누구의 힘으로도 막지 못한다』고 격려를 해주어 대표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거사일은 23일, 그리고 H「아워」는 하오2시로 굳혔다.전시내의 6개학교가 행동목표도 분담했다.
동중과 제일공업은 인민위원회 보안부를, 사범과 제이공업은 공산당본부를, 신의주보안서는 평안중과 상업학교를 각기 맡기로 했다.



압록강넘어 대륙에서 몰아쳐오는 강바람이 유난히 매서웠던 그날 하오2시. 동중과 제일 공업은 『학원의 자유를 침범말라』『피난민 구제기금 착복자 나오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도보안부를 겹겹이 에워쌌다.

그리고는 동중은 정문을, 제일공업은 후문을 타고 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보안부대에서의 무차별사격이 이루어졌다. 동중 이정직군이 쓰러졌다. 같이 담을 넘은 지남선 임춘주 양군은 피투성이가 된 이군을 끌어안고 강안역까지 도망을 쳤다. 「탱크」포가 터지고 상공에는 소군 「야크」전투기가 낮게 떠서 기총소사를 시작했다. 이 습격에서 이정식 백광진 조도우등 13명의 학생들이 죽고 8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한편 공산당본부로 갔던 제이공업과 사범학생들도 김의준 장원봉등 11명의 학생들이 생명을 앗기고 당시 제이공업기계과 2년 김장흥군은 악착같이 추격해오는 소련군을 피해 압록강철교를 줄달음 치다가 그만 푸른 강심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희생은 평안중학과 상업학교에서도 났다.


당일 피살자는 모두 21명, 중상자 3백50명…공산당과 소련군사령부에서는 혈안이 되어 학생들을 잡아 가두었으며 체포구금된자 1천여명중에서 2백여명은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냈다.


뒷날 내가 반탁학생연맹을 이끌며 반탁운동을 벌였을때 나의 좌우에서 고락을 같이한 동지중에는 신의주를 중심한 서북지역출신이 많았다. 장익삼·박선봉·김득신·최찬영·김기석·이범석·김호영·이미수·윤영환·차장준·차순학군등은 서북학생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19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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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 중심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탁 운동을 벌이던 조만식은 뜻을 바꾸지 않았고, 신탁통치 협정문 안건에 관한 사회를 거부함으로써 북조선에서 정권을 잡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 곧바로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서 축출된 뒤 조만식은 결국 1월 5일부터 연금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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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1.18. 재경서북인, 38선 철폐촉진대회 개최



[ ...... 북위 38도 이북의 소련점령지역에서 특히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를 확보케 하며 ........


..... 일당일파의 專管을 불허하며 ..... 인민위원회에 구속된 조선인정치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며 ......... ]


재경서북인, 38선 철폐촉진대회 개최


게재지명 중앙신문
게재일자 1945년 11월 19일
날짜 1945년 11월 18일




方應謨 외 여러 재경 서북인유지의 발기로 그 간 준비하여 온 북위 38도 철폐 촉진대회는 18일 오후 1시부터 시내 천도교당에서 서북출신 5백여명이 참집한 가운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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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수뇌부에 발송할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 決議文


我朝鮮의 해방을 위하여 일본을 타도한 연합제국에 대하여 감사의 의를 표함. 그러나 북위 38도를 남북으로 미·소 양군이 분단점령한 것은 조선의 자주민족통일국가 완수상 절대지장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생활상 불안 불편이 막대하므로 빨리 장벽을 철폐하여 행정상, 경제상, 교통상 통일을 촉구한다.


一. 북위 38도 이북의 소련점령지역에서 특히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를 확보케 하며 일본정부로부터 행정 사법기관 등을 접수함에 있어서 일당일파의 專管을 불허하며 8월 15일 이후 현존한 인민위원회에 구속된 조선인정치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며 소군의 불합리한 양곡, 의류, 기계 등 물자를 조선 외로 수출하는 것을 소련당국에 탄원함

附帶決議 右決議를 연합국 수뇌자에게 타전함


1945년 11월 18일
在京西北人大會






1945.11. 평양



[ ..... "철의 장막"이나 "참대의 장막"은 .... 지방과 지방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늘 ........ ]



[ .... 평양민보에는 ... 검열과 지도를 위하여 쏘모프라는 젊은 군인 ........

.... 쏘모프가 ... "신의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못들었느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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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11월 23일" 신의주학생반공의거사건 당시 나는 아직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기관지라고 하지만 그실은 소련사령부와 공산당의 지시하에 움직이는 "평양민보"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있었다.......


평양에 하나밖에 없는 신문사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신의주 사건을 어설프게나마 비로소 알게 된 것은 11월 25일경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는 철도도 소련사람들이 장악하고 제멋대로 운영하고 특히 약탈물자반출운전이 위주였기 때문에 각지간의 교통의 불편이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방의 뉴스가 평양에 전해지는 것도 아주 느리었던 것이다.


그런데다 이 사건이 폭발하자 소련군정당국과 공산괴뢰들은 그것이 딴지방에 파급될까 당황하고 질겁을 하여 이 뉴스가 퍼져 나가는 것을 백방으로 저지하기에 애를 썼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이 소식이 알려지는 것이 훨씬 늦었거나 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아니 그 당시에는 이것을 전연 모르고 지낸 사람도 허다 하였으며 모름지기 오늘도 북한동포 가운데는 아직도 이것을 일체 모르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공산 통치자들의 뉴스 통제책이란 그렇게도 철저한 것이다. "철의 장막"이나 "참대의 장막"은 공산세계와 자유세계 사이에만 쳐지는 것이 아니라 공산사회내부의 지방과 지방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늘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있는 일은 내가 이 사건을 비로소 주워 듣게 된 것은 이 뉴스를 막으려는 소련 사람들의 통제조치 때문에 도리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당시 평양민보에는 소련사령부로부터 우리신문의 검열과 지도를 위하여 쏘모프라는 젊은 군인 한사람이 배치되어 거의 신문사에 나와 살다시피 하였다. .... 이 쏘모프라는 소련군인은 아직 나이 젊고 계급도 높지 못하였으나... 우리나라말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서투른대로 신문검열의 중책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소련사령부에는 그보다 군계급도 높고 아는 점도 그 보다는 많은 한국인2세 군인들과 통역관들도 많았지만 소련장군들은 새로 나오기 시작하는 이곳 신문검열과 지도를 위한 자리같은 중책에는 그들을 내보내지 않고 비록 젊고 낮고 서투른대로 쏘모프 같은 소련인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소련사람들이란 그렇듯 곰같이 끈끈하고 의심 많고 남의 나라 사람이란 비록 "공산주의 동무"라 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쏘모프가 하루는 내방에 들어와서 "신의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못들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다고 솔직히 말하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도 고개를 기웃거리며 자기도 자세히 모르겠는데(정말 모르는 모양이었다) 좌우간 신의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무슨 기사이던 들어와도 취급하지 말라는 상부(사령부)의 지시라고 전하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일일인지 의아스럽게 여겨 사내 간부들에게도 이리저리알아 보았으나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그런데 몇시간 있다가 사령부에서 들어 오란다는 연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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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62.7.1.

김일성을 고발한다
김일성 직속기자의 수기

한재덕







1945 신의주



[ ...... 연회가 끝나갈 무렵 보안부장 한웅이란 자가 피스톨을 꺼내어 쐈다 .... 항의를 한 사람이 없었다 .........


...... 그날부터 일은 자꾸 기울어지기 시작 .... 하룻밤 새 생긴 공산당원의 횡포뿐이다. 정체 알 수 없는 특무대란 것이 생겼다 ......... ]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 사건 -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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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들어오자마자 시내는 공포 분위기에 싸이게 됐다. 첫째로 한 것이 상점 약탈이었다. 시계, 만년필은 닥치는 대로 "다와이"(내라)다. 그 담은 여자다. 어디서 여자가 끌려갔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위원회로서 소련군 장교 환영 모임을 위해 의논을 하는데 부위원장이라는 사람의 첫번 소리가 미인계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몹쓸 데를 왔구나 후회하는 생각이 났지만 이제 갑자기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한 손에 무슨 알코올 병을 들고 한 손에는 냉수컵을 들고 마셔대는 소련군, 인간으론 보이지 않고 짐승으로만 보이는 공산당 위원들, 나라가 뭔지 아냐 모르냐 물어보고 싶은 재재거리는 기생들을 번갈아 보며 그 자리엘 앉아있자니 살아 있는 것 같지를 않았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보안부장 한웅이란 자가 피스톨을 꺼내어 쐈다. 일동이 놀랐으나 뛰어 일어선 사람은 없었고 천장을 향해 쐈으니 사람이 상하지는 않았다. 위협하는 것이었다. 옆의 소련 장교가 빙그레 웃고 빼앗아버렸으나 인간의 짓이라 할 수 없는 일이고, 누가 봐도 그들 사이에는 뒷면에 무슨 오고감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부터도 못했지만, 누구도 그 자리에서도 그 후에도 거기 대해 항의를 한 사람이 없었다.




이튿날 일본 사람을 모두 한 수용소로 모으고 여자를 순번으로 징발해내어 소련 군인에게로 보내기로 했다. 일본 여자들도 승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삶이란 뭐냐 또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지만 그날부터 일은 자꾸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것은 그저 하룻밤 새 생긴 공산당원의 횡포뿐이다. 정체 알 수 없는 특무대란 것이 생겼다. 그저 횡행천하다. 그러니 해방으로 인해 왔던 그 감격, 그 바다같이 넓어졌던 민중의 마음, 서로 믿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 일하려던 그 열심을 다 달아나버리고, 있는 것은 공포, 불안, 분개, 낙심뿐이었다.



소련군 사령관이 오자마자 환영식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세워도 자유입니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소련 일생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벌써 거리마다 레닌, 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을 레닌가 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학교에서 소련말을 가르치기 시작하지, 그러더니 평양에서 5도연합회의가 열린다고 통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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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ialsori.net/bbs/board.php?bo_table=0205&wr_id=108







1946.3.6. 38선 철폐요구 국민대회




[ ....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 ]

[ ....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 ]


[ ...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





38선철폐요구 국민대회 개최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3월 06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가 5일 오전 11시 반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38선철폐요구국민대회에 군중이 들고 나선 기치와 표어는 다음과 같다.



38絞首線 撤廢

38以北의 農民의 食糧을 약탈 말라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自主獨立의 전제조건이다

38以北의 機械없는 공장의 노동자를 살리자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言論機關은 반성하라 38以北의 진상을 정확히 報道하라

民族의 總意로 38線 撤廢를 요구하자




이날 오전 11시 반 대회장에는 남북 각지에서 모인 수천명이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38絞首線을 철폐하라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고 국민의 총의를 무시한 38선의 철폐에 돌진하려는 결의가 움직이는 가운데 대회의 막이 열리었다.


개회사와 국기게양이 끝난 다음 애국가 합창이 성동중학교의 취주악대와 함께 있은 후 대회위원장 李允榮(平壤朝鮮民主黨副黨首)으로부터 “38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 우리의 완전독립은 가망없다. 우리는 이 대회를 기점으로 38선철폐 국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려 한다”라는 개회사가 있었다.

