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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승만
청년 이승만 2023-04-01 17:31:02 | 조회: 236
청년 이승만






1875.3.26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출생. 호는 우남(雩南).


1877 (2세) 서울로 이사하여 남대문밖 염동, 낙동을 거처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에서 자람. 그 때문에 그는 지역적으로 서북파 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

1879 (4세)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

1885~1894 (10세~19세) 사간원 대사간직을 지낸 이근수(양녕대군 봉사손)의 도동서당에서 수학.




1895.4.2.(20세) 신긍우(신흥우의 형)의 권유로 아펜셀러의 배재학당(培材學堂) 입학.

1896.5. (21세)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을 만나 서양 학문을 배움.

1896.11.30. 배재학당에서 양홍묵 등과 함께 <협성회>를 결성하고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음. 이승만은 서기, 회장을 맡음.








1896.11. 협성회



[ ...... 討論會를 위한 모임을 조직 ..... 민주적인 토론방식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開化意識을 함양하도록 ...... 協成會 ....... ]


[...... 배재학당 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가입도 권장 ......

...... 지방 협성회가 조직되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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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晩이 平山에서 상경한 직후에 배재학당에서 徐載弼(서재필) 박사 환영회가 열렸다. 환영회가 열린 날짜나 모임의 성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무렵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발간준비를 위하여 분주하던 때였는데, 그가 귀국한 뒤에 청중들 앞에서 강연을 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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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晩도 이 환영회에 참석했다. 이것이 承晩이 서재필을 처음 만나는 자리였는데, 서재필과의 만남은 承晩이 개화기의 주역의 한 사람으로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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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귀국하자마자 정부의 보조를 받아 「독립신문」을 발간할 준비를 시작했다. 金弘集 內閣은 독립신문사의 설립자금으로 4,400圓(「徐載弼 博士 自敍傳」에는 5,000圓)을 정부 예산에서 지급하고, 이와는 별도로 서재필이 앞으로 10년 동안 中樞院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월봉 300圓의 거액을 받도록 조치함으로써 그의 활동을 보장했던 것인데,63) 새로 구성된 貞洞派 內閣은 「독립신문」 발간에 한결 더 적극적이었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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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환영회가 있은 지 석달 뒤인 1896년 5월부터 서재필은 아펜젤러의 요청에 따라 매주 목요일 오후에 배재학당에 나와 世界地理, 歷史, 政治學 등 폭넓은 분야에 걸친 특별 연속강의를 시작했다. 이 특별 연속강의는 1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承晩이 歐美 市民社會와 조선의 정치현실, 그리고 國際社會에서의 조선의 위치 등에 대해 뚜렷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이 연속강의를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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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특강을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났을 때에 배재학당 학생들로 하여금 討論會를 위한 모임을 조직하도록 권장했다. 그는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과외활동으로 「리노니아」(Linonia)라는 文學討論會에 참가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었는데, 그것을 본떠 배재학당의 학생들로 하여금 민주적인 토론방식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開化意識을 함양하도록 하고자 했던 것이다.69) 모임의 이름을 協成會라고 정하고 11월30일에 그 첫 회합을 열었다. 그것을 보도한 「독립신문」의 다음과 같은 기사는 協成會에 대한 서재필의 기대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배재학당 학도들이 학원 중에서 협성회를 모아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의회원 규칙을 공부하고 각색 문제를 내어 학원들이 연설공부들을 한다니 우리는 듣기에 너무 즐겁고, 이 사람들이 의회원 규칙과 연설하는 학문을 공부하여 조선 후생들에게 선생들이 되어 만사를 규칙이 있게 의논하며 중의를 좇아 일을 결처하는 학문들을 퍼지게 하기를 바라노라.〉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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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는 매주 거르지 않고 열렸다. 주제는 처음에 〈國文과 漢文을 섞어 씀이 가함〉(제1회), 〈學徒들은 洋服을 입음이 가함〉(제2회), 〈學員들은 매일 運動함이 가함〉(제4회) 등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나라 宗敎를 예수교로 함이 가함〉(제7회), 〈노비를 속량함이 가함〉(제8회), 〈國民이 이십 세 된 자는 일제히 兵丁으로 택함이 가함〉(제13회), 〈士農工商 학교를 세워 인민을 교육함이 가함〉(제17회), 〈우리나라에서 上下議院을 설립함이 급선무로 결정함〉(제24회), 〈財政과 軍權을 남에게 맡기는 것은 곧 나라를 남에게 파는 것으로 결정함〉(제42회), 〈각 고을마다 우체를 설치하고 인민의 서신을 종편 왕래케 하는 것이 요무로 결정함〉(제47회), 〈나라를 開明하자면 新聞局을 각처에 설시하는 것이 요무로 결정하는 문제〉(제50회) 등과 같이 사회구습의 타파, 정치제도의 개혁, 실업 교육의 실시, 체신제도의 확충, 언론 창달 등 근대 시민사회의 필수적인 주요 문제들을 망라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 右議(찬성자)와 左議(반대자)를 두어 토론하게 하고 또 회의도 공개했기 때문에 토론 참가자들 뿐만 아니라 방청객들도 이 토론회에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토론회는 1896년 11월30일부터 1898년 7월16일까지 모두 50회가 열렸는데,73) 회를 거듭할수록 학생들의 변론술도 발전했다.


학생들이 박수치는 법을 배운 것도 이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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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가 흥미있게 진행되자 協成會 회원수도 급증했다. 회원은 배재학당 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가입도 권장하여, 일년 뒤인 1897년 12월에는 200명, 이듬해 3월에는 3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75) 일반인도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된 것은 협성회가 학생회의 범위를 벗어나서 개화운동을 위한 社會團體가 되어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협성회의 활동은 지방에까지 알려지게 되고, 그에 따라 지방 협성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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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 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孫世一 논설위원










1898.1.1. 주간신문 「협성회회보」 주필 이승만


1898.3.10. 종로 네거리 萬民共同會 연사 총대 이승만




1898.4.9.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사장 주필 이승만



[ ...... 「매일신문」.... 이 작은 신문은 새 韓國의 실질적인 誕生이었다.

──그것은 곧 이승만의 정치경력의 참된 시작이었다........ ]




1898.8.10. 「제국신문」 주필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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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졸업을 한 뒤에도 계속해서 배재학당에 나와 초등반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協成會 활동에도 열성을 쏟았다. 그는 토론회에서 가장 자주 연설자나 토론자로 선임되었고, 연설 예정자가 다른 일로 불참할 때에는 연설을 대신하기도 했다. 토론의 주제에 따라 결론이 찬성쪽으로 나든 반대쪽으로 나든 이승만이 참가하는 쪽이 연설을 잘한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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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보」 발행으로 協成會 급성장


협성회 회원들은 자신들의 토론회가 회를 거듭할수록 사회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토론회의 내용과 결과를 회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一般國民과 政府官僚들에게도 알릴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제29회 토론회는 「우리 중에 일주일 간 會報를 발간함이 가함」이라는 주제를 두고 토론한 끝에 회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제33회 토론회는 「新聞局을 각처에 배설하여 인민의 이목을 넓힘이 가함」이라는 주제로 新聞의 중요성을 더욱 폭넓게 토론하고 있다.


신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開化派 知識人 사회에서 보편화하고 있었다. 독립협회도 1897년 12월의 토론회에서 「인민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을 열리고 밝게 하려면 본 나라와 다른 나라들의 신문지를 널리 발표하는 것이 제일 긴요함」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고 있다.2) 국내신문뿐만 아니라 외국신문들도 많이 보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98년 1월1일을 기하여 주간신문 「협성회회보」(당시의 표기는 「협셩회회보」)가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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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성회회보」는 協成會의 기관지이기는 했으나 편집체제와 내용은 완전히 一般綜合紙였다. 실제로 발간 취지도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음은 다음과 같은 「논설」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한 번 발간하기에 십여원씩 밑져 가며 이 회보를 발간하는 것은 전국 동포의 이목을 열어 내외국 형편이 어떻게 될 줄을 대강 알게 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가 일심 협력하여 우으로 임금과 나라를 받들고 아래로 우리 동포의 집안들을 보호하여 가자고 발론하여 시작한 것이러니 …〉6)


이러한 발간취지는 「독립신문」의 그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한글전용을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체제도 「독립신문」과 똑같이 1면에는 「논설」, 2면과 3면에는 「내보」와 「외보」를 싣고, 4면에는 협성회 소식인 「회중잡보」를 실었다. 이 「회중잡보」도 협성회의 당시 사회적인 비중으로 보아서 일반에게 뉴스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7) 그런데 「코리언 리포지터리」가 「협성회회보」를 한국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최초의 신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독립신문」의 발행인 徐載弼이 美國市民權을 가진 사람이고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일 것이다. 이승만은 「협성회회보」를 발행한 일과 관련하여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守舊派 政權 아래 8년 동안 新聞 없는 時代 겪어


〈나는 몇몇 청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신문을 시작했는데, 「협성회회보」는 한국사람들만으로 제작되는 신문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것이었다. 작은 신문이기는 했으나 나는 그 지면을 통하여 自由와 平等이라는 위험한 사상을 나의 힘을 다해서 역설했다. 아펜젤러씨나 그밖의 사람들이 내가 急進的인 行動을 계속하다가는 목을 잘리게 될 것이라고 여러번 충고해 주었으나 그 신문은 친러파 정부와 러시아 公使館의 威脅으로 생겨난 여러 가지 재난과 위험을 겪으면서도 계속 발간되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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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성회회보」가 창간될 때에는 서울에서 네 가지 신문이 발간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1895년 2월17일부터 발행하고 있던 「漢城新報」, 1896년 4월7일에 徐載弼이 창간한 「독립신문」, 그리고 기독교신문으로 1897년 2월2일에 아펜젤러가 창간한 「죠션크리스도인회보(The Christian Advocate)」(12월8일자 제45호부터 「대한크리스도인회보」로 改題)와 두 달 뒤인 4월1일에 언더우드가 창간한 「그리스도신문(The Christian News)」이 그것이었다. 일본 정부의 보조를 받아 발행되던 「漢城新報」는 대판 네 면 가운데에서 세 면은 한글, 한 면은 일본어로 발행하고 있었는데, 이 신문은 한국의 국체를 모독하는 글을 싣는가 하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는 고종을 비웃는 글(동요)을 실어 한국 정부와 국민들을 격분시키기도 했다. 또한 이 「漢城新報」는 明星皇后(閔妃) 弑害를 모의한 일본인들의 비밀 본거지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근대적 신문의 효시는 1883년(고종20) 10월1일(양력 10월31일)에 정부기관인 博文局에서 발행한 「漢城旬報」였다. 朴泳孝, 兪吉濬 등 개화당의 노력으로 탄생한 이 신문은 비록 정부가 발행하는 것이기는 했으나 國內外의 時事를 비롯하여 西洋의 新文化를 소개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이듬해에 일어난 甲申政變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1885년 12월21일(양력 1886년 1월25일)에 속간되면서 열흘에 한 번씩 발행하던 것을 1주일에 한 번씩 발행하게 되어 제호도 「漢城周報」로 고쳤다.



그러나 「漢城周報」도 발간된 지 2년 반 만인 1888년 6월6일(양력 7월7일)에 재정난으로 폐간되고, 그 뒤 수구파의 득세 속에서 8년 동안이나 신문 없는 암흑시대가 계속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창간된 일본인들의 「漢城新報」가 얼마나 왜곡된 영향을 끼치고 있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독립신문」이 창간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독립신문」의 인기와 영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서울의 官僚와 知識人들 사이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시골 장터에서까지 널리 읽혔다. 郡守가 장터에 사람을 모아놓고 글 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장꾼들에게 「독립신문」을 읽히어 들려주는 일도 있었다.9) 그리하여 한 부가 최소한 200명에게 읽혔다고 뒷날 徐載弼은 술회했다.10)


「회보」 창간에 40전 기부해


「협성회회보」는 이러한 「독립신문」을 의식하면서 제작되었다. 그런데 「독립신문」이 정부로부터 4400圓의 보조금을 받아 발간된 것11)과는 대조적으로 「협성회회보」는 순전히 회원들의 출연금과 유지들의 찬조금으로 발간되었다는 것은 특기할만하다. 「협성회회보」 창간호는 제호 바로 밑의 「논설」란 앞에 본문보다 훨씬 큰 2호 활자로 〈이 회보는 매 토요일에 한 번씩 발간하고, 파는 처소는 배재학당 제일방이오 값은 매장에 엽전 너 푼씩이니 사 보시기를 바라오〉라는 「광고」를 내고, 또 「회중잡보」란에는 〈1897년 12월30일까지 협성회에서 의연금 수입한 금액이 138원 11전이며 지출된 금액이 86원 7전으로서 현재 52원 3전 8리가 남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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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성회는 「협성회회보」의 발행과 보급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협성회회보」 1월 15일자(제3호)의 「회중잡보」에는 〈회원은 회보를 친히 찾아다 보고 그외 회보 보는 사람에게는 갖다 주기로 작정되었더라〉는 기사가 눈에 띄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구독자들에게 배달까지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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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성회회보」가 사회적으로 큰 호응을 얻자 협성회는 마침내 야심적인 日刊紙 발행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협성회회보」를 창간하고 석 달도 되지 않은 때였다. 협성회는 3월19일의 토론회에서 「일주일 간에 한 번씩 내는 회보를 매일 한 번씩 발간하자고 작정」 했다.20) 그리하여 「협성회회보」는 4월2일자로 발행된 제14호를 마지막으로 하고, 제15호 발행 날짜인 4월9일부터 우리나라의 첫 일간지인 「매일신문」(당시의 표기는 「일신문」)이 창간된 것이다. 그때까지 「독립신문」은 주 3회 발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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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이 「논설」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일간지를 발행하게 된 것을 다음과 같이 자부하고 있다.


〈대범 서양제국서는 국중의 신문 다소를 가지고 그 나라 열리고 열리지 못함을 비교하거늘 돌아보건대 우리나라에 신문이 얼마나 되느뇨. 과연 부끄러운 바라. 만행으로 「독립신문」이 있어 영자로 발간하매 외교상과 나라 권리 명예에 크게 관계되는 영광이라. 그외 「한성신보」와 두세 가지 교중(敎中) 신문이 있으나 실상은 다 외국사람의 주장하는 바요, 실로 우리나라 사람이 자주하여 내는 것은 다만 「경성신문」과 우리 신문 두 가지뿐인데, 특별히 매일신문(일간신문)은 우리가 처음 시작하니 우리나라 사천년 사기(史記)에 처음 경사라, 어찌 신기하지 않으리오. 아무쪼록 우리 신문이 문명 진보에 큰 기초가 되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노라〉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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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4월12일자(제3호) 「논설」은 두 면에 걸쳐 신문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 「논설」은 〈신문이라 하는 것이 나라에 크게 관계가 되는 것으로 세 가지 목적이 있으니 첫째 학문(學問)이요, 둘째 경계(經界)요, 셋째 합심이라…〉고 전제하고 그 세 가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는데, 첫째의 학문이란 신문의 啓導(계도)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고, 둘째의 경계는 批評과 告發의 기능, 셋째의 합심은 國民的 統合의 기능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이승만을 비롯한 협성회 간부들이 신문의 기능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말해준다.


〈새 韓國의 실질적인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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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재학당에서 다른 학생들과 「협성회회보」를 시작하였고, 그 주필이 되었다. 작은 학생 신문이 정부고관들을 비판하게 되자 곧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아펜젤러 교장은 우리들에게 논설을 검열받으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 신문으로는 발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립정신이 강한 柳永錫과 나는 학교를 나와서 한국 최초의 일간지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우리더러 외국의 보호를 받지 않고 그런 신문을 발간하면 위험하다고 했으나 「매일신문」은 아주 호평을 받게 되어, 徐載弼 박사는 우리 신문 때문에 자기의 신문(독립신문)을 팔 수 없다고까지 하게 되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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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올리버가 「매일신문」의 발행과 관련하여 〈그(이승만)의 주제는 政府와 社會의 改革을 위한 정열적이고 반복적인 요구였다. 이 작은 신문은 새 韓國의 실질적인 誕生이었다. ──그것은 곧 이승만의 정치경력의 참된 시작이었다〉25)고 적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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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가 1주일 뒤인 5월27일자에야 회장인 이승만이 社長과 記載員(記者 내지 主筆)을 겸한다는 기사가 실렸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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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프랑스의 利權要求 비판



이승만이 협성회 회장이 되고 나서 사흘 뒤인 5월16일자 「매일신문」은 1면 전면과 2면에 걸쳐 러시아와 프랑스가 韓國政府에 利權을 요구한 외교문서의 내용을 폭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國家機密과 국민의 알 權利의 마찰이라는 언론의 본질적인 논제의 하나가 한국 언론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요구는 목포와 진남포 조계지에 인접한 사방 10리 안의 땅을 섬들까지 빼지 않고 사겠다는 것이었고,34) 프랑스의 요구는 평양의 석탄광산을 채굴하여 京義線 철도 부설공사에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35) 프랑스는 이미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획득해 놓고 있었다.

「매일신문」은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기사 끝머리에 다음과 같은 선동적인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 말을 들음에 치가 떨리고 기가 막히어 분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는지라. 우선 기재만 하거니와 이는 참 대한 신민의 피가 끓을 소문이라. 대소 인민 간에 대한의 신민된 이들이야 이런 소문을 듣고 잠시인들 어찌 가만히 앉았으리오. 우리 동포들은 일심으로 발분(發憤)하여 속히 조치할 도리를 생각들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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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와 은밀히 교섭하여 이권을 챙기려 했던 열강에게 「매일신문」은 여간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신문」이 이때의 상황을 〈외국 공영사도 이 무세(無勢)한 종이조각을 꺼리기를 군사 몇만 명보다 어렵게 여기고…〉46)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정부와 러시아 및 프랑스는 마침내 당초의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언론과 독립협회의 외교적 승리였다.




한국 최초의 언론법 新聞紙條例 제정



이때의 러시아 公使의 항의 조회에는 신문을 규제할 법을 제정하라는 요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10월에 이르러서는 日本 公使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도 주한 외교사절 대표자격으로 外交文書를 신문에 보도하지 못하게 하라는 조회를 外部에 보내왔다. 그리하여 신문관계법의 제정문제는 한국정부 안에서 논의가 계속되다가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난 직후인 1899년 초에 한국 최초의 언론법인 新聞紙條例47)가 제정되었다. 말하자면 李承晩이 러시아와 프랑스의 비밀 외교문서를 폭로한 것이 新聞紙條例를 제정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문지조례는 시행되지 않은 채 폐기되고, 1907년에 가서야 흔히 「光武新聞紙法」으로 일컬어지는 新聞紙法이 제정되었다.



「매일신문」이 일간으로 발행된 것은 다른 신문에도 큰 자극이 되어 「독립신문」도 7월1일부터 일간으로 발행되었고, 뒤이어 8월10일에는 「제국신문」이, 9월5일에는 「皇城新聞」이 일간 신문으로 창간되어 마침내 한국에도 일간 신문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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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신문」은 「매일신문」이 속간된 8월 10일에 창간되었다. 「제국신문」을 처음 준비한 사람들은 「매일신문」 창간에도 참여했던 以文社그룹이었는데, 이들 新興商工業者들은 4000~5000원의 자본56)으로 경영을 맡고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있던 李鍾一, 李承晩, 柳永錫 세 사람이 편집을 맡는 형태로 출발한 것이었다. 以文社 명의로 신문발간 인가를 받은 다음 사장은 李鍾一이 맡았고, 李承晩은 主筆로서 주로 「논설」을 집필했다.57)


「제국신문」은 창간사격인 「고백」에서 다음과 같이 발간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본사에서 몇몇 유지한 친구를 모아 회사를 조직하여 가지고 새로 신문을 발간할 새 이름을 제국신문이라 하여 순국문으로 날마다 출판할 터이니, 사방 첨군자(僉君子)는 많이 주의들 하여 보시오.

대개 제국신문이라 하는 뜻은 곧 이 신문이 우리 대황제 폐하의 당당한 대한국 백성에게 속한 신문이라 함이니 뜻이 또한 중대하도다. 본래 우리나라 대한이 개국한 지 사천여년 동안에 혹 남에게 조공도 하고 자주도 하였으나, 실로 대한국이 되고 대황제 존호를 받으시기는 하늘 같으신 우리 황상(皇上) 폐하께오서 처음으로 창업하신 기초라. 우리 일천이백만 동포가 이같이 경사로운 기회를 즈음하여 나서 당당한 대한제국 백성이 되었으니 동양반도국 사천여년 사기에 처음되는 경사라.…〉



대한제국의 선포를 경축하는 뜻으로 제호를 「제국신문」으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면제작 방향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그동안 국중에 신문이 여럿이 생겨 혹 날마다 발간도 하며, 혹 간일(間日)하여 내기도 하며, 혹 일주일 동안에 한두 번씩 내기도 하는데, 그중에 영어신문이 하나이오 국한문으로 섞어서 내는 것이 하나이오 일어로 섞어 내는 것도 있으되 그 중에 국문으로 내는 것이 제일 긴요할 줄로 믿는 고로 우리도 또한 순국문으로 박일 터인데, 논설과 관보와 잡보와 외국 통신과 전보와 광고 등 여러 가지를 내어 학문상에 유조할 만한 말이며 시국에 진적(眞的)한 소문을 들어 등재하려는 바, 본사 주의인즉 신문을 아무쪼록 널리 전파하여 국가 개명에 만분지 일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특별히 값을 간략히 마련하고 날마다 신실히 전하여 보시는 이들에게 극히 편리하도록 주의하오니…〉58)


庶民層과 婦女子들 읽게 신문값 싸게 매겨


이처럼 「제국신문」의 주된 발행목적도 「독립신문」이나 「매일신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국민 계몽에 있었다. 다른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한글전용을 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특히 신문값을 다른 신문에 비하여 싸게 매긴 것은 庶民層과 婦女子들에게까지 읽히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뒷날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된 뒤에 「제국신문」이 다음과 같이 특별히 한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한글전용이 오직 널리 읽히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제 나라 글을 숭상하지 아니하고 남의 나라 글을 배우되 제 나라에 글이 없는 고로 인민생활상에 제일 필요되는 내 나라 역대 사적이 없어서 중원(中原:곧 中國) 역사부터 가르치고 배운즉 … 그런 고로 자기 나라는 소홀히 알고 남의 나라 위하는 사상이 팽창하여 사람마다 독립사상이 없고 의뢰심만 남아서 남에게 의뢰하기를 좋아하다가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은 확실한 사실이로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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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국신문」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다가 제호의 연원이 된 大韓帝國과 운명을 같이하여 1910년 8월2일에 폐간되었다. 李承晩은 뒤에서 보듯이, 옥중에 있으면서도 2년 3개월 동안이나 비밀히 「제국신문」의 논설을 써서 내보냈는데, 출옥하고 나서도 석달 뒤에 美國으로 떠날 때까지 「제국신문」 제작에 관여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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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李承晩의 政治經歷은 言論活動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언론활동의 내용은 自由와 民權을 위한 투쟁이었다. 李承晩의 의욕적인 언론활동은 그 자신을 民權運動의 젊은 지도자로 확고한 위치에 올려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 日刊紙時代를 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의 언론활동은 1898년 한 해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언론활동의 경험은 뒤이은 옥중생활과 독립운동의 전 과정에서 이승만이 무엇보다도 언론을 통한 선전활동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열성을 기울이는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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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이승만과 김구(8)
李承晩, 日刊紙시대를 열다

孫 世 一







1898.3.10. 종로 네거리 萬民共同會 연사 총대 이승만




[ .... 연사들은 대한이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고문관의 철수를 역설했다 .......

李承晩, 현공렴, 張鵬(장붕) 세 사람을 총대위원(대표)으로 선출하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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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정부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통보 ....... ]


[ .... 독립협회의 대중운동의 향도 역할을 ........ ]





(1) 첫 萬民共同會의 연사와 총대위원




1898년 3월10일 오후 2시에 종로 네거리에서 이 나라 최초의 근대적 大衆集會가 열렸다. 이날짜 「독립신문」은 〈오늘 오후 두 시에 종로에서 유명한 유지각한 이들이 좋은 연설을 한다고 뜻있는 군자들을 청하였다더라〉는 예고기사를 싣고 있다. 이 집회는 徐載弼, 李完用, 尹致昊 등 독립협회 간부들이 은밀히 준비한 것이었는데,1) 미국 생활의 경험이 있는 이들은 미국 대중집회의 격식과 효과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날의 집회에 독립협회 간부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培材學堂과 京城學堂의 젊은 교사와 學員들을 연사로 내세우기로 했다.



李承晩은 玄公廉(현공렴), 洪正厚(홍정후) 등과 함께 이 역사적인 대중집회의 연사로 선정되었다. 李承晩과 홍정후는 배재학당 대표였고, 현공렴은 경성학당 대표였다. 현공렴은 開化派 史學者 玄采(현채)의 아들로서 일본에 유학한 뒤에 경성학당에 다니면서 光武協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을 맡고 있었다. 협성회 간부 李承晩이 독립협회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집회에는 주최 쪽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독립신문」과 鄭喬(정교)는 이날 모인 군중이 1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했고,2) 집회를 참관한 외국 사람들도 8000명에 가까운 인파로 추산했다.3)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이 모인 것이었다.




백목전 다락 위에서 연설



집회는 먼저 米廛(미전)의 쌀장수 현덕호를 회장으로 선출했는데, 그것은 일반대중의 참여를 과시하기 위한 배려에서였을 것이다. 연사들은 白木廛(백목전) 다락 위에서 연설을 했다. 집회의 목적은 외교 현안인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키자는 여론을 조성하고, 이 집회의 이름으로 그러한 주장을 담은 메시지(편지)를 정부에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연사들은 대한이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고문관의 철수를 역설했다.4) 청중들은 박수로서 『옳소(可)』라고 하면서 〈사람마다 대한이 자주 독립하는 것을 원하는 것〉을 표시했다.5) 이어 대회는 외부대신에게 보내는 회중의 일치된 뜻을 밝힌 편지를 채택하고 李承晩, 현공렴, 張鵬(장붕) 세 사람을 총대위원(대표)으로 선출하여 그들의 이름으로 이 편지를 외부에 전달하도록 했다.



대회는 큰 성공이었다. 독립협회가 이 집회를 계획할 때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이 「民會」라고만 했었으나, 모인 사람들이 1만여 명이 되었다고 하여 이날 이후로는 대중집회를 가리켜 「萬民共同會」라고 일컫게 되었다.



이날의 집회는 질서정연했고 연사들의 연설 기조도 침착했다.6) 그리고 외국인들도 많이 참관했는데, 개중에는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Alexis de Speyer)도 공사관원들과 함께 그 자리에 나와 있었고,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등 미국인들도 와서 지켜보았다. 이날의 집회는 정부와 서울의 외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독립협회의 간부들은 대회가 질서정연하게 진행된 것에 만족했다.7)



외부대신 閔種默(민종묵)은 이튿날 세 총대위원 앞으로 〈공동한 의론을 알았으며 러시아 고문관과 사관을 보낼 일은 탁지부와 군부의 소관이요 또한 정부에서 어떻게 의판하기를 기다릴 것이라〉는 답장을 보냈다.8)


李承晩은 이 답장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12일에 종로 네거리에 나가 붙였다.


그런데 이날 이틀 전에 만민공동회가 열렸던 자리에 독립협회와는 관계없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리고 있었다. 남촌 사는 사람들이 나서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때와 같은 취지의 연설을 했고, 또 북도 사람 네 명과 시위대 사관 두 명이 반대연설을 하려다가 시민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9)




러시아人 財政顧問과 軍事敎官 철수



1898년은 독립협회의 自主民權運動이 절정을 이룬 해였다. 독립협회는 朝鮮이 淸國으로부터 獨立한 것을 기념하여 迎恩門 자리에 獨立門을 세우고 그 주변에 獨立公園을 조성할 것을 사업목적으로 하여 1896년 7월2일에 결성된 사업단체였으나, 실제로는 徐載弼 등 개화파들이 처음부터 이 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당을 목표로 하여 결성한 政治結社였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계몽적인 講演會에 이어 1897년 8월29일부터는 배재학당의 協成會와 같은 토론회를 정례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정치결사로서의 협회의 역량을 배양할 뿐만 아니라 자주민권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급속히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1898년에 접어들어서는 上疏(상소)와 정부 각부에 보내는 편지와 萬民共同會라는 대중집회를 통하여 열강의 이권침탈 저지와 의회설립 요구 등의 運動을 강력히 전개했다.



3월10일의 만민공동회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협회의 회원수도 급속히 늘어났고, 公州, 平壤, 大邱, 宣川, 義州, 木浦, 仁川 등 각지에 지회가 설립되었다.10)

정부는 독립협회의 주장대로 3월12일에 러시아에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를 요구했고, 17일에는 러시아 정부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통보해 왔다.11) 뿐만 아니라 절영도 석탄기지 租借(조차) 요구도 철회하고, 3월1일에 설립한 한러은행도 철폐했다.



독립협회는 승리감에 넘쳤다. 러시아의 이러한 조치는 때마침 러시아의 극동정책이 한국문제보다도 만주문제에 「모험적 진출」을 도모하던 때였기 때문이었는데,12) 이러한 기묘한 사정이 독립협회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게 만들었다.




徐載弼의 재출국 막기 위한 萬民共同會 주도



3월10일의 만민공동회 이후로 독립협회의 소장파 활동가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 李承晩은 「매일신문」을 펴내는 데 열중하면서도 독립협회의 대중운동의 향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 4월30일에 崇禮門(숭례문: 남대문) 안에서 열린 서재필의 在留(재유)를 요청하는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회장 尹致昊의 동의도 받지 않고 열린 것이었는데, 李承晩은 이 대회에서도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그 동안 독립협회가 대중적 기반을 확대해 가면서 자주독립을 강조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며 고급관료들의 무능과 부패를 고발하는 운동을 강력히 전개하자, 친러 수구파 정부와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은 서재필을 해고하여 추방함으로써 독립협회의 활동을 저지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 재정고문과 교련사관이 해고되어 출국하게 되자 정부는 외국인고문 해고를 빙자하여 4월에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하고 출국을 요청했다.



독립협회는 4월25일에 그러한 조치는 부당한 일이라고 극력 반대하면서 서재필의 再雇騁(재고빙)을 요청하는 편지를 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정부는 사흘 뒤인 4월28일에 〈서재필은 이미 해고되었으므로 在留 여부는 본인의 의사에 달린 것〉이라고 사실상 거절하는 답장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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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안 만민공동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열린 것이었다. 이날의 만민공동회는 정부에 서재필의 재고빙을 요청하는 편지를 다시 보냄과 동시에 서재필에게도 재유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결의하고, 李承晩과 함께 崔廷植(최정식)과 鄭恒謨(정항모)를 총대위원으로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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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204100063&ctcd=&cpage=1

2002년 4월호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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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는 시전의 쌀장수 현덕호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현공렴·이승만·홍정후·조한우·문경오 등이 연설하였다. 이 시기 연설은 의사전달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 때 기록에 의하면, “백목전(백목천을 팔던 가게) 다락 위에서 연설하였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독립신문, 1898년 3월 12일자 잡보), 이것은 당시의 연설형태를 보여준다. 즉, 당시 종로에 있던 시전 가게의 건축 표준양식은 2층이었다. 1층은 가게이고 2층은 1층보다 높이가 낮은데 창고로 사용하면서 ‘다락’이라고 불렀다.


이 다락에서는 독립협회 간부들의 토론회도 열렸으며, 3월 10일에는 연사들이 백목전 2층 다락으로 올라가 집 밖을 내다보며 연설을 했던 것이다. 마이크가 없던 당시에는 이것이 청중들과 교류하는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조선 역사 최초의 의미 깊은 대중연설이었을 것이다.




<참고>

1898년 3월 10일 만민공동회 관련 기사



경계자는 아라사 공사가 외부에 조회 한 사건에 대하여 일만 백성이 공동회의를 하와 대한에서 아라사에 고빙한 탁지부 고문관과 군부에 교련사관을 일병 해고하여 대한의 자주권을 튼튼케 할 일로 가(可)하다는 의론을 결정하여 이에 앙포하니 조량하옵셔서 만민의 동심앙망하는 것을 맞추게 하심을 바란다고 하였는데, 총대위원은 이승만, 장붕, 현공렴 삼씨더라.

이 회에 잠시 모인 사람은 만 여 명인데, 사람마다 대한이 자주독립하는 것을 원하는 것 같고, 정부에서 이 조회 답장을 민심을 따라 하기들을 바라는 모양이더라. 연설한 이는 현공렴, 홍정후, 이승만, 조한우, 문경오 제씨이더라.


(독립신문 1898년 3월 12일자 잡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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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407&index_id=cp04070032&content_id=cp040700320001&search_left_menu=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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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10.12.