그 다음 임시정부 외교부장 趙素昻으로부터 李承晩, 金九의 축사를 대독한 후 서북선의 실정보고에 들어가 宋義淳, 崔奎恒, 白凡石 3인의 보고연설에 이어 다음과 같은 決議文 낭독이 있은 후 독립만세 삼창으로서 의의깊은 대회의 막을 닫고 동 오후 2시에 폐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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決議文



1) 朝鮮의 38도선은 外敵이 항복하기 전 聯合軍參謀總長會議에서 작전상의 필요로 획정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금일의 朝鮮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필요성을 인정치 아니한다.

이 후도 美蘇兩軍이 38선을 경계로 분할 주둔하여 현재와 같은 3천만 민족의 統一團結과 自主國家 건설에 지장이 클 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파멸을 초래하여 國民生活을 도탄에 빠지게 하며 政治·經濟 文化·交通·通信·居住의 자유를 拘?하는 바 큼으로 우리는 3천만 민족의 이름으로써 聯合軍과 聯合軍總司令官 及 美蘇共同委員會에 대하여 38선의 즉시 철폐를 요구하여 其 목적의 관철을 기하기를 결의함.


1) 우리 동포중에는 □□을 기화로 선량한 동포들을 기만 □□하여 政權의 획득을 꾀하는 賣國奴가 있어서 심지어 光輝있는 祖國을 外夷에게 팔아 먹으려는 □□□ 이땅에서 횡행 활보하니 어찌 통탄치 아니하랴.


38以北을 바라보건대 진정한 民意를 무시하고 소수인원의 恣意로 된 臨時人民委員會가 있어 입으로 民主主義를 표방하면서 민중을 억압 기만하여 후일 政權의 횡탈을 꾀하려 하니 우리 어찌 만연 방관할 수 있으랴.


이제 우리 3천만 동포는 理論과 표방에 속지 말고 사리와 감정을 떠나서 현실을 엄정 냉정히 관찰하여 정사를 가르고 □□을 판단하여 우리의 추앙 신앙하는 民族의 領導者를 선택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朝鮮의 血統과 民族的 良心을 가진 3천만 동포의 이름으로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을 절대 지지하는 것을 천하에 선명하여 써 內로는 民心의 歸一을 策하며 外로는 이를 萬邦으로 하여금 大韓國民의 完全統一政權으로 승인케 하기를 결의함.




大韓民國 28년 3월 5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



동아일보 1946년 03월 06일









[ .... 協定된 것도 蘇聯軍司令官의 거부로 성립되지 아니하였으니 蘇聯軍의 心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 38도 以北의 우리 동포는 무한한 모욕과 각종의 학대를 받아 파멸상태에 빠졌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 ]




민주의원 김준연, 38선문제 등 소군정당국 반성 촉구 방송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3월 16일
날짜 1946년 03월 13일



民主議院 金俊淵은 現下의 最緊急한 38선과 농촌문제에 관하여 13일 오후 7시 15분 中央放送局에서 방송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고, 지면관계로 농촌문제는 割愛하고 38선문제만 揭載하여, 美蘇共同委員會를 앞두고 특히 蘇聯軍當局에 반성을 촉구하였다.



“去年 8월 15일 이후 우리 3천만 민중은 37년이란 세월을 고통으로 비참한 死線에서 방황하던 日本의 虐政을 벗어나서 하루바삐 자유독립의 완성을 기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상도 아니하던 38도선이 가로 막아 누구나 그 理由와 原因如何를 물론하고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南北으로 갈리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생활 전면에 차단을 당하여 왕래의 자유가 없음은 물론 通信의 왕복도 전연 不能한 상태에 있어 벌써 반년을 경과하였으니 이와 같은 우리 民族 相互間의 고통과 비애는 과거 屢千年 역사상에 보지 못하였던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美蘇兩軍이 우리의 自主獨立에 협력하기 위하여 우리 땅에 進駐한 것으로 믿고 그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큰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京城에서 열린 美蘇共同委員會는 우리 自主獨立의 過渡政權을 수립하는데 협력하는 전제로 38도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하는데 대하여 그 회답의 내용과 경과의 발표가 있기를 날로 기다리던 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略) 協定된 것도 蘇聯軍司令官의 거부로 성립되지 아니하였으니 蘇聯軍의 心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 제반행동에 관하여 38도 以北의 우리 동포는 무한한 모욕과 각종의 학대를 받아 파멸상태에 빠졌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믿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蘇聯軍의 과오인가 소수 民族反逆者의 죄악인가.


우리는 民衆의 총력을 집결하여 蘇聯軍當局의 반성을 요구하는 동시에 民族反逆者를 배격하여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마음과 힘을 모아 死滅에 빠진 38도 以北의 동포를 구해냅시다.



美蘇共同委員會가 또다시 금명중에 회담을 개시하는 모양이니 여기에 대하여서도 우리는 그 경과를 주시하여 우리의 自主獨立完成에 협력하는 것이면 마땅히 滿腔의 성의를 드리고 우리도 심혈을 다하여 목적완성에 奮迅 勇往함은 물론이나 만일 38도선의 철폐를 거부하여 우리 민족의 통일을 저해하거나 소위 信託問題 等을 제의하여 우리 民族의 독립을 거부하는 자 있다면 그야말로 우리 3천만 민족의 사활문제이니 우리가 일심협력하여 끝가지 이것을 반대하지 아니하면 안될 결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는 비통한 마음으로 蘇聯軍當局에 대하여 반성을 요구하는 所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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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3.



[ .....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 ]



1946.3.18.월요일. 동아일보.

" 라듸오"로 듯는 이남의 소식


평양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심정은 오즉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지난번 , 미소회담에서 방송파장이 협정되면서부터 라듸오만은 잘들리어 , 서울중앙방송국으로부터 보내는 뉴스로서 자위한다고 한다.








[ ...... 해설한 기사뿐 .... 지면에는 민중의 여론이 조금도 반영되어 잇지안타 ...... ]




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2】

동아일보 1946년 4월 7일자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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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황해신문



역 매점에서 1원을 내고 신문 두 장을 삿다 자유황해신문(自由黃海新聞)의 14, 15 량일부이였는데 두 면의 소형신문이다 김무정 장군이 토지게혁령 실시에 관하야 지방순회차로 해주에 간 것을 머릿기사로 뽑고 정치사회 량면의 구별 없이 모다 토지개혁령(土地改革令)을 해설한 기사뿐이다. 이날 신문만 그러한지 몰으되 지면에는 민중의 여론이 조금도 반영되어 잇지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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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ongne.donga.com/2013/04/30/d-story%e2%85%a1-%ec%9d%b4%eb%b6%81%eb%8b%b5%ed%8c%8c%ea%b8%b01/







[ ....... 평양의 민심은 ... 불안에 눌리워 질식해 죽겟다는 것 ... 총소리도 .....

.......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 ......... ]




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 (3)


동아일보 1946년 4월 8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제비처럼 남국이 “그립다”, 컴은 거리에 총성이 은은


평양역에 나렷다 평양、여기가 북조선의 수도인가하는 생각이 화살같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개찰구를 나서니 붉은 깃발 붉은 포스타 스타린 수상의 초상 토지개혁의 해설 등이 거리마다 부터있을뿐만아니라 소련부인과 소련어린이들까지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였다. 기자는 여기가 제2의 적도(赤都)나 아닌가하고 조선의 지도를 펴보고 싶은 충동을 바덧다.


남북이 갈린지 일년도 못되어 평양의 자태는 너무나 엄청나게 소련식으로 변하고 말앗다 검으침침하고 기름끼 하나 돌지안는 평양 쓸쓸한 거리 정포를 벌리고 안저 잇는 상인들의 얼골에는 회색비치 지텃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거름은 무거웟고 얼굴은 한없이 우울해보였다


거리를 지나다니면 소련군완장과 군모를 파는 조고마한 점포가 눈에 띠인다 장총을 질머진 채 두 소련군이 그 가개 아페서 완장을 골르고 가격을 흥정하고 있다. 새로 설립된 북조선중앙은행(北朝鮮中央銀行) 아플지나 대동교(大同橋)쪽으로 발거름을 옴겻다 여기도 보안서원이 오고가는 시민을 감시하고 있다



3월도 중순이 훨신 넘었건만 날세는 그대로 추웟다.『북쪽손님이 오시드니만 날세까지 돌변 햇는 걸』하고 슬쩍 우서버리는 담화가 기자의 귀청을 울렷다 기후까지 소련식이냐 하고 기자는 혼자 우섯다. 강물도 흐렷다 모란봉 을밀대도 바람 속에 맴도는 것 같앗다 이 강을 오르나리든 검은 석탄배 네댓척이 강 건너 사장에 올라안진 채 동민(冬眠)을 게속하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구경이라도 가보자고 하니 친구가 반색을 하며 말린다。바로 그때였다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방안에 안잣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비처 돌앗다 잠깐 침묵이 게속되였다. 부억에서 설거질하든 친구의 부인도 놀랫는지 한참동안 그릇소리가 나지 안앗다『헛방 같은데.』하고 등무의 입에서 판결이 나린 다음에야 안심들하였다.등무는『이러케 마음을 조리고서야 어디 살 수가 있어야지』하고 허두를 내노코 자기 집도 삼팔이남으로 이사가겠다는 것이였다。


이곳에서는 여섯시 반만 되면 상점문은 불이나케 다다버리고 시민은 일곱시가 되면 거리에 나다니기를 꺼린다고 한다. 친구의 부인은『살아야 사는 것 같어야지요』하고『이웃집 순자네도 며칠 전에 서울로 이사갓다고』기자 보고 들으라는 것보다 자기 남편의 의견을 슬적 떠보는 것이였다. 친구는 비단 자기네뿐 만아니라 적어도 평양사람의 대부분이 떠날 수 있으면 삼팔 이남으로 가겟다는 사람들뿐이라고 들려주었다 부인은『벌서 간 사람은 얼만데요』라고 이 사□울 증명한다.


평양의 민심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이대로 있다가는 이 불안에 눌리워 질식해 죽겟다는 것이 그 친구의 말의 전부였다。기자는 이 불안의 원인이 어데있는가를 물었드니『기자자격이 없구만 그래 육감으로 알지 못해 이제 총소리도 들엇겟지』라고 말문을 내노코는 보안 행정이 너머나 탄압적이라는 것을 비롯하야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그 중에는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온다고 한다。그 말을 듯고 기자는 온몸에 소름이 쪽 끼첫다。(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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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의 자유를 봉쇄 .... 유구무언이 되고 ........ ]



삼팔선 이북답파기 함경도반 ①


동아일보 1946년 4월 14일자 2면.