[ ..... 나륙법과 연좌법 부활 기도 .... 수구파 7대신(申箕善, 李寅祐, 沈舜澤, 尹容善, 李載純, 沈相薰, 閔泳綺)의 규탄과 전면적 개각요구 ....... ]

[ ..... 7대신을 모두 면직시키고, 독립협회가 신임하는 朴定陽을 署理議政事務(서리의정사무), 閔泳煥을 군부대신 등으로 하는 새 각료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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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과 皇太子에 아편 탄 커피 올려


외국인 용병부대 설치문제와 때를 같이하여 발생한 金鴻陸(김홍륙) 毒茶事件(독다사건)은 다시 한번 정국을 뒤흔들었다. 김홍륙은 러시아 공사관 통역으로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때에 고종의 측근에서 러시아 세력을 업고 온갖 전횡을 자행했고 환궁한 뒤에도 갖은 농간을 부렸던 사람이데, 독립협회의 국정감시로 정사에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고, 高宗도 8월25일자로 그를 해임하여 海島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홍륙은 그의 심복 孔洪植(공홍식)에게 아편 한 냥쭝을 주어 高宗이 마시는 차에 타게 했고, 공홍식은 하수인을 시켜 9월11일에 고종과 황태자에게 아편을 탄 커피를 올렸다. 고종은 구토를 하고 황태자는 인사불성이 되는 큰 위난을 당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심문하면서 경무사 閔泳綺(민영기)는 죄인을 잔악하게 고문하고, 9월24일에 열린 中樞院은 의관 34명의 이름으로 신법을 개정하여 이미 폐지된 拏戮法(나륙법: 대역죄와 같은 큰 죄를 지으면 그 자손들도 연좌하여 사형에 처하던 형법)과 連坐法(연좌법)을 부활시킬 것을 정부에 요구하는가 하면, 법부대신 겸 중추원 의장 申箕善(신기선) 등은 이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독립협회는 9월25일의 통상회의에서 반역사건을 규탄하고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로 죄인을 악형으로 고문한 사실과 중추원의 나륙법과 연좌법 부활 기도는 국민의 生命과 財産의 自由를 침해하는 것이며 신법을 개악하는 것이라고 결의하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것은 독립협회가 그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해 있었음을 말해 준다.


독립협회는 10월1일에 중추원 문앞에서, 이튿날에는 高等裁判所 문앞에서, 6일에는 다시 고등재판소 문앞에서, 그리고 7일에는 高宗이 거처하는 慶運宮의 仁化門 앞에 나아가 상소를 올려 악법의 부활기도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高宗과 수구파 각료들은 독립협회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독립협회는 仁化門 앞에서 대회를 해산하지 않고 시대착오적인 악법의 부활 기도에 찬성하는 수구파 7대신(申箕善, 李寅祐, 沈舜澤, 尹容善, 李載純, 沈相薰, 閔泳綺)의 규탄과 전면적 개각요구로 투쟁을 확대하기로 했다.


독립협회는 8일에 인화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하면서 7대신의 탐학을 낱낱이 들어 규탄하고 그들의 파면을 요구하는 두번째 상소를 올렸다. 이 철야투쟁은 이내 광범위한 민중의 호응을 얻어, 서울 시내와 전국 각 지방에서 보내 온 의연금이 600여 원에 이르렀다.24) 독립협회는 밤에는 50명의 대표를 남겨 인화문을 떠나지 않게 하고 낮에는 다시 모여 민중대회를 열면서 그들의 요구를 승낙하는 高宗의 批答(비답)을 기다렸다.


高宗이 7대신에게 경고는 하되 교체는 않겠다고 하자 독립협회는 인화문 앞에서 집회를 더욱 확대하면서, 10일에 다시 7대신 파면과 전면개각을 강력히 요구하는 세 번째 상소를 올렸다.25) 인화문 앞 농성에는 각 학교 학원들과 철시를 한 시전 상인들도 참석하여 날이 갈수록 규모가 더욱 커졌다.

경무청에서는 강제로 시전을 열게 하려 했으나 상인들은 지금은 전과 달라 관인의 무례한 압제를 받지 않겠다면서 이를 거부했다.26)



改革派 內閣 탄생시킨 「平和的革命」



독립협회와 시민들의 강경한 개각요구와 집회의 대규모화 추세를 도저히 막을 수 없음을 안 高宗은 마침내 10일과 12일에 걸쳐 7대신을 모두 면직시키고, 독립협회가 신임하는 朴定陽을 署理議政事務(서리의정사무), 閔泳煥을 군부대신 등으로 하는 새 각료를 임명했다. 그것은 10월1일부터 열이틀 동안 궁궐을 에워싸고 철야시위를 벌인 끝에 쟁취한 승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의 힘으로 改革派內閣을 성립시킨 획기적인 일이었다. 독립협회 회원들과 시민들은 12일 저녁에 만세를 부르면서 해산했다.27) 각국의 외교관들도 이러한 사태에 경탄했다. 미국 공사 알렌이 「평화적 혁명(a peaceful revolution)이 이루어졌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하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보기일 것이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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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 (9)








[ ...... 中樞院新官制가 공포 .... 근대적인 立法機關이 탄생 ...... ]

[ ..... 모함으로 말미암아 이틀 만에 어처구니없이 무산 ..... ]


189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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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民共同會에서 「獻議六條」 채택



이튿날 독립협회는 정부에 다시 대관들의 참석을 요망하는 편지를 보냈고, 정부쪽에서도 독립협회의 주장을 받아들여, 하오 2시에 이윽고 역사상 처음으로 官民共同會가 열렸다. 정부가 태도를 바꾼 것은 윤치호가 입궐하여 高宗을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두세 명을 제외한 모든 대신들을 비롯한 관인들과 황국협회, 順成會(북촌에 거주하는 부인들 모임), 황국중앙총상회 등 각종 사회단체, 각 학교 학도들, 시전 상인들, 승려, 맹인, 宰設軍(재설군: 백정) 등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초청을 받고 참석했다.


대회는 오후 3시경에 개회했다. 먼저 대회장 윤치호가 경과를 보고했다. 이어 정부대표 박정양이 등단했다.


『어젯밤 이곳에 와서 勅語(칙어)를 전하고 돌아가 상주하자 인민이 노천에서 날을 보내니 오늘이라도 정부 대신들이 일찍 나아가서 참석하여 그 利國便民(이국편민)의 방책을 들으라 하셨소이다. 그러니 협의 후 모두 해산하면 곧 입궐하여 협의내용을 상주하겠소』

만세와 박수소리가 잇따랐다.


회중에서 누구든지 나와서 연설을 할 수 있었다. 모두들 머뭇거리고 있는데 朴成春(박성춘)이라는 백정이 나와서 연설을 했다. 대신들 앞에서 백정이 연설을 한다는 것은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 몰각합니다. 그러나 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편민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둘러처져 있는 차일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차일에 비유하건대 한 대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로 합한즉 그 힘이 매우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國祚(국조)로 하여금 만만대를 누리게 합시다』40)



백정은 갑오경장 때에 천민신분에서 해방되었었다. 회중은 이 백정의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어 몇 사람이 의견을 개진한 다음 11개조의 의안이 상정되었고, 먼저 6개조를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이것이 유명한 「獻議六條(헌의육조)」인데, 그 내용은 1) 專制皇權(전제황권)의 공고화, 2) 외국에 대한 이권양여나 조약체결 등은 각부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으로 날인, 3) 전국의 財政과 租稅는 度支部에서 관장하고 豫算 決算은 人民에게 공개, 4) 모든 중범죄도 公判을 하되 피고의 자백이 있어야 시행, 5) 勅任官(칙임관)은 황제가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얻어서 임명, 6) 章程(장정)의 실천이었다.


6항의 장정 실천의 촉구는 갑오경장 이후로 새로 제정한 法律과 각 부의 章程을 정부가 제대로 실천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석한 대신들도 모두 이 「헌의6조」에 「可」자를 적어 서명했다.


이어서 중추원 의장 한규설과 박정양이 대회를 치하하는 연설을 했다. 대신들은 「헌의6조」를 『황제에게 상주하여 내일 하오 1시까지 회중에 반포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다. 회중은 기쁨에 넘쳐 만세를 부르며 해산했고, 50명만 남아 밤을 새웠다.41)



官民共同會 해산 막아 中樞院 신관제 공포케


이튿날 독립협회는 사무소에서 회의를 열고 중추원 민선의관 25명을 독립협회에서 내게 된 경과보고를 들은 다음 중추원 관제의 개정이 공포되는 대로 25명 의관의 선거를 실시할 것을 논의했다. 「헌의6조」의 공포 여부를 알려 줄 시한인 하오 1시가 지나자 독립협회는 총대위원을 정부에 보냈다. 그리고 오후 8시에 관민공동회를 종로에서 속개하고 「헌의6조」의 재가를 기다렸다.


정부는 「헌의6조」는 모두 마땅히 실시할 것이고 그밖에 몇 조항을 첨가하여 조칙으로 공포하고 관보에 올릴 터이니 추운 날씨에 밖에 있지 말고 해산하여 기다리라는 뜻을 전해왔다.


회중은 돌아가 기다리기로 하고 50명만 남아 밤을 새웠다. 高宗은 31일 새벽에 30일자로 「헌의6조」의 공포와 함께 「詔勅五條」를 내렸는데, 조칙은 첫조항에 〈(갑오경장으로) 諫官(간관: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을 폐지한 뒤로 言路가 막히어 상하가 勸勉警勵(권면경려)의 뜻이 없기로 중추원 장정을 정하여 실시할 것〉을 규정했다. 그것은 중추원 개편을 실질적인 의회개설로 생각하는 독립협회의 견해와는 상당한 간극이 있는 내용이었다.



농상공부 대신 金明圭(김명규)가 나와 「헌의6조」가 재가되고 그것에 더하여 「조칙5조」까지 내린 것을 알리자 회중은 이를 환영하고 만세를 불렀다. 이때에 李承晩은 군중 앞에 나아가 군중을 제지하면서 외쳤다.


『무릇 국사에 매번 조칙이 있어서 정부가 조치하도록 하여도 그 실시를 본 적이 없소이다. 이는 우리가 강력히 諫(간)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러니 본회는 경솔히 해산할 것이 아니라 대신들이 만일에 이를 실시하지 않으면 爭論(쟁론)하여 그 실시를 보는 것이 옳을 것이외다』42)


회중은 李承晩의 주장에 찬동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해산하지 않고 관민공동회를 더 계속하게 되었다. 이처럼 李承晩은 이제 대중집회의 선동가로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관민공동회는 이튿날도 속개하여 「헌의6조」의 실시를 위한 정부의 조치를 기다렸다. 그 다음날인 11월2일에 공동회는 총대위원 3명을 선정하여 정부에 「헌의6조」를 조속히 실행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고, 정부에서도 고무적인 회답을 보내왔다. 그리하여 관민공동회는 엿새 동안의 집회를 마치고 오후 4시에 해산했다.



드디어 11월4일에 11월2일자로 된 中樞院新官制가 공포되었다. 이날 공포된 신관제에 따르면 中樞院은 〈法律과 勅令의 제정과 폐지 또는 개정에 관한 사항들을 審査議定하는〉 機關이었다. 그것은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國民代表가 참가하는 근대적인 立法機關이 탄생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날 정부는 독립협회에서 25명의 의관을 선거하여 그 명단을 보내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고, 독립협회도 이튿날(11월 5일) 독립관에서 중추원 의관 선거를 한다고 공고했다.43)




『國體를 共和政으로 바꾸려 한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의회 설립의 기회는 자신들의 입지에 위협을 느낀 수구파들의 악랄한 모함으로 말미암아 이틀 만에 어처구니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중추원 신관제가 공포된 바로 그날(11월4일) 밤에 궁중에 머물던 의정부 찬정 조병식은 군부대신 서리 유기환, 법부협판이자 황국협회 회장인 이기동 등과 밀모하고, 잡배들을 시켜 광화문 밖과 성내 몇몇 요소에 독립협회 쪽에서 작성한 듯이 꾸민 익명서를 몰래 내다 붙이게 했다.44) 尹致昊의 회고에 따르면, 익명서의 내용은 朝鮮王朝는 이미 쇠퇴했으므로 만민공동하여 尹致昊를 大統領으로 선출하면 정부와 시민이 모두 승복하고 국민이 각성하여 開明進步를 이룰 것이라는 것이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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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9)







[ ...... 시민들은 .... 자기들도 체포해 달라고 다투어 요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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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는 일기에서 그의 배신감과 러시아․일본의 배후세력 흉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오늘의 官報는 독립협회의 해산과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면관시킨 칙령을 공포하였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배신적인 어떤 비겁자라도 대한의 대황제보다 더 천박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정부가 친일 노예 兪箕煥과 친러 노비 조병식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 인들과 일본인들의 양자가 이 사건에 개입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모종의 살찐 이권을 위하여 그들의 노예들을 지원하고 있다. 저주받을 왜놈들! 그들이 대한의 마지막 희망인 독립협회를 분쇄시키는 데 러시아인들을 돕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을 나는 참으로 희망한다 (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11월 5일).



실제로 〈주한일본공사관보고〉에서도 일본공사 대리는 대한제국 황제의 독립협회 해산에 사전 동의했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20)


서울 시민들은 이때, 즉 1898년 11월 5일 독립관에서 실시할 동방 개벽이래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를 구경하기 위해 아침 식사 후 독립관으로 갈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또한 투표권을 가진 독립협회 회원들은 모두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25명의 새 중추원(상원) 의관 선거를 위해 독립관으로 향할 준비를 하였다. 이 때 청천벽력과 같이 이상재 이하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경무청에 체포되었으며,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었고, 박정양의 개혁정부가 붕괴되었으며, 조병식의 친러수구파정부가 재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울분에 북받친 서울 시민들과 독립협회 회원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배재학당 학생들이 독립관으로 가려던 발길을 돌려, 경무청 문 앞에 도착해서 항의시위를 시작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과 서울 시민들은 백목전 도매상가에 모여서 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경무청 문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하였다.21) 뒤이어 영어학교와 일어학교 학생들이 밀려왔다.22) 뒤이어 황국중앙총상회 회원들과 한국 최초의 여성단체인 贊襄會 회원들도 경무청 문 앞에 도착하여 합류하였다.23) 이날(11월 5일) 오전 경무청 문 앞에는 삽시간에 수천명의 시민이 운집하여 시위를 하게 되었다.24)


경무청 문 앞에서 서울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그리하여 11월 5일 만민공동회가 형성된 것이었다. 경무청 문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형성한 시민들은 林炳吉 등 5명을 총대위원으로 선출하여 경무사 김정근에게 독립협회 지도자 체포를 항의하고 사건 경위의 해명을 요구하였다.25)
경무사는 황제의 칙령에 따른 것이라고 책임을 회피하면서, 경무사와 한성판윤이 황제 칙령을 회중에게 낭독하였다.


시민들은 분개해서 다투어 연설을 한 다음 自願就囚(체포․투옥을 자원)하기로 결의하고, 체포당한 독립협회 지도자들과 함께 자기들도 체포해 달라고 다투어 요구하였다.26) 경무사는 당황하여 시민들은 체포대상자 명단에 없으므로 체포할 수 없으니 해산해 줄 것을 종용하였다.27) 그러나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후에는 그 수가 더욱 증가하였다.


이제 새로이 만민공동회가 성립되어 조직적 운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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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국사편찬위,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신용하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 군인들까지도 독립협회를 지지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 .......

.... 포위하고 있던 200명의 군인들은 스스로 해산하여 돌아가 ........ ]


[ ....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되찾고 감격에 넘쳐 ........ ]




189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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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공동회 제5일째인 11월 9일 오전 9시경 군부대신서리 유기환은 아직도 군대동원에 의한 만민공동회 탄압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친위대 제3대대의 2개중대 병력을 대회장에 투입해서 충돌을 유도하며 탄압을 획책했다가 실패하였다.50)


이날도 아침부터 날이 어둡고 찬비가 소소히 내리어 회민의
옷을 적시었다. 회중들은 찬비를 맞으며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더욱 의기가 분발하였다. 각계 각층의 시민들이 이를 보고 의연금을 계속 보내어 왔다.


예컨대 茶洞에 사는 朴召史는 집 판돈 100원을 내놓아 만민을 감격케 했으며,51) 한 나무장수는 장작 수십 바리를 실어와서 밤을 지새는 땔감으로 쓰도록 했고, 한 과일장수는 단배 3석을 보내어 회원의 목마름을 축이게 했으며,술장수는 새로 빚은 술 수십 통을 보내어 추위를 이기는 데 돕도록 했고, 심지어 걸인 한 사람도 1원을 보조했으며 청국상인까지도 감동하여 4원을 보조하였다.52) 또한 서울의 시전상인들은 이날도 철시를 단행하여 만민공동회를 적극 성원하였다.53)



이날 찬비속에서의 만민공동회의 시위와 시민의 호응을 보고 구경나온 외국인까지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54) 외국공사․영사들도 감동하여 외부를 방문해서 만민공동회에 대한 지지와 동정을 표시하였다.55)


뿐만 아니라 만민공동회에 대처하여 파수를 보던 군인들까지도 독립협회를 지지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했으며,56) 이날 밤 만민공동회를 포위하고 있던 200명의 군인들은 스스로 해산하여 돌아가 버렸다.57) 심지어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나온 한성부 관리들까지도 친러수구파정부의 모략을 개탄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하였다.58)
이날 밤은 찬비가 더욱 세차게 내리고 이튿날 아침까지 짙은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만민들은 추위와 찬비속에서 여전히 동요하지 않고 철야하였다.59)



만민공동회 제6일째인 11월 10일에는 대세는 결정적으로 만민공동회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황제는 이날 오후 5시경 한성판윤을 시켜 회중의 민원이 무엇인지 알아오게 하였다. 만민공동회 회중은 ①불량배들과 더불어 재판받아 충신과 역적을 밝히고, ②헌의 6조와 조칙 5조를 즉각 실시하며, ③혁파한 독립협회의 복설을 요구한다고 응답하였다.60)


황제 고종은 마침내 민의의 압력에 굴복하여, 이날 조병식․민종묵 등에게 해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이들을 해임하였다. 황제는 이어서 李金憲永을 의정부 참정으로, 농상공부대신 박제순을 외부대신으로, 학부대신 李道宰를 임시서리 내부대신 사무로 임명했으며, 유기환을 임시서리 군부대신 사무에서 해임하고 군부협판 趙東潤을 그 자리에 임명했고, 경무사 신태휴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閔丙漢을 임명하였다.61) 이로써 만민공동회가 규탄하는 익명서 조작의 장본인들이 대신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다른 수구파들이 기용된 것이지, 개혁정부가 수립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황제는 이날 오후 7시에 법부대신 한규설을 불러들여 독립협회 17명의 재판이 어떻게 되었는가 묻고, 재심까지 끝났다는 대답을 듣자, 즉시 돌아가 판결해서 마무리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한규설을 재판장으로 한 고등재판소재판부는 ①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칙령을 위반하여 ‘離次開會’ 했으며, ②대신을 위협하고 재판을 강청한 죄가 있으므로 17명 전원을 笞40에 처한다고 선고했으며, 17명 중에서 칙임관․주임관으로서 實職이 있는 사람만 贖錢을 물도록 하고 나머지는 속전도 면제한다고 결정하여 17명 전원을 즉각 석방하였다.62) 이것은 극히 가벼운 벌금형으로서, 거의 무죄선고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만민들은 황제와 수구파의 시위대 및 경무청의 무력 위협과 찬 겨울비속에서도 철야하면서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만 6일간의 불굴의 투쟁으로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되찾고 감격에 넘쳐 서로 붙들고 울며 서울 장안이 울리도록 만세를 소리쳐 불렀다.63) 석방된 17명 독립협회 지도자를 대표하여 이상재가 조한우를 대리로 시켜 만민의 투쟁에 감사를 드린다는 인사를 하였다.64)


만민공동회는 성립과 동시에 찬 비바람속에서 만 6일간의 철야시위의 간구한 투쟁으로 황제와 수구파에 의해 체포 감금된 독립협회의 17명 지도자들을 석방시킨 대승리를 쟁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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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국사편찬위,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신용하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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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하루


11월21일. 만민공동회의 철야시위가 17일째 되는 날이었다. 漢城府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告示를 했다. 드디어 보부상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이날은 李承晩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하루였다.


이날 새벽 2시에 만민공동회의 요청에 따라 회장에 나온 의정 서리 金奎弘 등 정부 대신들은 보부상의 혁파와 만민공동회의 피격 방지를 거듭 약속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종로의 보부상 패는 아침 일찍 홍종우의 격렬한 선동 연설을 들은 다음 2000여 명이 길영수와 홍종우의 지휘 아래 두 패로 나뉘어 고함을 지르며 인화문 밖의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李承晩은 회중이 동요하지 않도록 연단에 올라가서 연설을 계속했다.


『우리가 여기 進伏(진복)하여 풍찬노숙하는 것이 옷들을 탐하는 것이오이까 밥을 탐하는 것이오이까! 다만 한다는 일이 모두 나라를 위하고 동포를 사랑함이외다. 지금 들은즉 못된 간세배가 부상패를 불러 우리 만민을 치라고 해서 부상패들이 지금 목전에 당도하였소이다. 우리가 죽더라도 忠愛(「忠君愛國」)하는 의리는 가지고 죽을 터이니, 신민의 직분에 죽어도 또한 천추에 큰 영광이오이다!』63)



이 때에 큰 몽둥이를 든 길영수의 지휘에 따라 보부상들이 공동회장을 둘러쌌다. 경운궁 주변을 지키던 병정과 순검들은 처음에는 보부상들을 제지하는 체했으나 짐짓 밀리고 말았다. 아무 방비 없는 공동회 회중은 보부상 패의 몽둥이에 맞아 이내 부상자가 속출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옆 프랑스 공사관의 담을 넘어 피신하기도 했다. 길영수를 보자 격분한 李承晩은 그를 붙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너도 명색이 국록을 먹는 신하요 너도 소위 대한의 백성이 아니냐! 네 어찌 간세배와 부동하여 부상패를 모집하여 충애하는 우리 만민을 친단 말이냐!』



그러면서 그는 머리로 길영수의 가슴을 들이받으며 『나부터 죽여라!』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길영수는 히죽이 웃고는 몸을 빼어 좌충우돌했다. 누군가가 李承晩을 꽉 껴안고 『이승만씨, 진정하고 빨리 달아나시오』하고 말했다. 주위를 살펴보자 李承晩은 보부상들 속에 혼자 남아 있었다. 그는 가졌던 작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보부상들이 계속 밀려오는 쪽으로 나아가 그들이 길을 막아 놓은 작대기를 발로 차버리고 배재학당 쪽으로 걸어갔다.


배재학당 앞길로 나서며 李承晩은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때에 이승만의 아버지 敬善이 나타나 아들을 안고 같이 통곡했다. 어떤 사람이 李敬善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아들을 그런 위태한 데 다니게 하오?』

그러자 이경선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 자식이 만일에 悖戾(패려)한 일을 하게 되면 아비된 도리에 마땅히 엄금하려니와 당당한 충애의 의리로 나라를 위하고 동포를 사랑하여 다니는 것을 어찌 금할 수 있소!』


이 광경을 보도한 「독립신문」의 기사는 〈李承晩씨의 충애에 열심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부친의 당당한 의리는 세계에 더욱 드문 줄로 공론이 있다더라〉하고 덧붙이고 있다.64)



『李承晩이가 吉永洙에게 맞아 죽었다』


高宗과 수구파는 이것으로 만민공동회가 해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의 기습에 성공한 보부상들이 궁중에서 보내온 백반과 고깃국으로 아침을 먹고 의기양양해 있을 때에, 소문을 듣고 정동 골목길에 모인 군중들이 돌팔매로 반격을 시작했다. 돌팔매에 쫓긴 보부상들이 英國公使館으로 피해 들어가자 공사는 이들을 내쫓았다. 보부상들은 서대문쪽으로 밀렸다. 서대문을 지키던 파수병들은 보부상들만 통과시키고 뒤따르는 군중은 막아서서 뒤쫓지 못하게 했다.



李承晩은 배재학당으로 들어가자 기절하고 말았다.65) 보부상 패에 쫓겼던 사람들이 배재학당으로 몰려왔다. 金瑗根(김원근)이 눈물을 흘리면서 뛰어 들어오더니 『李承晩이가 길영수에게 맞아 죽었다』하고 외치며 통곡을 했다. 李承晩도 자서전 초고에서 〈그날 오후 신문도 내가 길영수에게 덤벼들었다가 그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보도했다〉고 적고 있으나66) 현존하는 당시의 신문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몸을 추스린 李承晩은 배재학당에 모인 군중들과 함께 종로 쪽으로 걸어갔다. 종로에서 다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이때에 모인 회중의 수는 인화문 앞 집회의 곱절이나 되었다. 李承晩과 양홍묵 등이 등단하여 정부가 보부상을 동원하여 회중을 습격했다고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李承晩이 연설하는 것을 보자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 놀랐다. 어떤 사람은 그가 얼마나 상했는가 보려고 그에게 다가와서 만져보기까지 했다. 흥분한 회중의 일부는 보부상 패가 몰려 있는 서대문 밖으로 밀려갔으나 병정들이 총포로 위협하여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



高宗과 수구파는 낭패했다. 고종은 경무사 閔丙漢(민병한)과 한성부 판윤 李根鎔(이근용)을 만민공동회에 보내어 회중을 회유하며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나 격앙된 시민들이 돌팔매로 응수하는 바람에 경무사는 황급히 민가로 피해 숨어야 했다. 이때에 나무를 팔고 돌아가던 나무장수들이 만민공동회가 습격당했다는 말을 듣고 격분하여 이기동의 집을 부셔버렸고, 흥분을 이기지 못한 회중의 일부도 다투어 달려가 조병식 등 보부상 패를 조종하는 대관들의 집을 때려부셨다.



각 학교는 문을 닫았고, 학도들은 모두 공동회로 몰려왔다. 공동회에 참가하지 않은 시민들도 의연금과 음식 등을 보내어 공동회를 격려했다. 군부는 병력을 풀어 高宗이 기거하는 경운궁 앞을 엄중히 경비했고, 정동 큰길은 통행이 통제되었다.




18일 동안의 철야투쟁 끝에 獨立協會 부활 얻어내


격정의 긴 하루가 지나고 날이 밝자 이른 아침부터 더 많은 시민들이 종로로 모여들었다. 서대문이 열릴 시간이 되자 회중은 보부상을 반격하러 그쪽으로 몰려갔다. 보부상들은 마포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거의 빈손인 회중으로서는 몽둥이로 무장한 보부상들을 이길 수 없었다. 신기료 장수 金德九(김덕구)가 사망하고 부상자 10여 명이 생기고 시민들은 패퇴했다.



그러나 서울 시내는 병정들과 순검들마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지지하여 제복을 벗는 등 혁명 전야와 같은 분위기였다.67) 高宗은 각국 공사들을 입궐시켜 궐내에 머물게 하면서 民會에 대한 각국의 대책 사례를 묻고 무력 진압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각국 공사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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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보부상들에게 한성부 판윤 李啓弼(이계필) 등을 보내어 보부상이 혁파되었으므로 퇴거하라는 칙유를 전했다. 그러나 보부상들은 종로의 만민회가 퇴거하지 않았다면서 듣지 않았다. 만민공동회는 잠시 먼저 해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尹致昊 등이 중심이 되어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토론한 끝에 23일 오후 8시를 기해 이틀 동안 해산하기로 했다. 이날 高宗은 朴定陽, 閔泳煥 등 만민공동회의 지지를 받는 인사들을 주축으로 하여 각료를 개편하고 尹致昊를 한성부 판윤에 임명했다. 그러나 보부상패는 여전히 해산하지 않고 마포에 집결해 있었고, 吉永洙는 가마를 타고 몰래 입궐하기까지 하는 판국이었다.



정부가 약속을 이행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26일 아침부터 군중들이 다시 종로로 모여들었다. 사태가 다시 심각해지자 高宗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시도했다. 高宗은 하오 1시에 경운궁의 敦禮門(돈례문) 軍幕(군막)에 친림했다. 이 자리에는 각국의 외교관들과 그들의 부인들도 초대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참관했다.



高宗은 먼저 공동회 대표 200명에게 독립협회의 부활 등 공동회의 요구조건을 대체로 허락하면서 해산을 친유했다. 다만 『독립협회는 앞으로 국내의 文明進步에 관한 일만을 토론할 것이며, 정부의 조치에 대한 말참견을 불허한다』고 했다. 공동회 대표들은 만세를 부르고 나와서 해산했다. 高宗은 오후 4시에는 또 보부상 대표 200명을 불러 모호한 약속을 하면서 역시 해산을 권유했다. 보부상들도 만세를 부르고 나와서 해산했다.



이튿날인 27일은 독립협회가 부활되고 나서 처음 맞는 일요일이었다. 감격에 넘치는 통상회의가 열렸다. 이날의 회의에서는 마포에서 보부상 패와 싸우다가 희생된 신기료 장수 김덕구의 장례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는 문제 등과 함께 협회의 토론회를 정상화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다음 토론회는 주제를 「信과 義를 튼튼히 지키는 것은 본국을 다스리는 데와 외국들을 사귀는 데 제일 요긴함」으로 정하고, 右議(우의)에 李承晩과 장태환, 좌의에 李商在와 方漢德을 선정했다.70) 부활된 독립협회의 첫 토론회에서 李承晩이 부회장 李商在와 동격의 토론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신진 소장파인 李承晩이 이제 독립협회 안에서도 지도적 위치를 확보했음을 말해 준다.




(5) 中樞院議官에 선임되었다가

제일 먼저 파면돼



高宗과 정부는 11월29일에 기정 방침대로 의관 전원을 관선으로 하여 中樞院을 성립시켰다. 선임된 議官 50명은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계열이 17명, 황국협회 계열이 16명, 전직 관료와 都約所 등 高宗의 직계가 17명으로서 수구파가 3분의 2 의석이 되도록 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의관들에게는 연봉 360원을 지급하기로 했다.71)


이 때에 李承晩도 從九品의 의관으로 선임되었는데,72) 독립협회 계열의 17명 가운데에서는 일본에 유학했던 스물두 살의 漢城義塾 교사 卞河進(변하진) 다음으로 가장 젊었다.73) 李承晩은 스물네 살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일방적인 중추원 의관 선임은 시국을 수습하는 데 전혀 효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17명의 독립협회계 인사 가운데에서 만민공동회 의장 高永根과 尹夏榮, 玄濟昶(현제창) 세 사람은 아예 의관직을 받기를 거부했다. 이들 말고도 李南珪(이남규) 등 전직 관료 네 사람도 授勅(수칙)을 하지 않았다. 일반 국민들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신문들도 「관보」나 「잡보」란에 간단히 보도하고 있고, 「皇城新聞」은 중추원이 「옛날의 言官」이라고 해설했다.74)


독립협회는 정부의 일방적인 중추원 의관 선정 발표에 대해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렇게 설치되는 중추원이 협회가 당초에 주장한 의회와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어서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헌의6조」 등 정부가 약속한 사항을 빨리 실시하게 하는 것이 주된 운동목표가 되고 있었다.


장례형식 빌어 대규모 시위행진


12월1일에 거행된 신기료 장수 김덕구의 장례식은 그러한 독립협회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것은 장례식의 형식을 빈 대규모의 대중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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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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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사가 홀홀단신으로, 그놈들과 마자싸와, 死生을 직결하던, 그의 극적 활약장면은, 아아 무엇이라 말삼하면 可하오릿가. ........ ]



李承晩 博士는 渾身都是熱


金一善



이러케 鐘路를 거처서 청년회관을 오면 李박사 생각이 別로 간졀해짐니다.

정말로 公번 띄고 私心업고, 혼신이 도모지 열정 떵어리인 李박사! 그야말로 愛國愛民의 열렬한 志士요 烈士임니다.


일즉이 海州에서 생장하야, 자기 아버지를 쪼차 京城에 드러오기는 아마 16,7세이엿슬 듯함니다. 본래 漢文에 능한 그는 培材學堂에 드러가 영어를 중심으로 신학문을 학습하다가, 丁酉年頃에 徐載弼박사가 독립신문을 發刋할때에는 그 社에 논설기자로 드러가서, 독립이상의 고취에 盡力하얏슴니다.


독립협회라 하며, 만민공동회라 하면 더 말할 것 업시 近世의 조선에서 처음 닐어난 유일한 민간정당으로서, 당시에 宮中府中을 蕭淸하고, 민간사회를 혁신하기에 얼마마한 활약을 하엿는가하는 것은 이제 군더덕이로 말할 것 까지도 업는 바이어니와, 李박사는 그때 겨우 22,3세의 年少로써, 일즉히 독립협회에 관계하고 만민공동회를 지도하야, 소위 황국협회의 褓負商軍으로 더부러 정면격투를 행하얏슴니다. (戊戌己亥年間의 일),


그 당시에 내가 아조 實見한 광경이 잇거이와, 兵丁, 난민을 어울너서 수천으로써 算하는 平凉子軍(褓負商)이 제각각 흉기를 들고, 새문 밧그로부터 貞洞을 넘어, 大漢門쪽 길로 덥허올 때에, 박사가 홀홀단신으로, 그놈들과 마자싸와, 死生을 직결하던, 그의 극적 활약장면은, 아아 무엇이라 말삼하면 可하오릿가. 엇잿던 박사는 그와가티 열렬하엿스며 대담하엿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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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 제62호 > 밧게 잇는 이 생각, 異域風霜에 氣軆安寧하신가

1925년 08월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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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인간의 탄생



19세기 말, 특히 1898년은 한국 역사상 근대적 인간이 탄생한 첫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 인민은 더 이상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특정한 조직에 참여하여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고 공동의 의사를 확인하며, 이를 함께 의논하여 그 결정사항을 행동으로 옮기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첫째, 전통사회의 인습·속박·부조리에 대한 저항의식과 외부세력의 침략에 따른 위기의식에 자극 받아, 비판 및 대항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촉발되었다.