HH본사 특파원, 누대(累代)살든 땅 버리고, 남으로 이동하는 주민군, 부안의 거리에 압살된 언론의 자유


『삼팔선 답파기의 제2대는 함흥을 기점으로 남으로 오는 피난민 속에 한사람이 되어 그들의 눈물나는 호소와 참상을 보며 들으며 함께 눈물지으며 이 답파기를 쓴다』


해방의 가을도 지낫고 진통의 겨울도 가고 해산의 봄도 왓것만 □다운 소식을 무궁화동산에 전하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에 못내 서러워하는 기자는 오래간만에 함경선열차에 □을 실코 해방이후 처음 함경남북과 강원 등 3도의 실정을 듯고 보고 이 암행(暗行)의 답파기를 독자에게 전하려는 것이다


만주방면과 함경북도로부터 밀려오는 전재피난민과 인민위원회의 탄압적 행정에 실증을 느낀 백성들의 남부녀대한 이사보따리는 날이 따스하여옴을 따라 성진(城津)을 기점으로 하로 단한번식 운전되는 이 남행열차를 타려고 몃칠식 각지 정거장 대합실에서 굶주려 떨고 잇는 정경은 참으로 눈물겨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소련(蘇聯)군이 기게를 또더갓기 때문에 요지음에야 겨우 조업(操業)을 시작하여 일부의 기게를 돌리고 잇다고 전하는 고주파공장을 뒤로하고 성진을 떠난 함흥행 여객열차는 수 천 명의 고단한 천만가지의 시□을 실고 무연탄 연기를 토하며 힌 갈메기 푸른 물결을 히롱하는 동해를 끼고 남으로 남으로 작정된 시간도 없이 천천히 달리는 동안 좌우의 산천을 도라보매 옛 얼골 새롭거늘 이 강산의 주인으로 여러대 조상의 뼈를 뭇고 한식(寒食) 추석(秋夕)에 성묘하든 자손의 정성도 집어치우고 주택과 가재도구도 버리고 잔뼈 굴거진 정든 고향을 도무지 살 수 없다고 하야 떠나는 사람이 늘어감은 이 어이된 일인가?
또한 이들의 안주의 락토는 과연 어대서 구하게 될 것이며 어떠게 건설되어 갈 것인가?



만주에서의 전재피난민은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정책으로 수농(水農)개척에 무던히 힘써온 보람도 없이 만주인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가족을 일코 쫏겨서 또는 도망처 그래도 고국이 그리워서라고 할가? 초라한 나그네로 3남에 돌아가거니와 이 고장에 뿌리박켜 살든 사람들조차 무수히 삼십팔도선을 넘으려하니 이 백성들의 안탁가운 사정은 무엇이며 사회의 실정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이 열차에 편승한 이동사찰대(과거 이동경찰)의 눈을 피하여가며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하여 그곳 실정을 들어보건대 작년 8월 15일 일본이 황북하고 그달 하순 소련군이 진주한 이래 과거 좌익(左翼)운동에 관게하였던 실적 잇는 사람들이 소련군을 배경으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보안대(保安隊)를 편성하여 행정 사법、치안의 모든 권한을 잡고 공산당과 표리일체가 되어 소련 그대로의 공산국가체제의 확입을 위하야 그 세포(細胞)단체인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공산청년동맹 여성동맹 등 가지가지의 새로운 방게조직으로 대중을 파악하기에 힘썻으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부터 시게 만연필『트렁크』현금이 가두에서 약탈당하고 밤 통행금지시간 중에는 주택 상점 사무소에 침입하야 70여 탄을 발사한다고 자랑하는『따발총』으로 위협하며 재물을 강탈한 우에 부녀자를 □욕하는 범행이 속출함에 이르러 일반의 불안과 비난은 날로 증대하고 원성과 분노는 날로 놉파감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는 대표기관으로 자처하면서도 인민위원회와 보안대는 폭행을 저지할 방책을 마련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엄페하고 붉은 군대는 우리조선을 해방시켜준 은인이므로 무한의 감사를 들여야할 것이라고 피해가측을 꾸짓지를 일수로 하고 18세 이상의 청년으로만 구성된 보안대원의 횡포 또한 자심하여 민심의 리반 되는 거리는 천리라만리라 형용할 수 없게 머러저 가고만 잇는 형편이다.


언론의 자유를 봉쇄당한 현재의 실정으론 정당한 의론도 주장도 불평도 불만도 호소도 애원도 투쟁도 반박도 입을 열어 말할 수 없고 귀를 기우려 드를 수 없게 되였으니 이른바 유구무언이 되고 만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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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

.... 출판에 대하여 검열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 ]



1945.9.12. 매일신보 .


하지, 기자회견에서 미군 施政方針을 발표




11日 오후 2시 40분 존R.하지중장은 아놀드소장과 헤이워드중좌를 대동하고 시내 각 대표신문기자들과의 회견석상에서 제1성을 발하였는데 (略)사령관과의 회담은 2시간 40분에 亘하였으며 (略) 이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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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진주해 온 후인 현재 조선에는 문자 그대로의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미군은 조선사람의 사상과 의사발표에 간섭도 안하고 방해도 안할 것이며 출판에 대하여 검열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언론과 신문의 자유는 여러분들을 위하여서 대중의 論을 제기하고 또한 여론을 소소하게 알리는데 그 직능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미군은 언론자유에 대하여 취재를 방해하고 검열을 하려하지는 않으나 그것의 정당한 의미의 치안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이런 경우는 별도로 강구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필요까지는 없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조선에 온 뒤로 조선의 역사와 조선의 신문사를 통해서 조선이 어떠한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만큼 나는 바라노니 부디 여러분은 이 기회를 조선신문사상의 일대 혁신전환단계로 삼아 주기를 바란다.


미국의 제 신문과 같이 신문의 역할을 다 하는데 있어서는 대중을 지도하고 여론을 일으키는 지대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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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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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방송 이외의 방송을 청취하는데 대한 처벌은 재산몰수 급 6개월 징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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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4.


[ ...... 운동장 개설 이래 최대 인파인 20만여명이 운집 ........

....... 이승만을 ‘국부(國父)’라는 최고의 존칭으로 소개했다. ........ ]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이승만과 김구

86.美蘇共委 파동 속에 지방 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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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地方巡廻로 지지기반 강화



이승만의 순회강연회는 독촉국민회 지방조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4월 15일 현재의 독촉국민회 지방조직 현황은 38도선 이남의 144개군 가운데 114개군에 지부가 조직되어 있었고, 회원수는 106만 8,479명에 이르고 있었다고 한다.52)


이승만의 지방순회에는 프란체스카도 동행했다. 첫 방문지는 천안(天安)이었다. 4월 16일 오후에 온양(溫陽)온천에서 일박한 이승만은 이튿날 오전에 천안제일국민학교 교정에 모인 3만여명의 군중 앞에서 50분쯤 감격적인 연설을 했다.53) 18일 오전 11시에 대전(大田) 독촉국민회 주최로 본정(本町) 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영연설회에는 4만여명의 군중이 모였고, 저녁에는 대덕(大德) 군수 주최로 유성(儒城) 온천호텔에서 간담회가 열렸다.54)



굿펠로가 급히 儒城溫泉으로 찾아와



이승만이 대전을 방문하기 직전인 4월 16일과 19일에 이승만 암살을 노린 일당 7명이 대전에서 체포되었다.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범인들은 일제 수류탄과 권총 등을 가지고 있었다.55) 이때부터 경찰은 이승만의 경호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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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후에 이승만의 승용차가 유성온천을 출발하여 경북 김천(金泉)으로 이동할 때에는 연도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열렬히 환영했다. 충북 옥천(沃川)에 도착한 이승만은 옥천국민학교에서 30분 가량 환영 나온 주민들에게 인사말을 했다. 이승만은 영동(永同)과 추풍령(秋風嶺)의 직지사(直持寺)를 거쳐 오후 5시께 김천에 도착했다.59)



地方紙 기자회견 통해 5호 聲明 대응책 제시해



22일 오전 11시에 독촉국민회 주최로 김천 동부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영강연회에는 남녀 학생들과 각 단체 등 군민 4만여명이 모여 이승만을 환영했다. 이승만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미소공위 진행상황 등 정국 정세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다.60)


23일 오전 10시에 김천을 출발한 이승만은 오후 1시쯤 대구 신동 가도에 들어섰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환영하는 시민들에게 이승만은 모자를 흔들어 화답했다. 숙소인 경북 내무부장 관사에 도착한 이승만은 도지사를 비롯한 지방유지와 미국인 지사 등 미군장교들을 접견하고, 해방 기념 식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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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國寺에서는 漢詩도 지어



이튿날 독촉국민회 경북지부 주최로 경북도민 환영대회가 대명동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대회장에는 10만여명의 군중이 운집했으나 대회도중에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이승만의 연설은 중지되고, 대신에 이날 저녁 7시반부터 대구방송국에서 30분가량 방송연설을 했다. 25일 오전 10시에 이승만은 시민들의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경주(慶州)로 향했다.62) 영천(永川)을 지나 오후 2시에 경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승만을 마중하러 나온 사람들로 옛 도읍 경주거리가 메워졌다. 이승만은 불국사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26일 오전 11시부터 경주중학교에서 열린 경주, 영천, 영일(迎日), 울산(蔚山) 4개군 연합환영회에는 5만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승만은 1시간반에 걸친 정열적인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았다.63) 이승만은 불국사에서 이틀밤을 묵으면서 아름다운 한시 한 수를 지었다.


宿泊佛國寺64)

小少旣聞佛國名
登臨此日不勝情.
群山不語前朝事
流水猶傳故國聲.

半月城中春草合
瞻星臺下野花明.
只今四海風塵定
古壘松陰臥戍兵.


불국사에서 묵다


젊어서 들은 이름 불국사
오늘에야 올라 감개를 가누지 못해.
산들은 지난 때 일 말이 없고
흐르는 물만 옛 왕국 소리 전한다.

반월성 안에는 봄풀이 어우러지고
첨성대 밑에는 들꽃이 밝다.
지금은 사해 풍진 다 평정되고
옛 보루 솔 그늘에 수병(戍兵)은 잠들었다.



27일 오전 9시40분에 불국사를 출발한 이승만은 11시에 울산읍에 도착했다. 울산에서는 울산제일국민학교 교정에 1만여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이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울산을 떠나 오후 4시쯤에 동래(東萊)를 통과할 때에는 남녀 학생들과 많은 주민들이 연도에 늘어서서 이승만을 환영했다. 이때에 동래 입구에서 이승만의 암살을 기도한 흉한 1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65) 이승만은 해운대에 도착하여 송도각(松濤閣)호텔에 들었다.




해운대에는 서울에서 민주의원의 백남훈 의원과 윤치영 비서실장이 급히 내려와 있었다. 미소공위 제5호성명과 관련하여 민주의원의 태도를 결정하기 위하여 이승만의 귀경을 종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귀경하지 않고 순회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 대신에 민주의원에는 미소공위 제5호성명에 따른 선서문에 서명하고 미소공위에 참가하라는 ‘친서’를 써서 백남훈에게 주었다. 이승만은 친서에서 신탁통치 문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민주의원이 서명하는 것은 신탁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신탁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토의에 협동한다는 뜻을 표함이니, 그 토의에 참여치 않으면 그 문제가 원만히 타결되기 어려울 것이며 설령 우리가 참가하고도 잘 타협이 못되면 그때에는 우리가 다른 보조를 취하기에 늦지 않을 것이다.”66)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남훈이 가지고 간 ‘이박사 친서’는 신문에도 공개되어 전문이 보도되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서울을 떠나 있으면서도 우익 진영의 최종 정책결정자였다.