둘째, 당시 사회경제적 변화가 그 기반이 되었다. 일례로 상민층의 성장은 전통적 상인의 근대적 상인으로의 개편과 조직화, 각종 상회 및 근대주식회사의 등장과도 관련되었다. 한편 농민계층은 동학농민혁명의 영향으로 모든 전근대적 속박과 관습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노동자층도 광산채굴의 진행과 개항장의 무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천민층 또한 갑오경장이후 법적으로 신분해방을 이루어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등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현실 앞에서 사회의 부조리와 위기에 눈뜨고 있었다.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이 민회를 주도한 개화파 지도들 이외에 각 학교 학생, 선각적 여성, 시전 상인, 승도·백정·관료 및 신사 등 각계각층의 인민들이었다는 점은 그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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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민중



만민공동회를 제안한 인물들은 개화파와 독립협회회원이었지만, 만민공동회를 이끈 사람들은 익명의 민중들이었다. 예를 들어 익명서 사건 이후 17명의 지도자들이 경무청에 체포되자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박정양 내각이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의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모닥불을 피우고 밤을 지새웠다.


장작불 시위는 참여자들의 지속적인 확산뿐만 아니라, 의연금과 의연물 지원을 통해 지속될 수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사람은 장국밥 3백 그릇을 보냈고 어떤 상인은 은화를 보내기도 했으며, 외국인들까지도 지지를 보냈다. 심지어 시장의 노파까지도 콩나물 판 대금 2원을 보냈고, 한 영남 유생은 의연금 4원을 먼 곳에서 송금하기도 했다. 익명의 민중들은 황국협회와 순검의 위협은 물론, 찬 겨울비 속의 고난을 무릅쓰고 6일 간의 불굴의 투쟁으로 지도자의 석방을 이루어냈다.


그들은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 붙들고 울며 만세를 외쳤다. 익명의 민중들의 투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1898년 11월 21일 황국협회와 맨주먹으로 싸우다 죽은 신기료 장수(구두수선공)인 김덕구 사건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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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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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12. 일본공사 가토 마스오



[ ..... 독립파에 의해 한국이 부강해지기 전에, 일본은 너무 늦기 전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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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의 실패 원인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특히 지적될 수 있다.


첫째, 황제 및 수구파세력과 러시아 및 일본 등 외세의 야합에 의한 무력탄압을 들 수 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은 국정 전반의 대개혁을 추구했기 때문에 수구파세력과는 정치적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정치체제 개혁운동은 전제군주제를 立憲代議君主制로 개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제군주인 고종황제의 이해에는 일치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황제 고종은 전제군주권을 잃지 않기 위해 독립협회 개혁파보다는 친러 수구파에 의존하려 하였다.


그러나 개항 후 수많은 격변을 겪는 동안에 언제나 승세나 대세에 편승하는 것이 안전함을 터득한 고종은 입헌대의군주제로의 개혁이 대세가 되면 그것까지도 받아들일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 점은 황제 고종이 만민공동회의 강력한 운동에 부딪혀 그가 가장 싫어하는 박영효가 추천되었을 때에도 만민공동회를 무마하기 위해 박영효를 소환 기용해서 개혁정책 채택을 생각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2) 따라서 당시 수구파를 압도할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던 독립협회․만민공동회로서는 수구파와 외세가 결탁하여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대항하지 않으면 승리하여 대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외세가 황제 및 수구파와 결탁하여 적대 행동을 한다면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러시아는 대한제국내에 뿌리가 약했고 이미 ‘아관파천’ 후에 수구파와 결탁하여 ‘친러 수구파’를 형성한 것을 독립협회가 압도했으므로 예견된 것이었지만, 새로이 일본세력이 수구파와 결탁하여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적대 행동을 한다면 이것은 힘겨운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독립협회가 궁극적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항할 독립세력이며 저항세력이라고 보고 적절한 기회를 포착하여 이를 붕괴시키려고 기도하였다. 특히 만민공동회가 대두하여 독립협회가 큰 대중적 기반을 갖게 되자 일본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내심 매우 두려워해서 이들의 와해 기회를 노리었다.3) 일본공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가 1898년 12월 초 일본에 휴가 중일 때《The Japan Daily Mail》紙가 가토의 주장을 보도했는데, 그는 “한국의 독립은 이름뿐이니, 서구열강이 간여하
2023-04-01 17:3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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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승만 | 2023-04-01 17:34:01 삭제


그런데 일본은 독립협회가 궁극적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항할 독립세력이며 저항세력이라고 보고 적절한 기회를 포착하여 이를 붕괴시키려고 기도하였다. 특히 만민공동회가 대두하여 독립협회가 큰 대중적 기반을 갖게 되자 일본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내심 매우 두려워해서 이들의 와해 기회를 노리었다.3) 일본공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가 1898년 12월 초 일본에 휴가 중일 때《The Japan Daily Mail》紙가 가토의 주장을 보도했는데, 그는 “한국의 독립은 이름뿐이니, 서구열강이 간여하기 전에, 그리고 보부상과 독립파와 왕당파들이 서로 목을 자르는 것을 그치고 독립파에 의해 한국이 부강해지기 전에, 일본은 너무 늦기 전에 어떤 목적을 달성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4)



일본 전권공사 가토는 이러한 입장에서 비밀훈령을 받고 서울에 귀임하자 1898년 12월 15일과 18일에 두 차례나 고종을 알현해서 군대 동원에 의한 만민공동회 탄압을 적극 권고한 것이었다.5) 또한 일본 전권공사는 1898년 12월 하순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독립협회 일부 급진파에게는 황제가 가장 싫어하는 박영효를 소환 기용하도록 공작적인 차원에서 적극 권고하고, 고종에게는 군대 동원에 의한 무력 탄압을 적극 권고하여, 황제 및 수구파와 결탁해서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을 실패케 하는 데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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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국사편찬위원회

41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1904.8.9 (29세) 이승만,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특사로 감옥을 나옴 (민영환, 한규설이 사면을 위해 노력).


10.15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


11.4 제물포항에서 미국으로 출국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고종의 밀사 자격). 일본 고베를 거처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윤병구 목사와 합류.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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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帝國新聞」의 「논설」집필


李承晩이 출옥하고 나서 시작한 일은 옥중의 부자유스러운 상황에서도 심혈을 기울였던 「帝國新聞」9)의 「논설」을 다시 집필하는 것이었다.「帝國新聞」은 軍部의 代辦砲兵局長이기도 했던 사장 崔岡(최강)이 일본에서 도입한 군함 揚武艦의 가격과 관련된 수뢰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사임하고 1903년 6월에 다시 李鍾一이 사장이 되어 있었는데,10) 李鍾一은 1904년 3월에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李承晩과 같이 석방되었다. 이때에 李鍾一이 李承晩에게 「帝國新聞」의 「논설」을 다시 집필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무렵에 「帝國新聞」은 논설기자(주필)를 구하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李承晩이 출옥한 뒤의 「帝國新聞」은 일실된 부분이 너무 많아서11) 그가 다시 「帝國新聞」의 「논설」을 집필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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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軍憲兵司令部에서 「帝國新聞」을 무기정간시켜


이처럼 특별히 눈에 띄게 반일적인 논조는 펴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帝國新聞」은 1904년 10월10일에 駐韓日本軍憲兵司令部에 의해 무기정간 처분을 당했다. 정간 이유는 10월7일자 「논설」의 내용이 〈일본 군사상에 방해요, 한일 양국 교제에 방해요, 치안에 방해되는 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16)


문제가 된 「논설」은 공교롭게도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아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李承晩이 집필했던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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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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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洞敎會와 엡워스靑年會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출옥한 李承晩은 尙洞敎會靑年會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靑年學院을 설립하는 일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尙洞敎會는 1889년 가을에 감리교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턴(William.B.Scranton)이 남대문 안에 세운 교회였다. 상동교회의 처음 이름은 達城敎會였고, 교인들은 거의가 중류층 이하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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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된 뒤로 상동교회에는 이른바 尙洞派로 불리는 민족운동가들이 모여들어 이 무렵의 개화파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고 있었다. 교회 지하실의 넓은 공간이 그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李承晩이 투옥되기 전에 高宗을 폐위시키고 義和君을 새 황제로 옹립하여 정치개혁을 실시하려는 계획을 같이 추진했던 全德基, 朴容萬, 鄭淳萬 등은 상동교회 청년회의 중심인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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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天愛人하는 참 도로 근본을 삼아…』


한동안 해체되기도 했던 상동청년회는 1903년에 전덕기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 조직되면서 의욕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천민 출신으로서 스크랜턴 목사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기독교인이 된 전덕기는 스크랜턴의 지도로 尙洞敎會의 중심인물로 성장했는데, 이 무렵에는 전도사가 되어 스크랜턴을 대행하고 있었다.


그는 고향의 양반출신 李東寧과 친구 周時經의 영향으로 독립협회에도 참여하여, 李承晩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었다.22) 배재학당 때부터 李承晩과 각별한 친분관계에 있던 周時經은 자신이 속한 貞洞敎會보다도 尙洞敎會의 청년회 사람들과 의기투합해서 어울리고 있었다. 李承晩이 출옥하자 이들은 상동청년회의 역점사업으로 청년들의 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했다. 尙洞靑年學院의 설립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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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5일 오후 2시에 청년학원 개교식이 열렸다. 괴로웠던 옥중에서 감옥학교를 운영했던 李承晩에게는 특별히 감개무량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대문 중문과 대청 안에 청송 홍엽으로 아치를 만들어 세우고 국기를 달았다. 내외국 초청인사들과 학도들이 수백 명이나 되어 좁은 자리에 다 앉지 못했다.


교장 李承晩이 먼저 개회사를 했다.『학교의 대지가 모든 학문을 다 하나님 공경하는 참 도로써 근본을 삼아, 청년으로 말하여도 벼슬이나 월급을 위하야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세상에 참 유익한 일꾼이 되기를 작정하자는 데 있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이어 청년회장 全德基가 청년학원 설립경위를 설명하고, 게일, 헐벗, 스크랜턴이 격려사를 한 다음 부교장 박승규와 교사 周時經, 그리고 학생대표로 유희경이 인사말을 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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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장 李承晩은 상동청년학원이 개교한 지 3주일 만에 美國으로 떠난다. 그러나 이 청년학원은 그가 떠난 뒤에도 全德基가 담당한 성경교육을 비롯하여, 周時經의 국문교육, 張道斌과 崔南善의 국사 교육, 南宮檍-玄楯 등이 담당한 외국어 교육, 군인 출신 이필수가 담당한 체육과 군사 교육, 그밖에도 音樂, 演劇 등의 예술 교육 등을 통하여 기독교 구국론에 입각한 민족신앙 교육의 산실이 되었다.31)


이처럼 상동청년학원은 외국선교사들이 아닌 한국인들의 힘으로 세운 사립학교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평양의 大成學校와 같은 다른 사립학교의 설립모델이 되었으며, 1905년의 을사늑약을 계기로 하여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일어나는 新敎育運動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32) 그런 점에서 李承晩은 한국의 민족교육에도 선구적인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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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1904.7.13. 보안회



[ ...... 보안회의 활동은 종로네거리에서 대중집회를 개최하는 등 ........

...... 協同會로 개편되면서는 회장 李相卨, 부회장 李儁 ... 李承晩은 편집부장 .......

..... 日本은 8월에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철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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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이 출옥하기 직전부터 서울에서는 日本人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저지하기 위해 1904년 7월13일에 조직된 輔安會(保安會라고도 했다)를 중심으로 활발한 반대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러-일전쟁의 개전과 동시에 戰時中立을 선포한 韓國 정부를 위협하여 2월23일에 군사동맹을 골자로 한 이른바 韓日議定書를 맺은 일본은 그것을 근거로 하여 새로운 對韓經營方針을 마련하고 그 일환으로 6월 들어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해 온 것이었다.6)


보안회의 활동은 종로네거리에서 대중집회를 개최하는 등으로 독립협회와 萬民共同會의 자주민권운동을 방불케 했다. 이러한 반대운동은 地方에까지 파급되었다. 정부에서는 日本의 항의도 있는데다가 治安문제를 고려하여 해산을 종용했으나 집회는 장소를 典洞의 漢語學校로 옮겨서 계속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상황을 역이용하여 軍事警察을 실시할 것을 일방적으로 한국정부에 통고하고 보안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附日團體인 一進會가 발족한 것은 이러한 와중인 1904년 8월20일의 일이었다.



일본군의 군사경찰 실시로 보안회는 해체된 듯했으나, 집회만 하지 않았을 뿐 9월11일에 協同會의 이름으로 새로 조직되었다.7) 보안회는 회장에 전 중추원 의관 宋秀晩, 부회장에 시종 元世性 등을 내세우고 있었는데, 協同會로 개편되면서는 회장 李相卨, 부회장 李儁 등으로 실제 주동자들이 표면에 나섰다. 이들은 정부의 실력자인 閔泳煥의 내밀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때에 評議長 李商在, 서무부장 李東輝, 지방부장 梁起鐸, 재무부장 許蔿와 함께 李承晩은 편집부장으로 발표되었는데,8) 실제로 李承晩이 協同會 활동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대한 반대운동이 政府大臣으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참여하는 救國運動으로 확대하자 日本은 8월에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철회했다. 그리고 協同會는 일본군의 무력탄압으로 와해되었으나 그 뿌리는 뒤이은 愛國啓蒙運動의 중심세력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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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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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泳煥과 韓圭卨이 高宗에게 건의


그러나 閔泳煥과 韓圭卨 등 李承晩을 신임하는 중신들이 高宗에게 그를 미국에 밀파하도록 건의한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李承晩은 민영환과 한규설이 처음에는 자기를 駐美公使로 임명시키려 했으나 日本人들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35) 또 李承晩은 뒷날 다음과 같이 술회하기도 했다.



〈… 외교방면에 국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되었다. 그래서 민영환, 한규설, 金宗漢(김종한), 金嘉鎭(김가진)제씨와 상의하고 그중 한 사람이 주미공사의 책임을 띠고 나가서 평화회의시에 해외활동을 미리 준비치 않을 수 없다 하여 그 방법으로 주선하여 보다가, 일사(日使:日本公使)의 조종에 막가내하(莫可奈何:막무가내)임을 각득(覺得:깨달아 앎)하고, 나를 대행하려 하여 보아도 역시 불가능하므로 나를 위탁하여 조용히 도미케 한 고로… 〉36)



일본군의 점령 아래 일본공사의 내정간섭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는 직접적 외교활동을 벌이기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미국정부에 대해 1882년의 朝美修好條規에 따른 지원을 교섭하고 앞으로 있을 러-일 강화회의에 대비할 사람을 駐美公使館에 확보해 두는 것은 高宗과 한국정부로서는 절실히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먼저 제안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고 李承晩은 적고 있다. 〈그때에 나는 閔公이나 民族黨에서 어느 누구를 해외로 보내도록 하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서 그럴 수 없었다〉37)는 것이다. 올리버도 李承晩이 민영환과 한규설에게 미국을 방문하도록 설득했다고 적고 있다.38) 독립유지를 위한 지원을 교섭할 밀사 파견이 李承晩의 말대로 그 자신의 아이디어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1907년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르기까지 高宗의 거듭된 밀사파견의 효시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閔泳煥과 韓圭卨은 자기들 대신에 李承晩을 미국에 가도록 권유했다. 민영환은 李承晩에게 가족의 뒷일을 자기가 돌보아 줄 것이며, 李承晩이 워싱턴에 있는 한국공사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李承晩이 「韓國獨立黨」또는 「民族黨」이라고 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개화파 관료들을 지칭한 것이므로, 그의 미국행은 민영환이나 한규설과의 상의에 의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高宗의 부름을 즉석에서 거절


이 무렵의 어느 날 李承晩이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니까 궁중에서 온 시녀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가 李承晩을 단독으로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李承晩은 황제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에 대한 평소의 증오감이 복받쳐 올라와 즉석에서 거절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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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李承晩은 여러 통의 「外交文書」를 트렁크 속에 숨겨가지고 급히 미국으로 떠났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때에 그가 지니고 떠난 「외교문서」란 閔泳煥과 韓圭卨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하원의원 앞으로 써 준 편지와 민영환이 주미공사에게 보내는 편지였다.41)


딘스모어는 1887년부터 2년 동안 주한미국공사로 와 있던 사람이다. 韓圭卨은 李承晩에게 여비로 50원을 보탰고, 독립협회 회장과 農商工部 大臣을 지낸 金嘉鎭도 李承晩의 여비를 보탰다.42) 한규설은 자신이 喪中(상중)이므로 격식을 갖추지 못하고 노자를 보태니 꺼리지 말고 받아달라는 정중한 편지를 함께 보냈다.43)


그런데 李承晩의 여비조달이 이처럼 개인차원의 구차한 방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미국행이 고종의 「밀사」 임무가 아니라 민영환과 한규설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 관료들의 「밀사」 임무였음을 말해 준다.


알렌公使는 소개장 써주지 않아


李承晩의 도미 목적은 그러한 「밀사」임무만이 아니었다. 아마 그보다도 더 직접적인 목적은 留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게일, 언더우드, 벙커, 질레트, 스크랜턴, 프레스턴, 존스 등 한국에 와 있던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미국 敎會 지도자들이나 그밖에 도움을 줄 만한 주요인사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추천서를 무려 19통이나 받아 놓았던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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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5)








[ ...... 1905년 7월에는 .... 이승만을 밀사로 선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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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7월에는 러일간의 강화담판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자는 취지로 이승만을 밀사로 선정하였다.11) 이승만은 독립협회운동 당시 급진공화세력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선교사들의 배려로 1904년 8월 특별사면을 받고 11월 미국으로 출국한 상태였다.


당시 정부대신 중 미국과 가까웠던 민영환과 한규설은 이승만에게 미국정부 요로에 한국의 독립보전을 요청하는 서신을 전달하게 하였고, 이승만은 주한 미국공사였던 딘스모어(H. A. Dinsmore)의 주선으로 1905년 1월 상순에서 2월 사이에 미국무장관 헤이(John Hay)를 면담한 바 있었다.12) 이때 다시 이
승만을 강화담판 밀사로 선정했던 것은 러일간의 협상이 한국에 유리하게 결정되도록 잘 교섭해 보라는 지시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8월 4일 하와이 교민 8,000명을 대표해서 미국에 온 목사 윤병구와 함께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하고 한국의 주권과 독립보전에 대한 청원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친일파인 주미 한국대리공사 김윤정이 한국정부의 공식 훈령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면서 이들의 對美교섭을 지원하지 않음으로써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13) 물론 미국이 이미 태프트-가츠라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승인한 상태였으므로 이승만 등의 루즈벨트 면담이 특별한 결과를 낳을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의 면담에도 불구하고 러일강화조약이 일본의 한국보호권을 승인하는 것으로 결정되자, 고종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를 1905년 10월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 친서를 전달했다. 1882년 朝美條約 제1조의 ‘居中調整’조항에 의거하여 미국이 나서서 한일의정서를 파기하고 열강의 공동보호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견제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保護條約’이 체결된 직후인 11월 26일에는 헐버트에게 勒約은 무효라는 긴급 전문을 보냈고, 주프랑스공사 閔泳讚에게도 밀명을 내려 12월 11일 미국무장관 루트를 면담하게 하였다. 그러나 루트는 ‘한국은 1904년 2월의 한일의정서와 8월의 顧問協約 체결로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 상태가 되었으므로 미국은 어떠한 협조도 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전 주한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도 고종으로부터 운동자금 1만불과 황제의 어새가 압인된 백지 친서 등을 전달받고 미국정부를 상대로 교섭을 벌였으나 미국은 고종의 호소를 모두 묵살하였다. 미국정부의 입장은 일관되게 친일적이었기 때문이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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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 국 사 편 찬 위 원 회

Ⅴ. 대한제국의 종말
1. 고종의 국권회복 노력과 강제퇴위
1) 밀사파견 외교의 전개








1905.8.4. 이승만 ---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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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閔泳煥과 韓圭卨의 편지를 가지고 아칸소州 출신 하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를 찾아갔다. 딘스모어는 1887년부터 1888년까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인물로서 그의 밑에서 서기관으로 일했던 알렌에 따르면 〈냉정하고 빈틈없는 法律家〉이며 〈양심적인 크리스찬 紳士〉였다.5) 그는 동아시아의 정세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우호적이었다.


딘스모어는 옛 친구들의 소식을 들어 기쁘다면서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의 면담을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헤이는 매킨리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있던 1898년에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정책을 제창한 인물이었다. 그의 문호개방정책은 중국에 대한 열강의 통상기회의 균등과 영토보전을 강조함으로써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을 방지했고 이후 오랫동안 미국의 동아시아정책 기조가 되었다. 李承晩은 물론 딘스모어도 이같은 정책기조에 따라 헤이가 親韓的 조치를 취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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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에 딘스모어 의원은 의원사무실에서 기다리지 않고 자기 마차를 몰아 아이 스트리트에 있는 李承晩의 거처로 데리러 왔다. 국무부로 간 두 사람은 곧 장관실로 안내되었다. 면담은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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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장관은 條約上의 義務이행 약속


李承晩은 그에게 한국이 開港한 이래로 한 사람의 선교사도 아무런 화를 입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그러고 나서 결론적으로 말했다.

『우리 한국인들은 장관께서 中國을 위해 하신 일을 韓國을 위해서도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李承晩이 지적한 것은 헤이 장관이 1899년에 발표한 「무역상의 門戶開放政策에 관한 宣言」을 뜻하는 것이었다.8)

헤이는 李承晩이 자신의 문호개방 정책을 거론한 데 대해 기뻐하는 듯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나는 개인적으로나 미국정부를 대표해서 우리의 條約상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것입니다』9)



이때에 헤이 장관이 李承晩에게 조약상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이처럼 확실하게 말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헤이 장관은 바로 한 달 전에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으로부터 〈우리는 日本의 의사를 거슬려가면서까지 韓國問題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韓國人은 자신들의 방위를 위해 一擊을 가할 능력도 없다〉10)는 편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러-日 사이의 講和가 성립되면 韓國은 日本의 保護國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문제로 자신과 대립했던 알렌 공사를 3월에 해임하고 후임으로 모건(Edwin V. Morgan)을 임명했다.


李承晩은 헤이 장관과의 면담으로 크게 고무되었다. 국무부를 떠나면서 딘스모어 의원도 회담결과가 매우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李承晩은 閔泳煥과 韓圭卨에게 회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썼고, 딘스모어는 그것을 외교 파우치 편으로 주한 미국공사관에 보내어 두 사람에게 전하게 해주었다. 李承晩이 閔泳煥과 韓圭卨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미 한국공사관 파우치를 이용하지 않고 미국 외교파우치를 이용한 것은 이 무렵은 이미 스티븐스(Durham W. Stevens)가 외교고문에 취임하여 일체의 외교관련 업무를 장악하고 있어서 편지가 日本人들에게 알려질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헤이 장관이 한국정부의 공식 사절도 아닌 젊은 李承晩을 만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李承晩은 이때의 일을 오래도록 자랑스럽게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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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록코트와 실크해트로 정장한 李承晩과 尹炳求는 오후 3시에 새가모어 힐에 도착하여 안내하는 대로 마차에서 내려 대기실로 들어갔다. 집 안은 들고 나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 가운데에는 문무관 복장을 한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러시아의 수석대표 위테(Sergei Witte) 일행이 막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안내인이 와서 두 사람을 한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가슴이 조마조마했고 사지가 떨렸다. 이 때에 루스벨트가 안쪽에 있는 방에서 나오면서 문 밖에서 기다리는 외교관들을 보고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반갑습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서 두 사람에게도 의자를 권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루스벨트가 어떻게 바쁘게 서두는지 두 사람은 말을 꺼낼 겨를이 없었다.


尹炳求가 청원서를 꺼내면서 말했다.

『우리는 하와이에 거주하는 우리 국민의 청원서를 가지고 각하에게 바치러 왔습니다』

루스벨트는 그 자리에서 청원서를 읽었다. 그가 청원서를 읽는 동안 두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청원서를 다 읽고 나서 루스벨트가 말했다.


『두 분이 내 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러시아와 일본을 초청하여 講和를 논의하도록 권할 뿐이고 다른 간여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대단히 중대하여 이 청원서를 내가 사사로이 받을 수 없고,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다 보았으며, 또 이렇게 두 분을 만났으니까…, 나의 권리가 防閑(방한·하지 못하게 막는 범위)이 있는 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각하의 스퀘어 딜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李承晩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먼 지방에서 각하의 스퀘어 딜(Square Deal: 공평한 처사나 정책, 공정한 거래 등의 뜻)을 구하러 왔습니다』


李承晩의 이 말은 사전에 여러 사람과 상의하여 준비했던 말이었을 것이다. 「스퀘어 딜」이라는 말은 이 무렵 루스벨트가 大企業과 勞動組合의 대립을 조정하면서 슬로건으로 표방한 말로서, 루스벨트의 국내정책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어 있었다.


李承晩의 말에 루스벨트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줄 압니다』


李承晩은 말을 이었다.

『저희가 온 것은 각하께 강화회의에 구태여 간섭을 하시라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기회있는 대로 朝美修好條約에 입각하여 불쌍한 나라의 위태함을 건져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루스벨트는 한국 공사관을 아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대답했다.

『이 일은 공사관에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일은 우리 백성끼리 전국 관민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므로 공사관에서 간여하는 것은 긴요치 않은 줄 알았습니다』

『淸國政府에서도 항의 서한을 공사관을 통해서 보내었으므로 이 청원서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루스벨트는 이 일의 중대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공사관으로 보내어 보겠습니다』하고 일어섰다.37)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에서 이때에 루스벨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적고 있다.

『만일 당신들이 이 문서를 귀국 공사관을 통해 제출하신다면 나는 그것을 中國의 청원서와 함께 강화회의에 제출하겠습니다. 귀국 공사더러 국무부에 가져다 주라고 하십시오. 국무장관을 만날 수 없거든 아무에게나 내게 보내라고 말하고 맡기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38)



태프트가 써준 소개장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루스벨트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두 사람을 만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루스벨트가 두 사람을 만난 것은, 그 자신이 면담사실 자체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데서 보듯이, 어쩌면 위테 백작과 고무라 주타로의 면접에 앞서 잠깐 동안이나마 한국인을 만나는 것이 강화회의를 주선하는 자신의 영향력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회견은 30분 가량 걸렸다.39) 루스벨트는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이때는 루스벨트가 태프트에게 가쓰라와의 비밀협정을 확인하는 전보를 보내고 5일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그러므로 루스벨트가 韓國政府의 공식문서가 아니라 하와이에 사는 민간인들이 대통령인 자기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굳이 公使館을 통해서 제출하라고 한 것은 청원서의 접수를 정중하게 거절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기자들의 축하받으며 워싱턴으로 달려가


李承晩과 尹炳求는 루스벨트의 친절에 진정으로 감사했다. 루스벨트와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오는 두 사람은 흥분과 희망으로 들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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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뉴욕을 거쳐 이른 아침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새 기찻간에서 뜬눈으로 보냈으나 아침 신문들에 난 자신들의 기사를 보자 다시 힘이 솟았다. 「워싱턴 포스트」는 두 한국 사절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서 청원서를 제출했고, 이미 그 청원서를 공사관을 통해 공식으로 접수시키기 위해 워싱턴으로 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신문보도에 대해 李承晩은 閔泳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는 지금 우리나라 형편에 앉아서 몇 천원, 몇 만원을 각 신문에 주어가면서도 이렇게 될 수 없는 일이라. 초목 같은 무리라도 흥기나는 마음이 없지 못할러라〉라고 적었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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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머드 강화회의가 폐막되고, 며칠 뒤인 9월10일에 李承晩은 閔泳煥으로부터 그와 尹炳求의 노고를 치하하는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그 동안의 비용이라면서 130달러의 송금수표가 들어 있었다.58) 민영환은 皇帝가 자기편에 두 사람의 노력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비밀 경로를 통해 두 사람의 활동자금을 보낼 것을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閔泳煥의 격려편지도 실의에 빠진 李承晩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高宗이 비밀경로를 통해 활동 자금을 보낼 것을 약속했다는 말에 대해서도 李承晩은 〈나는 그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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請願外交路線과 여론환기 작업의 원형


李承晩의 대미 「밀사」 사명은, 미국의 「居中調整」을 통하여 大韓帝國의 독립유지를 보장하게 한다는 목적에서 보면, 헐버트 등 다른 밀사들의 경우와 함께,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李承晩의 개인적 능력 밖의 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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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헤이國務長官을 만난 데 이어 포츠머드 강화회의를 앞두고 루스벨트 大統領을 만나고, 특히 그것을 계기로 美國의 유수한 신문에 韓國問題를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은, 李承晩 자신의 말마따나 한국정부가 〈몇 천원, 몇 만원을 각 신문에 주어가면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成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李承晩은 루스벨트와의 면담을 계기로 제국주의적 國際政治秩序의 냉엄한 현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아무런 공적 직함이 없는 신분으로 미국의 大統領과 國務長官을 만났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경험이 되었다. 사실 李承晩은 이때 이후로 독립운동 기간 내내 미국의 어떤 대통령이나 국무장관도 만날 수 없었다.



이때에 李承晩이 헤이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고 또 그것에 대한 미국 신문의 반응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뒷날 그가 독립운동 방략으로 시시포스의 神話처럼 되풀이하는 請願外交와 여론 환기작업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金九가 國母報讐(국모보수)의 의분에서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를 살해했던 치하포 사건과 대비되는 상징성을 가지면서, 그 자신의 名聲과 權威를 높여 주는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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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7)
루스벨트 大統領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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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루즈벨트의 별장에는 세계 각처에서 남긴 귀한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조선의 전통 나전 칠기가 있다. 나전칠기 뒷면에는 조선의 왕이 보냈다는 글귀가 선명하게 쓰여 있다. 이승만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선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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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879

외교 중시했던 독립운동가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이승만 시절 뿌려진 산업화 씨앗들 ‘한강의 기적’ 일구는 초석

마연옥 기자 2015.03.03








1908.9. 프린스턴대학 박사과정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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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의 프린스턴 생활에서 가장 큰 수확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총장과 그의 가족들을 가깝게 사귈 수 있었던 일이었다. 윌슨은 메릴랜드州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정치학 교수로서 「議會政府論」과 「國家論」이라는 명저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변호사로서도 평판이 좋았다. 윌슨의 가족들은 韓國과 韓國宣敎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면서 李承晩이 귀국해서 추진하고자 하는 기독교 사업에 대해 격려해 주었다. 李承晩이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던 해 겨울에 윌슨이 불특정 다수의 여러 사람 앞(“to whom it may concern”)으로 써 준 다음과 같은 소개장은 李承晩에 대한 윌슨 총장의 신임이 어떠했는가를 보여 준다.



〈李承晩씨는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생으로서, 탁월한 능력과 고매한 인품으로 우리에게 호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 韓國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東洋의 전반적인 정세에 대해 놀랄 만한 식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대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도 특별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투철한 애국심과 동포들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닌 그는 그의 조국을 위해 큰일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연구하고 보존해야 될 위대한 東洋에서의 우리의 권익에 대해 직접 배우고자 하는 분들에게 나는 기꺼이 그를 추천합니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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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의 윌슨 가족들과의 교분은 자별했다. 윌슨 가족들은 피아노 옆에 둘러서서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는데, 李承晩은 그러한 가족모임에 초대되는 몇 안 되는 프린스턴 대학교 학생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李承晩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딸들은 李承晩과 자기네 아버지를 함께 놀리곤 했다. 학생손님은 흐트러짐이 없이 위엄을 지키고 있고 그를 초대한 대학총장은 풀어져서 마냥 즐거워한다는 것이었다. 캠퍼스에서 윌슨은 방문객들에게 李承晩을 소개하면서 곧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장차 한국의 독립을 되찾을 사람〉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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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21)







1910.9. 이승만 귀국


[ ......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등 유럽의 대도시들을 둘러본 다음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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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귀국


李承晩이 윌슨 총장 가족과 웨스트 대학원장과 어드먼 박사 등 친지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다음 뉴욕항에서 영국의 리버풀로 향하는 발틱호(S. S. Baltic)를 탄 것은 9월3일, 곧 「한일병합」 조약이 공포된 지 닷새 뒤였다. 李承晩이 미국을 떠나기에 앞서 「병합」 소식을 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李承晩은 귀국하고 나면 언제 다시 출국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귀국 길에 유럽 여러 나라를 잠깐씩이나마 둘러볼 생각이었다. 발틱호로 1주일 동안 大西洋을 항해한 끝에 리버풀에 도착한 그는 런던에서 다시 배로 도버해협을 거쳐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등 유럽의 대도시들을 둘러본 다음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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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22)







1912 이승만 --- 우드로 윌슨


[ .......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치열한 .... 주말 저녁을 윌슨 가족이 李承晩과 같이 지냈다 ........

....... 윌슨 가족과의 교분은 이때 이후로 李承晩의 정치 행로에 압도적인 권위를 지닌 정치적 자산으로 ......... ]




[연재再開] 孫世一의 비교 評傳 (2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기독교 국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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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1912년 3월26일에 두 번째 渡美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33년 동안 그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渡美 도중에 그는 日本에 들러서 가마쿠라(鎌倉)春令會를 주재하고 유학생 대표들을 만났다. 이때에 만난 많은 사람들이 뒷날 民族運動의 지도자가 되었다.


李承晩은 5월에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린 국제감리교 총회에 韓國平信徒代表로 참석한 다음 프린스턴大學 때의 은사 우드로 윌슨을 만나, 윌슨이 民主黨 대통령후보로 지명되는 전당대회를 참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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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거트의 州知事별장에서 윌슨 만나


李承晩이 미국으로 떠날 때부터 가장 기대했던 일은 프린스턴 대학시절의 은사인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을 만나는 것이었다. 1910년에 民主黨에 영입되어 뉴저지州 知事로 당선된 윌슨은 과감한 革新政治를 실행함으로써 전국적인 평판을 얻어 일약 1912년 대통령선거의 유력한 후보로 급부상했다.