같은 날 하지는 선언서에 서명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에는 신탁통치의 찬성 또는 반대의 의견을 발표하는 특전을 보장하되, 선언서에 서명하지 않는 사람은 미소공위의 협의대상에서 제외된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여 ‘이박사 친서’를 뒷받침했다.



“나를 國父라고 불러주니 …”



부산 방문의 성과는 컸다. 환영연설회는 29일 정오에 구덕산 아래의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되었는데, 운동장 개설 이래 최대 인파인 20만여명이 운집했다. 환영회 회장 김철수(金喆壽)의 개회사, 경남도지사 김병규(金秉圭)의 환영사, 부산기독교연합회 합창단의 ‘환영합창’ 등으로 이어지는 대규모의 환영회 행사를 보면서 이승만은 감개무량했다. 주최쪽은 이승만을 ‘국부(國父)’라는 최고의 존칭으로 소개했다. 1911년에 밀행하다시피 하며 기독교 관계자들을 만나고 간 지 30여년 만의 부산 방문이었다.



마이크 앞에 선 이승만은 먼저 “나를 위해서 성대한 환영과 더불어 국부라는 가슴에 넘치는 경어를 주어 눈물이 흐를 듯하다”고 말하고, “지금에 하신 환영사와 환영합창 중에 특히 동감되는 것은 한덩어리로 뭉쳐서 완전한 자주독립을 찾자라는 구절이었고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그 요지도 이것이다”라면서 단결을 역설했다.



이승만이 순회강연에서 역점을 두고 강조한 것은 공산당 비판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산강연이었다. 이승만은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그룹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나는 공산주의와 극렬파들이 나와 정치의견이 다르다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공산당과 극렬파가 하고 있는 것은 인민의 복리를 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지연시키고 자주독립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적으로 보아서 공산당과 과격파들이 하고 있는 것을 들어 말하자면, 그네들은 자본가 타도를 일삼아 부르짖고 있으나 자본과 노동과 토지가 발을 맞춰 가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상업도 공업도 발전할 수 없고 민생도 발전할 수 없다.”


“土地의 無償沒收·無償分配는 반대”


그러면서 이승만은 공산당 그룹이 노동자들에게 동맹파업을 하도록 선동하는 것은 “하루 일 안하면 살아 나가지 못하는 근로대중을 못살게 하는 것이고 국가에 큰 역할을 하는 산업을 파괴시키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국민적인 쟁점이 되어 있는 토지개혁 문제에 대해서도 중론과는 다른 자신의 소신을 분명히 밝혔다.


“일인토지고 조선인토지고 이것을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한다고 하나 이것은 … 국민의 재산소유권을 무시함이니, 장차 우리가 민주정부를 수립할 때에 국법을 제정하야 국민의 생활을 옹호함이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또 전날 밤에 있었던 굿펠로와의 통화에 근거하여 미소공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피력했다.


“가까운 장래에 수립될 임시정부의 진용은 아직 확실치는 않으나 북조선 5, 남조선 8 또는 북조선 3, 남조선 5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여하간 인구로 보아서 북조선보다 남조선이 많으니 임시정부의 진용도 남조선이 많을 듯하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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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州는 9개 군민이 몰려 초만원



이승만은 4월 30일에 동래중학교 교정에 모인 1만여명의 청중에게 강연을 한 다음 마산(馬山)으로 떠났다. 대전에 이어 4월 27일에는 동래 입구에서도 암살범 1명이 체포되었기 때문에 경찰은 이승만의 경호를 더욱 강화했다. 그리하여 이승만이 마산에 도착한 날 저녁에는 경찰 1,000명이 외부에서 투입되었다고 한다.69)



이승만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산시민들은 물론 멀리 남해(南海)와 거제도(巨濟島)에서도 범선을 타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5월 1일 오전 11시에 마산중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영연설회에는 4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이승만을 환영했다. 마산부윤 옥기환(玉麒煥)의 개회사, 미군정장관 매리크 프라이디의 축사가 있었고, 미해병대 800여명이 군악행진을 하여 이채를 띠웠다. 이승만은 연설회를 마친 뒤 오후 3시반에는 배편으로 진해(鎭海)를 시찰했다.70)



5월 2일 오전에 마산을 떠난 이승만은 오후 2시20분께 함안(咸安)에 도착했다. 함안의 가야국민학교 교정에는 읍민은 물론 의령(宜寧) 등 먼 곳에서도 흰 옷을 입은 촌로들이며 색색 옷가지의 부녀자들과 아이들까지 2만여명이 모여들어 조그마한 함안 촌읍은 무슨 큰 잔치나 벌어진 듯했다.



함안을 출발하여 진주(晋州)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고성(固城), 통영(統營), 하동(河東), 산청(山淸) 등 9개 군민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진주 시민들은 집집마다 친척 손님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다.71)


5월 4일 오전 10시에 진주를 출발하여 전라도로 향하던 이승만은 섬진강을 건너기 전에 하동에서 차를 내려 하동국민학교에 준비되어 있는 환영회에 들러 참석자들에게 인사말을 했다. 순천(順天)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반이었다.72)


이튿날 오전 11시에 순천남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영연설회에는 3만여명의 청중이 모였다. 1925년에 《조선일보(朝鮮日報)》기자로 하와이의 태평양회의에 참석했다가 미국에 눌러앉아 이승만의 동지회 일을 도왔던 김양수(金良洙)가 순천군수였고, 1944년에 주미외교위원부 활동에 참가했던 배민수(裵敏洙)는 미군과 같이 귀국하여 순천에서 목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감격적으로 두 사람을 만난 이승만은 이들을 청중에게 소개했다.

오후에 중앙교회에서 열린 이승만환영예배에는 800여명의 신도들이 참가했다. 이승만은 그 자리에서 “3천리강토의 광복을 위하여 생사의 지경이 수십 번이나 있었으나 하나님이 여러분과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까지 이와 같이 건강을 보호하고 우리 동포에게 좋은 독립할 기회를 허락하신 줄 안다. 우리는 이 기회를 잃지 말고 자주독립을 힘쓰고 자유신앙에 노력하자”고 말하고, “공산분자는 독재적 정치로 교회를 일정시대보다 더 구속한다”고 비판했다.73)



6일 오전 8시에 순천을 출발한 이승만은 벌교(筏橋), 보성(寶城), 장흥(長興), 영암(靈巖), 영산포(榮山浦)를 거쳐 목포(木浦)로 이동했다. 벌교를 지날 때에는 그곳 부인회에서 이승만 일행이 그냥 지나가는 것이 섭섭하다고 하여 꿀물을 풀어 가지고 대접했다. 보성에서는 1만여명이 모여 이승만 환영대회를 열었고, 이승만은 그곳에서 기념식수도 했다. 오전 11시20분께에 보성을 출발하여 장흥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쯤이었다. 장흥에서는 장흥국민학교 교정에서 환영회가 열렸다. 목포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40분.74) 8일 오전에 산수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목포환영강연회에는 3만여명의 청중이 모였다.



美蘇共委休會로 歸京 서둘러


이승만은 귀경을 서둘렀다. 교착상태에 있던 미소공위가 이날 무기연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5월 8일 오후 2시에 목포를 출발하여 광주(光州)로 향했다. 도중에 나주(羅州)에 들러 독촉국민회 주최의 환영대회에 참석했다. 환영대회에는 1만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광주에서는 9일 오전 11시에 서정(西町)국민학교 교정에서 5만여명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두 시간에 걸쳐서 환영연설회가 열렸다. 연설회에 이어 오후 2시반에 전남도청 응접실에서 광주지역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을 접견하고,75) 오후 4시에는 기자들을 만났다.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된 것과 관련하여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소련을 비판했다.


“소련인들이 세상의 공론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자기네들의 장래 이해가 어찌될 것을 각오하고 미국대표와 협동해서 순리적으로 … 해결할 줄 알았더니, 그 사람들이 그것을 양해 못하고 또 미국대표들이 좋은 기회를 준 것을 이용하지 못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38도선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단호하게 소련을 비난했다.


“38도선 문제도 소련 사람들이 자의로 우리 민의와 세계 공론을 따라 해결치 못하면 결국은 소련에 대해서도 이롭지 못할 것이니, 우리의 관계로만 아니라 소련관계로 보아도 큰 불행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미 우리는 전 국민의 결심으로 공산당의 제안을 접수치 않기로 하였고, 우리 강토를 단 얼마라도 남에게 양여치 않기로 결심한 만큼 이것을 소련 사람들이 하루바삐 각성하기를 바란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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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1.



[ ...... 우리에게 一條의 서광이 있으니 이는 UN 위원단의 내한이다 ............ ]



제목 이승만, 김구 등 정계요인 연두사 발표


게재지명 조선일보,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8년 01월 01일
날짜 1948년 01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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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


“우리에게 一條의 서광이 있으니 이는 UN 위원단의 내한이다. 우리는 잠시라도 모든 비애를 잊고 새해에 새손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동시 최선을 다하여 그들과 공동 노력할 것이며 수시로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발표하므로서 기어히 우리의 염원을 관철하도록 하자. 따라서 우리가 기대하는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總選擧가 실시된다면 우리는 귀중한 一票를 유효하게 던져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新年劈頭에 있어서 과오를 청산하고 먼저 우리 민족이 단결하여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이며 단결된 역량으로써 UN 위원단도 맞이하고 그들의 도움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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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中將


“1948년 조선국민의 자유의사 발표에 의하여 민주주의적 통일국가 재건을 볼 수 있는 해가 되기를 본관은 진심으로 염원합니다. 위대한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수조건인 전국민의 완전한 통일 및 경제와 교육의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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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蘇側의 거부가 있었다면 이는 최대의 불행이다 ......... ]



소련의 (UN委員團) 북조선 입경거부에 대한 각계 견해


게재지명 경향신문

게재일자 1948년 01월 25일


날짜 1948년 01월 25일


▷金九 談:우리 3천만의 염원은 南北統一 총선거이다. 그러나 蘇側의 거부가 있었다면 이는 최대의 불행이다. 차후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言及하기를 삼가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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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천만의 동포가 우리와 민국건설에 같이 진행하기를 원하였으나 유엔대표단을 소련군이 막아 못하게 된 것이니 우리는 장차 소련 사람들에게 정당한 조치를 요구할 것이요….”(건국 기념식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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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 ]



월남한 북로당원 유재민, 이북실정 폭로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8년 0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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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귀하가 월남한 이유는 무엇인가


(答) 나는 북로당원의 일원이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조선을 적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인민의 생활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어 인민들은 의식주 안정을 찾기 위하여 남하하는 것이다.

나도 유엔조위의 來朝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북조선의 유엔위원단에 대한 북협조에 불만을 품고 그리운 고향을 뒤로 남하하였다.