시카고에서 나흘 밤을 묵은 李承晩은 6월3일에 시카고를 떠나 4일 오후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YMCA에 숙소를 정한 그는 다음날 윌슨의 딸 제시 윌슨(Jessie Wilson)을 만나서 윌슨 지사와의 면담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승만과 제시는 프린스턴 대학시절에 연애감정에 빠진 일이 있을 만큼 서로 친하게 지냈었다고 한다.22) 윌슨은 6월25일로 박두한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앞두고 몹시 분주한 때였으나, 제시는 면담을 주선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출판된 博士學位논문 들고 윌슨 찾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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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에서 2주일 동안 머문 李承晩은 6월18일에는 프린스턴으로 갔다. 첫날 저녁은 「알렉산더 홀」의 게스트 룸에서 자고, 이튿날 같은 홀의 A룸으로 옮겼다. 이 때부터 이듬해 1월에 하와이로 떠날 때까지 프린스턴은 그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李承晩이 프린스턴으로 간 것은 그의 학위논문 「美國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120쪽밖에 되지 않는 얄팍한 책이었으나 학위논문이 출판된 것은 거취문제로 고민하던 李承晩에게 크게 용기를 주는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도착한 이튿날인 19일에 출판을 주선해준 웨스트(Andrew F. West) 학장으로부터 책 50부를 받아 든 李承晩은 그 길로 뉴저지州의 시거트(Sea Girt)로 갔다. 시거트는 주지사의 여름별장이 있는 곳인데, 그곳에 머물고 있던 윌슨이 이승만을 그곳으로 오라고 한 것이었다.


李承晩은 그 날 저녁에 윌슨을 만났다. 윌슨이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앞둔 바쁜 일정 속에서도 李承晩을 만난 것은 李承晩 개인에 대한 호의도 호의지만 대통령후보로서의 외교정책 공약 등과 관련하여 東아시아 정세에 대한 李承晩의 견해를 한번 들어보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徐廷柱의 「李承晩博士傳」이 유일하게 대화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서정주는 李承晩의 두 번째 미국行의 동기 자체가 감리교 총회에 참가하는 것보다도 윌슨을 만나서 한국의 실정을 설명하고 한국의 해방을 위하여 그의 협력을 얻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李承晩은 윌슨을 만나자 한국의 해방을 세계에 호소하는 성명서를 만들고자 하니 거기에 同意署名을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승만의 이러한 요청에 대하여 윌슨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중히 거절했다는 것이다.


『나 개인으로서는 거기에 물론 서명해드리고도 싶소. 서명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일을 도와주려고도 하오. 그렇지만 미국의 정치를 위해서는 아직도 내가 당신의 성명에 도장을 찍을 때는 아니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같이 일할 때는 반드시 올 것이니 그것을 믿으시오. 그렇지 않아도 나는 벌써부터 당신의 조국 한국을 포함한 모든 약소민족 국가들의 일을 생각해 오고 있는 중이오』


이러한 윌슨의 대답에 대하여 李承晩은 한번 더 그의 요구를 간청했다고 한다.

『현상유지의 정치보다 正義人道의 미래를 위하여 나의 편이 되어 주시오』

그러자 윌슨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이오. 그렇지만 모든 일의 해결에는 그 적당한 때가 있는 것이오. 하여간 내 당신의 갸륵한 뜻을 명심해 두리다』23)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비록 그것이 이승만의 구술을 토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윌슨이 이때에 美國 大統領이었다고 적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이 과장된 것이다. 徐廷柱는 윌슨이 李承晩에게 지방 순회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여러 사람을 소개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덧붙였다.

『이승만씨! 당신은 나 한 사람의 도장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미국 국민들의 마음의 도장을 모두 받도록 하시오』


볼티모어에서 열린 民主黨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이튿날 李承晩은 제시 윌슨을 다시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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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노스필드에서 1주일 동안 머문 다음 매사추세츠州의 스프링필드로 갔다. 그곳의 YMCA 트레이닝 스쿨에 와 있는 조남복을 잠시 만나본 다음, 뉴욕을 거쳐 일요일인 6월30일 아침에 뉴저지州의 애즈베리파크(Asbury Park)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는 시거트 별장으로 다시 윌슨 가족을 방문했다.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치열한 접전으로 말미암아 끝나지 않고 있는 주말 저녁을 윌슨 가족이 李承晩과 같이 지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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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 지명대회는 7월 초까지 투표가 계속되다가 46번째 투표 끝에 윌슨으로 결정되었는데, 李承晩은 지명대회 동안 윌슨과 같이 있었다.24) 그것은 李承晩이 美國式民主政治의 극적인 장면을 직접 목격한 값진 체험이었다.


李承晩은 윌슨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지명대회가 있고 난 뒤에 李承晩은 또다시 시거트를 찾아갔다. 그는 7월6일 아침에 프린스턴을 떠나 오전 11시30분에 뉴저지州의 벨머(Belmar)에 도착했다. 그리고 시거트에서 또다시 윌슨 후보의 딸 제시 윌슨을 만났다. 이러한 윌슨 가족과의 교분은 이때 이후로 李承晩의 정치 행로에 압도적인 권위를 지닌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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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3.1.



[ ........ 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되더니 다음에는 그칠 줄 모르는 만세소리가 ........

...... 몇 십만의 인파가 서울 거리마다 넘쳐났다. ........... ]





2001

국 사 편 찬 위 원 회


한 국 사 47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Ⅲ.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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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세시위운동의 시작



3월 1일 오후 2시 30분 민족대표를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학생대표들은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날의 파고다 공원의 광경을 이미륵의 묘사를 통해 볼 수 있다.14)



내가 공원에 갔을 때 이미 공원은 경관들로 포위를 당하고 있었다. 담장 내 부는 단 열 발자국도 걷지 못하게 사람이 꽉 차 있었다. …

갑자기 깊은 정적 이 왔고 나는 누군가가 조용한 가운데 연단에서 독립선언서를 읽는 것을 보았다 …

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되더니 다음에는 그칠 줄 모르는 만세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좁은 공원에서는 모두 전율하였고, 마치 폭발하려는 것처럼 공중에는 각양각색의 삐라가 휘날렸고 전 군중은 공원에서 나와 시가행진을 하였다. 우뢰와 같은 만세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삐라를 날리며 행진하였다 (전혜린,《압록강은 흐른다》 , 여원사, 1959).



시민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독립선언서〉를 발표한15) 파고다 공원의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시가행진을 했다. 서쪽으로 향한 대열의 제1대는 서울역에서 통의동, 정동, 미국영사관, 이화학당, 광화문 앞, 서대문, 소공동, 충무로로, 다른 1대는 무교동, 대한문으로, 동쪽으로 향한 시위대는 창덕궁, 안국동, 광화문, 서대문, 대한문, 충무로, 동대문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온 서울 장안이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동쪽으로 향한 다른 시위대는 창덕궁 앞, 안국동, 광화문 앞, 서대문, 프랑스영사관에 이르러 일부는 미국영사관, 대한문 앞, 소공동, 충무로(本町)를 거쳐 종로통, 동아연초회사, 동대문으로 향했다.


그날 대한문 앞 광장에는 광무황제의 돌연한 죽음을 애도하는 각도의 유생들이 엎드려 곡하는 것을 많은 남녀노소들이 운집하여 지켜보고 있었다. 파고다공원의 시위대열에 앞서 검은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2, 3명씩 조를 지어 먼저 달려오더니 군중들 속으로 흩어져 들어가 모자를 벗어 들고 열변을 토했다.

학생들을 에워싸고 있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높이 외치자 금방 군중 전체에 전파되어 만세소리가 대한문 광장을 뒤흔들었다.16) 상인들은 점포를 철시하고 뛰쳐 나오고, 因山을 구경하러 시골에서 상경한 유생들, 평안도 수건을 쓴 부녀자들, 백립을 쓴 노인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담하여 몇 십만의 인파가 서울 거리마다 넘쳐났다. 대열은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각국 영사관, 일제 주요기관 등을 누비며 나갔다. 행렬은 꼬리를 물었고, 대열마다 한번씩은 덕수궁 정문 앞에 당도하여 대한문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서 황제의 빈전을 향하여 절하고 물러갔다. 해가 질 때까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17)


《조선독립신문》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지하신문과 격문들이 시가에 배포되었다. 이날 전주에서 상경하여 서울 시가지 시위광경을 목격한 한 사람은 당시의 시위광경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때 인심은 극도로 동요되고 학생은 교복을 벗고 白衣에 흰 헌팅을 쓰고 서로 만나는 대로 인사 뿐이요, 말은 하나도 건네지 않고 이처럼 학생들의 鬪意는 불타고 있었다. 거리의 긴장은 무서웠고, 독립신문을 비롯한 비밀신문이 무려 수십 종이 발행되어 돌며, 거리마다 만세성이 물끓듯 적이 컸는지라. 일경은 말을 타고 3尺 가량이나 되는 철망치를 휘두르며, 소방부는 몽둥이를 들고 발광하듯이 우리 동포를 사상케 하였고, 거리며 동리 어구마다 변장한 倭警이 서서 加害를 하니 그 수 不知其數라. 그럴수록 민심의 타는 애국의 至情은 더욱 더 고양의 일로를 달릴 뿐이었다 (유병민,〈내 삼일운동의 기록〉 ,《신천지》1 -2, 1946, 112~113쪽).



시위대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시민들이 합세하여 함께 만세를 불렀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崔恩喜 여사는 그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독일 영사관에서 회정하여 의주통을 지나갈 적에는 길가에 냉수동이가 즐비하게 놓이고, 평양수건을 쓴 할머니들이 지켜서서 바가지로 물을 떠 주다가 바가지째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부르던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 우리 일대는 거기서 숭례문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 진고개 골목으로 들어섰다. … 샐 틈이 없는 좁은 골목이라 본정 2정목에 이르러서부터는 몽땅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상가가 모두 떨쳐 나와 협력하였다. … 수갑이나 포승을 사용할 겨를이 없었다. 헌병들은 양편 손에 한 사람씩 손목을 잡고 남산 밑에 있는 경무총감부로 연행해 갔다. 군중들은 끌려가는 길에서도 힘차게 만세를 불렀고, 총감부 마당에 꿇어앉은 사람들도 새 사람이 잡혀 들어올 적마다 마주 들 바라보며 만세를 불렀다 (최은희,《조국을 찾기까지》中, 탐구당, 1973, 100 ~101쪽).



3월은 해가 짧아 일찍 어두워졌다. 저녁 7시까지 서울 중심가에서는 시위운동이 일단 끝났으나 밤 8시 경 마포전차 종점에서 전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약 1,000명의 사람들이 모여 만세시위를 하였고, 밤11시 경에는 신촌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 학생 약 200명이 집결하여 시위를 하였다.18)


일제 총독부는 서울 중심가의 군경을 총동원하는 한편, 용산의 일본군 보병 3개 중대와 기마병 1개 소대를 시위해산에 투입하였다. 일제는 평화적인 학생, 시민들의 시위에 손을 쓸 방법을 몰라하다가 해가 저물고 난 뒤부터 경찰․헌병․군인들이 일본 진고개 상점가 점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곳을 통과하는 시위대원들을 모조리 검거했다. 이 날 134명이 검속되었다.

서울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시작된 같은 날에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에서도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들 지역에 사전에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에 의해〈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고, 사전 조직화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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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의 격문들이 시중에 살포되는 가운데, 상인들은 철시하고, 공장의 노동자․고용인․행상인․일반 서민들이 시위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상인들은 3월 1일부터 대부분 철시에 들어가 8일에는 완전철시, 시위운동에 참여를 결의하여 3월말까지 완전철시에 들어갔다. 당황한 일제는 상인 대표 60명을 초청하여 수 차례 개점을 설득하였으나 거부되자 4월 1일부터 경찰을 동원하여 강제 개점을 시켰으나, 큰 효과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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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의 전국확산



3월 1일 서울․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 4개 道 7개 도시에서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은 서북지방과 경기․충남지방을 시작으로 전국에 파급되어 갔다. 강원도에서는 3월 10일 철원에서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 났으며, 전북에서는 3월 3일 전주․군산․이리에서〈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4일 옥구에서 최초의 시위가 일어났다. 전남은 3월 3일 목포․광양․구례․순천․여수 등지에서〈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10일 최초의 시위가 광주에서 학생들에 의해 일어났다. 경남은 3월 3일 부산과 마산에서〈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11일 부산진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경북 대구에서는 3월 8일, 함북 성진에서는 3월 10일, 충북 괴산에서는 3월 19일 각각 최초의 시위가 일어나 도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3월 중순경에 들어서서는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방방곡곡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집중적인 시위운동은 최소한 4월 말까지 두 달간 계속되었다. 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회 이상 시위가 일어났으며, 시위운동의 정점을 이룬 4월 1일은 하루 동안 67회의 시위가 일어났다. 3월 27일, 4월 2일․3일은 50회 이상 일어났으며, 적어도 30회 이상 일어난 날만 15일이었다.


참여인원으로 보면, 수십만이 참여한 서울을 제외하고서도, 의주 3만 명, 강화읍 약 2만 명, 합천․삼가 1만 명, 선천 8,000명, 삭주군 대관 8,000명,선천읍 6,000명, 순천읍 5,000명, 명천군 화대 5,000명 등 대규모의 시위도 많았다.


시위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시가지 대로상의 만세시위, 시골장터에서 행한 장터 만세시위, 야간 산상의 봉화시위, 한 장소에서의 1회성 만세시위, 같은 장소에서 몇 차례 거듭된 시위운동, 인근 지역을 찾아다니며 행한 만세꾼들의 시위운동, 지역과 지역이 태극기를 이어 받으며 행한 릴레이 시위운동,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떠메고 행한 상여시위, 상점 문을 걸어 잠근 상인들의 철시시위, 학생들의 동맹휴학시위, 노동자들의 파업, 광부들의 순사주재소 습격시위, 어린이 시위, 거지들의 시위, 기생들의 시위 등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전계층이 다양한 형태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행한 총 시위 회수는 2,000회 이상, 연인원 200만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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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


....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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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은 40대 중반에 이른 李承晩과 金九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李承晩은 3·1 운동 이후에 국내외에서 선포되거나 논의되던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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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外地의 인심이 李承晩에게 瀑注해』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는 현순의 표현대로 이때는 이미 李承晩은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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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31. 임시정부 국무총리 李承晩










1926.4. 김좌진



[ ...... 오직 우리의 사모하는 각하의 지도하심만 빌고 기대 ......


..... 오직 우리는 각하의 지도를 받아 사업의 전도를 진행코저 하오니, 통량하신 후에 다음 조항의 선후판법을 明敎하오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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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은 취임사에서 천명한 대로 李?(이탁), 金東三, 吳東振, 李裕弼, 尹世葺(윤세용), 玄天默, 尹秉庸, 金佐鎭, 曹成煥의 9명을 국무원으로 추천하여 10월10일과 12일의 임시의정원에서 가결되었다.11)


이상룡이 추천한 국무원 9명은 상해에 있던 이유필 이외에는 모두 이 시기의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세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와 新民府와 參議府의 지도자들이었다. 이탁은 정의부의 중앙행정위원회 위원장이었고, 김동삼, 오동진, 윤병용은 모두 중앙행정위원이면서 외무위원장, 생계위원장, 교통위원장을 각각 겸하고 있었다.12) 유명한 청산리전투를 지휘했던 김좌진과 조성환, 현천묵은 1925년 3월에 북만주지역에서 새로 조직된 신민부의 간부들이었다. 김좌진과 조성환은 중앙집행위원으로서 군사부위원장겸 총사령관과 외교부위원장을 각각 겸임하고 있었다. 현천묵은 사법부에 해당하는 檢査院 원장이었다.13) 대한독립단, 한족회, 大韓統義府 등의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했던 윤세용은 이때는 압록강 대안의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참의부의 참의장이었다.14)



金佐鎭 등은 李承晩에게 忠誠편지 보내


그러나 이러한 인선은 당사자들의 동의를 거쳐서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새로 선임된 국무원들 가운데 이유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취임하지 않았다. 국무원에 선임된 정의부 간부들이 부임하지 않은 것은 중앙의회가 결의한 4개항의 선결조건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상룡이 독단으로 국무령에 취임한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신민부 간부들이 국무원 취임을 거부한 데에는 더욱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개조파그룹이 취한 일련의 조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신민부 간부들은 1921년 이래로 白純을 통하여 李承晩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5)


그러한 사정은 신민부 창설 1주년이 되는 1926년 4월15일자로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金爀과 김좌진, 朴性儁(박성준) 두 위원이 연명으로 李承晩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해외 성상에 각하의 분투 노력하심은 우리 일반이 감읍하는 바외다. 저희들은 경신참변 이후에 북쪽으로 가서 북만주 일우에서 옮겨 다니던 중 작년 3월경에 北路軍政署, 義軍府, 光復團, 獨立團 및 내지 각 단체와 북만주 각 지방 주민대표들과 함께 통일회를 촉성한 결과 신민부를 조직한 이래 1년 동안 軍民行政을 실시하고 있는 바, 지금은 차츰 정리되어 기반이 점점 확고해지고 있어서 다행이오나, 어찌 이것으로써 대업의 기본이라 하오리까.


3·1운동이 발생한 이후로 성립된 임시정부는 우리 운동의 최고기관이 되어 절대로 대동적 통치의 본위가 되지 않고는 밖으로 국제의 동정을 구하며 안으로 군중의 정신을 全一케 하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견지에서, 연래로 다소의 노력과 고통을 겪지 아니함은 아니오나, 시국의 복잡은 갈수록 더욱 심하야 수습책이 큰 난관에 이르렀으니, 우러러 바라건대 각하는 東風西潮(동풍서조)가 점점 박두한 위기를 당한 우리 민족의 전도를 장차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저희들이 연래로 荒漠(황막)한 구석에 있으면서 오직 우리의 사모하는 각하의 지도하심만 빌고 기대하거늘 불행히 야욕자의 간사한 농간과 私利를 도모하는 자의 편견으로 우리 운동의 전도를 가로막으며 사업의 발전을 저지케 함은 참으로 통탄스러운 바이 올시다. 그러나 최후의 노력은 우리의 천직이므로 오직 우리는 각하의 지도를 받아 사업의 전도를 진행코저 하오니, 통량하신 후에 다음 조항의 선후판법을 明敎하오서 우리의 목적을 속히 도모케 하심을 바라나이다.〉16)



李承晩이 임시의정원에서 탄핵 면직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李承晩을 임시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면서 이들은 개조파그룹을 독립운동의 방해세력으로 규정하고 「선후판법」으로 1) 내정, 2) 외교, 3) 무력준비, 4) 경제문제의 네 가지 사항에 관한 李承晩의 지도를 요망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이상룡의 조각작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상룡을 추대하여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려고 했던 개조파그룹은 낭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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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4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內務總長 사임 2년 만에 國務領으로 선출되다











1945.9.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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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귀국시켜달라고 요청했던 이는 남한 점령 미군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장군이었다. 하지는 이승만과 상하이 臨政(임정) 사람들이 귀국해야 한국의 혼돈 상황이 정리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45년 9월 13일자 하지 사령부 일일보고서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이승만을 한국의 孫中山(손중산·孫文)으로 여기고 있다”고 했다.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익 사람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 중장은 인천에 상륙한 9월 8일,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말을 잘하는 해군중령 윌리엄즈를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윌리엄즈는 비행기를 타고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민심동향을 파악했다. 한국의 서민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있다는데 왜 모셔오지 않는가?”


이정식 교수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들은 해방과 독립을 동일시했고, 미군과 공산세력과의 갈등이 표면화하기 전이라 좌익도, 우익도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9월 14일 좌익들이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명단에 이승만은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순진한 한국인들은 해방되고 독립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승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승만이란 이름은 오랫동안 많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위대한 독립투사’라는 傳說的(전설적) 이미지의 뿌리를 내려놓고 있었다.

이런 民心(민심)보고를 받은 하지 중장이 본국에 이승만을 귀국시켜달라고 건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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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board/view_turn.asp?tnu=200810100078&catecode=C&cpage=1

2008년 10월호

다시 생각하는 國父 李承晩 - 李承晩의 미국다루기
“공산주의자와 대결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賢人” (리처드 닉슨 前 美 대통령)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위원·조갑제닷컴 대표










1945.12.17.



[ ..... 러시아를 저의 조국이라 부른다니 ........

.....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 ........ ]



이승만,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 방송


게재지명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5년 12월 21일



李承晩은 17일 7시반 ‘共産黨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하에 그 대변인으로 하여금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방송을 하였다.



“共産黨에 대한 나의 입장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공산주의를 排斥하는 것이 아니오 공산당 극렬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4천여년의 오랜 역사를 가졌으나 우리가 다 잘못한 죄로 거의 죽게 되었다가 지금 艱幸히 살아나서 다시 발을 땅에 디디고 일어나려고 애쓰는 중이니 까딱 잘못하면 밖에서 들어 오는 병과 안에서 생기는 병세로 생명이 다시 위태할 터이니 먹는 음식과 행하는 동작을 다 극히 조심해서 어린애기처럼 간호해야 할 것이고 건강한 사람처럼 대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산당 극렬분자들의 행동을 보시고 우선 동서 각국에서 遂要되는 것만 볼지라도 폴란드 극렬분자는 폴란드 독립을 위하여 나라를 건설하자는 사람이 아니오 폴란드獨立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이번 전쟁에 독일이 그 나라를 점령한 후에 애국자들이 임시정부를 세워서 영국의 수도인 런던에 의탁하고 있어 백방으로 지하공작을 하며 英·美의 승인까지 받고 있다고 급기야 러시아가 독일軍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한 후에 폴란드 공산분자가 외국의 세력을 藉托하고 공산정부를 세워서 각국의 승인을 얻고 또 타국의 軍機를 빌려다가 국민을 위협해서 민주주의자가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 놓아 지금도 정돈이 못되고 충돌이 쉬지않는 중이며 이외에도 歐羅巴의 해방된 모든 나라들을 보면 각각 그 나라 공산분자들이 들어가서 제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의 권리범위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위주하는 고로 전국 백성이 처음으로 그자들의 선동에 끌려서 뭣인지 모르고 따라가다가 차차 각오가 생겨서 죽기로써 투거하는 고로 구라파의 각 해방국은 하나도 공산분자의 파괴운동으로 인연하여 분열 분쟁이 아니된 나라가 없는 터입니다.



동양의 중국으로 보아도 蔣介石總統의 애국심과 용감한 軍略으로 전국 민중을 합동해서 왜적에 항전하여 실낱 같이 위태한 중국운명을 보호하여 놓았더니 연합 각국은 다 그 공적을 찬양하며 극력 후원하는 바이어늘 중국의 공산분자는 백방으로 파괴운동을 쉬지 아니하고 공산정부를 따로 세워 중국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놓고 무장한 군병을 양성하여 중앙정부와 蔣總統을 악선전하여 그 세력을 뺐기로 극력하다가 필경은 내란을 일으켜 관병과 접전하여 동족상쟁으로 피를 흘리게 쉬지 아니하는 고로 타국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이권을 도모하기에 기탄치 않기에 이르나니 만일 중국의 공산분자가 만분지일이라도 중국을 위하여 독립을 보존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어찌 차마 이같은 파괴적 행동을 취하리오.



우리 대한으로 말하면 원래에 공산주의를 아는 동포가 내지에는 불과 몇명이 못되었다니 공산문제는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중에 공산당으로 지목받는 동포들은 실로 독립을 위하는 애국자들이요 공산주의를 위하여 나라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따라서 시베리아에 있는 우리 동포들도 다대수가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생명까지 희생하려는 애국자들인줄 우리는 의심없이 믿는 바입니다.



불행히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憑藉하고 국경을 없이하여 나라와 동족을 팔아다가 이익과 광영을 위하여 浮言僞說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軍機를 사용하여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를 조작하여 국민전체에 분열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다가 지금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이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여 민심을 현혹시키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로 만들고 저의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의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의 것을 만들어 가지고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대로 만들어 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왜 조선사람의 形容을 쓰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다가 저의 조국에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치 않는 것이니 우리 3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 놓고 싸울 입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남녀들은 어디서든지 각기 소재지에서 합동해서 무슨 명사로든지 애국주의를 조직하고 분열을 일삼는 자들과 싸워야 됩니다. 우리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과 우리 가족을 팔아 먹으려는 자들을 방임하여 두고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과 우리가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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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사람들을 회유시켜서 이 위급한 시기에 합동공작을 형성시키자는 주의로 많은 시일을 허비하고 많은 노력을 써서 시험하여 보았으나 종시 각성이 못되는 모양이니 지금은 중앙협의회의 조직을 더 지체할 수 없이 협동하는 단체와 합하여 착착 진행중이니 지금이라도 그중 극렬분자도 각성만 생긴다면 구태어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파괴운동을 정지하는 자로만 협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에 이 문제를 우리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우리나라도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切分으로 나누어져서 동족상쟁의 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노릇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각처에서 모든 애국 애족하는 동포의 합심합력으로 단순한 民主政體下에서 국가를 건설하여 만년무궁한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합시다.”








巨惡 스탈린과 공산당을 조롱한 李承晩의 대연설


트루먼 독트린을 2년 앞선 이 연설은 建國 지도자에 의하여 이뤄진,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공산당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이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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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설은 70세 老鬪士(노투사)의 위대한 先制공격이었다. 급소를 얻어맞은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중앙위원회 대표 명의로 ‘세계민주주의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반박함’이라는 長文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표현은 극렬했지만 守勢的(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 등 공산세력이 주도한 좌익의 통일전선체인 조선인민공화국은 李承晩이 귀국하기 전에 그를 主席으로 추대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래 놓고 그를 파시스트라고 공격하니 국민들에겐 잘 먹히지 않았다. 대중의 李承晩에 대한 신뢰는 공산당의 선전 선동이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李承晩이 공산당을 賣國세력으로 규정한 지 1주일이 지난 12월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美, 英, 蘇 3國 外相 회담은 남북한에 대한 5년 기한의 신탁 통치안을 발표하였다. 金九, 李承晩이 주도한 反託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은 熱火(열화)와 같은 민심에 동요하여 贊反(찬반)을 정하지 못했다. 지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을 찾아가 지침을 받으려 했으나 영사관측은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박헌영은 12월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그는 김일성 등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간부들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남한의 민심이 반대쪽이라고 설명하였다. 김일성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모스크바에 갔던 북한주둔 소련군 民政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으로 돌아온 다음날 朴憲永에게 지침을 하달하였다. 신탁통치를 결의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朴憲永은 1946년 1월1일 밤 평양을 출발, 2일 새벽 서울에 도착, 김일성과 보조를 맞추어 조선공산당 이름으로 모스크바 협정, 즉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李承晩의 1주일 전 예언대로 극렬공산주의자들은 民心을 거스르고, 소련의 지령에 충직하게 복무함으로써 민족반역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그들은 회복이 불가능한 敗着(패착)을 두었다. 좌익은 賣國세력, 우익은 民族진영이 된 것이다. 右翼(우익) 주도의 反託, 좌익 주도의 贊託(찬탁) 政局은 김구의 臨政(임정)세력을 오른쪽으로 몰았다. 그 뒤 한 동안 李承晩-金九 연합전선이 형성되면서 좌익은 더욱 고립된다.



李承晩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先制공격으로 역사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가 2010년 한국 대통령이었다면 연평도 도발 직후 평양의 금수산 기념궁전을 폭격하도록 명령하여 김일성의 屍身(시신)을 날려버리고 김정일-김정은을 昏絶(혼절) 시켰을 것이다.


李承晩의 공산주의자 배격 연설은 한반도 정세를 賣國者와 愛國者, 파괴자와 건설자, 敵과 동지, 善과 惡으로 가른 역사의 分水嶺(분수령)이었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는 그 연설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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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7.









1945.12.31.



[ ...... 서울 시내 상점은 거의 문을 닫고, 동대문 뒷산이 하얗게 덮일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어요. ........

...... 좌도 없고 우도 없고 완전히 자연발생적이었습니다 ........ ]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삼상회의 보도

200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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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탁을 반동으로 몰던 그들인데…


“12월 31일 서울운동장에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을 때 서울 시내 상점은 거의 문을 닫고, 동대문 뒷산이 하얗게 덮일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어요. 반탁운동은 누가 계획하고 주도해서 일어난 게 결코 아닙니다. 좌도 없고 우도 없고 완전히 자연발생적이었습니다.”


경교장 모임에도 참석했던 강원용 목사는 올해 초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2월 29일 경교장에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됐다. 각계 인사로 구성된 중앙위원 76명 중엔 박헌영 홍남표 이극로 김세용 같은 좌익 지도자들도 다수 포함됐다. 그와 동시에 좌익단체와 좌익인사들의 반탁 담화와 성명이 줄을 이었다. 12월 30일엔 40여 개의 좌익단체가 모여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결성대회를 갖고 신탁통치안철폐요구성명서를 채택했다.


● 찬탁을 반동으로 몰던 그들인데…


이 성명서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반동분자들이 갈망하는 신탁통치는 결코 실현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그 시점엔 좌익에게 있어서도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사람은 ‘반동분자’임이 분명했다. 조선공산당 서울시위원회는 12월 31일까지도 반탁 전단을 살포했다. 이쯤에서 확실히 가릴 것이 있다. 그것은 신탁통치를 제의한 쪽이 소련이었다고 해서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가 더 커졌다고 해석하는 논리는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좌익도 초기엔 신탁통치 자체를 반대했지 그것을 어느 쪽이 제의했느냐는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던 좌익의 태도가 해를 넘기면서 돌변했다. 1946년 1월 3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돌연 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담화문을 발표했다. 1월 4일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도 뒤를 따랐다. 이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은 1월 5일 기자회견에서 “김구 씨의 반탁데모는 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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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70000000600/3/all/20041212/8138197/1






[ ...... 시민들이 총동원을 하고 군정관리들이 그 뭐 거의 다 사표를 내버리고 서울 시에 있는 경찰서장들이 시외 경찰들이 사표를 ......... ]



이철승 편

제7회 신탁통치의 급보와 영도자들의 동향


1965.04.09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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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제 우리는 서울 운동장에서 전 시가 철수를 하고 12월30일 날 반탁 총궐기대회를 하지않았습니까? 그 당시에 뭐 시민들이 총동원을 하고 군정관리들이 그 뭐 거의 다 사표를 내버리고 서울 시에 있는 경찰서장들이 시외 경찰들이 사표를 냈으니깐요.


네 그리고 나니까 조병욱박사가 참 여기서 한가지 얘기하고 싶은것은 조박사는 당시 경무부장이란 말이죠. 그 경무부장의 입장이 고약하단 말이야. 그래서 가운데서 샌드위치에요. 우익에서는 우익대로 반탁을 하고 하치중장은 사령관으로서 미국과 소련이 국제회의에서 결정한 신탁을 말에요 우리가 반대하니까 그사람 그 중무장관을 통해서 질서를 위계해라. 또 반대를 못하게 해라. 이런 입장이 있고 그러니깐 그 양반이 가운데서 입장이 곤란한 입장이였단 말이지


특히 임시정부의 신이치가 포고 내무부장이었던 그때 내무부장 포고 1호 2호를 내가지고 적 쏜다고 포고를 해버렸는데요 바로 우리정부 행세를 한다고 그러니깐 하치가 조박사를 불러가지고 임정을 갔다가 그냥 추방시키겠다. 이 조박사가 하치한테 삶아가지고 결국 임정을 추방하더니 더 직설을 혼란할 작정이요 난 감당 못하겠소 우리 조국 광복을 위했던 이런분을 추방하다니 이런 반탁은 민중의 자유의사 아니요 이게 민주주의의 씨 프링스프런이 아니요 이렇게 하치한테 따지니깐 그 하치는 그걸 조박사 말씀을 들었다는 거에요 심지어 조박사한테 나중에 들었습니다만은 하치 사령관이 …도망갔기 때문에 군정관리 밥을 못먹었다는 그런 그 애피소드를 들은바 있습니다.



-하여튼 한국인 종업원 일체가 전부 파워를 했…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요 그러다가 그 1월3일날 그 민족 통일 자주 독립 촉성 서울 시민대회든가요? 그런 이름으로서 그 자익계통에서 서울 운동장에서 궐기 대회를 한다그랬어요. 그러니깐 전부 시민들이 1월 3일날 전부 거기 가지 않았겠습니까?

그 대대동호에서 근 십만명이 왔다. 서울 운동장에 그러다 보니깐 별안간 그 사람들이 우리는 자중해야 하고 우리는 그 감정적으로 하면 안되고 이 신탁통치를 반대한다. 이러는 그 연설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난리가 나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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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 모두는 신탁통치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이 日帝의 지배와 너무 유사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이를 격렬히 비난하였다 ......... ]



美軍政의 政策과 國內政治狀況

金 雲 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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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信託統治問題와 美·蘇 共委에 대한 美軍政의 對應



한국인이 解放의 實體를 올바로 파악하기 시작한 것은 신탁통치 소식에 접하면서부터이다. 한국에 5년 동안 신탁통치가 실시될 것이라는 모스크바 三相會議 決定書 내용이 처음으로 국내에 보도되자, 한국인은 이때부터 해방이 반드시 즉시 독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강력하게 전개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37) 당시 좌·우익을 포함한 한국인 모두는 신탁통치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이 日帝의 지배와 너무 유사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이를 격렬히 비난하였다.38)


그렇지만 좌익측이 1946년 1월 2일 蘇聯의 指令에 의해 신탁통치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갑 작스럽게 바꾸자,39) 새로운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후 좌·우익은 각기 신탁통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논리40)를 전개하면서 격렬하게 대립하였고, 마침내 이들의 대립은 감정의 싸움으로까지 深化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해방 정국이 信託統治 論爭으로 인해 昏迷를 거듭하자, 누구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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