(問)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는가


(答)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에 하등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데 도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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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승만 | 2023-04-01 17:41:55 삭제



[ ....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 ]



월남한 북로당원 유재민, 이북실정 폭로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8년 0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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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귀하가 월남한 이유는 무엇인가


(答) 나는 북로당원의 일원이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조선을 적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인민의 생활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어 인민들은 의식주 안정을 찾기 위하여 남하하는 것이다.

나도 유엔조위의 來朝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북조선의 유엔위원단에 대한 북협조에 불만을 품고 그리운 고향을 뒤로 남하하였다.



(問)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는가


(答)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에 하등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데 도리어 남조선 동포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다. 하여간 이북동포들은 여러번이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모략 선전에 속아왔기 때문에 이번 남북협상도 기대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면 총선거의 반대 공작이라는 것은 이북동포들도 잘 알고 있다.




(問) 金九씨는 현재까지 공산주의자들과 적대시하여 왔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金九타도라는 구호를 부르짖어왔던 것인데 최근의 金九씨 태도를 이북동포는 어떻게 보는가


(答) 남조선동포들은 북쪽 동포를 전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보는 듯하나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90퍼센트에 달하는 우익적 동포들은 李承晩·金九 양씨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숭배하여 왔다.

金九타도라는 구호에 우리 우익에서는 반감을 가지고 왔던 것인데 이제와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전조선에 공산주의정책을 감행하려는 金日成파의 책동에 추종한다면 3천만을 지도할 영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問) 이북동포들은 5월 10일 실시될 총선거를 어떻게 보는가

(答) 이에 대하여서는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으나 유엔위원단 입경을 거절한 소련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하루바삐 국제무대에서의 우리 독립국가가 실현될 방법을 갈망하느니만치 이번 선거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1947.10.


[ ..... 평양방송 이외의 방송을 청취하는데 대한 처벌은 재산몰수 급 6개월 징역이다 ........ ]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7년 10월 26일


駐서울UP특파원 스탠리 리취, 북조선의 무력행동 계획 발표



先月 남조선으로 도망하여 온 한 前北朝鮮관리는 소련에 의하여 훈련 장비된 북조선 군대는 미소 양 점령군의 철퇴와 동시에 조선을 원조코자 행동을 일으키고 조선을 제18소련공화국으로 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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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군대는 일본병기로 무장된 것이며 목하 소련은 이들을 위하여 다수의 輕兵器를 齎來중이다. 과거에 있어 소련인은 직접 북조선인을 훈련하고 있는데 그들은 조선은 결국은 제18소련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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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는 ‘미국의 소리’ 방송 외의 조선에 대한 방송을 청취한 까닭으로 남조선 상태가 양호함을 알았다. 이 미국방송은 余가 요직에 있었으므로 청취할 수 있었다. 평양방송 이외의 방송을 청취하는데 대한 처벌은 재산몰수 급 6개월 징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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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 개최


동아일보 1951년 12월 13일



통일 없는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는 12일 상오 10시부터 충무로 광장에서 10시부터 愛協주최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먼저 金一休씨의 개회사가 있은 다음 유엔총회(毛允淑 여사), 릿지웨이 사령관(崔仁順여사), 트루만 대통령(김철수씨)에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대회 결의문을 金賢大씨가 낭독하여 통과하였다. 이어 尹致暎, 白南薰 양씨로부터 휴전회담은 한국분할을 재판시키는 것이므로 전국민이 거족적으로 반대하자는 요지의 궐기사가 있은 다음 대회를 끝마쳤는데, 동 대회에서 결의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한국의 통일과 평화 없는 유엔군의 철수를 반대한다. 중공군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북한괴뢰군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함으로써 한국의 평화가 수립될 것이며 세계의 평화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2. 우리는 38선의 재판인 휴전선을 용인할 수 없다. 백두聖峰에 태극기가 휘날릴 때까지 침략자를 격퇴하고야 말 것을 다시금 맹서한다.


3. 우리는 국토분할과 재침략의 위험성 있는 모든 결정과 우리의 주권과 통일을 침해하는 어떠한 결정에도 결사반대한다.


4. 우리는 약탈과 학살의 대상으로 되어 있는 재이북 700만 동포를 구출하기 위하여 조속한 대책이 있기를 전 자유세계에 호소한다.


5. 우리는 자유통일 신민주주의적 한국을 건설한다는 유엔의 결의를 하루속히 관철하도록 촉진한다.






1953.4.26. 북진통일 국민총궐기대회



[ .....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민들의 힘찬 행렬이 거리를 .......

...... 전시민이 한뭉치가 되어 국민들의 결의를 피력한 것은 저 신탁통치반대대회 이후 처음 .......


...... 백만 시민이 참집 ........ ]




1953.4.27. 경향신문



장! 휴전반대의 의기충천

휴전결사반대 서울시민궐기대회



공산괴뢰들의 6.25남침으로 조국의 강토가 전화속에 휩쓸려 수백만 인민이 죽고 상하였으며 수천만동포가 재산을 잃은 채 거리에서 방황한지 이미 4년이 되었으나 한가지 국토통일 조국독립이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참고 견디며 싸워왔는데 다시 공산침략군과 타협함으로써 휴전회담이라는 일방적인 결정으로 조국은 다시 두동강에 짤리울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휴전을 반대하고 통일 없는 타협을 규탄하는 국민적인 감정은 임시수도 부산을 비롯한 전국방방곡곡에서 폭발되고 있는데 서울에서도 각정당사회단체 주도 아래 26일 오전 10시 반부터 중앙청광장에서 북진통일국민총궐기대회가 열려 휴전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용소슴 치는 북진의 맥박

침략자를 축출 북진통일을 결의



이날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꽃철을 맞아 시민을 불으던 창경원 덕수궁도 문을 굳게 닫고 시내 상가는 자진 철시를 단행 일체의 가무음곡이 정지된 가운데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민들의 힘찬 행렬이 거리를 메웠는데 이같이 전시민이 한뭉치가 되어 국민들의 결의를 피력한 것은 저 신탁통치반대대회 이후 처음 보는 대회이었다. 백만 시민이 참집한 가운데 대회는 김(김일)씨의 사회로 장중한 주악리에 개막되어 국민의례가 끝난 다음 강(강창희)씨의 사회사에 이어 조(조광섭)씨가 국제정세보고를 하였고 유(유??)씨가 별항과 같은 결의문을 낭독하여 팽배하게 일어나는 북진통일의 국민적 기개를 다시 한번 고창하였다.


이어 윤(윤재욱)씨와 남(남송학)씨가 열렬한 궐기사를 하여 대회회중을 격려하자 회중은 우뢰같은 박수와 환호로 이에 호응하였다.



이어 이대통령과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 장군 그리고 유엔총회의장 피어슨씨 및 크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멧세-지 낭독이 있었고 '속지 말자 침략자 크레므린 평화공세를!'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내몰자 공산오랑캐 압록강 넘어로!' 등 열렬한 구호를 부르짖은 다음 국회 국방위원장 임(임흥순)의원 선창으로 대한민국 만세 북진통일 만세로 대회는 일단 끝을 막고 참집하였던 회중은 '휴전반대' '북진통일' 프라카-드를 높이 들고 일대 데모로 들어 갔다.




선언서



8년전 일본제국의 쇠사슬에서 해방되자 3천만 민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우리 강토는 양단되어 드디어 역사상 일찌기 보지 못한 민족의 수란과 희유의 참화를 당하고 있으며 1951년 소련대표 마리크의 휴전회담 제안은 침략자로 하여금 재침략의 기회를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세계의 고귀한 젊은 피들을 헛되게 하고 있다. 최근 적색제국주의자들은 세계정복의 독아를 닦으면서 가장한 평화공세를 전개하여 국제정국을 현혹케 하고 있으며 이에 수반하여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유엔 총회를 비롯하여 우방제국지도자가 또 다시 혼미에 빠지게 됨은 심히 유감된 사실이다. 오늘 소위 판문점회담이 재개되는 이 마당에 있어 우리는 언제 까지나 외세의 농락에 유린될 수 없고 외세의 과오로 기인한 비극적 대상이 될 수 없다. 민족과 국가의 운명 정히 중대 간두에 선 이 순간 우리는 오직 우리의 힘으로 북진통일하는데 총궐기할 것을 신명 앞에 엄숙히 맹세할 뿐이다. 우리 천손 만대의 경복과 조국의 영예와 자유를 위하여 한사코 북진통일을 이룩할 것이며 우리 대한민국주권을 무시하는 여하한 국제협상도 절대반대하며 UN제국은 우리 민족의 절호에 귀를 기우려 정의를 살리기를 정중히 선언한다.



4286년 4월 26일

북진통일 서울시민궐기대회



구호


1 속지말자 침략자 크레므린 평화공세를

2 내몰자 공산오랑캐 압록강 넘어로

3 청년들아 북으로 총을 잡고 진격하자

4 멸공으로 통일하자 3천리강산

5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다오







1953.4.30


[ ....... 궐기대회 참가 총인원은 500여만 명 .......

......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한다는 결의문은 약 1만 통 ....... ]



경찰, 휴전반대 궐기대회 참가 연인원 통계 발표

평화신문 1953년 5월 4일


[부산] 통일 없는 휴전은 우리겨레에 주검을 갖다 주는 것이라고 절규하여 방금 전국적으로 북진 통일궐기대회가 개회되고 있거니와 30일 현재 치안국 집계에 의하면 동 궐기대회 참가 총인원은 500여만 명으로 각사회 단체 및 각지구의 대회에서의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한다는 결의문은 약 1만 통에 달하고 있다.






1953.5.29. 경향신문


북진통일에 접대부들 궐기



긴급 국무회의로 북진의 소리도 드높은 27일 파고다공원에서는 종로구 요식업자 접대부 들의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가 벌어졌다.


통일이 아니면 죽엄을 달라! 통일 없는 휴전은 6.25의 재판이다! 고 외치는 구호도 씩씩하게 대회끝에 시가행진에 들어가 이마에 수건을 힘있게 싸맨 1천여 접대부들


종로로부터 세종로등 시내 중심가로를 일주하였는데 이날만은 이들도 이나라 여성의 ?된 가치를 시민들 앞에 남김없이 발휘하였다.(사진은 시가행진하는 접대부들)






1953.6.9. 진명여중고



[ ...... 학생들이 눈물로 아우성치면서 생사를 가리지 않고 떠밀고 들어가려고 .......

..... 울분이 터지는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 ]



휴전반대 시위중 미군의 진압으로 여중고생 다수 부상


서울신문 1953년 6월 11일



9일 擧市的인 휴전반대 데모에 참가한 진명여중고 학생 25명이 해산을 명령하는 미군헌병들에 의해서 부상을 당한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즉 이날 시위에 참가한 시내 각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정오경 미 제8군사령부와 미 제5공군사령부 앞에 쇄도하여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반공포로의 즉시 석방’등 구호를 드높이 부르면서 열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때마침 미 제5공군사령부 후문을 경비 중이던 미군헌병이 쇄도하는 진명여중고 학생들을 제지하려고 이들을 구타한 나머지 동 여중고생 25명을 부상시켰다.


부상당한 학생들은 대부분이 타박상을 입었는데 팔목에 열상 입은 자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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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정보에 접한 시경 사찰과에서는 10일 상오 전기 학교 현장에 출동하여 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한바 있었다.


그리고 이날 학생들을 인솔하였던 담임선생과 동교 학생 및 학부형측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책임 인솔선생 李根永씨:불상사가 발생할까 해서 혹시나 학생들의 데모를 제지해 봤으나 5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눈물로 아우성치면서 생사를 가리지 않고 떠밀고 들어가려고 하는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교장 이세□씨:이날 내가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휴전을 반대하는 마음에서 그 같이 시위하는 학생들의 행동을 제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학생일솔 책임 洪妊順□:울분이 터지는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학부형 □□창씨:내 딸이 미군에게 맞아 죽었다 하더라도 민족의 굳은 의사를 표시해 주었으니 만족하게 생각한다. 미군들이 어린 소녀들의 눈물로 호소하는 애끓는 정신을 이해 못하고 폭행을 가하였음은 실로 유감이다. 이래서 과연 자유세계의 진실한 민주평화가 확립되겠는가. 미군 당국자들의 신중한 검토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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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6.12. 동아일보


우리의 갈 길은 오직 통일완수


정부안만을 지지
철시코 60만 시민궐기



굴욕적인 휴전조인을 한사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희구하는 3천만 겨레의 절규는 바야흐로 최고절정에 달하고 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어제 11일 국제시장을 비롯하여 신창동 대신동 등 전시내의 시장이 철시하는 한편 일반 상가점포 및 다방 등의 문은 굳게 닫혀지고 시민대중의 발인 시내 '버스'는 그 운행을 총정지하였다.


한편 이와 아울러 시내 충무로 광장에서는 상오 11시 40분부터 부산시 애국단체연합회 주최의 '정부대안 절대지지 국민총궐기대회'가 개최되었는 데 이날 대회장에는 각동민 상인조합 직장근로자 등 자발적으로 밀려든 수만여명이 참집하였다.


그리하여 동대회는 한청 이달우씨의 사회로 시작되어 양우정 김우정 양씨의 개회사 및 궐기사가 있은 다음 이대통령을 비롯하여 미대통령 유엔 사무총장 및 유엔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멧세-지'를 채택하고 이어 다음과 같은 결의문낭독이 있은 다음 만세3창으로서 하오 영시 15분 대회를 마치고 이어 보수동 파출소 미국대사관 앞을 통하여 시가행진에 드러갔다.


이날 시위에 있어 팔과 다리를 국가와 민족에 바친 수천 상이군인들은 역시 싸우다 쓰러진 앞 못보는 상이전우를 부축하여 가면서 '북진통일을 위하여 나머지 목숨을 바치겠다'는 피눈물의 구호와 '푸란카-드'를 내흔들고 시민의 앞장에 나섰다.





[ ..... 남녀학도 10여 만명 ......

.....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 .... 데모행진 ......

..... 이들의 부르짖음은 온 시내를 진동하였다. ....... ]



1953.6.12. 동아일보



10만 학생도 일대시위

상이병은 도청에서 대좌



또한 이날 전시내의 67개교 고등학교 학생과 10여 대학교의 남녀학도 10여 만명은 하오 1시 대신동을 비롯하여 영도 초량 충무로 서면 동래 등 6개 지구로 나누어 각기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를 개최하고 동 1시 40분경 부터는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등등의 구호를 절규하면서 데모행진을 감행하였다. 전기 10만명 이상의 데모 행진은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젊은이의 순정한 기개를 여지없이 발휘하여 남음이 있었고 이들의 부르짖음은 온 시내를 진동하였다.


한편 수천명의 상이군인들은 행진끝에 임시 중앙청내에 몰려들어 정부 및 입법부의 책임자를 만나 재기봉공의 각오를 표명하는 멧세-지 전달과 명확한 정부의 태도의 천명을 듣고저 하오 2시반 현재까지 광장에 주저 앉고 있다.






1953.6.11. 홍성군 이재명



[ ..... '통일 없는 휴전은 죽음이다' .....

..... 미제 수류탄에 자폭자살 ....... ]



1953.6.20. 경향신문


휴전반대의 불꽃

홍성 이씨는 통분 끝에 자결



우리의 주권을 무시한 휴전은 결사반대한다고 부르짖는 민족의 함성은 방방곡곡에서 들려오고 있다.


<이리> 지난 13일 이리 시민들은 역전광장에 시민총궐기 대회를 개최한 후 시가행진을 성대히 거행하는 한편 야간에 횃불 행진도 하였다.


(안중) 당지 평태군내 현덕 포승 청북의 3개면에서는 지난 11일 휴전결사반대 북진통일 총궐기대회를 군청광장에서 성대히 거행하였다.


(남양) 남양면민들은 지난 13일 남양국민학교 교정에 모여 휴전문제 한국제안관철 총궐기대회를성대히 거행하고 시위 행진을 행하였다.


(춘천) 춘천시 춘성군민들은 지난 13일 춘천여자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휴전문제 한국제안관철 총궐기대회를 성대히 거행하고 이대통령을 비롯한 각요로 보내는 멧세-지를 결의하였다.


(예산) 당지 시민들은 지난 13일 덕산에 주둔한 유엔군 통신부대 근방에 모여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홍성) 당지군내 11개면에서는 지난 11일 북진통일 총궐기대회를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통일없는 휴전과 포로강제송환에 울분한 홍성군 장곡면(홍성군 장곡면 산성리53)에 거주하는 이(이재명=27)씨는 궐기대회 선두에서 '통일 없는 휴전은 죽음이다'라고 통탄한 나머지 집에 돌아와 미제 수류탄에 자폭자살하여 통일을 애원하는 선구자가 되었다. 그런데 전기 이씨는 청양 경찰서에 근무 당시 보?한 미제 수류탄으로 자폭한 것이다.







1953.6.18.



[ ...... 국민의 절대적인 호응에 힘입은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 7000명을 석방 ........

...... 미국은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 5개 항을 보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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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3월 하순 그 동안 정체되었던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으며, 이에 비례하여 휴전반대국민대회 또한 열기를 더해 갔다.


이러한 국민의 절대적인 호응에 힘입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서야 비로소 한국 국민의 동의 없이는 휴전의 실효성을 거둘 수 없음을 알게 된 미국은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 5개 항을 보장했으며, 한국 정부는 유엔군측의 휴전협상 조건에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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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6.18.


반공포로 석방



발생원인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던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에게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한국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휴전협상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의제의 하나는 포로송환 문제였다. 군사분계선에 관한 협상은 「휴정협정」 조인시 접촉선으로 하기로 일찍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1951년 12월 11일부터 시작된 포로 송환에 관한 협상은 1953년 6월 8일에 가서야 비로소 합의에 도달했다.


이 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은 포로 송환원칙을 두고 유엔군측과 공산측이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측은 포로가 돌아갈 국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자발적 송환원칙’을 주장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 중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을 경우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공산측은 포로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본국으로 반드시 돌려보내야 한다는 ‘강제적 송환원칙’을 내세웠다.


이러한 원칙의 대립 때문에 장기화되던 포로송환 문제는 귀한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송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될 경우 상당수의 반공포로들이 자유의 품에 안기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이승만대통령은 미국과 유엔참전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을 결정했다.



내용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을 때 남한에서는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승만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면 한반도에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을 매우 우려했다. 미국은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나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이 곧 바로 개시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이승만대통령을 설득했다. 사실 미국은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경우 공산측이 휴전협상을 중단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은 반공포로들에게 자유를 되찾게 해주려는 목적 뿐만 아니라 방위조약과 관련하여 미국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전후하여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던 부산, 마산, 대구, 영천, 논산, 광주, 부평 등의 반공포로 수용소에서 2만7천여명의 포로들을 석방시켰다. 부평수용소에서는 400명이 탈출하면서 30명이 사망했다. 6월 21일까지 계속된 반공포로들의 탈출과정에서 모두 61명의 포로가 희생되었고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휴전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태에서 일어난 반공포로 석방 사건은 미국과 유엔 참전국들을 경악시켰다. 공산측은 탈출한 반공포로들을 전원 재수용할 것을 요구하면서 「휴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엔군측과 공산측의 반응은 반공포로 석방 이전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은 휴전협상이 한국 정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서 이승만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는 휴전은 현실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유엔군측과 공산측 모두에게 분명히 하고 휴전협상 과정 및 체결 이후에도 한국 정부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다.


미국 내에서도 반공포로 석방을 지지하는 여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군 포로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을 때 소련 정부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을 사상이 오염되었을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처형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미국은 휴전협상에서 ‘강제적 송환원칙’에 반대했던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은 그들을 자유의 품으로 데려오기 위해 유엔 참전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취해진 조치로서 이승만대통령의 가장 훌륭한 외교 업적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2717







1953.6.19.


[ ..... 중학생 1만여명은 ......

.....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애국포로석방 만세' ......
..... 열광적인 시위를 ........ ]



1953.6.21. 동아일보



반공포로석방 지지

서울서 수만 남녀중학생 시위



[ 서울분실발 ] 19일도 반공포로의 석방을 지지하는 일대 시위행렬이 수만명의 서울시민과 학생들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이날 상오 9시 서대문 일대 중학생 1만여명은 동지구 배재중학에서 시위를 시작하여 시청앞을 비롯한 시내 중심지 일대에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애국포로석방 만세' 등의 프라카-드를 높이 들고 열광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성신 숙명 수도 창덕 계성 동성 보성 등 7개 남녀중학생들이 궐기하여 애국포로석방지지의 구호를 절규하면서 5시간에 걸쳐 시내일대에 열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1953.7.8. 경향신문


비장한 우중시위

6일 2만여 학생, 시민들 단행



전국적으로 홍수사태를 일으키고 있는 폭우 속에도 불구하고 6일 2만5천여 명의 서울 시민 학생들은 시내 수개처에서 봉기하여 통일 없는 휴전반대 데모의 비장한 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날 상오 9시부터 성북구민 8천7백명 마포구민 1만명과 용산구민 3천명 성동 10개동회 5천5백여명이 궐기하여 비장한 우중시위를 단행하였다.


한편 시내 경서 선린 용산 상명 계성 보성 동성 성동 덕수상업 한영 수도여중 등 12개교 남녀학생들도 비바다로 화한 장안 거리에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위를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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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8. 정,부통령선거



[ ....... 유효표 74.6% ... 압도적 지지로 쉽게 대통령에 재선 .......


...... 민국당은 ... 정치자금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고 ......

...... 조봉암 ... 이시영이 무소속으로 .... 10% 내외 ........ ]




1954.5. 3대 민의원선거


[ ...... 자유당이 재석 203석 중 과반수가 넘는 114석 ........

..... 민국당은 .... 불과 15명만 당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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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4.5월에 실시된 지방의회선거는 정당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기초의회(시,읍,면의회)의 경우 17,559석 중 무소속이 42.5%인 7,469석을 차지하여 자유당의 4,444석이나 야당세력인 대한청년단 2,843석, 국민회 2,621석 보다 다수였다. 그러나 광역의회(특별시,도의회)의 경우 선거 직전에 족청의 이범석이 내무장관에 임명됨으로써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료, 경찰의 지원까지 받았던 자유당이 306석 중 147석을 차지하여 무소속 85석이나 한청 34석, 국민회 32석 보다 월등히 많은 당선자를 냈다. 기초든 광역이든 정당조직으로는 자유당세력이 지방의회를 거의 장악하게 되었고 그렇게 구성된 지방의회는 지방주민을 동원하여 직선개헌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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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경찰과 계엄군을 동원한 가택수색이 시작되고 심지어 구속중인 의원들도 보석출감하여 국회에 호송되었다. 이리하여 7월 4일 경찰과 청년단에 의해 포위된 의사당에서 기립투표 끝에 마침내 찬성 163, 반대 0, 기권 3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 되었다.



직선제 개헌을 위해 이와 같은 무리수를 동원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52년 8월 5일의 정,부통령선거에서 유효표 74.6%에 해당되는 5,238,769만 표를 얻어 압도적 지지로 쉽게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경찰,관료,그리고 자유당 조직이 총동원된 선거였기도 했지만 전쟁 중의 국민들로서는 이승만 외에 마땅한 대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국당은 이승만에 대항하여 후보를 내세운다는 것은 정치자금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고 초대 농림장관을 지낸 조봉암과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각각 797,504표,764,715표를 얻어 10% 내외의 득표율을 보였다. 한편 부통령에는 자유당내 족청계의 지지로 후보에 나섰던 이범석을 제치고 이승만이 지지한 무소속의 함태영이 유효표의 41.3%인 2,943,813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원래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 족청계가 장악하고 있었던 자유당은 52년 7월 전당 대회를 개최하고 정,부통령후보에 이승만,이범석을 각각 공천하였다. 그러나 개헌성공 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정도로 강력했던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함으로써 자유당을 확실한 친정체제로 전환시키고 싶었던 이승만은 전당대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부통령에 무소속의 함태영을 지지하고 정,부당수제를 총재제로 바꿀 것을 요구하여 잠재적 경쟁자인 부당수 이범석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이범석과 경쟁관계에 있던 장택상총리는 전국의 지방행정조직 및 경찰조직을 동원하여 함태영을 당선시켰는데 이것은 족청의 조직력이라 하더라도 경찰,관료의 뒷받침 없이는 선거를 치를 수 없는 당시 정치의 한계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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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등의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2대 직선대통령 선거와 그 뒤를 이은 휴전반대운동 및 반공포로 석방 등에서 국민들의 동원이나 지지를 끌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선거사상 처음으로 정당공천 후보제를 실시했던 1954년 5월 20일 3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물론 관료와 경찰의 선거개입은 여전히 중요한 변수였으나 이승만의 권위에 도전했던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하고 이기붕을 중심으로 확실한 이승만의 친정체제를 확립한 자유당이 재석 203석 중 과반수가 넘는 114석을 차지하였다.



반면 민국당은 개헌파동 후 현저한 세력 약화 속에서 자유당의 족칭계 제거기를 이용하여 1953년 11월 혁신강화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종래의 집단지도체제를 신익희를 중심으로 한 단일지도체제로 개편하는 한편 소장파를 책임부서에 등용하는 등 당세 만회에 노력하였으나 3대 총선에서 불과 15명만 당선됨으로써 원내교섭단체도 구성치 못하게 되었다. 또한 1,2대 국회선거에서 압도적 다수가 당선되었던 무소속 제도의 변화와 자유당의 압승에 따라 67명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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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7.27. 휴전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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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것은 2대 국회 후기에 들어서다. 그러니까 1953년 휴전 협정을 맺을 무렵 거세게 일어나는 북진 통일 운동 때부터 이승만의 의회 장악력이 점점 커지고 1954년 5.20선거에 의해 그야말로 이제는 자유당을 완벽하게 좌지우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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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감금된 의원들, 화장실 가려다 뺨 맞은 총리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8> 조봉암과 진보당, 여섯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2015.05.16







"이승만, 전쟁중에도 언론 검열, 간섭 안해"

鄭晉錫 한국외대 교수, "그는 끝까지 언론자유의 신념을 지켰다"



뉴데일리


“이승만, 끝까지 자유민주언론 신념 지켰다”
鄭晉錫 한국외대 교수 “韓末엔 국제잠각 뛰어난 기자로 활약”
6.25동란 등 국가 위기에서도 검열이나 논조 간섭 전혀 안해


온종림 기자




“이승만 建國대통령은 끝까지 언론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根幹)이라는 신념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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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수는 6.25 전쟁 기간 기사 검열을 실시한다는 공고가 잠시 잇었지만 검열기구를 두거나 제도적으로 운영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국가가 어렵고 혼란할 때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고 야당지가 여론을 주도하는 형국에서도 이 대통령은 신문의 논조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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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30016&C_CC=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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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전쟁의 와중에서도 선거가 중단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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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집권 12년은 국내외적으로 혹독한 시련의 시기로서, 자유주의 정책을 제대로 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승만은 6·25전쟁 중에도 언론에 대한 검열·통제를 하지 않았고, 지방선거를 실시하는 등 자유주의 원칙을 지켰다. 국회를 해산하거나 헌법을 정지시키지도 않았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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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박사 재임시 한국 신문들의 지면에는 반정부적인 기사들로 가득차 ....... ]



이승만의 대한민국 만들기

왜 한국인은 자기나라 위대한 지도자를 모를까



2010-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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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는 과연 독재자였는가.


이 박사 재임시 한국 신문들의 지면에는 반정부적인 기사들로 가득차 있다. 비판자들은 이런 것을 근거로 이 박사는 재임시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지적하지만, 이는 이 박사가 언론자유를 폭넓게 허용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비판자들은 당시 AP 통신이 한국의 언론자유를 세계 네번째, 다섯번째 수준으로 평가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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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제도의 확립 역시 빠뜨릴 수 없는 이 박사의 업적이다. 그의 재임 중 국민확교에서부터 대학원까지의 수많은 학교가 생겨났고 여기에서 배출된 인력이 그후 급속한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북한에서의 교육이 '위대한 지도자'의 전기와 사상에 집중하는 동안, 대한민국 헌법은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는 교육을 강조했다. 그 결과 한국 학생들이 열령한 이 박사 추종자가 아니라 가장 치열한 비판자가 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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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daily.co.kr/mobile/mnewdaily/newsview.php?id=54082






[ ...... 거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당 정부를 비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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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게 불리한 경우에도 어김없이 선거를 치렀다.


또한 국회를 해산하거나 인위적으로 정당을 개편한 적도 없었다. 야당을 탄압하기는 했지만 존속하지 못할 정도의 가혹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1955년부터는 민주당이 출현함으로써 자유당과 함께 양당제도의 틀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민당계의 <동아일보>, 흥사단계의 <사상계>, 카톨릭 계의 <경향신문>이 거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당 정부를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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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4.



[ ...... 내가 받아야 할 총탄을 너희들이 받았구나,

청년이 불의에 항거하지 않으면 그 나라에는 희망이 없는 거야! ........ ]



[편집자에게] '건국 대통령'을 다시 역사 속으로



김일주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2010.04.26



4·19 학생시위에 의해 정국이 요동치고 있을 때 우남(雩南) 이승만 대통령은 시위 학생들이 입원하고 있었던 서울대학병원을 찾았다. 내가 받아야 할 총탄을 너희들이 받았구나, 청년이 불의에 항거하지 않으면 그 나라에는 희망이 없는 거야! 부상한 학생들을 위로하면서 우남은 그들과 함께 울었다.


임기 후반의 과오 때문에 우남은 마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적(敵)인 양 비난받고 있으나, 그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공산침략으로부터 목숨을 다해 지켜낸 주역이다. 그리고 자신이 생명을 걸고 지켰던 그 체제의 제도에 의해 하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의 위대성을 학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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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을 보고 궐기하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니
이런 날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이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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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인 대목이 그의 대선 당시 야당 후보 조병옥이 유세 도중 급서(急逝) 했고, 때문에 우남이 무리해서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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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4월 22일, 시위 중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을 방문하여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은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젊은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라는 말을 남기고 하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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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의 이런 고귀한 뜻은 퇴임 후 각국 수반의 위로 편지에 대해 쓴 답장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를 위로하는 편지는 안 받겠소.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오. 부정을 보고 궐기하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니 이런 날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이오”.


이야말로 그가 20대 시절에 썼던 『독립정신』에서 “무식하고 천하며 약한 형제자매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국민정신이 바뀌기를 원하고 또 원하는 바이다.”라고도 말했던 것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새삼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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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 하야 결정, 민주주의 초석되다
독립정신의 실현…‘착한 권위주의 통치자’의 위대한 결단

조우석 2015.09.27







1960.4.29. 하야



[ ....... "평안하시라 여생" "할아버지 만세" .......

...... "위대한 이승만 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모십시다" ........ ]



1960.4.29.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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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가 들어간 이화장 대문 옆담엔 "평안하시라 여생" "할아버지 만세"라고 쓰여진 백지가 붙어 있었다. 이화장 정문앞엔 50명 이상의 보도원들과 다수의 노인 부녀자들이 경비헌병의 제지를 무릅쓰고 모여 들어 있었다.


하오 3시 20분 경 돌연 모대학생이라고 자칭하는 23세의 한 청년은 찦 위에 올라가 "위대한 이승만 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모십시다"라고 외쳤을 때 군중 가운데서 박수 소리가 났다.


이를 본 고대의 일 학생이 그 찦 위에 올라가서 "우리는 깨끗이 하야 한 이박사의 정치적 양심을 받아 들입시다. 우리는 값싼 동정심에서 벗어납시다. "라고 외치자 군중은 다시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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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박사의 모습이 보이자 그때마다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그를 맞았고 이박사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대답 ........ ]



1960.4.29.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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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모셔야 한다"고 선동하다 다른 학생들에게 끌려 내린 한군은 기자에게 "나도 지난번 데모를 한 사람입니다. 이기붕 정권이 부패한 것도 잘 압니다.그러나 할아버지만은 건실한 애국자입니다"라고 말 하였는데 한편 이를 말린 학생들은 "이제야 데모가 겨우 가라 앉아서 지금부터는 수습을 해야만 나라가 바로 서겠는 데 저런 자가 나타나서 민심을 동요시키고 가뜩이나 흥분된 국민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지금은 냉각이 필요합니다. 흥분만 해서는 나라가 망합니다"라고 기자에게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러한 약간의 혼잡이 있은 후 이박사가 허장관과 박찬일 비서를 대동하고 이화정 정원을 산책하며 화초를 가꾸는 모습이 담 너머 넘겨다 보였다.


몇번인가 이박사의 모습이 보이자 그때마다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그를 맞았고 이박사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대답하였는 데 이제는 10여년간 에 걸친 파란 많던 정부 수반의 자리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한가로운 여생의 보금자리를 찾은 안도된 평민으로서의 이박사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차라리 욕된 자리에 모시는 것보다 얼마나 노박사를 위해 좋은 것인가"하고 가슴속 깊이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역시 모든 권력을 떠난 인간 이승만은 멋있는 사람이었고 독재를 씻고 돌아가는 그에게 박수로 환송하는 동포들도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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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송건호는 ‘4.19’학생들이 기존 체제를 뒤엎는 혁명의 주역이 되지 못한 점을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송건호의 안타까움과 반대로, 바로 이러한 점이 바로 4.19가 자유민주 헌법 수호의 저항권으로서 충족 요건의 충족이 된 것이다.




4,19의 결과에 대해서는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보는 학생이 32%였고, 데모 당시의 소망에 비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고 답한 학생이 39.7%였으며, 전혀 우발적으로 생긴 결과라고 보는 견해 7.3%까지를 합한다면 이승만의 하야, 자유당정권의 붕괴 등 거창한 정변을 학생들의 반 이상이 전혀 예기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4.19 데모가 과격한 점이 없지 않았다고 본 학생이 40.9%, 무리였다고 보는 학생도 7.3%나 되며, 앞으로 학생들의 사회참여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학생이 겨우 9.5%에 불과한데, 이념적인 뒷받침만 해야 한다고 답한 학생이 70.2%에 달하고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4.19 당시의 학생들의 의식상황이 이러했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타도한 이승만의 계승정권이 들어앉았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조금도 모순을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제 우리의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하며 “질서유지”를 외치고 다녔다. (송건호,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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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이박사의 장례행렬을 보러 나온 서울 시민의 수를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 ........... ]



1965.7.27.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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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정오 무렵 정동 교회에서 나와 동작동으로 향해 떠난 영구차는 시청앞에 모인 약 35만명(경찰 추산)의 인파로 막혀 한동안 나아가지 못하다가 낮 12시 25분경 길이 트여남대문쪽으로 빠져 나갔다. 시청앞에서 있을 예정이던 이 박사의 녹음 방송 등 일반 시민과의 고별절차는 취소됐다.


연도


ㅇ 이화동 입구에서부터 광목줄로 영구차를 매어 앞뒤로 사방에 남녀 90명씩 7백 20명의 남녀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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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종로 5가 로타리에는 수천 시민이운집햇서 교통은 완전두절, 종로에 접어들자 영구행렬은 제대로 틀이 잡히기 시작 , 호상 변영태 씨가 선두에 섰으며 그뒤에 태극기 초상화 행장 만장을 든 배재중학생들 해군조악대에 이어 영구차가 따라 영구차량쪽에는 2대의 경찰 백차와 기마대가 호위했다.


국립묘지


ㅇ 삼각지에서부터 차로 운구하려던 예정을 바꿍어 영구행려렬은 계속 도보로 오후 2시 40분 한강 인도교를 통과 , 3시반경 동작동 국립묘지에 도착하여 용사문 앞에서 정부 주관으로 영결식을 가졌다.이 식전에서 박치순 목사의 기도와 박대통령의 조사(정총리 대독)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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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최대인파


연도의 만송시민
경찰은 백만추계


서울시경은 27일 고 이박사의 장례행렬을 보러 나온 서울 시민의 수를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라고 밝히고 이날 연도 경비를 위해 관하 3천명의 경관을 동원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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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는 달리 이박사 장례식행렬이 세종로 그 자리를 지나갈 때의 연도광경은 그의 영구가 하와이로부터 돌아 오던 그날의 성관보다 한층 장관을 이루었다. 이박사의 사면초상화를 앞세운 그뒤로 5백여개를 헤는 만장과 4백여개의 조화대열 그리고 소복에 상장을 두른 수천백명의 남녀수상객과 악대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황국 꽃으로 뒤덮힌 영구차 그만하면 고 우남에게 영광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국장은 그 보다 더 성할 것이며 국민장인들 그 이상 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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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072700209207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07-27&officeId=00020&pageNo=7&printNo=13465&publishType=00020




* 1965년의 서울인구는 3백80만





[ .......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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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秀 박사는 李承晩 대통령이 국민에게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을 자주 하시면서 국민들께 남기는 유언이라고 하셨어요.


다시 나라를 잃고 침략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제적, 문화적 침략에 대비해 정체성을 해칠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해가 운구되고 이화장에 빈소가 마련되자 전국에서 추모객이 몰려들었다.

장례식 때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참배를 하는 바람에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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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eziWR5fkqE


이승만 박사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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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 ..... "북한에서는 남한에 대해 전혀 배우지 않는다" ........ ]




탈북청소년, "북한서 南드라마 보냐"는 질문에…

남북청소년 우정 예능 '별친구'서 "시청시 총살" 답해



문은주 인턴기자(동국대 북한학과 2년) | 201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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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북한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묻는 시간에는 "북한에서도 한국 드라마 보냐"는 낸시의 질문에 탈북 청소년 최순미는 "그러면 총살당한다"고 답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어 "북한에서는 남한에 대해 전혀 배우지 않는다"는 탈북 청소년의 말에 낸시는 "같은 나라였는데 어떻게 안 배우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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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4503&num=10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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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사람들은 탈북자들로부터 북한의 많은 것들에 대해 궁금해하죠. 북한에서는 어디에 살았는지에 따라 자기 지역 소식밖에 몰라요. 철저하게 통제된 사회예요.

남한에 오니까 북한이 어느 정도인지 오히려 더 많이 알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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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 ...... 남조선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7백만명의 실업자가 득실거리는 ......... ]



[ ...... 북한 인민들이 인간 아닌 짐승 같은 생활을 .......

.... 상상도 못했다. 여기가 바로 지상의 낙원 ........ ]



경향신문 1980.7.12.



귀순한 북한주민 이영우씨 회견

당추방경고에 자유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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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 직전까지 개성시 판문군 일용품수매사업소에서 당세포비서 겸 공급지도원으로 일해 왔다는 이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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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한후에는 북의 선전이 모두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군초소에 도착해서부터 지금까지 모든게 북에서 듣던 것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주민들의 최근 생활 실태 = 내가 남한에 와서 가장 먼저 느낀것은 북한 인민들이 인간 아닌 짐승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식량 사정을 보면 1일 배급량이 노무자와 사무원에 대해 7백g씩인데 그나마 전쟁비축미라는 구실로 1백g씩을 떼고 6백g씩을 주고 있으며 노동력이 없는 노인이나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3백g밖에 주지 않는다.


그나마도 강냉이등 잡곡7에 쌀3의 비율로 주고 있어 강냉이를 삶아 먹고 사는데 그것도 비축미를 떼기 때문에 하루 한두끼는 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간장 된장이 모자라 소금으로 음식의 간을 맞추어 먹으며 육류는 돼지고기를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과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 , 그리고 1월 1일에 한해 가구당 5백g씩 배급하고 있어 평소에는 고기 구경도 할 수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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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괴의 전쟁준비실태 = 내가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느낀것은 남북한이 상호내왕을 한다면 북한은 당장 패하고 말것이라고 느꼈다.


김일성은 전쟁으로 조국통일한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실례로 모든 주요공장이나 기업소는 이미 오래전에 갱속으로 들어 갔고 인민으로부터 하루 1백g씩 빼앗은 식량을 각군별로 식량창고를 만들어 비축하고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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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대남인식 및 전쟁관 = 김일성의 선전대로 남조선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7백만명의 실업자가 득실거리는 것으로 믿고 있다.

모든 기술이 뒤떨어져 자체 생산품은 하나도 없고 모두 미국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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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소감 및 하고 싶은 말 = 남한이 이렇게 발전되고 행복한 세상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여기가 바로 지상의 낙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북한보다는 반세기는 앞서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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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7.14.경향신문

김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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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북한주민들은 식구가 많든 적든 간에 가구당 방한칸을 쓰기 때문에 식구가 많은 가정은 큰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의복도 연간 한벌 정도밖에 배급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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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8.


[ ...... 옥수수밭이 펼쳐져 .... 안내원은 "저것이 모두 고기"라고 ......... ]


경향신문 198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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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연변에는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북한측 안내원은 "저것이 모두 고기"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 저 옥수수는 사료로 쓰기 때문에 결국 고기나 마찬가지"라고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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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김만철 일행



[ ..... 『북한에서는 이밥(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 ]

[ ...... "남조선에서는 간장 된장을 마음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니 지금까지 헛살아 왔다" ........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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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8년에 보위부 경비대원으로 입대했다.

나는 북한이 제일 행복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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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1. 서해 표류중 구조 송환된 북한군 정광선 (19·상등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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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선은 조사에서 『북한군은 김정일을 옹호하는 5백만개의 총·폭탄이므로 그 어떠한 핵미사일 보다도 무서운 군대다. 우리는 김정일을 보위하고 죽으면 되기 때문에 남한 군대가 전쟁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무장을 해도 상관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는 지난 22일 오후 1시쯤 서해 연평도 서남방 해상에서 표류하던 거룻배에 우리 해경 함정이 접근하자 『나는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의 군인이기 때문에 남조선 배에 오르지 않겠다』며 『김정일 장군님의 배를 사수하겠다』며 손도끼를 들고 자해 위협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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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붓대로 수령결사옹위' 촉구

200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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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기관지 노동신문 최근호(11.1)는 `붓대는 우리 당의 위력한 사상적 무기'라는 제목의 논설을 통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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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이어 선군시대에는 모든 기자, 언론인들이 `혁명적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시대정신을 발휘해야 된다면서 '붓대를 총대를 틀어쥔 인민군대처럼 수령결사옹위정신의 체현자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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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k.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28






[ ..... 혁명적인 사상공세의 기수, 나팔수가 되자 .........

..... 김정은시대의 항일유격대 나팔수가 되어야 한다 .......... ]


201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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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이날 '기자, 언론인들은 혁명적인 사상공세의 기수, 나팔수가 되자'는 사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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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출판보도부문의 기자, 언론인들은 당의 위업에 무한히 충실하고 인민의 사랑을 받는 김정은시대의 항일유격대 나팔수가 되어야 한다"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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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700&num=103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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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김일성·김정일을 비난하는 삐라 내용을 보면서 수령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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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후보자에 대해 감히 비난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어련히 당에서 정해준 사람이 나왔겠거니 생각하고 찬성투표를 던지는 것이 북한주민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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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교관은 북한에 돌아가서 파키스탄에서 개가 쌀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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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왜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독립을 쟁취하고도, 정치·경제적 발전과 안정을 달성할 수 없었는가.



李光耀 선임장관은 『1960~1980년대까지 많은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을 실패로 몰아간 것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라고 결론지었다.


국가개입 경제정책은 자원분배의 효율성을 저해하고 부패를 심화시킴으로써, 開途國(개도국)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제3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환상에 사로잡혀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 ]



월간조선
2000.12.

하버드에 온 李光耀의 특별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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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후 수많은 신생 독립국가들이 예외 없이 사회주의의 노선을 따라 시행 착오를 거듭할 때, 이 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고, 또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꿰뚫어본 선견지명의 지도자였다.


이 전 대통령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헌신과 자유민주국가를 건국한 공로만으로도 전국민에 게 귀감이 되는 것이며, 민족의 지도자로서 추앙받을 충분한 자격 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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